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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9/06
    미학 비판(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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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9/05
    박근혜의 카노사 행(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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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9/04
    독일 노동쟁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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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9/04
    학문하기 - 칼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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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2/09/03
    학문하기 - 레오나르도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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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2/09/03
    짐승같이 일하는 [과]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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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08/31
    아다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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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2/08/30
    201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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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2/08/30
    박근혜의 "국민 대통합"과 좌파의 위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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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8/28
    [의자놀이], 글쓰기, 그리고 진중권의 좆까는 소리(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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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비판

"[미학의] 형식적 차원인 <추하다-아름답다>는 내용적으로 사회적 관점을 감추고 있다. [부르주아가] 추한 것을 허용하게 된 동기는 반봉건이었다. 농부들도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랭보에 이르면 그 차원이 보들레르의 <순교자>가 보여준 것보다 더 철저하게 추적된다. 형체가 해체된 시체를 노래한 랭보의 시에서 튈레리엥 궁전으로 쳐들어가는 아낙네는 "그래, 나 병신 악당이다."라고 말한다. 제4계층, 롬펜프롤레타리아트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상황을] 뒤집어엎어 버리기를 욕망할 때 그 모습은 추한 사회의 아름다운 삶의 규범에 비춰보면 거칠고, 원한으로 일그러져 있으며, 강제된 노동, 더욱이 육체노동의 짐에 눌린 굴욕의 상처(Mal)가 깊게 패어있다.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서 우아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잔치상을 지불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권에는 그런 굴욕을 기억하게 하는 패인 상처를, 있는 것을 그대로 긍정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전체에 전쟁을 선포하는 그런 상처를 그들의 [본래] 모습으로 허용하는 [아량도] 얹혀 있다. 예술은 [옛적부터 귓속말로 이어져와] 추하다고 추방된 것을 자신이 다뤄야 할 과제로 삼아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추한 것을 한 구성요소로 짜 맞추거나 좀 부드럽게 하거나 혹은 가장 역겨운 것보다 더 역겨운 유머를 통해서 추한 것과 화해하고 실존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추한 것을 자기의 모습에 따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세계를 추한 것 안에서 까발리기 위해서다. 예술이 이렇게 된다고 해도 굴욕에 동의하는 것으로서의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긍정의 가능성이, 깔아뭉개진 자들과의 동정이 쉽게 이런 긍정으로 전복되는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말이다." (ou_topia, 강조역자)
 

 

아도르노, 미학이론  (Gesammelte Schriften, Bd. 7, S. 79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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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카노사 행

박근혜의 이른바 '국민대통합' 행보에 하인리히 4세의 카노사 행이 겹치는 것은 왠 일인가?

교회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왕자리까지 내놓아야 할 처지에 빠진 하인리히 4세가 눈 내리는 겨울 카노사 성 앞에서 맨발과 누더기만 입고서 그레고리우스 7세가 그의 회개를 인정하고 다시 교회공동체 안으로 받아 주기를 기다린 것은 아마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진정성이 없었을 것이다. 그걸 모를 정도로 그레고리우스 7세가 멍청하지 않았고. 그래서 "넌 교회 안으로 두 번 다시 들어올 수 없어"하고 금을 확실히 그어놓고 전혀 지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근데, 카노사 성의 주인 (여)변방백작 투스치엔의 마틸데가 그가 교항으로서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진정성이 문제가 아니라 회개하고 교항 앞에서 머리를 쪼아렸으니 하인리히 4세를 다시 교회 안으로 안 받아 줄 수가 없다고 한다. 교회공동체가 안과밖을 엄격하게 구분하지만 그 경계선이 그물망이 되어야 교회공동체가 불어나기 때문에 그 경계선을 그물망으로 만들어 주는 회개를, 그것이 아무리 외식으로 보일지라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안 그러면 교회공동체에도 손상이 온다는 것. 순수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진 신자들을 염두한 전략적인 접근이다.

박근혜의 김대중, 노무현 묘소 참배, 전태일 재단 방문 시도 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박근혜의 진정성을 문제시해야 하는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쪽과는 아예 선을 긋고 절대 넘어오지 않을 사람들을 의식한 고육지책임을 모를 사람이 있는가? 다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진중권의 "박근혜, 전태일 재단 전에 쌍용차 노동자 만나야"가 답인가? 이건 박근혜가 짜놓은 틀 안에서 놀아나는 꼴인데? 그래서  "그거라면 적극 지지해 드리죠"라는 발언도 가능한가? 박근혜보다 더 재치있게 정치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나온 말 같은데 마스터가 만들어 놓은 게임에서 이기는 것은 항상 마스터의 승리라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틀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자본의 꼬봉 박근혜가 자본의 오야봉이 되어 쌍차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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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노동쟁의 동향

독일 제조업부문의 노동쟁의는 이제 거의 없는 것 같다. 파업하면 딴 데로 가버린다는 신자유주의 공세와 자본의 협박에 노조지도부까지 '일자리우선'하면서 파업을 자제하고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노동쟁의구조에도 변화가 온 것인가? 지난 몇 년을 되돌아보면 주로 서비스부문에서 파업이 있었고 또 항공기조정사는 항공기조정사끼리, 기관차조정사는 기관차조정사끼리, 항공관제사는 항공관제사끼리, 승무원은 승무원끼리 등등 특수전문직들이 따로따로 살림을 차린 '전문영역노조/Spartengewerkschaft'의 노동쟁의만 있었던 같다.

지금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는 '독립항공승무원조직/Unabhängige Flugbegleiter Organisation-UFO)이란 노조의 노동쟁의를 봐도 그렇다. 개원 의사들이 파업할 조짐도 보이고.

노동자운동 역사를 보면 가장 잘 나가는 부문의 노동자들이 항상 기관차적인 역할을 하면서 노동쟁의를 주도해 왔는데 이젠 노조들이, 특히 전문영역노조들이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지난 항공관제사의 파업이 그런 비판을 받았다.   

일이 왜 이렇게 됐지?


독일 친경제연구소인 쾰른 소재 <독일경제연구소/Institut für Deutsche Wirtschaft-IW>에 따르면 1970년 이후 독일의 노동쟁의동향은 아래 그래프와 같다. (여기참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노동쟁의로 상실한 노동일(검은 선) 및 서비스부문의 비중 (막대기), 독일연방노동청 자료에 기반한 IW 통계)


노동쟁의로 상실한 노동일이 1970년대에는 연평균 80만 일이었는데, 1990년대 연평균 33만 8천일에서 2000-2011년 연평균 14만 4천일로 줄었다.  

1984년의 경우 주 35시간 도입을 놓고 진행된 노동쟁의로만 그해 560만 노동일이 상실되었다.

현재 전반적으로 저조한 노동쟁의에 서비스부문의 비중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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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하기 - 칼 마르크스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놓고 베를린 자유대 철학 거장들이 돌아가면서 강의하는 Ringvorlesung이 있었다. 80년대 말로 기억된다. 그중 참신한 보수이며 학자보다는 선생이었던 미하엘 토이니쎈(Michael Theunissen)의 강의 일부를 번역 소개한다. 이 강의는 "시간의 부정신학"(Negative Theologie der Zeit)이라는 묶음집에 발표되었다. 역자는 받아 쓴 것을 번역했기 때문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이제] 철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각인한 두 번째 경험을 이야기할 순서입니다. [역사의 아프리오리(A priori)를 사유하려다 거의 미쳐버린 예나 시기의] 헤겔을 [다시] 기초철학(Fundamentalphilosophie)으로 내 밀고 [논리학으로 떨어지게 했던 첫 번째 경험처럼] 이 두 번째 경험도 사유의 [현실]접근(Denkansatz)에 있어서 혁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르크스 사유에서의 단절(Bruch), 즉 곧바로 [철학에 몰입하는] 철학적인 저서에서 경제비판적인 저서로서의 전환을 말하고자 합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토록 명망을 상실한 오늘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1844년 <파리 수고>와 1867년 <자본론> 사이에 일어난 마르크스 이론의 변화가 철학을 이런저런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닌 사람들도 인정하는 오늘날의 철학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초기 마르크스에서 후기 마르크스로 넘어가면서 철학은 비판이, 비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철학이 역사철학이라면, 철학은 동시에 유적인간의 발전경로의 청사진(Entwurf)을 출발점으로 하여 현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한 이론에서 이젠 거꾸로, 당시 알려지지 않은 프랑크푸르트 시기의 헤겔에 무의식적으로 접목하면서, 현재를 출발점으로 하여 역사 전체를 시야에 넣으려는 이론으로 변합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이 대수롭지 않는 것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마르크스가 경제학 고전을 공부하기 위해서 대영박물관에 처박혀 자기 생애의 10년을 투자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이 10년 사이 철학은 예전에 전혀 없었던 [예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연구(Forschung)가 되었습니다. 철학적 연구는 자신을 부정하는 양태로서의 철학입니다 (Philosophische Forschung ist Philosophie im Modus ihrer Negation.)

유감스럽게도 마르크스 후의 철학이 계속 연구로 머물렀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철학이 오늘날 두루 연구가 아니라 할지라도, 철학은 - 최소한 이것은 주장하고 싶네요 - 연구여야 한다는 혹은 (...) 연구로 시작해야 한다는 요구아래 있습니다. 오늘날 철학이 견실한 것이 되려면 달리 할 수 없고, 남은 것은 오로지 자신의 부정양태입니다. 이것은 또한 철학의 첫걸음이 연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리고 이 대목에서만,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을 굽혀 받아들이는 요구를 다른 사람에게도 할까 합니다. 이 요구를 명확하게 하기위해서 철학적 연구라는 보편적인 개념과 특수한 전제 때문에 철학이 철학적 연구가 된 마르크스의 특수한 상황을 구별해야겠습니다. 저 자신에겐 이런 특수한 의미로서의 연구로 시작하는 철학을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찌되었던 간에 그들이 철학을 연구이상에 맞추기를 기대합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추측컨대 마르크스가 [철학을 철학적 연구로 만듬과] 동시에 모든 철학적 연구에 적용되는 잣대를 정립했습니다. 마르크스 후의 모든 철학이 그의 부정된 철학의 개념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 잣대는 마르크스가 출발점으로 삼은 특수한 전제에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를 고려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첫째, 현실은 역사적으로 되어진 것이고 이런 것으로서 모든 철학적 청사진을 앞서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제는 모든 철학으로 하여금 [자신을 까뒤집어] 밖으로 향하게 하고 실재하는 사실(Realien)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강제합니다. 둘째, 현실은, 역사적으로 되어진 것으로서, 지적 활동의 성과로, 특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전공학과의 연구결과(Erkenntnisse)로 매개된 것으로서 역시 모든 철학에 선행되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전제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현실로서의 정치경제학을 과학으로서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거쳐서 서술하게 강제했습니다. 이 자리는 철학과 경제학의 관계를 토론할 자리는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적용한 방법의 모범성에 주목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연구]진행방법의 모범성은 그가 철학을 그렇게 진행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모든 철학으로 하여금 전공학과에 빌어 붙어 [연구하게] 한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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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하기 -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른스트 한스 곰브리히(곰브리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학문하기를 이렇게 서술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달인이 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반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게 전통적인 학자교육을 받지 않은 그에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연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게 가능했던 건 어쩌면 [역설적으로] 바로 그가 [전통적인 학자가 되는 교육을 받아] 어느 한 학자공동체에 속하는 지성인이(zünfiger Gelehrter) 된 것이 아니라 피렌체의 [자유로운]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을, 그 선배들이 이미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다 탐구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는 탐구를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깊게,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정확하게 했다. 그는 당대의 [교양]학자들처럼 책지식(Buchweisheit) 답습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는 한 대목에서 학자들이 자기를 못 배운 사람이라고 얕보고 가볍게 처리하려 했다고 한다. 당대의 학자들은 성경과 고대 글쟁이들의 권위에 기반하지 않은 지식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와 달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로지 자신의 눈에만 의존하려고 했다. 그는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먼저 옛날 글쟁이들의 문헌을 뒤적거릴 생각은 않고 문제해결을 위한 실험에 바로 착수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그의 탐구심을 자극했다. 그는 인체의 비밀을 탐구했다. 핏줄, 근육, 힘줄이 어떻게 뻗어나가는가를 그리고 서술하기 위해서 30구 이상의 사체를 해부했다. 그는 자궁 속 태아의 신비스러운 성장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사람에 속한다. 그는 물과 공기의 흐름과 소용돌이를 관찰했으며, 곤충과 새의 비상 탐구에 수년을 투자했다. 그는 비행기구를 만들기 원했고 그 계획이 언젠가는 현실화될 거라고 확신했다. 암석과 구름의 포메이션, 물체가 먼 곳에 있을 때 대기가 그 빛깔에 미치는 영향, 꽃과 나무의 성장법칙, 음의 조화 등등 이런 것들과 다른 많을 것들이 멈출 줄 모르는 그의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탐구가 그의 예술적 창조의 바탕이 되었다.

(...)

무엇보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연탐구가로 명성을 날리고 싶은 욕심이 정말 없었던 것 같다. 자연을 하나하나 힘들여 탐구하는 것은 그에게 단지 시각세계를 더 잘 이해하여 그림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회화를 평범한 수공업에서 명예로운, 아니 고귀한 직업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회화예술을 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기를 원했다. (...) [당시 손을 쓰는 일은 천하게 여겨졌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자유예술과 자유롭지 않은 예술로 구분함으로써 이미 고대 스노비즘의 전통이 세워졌다. 자유로운 예술은 예를 들어 [일곱 가지 자유문예에 속하는] 수사학, 논리학, 문법, 기하학 등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자유인의 교육에 어울리고 그가 비천한 노예처럼 손에 침 뱉고 몸으로 힘쓰는 일을 하게 강제하지 않는 예술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사람들의 야심은 회화가 이런 '자유로운' 예술이며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손을 놀리는 것은 예를 들어 시인이 시를 쓸 때 손을 놀리는 것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를 후원했던 사람들 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는데] 아마 [육체노동이 필요한] 예술의 존엄성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자주 주문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개나 소나 다 와서 그림을 주문할 수 있는 가게주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서양미술사> 독어 제16판을 참조하여 번역함, 강조 역자] 


<모나리자> 그림 한 장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 그 모든 탐구를 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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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같이 일하는 [과]학자들

우연히 [과]학자들의 노동패턴을 조사한 논문을 접하게 되었다. 중국 대련이공대학의 Wang Xianwen외 여러 명이 스프링거 출판사에 발표된 학술논문 다운로드 회수를 시간대별로 세분화하여 몇 개국 [과]학자들의 노동일과(Working timetable)를 간접적으로 비교한 논문이다. 제목은 이렀다. “Exploring Scientist's Working Timetable: Do Scientist's Often Work Overtime?"

FAZ의 “Planckton"이라는 블로거의 "짐승같이 일하는 [과]학자/Wissenschaftler als Arbeitstiere“라는 글에 소개된 논문이다.

Planckton은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박사논문연구계획서를 제출해야 한다. 계획서를 잘 만들기 위해서 계획서작성 훈련을 받고 치밀하게 작성된 3년 계획서를 트레이너에게 제출한다. 근데, 트레이너가 뭔가 빠졌다고 지적하고 잘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러나 빠진 것이 뭔지 도무지 안 보인다. 결국 트레이너가 "휴가계획"이 빠졌다고 지적한다.

중국 대련이공대학의 Wang Xianwen외 여럿은 [과]학자들이 엄청난 경쟁 때문에 근무시간을 넘어서 연구에 집중함으로써 여가시간이 소홀히 되고 집과 사무실간의 구별이 불분명하게 되어 몸과 마음이 지친다고 한다.  
 

 

2012.9.3 한델스 블라트(Handelsblatt) 인터넷판에 메인기사로 이런 글이 실려 있다. "노예다루기 대가/Die genialen Sklaventreiber)제하 스티브 잡스, 엘론 머스크, 제프 베조스 등의 직원관리를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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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들이 노예마냥 디지게 욕 얻어먹으면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해 하면서  좆나게 일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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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다

설거지 하다가 한눈팔면 영낙없이 그릇을 깨뜨려먹는다. 그래서 소리도 많이 들었다. 내 곁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이 그러면 암담하다. 아프기도 하고.

어릴 때 부잡하게 놀다가 왼손을 크게 다쳤다. 시골 병원에서 상처만을 꿰맸는지 결국 손이 오그라졌다. 수술해서 폈지만 손가락에 감각이 없고 엄지손가락은 아직도 완전히 안 펴진다. 그래서 왼손에 눈이 따라가 주지 않으면 뭘 자주 놓친다. 감각은 어떨지 몰라도 엄지손가락은 한번 더 수술해서 완전히 펼 수 있었을 거다. 근데 여태 안하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아마 생활하는데 크게 불편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일 거다. 또 깨먹었냐고 뭐라하면 “내가 원래 부주의해서 그래, 미안”하고 지나가는데 익숙해 졌고.  

아다다를 좋아한다. 음치에 박치지만 ‘아다다’는 부를 줄도 안다. 그리고 내가 디지게 좋아했던 여성들은 어딘지 모르게 다 ‘아다다형’이었던 것 같다. 나도 ‘아다다형’?

암튼, 흠이 없는 것은 싫다. 매끈한 것은 더더욱 싫고. ‘칼자국/ incision'을 보라고 끊임없이 지적하고 자신의 '1월 20일'1을 이야기하는 첼란에게서2 지하로 통하는 결사(combination)를 보게 해준 데리다가3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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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게오르크 뷔히너, 렌쯔(Lenz)텍스트로 돌아가기
  2. 파울 첼란, 메리디안(Meridian), 게오르크 뷔히너 상 수상 연설텍스트로 돌아가기
  3. 데리다, 쉬볼렛텍스트로 돌아가기

2012/08/30

알프레드 슈미트(Alfred Schmidt)가 2012.8.28 죽었다.

 

 

FAZ가 "Begriffene Natur"제하 추도한다.

 

 

잘 모르고... 단지 [알아먹기 힘든] 프랑스의 구조주의포스트??XYZDETC의 위력이 맥을 다할 무렵 "Gott sei Dank! Der Spuk ist endlich vorbei." (감사. 마침내 [유령을 본] 야단법석이 지나갔다.) 했던 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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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국민 대통합"과 좌파의 위기

박근혜의 대통령 후부 수락 연설문을 읽어 내려가는 중 문득 좌파가 이번 대선과 그 후 첨예한 위기에 처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박근혜의 레토릭에서 20세기 초 이태리 파시즘의 레토릭이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1. 지도자와 국민이 하나 되는 파시즘적 국가 코포라티즘

이태리 파시스트 코포라티즘은 국가 주도아래 생산력을 완전히 통제하여 국민의 행복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박근혜를 보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당원동지 여러분! (...) 오늘 저의 승리는 당원 여러분의 승리이고, 국민 여러분의 승리입니다. [...] 저의 삶은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오늘까지 제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국민여러분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제 삶에 마지막으로 주어진 무거운 책임을 안고, 국민 여러분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제가 가는 이 길 앞에 수많은 고난이 놓여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진실과 정의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외롭지 않습니다. 저의 가족인 여러분이 계시기에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러분”에서 “당원동지 여러분”으로 올라오고, 다시 “당원 여러분”에서 “국민 여러분”으로 내려가고 국가를 가정과 비교하는 대목에서는 김일성의 주체사상까지 오버랩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 서문>에 이렇게 쓰여 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으시여 언제나 인민들과 함께 계시고 인민을 위하여 한평생을 바치시였으며 숭고한 인덕정치로 인민들을 보살피시고 이끄시여 온 사회를 일심단결된 하나의 대가정으로 전변시키시였다.”


2. 이태리 파시스트 코포라티즘 구상의 관철 절차

- '제3의 변화'란 시대해석의 사령탑(Deutungshoheit) 선점.

“여러분!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우리 대한민국은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산업화로 기적의 ‘경제 성장’을 만들었고, 민주화로 성숙한 ‘정치 발전’을 이뤄왔습니다. 이제는 산업화 시대의 성장 패러다임, 민주화 시대의 분배 패러다임을 넘어서 새로운 제3의 변화, 국민행복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 민주주의 정치제도 외의 정치조직체(polity) 도입

“여러분, 저는 경제민주화, 복지, 일자리를 핵심내용으로 하는 ‘5천만 국민행복 플랜’을 수립하여 추진하겠습니다. 각계 전문가와 국민대표로 ‘국민행복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국민행복 청사진을 마련하겠습니다.”

3. 국체(Volkskörper)에서 ‘이물질’ 배제

“이념과 계층, 지역과 세대를 넘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모두가 함께 가는 국민 대통합의 길을 가겠습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들이라면 그 누구와도 힘을 모으겠습니다. 100% 대한민국을 만들어, 5천만 국민의 역량과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새누리당 홈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이번 대선은 종북세력과 그 연대세력으로부터 조국 대한민국을 지키는 역사적 사명이 있습니다.”

새누리당은 경쟁정당을 정치경쟁자가 아니라 전쟁을 치러서라도 없애야 하는 [외부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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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글쓰기, 그리고 진중권의 좆까는 소리

공지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로 진중권이 이런 글을 썼다.

“‘의자놀이’를 둘러싼 의자놀이” (여기에도 게재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 것 같다. 근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한다는 느낌이 들면 들수록 역겨운 느낌이 더해진다.

왜 그러지?

소제목 “난무하는 해방의 서사”에서 왜 그런지 좀 분명해진다.

이 부분 전문 인용한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하종강-이선옥이 새로 건물을 짓고, 그것을 하종강의 이름으로 등록하기로 합의한다. 이후 하종강이 그 건물을 공지영에게 임대한다. 그러자 이선옥이 나타나 자신이 건물의 공동소유주이니 자신에게도 임대료를 내라고 하는 격이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이선옥은 이 사안에서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권리를 스스로 포기, 혹은 양도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책의 기획 자체가 공익을 위한 것이고, 저자는 물론이고 인용된 필자들, 책을 만든 출판노동자들 모두가 재능을 기부했다. 게다가 칼럼의 내용도 되도록 널리 복제될수록 좋은 공익적 콘텐츠에 속한다. 그런데 소유권 등기도 안 한 이선옥이 나타나, 그 공익적 콘텐츠에 대한 사유권을 주장하다가, 저자의 사과가 없다고 공익적 콘텐츠의 배포중지를 요구한다. 남세스럽지 않은가?
 
 자본주의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사유재(저작권)로 보나,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공유재(공익적 콘텐츠)로 보나, 애초에 이선옥이 낄 자리는 없다. 그런데도 하종강과 일부 자칭 좌파들은 특유의 스테레오타입를 사용하여 이번에도 신속히 또 하나의 이야기를 찍어냈다.

 ‘거대한 문화권력에 맞서 힘없는 무명 르포 작가의 권리를 수호하는 싸움.’
 
 이로써 공지영은 밤의 여왕이 되고, 이선옥은 착취당한 민초가 되고, 하종강은 정의의 기사가 되고, 트위터러들은 그 뒤를 따르는 민중의 군대가 된다. 이 해방의 서사가 아무리 숭고해 보여도, 그것은 오직 그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순도 100%의 허구다.”



“삽살개의 정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니라 사냥개로.

그래,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등록, 임대, 임대료, 공동소유주, 권리, 양도 등 법률용어가 난무한다. 이런 용어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법대생들에게 맡기고 자본주의 법체계 시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이런 용어들처럼 겉만 도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아주 단순한 내면세계에 기초하고 있다.

칸트는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시원/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Rechtslehre" 첫 조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민]법체계의 기본명제다.

“법적 내 것(meum juris)이란 나와 붙어있는 것인데, 어떻게 붙어 있느냐하면 다른 사람이 내 동의 없이 그것을 사용할 경우 나를 찢는 행위가 될 만큼 붙어있는 것이다. 사용 가능성의 주관적 조건을 통틀어 소유라 한다.” (Das Rechtlich-Meine (meum iuris) ist dasjenige, womit ich so verbunden bin, daß der Gebrauch, den ein anderer ohne meine Einwilligung von ihm machen möchte, mich lädieren würde. Die subjektiv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s Gebrauchs überhaupt ist der Besitz..)

이선옥이 아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을 써본 사람은 글쓰기가 애 낳는 것과 같음을 알 것이다. 글쓰기를 좆까 배설하는 식으로 하는 ‘남성’은 모르겠지만. 그래 니들을 싸 질러대고 쾌감을 느끼겠지만 이선옥은 글을 낳으면서 아파했고 애를 호적에 안 올렸다고 지랄하고 비아냥거리는 걸 보면서 또한번 아파했을 것이다.

그래, 이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사회주의적 관점의 기본은 어디에 있는가? 앞 칸트의 첫 명제에 함의되어 있다. 무산계급은 다른 사람에 의한 “법적 내 것” 사용에 있어서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굶어 죽음을 선택하면 몰라도.

사회주의적 관점이 지향하는 것이 뭔가? 공동소유다. 이게 뭔지 다시 칸트를 조회해 보자.

같은 책 20조항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래서 내가 계약을 통해서 취득하는 것은 (약속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속이다. (...) 계약에 의한 내 것의 양도는 항구성법(lex continui)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 이 항구성은 나아가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이 [계약당사자] 양자(promittents et acceptantis)의 특정한 한쪽이 아니라 양자의 통합된 의지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달리 표현하면, 약속하는 자가 먼저 자기 소유를 다른 사람이 선점할 수 있게 내버리는 (derelinquit), 혹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여(renunciat) 다른 사람이 바로 그 권리를 챙기는, 혹은 그 반대의 식이 아니다. 양도는 결국 행위인데, 그 안에서 대상이 한 순간 양자 모두에게 속하는 행위이다.” (Durch den Vertrag also erwerbe ich das Versprechen eines anderen (nicht das Versprochene). (...) Die Übertragung des Meinen durch Vertrag geschieht nach dem Gesetz der Stetigkeit (lex continui). (...) Diese Stetigkeit aber bringt es mit sich, daß nicht eines von beiden (promittentis et acceptantis) besonderer, sondern ihr vereinigter Wille derjenige ist, welcher das Meine auf den anderen überträgt; also nicht auf die Art: daß der Versprechende zuerst seinen Besitz zum Vorteil des anderen verläßt (derelinquit), oder seinem Recht entsagt (renunciat) und der andere sogleich darin eintritt, oder umgekehrt. Die Translation ist also ein Akt, in welchem der Gegenstand einen Augenblick beiden zusammen angehört.)

사회주의적 관점이 지향하는 것이 뭔가. 자본주의에서는 한순간만 가능한 공동소유를 최소한 장기화하자는 것이다. 이 요구는 허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이론상 필연적이고 그래서 가능한  가능한 것에 실질적, 실천적인 힘을 보태자는 것이다.  것을 실천적으로 이룩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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