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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8/27
    발터 벤야민 - 변증법적 이미지
    ou_topia
  2. 2012/08/27
    의자놀이, 단상 6
    ou_topia
  3. 2012/08/26
    성자(3)
    ou_topia
  4. 2012/08/25
    의자놀이, 단상 5
    ou_topia
  5. 2012/08/25
    의자놀이, 단상 4
    ou_topia
  6. 2012/08/24
    보편적 복지논쟁이 감추는 것
    ou_topia
  7. 2012/08/24
    운동형식에 관한 논쟁(2)
    ou_topia
  8. 2012/08/22
    고향과 정체성
    ou_topia
  9. 2012/08/22
    고지쟁탈
    ou_topia
  10. 2012/08/22
    의자놀이, 단상 3(1)
    ou_topia

발터 벤야민 - 변증법적 이미지

"Man sagt, daß die dialektische Methode darum geht, der jeweiligen konkret-geschichtlichen Situation ihres Gegenstandes gerecht zu werden. Aber das genügt nicht. Denn ebensosehr geht es ihr darum, der konkret-geschichtlichen Situation des Interesses für ihren Gegenstand gerecht zu werden. Und diese letztere Situation liegt immer darin beschlossen, daß es selber sich präformiert in jenem Gegenstande, vor allem aber, daß es jenen Gegenstand in sich selber konkretisiert, aus seinem Sein von damals in die höhere Konkretion des Jetztseins (Wachseins!) aufgerückt fühlt. Wieso dies Jetztsein (...) an sich schon eine höhere Konkretion bedeutet – diese Frage kann die dialektische Methode freilich nicht in der Ideologie des Fortschritts sondern nur in einer, an allen Teilen diese überwindenden Geschichtsanschauung erfassen. In ihr wäre von der zunehmenden Verdichtung (Integration) der Wirklichkeit zu sprechen, in der alles Vergangene (zu seiner Zeit) einen höheren Aktualitätsgrad als im Augenblick seines Existierens erhalten kann. Wie es als höhere Aktualität sich ausprägt, das schafft das Bild als das und in dem es verstanden wird. Und diese dialektische Durchdringung und Vergegenwärtigung vergangener Zusammenhänge ist die Probe auf die Wahrheit des gegenwärtigen Handelns. Das heißt: sie bringt den Sprengstoff, der im Gewesenen liegt (…) zur Entzündung. So an das Gewesene herangehen, das heißt nicht wie bisher es auf historische sondern auf politische Art, in politischen Kategorien behandeln."


Walter Benjamin: Das Passagen-Werk, in: Rolf Tiedemann (Hg.): Walter Benjamin - Gesammelte Schriften, Band V.1, Frankfurt am Main 1991, S. 494f.
 

 

"사람들은 말하기를 변증법적 방법은 [대상을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대상이 처해있는, 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충실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방법에서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변증법적 방법이 대상으로 삼는 것에 개입하는 존재가(Interesse) 처해 있는 구체적-역사적 상황을 또한 충실하게 담아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근데 둘째 상황은 개입하는 존재(Interesse)가 항상 스스로 [변증접적 방법의] 대상 안에서 자신을 미리 형성한다는데, 특히 그 대상을 자기 안에서 구체화한다는데, 그 대상이 옛날있기에서 지금있기(깨어있기!)로, 보다 높은 구체화로 한자리 더 올라온 것을 느끼는데 내포되어 있다. 어떤 이유로 이 깨어있기 (...) 자체가 이미 보다 높은 구체화를 의미하는가?  - 이 질문은 사실 변증법적 방법이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아니 오히려 오직 바로 그 진보이데올로기를 모든 부분에서 극복하는 역사관에서만 제기되고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역사관에서 [비로소] 증가하는 현실의 농축(통합)이 이야기될 수 있겠는데, 이건 지나간 모든 것들이 그들이 존재했던 순간보다 더 높은 현실성수준을 취할 수 있는 현실의 농축(통합)이다. 지나간 것이 자기를 보다 높은 현실성으로 드러나게 각인함에 따라 이미지가 창조되는데, 이때 지나간 것은  바로 그 창조된 이미지로, 그 이미지 안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나간 연관성들의 변증법적인 삼투(滲透)와 재-현재화가 [우리가 지금 맞서고 있는] 현재 실천의 진리에 대한 판가름인 것이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이런 삼투와 재-현재화가 지나간 것 안에 있는 폭탄에 (...) 불을 지핀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나간 것에 접근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지나간 것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 (historisch) 식이 아니라 정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나간 것을 정치적인 카테고리로 다룬다는 말이다." (ou_topia)

 

 

<의자놀이>란 폭탄을 만들어 놨는데, 왜 뇌관을 때리지 않고 거기다 물총질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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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6

하종강 홈페이지에서 진행되는 논쟁을 보면 까깝하기만 하다.

왜 <의자놀이>의 이미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지?
 
난 <의자놀이> 출간과 관련해서 공지영이 한 일이 “의자놀이”란 제목을 만들어 낸 일 외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공지영의 기여보다 더 큰 기여가 없다고 생각한다. 개념의 노동이 엿보이는 제목이다. 이게 “교양시민”이 자기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성찰”의 결과라고 해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애플사를 한 번 봐라. “i-pad"란 이름을 완전히 자기 걸로 하기 위해서 중국 모 기업에 어떤 액수를 지불했나? 조중동이 왜 이리도 조용하나? “의자놀이”란 책 제목이 가지는 파워 때문이 아닐까?

“의자놀이”란 이미지를 평하는 글은 노정태의 “공지영, '쌍용차의 눈물' 보며 <도가니>에 빠지다!” 밖에 없다.

“공지영의 <의자놀이>(휴머니스트 펴냄)는 아주 좋은 제목이다. 이 책이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를 다룬다는 최소한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제목이 '사람 수보다 적은 의자를 놓고 빨리 앉는 사람이 살아남는 놀이'의 은유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분석이다. <의자놀이> 이미지를 은유의 수준에서 처리하고 있다.

구글에서 “벤야민”을 검색해보니 35만 8천개 등록이 검색된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무려 239만개의 등록이 검색된다. 근데 “변증법적 이미지 ∧ 의자놀이”는 0 이다.

<의자놀이>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변증법적 이미지”가 아닌가? 벤야민 전문가들은 많은데 왜 이리도 <의자놀이>에 대한 “변증법적 이미지” 접근이 전무하지? 물총 쏘는 것만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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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

어디선가 주워들었는데 카톨릭에선 성자가 되려면 유머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자기관계의 특유한 양태가 유모여서 그런가? 유모의 밑바닥엔 ‘나 별것 아녀’가 있어서 그런가?

잘 모르겠고, 암튼 요나서에 등장하는 야훼란 분은 장난기가 좀 심하다.

요나는 야훼에 삐쳐서 입이 넉자나 나온다. 한마디로 야훼가 약속을 안 지켜서 자기가 우습게 되었다고 기분이 잡친 것이다. 야훼가 시키는 대로 니느웨에 가서 "니들 다 죽었어"했는데 야훼가 그들을 버젓이 살게 내버려 둔거다. 요나가 결국 헛소리를 하게 된 거다. 요나는 매번 그렇다고 항의한다. 요나는 "내가 그럴 줄 알고" 스페인으로 내빼지 않았냐고, 니느웨를 싹 쓸어버리지 않으면 자길 두 번 다시 쓸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사막에 주저앉아 사태가 어떻게 되나 지켜본다.

요나가 야훼의 말을 니느웨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했길래 사람들이 다 회개하고 돌아섰는지 궁금하다. 별로 열심히 전하지 않았을 것 같다. 듣거나 말거나, 뭐 이런 식으로 전했을 거다. 근데 이상하게 야훼를 몸소 경험한 이스라엘 사람들조차 별다른 선지자들이 피토하는 심정으로 전해도 눈썹하나 꿉적하지 않는데 요나의 말은 야훼를 모르는 걸로 추정되는 사람들까지 곧이곧대로 듣는다. 이게 참 이상하다.

암튼, 야훼는 꼴이 난 요나한테 장난을 친다. 뜨거운 사막에 앉아있는 요나에게 박 넝쿨이 자라 올라 그늘이 지게 해 준다. 요나는 기뿐이 째진다. 근데 다음날 야훼는 벌레를 보내 박 넝쿨을 갉아먹어 죽게 하고 거기다 뜨거운 돌풍까지 불게 한다. 요나가 뭐라고 했겠나. 물론 "날 죽여줘"했겠지.

장난기 서린 야훼의 얼굴이 보일듯 말듯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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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5

스케치

 

1. 도로시아 랭의 사진 <이주 어머니/Migrant Mother>의 뉴딜의 사회공학( social engineering)에서의 기능/역할

 

2. <의자놀이>와 박근혜의 사회공학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관련링크

http://www.zeithistorische-forschungen.de/site/40208749/Default.aspx

http://paulturounetblog.files.wordpress.com/2008/09/case-study-migrant-mother.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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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4

<의자놀이>를 놓고 이상야릇한 대립구도가 빚어졌다. 애기했다시피 난 이 대립구도에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없다.

난 처음부터 공지영의 <의자놀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명제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1. 공지영의 <의자놀이>는 진보가 말하는 “배제 서사”의 발전형이다.

르포하면 얼른 생각나는 책이 있다. 귄터 발라프의 <가장 낮은 곳>이다. 이런 책이다.

“『가장 낮은 곳 Ganz unten』은 귄터 발라프 Günter Wallraff가 1983년 3월부터 2년 동안 국적과 신분을 위장하고 터키인 노동자, 알리(레벤트 시니르리오글루)로 살면서 독일 사회와 노동 현장에서 겪은 차별과 착취에 관한 체험르포이다. 1985년 첫 출판 된 이 책은 지금까지 독일어판으로만 35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으며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독일 출판 역사상 가장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다.1) 르포 형식의 이 책은 13장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장마다 발라프는 자신의 체험 보고를 묘사하고 다른 동료들이 겪은 체험도 함께 끼워 넣으며 이야기 속의 이야기나 대화체 형식으로 표현하였다.”(서정일(한국외대), 변장과 위장을 통한 사회 비판과 폭로 - 귄터 발라프의 르포 『가장 낮은 곳』, http://brecht.german.or.kr/jungbo.net/Hwizard/contents/ jahrbuecher/22/3-2%EC%84%9C%EC%A0%95%EC%9D%BC.pdf)

이 르포는 외국인이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폭로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귄터 발라프의 접근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발라프 르포의 핵심은 [몸소]체험이다. 근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실을 인식 저편의 즉자(an sich)로 규정하고 그걸 꾀를 사용하여 고스란히 취하려는 직관주의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 (정신현상학 서론)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헤겔이 행한 비판의 논지는 현실이란 인식 저편이 아니라 대상과 인식이 항상 어우러져 있는 총체성(Totalität)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수고하여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은 ‘까 발라진 팩트’(factum brutum)들이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은 그런 것들을 주워 모아 [인과성에 따라] 엮어 꿰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이란 수없이 많은 총체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문이란 그런 “원들의 원”(Kreis von Kreisen)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헤겔 철학의 정점은 시스템이 아니라 엔치클로페디아이다.     

외국인이 이주 노동자가 처한 현실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총체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탁월한 사람이 몸소(authentisch), 원천에 가서 (originell) 찍어 올리는 factum brutum이 아니다. 이런 총체성들이 현존하는 양식은 자료다. 수많은 신문기사, 법원판결, 병원기록, 경찰서 기록, 이주노동자외국인단체 상근자의 진술, 외국인의 이주노동자의 일기 등등 널리 펼쳐져 있다. 이 걸 “원들의 원”으로 만드는 것이 ‘외국인 이주노동자 현실’의 진리다. 여기에 수고가 있다. 역사를 학문으로 만드는 첫 마당에 이런 수고가 있었다. 진리는 찍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노동의 고삐를 채워”(“ἐπιπόνως”) 수많은 자료를 “탐색하는”(“ηὑρίσκετο”) 과정의 결과였다. (“ἐπιπόνως δὲ ηὑρίσκετο”,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22장).
    
“[몸소]체험”은 진짜 수고하는 척 한다. 모습뿐만 아니라 말하기까지 많은 수고를 들여 변장하고 위장하여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찍어 올리지만 이건 "개념의 노동"(Arbeit des Begriffs)이 결여된 놀이에 가까운 것일 뿐이다.

공지영과 휴머니스트사의 <의자놀이>가 최소한 이런 맥락에서 싹수가 있는 것이고 공지영의 “나 고생 했어”는 액면 그대로 수용해도 되는 것이다.   


2. 쌍용차 해법을 두고 공지영/휴머니스트사식 르포와 김기원식 학문하기 사이에 진검승부가 있어야 한다.

김기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 “공지영의 ‘의자놀이’와 쌍용차의 해법”에서 하종강으로 매개된 공지영과 이선옥간의 대립을 빗나간 논란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립은 자연 소멸되든지 양자가 소통하든지 해서 암튼 해소될 것이다.

맞다. 쌍용차 해법이 문제다.

이걸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첫째, 경제학 문제다.

우선 경제학이란 게 뭔지 논쟁해야 한다. 경제학이 수학인지 아니면 인민이 먹고사는 문제가 달려있는 철학이고 정치인지, 다시 말해서 정치경제학인지 사투해야 한다. 실존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정치경제학이 폐기처분된 후 경제학은 수학이 되었다. 근데 그게 가져다 준 게 뭔가? 세계를 말아먹는 금융위기가 아닌가? 정확한 수학에 기댄 경제학이 왜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하는가? 수학에 기댄다는 게 자본에 기댄 것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였나?

둘째, 학문하기 문제다.

여기 진보넷 바깥블로그 <Social and Material>의 heesang님은 “마르크스처럼 학문하기”를 권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학자인가? 수고하여 현실세계의 ‘총체성’들을 “원들의 원”으로 만든 학자다. 10년 이상 별 볼일 없는 상업편지까지 검토해 가면서  자본론을 집필한 학자다. 어찌 보면 공지영이 마르크스처럼 학문하고 있다. 현실을 직접 찍어주는 뭔가에 의존하지 않고 ‘총체성’으로 널려있는 자료들을 최소한 한 곳에 모은 것이다. 정치경제학 싹수가 있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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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복지논쟁이 감추는 것


사회를 무슨 과학 공동체(scientific community)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로운 소통으로 사회가 발전한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보편적 사회복지도 자유로운 소통으로 좋은 정책을 만들어내는 문제라고 여기는 것 같다.

참으로 몰상식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유방식이다. 인권이란 게 투쟁해서 따 낸 것 외 아무것도 아닌 것과 같이 보편적 복지란 게 투쟁해서 쟁취한 것 외 아무것도 아니다.

보편적 복지란 게 뭔가? 몸이 아프면 일 안 가도 되고, 몸이 망가져 충전이 필요할 때 휴가가도 먹고 사는 문제에  걸리지 않다는 게 아닌가?

보편적 복지의 일부인 휴가급여, 병가급여(Lohnfortzahlung)가 도입된 건 논리적인 귀결이 아니었다. 독일의 경우 가장 치열한 노동자파업을 통해서 쟁취된 것이었다. 독일 금속노조의 이 파업은 1956.10.25에 시작해서 1957.2.8일까지 무려 16주간 진행된 파업이었다. 노동자계급투쟁이 집단이익이 아니라 사회정의, 즉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는 힘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투쟁이었다.


관련 링크
http://www.vimu.info/general_04.jsp?id=mod_28_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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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형식에 관한 논쟁

독일 일간 타쯔 기사 2012.1.26 (원문은 여기)

 

시민불복종 논쟁


무임 승차자! vs. 형식 페티시스트!

시민불복종 정의 : 시민불복종이란 의식적으로 비폭력적으로 법을 어기는 행위. 윤리적인 권리를 행동지침으로 삼기 때문에 그 불법 행위에 떳떳함.    

논쟁배경: [핵폐기물 처리지역으로 지정된] 벤트란트의 "수천 번 드러눕기" 이니시어티브가 조직한 친가족적인 연좌봉쇄시위에 90년대 이후 시민불복종 행동이 등장한다. 몇 년 전부터 이른바 포스트자율주의 스펙트럼의 좌파급진주의 그룹들도 시민불복종이란 표제아래 행동조직을 하고 있다. 그로나 그들의 시위는 상징적인 연좌봉쇄시위를 넘어선다. 드레스덴에서는 오는 2월  신나치시위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핵폐기물용기]카스토운송을 저지하기 위해서 철로 밑 자갈바닥을 수많은 곳에서 다 걷어치워("schottern") 기차가 다닐 수 없게 한 행동이 여론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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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hott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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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천 번 드러눕기" - "X-tausendmal quer")

 

 


논쟁자
타찌오 뮐러 박사 (35세): [친좌파당] 로자-룩셈부르크재단의 대기 및 에너지정책 담당. "Castor Schottern" 컴페인 대변인. 좌파급진그룹 연합체인 “개입좌파” 조직원,

펠릭스 콜브 박사 (38세): 운동재단 창시자 및 재단위원,  아탁(attac) 공동창시자, 핵폐기물을 운송 저지 “수천번 드러눕기” 이니시어티브의 첫 호소문에 서명한 7인 중 1인.    

 



시민불복종이 대유행이다. 근데 불복종의 한계는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의 저항과 법어기기 의무에 관한 논쟁 (인터뷰어: 마르틴 카울)
 

 


타쯔: 콜브, 독일에서 시민불복종에 온 가족이 참여할 수 있게 하는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은데, 시민불복종이란 무엇인가?

콜브: 나는 시민불복종을 소극적으로 정의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먼저 근본적으로 정의롭고 민주주의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행정조치결정]절차가 부정당한 결정으로 이어지면 법을 의식적으로 공공연하게 어기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을 수 있다. 이 때 핵심원리는 비폭력적인 행동이며 불복종에 떳떳함이다.
 
타쯔: 뮐러, 그쪽은 "카스토 쇼터른" – 철로 밑 자갈바닥 치워버리기 – 가 시민 불복종이라고 한다. 드레스덴에서도 경찰이 연좌시위자들을 들어 나르게 얌전하게 앉아있고 신분증을 내놓는 것이 다가 아닐 것이다.

뮐러: 맞다. 미안하지만 콜브의 견해는 80년대에서 유래한 거라고 생각한다. 콜브는 원칙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운운한다. 그러나 우리 생활스타일이 다른 사람의 생활터전을 파괴하는 것을 두고 어찌 정의롭다 할 수 있는가? 나는 시민불복종 개념을 전략적으로 사용한다. 시민불복종은  많은 사람이 정당하게 여기는 법어기기다.

타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뮐러: 우리가 드레스덴에서 보는 것은 수천 명이 나치시위를 반대하기 위해서 촛불만 켜는 걸 넘어서는 행동을  정당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포스트자율주의 밀리외에서 유래한 우리 좌파급진그룹은 늘 이렇게 주장해왔다. 우리는 지나간 전통적인 가두투쟁의 호전성과 폼잡기를 극복하였다. 경직된 [행동]규정 역시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철로 밑 자갈바닥을 제거해서 [기차가 다닐 수 없게 한다.] 나치가 나오지 못하게 한다. 너희들은 이게 정당하다고 생각하나?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같이 하자."
 
콜브: 나는 급진적인 행동이 그 자체 정당하다거나 혹은 그걸 넘어서 변화를 촉발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어떻게 기획되는가에 달려있다. 뮐러가 시민불복종이라고 선전하는 예컨대 벤트란트에서의 철로 밑 자갈바닥 치워버리기 등의 새로운 행동양식들은 사회적 다수를 광범위하게 동원하는데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론 및 사회운동의 중요한 행위자들이 멈칫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법위반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불복종은 공론장의 정의감에 호소해야 한다.

타쯔: 뮐러, 그쪽은 "시민불복종" 개념을 매우 유연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막판에 가서는 틀림없이 짱돌이 나르기 일쑤다.

뮐러: 우리는 개념을 주무른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 비난은 사회적인 관계와 함께 저항형식이 근본적으로 부동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2500년 전 그리스 민주주의자에게 묻는다면 그는 우리 민주주의는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주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시민불복종도 이와 유사하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하고 있는데 뭔가를 바꿔보려고 하는 형식은 변할 수 없다? 난 이걸 이해할 수 없다.

타쯔: 콜브, 이건 그쪽이 보수주의자란 말 같은데?

콜브: 얼토당토 않는 소리다. 나는 1997년 당시 "수천 번 드러눕기"가 조직한 비폭력 연좌봉쇄시위 첫 호소문에 서명한 7인에 속한다. 당시 우리도 역시 범법행위를 촉구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받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지침이 되었던 것은 억압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이름과 얼굴을 내놓고 법을 어기고 떳떳해 하는 것이었다.  

타쯔: 무엇이 뮐러쪽 사람들과 다른가?
 
콜브: "수천 번 드러눕기"는 연좌봉쇄시위를 일반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철로부수기 같은 걸 지원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엔 나도 그런 걸 역시 지원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다른 것과 결합될 수 있도록 하여 예컨대 먼저 예배를 원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법어기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노력한다. 지금에 와서는 이에 역행하는 운동이 있다. 좌파급진 스펙트럼은 시민불복종에 호소하지만 궁극적으로 사실상 거의 하나 빠짐없이 철로 밑 자갈바닥 치워버리기로 달려간다. 경찰이 오면 많은 이가 줄행랑이다.    

타쯔: 하지만 결과를 보면 포스트자율주의자들이 옳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드레스덴 연좌시위에 수천 명이 참여하지 않았던가, 벤트란트의 <철로 밑 자갈바닥 치워버리기>에도 마찬가지고.  

뮐러: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지 않는가. 우리의 행동양식이 사람들에게 먹여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비폭력 스펙트럼에는 많은 거부반응이 있다. 내가 주장하는 건 사회를 다시 움켜쥐려는 새로운 노력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도전으로 생각하고 심각하게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콜브: 잠깐. 물론 항의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다행이도 시민불복종이란 권리는 없다. 법어기기 때문에 벌금형을 받는 것은 사악한 억압이 아니라 그저 논리적인 귀결일 뿐이다. 문제는 부족하더라도 민주적인 결정을 통해서 마련된 공동규정이 있다는 걸 옳다고 여기는지 여부다.
 
타쯔: 옳다고 생각하는가?
 
콜브: 난 옳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경찰이 여성들이 출입할 수 없게 앉아있는 낙태반대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시민불복종의 올바른 윤리적인 근거가 뭔지 정의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민주주의자로서 다른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나만의 권리를 취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법위반에 대한 형벌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뮐러: 물론 우리도 신나치를 봉쇄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평하지만 여성을 낙태병원에서 성가지게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평한다. 이런 윤리적인 기준을 국가가 정의할 수 있게 내버려 두는 걸 생각하면 오금이 절인다.

타쯔: 뮐러, 그쪽은 "시민불복종" 개념을 순전히 전략적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한가?

뮐러: 그렇게 해서 [윤리적으로] 정당한 법어기기가 정치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콜브: 이젠 좌파급진주의 스펙트럼에서도 짱돌을 던지고 경찰과 몸싸움하는 게 어린애 짓이고 정치적으로 파괴적이라는 통찰이 지배적이라는 건 정말 좋다. 근데 포스트자율주의 그룹들이 시민불복종 이념을 한발 앞서 차용하는 게 틀린 이름표를 달아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라면] 이건 중기적으로 시민불복종 구상전체를 부정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꼬집어 말하자면 니네들은 무임승차하고 있다.

뮐러: 난 그걸 꼰대정치라고 한다. [G7 정상회담이 있었던] 하일리겐담에 80년대까지만 해도 골 깊게 마주하던 그룹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순한 채식주의자 대 호전주의자, 평화주의자 대 짱돌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는 그들이 함께 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계속] 갈등의 골을 좁히는 일을 한 그룹은 바로 포스트자율주의 스펙트럼이었다. 지금에 와서 니네들은 이렇게 말한다. "니네들 정치는 애들 똥싸기 식이였다. 우리 비폭력주의자들이 배울 필요가 없다." 더 꼬집어서 표현해 볼까? 우리가 무임 승차자이면 니네들은 형식 페티시스트들이다.
 
콜브: 전통적인 비폭력 운동이 현재 좀 쪼그라든 건 물론 인정한다. 내가 보기에 이 상황에서 비폭력 운동은 좌파급진주의와의 호환성은 줄이고 사회 중간[세력]과의 호환성을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좋다. 독일환경자연연맹(BUND), 독일자연보호연맹(Nabu), 노조 등도 생태계적 사회적 투쟁에 있어서 다른 중요한 파트너들이다.

뮐러: 반론을 제기한다. 핸드볼 연방리그 감독이 게임 후 “상대편은 철로를 타듯 일사불란했는데, 우리는 철로 밑 자갈바닥을 걷어치우는 걸 더디 했다.”1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행동은 사회의 일상적인 지성에 기대고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근데 서로 차이를 강조하는 건 이제 그만두고 공통점을 부각시켜야 해야 할 것 같다.

타쯔: 공통점이 있나? 어떤 거지?
 
콜브: 서로 통하고 연결시켜 주는 것은 분명 우리 모두가 사회가  뒤집혀지는 심각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분석이고 그러기 때문에 시위를 원칙적으로 단지 합법적인 형식으로만 제한하는 게 틀렸다는 입장이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양식을 이와 같은 극적인 상황에 적합하게 하는 게 정답임과 동시에 필연이다. [강조 역자]  – 그러나 언급했듯이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뮐러: 좌파급진주의 스펙트럼은 "수천 번 드러눕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허나 시위에서 누군가가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하면 이젠 OK 해도 괜찮을 때가 되었다.  지난 몇 년간의 공통점에 다시 조금 차이가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지나간 참호전으로 떨어지지 말자라고 하고 싶다. 우리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힘을 다시 함께 변혁에 사용해야 하지 않는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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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자주: 독일 핸드볼 국가대표팀 감독 하이너 브란트(Heiner Brand)가 어떤 게임에서 지고 난 후 한 발언 "Die Gegner spielen Handball wie auf Schienen, und wir haben es verpasst, zu schottern"텍스트로 돌아가기

고향과 정체성

ou_topia님의 [어린이를 뮈토스화하는 독일 개혁교육학 비판] 에 관련된 글.

 

"Der Mensch lebt noch überall in der Vorgeschichte, ja alles und jedes steht noch vor Erschaffung der Welt, als einer rechten. Die wirkliche Genesis ist nicht am Anfang, sondern am Ende, und sie beginnt erst anzufangen, wenn Gesellschaft und Dasein radikal werden, das heißt sich an der Wurzel fassen. Die Wurzel der Geschichte aber ist der arbeitende, schaffende, die Gegebenheiten umbildende und überholende Mensch. Hat er sich erfaßt und das Seine ohne Entäußerung und Entfremdung in realer Demokratie begründet, so entsteht in der Welt etwas, das allen in die Kindheit scheint und worin noch niemand war: Heimat."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 원리, 마지막 부분)
 
"인간은 어떤 곳에 살든지 아직 역사의 문턱 바깥에서 살고 있다. 아니 전체와 그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아직 세계창조를, 올바른 세계로서의 창조를 기다리고 있다.  참다운 창조는 태초가 아니라 끝[장]에 있다. 이 창조는 사회와 현존재가 급진적이 될 때, 즉 자신에게 손대는데 있어서 뿌리까지 내려갈 때 비로소 착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근데 역사의 뿌리는 분명 노동하는, 창조하는, 주어진 것을 뒤집어 바꿔 새로 짜 맞추는 가운데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이다. 그가 자신을 스스로 움켜쥐고 자기주변을 외화와 소외 없이 현실화된 민주주의 바탕에 굳게 세우고 그것이 완성될 때 비로소 세상에 생성되는 것이 있다. 모든 사람에게 번득이면서 유아기로 비춰 내려가는 것, 하지만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 바로 고향이다."(ou_topia)        
 

 

 

이 말이 일부가 거짓임을 알게 된 것은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될 때였다. 이 희망의 세계가 참작하는 욕망이 아무런 매개 없이 충족되는 유아기는 어린이를 감싸고도는 부르주아의 유년기임을 한 순간에 깨닫게 되었다. 왜 거짓이냐고? "모두에게"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 한 사람을 내 주장의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    


한국에 나가면 가능하면 바로 시골 고향에 간다.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라 상수도, 하수도가 없고, 화장실도 물론 재래식이다. 그러나 전혀 불편하지 않다. 모든 것이 좋다.


어렸을 때 말 안 듣고 부잡하기로 유명했다. 매를 때리려고 해도 도망가 버려서 맞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먹히는 주문이 하나 있었다. “계속해서 그러면 00에게 장가보낸다.” 란 말이었다. 옆집에 동갑내기 여자아이가 살았는데 정말 못 생겼었다 (미안해!). 장가간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건 나에게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그 여자아이를 몇 년 전에 만났다. 얼마만인가? 머리가 희끗희끗한 가정주부였다. 그녀의 언니가 아직 시골 고향에 살고 있는데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늘 00이가 날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전화했다.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다. 너무나 반가와 한다. 짝지랑 같이 만났는데, 짝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녁을 같이 하는 동안 내내 내 옆에 앉아서 내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내가 니를 언만큼 조아했는지 니 아냐. 00댁은 참 행복하시겠어요." 숨어서 날 훔쳐봤단다. 내가 피해 도망 다녀서.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단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갔다. 00이는 식구와 함께 일찍 고향을 떠났다.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손은 시베리아에서 벌목하다 독일로 이주하여 공장에서 막일하는 독일계 아저씨의 손, 석면제거공사장 막일노동자의 손과 다름없다. 거칠다.


00이네는 정말 못살았다. 이건 내가 그 당시 알았던 것이 아니다. 당시 알 리가 없었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힘겨운 일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 집에서 빌어먹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런 걱정 없이 자란 내개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안다는 것도 한국의 70/80년대에서 무산자가 어떻게 살았을 거라는 추상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고향을 떠난 후 고향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한 번도 없단다. 그리고 가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단다. 그때 순간적으로 고향이 다 고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 정체성의 본질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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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쟁탈

근대의 전쟁이 속도전이 되고 총력전이 되었다고 해서 고지쟁탈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지에 성을 쌓아올려 놓고 거기에 들어앉으면 그만이었던, 근본적으로 방어전이었던 중세의 고지가 대포의 도입으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평지에서의 "대중"군대의 육박전으로 대체되었다고 해서 고지개념이 낙후한 것이 된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 3세의 대군을 격파했던 몰트케의 속도전, 총력전은 고지의 추상적 사용에서 나온 것이다. 과히 추상적이라 할 만한 합참이란 고지를 만들어서 고지를 개념화하고 개념적으로 사용한 결과였다.

이른바 좌파는 사회주의 운동이 쟁탈한 모든 고지를 쓰레기처리하고 이상야릇한 말들로 대체했다. 대포가 나왔는데 고지에 성 쌓는 일이 무슨 필요가 있는 일이냐 하면서 육박전과 같이 알아먹기 힘든 "대중", "Multitude" 등등을 운운한다.

근대전과 현대전의 본질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

이런 글을 읽으면 정말 짜증난다. (새로운 주체로서 대중과 대중운동의 방향, 진보평론  제28호, 윤수종, 전남대 교수/ 사회학과)

들어가는 질문부터 확 짜증난다.

"왜 인간들은 마치 노예상태가 자신들의 구원인 것처럼 완강하게 자신들의 노예상태를 위해서 싸우는가? 왜 대중은 복종을 달게 받고 있는가? 왜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억압을 자청하고 있는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한 말고 똑같다. 니가 그렇게 멍청한 놈으로 취급받는 것은 니 잘못이고 니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니가 알아서 헤어 나와야 해!

 

지랄, 빠져 나오려고 하면 뚜드려 패는 놈이 없었나?

계급정의와 관련해서 레닌을 한번이라고 읽어 보고 그게 뭘 의미하는지 뇌주름 한 가닥이라도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자 그러면 대중 개념을 맑스주의적 맥락과 연관시켜 좀더 파악해 보자. 맑스주의 논의에서는 자본주의사회의 기본계급이면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로 설정되는 노동자계급이 있다. 그런데 사실 노동자계급 개념은 배타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노동할 필요가 없는 소유자들로부터 노동자를 구분하고 또한 노동자계급을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는 식으로 말이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는 노동자계급 개념은 농업, 서비스,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과 구분하면서 산업노동자들만을 지시하는데 사용되었다. 가장 넓은 의미로는 가난하고 임금을 받지 않는 가사노동자들 및 임금을 받지 않는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구분되는 ‘모든 임금받는 노동자들’을 나타낸다. 대중은 반대로 열리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계급정의가 무슨 동물세계의 분류학과 같은 거였나? 제발 레닌의 계급정의를 좀 읽어봐! 카테고리적인 규정(kategoriale Bestimmung)이잖아! 그래서 가장 열려있고 포괄적이잖아! 논리학 기본부터 알고서 좀 떠들어라. 그래야 읽을 가치라도 있지.

넘, 짜증나서 한마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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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3

분석과 비판의 능력 부족으로 우선 연구해야  할 방향만을 스케치해 본다.


테제: 현재의 자본주의는 시민운동과 [전통]노동운동이 연대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들어 놓았다.
 

연구방향

1. 노동운동과 계몽과의 관계

0 우선 두 사람의 대조적인 행보가 눈에 뜨인다. 계몽을 주체의 문제로 설정한 칸트한테 가서 결국 다시 존재론-역사적 존재론이라고 하지만-으로 떨어진 푸코에 영국에 가서 계몽을 "combinations of the poor against the rich"의 문제라고 인식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moral science" [사회과학]을 참조해서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가 대비된다.

"Laws are continually made against combinations, but the secret combinations of the low against the high can never be prevented, because it is founded on the interest of the many, and the moral sense of all." (Anna Laetitia Barbauld, zit. nach: Dietmar Dath/Barbara Kirchner, Der Implex, Sozialer Fortschritt, Geschichte und Idee, Berlin 2012, S. 88)

0 이게 무슨 의미인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2. 현재의 자본주의와 가치론에 대한 연구

0 진보넷 바깥블로그 EM님이 제시한 틀을(http://socialandmaterial.net/?p=3593) 참조한 공부가 되겠다.

- 정신노동(문화 등등)이 자본의 밑으로 실질적으로 종속되는 과정과 그 현상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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