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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병원회진시간이 다 되어서 독서실에서 읽고 있던 책 -<호밀밭의 파수꾼>- 을 덮어두고, 병원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TV를 틀었는데 방금 전에 덮어 두고 왔던 바로 그 책이 나오는게 아닌가. 기막힌 타이밍에 뭔가 싶어 집중을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홈쇼핑 광고였다.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을 세트로 팔고 있었다. TV속에는 남·녀 진행자가 책들이 빽빽이 꽂힌 책꽂이를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김갑수 아저씨가 역시 책이 가득 쌓인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화장품이나 디지털 카메라 등이 놓여있을 자리에 책들-그것도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이 쌓여있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두 쇼호스트는 그 책꽂이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을 꺼내서, 책 표지에 그림이 하나도 없고, 책 뒷면도 텅비어있다는 점을 몇 번씩 강조해서 보여주더니, 작가와의 직접계약에 의해서 작가의 요구에 따라 그 의도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만든 것이라고 몇 번씩이나 강조해서 말했다. 옆에 있던 깁갑수 아저씨는 거기에 거들어서 제대로 된 번역이 중요하다면서 힘을 보탰다.


내가 읽고 있던 책은 전에 헌책방에서 3000원 주고 산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책표지에는 정체모를 한 소년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아마 소설 속 주인공인 ‘홀든’인 듯-   뒷 표지에는 책에 대한 설명이 거창하게 쓰여 있었다.

나는 그 방송을 보고 있으면서 일전에 민음사 블로그에서 세계문학전집을 주는 이벤트를 진행했을 때, 한번 받아보겠노라며 동생 아이디까지 동원해서 중학교방학숙제로 내준 독서감상문틱한 글을 쓰던 내가 떠올랐다.

 

홈쇼핑에서는 책 소개를 하면서 수능이 어쩌구 논술이 저쩌구 하는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자막에는 예의 그 ···9900으로 끝나는 가격표가 달려있었고, 각각의 책 표지에는 꺼풀이 하나씩 더 덧씌워져 있었는데,  ‘몇 년도 노벨문학상수상, SAT선정 추천도서, 몇 년도 서울대논술문제 기출’ 등등이 그 내용이었다. 삐까뻔쩍한 스튜디오의 조명을 받아 번들거리는 책표지와 어울리지 않게, 표지에 실린 흑백사진 속, 주름 잡힌 작가들의 얼굴들이 왠지 모르게 애처로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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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은 일전에 문고판으로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에 하나로 꼽힌다. 물론 이 소설보다 훌륭하고 위대한 책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만큼 그 훌륭하고 위대한 책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처음 이 책을 다 읽었을 때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전 날 ‘반지하’연구실에서 사람들과 새벽까지 술을 먹었었다. 꽤 늦은 시간에 하나둘 각자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고 나와 J가 남아서 어떤 이야기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꽤 진지한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새벽 5시가 다되어 잠을 자기 위해 내가 들어갔던 방에는, ‘이쁜이’라는 고양이가 나은지 얼마 되지 않는 새끼들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눕자 대여섯마리 정도의 새끼고양이들은 쪼로롬히 구석으로 숨어들어갔다. 이불에서는 고양이 오줌 냄새가 조금 나는 듯 했지만, 워낙 피곤했던 터라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새끼 고양이 들이 어느새 내가 자고 있는 침대위에 올라와서 각자 내 몸을 이용해서 잠들어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당당히 배위에 올라가 있기도 하고, 어떤 녀석들은 내 허벅지를 베게삼아 곤히 잠들어있었다. 좀 일찍 깬 녀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위를 활보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는데 몇 마리는 부스스 일어나 구석으로 도망갔지만 어떤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아서 - 특히 배위에 올라탄 녀석은 손으로 받쳐 들어 내려 주어야했다. 시계를 보니 꽤 이른 아침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그렇게 술을 먹고 그 시간에 일어났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더 이상한 건, 그런데도 너무나 상쾌한 아침이었다는 것이다. 베란다창문으로 한가득 아침햇살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어 그 빛을 조명삼아 반쯤 읽다 덮어둔 책 <호밀밭의 파수꾼>을 꺼내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깨기 시작할 무렵에 책을 다 읽었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뭔가 짠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 감상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마치 그 아침 햇살이 내 살갗을 통과해서 내 안 깊숙한 어떤 곳까지 스며드는듯했다. 나는 어떻게든 지금 이 순간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시에  가지고 다니던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몇 번 눌렀다. 내가 찍고 싶었던 것은 그 때의 그 빛이었는데 왜 새끼고양이들만 찍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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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고양이 한 마리 기르게 되면 ‘피비(소설 속 홀든의 여동생)’라고 이름 붙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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