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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님의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 <저급한 아이들하고 놀면 안돼>] 에 관련된 글.
작년 11월, 그니까 11월 14일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우연히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가 79세로 별세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Spiel nicht mit den Schmuddelkindern>을 불렀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알게 된 이후 종종 불러보는 노래다. 이 노래는 1965년 같은 제목으로 발표된 음반에 선보인 발라드로서 독일 68세대를 대표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래와 함께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를 한번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이제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세상이 참 아니러니하다. 독일 학생운동의 상징이자 대표였던 루디 두치케를 사냥 몰이했던 빌드지를 발간하는 스프링어하우스가 있는 길이 최근에 코흐슈트라쎄에서 루디-두치케슈트라쎄로 개명되는가하면, 독일의 소위 교양부르주아지를 신랄하게 비판한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를 바로 독일의 교양부르주아지를 대변하는 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짜이퉁이 가장 충실하고 성실하게 소개하고 추모한다. (이것은 물론 내 느낌이다.) 그래서 이 추모문을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와 <저급한 아이들과 놀면 안돼>를 소개하는 글로 번역해 본다.
부르주아지의 모든 길들이기 행위에 대항하여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는 60-70년대에 정치적인 노래로 한 세대 전체를 대변하는 작가가 된다. 그가 오늘 79세로 별세했다.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는 한결같이 자기 확신에 충실했다.
그는 동부권 붕괴 후 공산주의의 미래를 믿느냐는 질문에 손자와 증손자에게 희망을 건다고 대답했다. „이 전투에서는 패배했다. 그러나 [투쟁은]은 계속 된다.“ 그가 갖는 희망의 근거를 제시하는 이 대답에는 또한 변호사, 작가 그리고 가수인 데겐하르트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한번도, 어떤 경우에도 자기신념을 한줌이라도 포기한 적이 없고, 회의하지 않고, 장기간 용기를 상실한 적이 없다.
저급한 아이들과 놀기
그는 급진적으로 정치적인 노래작가로서 독일 힛트페레이드에 오른 몇 안되는 작가이며 거기다 „저급한 아이들과 놀면 안돼“는 에버그린으로 불려지는 노래다. 1965년에 창작된 이 노래는 오늘 들어도 닭살이 돋는다. 독일 전후 세대의 삶을 반영하는 이 노래는 사실 한 사람의 생을 그린 쓰라린 소설이다.
사회적 존망의 대상이 되는 착실하게 삶을 꾸려나가는 부모에 반항하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살고 있는 상류층 지역(Oberstadt)에서 „66카트놀이 하고, 여자아이들 치마 밑을 들여다보고, 솨솨 비오는 날에는 머리빗을 입에 물고 쥐잡는 노래를 부르는 바보 엥엘베르트에게 귀를 기우리는 곳“으로 빠져나온다. 유아시절의 이런 색다른(schwarz) 페러다이스가 불운을 불러 일으킨다. 상류층 사회(Oberstadt)는 소년에게 „허리와 함께 말 구부리는 법, 삐적 마른 얼굴을 빠알같게 화장한 문화인들 앞에서 달달외운 어린의 정경을 띵똥거리“는 것을 가르친다. „보란듯이 부자“가 된 후 데겐하르트의 끔찍한 영웅은 교통사고로 육체적/정신적으로 장애자가 되고 저급한 아이 한 명을 겁탈하다가 그 동료들에 의해 익사당한다.
이렇게 철저하게(radikal) 부르주아지의 길들이기 행위를 폭로하고 아웃사이더를 찬찬히 조명한 사례로는 데겐하르트 이전에 단지 조르주 브라상스를 들 수 있고 쟉 브렐이 종종 그랬다고 할 수 있겠다. 1960년 즈음 변호사로 일하는 것과 병행해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기 시작할 때에 그는 앞 작가들 외에 브레히트, 투홀스키, 베데킨드 등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뭐가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1968년 „68세대의 가수“란 타이틀을 안겨준 그의 노래 때문인지 아니면 동년에 APO 원외야당 멤버를 변호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1970년 독일 음반상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1972년 [독일 적군파 모태인] 바더/마인호프 그룹을 법률적으로 지원해서 그런지 말하기 어렵다.
데겐하르트의 단호함이 아쉬울 것이다
바더/마인호프 그룹을 변호한 것과 더불어 사민당에 공산당으로 당적을 옮긴 것에 관해서는 찬반논쟁이 근거있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데겐하르트 노래 가사가 갖는 말의 사로잡는 힘과 구상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 않을 것이다. (…) 또 그가 출판한 음반 제목은 독일연방공화국이 걸어온 발자취를 그린 단편소설과 같이 들린다. „Im Jahr der Schweine/돼지들의 해에“ (1969), „Mit aufrechtem Gang/허리를 굽히지 않고“ (1975), „Da müssen wir durch/상황를 뚫고 나아가야 할 때다“ (1987) 그리고 „Weiter im Text/글로 계속“ (1996) 등 몇몇 제목만 소개해도 그렇다.
1986년 브라상스의 노래를 독어로 번역하여 모음집을 발표할 때 사용한 제목 „벤치에 앉은 젊은 커플들/Junge Paare auf Bänken“과 같은 부드러운 음성은 예외다. [음반 제목은 보통 투쟁적이거나 비판적이다.] 그러나 무대에 서면 전적으로 부드럽고 미소를 자아내면서 삶의 기쁨에 도취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2월 19일 베를린너 앙상블이 팔순 기념을 위해 계획한 연주회에서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오는 12월 3일이 팔순잔치였다. 그러나 프란츠 요셉 데겐하르트는 이번 월요일 함부르크 근교Quickborn에서 별세했다. 그의 단호함이 [독일연방]공화국에 [사는 우리에게] 아쉬울 것이다. 단지 음악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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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이북체제가 3대세습으로 이어졌는데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독재체제는 권력이양시 필연 위기에 빠진다는 이론에 근거하고 여기에 이북의 경제적 곤경과 사회적 불만을 더해서 이북붕괴론을 주축으로 하는 여러 시나리오가 어제까지 그려졌는데 권력이양이 진행중인 오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왜 그러지?
분명 많은 뇌줄음이 투자되었을텐데 …
이디오진크라지가 문제인가?
이디오진크라지가 이북에 대한 알레르기이면 체질을 고치고, 이북이 역사적으로 독특한 혼합의 결과라는 의미로서의 이디오진크라지라면 개념과 사태에 더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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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놓고 가면 어차피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이라고 갖고 가란다. 치근 위쪽 일부에 아직 살점이 말라 붙어있다. 들고 오기는 했지만 전혀 섭섭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반복되는 염증에도 불구하고 일년이상 버티다가 결국 뽑아 버릴 수밖에 없게 된 어금니다. 머뭇거린 이유는 아마 속썩이는 이빨이지만 내 몸의 일부라 그냥 뽑아버릴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뽑아버리니까 말 그대로 속이 시원하다. 괜히 들고 왔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런데 혀는 안 그런다. 사라진 어금니를 내내 못 잊어 한다. 뽑힌 어금니가 남긴 허전한 공간을 더듬고 또 더듬는다.
같은 일을 놓고 이렇게 엇갈리는 태도를 보이는 나와 혀는 과연 같은 무리일까? 속 시원하게 떠나기로 좋아하는 나와 떼놓고 온 사람과 사물을 내내 못 잊어 하고 예전의 감촉과 윤곽을 찾아 헤매는 손은 같은 무리일까?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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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과 마음이 어지럽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죽은 사람의 몸을 보지 못해서 찾아가면 죽었다는 사람이 그대로 있을 것 같다.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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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자가 문자언어로서 갖는 일정한 초국가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한글전용론과 중국어 원음표기 주장 속에서 이러한 한자의 초국가성이 민족주의/국민주의와 갈등적 관계에 있음을 본다. "
"한글전용(한자의 외국어화)과 중국어원음표기주의(중국어의 타자화/국어의 동일화)가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세계체계의 작동 논리로서 '국민적인 것들의 강화'라는 맥락에 놓이는 반면, 한자의 초국가성(transnational)의 승인 및 한자음표기주의는 이질적인 것들의 존재를 승인함으로서 국민적인 것들 내부에 일정한 균열을 낳는 효과를 갖는다. 이는 일부 복고주의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를 국민화의 강화의 경향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탈국민화 및 초국민화의 맥락에 위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 이전의 국제주의적 사회운동에 대한 현재적 계승이 복고주의적이지 않은 것 처럼 말이다. "
"원음 표기는 원음에 '가까운' 표기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이 전제 자체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문자와 구어의 관계, 개념과 실체, 이론과 실제(실천/운동)의 관계의 대비. 경험주의의 문제. 그 배후의 인식론적 문제."
"민족주의적 언어운동이 오히려 반민중적이게 될 가능성. 사카이 나오키의 논의를 재검토할 필요성."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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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행인님의 [가카의 최대 치적은...] 에 관련된 글.
예수님이 좋다. 마음이 훈훈해서 그렇다. 마음이 깨진 사람들의 마음을 절대 더 깨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란 말씀에 이런 예수님의 마음이 엿보인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자력으로 먹거리 문제를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완전 거지다. 그래서 중세에 거지가 되어 예수를 따른 사람들이 있다. 예수를 따르는 것과 가난/거지 문제는 카톨릭에서 아직도 가장 첨예한 대립을 빗는 이슈가 아닌가 한다.
그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가. 마음에 도사리는 온 갓 욕심을 비운 도사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근데, 그게 아니다. ‘마음’은 pneuma, 즉 영을 번역한 것이고, 원문에 pneuma는 맥락을 가리키는 3격으로 사용되고있다. ‘영적 차원에서 가난한 자’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영은 야훼에 속하고 야훼를 향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을 수 없다. 대려 가장 불행한 자가 된다. 그럼 여기서 pneuma는 뭐하고 관계하고 있는가? 인간의 내면을 가리킨다고 해야겠다. 그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다시 앞에서 말한 마음을 비운 도사 정도가 되는데….
이렇게 되면 해석이 진퇴양난에 빠진다. 이 아포리아를 인간존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구약성서의 도움을 받아 해결해보자. 시편 34편을 보면 친자식 압살롬에게 쫓기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는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다. 18절에 보면 ‘주님은 항상 마음이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신다.’란 표현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여기 ‘마음이 상한 자’와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가난이란 외부의 실질적인 압박과 결핍으로 마음이 상한자다. 마음을 비운 도사처럼 넉넉한 웃음을 자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뒤러의 ‘어머니의 초상’과 같이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이다. 외부/물질적인 결핍으로 내면세계가, 즉 영이 깨지고 상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먹이실 때 그들 마음이 더 상하지 않게 그들에게만 주지 않고 모두에게 준다. 옛날 밥 먹을 때 찾아와 마루에 걸터앉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밥상을 내놓았던 우리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말이다.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2021/03/08 |
2021/02/06 |
독일 한인 2세들의 우리말 능력은 다양하다. 크게 한국말로 대화가 가능한 2세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2세가 있다. 한글을 가르친 부모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부모들이 있다.
독일 대학에서 한국어 교수로 지냈던 분들 등 소위 두개의 언어를 문제없이 배울 수 있다는 걸 알만한 분들의 자녀들이 우리말을 전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해가 안 간다. 그런가 하면 자녀들이 집에서 독일말을 하면 ‘니 아버지는 무식해서 독일말 못해”라고 때리기까지 하면서 한국말을 가르친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 중 보수적인 차원을 넘어서 국수적인 분들도 있다. 근데 이제 이런 분들이 존경스럽다.
성경에 느헤미야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읽기 힘든 부분이 있다. 유대인 남성이 이방인 여성과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이 히브리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모국어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머리를 뽑아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흔드니까 머리가 한줌 뽑혔을 거다.
전반적인 내용상 느헤미야가 국수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느헤미야가 좋다.
2021/05/15 |
2021/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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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서점에서 사라졌던 맑스를 얼마 전부터 다시 볼 수 있다. MEW도 보인다. 자유[시장]주의자들도 좌파가 현실을 옳게 보지 않았냐고 묻는 상황에 자본론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고 불어나나 보다.
영국 보수 일간지 The Telegraph의 컬럼리스트 찰스 모어(Charles Moore)의 2011.7.22 컬럼의 시작부분이 흥미롭다.
“I'm starting to think that the Left might actually be right. It has taken me more than 30 years as a journalist to ask myself this question, but this week I find that I must: is the Left right after all? You see, one of the great arguments of the Left is that what the Right calls “the free market” is actually a set-up.”
그리고 토니 블레어의New Labour를 우파로 치고, 우파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못해서 [보수의 지지를 받고 보수를 지지했던 루퍼트 머독이 반사회적인 세력이 된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 부분이 재밌다. (The Left was right that the power of Rupert Murdoch had become an anti-social force. The Right (in which, for these purposes, one must include the New Labour of Tony Blair and Gordon Brown) was too slow to see this, partly because it confused populism and democracy.)
오래 살고 볼 일이다.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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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ür zehn auf dem Bau"란 표현 번역이 어렵다. "시급 10마르크"인지 "식구 열명을 위해서"인지 불분명하다. 둘다 맞을 것 같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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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wachsen"울 "못 먹어서 제대로 크지 못한"으로 번역했는데, "메쪼조르노가 몸에 베인 심성" 정도의 의미로 번역될 수도 있겠다. 그럼 물론 다음 전치가가 "mit"가 되어야겠지만 말이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