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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2/14
    감정이입과 오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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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2/14
    즐거운 번역(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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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2/13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 - 욕지꺼리 대연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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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2/13
    National - Nation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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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2/02/09
    201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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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2/02/05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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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02/04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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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2/02/04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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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2/02/04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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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2/04
    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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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입과 오입

„감정이입“이란 말과 좀처럼 친해지지 않는다.

„Einfühlung“하면 아무렇지 않는데 „감정이입“하면 내 귀엔 „오입“이 함께 들린다.

왜 그러지?

감정이입이론이 동반하는 부르주아적 감수성이나 주관적 이상주의 때문인가? 그렇다면 „Einfühlung“해도 „오입“과 비슷한 거부반응을 보여줘야 하지 않나?

„감정이입“이란 말이 생소해서 그런가?

생소하다. 들어보지 못한 말이고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말이고 학문용어로 수입되었다가 일상화된 말이라는 냄새가 물씬 나는 말이다.

 아무튼, „감정이입“에 대한 이디오진크라지에 가까운 내 반응은 이 생소함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살펴보니 „감정이입“이 지시하는 행위와 내 몸에 베어있는 타인에 대한 마음가짐이 다르다.

„감정이입“은 우선 시끄럽다. 다 보고 다 듣게 거칠고 시끄럽게 행동한다.

반면, 내가 자라면서 보고 들은 타인에 대한 마음가짐은 은근하다. 상대방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례일까봐, 결례일까봐 너도나도 아무도 모르게 상대를 배려하는 것을 보고 자랐던 것 같다.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은밀한 약속에 가까운 마음가짐이었던 같다. 그래서인지 그런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적당한 말도 없는 것 같다. 은밀한 약속을 하고나서 „감정이입했다“고 떠들  일이 아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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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번역

10대 말 아리따운 나이에 간호보조사로 독일에 온 짝지가 가끔 옛날 이야기를 한다. 허리를 구부리고 웃는다. 남도 어느 보건소에서 근무하다가 독일로 오게 되었다. 아이 복이 많았던 시대, 가족계획이 중요하다며 시골 동네 공동 우물터를 찾아 다니면서 아낙네들에게 콘돔을 나눠주다가 독일에 오게 되었다.

„처녀는 잘 모른당께“
„뭘 몰라요. 날짜 계산해서 조심하면 되잖아요.“
„글쎄, 아가씨는 잘 모른당께. 남자를 모른당께.“

암튼, 이러다가 독일에 오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독일 사람과 똑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녀를 둔 간호사들은 자녀수당 등 독일 간호사들보다 급여가 훨씬 더 높았다.

어젠 당시 독일말 구사때문에 한바탕 웃었다. 종종 웃는다.

음주운전하다가 음주단속에 걸리면

„Polizei Onkel, ein Auge zu ja?“

한번 눈감아 주라는 이야기를 직역해서 표현한 것이다. 독일 경찰이 아마 어리둥절해서 눈감아 주었을 것이다.

„Doktor, eine Maus, hoch und runter Bein, und ganz sauer.“

의사 선생님, 다리에 쥐가 나고 시큰거려요란 말이다. 왠 놈의 생쥐가(Maus) 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거리고, 다리에 왜 신맛(sauer)이 나는지 아마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처방이야 제대로 했겠지.

독일 간호사들이 쉬는 시간에 수다를 떨고 있으면 뭔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해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뭘 할지 몰라 하다가 환자실에서 벨을 누르면 구세주 만난듯이 얼른 일어나 달려가기 일수였다.

„Schwester, ich brauche eine Pfanne.“

저 환자 왜 저러지. 후라이팬이 왜 필요하지. 병동에서 환자가 왜 후라이팬이 필요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에라 모르것다하면서 부엌에서 후라이팬을 들고 갖다주었다.

„Schwester, nicht diese Pfanne.“

이런 후라이팬이 아니다? 다른 종류의 후라이팬이 있단 말인가? 어떻게 생긴 거지?

종잡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수간호사에게 가서 말한다. Pfanne(후라이팬)을 갖다 달라 해서 후라이팬을 갖다 주었더니 그게 아니래요.

병원에서 쓰는 납작한 요광을 보여주면서 이것도 „Pfanne“라고 설명.

번역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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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 - 욕지꺼리 대연도

 

 
 
욕지꺼리 대연도(大蓮禱)
-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가 받은 편지에서 발췌


노래 1

친애하는 데겐하르트 박사님,
울브리히트 수염을 기른 더러운 돼지쌔끼,
종동(東) 꼬봉, 쏘련 간첩
반동의 궁중시인
크레믈린을 노래하는 개돼지쌔끼.
니 입에서 똥물 튀긴다.
가장 저질한 찌꺼기 너, 
데겐하르트 널 가스실에 보내
공산주의자, 수정주의자 니가  
어서 빨리 뒈지게 해주마.
어서 빨리 뒈져라


노래 2

존경하는 좌익변호사님,
넌 즉결처분 총살감이야,
수퍼범죄형 스타, 
법복을 입은 갱스터 ,
폭탄재료 딜러, 폭탄 던지는 프란츠,
테러리스트 – 좆까 거세해 줄께,
뻘건 돼지변호사쌔끼,
주둥이를 후려 갈겨주랴
아나키스트, 좌익파시스트,
어서 빨리 뒈지게 해주마
어서 빨리 뒈져라
 

노래 3
 
거드름 피우는 백만장자,
돈을 어디서 그렇게 모았니?
테씬에 별장있고,
서베를린에 업소있다며?
뻘건 캐딜락을 타고 다니는 너,
부의 치마에 붙어 기생하는 찐득한 진딧물,
사회주의를 노래하면서
대마초 빨고 크림(반도)삼페인을 홀짝거리는 
착취자, 자본가,
어서 빨리 뒈지게 해주마
어서 빨리 뒈져라.


퇴장 노래

나를 옛부터 수호해 온 
도둑이자 시인인 프란츠[프랑수아] 비용,
그 무덤에서 노래할 때마다 
불알이 떨어져라 웃는다 
이 연도를 들으면. 
그럼 우리는 같이 노래한다:
교수대에 달려서
목이 바짝 죄어오면
아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 누가 그렇게 거짓말 했는지
그리고 내 엉덩이가 얼마가 무거웠는지.
내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1978년 앨범 "Liederbuch - Von damals und von dieser Zeit"에서 발표. Live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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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 Nationell

유럽, 아니 독일, 아니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좌파는 „Nation“하면 안색이 달라진다. „나찌“가 „나찌오날쏘찌알리스무스/Nationalsozialismus“의 „Nation/나찌온“을 줄인 말이니 안색이 달라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좌파가 아니더라도 „Nation“하면 기색이 별로 좋지 않거나 쓸데없는 말을 들었다는 인상을 준다. 아무튼 많은 독일인은 „Nation“과 아직 불편한 관계에 있다 (통동후 2000년대에 들어와서 그 관계가 좀 풀렸다는(entspannt) 이야기도 있다.)

근데 독일의 이런 상황이 80년대 한국의 사회운동을 독일에 소개하는 걸 어렵게 했다. 특히 NL계열의 민족주의를 좌파에 소개하는 것이 그랬다. 장황한 설명이 항상 필요했다. 그리고 번역부터 문제가 되었다.

„민족“을 „Nation“으로 번역해야 하나? „Nation“이 국수주의라는 함의로 넘어서 바로 „나찌“로 연결되는 독일 좌파의 풍토에 NL이 말하는 „민족“을 „Nation“으로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중에 민중신학을 통해서 독일개신교 주변에 먼저 알려진 민중개념이 도움이 되긴 했지만.

독일말에는 „national“과 유사한 „nationell“이란 형용사가 있다. 요새 쓰지 않는 말인데 독일 현시대 작가 보토 슈트라우스(Botho Strauss)의 책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어떤 책이었는지 깜깜하다. 다만 보토 슈트라우스에 퐁 빠져 있을 때였고, 독일 전통좌파를 까는 맥락이었다고 어렴풋이 기억된다. 떠돌이(생활?)에 지쳐서 그랬는지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할 때였다. 아도르노의 „최소한의 도덕“의 미시적인 정확함과 노발리스의 간결함이 어우려진 글 때문에 퐁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때 „nationell“이란 낱말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나중에 횔더린이 1801년 12월 4일, 그러니까 걸어서 근 600km떨어진 프랑스 보르도로 떠나기 며칠을 앞두고 뵐렌도르프에 쓴 편지에서 사용한 낱말이란 걸 알게되었다.

횔더린은 이 편지에서 „nationell“을 „eigen“과 같고 „fremd“에 대비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eigen“은 ‚몸에 베어있는, 토속/토향적인 것’이란 의미로 „fremd“는 ‚외래적인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횔더린이 살펴보는 ‚토속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의 변증법을 떠나서 „nationell“이란 것의 의미가 명료하고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인터넷을 헤매다가 이 두 단어를 설명하는 일간지 „taz“의 블로그를 검색하게 되었다 (http://blogs.taz.de/wortistik/2007/06/18/nationell/). 주지하다시피 „taz“는 70-80년대 베를린 크로이쯔베르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안운동 세력이 주체가 되어서 만들어진 신문이다. 데틀레프 귀어틀러(Detlef Guertler)란 블로거는 „nationell“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nationell“은 „national“과 비교해 볼 때 본질적으로 열광적이지 않고 „국가긍지/Nationalstolz“나 „국가대표팀/Nationalmannschaft“ 등과 같은 복합명사의 일부로 사용될 수 없고, 오로지 형용사로만 사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national“이란 형용사는 „Nation“이 2격으로 사용되는 곳에서만, 예컨대 ‚Mannschaft der Nation’을 ‚Nationalmannschaft’란 복합명사로 줄이는 형식으로만 사용될 수 있고,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nationell“을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Küche der Nation/민족의 부엌/요리/맛’이란 표현에 기댄 „Nationalküche“(‚민족요리’)란 표현은 있을 수 없고, 다만 „nationelle Küche“(‚익숙한/몸에 베어있는/토속/토향적인 맛’)이란 표현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nationelles Klima“(‚전형적인 기후’), „nationelle Sprache“(‚독일 (땅)에서 자라 통용되는 독어’) 등의 표현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근데 „nationell“의 함의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마지막에 가서 설명된다. „taz“지가 만들어진 배경에 주목하면서 „taz“는 „nationelle Zeitung“(‚(출신 배경이 정확하고 자력으로 자라난) 토속적인 신문’)이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 전역에서 구독되고 „Zeitung für Deutschland“(‚독일을 위한/대표하는 신문’)이라고 자긍하는 „FAZ“지는 ‚nationale Zeitung’('범국가적인/민족적인(?) 신문')이 될 수야 있겠지만, 정체가 (누가 돈줄을 대고 어떤 이데올로기에 속하는지가) 분명한 „nationelle Zeitung“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nationell“에는 행위주체가 분명하고 정확하게 스며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민족민주주의의 „민족“을 „Nation“으로 번역할 수 없었는데 그럼 이제 „nationell“은 어떻게 번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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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9

재밌는 말  두 마디

 

„Es giebt (…) einen Hospital, wohin sich jeder auf meine Art verunglükte Poët mit Ehren flüchten kann – die Philosophie.“ (1798년 11월 12일 횔더린이 노이퍼(Neuffer)에게 쓴 편지에서 인용)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시인이 되려다가 [방항하고] 실패한 시인이라면 누구나 다 쪽팔리지 않고 도망쳐 [칩거할 수 있는] 철학이란 병원이 있다.

„[Es ist] die Schwäche der Dichtung Schillers, dass sie die Philosophie Kants in dichterische Form [bringt, und] die Schwäche der Philosophie Hegels, dass sie die Dichtung Hölderlins in philosophische Form [bringt].“ (Walter Bröcker, Das was kommt, gesehen von Nietzsche und Hölderlin, Pfullingen 1963, S. 50, zitiert nach: Peter Szondi, Poetik und Geschichtsphilosophie I, Frankfurt am Main 1974, S. 215)

쉴러 시가 빈약한 점은 칸트의 철학을 시형식으로 옮긴데 있고 헤겔 철학이 빈약한 점은 횔더린의 시를 철학형식으로 옮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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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무주님의 [떠남을 앞두고. 어리석음앞에서. 현명한 선택이라고 고집하면서.] 에 관련된 글.

 

나도 그냥 기록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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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5

2.4 „Weh mir“ – 속임수에서 깨어난 비명

„Hälfte des Lebens“를 엄밀하게 읽어보는 동기는 이 시를 헤겔 정신현상학의 „Die Wahrnehung –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지각 – 혹은 사물과 착각/불량거래/속임수“와 맑스의 상품분석 그리고 이에 기대는 상품미학(Warenästhetik)의 맥락으로 연결지으려는 시도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덜 읶은 시도일 뿐이다.  헤겔과 맑스의 해당 부분을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런 시도의 첫 실마리를 „Weh mir“라는 비명에서 찾고자 한다.

„Weh mir“를 „서러워라“ 혹은 „슬프도다“라고 번역하면 뭔가 아닌 것 같다. 골수에 사무치고 동정을 거부하는 이 비명이 자기연민에 빠지는 정도의 슬픔으로 왜곡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중심을 뒤 흔드는 이 비명에는 당사자가 이토록 비명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는데 깊이 참여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파우스트> 그레첸의 „Weh“ 비명이 그렇다. 그러면 왜 참여했을까. 속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착각/속임수에서 깨어난 반응은 분노다. 그레첸은 하인리히에게 „Heinrich! Mir graut’s vor dir.“/하인리히, 널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라고 한다.

„Weh mir“는 또 요새 쓰지 않는 말이다. 이 표현을 요새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 질문에 „나는 멍청했다.“(„Ich bin doof, blöde, ein Blödian, eine dumme Gans.“)라는 대답이 가장 많은 호응을 받는다 (http://de.answers.yahoo.com/question/index?qid=20090628110742AAZlS7Z). 이것도 „Weh mir“란 표현의 중심에 멋모르고 속았다는 것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 같다.  

 „Weh mir“를 뒤의 내용하고만 연결하면 이런 강렬한 비명이 될 수 있을까? 안 그럴 것 같다. 백조에 기대했던 착각에서 깨어난 시적 주체의 비명으로서만 이런 비명이 가능할 것 같다.

1연의 마지막 낱말 „Wasser“이후 연속되는 w-두음 (Wasser, Weh, wo, wenn)도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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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4

2.3.1 5행 „und“와 성사되지 못한 대화

이 시 5행의 „und“는 사전적인 의미로, – 비트겐슈타인을 따르자면 – 구체적인 사용과 괴리하여 이해하고 번역할 수 없을 것 같다.

여기 이 „und“의 구체적인 사용에 관하여 두가지를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새로운 상황의 전개이며 다른 하나는 말을 주고 받는 대화상황이다.

루터 번역 독어 성경 창세기 1장 3절을 보면 이렇게 쓰여있다.

„Und Gott sprach: Es werde Licht!"

한글 번역은 다 이 „und“를 생략하고 있다. 여기 이 „und“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그렇지 않다. [예기치 않았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됨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und는 대화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말을 건 사람이 말을 다하고 나서 „Und?“하고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고문실에서 고문하는 사람이 고문 당하는 사람을 잔뜩 협박하고 나서 „Und?“하고 „술술 말하기“를 기다리는 상황도 이런 상황에 속한다.

이 시 5행의 „und“이 이런 상황을 알리고 있다. 백조님들의 태도가 예기치 못했던 것이고, 그들과의 대화가 단절됨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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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3

2.3 Und trunken von Küssen

Und trunken von Küssen  
Tunkt ihr das Haupt           
Ins heilignüchterne Wasser.

보통 이 시의 1연은 목가적인 풍경을, 2연은 이에 대조되는 아픔과 쓰라림을 노래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앞 행 „Ihr holden Schwäne“의 소리가 목가적이지 않다. 밝은 모음 i-o-e에 시작했지만 ä-e 어둔운 모음으로 끝난다. ‚ä’는 비운을 느끼게 한다. 뭔가 기대하면서 백조들에게 말을 걸었는데 기대했던 것을 받을 수 없다는 비운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은 이 행의 흐름을 주관하는 약강 혹은 단장(Iambus) 음보(音步)가 마지막에 가서 한 걸음 빠져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완성된 음보라면 ‚Ihr holden Schwäne da’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뭔가 허전하다. 뭘 기대했는지 알 순 없지만 말걸기(Anrede)에 대답하는 말받기(Gegenrede)가 없을 것을 예상하게 한다. „Schwäne“라고 부르고 뭔가 허전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런 허전함에 이어지는 다음 행 „Und trunken von Küssen“은 음율의 속도가 빨라진다. 느릿느릿 오르락 내리락 했던 잔잔함이 서둘러 앞으로 나가는 박자로 바뀐다. 행진곡에 쓰여지는 약약강(Anapäst) 음보가 5,6 행의 경우 중간에서 속도를 높이고 있다. 6행에서는 또 상박없이 바로 강/장으로 들어가는데 허둥댄다는 느낌까지 준다 (Karl Eibl: Der Blick hinter den Spiegel. Sinnbild und gedankliche Bewegung in Hölderlins „Hälfte des Lebens“ (20.02.2004). In: Goethezeitportal. URL: http://www.goethezeitportal.de/db/wiss/hoelderlin/haelfte_eibl.pdf, 2012.2.3 참조). 여기 진보넷 블로거 Daydream님이 이 시를 읽으면서 전쟁을 연상하기도 했는데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백조님들이 하는 짓이 우아하고 사랑스럽지 않고 행진하는 군인과 같이 무지하고 꼴 사나운 면이 있다. 기계적이다.

그리고 „und“가 이해하고 번역하기 어렵다.

고트프리드 벤(Gottfried Benn)은 이 시를 읽으면서 5행의 „und“가 눈에 거슬린다고 했단다 (Ulrich Knopp, 같은 곳 참조).


이런 경유를 생각해 보자.

„나는 죽어라고 일했는데 넌 뭐했어? 잠만 퍼 잤잖아!“

이 표현을 독어로 번역해 보면 이 정도 되겠다.

 „Ich habe mir den Arsch aufgerissen und gearbeitet. Und du? Was hast du gemacht? Du hast nur gepennt.“

이 시 5행의 „und“도 und의 이런 사용법이 아닌가 한다. 기대했던 것과 어긋나는 행위, 그리고 기대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 행위를 이 „und“가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 시와 관련해서 이야기되는 비운은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백조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3행의 „Die Mauern stehn/Sprachlos und kalt, im Winde/Klirren die Fahnen“의 시제가 현재형임을 봐서도 비운은 겨울이 오면/되면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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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2

2.2 Ihr holden Schwäne

‚hold’의 의미도 쉽지 않다. 요새 쓰지 않는 말이다. 좀 아이러니하게 가미하지 않으면 느끼하기 때문이다. 횔더린이 살던 당시에는 안 그랬단다 (Ulrich Knopp, 같은 곳 참조). 그냥 ‚사랑스럽다’란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루크레티우스 „De rerum natura/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첫 줄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Aeneadum genetrix, hominum divomque voluptas,/alma Venus“/’에네이스 가문의 시조이시며, 인간과 신이 모두 군침 흘리며, 젖 가슴이 풍부한 비너스여’. 근데 이 표현에서 „alma Venus“/’젖을 주는 비너스’를 독어로 흔히 ‚holde Venus’로 번역한다. 이에 기대어 ‚hold’의 의미엔 젖 먹이면서 아이를 굽어 살펴보는 엄마의 자세가 스며있다고 짚어보자.  
 
헛다리 짚은 것일까? 어원사전을 보니 안 그런 것 같다. ‚hold’은 (광산이나 채석장 등에서 석탄 혹은 돌을) ‚비스듬하게 높이 쌓아 올린 더미’란 의미가 있는 ‚Halde’와 어원을 같이 한다. 이런 어원에 기대어 롤프 쭈버뷜러(Rolf Zuberbühler)는 ‚hold’가 백조가 머리와 목을 비스듬히 하고 있는 것을 표현한다고 한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 다. 그리고 1793년 요한 크리스토프 아델룽(Johann Christopf Adelung)이 편찬한 사전 „Grammatisch-kritisches Wörterbuch der Hochdeutschen Mundart, mit beständiger Vergleichung der übrigen Mundarten, besonders aber der Oberdeutschen“은 ‚hold’를 „Geneigt, des anderen Glück gerne zu sehen, Liebe gegen denselben zu empfinden/다른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을 즐겨 살펴보고 애정을 느끼는 쪽으로 기울어진 [그런 disposition이 있는]’이라고 설명한다 (Ulrich Knopp, 같은 곳 참조).

„Ihr holden Schwäne“하면서 백조를 부르는 말걸기(Anrede)에는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이 말걸기로  시적 주체가 등장하다. 근데 한가지 눈에 띄인다. 주체가 주체로 등장함과 동시에 아무런 형태없이 사라진다.

시적 주체(poetisches Subjekt)는 보통 강력한 창조자(poietes)로 등장한다. 시적 주체가 등장하는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 호라티우스가 „반두지아의 원천/fons bandusiae“을 노래하는 시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거기 네번째 연, 2행을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me dicente“. 문장의 흐름에 종속되지 않고 따로 우뚝 서 있는 소위 ‚ablativus absolutus’격으로 시적 주체가 등장한다. 해석해보자면 반두지아의 원천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가 노래하기/말하기 때문이다’란 것이다.

근데 여기선 그렇지 않다. 백조에 말을 거는 시적 주체가 대려 객체가 되어 ‚날 좀 봐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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