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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

[§1]

[한 마음 한 뜻으로 {대상}을 향하고 그것을 온통 감싸려는] 직접적 확신은 [자기가 하는 일의 결과가 실지로 진정 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망태에] 담긴 것을 놓고 [그건] 자기가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 [망태에] 담긴 것은 항상 보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그 마음과 뜻이 지향하는]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취하려고 욕망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각은 [{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안으로 기어들어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각은 [감각적 확신 혹은 마음과 달리] 온통 보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직접적 확신과 달리 한 마음 한 뜻을 품을 수가 없고 그 마음이 갈라져 있으며] [이런 갈라짐은] 지각 안에서 바로 [나타나고], 이런 [원시적인] 구별[갈라짐]의 양대 축 역시 항상 보편적인 것이 된다. 즉 <나>라는 것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자아이며 <나>가 마주하는 대상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대상인 것이다.

 

 

일러두기

 

- 직접적 확신의 [바깥] 대상과 지각의 [내재적] 대상을 구별하기 위하여 직접적 확신의 대상은 {대상}으로 표기함.

- 강조는 역자

 

참조

http://blog.jinbo.net/ou_topia/181

http://blog.jinbo.net/ou_topia/267

http://blog.jinbo.net/ou_topia/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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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 누추한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는 환영

누추한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는 환영

 

들어 와, 내 손님이 되어줘! 네가 찾아오면 항상 그랬듯이  

오늘도 고독에 쌓여 있어, 알잖아, 이젠 난 너없이 못살아.

 

아니 엘리제, 너였어?! 이 사람아, 어떻게 된거야!

얼마만이야? 너랑 나란히 앉아서

마지막으로 소근거렸던 적이! 알아?

그간 난 고독에 익숙해져 버렸어.

그때 처럼 소근거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들어봐.

 

생각나? 아직 기억해, 엘리제?

해는 숲에 걸린체 서서히 식어가고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던 초원을?

 

웅장한 배나무 한 그루가

얼싸안은 너와 나의 흥분을 하늘도 모르게 덮어주고 있었고, 멀리서

때 이른 별 하나만이 산 위로 떠 오르고 있었지.

주제넘은 산들바람이

살며시 덤불 속에서 일어나

웃었던 걸,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렸던 걸

기억해?

 

정말, 달콤한 시간이었다.

세상은 온통 장미빛으로 쌓여 있었고

넌 더없이 사랑스러웠지.

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슬그머니 찾아오는 도둑처럼

날 찾와와 입술과 애무로 덮쳤지.

넌 정말 사랑스러웠어.

 

근데 왜 왔어? 너의 금발머리 향기를 잊을 수 없는 날 왜 떠났어? 말해봐!

그날, 그 뜨거웠던 여름날,

내가 열정으로 달아오른 야수처럼 널 찾아 다닐 때

귀를 기울이다 지쳐 너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헤맬때

넌 어디로 훌쩍 가버린거야?

 

지금 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내 곁에 앉아서

내 마음을 녹이고

내 마음이 노래로 가득차게 만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내게 안기고 있다.

옛날 배나무 밑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것 또한 그저 환영일 뿐이었었던가?

 

 

 

Ein Traum pocht an die Pforte mir

 

Tritt ein, mein Gast! Ich bin allein

Wie jedes Mal, und bin bedürftig dein.

 

–Du?! Du Elise? –Grüß dich, Kind!

Wie lang, daß wir zur Plauderzeit

Nicht mehr beisammen gewesen sind!

Ich ward gewohnt der Einsamkeit;

Laß sehn, ob ich noch plaudern kann–

Hör an!

 

Weißt du, weißt du noch, Elise?

Verglimmend hing die Sonne noch am Wald,

kein Mensch auf der Wiese!

 

Ein Birnbaum breit und wohlgestalt

Verbarg dem Himmel unsere Lust. Nur fern

Vom Berge klomm empor ein früher Stern.

Ein naseweiser Abendwind

Verstohlen aus der Hecke kroch

Und lachte, lachte wie ein Kind.

Weißt du noch?

 

Ja, das war eine Flitterzeit,

Alle Welt in Rosen!

Du warst so lieb,

Und kamst zur Nachts- und Tageszeit

Über mich mit Kuß und Kosen,

Hinterrücks wie ein Dieb

–Du Warst so lieb!

 

Und nun, mein Blondchen, sag!

An jenem heißen Sommertag

–Ich suchte dich mit wildem Sinn

Und lauschte lang und rief nach dir-

Wo warst du hin?

 

Nun sitzest du wie sonst bei mir

Und machst das Herz mir weich

Und liederreich,

Und siehst mich an und schmeichelst mir

Wie damals unterm Birnenbaum…

 

War das auch nur – ein Tr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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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자기형태'(Gestalt des Selbsts)

기독교는부활의 종교라고 한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헛 될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한다(고전15장14절).

 

무슨 말일까?

 

우선, 기독교는 죽음을 믿는 종교라는 것에서 시작해 보자.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데 종교는 죽음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든 저승이 있어서 계속 살게 된다고들 한다. 최소한 죽지 않는 뭔가가 있다고들 한다. 근데 기독교는 여지없이 통째로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

 

근데 이렇게 통째로 죽는데 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부활을 믿지 않는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는 질문에서 부활에 대한 상상을 일면 접할 수있다. 일곱형제가 차례로 같은 여자를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들이 부활할 때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질문에서 부활은 생의 일부가 아니라 생전체의 부활이라는 상상을 엿볼 수 있다. 질문의 요는 서로 모순을 빗는 성질이 어떻게 한 몸에 있을 수 있냐는 말이다(마가12장18절이하).

 

비슷한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서도 거론된 모양이다(고전15장). 몸의 부활(carnis resurrectio/살의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가가 문제가 된 모양이다. 사도바울은 자연을 본보기로 들어, 씨의 예를 들어 몸의 부활을 설명한다.

 

핵심구절은 고전 15장 38절인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되,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ὁ δὲ θεὸς δίδωσιν αὐτῷ σῶμα καθὼς ἠθέλησεν, καὶ ἑκάστῳ τῶν σπερμάτων ἴδιον σῶμα.)

 

부활한 몸은 다 다르다는 말인가? 거기엔 종과 유의 구별이 없다는 말인가? 헤겔이 말한 각 내용이 고유의 자기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인가? 부활한 몸은 한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담아내는 문학과 같은 것인가? 부활한 몸은 살아있는 문학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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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번역에 다시 착수하면서

정신현상학을 번역한답시고 불로그를 만들어 놓고 한참 동안 딴 짓(?)만 했다. 뭔가 콱 막히면 더 파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계속해야/해서 끝을 봐야 하는데’라고 생각만 할 뿐  한던 일을 방치해 둔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근데 하두 오래동안 방치해 두어서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 부터 다시 시작하지?

 

먼저 왜 정신현상학이지라는 질문을 지침삼아 지금까지 이해한 것을 한번 정리해 보자. 어쩌면 정신현상학 입문 같은 것이 되겠다. 철학에는 ‘어쩌구저쩌구 입문’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사태에 직접 도전하여 사태의 운동을 따라 잡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도 마찬가지로 문장 하나 하나를 놓고 씨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몸싸움 후 어렴풋하게 총체적으로 잡히는 것이 있는데 이런 걸 정리해 놓은 것이 입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입문은 나중에 읽어보는 것이 더 좋겠다. 물론 ‘close reading’과 ‘입문’ 간에는 다시 변증법적인 긴장이 있겠지만.      

 

정신현상학 서론 일부에 따라 정신현상학을 최소한 인식론 비판이라고 하자. 헤겔은 당시 인식론 밑바닥에 깔려있는 전제를 인식(das Erkennen)과 대상(헤겔의 용어로는das Absolute)간에 이 둘을 어떤 경우에도(schlechthin) 따로 갈라놓는(scheidend) 분단선(Grenze)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회의주의적인 인식론을 비판하는 헤겔의 근본 입장은 이와 상반되게 대상(das Absolute)이 ‘완전 무결하게’(an und für sich)이미 우리 곁에 와 있고 또 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하 헤겔은 인식과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 현상을 사례로 들면서 회의주의적 인식론을 비판하고 ‘안 그래’ 혹은 ‘그게 다가 아니야’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헤겔은 이 길을 택하지 않고 이른바 ‘내재적 비판’이라는 길을 택했다.

 

정신현상학은 회의주의적 인식론과 함께 인식과 대상간의 분리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른바 ‘직접적 확신’이라는 현상에서 인식과 대상간의 분단이 엄연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서로 뭉크러져 있는 ‘Dieses’와 ‘Dieser’의 이면에는 이미 보편적인 ‘나’와 보편적인 ‘그것’간의 분단이 존재하고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동물적인 상태로 떨어지려고 하는 것이라고 야유한다.

 

근데 문제는 이런 분단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런 분단하에서는 인식이 끝이 안보이는 자기모순에 빠져서 뒤죽박죽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지각의 발버둥에서 보여준다. 이 발버둥을 완전히 소화하고 매끈하게 번역하는게 어렵다.

 

‘지각’ 번역에 다시 착수하기 전에 ‘직접적 확신’과 관련해서 몇마디 하고 넘어가겠다.

 

헤겔이 이야기하는 ‘직접적 확신’은 ‘직접적 확신’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따라 잡지 못한다는 느낌을, 즉 규정미달(under-determined)이라는 느낌을 준다. 최소한 그 동기를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의 구조에서, 특히 병적인 욕망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직접적 확신’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녀’를 향하는 내 성적 욕구의 구조는 헤겔이 말하는 것과 반대인 것 같다. 건강하지 못한(?) 병적인 성욕은, 혹은 사랑은 ‘그녀’를 취하려고 하지만 ‘그녀’를 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그녀’를 취하면서 무의식으로 혹은 기억속으로 침강한 그때 ‘그녀’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헤겔이 서론에서 말하는 의식의 ‘기억’은 의식과 대상이 돌이킬 수 없게 분단되었다는 것이지만 욕망의 기억은 그 반대인 것 같다. 나와 ‘그녀’가 한때 하나였으며 그때 내가 정말 내 자신이었다는 확신이 아닌가 한다. 이런 확신이 현실화되어야 치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정신현상학 마지막 장 ‘절대지’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전개되지 않은 내용의 첫 상태에서 이미] (an sich) 확신과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전개된 현상을 보더라도]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의 형태를 띤다. … 이런 일치는 내용이 자기형태를 부여받았다는 데 있다.” (Die Wahrheit ist nicht nur an sich vollkommen der Gewißheit gleich, sondern hat auch die Gestalt der Gewißheit seiner selbst … Diese Gleichheit aber ist darin, daß der Inhalt die Gestalt des Selbsts erhal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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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니체

번역물. – 한 시대에 깔려있는 역사 감각의 정도는 그 시대가 어떻게 번역 작업을 하고 지나간 시대와 저서들을 자기것으로 만드려고 시도하는지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꼬르네이유부터 시작해서 혁명 프랑스에 이르기까지, 로마 고전을 – 우리들은 이제 향상된 역사 감각 때문에 더 이상 엄두도 못낼 – 방법으로 취했다. 그리고 고대 로마 그들은 어떠했던가. 얼마나 폭력적이면서 동시에 천진난만하게 고대 그리스의 모든 우수한 것과 고귀한 것에 손찌검을 했던가! 고대 그리스를 로마의 현재로 번역한 것은 어떠했던가!  의도적으로 그리고 거침없이 나비 날개짓에 일어나는 한순간의 꽃가루를 뭉개버린 것은 어떠했던가!  그런 식으로 호라티우스가 여기 저기서 알카이오스를 혹은 아르키로호스를, 그런 식으로 프로페르티우스가 칼리마호스와 필레아타스(우리에게 평이 허용된다면, 테오크리트와 같은 등급인 시인)을 번역했다. 본래 창조자가 이것저것을 체험하고 그 표징을 자신의 시에 쏟아부었다는 것에 그들은 아랑곳했던가?  – 시인이었지만 그들은 역사 감각에 앞서가는 고서점 주인의 옛것을 찾아내려는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인이었지만 그들은 이런 온통 개인 특유의 사물과 이름, 그리고 한 도시의, 한 해변의, 한 세기의 고유한 차림새와 인상을 가볍게 생각하고, 서슴없이 현재적인 것과 로마적인 것으로 대체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옛것을 우리에게 맞춰 새롭게 만들어 우리가 그 안에 편안하면 안되나? 우리가 우리의 혼을 이런 죽은 몸에 불어넣어서는 안되나? 어쨌거나 죽은 것은 확실하고 죽은 것은 다 혐오스러운 것이 아닌가?“ – 그들은 역사 감각이 주는 맛과 즐거움이 뭔지 몰랐다. 지나간 것과 낯설은 것은 그들에게 단지 당황스러운 것이었고, 로마인인 그들에게 로마식 정복을 자극할 뿐이었다. 정말, 당시 번역은 정복이었다. 역사적인 것을 제거한 것 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현재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을 첨부하고, 무엇보다도 본래 시인의 이름을 제거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대체했다. 도둑질한다는 마음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자아상과 딱 맞아 떨어지는 전혀 죄책감없는 양심으로.  

 

(니체, 즐거운 학문, 2부,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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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신나치의 정치세력화 현황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슈피겔, 2013.1.14, 3호)

 

NPD가 구동독지역의 기초단체에 진출한 현황이다. 득표율이 24% 이상인 지역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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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신나치 지하조직 ‘민족사회주의 지하동맹’(NSU/Nationalsozialistischer Untergrund)과 ‘물밑국가’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1998년에 잠복한 이후2011년까지 8명의 터키인과1명의 그리스인 그리고 경찰관 한 명 등 총10명을 살해한 독일 신나치 지하조직NSU를 지지한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독일 정보기관이 파악한 인원은129명. 단지 구성원3명으로14년 동안 독자적으로 지하활동을 했을리 없다.

 

NSU의 전모가 드러난 것은 수사결과가 아니라 우연이었다. 독일정보기관은NSU주변까지 비밀요원을 확보한 상황이었지만 수사는NSU의 신나치 연쇄살인 및 폭탄테러사건이 터기 범죄조직의 만행이라는 단정아래 어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결과, 심지어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수사의 대상이 되어 다시 한번 희생양이 되었다.

 

독일정부는 독일 정보기관이 비밀요원을 통해서 신나치 세력을 양성하고 NSU 주변까지 손이 다다랐다는 의문이 제기된 후 사태 수습에 나섰다. 연반하원에서는 유가족을 위로하는 추모식이 열렸고, NSU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정보기관과NSU간의 관계를 조명하기에 나섰다.

 

무엇이 조사의 대상인가?

 

한마디로 독일 내 “물밑국가”의 존재여부다.

 

독일에 민주주의가  뒤늦게 정착한 이유 중 하나는 “국가 내 국가”(Staat im Staate)였다.  민주주의의 투명한 공론장과 따로 노는 집단을 일컫는 표현이다.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의 군부를 일컫는 표현이다.

 

그런데 독일정보기관이 왜NSU테러집단을 적발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국가 내 국가”와 유사한 표현이 등장했다. 바로 “물밑국가”(Tiefer Staat/깊은 국가)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터기에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터기의 보안기관, 법계, 정계, 그리고 행정 및 지하범죄조직과의 연계를 일컽는 “derin devlet”를 번역한 것이다.

 

바로이표현을터키계바덴뷔르템베르크주사회통합장관 빌카이외네이(Bilkay Öney)가 사용함으로써 논쟁이 불거졌다. 2011.11.17 „베를린튀르크“(Berlintürk) 인터넷 판에 실린 글에서 „’물밑국가’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물밑국가’를 이야기하는 국가는 없다. 터키에서는 ‚물밑국가’가 밝혀지고 있다. 2000년 이후 자행된 연쇄살인은 해명되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통독 이후 182명이 인종차별주의에 의해서 죽게되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정계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발언정정을 요구하고 나섰고, 언론은 좌우를 막론하고 ‚그럴리 없어’했다.

 

그러나NSU조사위원회가 청문회를 통해 얻은 일련의 결과를 놓고 볼때 NSU 사태를 „당국의 과실“이라고 일축하고 독일 내 „물밑국가“의 존재여부를 묵인할 수 만은 없는 상황이다.

 

물론, 독일에 한국의 과거 „하나회“나 터키의 „에르게네콘“과 같은 조직적인 구조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보안 및 치안 당국 내에 극우 범죄를  바가텔로 취급하는 풍토가 팽배하다는 것과 정보기관이 연방하원의 조사위원회가 요구한 자료를 사전에 제거하거나 제출하지 않은 것은 확인되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극우 범죄가 크게 처벌이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적 풍토다. 얼마전 극우가 뿌리를 내린 구동독 남쪽지역에 관한 다큐가 있었다. 극우의 위협을 받는 좌편향 청년 커플에게 경찰이 그랬단다. 우리가 니네들 신변을 보장할 수 없으니까 다른 도시로 이사가라고.

 

한국 정보기관의 막대한 권한과 한국에 양성된 극우를 볼때 결코 남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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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g Fidel 초등학교

세상은 분명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일들로 유지될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인식의 초점과 보편적인 조명에서 배제되기 때문에 아마 모르고 그냥 스쳐 지나갈 뿐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종종 조명되는 경우가 있다.

어제 독일 제2 공영방송 ZDF “Heute Journal”(오늘 저널)에 “Berg Fidel - Eine Schule für alle” (베르크 피델 [재밌는 산 혹은 모든 소리가 나는 몸체라는 의미가 스며있고, 신약의 만인을 위한 산상설교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 모든 [어린]이를 위한 [초등]학교)란 영화가 소개되었다.

헬라 벤더스(Hella Wenders, 독일 영화감독 빔 벤더스의 조카)가 독일 뮌스터에 있는 ‘사회포함’ “베르크-피델 초등학교”의 초등학생 4명을 3년 동안 집중 취재하여 제작한 저저저예산 다큐멘터리다. 2만 5천의 관람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9월 13일에 개봉되었다.

 



베르크 피델 [초등]학교
는 어떤 어린이든 다 받는다. 독일의 경우 일반 초등학교가 특히 다운 증후군 같은 장애자 어린이들을 잘 안 받아줘서 “특수학교”(sonderschule - 지금은 ‘특수학교’라 하지 않고 “Förderschule”(추가 뒷받침을 해주는 장려학교)라고 부른다.)에 입학하는 경향이다. ‘사회포함’ 이론이 비판하는 학교형식 및 제도다. 베르크 피델 [초등]학생들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나이와 학년을 초월해서 구성된 반에서 서로 돕고 자율적으로 학습하고 매주 소집되는 “반평의회”(Klassenrat)에서 반의 제반문제를 토의하고 갈등문제 등을 스스로 해결한다. 이 “반평의회”는 2002년 “독일 초등학교 연합”의 “민주주의 상”을 받았다. 이 학교의 비전은 현재의 초등학교과정(1학년부터 4학년까지)을 넘어 독일의 ‘3계급으로 구분된’ 학교를 폐지하고 1학년부터 13년까지 모든 이를 포함하는 학교로 발전하는데 있다.

 


영화의 주인공 4명은 다비드(David), 다비드의 동생 야콥(Jakob), 아니타(Anita), 그리고 루카스(Lucas)다.

다비드는 천재적인 어린이다. 삼척동자가 어른을 방불케 하는 언어구사로 예전엔(!!) 공룡에 관심이 많았는데 요즘엔 천문학에 관심이 간다고 한다. 그러나 다비드도 역시 신체장애자다. 유전자결함으로 보고 듣는데 지장이 있다. 다비드의 동생 야콥은 장난꾸러기다. 항상 반의 분위기가 웃음이 넘치게 한다. 야콥은 다운 중후군 어린이다. 아니타는 코소보에서 피난한 어린이다. 나중에 톱모델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집에서 남동생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한다. 루카스는 읽고 쓰는데 약하다. 학교에서 뭐가 잴 재밌냐는 질문에 휴식시간과 체육이라고 대답한다.

이 4명의 어린이가 4학년을 마치고 각각 다른 학교로 진학한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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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테제" - 4

II.

 

루카치가 레닌에 기대어 상술했듯이, 계급의식은 경험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라는 사변적인 성찰은 계급의식의 카테고리적인 짜임/구성Verfassung에 대한 부족한 성찰이었다. 이런 부족한 성찰은 레닌주의적 의미에 묻혀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메트로폴리스에 적합하지 않은 계급의식의 단순화/환원을 야기한다. 첫 단계에서 자발적으로/즉흥적으로 [나타나고] 정신분석학적인 틀[언어]와 개별자로 제한된 해방논쟁의 침체는 대중의 가능한 욕구구조로의 접근과 전략적으로 실천적인 인식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첫 단계에 있어서 반(反)권위주의적 운동을 두드러지게 하는 사변적인 총체성의식은 역사맹아적인 추상적인 계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반면 실천적으로 일하는 많은 그룹들의 직접성이데올로기가 그 의식상 역사적인 [투쟁, 운동 등등] 현상형식들을 결합하지 않은 소실(消失)[점]에 안주하고 경험적인 실천들의 다양성을 정치적인 실천이란 계급의식적인 통일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계급의식의 카테고리적인 차원에 대한 성찰은, 아직도 종종 그러듯이, 어찌할 줄 모르면서 어렴풋한 당사자 개입에 머무는 나쁜 의미로 윤리화하는 당사자개입토론들보다Verbindlichkeitsdiskussion 훨씬 더 조직적인 정체성 기준들을 매개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인 운동에 대한 이론적인 해석은 부분적으로 루카치가 부르주아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말한 경험적인 역사주의의 요소/계기에 붙들려 있다. “그들의 오류는 그들이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개별자(그것이 한 인간이든지, 계급이든지, 또는 인민이든지 간에)와 그의 경험적으로 주어진/확인되는 (그러니까 심리학적인 또는 대중심리학적인) 의식 안에서 그 구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사념하는데 있다. 그들이 가장 구체적인 것을 찾았다고 믿는 곳 바로 거기가 그것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다. ... 그들은 이 점을 간과함으로써 완전히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루카치, 역사와 계급, 61쪽).


그러나 “총체성으로서의 사회에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객관적인 가능성의 카테고리와 이와 함께 계급의식의 논리적인 형성Bildung이 굳혀진다는konstituieren 루카치의 인식 자체가 이미 이상화하는 추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조직문제뿐만 아니라 계급의식 다루기 역시 개별 프롤레타리아들의 경험적인 심리적인 의식 안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총체성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단지 사후적으로 총체성을 참조/전유한다는 중앙위원회의 결정들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투쟁경험, 이론들의 형성, 선전선동활동 등을 통해서 총체성카테고리들이 현실적으로 개별 프롤레타리아의 머리 안으로 [자리를 옮겨] 들어가는지 어둠에 묻혀있다. 올바른 계급의식은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올바른 정당이란 형태로, 즉 모든 역사적인 형태규정성들로부터 초월적으로 들어 올려진 레닌주의적인 정당유형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총체성이란 카테고리는 헤겔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도, 경험적일뿐만 아니라 비경험적인 요소/계기에 [활짝] 열려있다. 상품이 마르크스에 따르면 감각적-초감각적 사물인 것처럼 그렇다. 총체성카테고리에서 경험을 제거함으로써 계급의식의 역사적인 생성에 대한 성찰이 잘려나갔다. 루카치의 경험개념 자체가 이미 과학주의적으로 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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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테제" - 3

자본의 새로운 사회화의 질은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의 개념을 확장하고, 전개되지 않은 [시원]원리에서부터 이미 쭉 그랬던 [노동]개념의 총체성을 [이제] 분업적인 총체성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내 준다. “자연시스템에서 머리와 손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이, 노동과정이 머리노동과 손노동을 통합한다. 이 둘은 나중에 갈라서고 상호 적대적인 대립까지 간다. [이제] 생산물은 전반적으로 개별적인 생산자의 직접적인 생산물에서 사회적인 생산물로, 총노동자의 공동생산물로, 즉 노동대상의 손질하기에서 가까이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마디마디로 분절되고, 그때그때의 계기를 이루는] 일원들로 결합된 노동[총]인원의 공동생산물로 전화된다. 때문에 노동과정의 협동적인 성격 자체와 함께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노동과 그 기체(基體)Träger[휘포케이메논]의, 즉 생산적인 노동자의 개념이 확장된다. 생산적으로 노동하기 위해서 이젠 더 이상 스스로[직접] 손을 놀릴 필요가 없다. 총노동자의 기관으로, 즉 총노동자의 하위기능 중 그 어떠한 하나를 집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본론 1권, 537쪽)


 - 체계적으로 19세기 말부터 추진되었던 - 과학의 고정자본적인 기계시스템 안으로의 기술적인 전환과 자동화 경향은 마르크스가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이라고 표현했던 것에 변화를 가져왔다. 실질적인 종속이 단지 형식적인 종속과 다른 점은, 실질적 종속은 노동, 분업, 그리고 과학의 사회적 생산력들의 체계적인 적용을 통해서 직접적인 노동과정의 테크놀로지적인 구조까지 질적으로 변화시킨다는데 있다. 인간들과 자연간의 물질대사로서의 노동과정이 말하자면 그 내부 자체에서 사회화된다.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의 가장 두드러지는 성질 하나는 “사회적 발전의 일반적인 생산물인 과학을 직접적인 생산과정에” 의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재결과, 50쪽,  프랑크푸르트 1969).


 마르크스가『그룬트리쎄』에서 상술하고 있는 것처럼, 개별적인 노동능력/역능이 점점 더 순간화.계기화되고 노동시간의 가치척도가 고정자본과 사실적인 생산과정의 현실과의 관계에서 점점 더 극적인 모순에 들어서는 가운데, 사회적 결합/결사는 생산의 과학화와 함께 생산을 점점 더 총노동자로 총체화한다. 기술과 과학의 전개는 [현재] 시스템을 폭발시키는 정도까지 생산적으로 이행된 상태에 이르렀다. 생산의 테크놀로지적인 과학화에 의한 생산적인 노동의 새로운 사회화의 질은 그의[=새로운 사회화의 질의] 자본주의적 강제의 양식으로의 대상화를 더 이상 관용할 수 없게 한다. 독점자본과 자동화의 관계는 또한 계급이론적으로도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의 중대한 변화의 본질은 이룬다.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 또는 특수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함께 [더 이상] 개별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점점 더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능력/역능이 총노동과정의 실질적인 기능자가 되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 경쟁하면서 총생산적인 기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노동역능/능력들이 매우 다양한 다른 방식으로 상품의 - 혹은 여기에 더 적합하게 말하자면 생산물형성의 - 직접적인 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자는 손을 더 많이 써서, 저자는 머리로 더 많이 써서 노동하고, 이자는 매니저, 엔지니어, 기술학자 등으로, 저자는 감독자overlooker로, 제3자는 직접적인 노동자로 혹은 심지어 단지 [기구/도구를 받쳐 들고 있다고 지시에 따라 건네주는] 보조자Handlanger로 노동하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노동능력/역능의 기능들이 생산적인 노동의 직접적인 개념 아래로, 그리고 그 기체들이 생산적인 노동자의, 즉 직접적으로 자본에 의해서 착취되고, 그리고 자본의 가치증식과 생산과정 전반에 종속되는 노동자의 개념 아래로 정렬된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재결과, 66쪽)1


과학들이 그것들의 기술적인 전환[가능성]에 따라서, 그리고 그런 과학의 기체, 즉 정신노동자들이 생산적인 총노동자 안으로의 통합이 완성되면, 그러면 사회혁명적인 전략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거의 배타적으로 산업프롤레타리아만을 참조하면 된다는 식의 가정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지성이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산업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어떻게 직접적인 생산자의 개념이, 그리고 이와 함께 노동하는 계급의 개념이 전반적으로 변화되었는가에 있다.


진척되는 자본 및 생산적인 노동의 사회화와 생산의 테크놀로지적인 과학화와 함께 직접적인 산업프롤레타리아 역시 점점 더 총노동과정의 요소/계기가 된다. [한편] 산업프롤레타리아는 그 어는 때보다 덜 생산적인 노동의 총체성을 대표한다. [다른 한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극적인 첨예화에도 불구하고 정신노동이 더 이상 [자신을] 단지 [숭고하게] 드높은 것으로 하는 추상노동의 반영(反影)으로, 그리고 이와 함께 부르주아적인 문화전유와 과학프로세스의 소시민적인 조직형식들의 대표/재현으로 다루어질 없고, 오히려 조직된, 그리고 집단적인 형식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의식의 형성과 정치적인 계급 조직의 형성에 있어서 [거짓이 아닌, 후기자본주의에 터전에서 생성된 자연적인] 순수한 형성요소/계기가 된다.  


계급투쟁에서의 과학적인 지성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정신노동] 개별자의 계급배신(대개 루카치의 계급투쟁에서의 인텔리겐치아의 역할의 규정을 참조하면서)이라는 전통적인 이론들에, 조직된 생산적인 과학적인 지성 없이는 부르주아 사회 전반에 관련된 계급의식의 형성이 산업프롤레타리아 안에서도 역시[=단지 과학적 지성 안에서만은 불가능하듯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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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rx zufolge ist das „Wachsen der scientific power ... das Maß, worin sie schon als capital fixe gesetzt ist, der Umfang, die Breite, worin sie realisiert ist und sich der Totalität der Produktion bemächtigt hat", eines jener exklusiven Widerspruchsmomente am naturgeschichtlichen Ende der gewaltsamen Krisengeschichte des Kapitals, „worin im advice gegeben wird, to be gone and to give room to a higher state of social production" (Rohentwurf, S.636)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