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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와 비판 2

 "Die wahrhafte Widerlegung muß in die Kraft des Gegners eingehen und sich in den Umkreis                seiner Stärke stellen." (헤겔, 논리학, 2권, “Vom Begriff im Allgemeinen/개념일반에 관하여”)

 “진정한 반박을 행하기 위해서는 반대자의 힘 자체의 속으로 파고들어서 바로 그 힘이 휘둘러 대는 작용권내에 진을 치고 들어앉아야만 한다.”(임석진 역)
 

 

반대자를 유치한 것으로 규정하고 어린아이 팔 비틀듯 비틀어 넘어뜨리고서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겠다. 이런 만족감에 똥물을 퍼붓는 일이 또한 만족감을 줄 수도 있겠다. 둘 다 유치하다고 고개를 획 돌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만족감이 “쉽게 본질적인 것을 다루는 것으로 통용”(헤겔, 정신현상학, 서론)되는 현실이다.

공지영의 <의자놀이>에 관한 이른바 좌파의 비판이 “타자화”의 담론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 <의자놀이>가 노동운동의 주변을 맴돌면서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투쟁을 도구화 한다는 것이 이런 비판의 논지다. 그 궤도의 소실점은 아마 새누리당 박근혜가 “국민을 위한 복지”, 달리 표현하면 “모든 계급을 위한 복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나온 마당에 리버럴한 세력이 버린 아이 취급했던 노동자계급을 안으려는 것은 차기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사진을 증거물로 내놓을 수도 있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수 전인권이 18일 저녁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들국화와 함께하는 공지영의 의자놀이'에서 노래하는 가운데 백기완 통일문제 연구소 소장과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등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민중의 소리 http://www.vop.co.kr/A00000531856.html)

 

 

숨가쁜 비판이며 유효기간이 빤히 내다보이는 비판이다.

이런 타자화담론은 진정성에 기반하고 있다. 공지영은 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이런 타자화담론의 지평을 인지하고, 같은 지평에서 이른바 좌파의 진정성을 문제시하면서 역공한다.

공지영: “언제나 적은 우리 내부에 있다. 내가 너무 단순한가? 정말 무섭다. 겉으로는 위선을 떨고 다니겠지....내면으로는 온갖 명예욕과 영웅심 그리고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은 남의 헌신을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진심인 적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헐!!”

진정성에 기반한 타자화담론이 좌파의 분석 및 비판인가? 헤겔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이행한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아니었던가? 명료했던 레닌의 개념사용이 실존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벼룩시장에 나부기는 쓰레기가 된 지금 좌파의 분석과 비판은 어디에 와 있는가? 실체가 모호한 <Empire>에 대응하는 더욱 모호한 <Multitude>를 운운하고 있지 않는가? 공지영이 말한 "실체의 모호함"이 바로 이런 퇴보한 좌파의 분석 및 비판능력을 그대로 참조하고 있지 않는가?


<의자놀이>의 힘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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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와 비판 1

“비판하기 전에 그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놔봐!”

 

Argumentum ad personam: ‘새파란 것이, 분수를 알아야지. 먼저 뭔가 벌어봐.’

 

대인의 품위가 뿜어내는 후광을 추진력으로 하여 날아오는 비수.

 

공작가님! 이런 비수를 던질 수 없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쓩==33” 낮은 곳으로 임하시고 친히 천한 자들과 경쟁해 주심으로써 휘장을 찢어 일품 추종자들을 물리치고, 비판의 통로를 열어주심에 진정어린 마음을 들어 올려 감사의 제물로 드리는 바입니다. 이런 통로를 열어주신 당신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저들이 되지 않게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저를 아시는 것이 어디 감히 당신의 영광에 티끌만한 보탬이라도 될 수 있겠나이까만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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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our votre honneur, je suis convaincu que vous l’ignorez." (에밀 졸라, J'accuse)를 윤색함텍스트로 돌아가기

삼성전자 혈액암 환자를 여론화하는 독일 제2방송 ZDF

ZDF Frontal 21, 2012.8.14

 

http://www.zdf.de/ZDFmediathek/beitrag/video/1709184/Krebskranke-bei-Samsung#/beitrag/video/1709184/Krebskranke-bei-Samsung

 

연합뉴스 베를린 특파원 제대로 해라. 한국하고 관련된 것이면 허접한 것까지 다 보도하면서 삼성이 독일 제2공영방송에 얻어맞고 있는데 일언방구 없냐?

 

관련 기사 경향신문 201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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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2

<의자놀이>를 놓고 진행되는 의자놀이를 어디까지 마르크스 <자본론> 1권 마지막 부분 “이른 바 본원적 축적”에 기대어 해석할 수 있을까?

- “enclosure of commons”가 지적-문화적 공간에서도 진행된다.
- 지적-문화적 공간의 “식민지화”도 땅차지하기(Landnahme) 및 토지분할(Parzellierung)과 유사하게 진행된다.
- 똑같이 나눠주면 본원적 축적의 의미가 사라진다. 한곳으로 몰아주어 땅으로부터, 땅이 없는, 그래서 빌어먹을 수밖에 없는 “자유”가 필연이다.
- 역사적인 사실일 뿐이 배타적/독점소유를 역사 외의 혹은 이전의 사건으로 돌려 법규화하여 신성한 것으로, 손댈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 시민사회/자본주의하의 인간관계는 인격체간의 관계가 아니라 배타적/독점소유관계로 매개된 법규화된 관계다.
- 이런 법규화된 관계의 현상이 계약이다.
- 계약을 통해서 타자의 배타적/독점 소유물이 아니라 이와 관련된 타자의 약속 (사용허락, 양도 등등)을 취득한다. (칸트, 도덕형이상학, 1부,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시원, §20)
- 자유로운, 자유의지만을 갖는 자본주의하의 가상 주체(Subjekt)는 사회현실에서 깔아뭉개진 자(Subjekt)일 뿐이다.

- 이런 상황에서의 주체성고집은 법체계의 기능과 작동에 기댈 수밖에 없다.

- 이런 법체계를 파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진정성의 문제가 아니다. 대의의 문제도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공지영, 혹은 하종강의 인품을 논하거나 둘이서 잘 이야기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자본주의/시민사회의 의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보지 못하는 천진난만하고 낭만적인 생각이다. 그 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힘에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진정성, 진심, 헌신 등의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카테고리들이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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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단상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놓고 의자놀이가 진행 중인가?

모르것다.

아는 것은 단지 의자놀이는 계급의식이 없는 집단에 먹히는, 그리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노동자연대를 해체시키는데 사용되는 도구라는 점이다. 먹고 뱉어내는 자본의 행패를, 비 피해 가듯이 피해 갈 수 있는 찬스가 있다는 <룸펜 자유주의자>들에게 어울리는 놀이다. 우산을 준비할 수 있다고도 한다. 아니, 우산 몇 개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한다.


공지영이 재능기부 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메스껍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발현인가, 아니면 룸펜자유주의자의 의식이 깔려있는 발언인가?

계급, 계급의식? 고리타분한 말과 분석틀?

레닌의 계급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인 생산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대부분 법규로 고착되고 문서화된)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의 역할에 따라, 그리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임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가치의 다른 표현] 취득양식과 그 몫의 크기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인간의 대집단들을 계급들이라고 칭한다. 계급들은  규정된 사회적 경제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의 차이의 결과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인간집단들이다.” (레닌, 위대한 대안, 1920.4.11 신문  “공산주의적인 수보트닉”에 게재, http://www.erich-koehler-ddr.de/dokumente/initiative.html, 2012.8.16)  


계급의식?

레닌이 계급정의에서 말한 자리는 체화될 것이다. 뭉크의 그림 <길가는 노동자들>을 사유하는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노동자계급의 체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체험한 것이 모두 다 이 그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잠이 덜 깬 다리를 터벅터벅 힘겹게 옮기면서 공장을 향하는 길, 교대작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혼이 사라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업장에 꽉 묶인 상황, 그리고 이런 예속과 주는 일자리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제에 대한 증오, 다른 사람 좋은 일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노여움과 그 노여움을 참아 삼키는 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불안 등 내가 몸으로 느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림에는 끝없는 반복으로 마비된 정신과 몸의 고립이 있었다. 그 그림에는 쓰러뜨려진 자의 낙심이, 무능력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느낌이, 더없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썩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시에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것을 또한 모색하고 있었다. 이젠 말문이 막히고 기계의 단조로운 동작 안에서 분리된 개인들이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함께 하고 사용하지 못한 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길이었다. 그 힘은 아직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잠재하고 있었고 높은 담으로 장식된 쭉 뻗은 길을 가는 노동자대중의 대열을 걷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었다.”  (ou-topia)


계급의식은 계급이 자기 자리를 떠날 때 생기는 의식이다. 민족의식은 민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다. 생물학적인 것과 개별 인간의 카테고리에 근거한 의식은 자기의 존속을 주장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계급의식은 완전히 다르다. 계급의식은 계급을 부정한다. 자기 자리를 떠나면서 자기부정을 하는 운동이며, 그리하여 인간의 유적존재를 실현하는 유일무이한 휴머니스트 의식이다. 계급의식의 노동자는 “공지영으로서” 뭘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뭔가를 요구한다. 사회를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자부심에 근거한 요구다. 노동자는 기부금 수혜자가 아니다. 인간의 유적존재를 물질적으로 담보하는 계급이며, 만인을 위한 부를 요구하면서 “계급사회는 아니다”라는 부정운동을 하는, 계급투쟁을 하는 계급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근데 계급투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들이 많다. 아마 능력이 부족해서 계급투쟁의 서브텍스트를 읽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근데 가끔, 계급투쟁이 고리타분한 것이 된 현재 다시 민족, 종교, 개별 인간 등의 카테고리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야만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계급투쟁의 인간역사가 개시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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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 "창의력" 담론

언제부터인가 “창의력”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 없다. 공장단순노동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일을 하는 사무직임노동자들이 껀덕하면 “창의성” 운운한다. 모두 예술가 행세를 한다. 역겹다.

“창의력”이 혁신의 동력이고 가치생산의 주역이란다. “은행도둑질”(“Bankraub”/독일 시사주간 Spiegel, 2008.11.7) 주역의 한명인 블라이드 마스터스(Blythe Masters)의 “창의력”이 쓰레기(일명 CDS)를 가지고 엄청난 가치를 생산했단다.

베를린에 수두룩한 “디지털 보헴”은 지네들은 임노동을 하지 않고,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허세를 부린다. 자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없으면 전전긍긍하는 일일노동자 - 룸펜자유주의자!! - 들이 신자유주의의 대변인이 되어서 그 물결을 타고 서핑을 즐기다가 이젠 뭔가 보이는지 “우리에게도 사회복지를”하고 외친다. 무조건 기본소득을 열렬히 지지한다.

자연 소멸될 거품을 구태어 언급할 필요야 없겠지만 저들이 허세적인 “창의력” 담론에 앞장서서 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줄이는데 한몫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가만두고 지나갈 수 없다.

노동자의 노동 가치를 제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은 자본가들이다. 수천 번, 수만 번 반복되는 단순노동을 통해서 어떤 매뉴얼에도 찾아볼 수 없는 능력을 소유하고 품질을 담보하는 사람이 노동자다. 난노 크기를 가리는 손의 감각, 정확한 눈대중, 분자를 가리는 후각, 나사 조임의 상태를 알아내는 청각으로 변함없는 품질을 생산하고 있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를 위협했을 때 독일 제조업의 요구는 무엇이었던가? “줄기직원”(Stammbelegschaft)을 경영상 해고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달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왜 그랬나? 아무렇게나 대체될 수 있는 단순노동이라면 경영상의 어려움을 빌미로 해고하고 더 값싼 노동으로 대체할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사회복지제도의 재원으로 “단축노동프로그램”("Kurzarbeitergeld"/단축노동자수당)을 운영하여 제조업자가 직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던가?

창의력?

좆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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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식 교육이 좋다?

아이를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하는 부모를 두고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최소한 정상적인 학교에 보내고 싶을 것이다.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로 하자면 대안운동과 녹색당의 본거지에 속한다. 녹색당 후보가 독일에서 유일하게 직선된 선거구의 핵심지역이다. 이 선거구에선 지난 2002년 총선 이후 계속 녹색당 후보가 직선되고 있다. 진보적-좌파적 성향의 지역이다.


근데 이런 진보적-좌파적 주민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하나 있다. 아이들이 자라서 초등학교 보낼 때 발생하는 일이다. 크로이츠베르크 초등학교는 온통 외국인 자녀들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부모를 갖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어떤 녹색당원은 반에서 자기 아이만이 외국인이 아닌 초등학교를 고집하다가 결국 아이 때문에 중산층지역 빌머스도르프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런 기사도 검색된다. “99%가 이주자. 우리 3명이 우리 학교의 마지막 독일인이다.”) 그래도 크로이츠베르크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편법을 쓴다. 다른 지역에 거주신고를 하고 아이를 다른 지역에 보낸다.1

좋은 학교?


독일에는 일류학교가 없다고 한다. 특히 일류대학이 없어서 치열한 입시경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독일의 교육제도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잘나가는 시민계급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70년대 한국 교육제도가 더 좋다고 말하고 싶다.


(전통적인) 독일교육제도의 특징은 어린이를 조기에 (9-10살) 3등급으로 분리하여 교육을 시킨다는 점이다. 납세액에 따라 선거권을 3등급으로 구분한 프로이센의 3등급선거제도를 연상시키는 제도다.2

독일에서 고등학교 졸업률이 30%정도라면 한국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한국은 아마 100%에 가까울 것이다. 이 30%도 70년대 사민당/자민당 연정하의 교육개혁에 의해서 노동자가정의 자녀들에게도 고등학교와 대학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전의 상황을 보면 고등학교 졸업, 소위 아비투어는 극소수의 특권이었다. 19세기 중반에 김나지움-고등학교 졸업자는 1%미만이었다. 노동자는 학비 때문에도 고등학교는 엄두를 낼 수도 없었다. 요새 다시 유행하는 전원기숙학사 혹은 기숙사학교는 20세기 초 월학비가 노동자의 연 임금에 준한 것이었다. 김나지움-고등학교 졸업률은 100년이 지난 1960년대에도 단지 6%선상이었다3. 독일의 고등학교졸업은 클로즈드숍에 가깝다. 그래서 대학입시 경쟁이 없다. 클로즈드숍에 경쟁이 있을 리 없다.


독일에서 교육관련 좌우간의 논쟁은 3등급교육제도지지 혹은 폐지논쟁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한국과 같이 등급을 두지 않는 “통합학교”(Einheitsschule)를 만들자는 것이 좌파의 입장이고 전통적인 교육제도를 수구하는 쪽이 우파다. 우파의 슬로건은 개혁교육학이 이야기하는 창의력과 개별화다. 우파와 좌파의 입장이 절충된 것이 소위 “종합학교”(Gesamtschule)다. 3등급을 따로 따로 두지 않고 한 학교 내에 두어 3등급 간 유동성을 지향하는 모델이다.

좌파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돌봄과 무관하게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고 한다. 그래서 “하루종일학교”(Ganztagsschule)를 주장한다. 독일에서는 보통 이른 오후에 하교하고 교육의 상당부분이 가정에서 이루어지거나 가정에서 이루어진 교육을 토대로 하고 있다 . 그래서 부모가 돌보지 않을 경우 “주관적인 창의력”을 지향하는 독일의 전통교육제도에서 낙오되기 쉽다. 중산층이상의 아이들은 부모가 따로 크게 돌보지 않아도 밥상 등에서 부모의 교육친화적인 아비투스를 자연적으로 습득한다. 이런 가정을 두고 독어로 “bildungsnah"(교육이 바로 옆에 있는)라고 한다. 반면 ”교육이 먼“(bildungsfern) 가정의 자녀들은 학교교육에서 전제되는 이런 아비투스를 습득할 기회가 없다. 아이들을 다 온종일 돌보아 기회균등을 이루자는 것이 좌파가 지향하는 교육이다. ”좋은 부모“야 운명이겠지만 “좋은 교육”은 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offenes Lernen"(열린 학습)이란 ”과목“에서 ”주관적 창의력“으로 요약될 수 있는 독일교육의 현실의 살펴 볼 수 있다. 학습내용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자발적으로 주제를 선택하여 일정기간동안 혼자서 혹은 여럿이 주제를 다루고 발표하는 ”과목“이다. 가정에서 훈련된 토론능력, 고등교육을 받은 부모의 뒷받침 혹은 그런 분위기 등이 전제되는 “과목”이다. 열악한 사회적 상황에 처해있는 가정의 자녀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과목이다. 특히 이주자 가정의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과목이다. 근데 여기서 체화된 능력이 가면 갈수록 더 중요해진다. 김나지움 상급반에 가면 실기가, 즉 발표능력이 점수의 50%를 차지한다. 실기점수를 놓고 반에서 종종 열띤 논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능력에 따른 등급이고 능력 맞춤형 교육이라면 할 말이 없을 수도 있겠다. 근데 그게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특권층을 따로 양성하는 제도로 시작했고 그 잔재가 아직 남아있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김나지움에 진학하는 아이들의 출신을 보면 상류층 아이들이 훨씬 더 많다. 베를린 등 그래도 좌파적인 성향의 지역에서는 그 간격이 그리 크지 않다. 베를린의 경우. 상층 아이들이 김나지움-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하층 아이들보다 2.5배 높다. 바이에른 등의 지역은 그것이 6.1배 다.4 그리고 4학년말에 교사가 아이들의 진학 관련 권고를 하는데 이상하게도 상층 아이들은 점수가 낮아도 김나지움을 권장하고 하층 아이들은 점수가 훨씬 높아야 김나지움-고등학교를 권장한다.5 (썩을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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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www.pc-blog-berlin.de/in-kreuzberg-kommen-manche-linksgrune-mit-der-realitat-nicht-mehr-klar/텍스트로 돌아가기
  2. 프로이센 3등급선거제도(Dreiklassenwahlrecht): 납세액의 상권 1/3, 중권 1/3, 하권 1/3고 구분하여 선거 실시. 프로이센에 속했던 루르지역의 경우 철강업자 알프레드 크룹이 시의원의 1/3을 혼자서 결정. 사회수당 수혜자는 선거권 박탈, 선거권이 전혀 없는 지역도 있었음텍스트로 돌아가기
  3. http://www.bpb.de/apuz/30809/das-tor-zur-universitaet-abitur-im-wandel?p=all텍스트로 돌아가기
  4. http://www.chancen-spiegel.de/daten-und-fakten/relative-chancen-auf-den-gymnasialbesuch/indikator/59/indcat/6/indsubcat/0.html?no_cache=1텍스트로 돌아가기
  5. http://iglu.ifs-dortmund.de/assets/files/iglu/IGLU2006_Pressekonferenz_erweitert.pdf텍스트로 돌아가기

어린이를 뮈토스화하는 독일 개혁교육학 비판

1999.12.30 독일 일간 Frankfurter Rundschau에 실린 독일 교육학자 볼프강 카임(Wolfgang Keim)의 글이다.

원문


부유하고 인종적으로 건강한 어린이로부터 출발한 운동

개혁교육학 100년 - 결산 시도  

20세기 교육에 있어서 독일 개혁교육학처럼 지속적으로 거론되고, 동시에 그 의미에 있어서 그처럼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교육 주제는 없다. 독일 개혁교육학하면 많은 사람들이 곧바로 발도르프-학교, 몬테소리-학교, 페터-페터젠-학교, 혹은 전원기숙학사 등을 연상한다. 보다 엄밀한 과학적인 의미로서의 개혁교육학은 20세기 1/3분기에 발생하여 - 나치체제와 구동독시 부분적으로 중단되었다가 - 오늘날까지 맥을 이어오고 있는 이른바 “운동”의 양상을 띤 다양한 교육개혁노력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개혁교육학의 핵심적인 특징은 모든 권위적인, 교육자 혹은 교육내용으로부터 구상된 교육에 대립하는 것이었고, 그런 교육대신 어린이와 청소년의 요구에 방향이 잡혀진 교육이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자발성, 자립성, 개성화가 교육목적으로 제시되었고, 뿐만 아니라 “공동체교육”에 대한 구상이 이야기되었고, 특히 총체성, 창의력 개발, 그리고 [직접적인 자기]경험을 지향하는 새로운 학습개념이 제시되었다. 이런 의미로서의 개혁교육학은 당시의 교육관련 토론에서뿐만 아니라 정규학교에서도, 오늘날까지 장기적인 효과를 보이는, 고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독일 개혁교육학은 동시에 그 기원부터 문제투성이인 유산이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진보적인 교육구상에 반계몽적인, 반민주적인, 그리고 부분적으로 심지어 인종차별적인 사유형식과 실천이 뚜렷하게 접목되어 있고 -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 비민주적인 학교구조는 그대로 두었기 때문에, 아니 대려 [독일교육제도의] 배타적인 요소를 더욱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 개혁교육학 일부는, 최소한 일시적으로, 나치의 관용을 받을 수 있었고, 개혁교육학의 대표적인 인물들은 나치시대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45년 이후에는 그들 구상에 따른 학교모델들을 계속 운영하거나 새로 설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연명한 개혁교육학이 다가 아니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 리버럴하고 민주-사회주의적인 바탕에 기초한 개혁교육학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교육학은 단지 1919년과 1933년 사이의 14년 동안에만 [활기차게] 진행될 수 있었다.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거의 다 때려 부셔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주의적 개혁교육학은 1945년 이후에도 대부분 독일에서 축출된 상황이었다. 서독의 경우 교육학과 아동교육학까지도 가만 놔두지 않은 복고적인 [사회]발전 때문이었고 동독의 경우 -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던 잠깐의 기간의 지나고 나서 - 모든 개혁교육학의 종말, 결국 “좌파적인” 개혁교육학까지의 종말로 이어지는 40년대 후반기부터 들어서는 스탈린화 때문이었다. 학생운동, 그리고 부분적으로 대안운동이 비로서 개혁교육학을 재발견했다. 70년대의 대안운동은 통틀어 일종의 (역사적인) 20세기 1/3분기 개혁교육학의 연속으로 간주될 수 있다. [...]

 


그러나 [까놓고 말하자면] 새롭게 일어난 개혁교육학에 대한 관심의 동기에 정말 의심이 갈 때가 종종 있다. 예컨대 자기 자식들을 보다 좋은 학교에 보내고자 하는 부모의 소원이 독일 기본법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기회균등이라는 원칙에 반하는 것처럼 말이다. 뿐만 아니라 앞에서 문제투성이라고 평했던 역사적인 개혁교육학의 과오를 [버리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떠맡고 있다. 그리하여 세기의 전환을 적절한 기회로 삼아 개혁교육학의 발생, 발전, 그리고 재개를 살펴보려고 한다. [...]

 


문제투성이의 발단


엘렌 케이의 “어린이의 세기”는 20세기 초 개혁교육학의 토론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행사한 책이었음이 틀림없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100년 전에 스웨덴에서 발간되고 2년 후 독어번역판이 발간된 이 책은 1905년 2만 6천 본이 발간된 상황이었고 당시 가장 많이 읽혀진, 최소한 공공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으로 기록되고 있다. 책제목이 외치는 메시지에 대한 관심은 1890년대 이후 시민계급 내에서 이미 장기간 준비된 것이었다. 엘렌 케이의 저서와 유사한 기본경향을 갖는 광범위한 문헌을 통해서, 의학, 심리학, 그리고 복지후생사업 등의 분야에서 동기간에 진행된 어린이의 특수한 욕구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여기에 추가적으로 어린이에게 적합한 것 주기와 다루기에 대한 집약적인 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특히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이 진학할 수 없었던] 바로 김나지움의 교육내용과 방식과 김나지움의 청소년에 대한 과대한 요구를 염두한 학교비판을 통해서 준비된 것이었다.  엘렌 케이의 자못 엄숙한 “어린이의 위엄”, “어린이적인 삶을 온통, 흠뻑 향유할 수 있는 인격체”로서의 권리 강조, 교육은 “어린이의 본성”을 따라야 하고 어린이 “특유의 본질”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 등이 이런 경향을 하나로 묶어내고 수사학적으로 효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엘렌 케이의 영향이 지배적이었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난 후에 비로소 “어린이로부터의 운동”으로 표기된 개혁교육학파는 논증패턴에 있어서 루소, 페스탈로치, 프뢰벨, 다시 말해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교육학자에 기대고 있으나 그 요구에 있어서는 동시에 완전히 달라진 사회적인 콘텍스트, 즉 첨예한 대립을 빗는 계급구조와 그에 따른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불평등과 성적 불평등을 동반하는, 생성단계에 접어든, 현대적인 산업사회를 대향하고 있다. 사회의 주문이 학교를 통해서 어린이에게 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관점에서 어린이적인 욕구로 관점을 전환함으로써 이 개혁교육학파는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시민계급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가족에서 계속 지배적이었던 어린이, 어린이[적]존재, 그리고 어린이교육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19세기 3/3분기에 진행된 학교제도의 현대화와 확충, 분화, 관료화, 그리고 법화에서 있어서도 급진적인 이의를 제기한다.

 


엘렌 케이는 교육학의 대부분에, 최소한 독일의 그것에, 결정적인 교육이념을 주조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교육이념에 기초한 “꿈꿔본” - 개혁교육학을 지향하는 - 학교의 윤곽을 개발했다. 학교는 종합학교가 되어야 하고, 자발성과 마음과 머리와 손을 통한 학습의 총체성 원칙에 기초해야 하고, 의무수업은 필수적인 범위로 줄이고, 대신 선택자유를 통해서 학습의 개별화 공간을 제공해야 하며, 특히 성적표와 상장수여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엘렌 케이는 대부분의 당시 독일개혁교육학자에 비해서, 9세에서 15/16세 사이 모든 사회계급의 어린이들이 진학할 수 있는 남녀공학 종합학교를 지지했던 것이 보여주듯이, 사회정치적으로 명백하게 진보적인 여성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노동자운동뿐만 아니라 여성운동을 동조했고, 명백하게 평화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허나 그녀는 독일개혁교육학의 문헌에서도 널리 퍼진 어린의의 낭만화와 어린이를 모든 사회적 현실의 저편에 있는 일종의 뮈토스로 양식화하는 것에 묶여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어린이의 세기란 변론은 잘나가는 시민계급의 어린이에나 어울리는 변론은 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의 어린이를 위한 것이 되기엔 희박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개혁교육학자와 마찬가지로 시민계급 출신으로 그 환경을 누린 엘렌 케이는 프롤레타리아트 어린이의 실재적인 삶의 조건을 자기경험을 통한 직관으로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외에 그녀의 문헌에서 후에 대부분의 개혁교육학의 특징이 된 “자라게 나둠”("Wachsenlassen")과 “당겨주기”("Erziehung")를 성찰적 교육에1 비해 과다하게 강조하는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와 정치를 거의 다 배제하는 이런 경향을 하인쯔-요아힘 하이도른(Heinz-Joachim Heydorn)은 30년 전에 이미 그의 저서  “교육과 지배의 모순에 관하여”에서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 “어린이의 창의력적인 본성의 해방과 함께 인간이 해방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도전은 경직된 것, 책과 [모양새를 다듬는] 형식의 학교를 겨냥하고 있지만, 그 밑바닥을 보면 말라 비틀어 죽어 떨어져 나가는 것, 즉 가식적-야만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모든 의식화 및 그 자체를, 모든 빛을 겨냥하고 있다. 어린이의 요술적인 세계, 인간이 자기역사로 들어가지 전의 상태를 보여주고, 그를 거기에 묵어두려는 어렴풋한 세계(vorbewusste Welt)를 생산적인 의식에 대립시킨다.


그러나 더욱 치명적인 것은 엘렌 케이가 선전하는 “치유 불가능하게 병들고 기형적인 어린이”의 안락사를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인종위생학적인 바탕에 기반한 “새로운 윤리”다: “아직  - 사형과 전쟁을 고수하는 - 사회에서 [쓸모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 [쓸모없는] 생명이 꺼지는 것을 위험 없이 허용할 수 없다. 오로지 자비만이 죽음을 갖다 줄때 비로소 미래의 인간성이, 의사가 통제와 책임 하에 아무런 고통 없이 이런 생명을 제거하는 상황에서 나타날 것이다.”  스웨덴 작가의 이런 변론은 당시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광범위하게 합의 가능한 것이었고 독일에서는 비교할 수 없이 비옥한 땅에  떨어졌고, 1933년 이후 처음엔 어린이안락사에서, 나중엔 성인안락사까지 무자비하게 현실화되었다. 그리고 죽이는 절차는 “고통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고 심지어 심한 고통과 죽음의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엘렌 케이의 [인간]사육 공상도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 그녀의 “어린이의 세기”는 근본적인 접근에 있어서 인종위생학적인 담론, 즉 “우위적인 인간 타입”을 사육하는 사업으로 독해되어야 한다. 이런 사업을 현실화하는 일환으로 “남자와 여성”이 한 쌍이 되는데 있어서 [인종위생학적 차원의] 목적의식적인 분별을 권장하고 있다. 이것도 역시 당시 진보적으로 간주되었던 교육학계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거라고 내다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개혁교육학의 과학적인 해석자로 분명 가장 많이 알려진 헤르만 놀(Herman Nohl)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해에 이미 괴팅엔에서 “민족적인 교육의 바탕”이란 강의를 했다. 여기서 인종위생이, 광범위한 결론으로 이어지는 엘렌 케이에서 그러듯이, 핵심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다.  놀의 1933/34년 겨울학기 강의원고가 얼마 전에야 비로소 뮌스터대학의 교육학자 하스코 찜머(Hasko Zimmer)에 의해서 “캐내어”졌다는 것과 교육학과가 이제야 비로소, 진솔하게 말해서 홀로코스트가 지난 지 반세기가 넘은 오늘날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신성불가침적인 위력을 자랑했던 개혁교육학이 얼마나 문제투성이인 혼합물인지 점차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개혁교육학의 사유가 많은 세대의 교육학자들의 의식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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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자주: "reflexive Bildung" 여기서 “reflexiv"의 의미에 주목하고 싶다. 반성철학의 자기 배꼽보기가 아니라 헤겔적 의미로서의 반성이라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칸트의 인식의 영역으로 제한된 'transzendental" 프로젝트를 의식, 존재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헤겔의 프로젝트를 더욱 확장한 사람이 마르크스라 할 수 있고. 이런 맥락에서 반성은 여기서 자기존재를 규정하는 사회적 토대에 대한 성찰이고 궁극적으로 계급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텍스트로 돌아가기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제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푸우님의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제도] 에 관련된 글.

 


1. 어린아이가 성폭행당하고 살해될 때 여론화되고 관련법이 만들어 진다.

2. 어린아이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죄자는 “영원히 가둬버리자!”가 압도적인 여론이 아닌가 한다. 7살 배기 자기 딸을 살해한 범죄자를 법정에서 쏴 죽인 마리안네 바흐마이어(Marianne Bachmeier)에게 잘했다고 할 사람이 많다.

3.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제도는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미성년자] 성범죄자는 "Freiwild"(사냥해도 되는) 야생동물인가?
- 시민이 조심해야 하나?
- 시민이 파수꾼이 되어야 하나?
- 규범적인 틀 안에서 행동해야 하는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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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의 시 "Lied Vom Kindsein" 번역- 수정 1

[영원한] 아이의 노래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팔을 덜렁거리며 돌아다녔다.

[웅덩이를 보면 물고를 틀어 물이 흐르게 하고] 

그 도랑물이 강이 되고

그 강이 대하가 되고

바로 그 웅덩이가 바다가 되는 욕망의 세계에서 살았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자기가 아이라는 걸  몰랐다.

아이에겐 모든 게 살아 숨 쉬는 것이었고

살아 숨 쉬는 것은 모두 하나였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그 어느 것에도 굳어진 생각이 없었고

몸에 베인 행동이 없었다.

종종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가

뜬금없이 뛰기도 했고 

  머리엔 가마가 그대로 보였고

사진 찍을 때 딴 얼굴이 되지 않았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그때 아이는 이런 것들이 헷갈렸다.

왜 나는 나지, 왜 네가 아니지?

왜 나는 여기에 있지, 왜 저기에 있지 않지?

언제 시간이 시작했지? 어디에 공간의 끝이 있지?

대낮에 뛰노는 것과 꿈꾸는 것이 어떻게 다르지?

내가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것이  

단지 세계 앞 세계의 가상일뿐이 아닐까?

악이 있고 정말 악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사실일까?

어떻게 지금 이렇게 있는 내가

이렇게 되지 전에는 있지 않았다는 것과

이렇게 있는 내가 언젠가

더 이상 이렇게 있지 않게 된다는 게 가능하지?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시금치가, 완두콩이, 우유쌀죽이,

데친 콜리플라워가 밥상에 올라오면 입을 봉했다.

이젠 이런 모든 걸 먹는다. 챙겨 먹기도 한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언젠가 낯선 침대에서 깨어났다.

이젠 그게 반복된다.  

그땐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였지만 

이젠 운이 좋아야만 그렇다.

그땐 천국을 분명하게 그릴 수 있었다

이젠 잘해봐야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다. 

그 땐 無를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無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신바람이 나게 놀았다.

이젠, 그때와 같이 뭔가에 푹  빠지는 경우는, 겨우

하는 일이 밥벌이일 경우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양식은 사과와 빵으로 충분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가 펼친 손에 산열매들이 산열매들만의 촉감으로 떨어졌다. 

그 촉감이 아직 손에 남아있다.

싱싱한 호도를 잔뜩 먹고 혀가 떨떠름해졌다.  

그 떨떠름함이 아직 혀에 남아있다.

아이는 어떤 산에 오르더라도

그 다음으로 높은 산을 동경했고

어떤 도시에 가더라도

더 큰 도시를 동경했다
그 동경은 여전하다.

나무 꼭대기 올라가 팔을 뻗어 버찌를 딸 때의 짜릿한 느낌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항상 수줍어했다

수줍음은 여전하다. 

첫눈을 기다렸다

여전히 그때처럼 첫눈을 기다린다.
 
내 안에 있는 아이가 온통 아이였을 때

  아이는 막대기 하나를 창 삼아 선악과나무에1 던졌다 

그 창이, [내 마음 안2] 그 자리에서, 오늘도 파르르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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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n Baum"을 이렇게 번역했다. 여기서 나무는 정관사가 사용된바 앞에서 언급된 나무를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독자의 세계지식을 참조한다. 앞에서 언급된 나무는 버찌나무일 뿐인데 맥락상 버찌나무가 참조의 대상이 아니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2. "da"는 바깥세계의 "저기"라기보다는 심적으로 다다를 수 있는 "저기"라는 의미임을 이렇게 번역함.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