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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마쵸?

* 이 글은 알엠님의 [고백] 에 관련된 글입니다.

내가 뭘 고백을 하겠다고 쓰는 것은 아니다. 그냥 알엠님의 글을 읽다가 이것 저것 생각나서.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가끔 듣긴 하는데 그 말이 영 편하지가 않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진짜로 페미니스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페미니스트라면 여성주의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봐야하는데 난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려고 노력을 하지도 않고 말이다. 그런데 세상이 워낙 거지같아서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못된 것들이 눈에 많이 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하면 "거봐, 페미니스트 맞잖아" 뭐, 이런 식이다.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페미니스트라는 용어 자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유통되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물론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은 분명 필요하다. 어떤 특정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따로 부를 필요가 있으니까. (일본에서 페미니스트라는 표현은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는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원래 뜻 그대로인 채로는 일본 땅에서 발붙일 수가 없어서 그런 식으로 살아남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페미니스트라는 용어가 마치 그들을 특별한 집단처럼 취급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즉 자신들이 보편적인 평균의 인간이고 페미스트들은 뭔가 좀 유난을 떠는 사람들처럼 취급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페미니스트들을 좀 급진적인 사람들로 취급함으로써 잘못된 기성 질서에 길들여진 자신들이 마치 '정상'인양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다소 무리한 비교일 수도 있지만 노무현을 '좌파'라고 부르는 것은 한마디로 코메디인데도 이 사회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극우가(진정한 극우도 없지만 어쨌든) 합리적 보수라며 너스레를 떨 수 있게 된다.

 

비록 진보넷에 둥지를 틀기는 했지만 난 '진보적'이지 않다. 파란닷컴이나 싸이월드 같은 곳보다는 그나마 이 곳이 약간 편해서 이곳으로 왔을 뿐이다. 난 그냥 좀 '상식적'인 인간이고 싶을 뿐이다.

 

예전에 누가(女)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 시각을 갖게 되었느냐"고, "어떻게 하면 남자들이 나 같은 시각을 갖을 수 있을 것 같냐"고 말이다. 물론 두 번째에 대한 해답은 나에게 없다. 아마도 내가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일 게다. 내가 남녀문제에 관해서 조금이나마 균형적인 시각을 갖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사실 나 자신도 '남성우월주의자'였다. 즉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잘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세상이 여자들에게 너무 불공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생각은 무지하게 단순했다. "남자들이 워낙 잘나서 공평하게 경쟁해도 충분히 여자를 압도할 수 있는데 왜 그리 치사하게 여자들에게 불공평한 룰을 만들었지?" 한마디로 말하면 '남자로서 정말 쪽팔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마쵸였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똑같은 여건에서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야 비겁하지 않고 쪽팔리지 않게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으니까.(지금까지도 남자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냐고? 난 바보가 아니다.)

 시작은 정말 유치했다. 그런데 어떤 것들이 불공평한지 따지다 보니까 정말 말도 안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면서 나도 변해갔다. 20대 초반의 일이다.

 

결혼하고 몇 년쯤 지나서 추석 때였다. 정혜가 우리집(시댁)에 가지 않고 자기집(친정)에 가겠다는 거였다. 어차피 차례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어차피 지낼거면 자신도 조상이 있는데 왜 남(여기서 남은 '나'다)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냐는 거였다. 난 당황해서 몇가지 허접한 핑계를 대며 설득을 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한 말이 나 스스로에게도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치졸하게 "그렇게 하면 결국 너만 피곤해진다"라는 야비한 설득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포기했고 결국 추석에 나는 우리집으로 정혜는 자기 집으로 갔다. 내가 그랬던 것은 페미니스트라서가 아니라 그게 합리적으로 맞는 말이라서 따른 것이다. 이 얘기를 하면 대개는 "잘했다"가 아니라 "깬다"라는 반응이다. 기껏 하는 얘기가 "너희집 먼저 차례 지내고 곧장 처갓집에 가면 될 거 아냐" 정도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결코 "처가집 먼저 차례 지내고 나중에 남자 집에 가는 것"은 용납 못한다.

내가  그렇게 바른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난 적당히 비겁하고 타협도 무지 잘한다.

 

잠시 엉뚱한...

알엠님의 글을 읽으면서 '같은 남자'로서 무지 쪽팔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 건가? 내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어도(아무런 잘못을 안했다는 것은 아니고) 같은 남자이라는 이유로 쪽팔려 하거나 미안해 해야 하는 걸까? 왜?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해서? 방관함으로써 결국 못된 사회가 되는데 일조했기 때문에?

 한국이 베트남 침공에 협조했으니까 한국인인 내가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얼핏 당연하고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는데 정말 합당한 것일까? 난 가해 당사자가 아닌데? 이라크 침략전쟁에 동참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이라크인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이 합당하고 양심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말 결사적으로 반대한 사람들도 미안해 해야할까?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동족을 잘못둔 죄? 파병을 막지 못한 죄?(막을 힘이 있는데 안막았다면 미안해 해야 하지만 최선을 다했는데도 못막았다면?) 조금 이상하지 않나? 무슨 책임회피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논리적으로 맞느냐 하는 것이다. 혹시 우리 안에 있는 집단주의? 이 얘기는 아주 나중에 다시 해야겠다.

 

 내가 가장 많이 바뀌게 된 직접적인 사건(사실 아무 일도 없었지만)은 대학에 입학해서 여자들이 담배피는 것을 본 것이었다. 그 모습이 '충격적'이었다는 게 아니다. (내가 자란 곳은 미군부대가 있는 기지촌 같은 곳이었는데 코흘릴 때부터 여자들이 담배피는 것은 지겹도록 보아왔다.) 벌써 20년이 다돼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수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남성들의 수준이 아직도 '여자들이 담배피는 것을 뭐라 하지 않을 정도' 수준에만 머물러있는 게 아닌가 싶다. 딱 거기까지만 말이다.

얘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다. 오늘은 그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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