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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엿먹어라

퇴임한 독일 대통령에게 평생 지급되는 연금을 두고 또 시끄럽다. 주자, 줘서는 안된다. 크리스티안 불프의 비리 폭로를 선두(?) 지휘했던 깡 보수언론 사령탑  (주)악셀 스프링어 그룹 소속 „빌트 암 존탁“(Bild am Sonntag)이 실시했다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인민 78%가 크리스티안 불프에게  대통령연금을 주지 말자는 입장이다.


개인들로부더 갖은 혜택을 받고 그 대가로 혜택제공자에게 공금이 돌아가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사임한 사람에게 어떻게 „명예로운 일을 한 대가로 주는 보상“(Ehrensold = 독일 대통령연금의 공식명칭)을 줄 수 있느냐는 이야기다.

법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의견이 갈라지고 있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여.야가 합의해서 대통령연금은 지급할 것이다. 빤한 이야기.

근데 인민이 왜 이렇게 반응하지?

신자유주의 행패가 얼마나 심한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독일에 소위 „보잘것 없는 것에 관한 판결“(Bagatelle-Urteil)이 있다. 특히 고용자의 사소한 잘못을 빌미잡아 해고하는 사례가 지난 20년 부쩍 늘어났다. 만두 몇개를 먹었다는 이유로, 케이크 한조각을 먹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1.8센트어치 (30원쯤) 전기를 충전했다는 이유로 등등등 한없이 이어진다. 도둑질은 도둑질이며 고용주와 고용자 간 신뢰를 파괴하는 행위라면서.

에이 엿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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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크 인물평을 대신하여

2010년 6월 30일 [연방하원의원과 각주 정부가 파견한 의원을 50대 50 비율로 구성하여 소집되는]  14기 연방총회(Bundesversammlung)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흑황연정이 반가우크 입장을 고수하는 것을 독일정통보수 일간 FAZ는 2010.6.7 다음과 같이 평했다.  (관련기사 )

0 통독후 독일 정치인들의 공론공간에 대한 성찰(öffentliche Reflexion)과 자신에 대한 반성이 10대의 그것으로 퇴보한 반면, 요하힘 가우크는 그의 저서 „여름에 맞이하는 겨울 - 가을에 스며있는 봄“(Winter im Sommer – fruehling im Herbsrt)에서 볼 수 있듯이 베를린 공화국 정치계와 대조적으로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이런 10대 아이의 성찰수준으로 떨어진 정계의 모습은 기능장애에 걸린 가정에서 메르켈이 엄마노릇을 하는 모습으로, 혹은 응급실 의사 노릇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지적.


0 이어 흑황연정을 소위 „시민[세력]연정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흑황연정이 말하는 시민은 뭐냐고 질문하면서, 소비자로 전락한 시민을 다시 내용 충만한 자유개념으로 살려야 한다고 지적.


0 이와 관련 앞에서 언급된 저서에서 가우크가 한 말, 즉  „어떤 사람을 향한 , 더더욱이 어린이를 향한, 어떤 가치를 향한, 신을 향한, 예술을 향한, 자연을 향한, 어떤 일을 향한, 어떤 마음/몸가짐(Stil)을 향한  사랑에서 나 밖에 있는 그 무엇을 항해 기울어지는/굽어지는 [인간사회의] 바탕이 되는 보살핌(fundamentale Geneigtheit)이 발생한다. 책임으로서의 자유를 사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갖고 태어난 가장 좋고 깊은 역량(Potenzen)을 맞이하게 된다.“란 말을 인용하면서  시토앵으로서의 삶을 소비자로서의 삶으로 대체하는 경향과 달리 가우크의 자유개념은 시민개념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관조가 아니라 개입이라고 지적.  


0 가우크의 민주주의 개념 관련 그는 브레히트가 한 말을 달리 표현하면서 민주주의를 복잡한 것이지만 아주 단순한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면서, 민주주의는  어떤 형식적인 합의가 아니라 회의와 과학 사이를 오가는 변증법적인 동요(Unruhe)를 수반하는 믿음과 유사하다는 것.


0 가우크는 기독교 정신에 기반한 정치, 자유주의, 그리고 시민주의의 관한 자기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originäres) 신바람나는 민주주의 이해를 개발한 지성인이라면서,  기독민주연합, 기독사회연합, 그리고 자유민주당 등  이런 세 가지 이념에 기초한 정당들이 가우크를 연방대통령으로 뽑지 않을 것을 앞두고 이건 이성/지성적으로 합리화 될 수 없는 짓이라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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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의 정치공학과 가우크 대통령후보

역시 메르켈답다.

정치가 다수를 조직하고 그 중심에 서는 거라면 정치공학 달인 메르켈을 따라 갈 사람이 [아직] 없는 것 같다.

위기의 국면을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유도하는 면에서 탁월하다. 이 탁월함은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유연성에 기초하는 것 같다.  

크리스타안 불프 사임 후 메르켈은 사실 위기의 국면에 처했다. 흑황연정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었다. 흑황붕괴의 개연성 순간은 불과 30분, 아주 짧았지만 말이다.

2009년 총선에서 „감세, 감세, 감세“라는 순수 신자유주의 슬로건으로 14.6%라는 사상 최대득표를 이룩했던 자유민주당(FDP)이 금융위기가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고객관리정치를 일삼아온 결과 신뢰가 폭락하여 현재 연방의회 진출 컷트라인인 5%를 한참 밑도는 2-3%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민주당 수뇌부는 고육지책으로 [연정을 판돈으로 걸고] 메르켈 기민당이 받아들일 수 없는 가우크를 대통령후보로 결정하고 메르켈과 협상에 들어갔다.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흑황붕괴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다.

요아힘 가우크(Joachim Gauck)는 구동독 인권운동가 출신으로서 이미 2010년 6월 대선에서 야권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대통령 후보로 추대된바 있다.

이건 물론 야권이 여권, 특히 자유민주당의 균열을 유도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책임 속에 있는 자유’(„Freiheit in Verantwortung“)라는 슬러건 아래 시민사회의 확장과 장려를 최대 안건으로 삼는 가우크를 대통령후보로 추대함으로써 자유민주당을 균열하려는 시도였다. 자유민주당으로 할 것 같으면 지금은 신자유주의 세력이 당권을 장악한 상황이지만 시민사회와 인권에 뿌리를 두는 세력이 시장주의 세력과 균형을 이루었던 정당이다. 야권은 자유민주당의 시민사회 세력을 흔들리게 할 계산이었다. (그리고 사실 흔들렸다. 가우크가 여권과 야권의 표차가 압도적이었음도 불구하고 3차 투표까지 갈 수 있었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자유민주당이 가우크를 대통령후보로 추대하게 된 경위를 보면 우선 자유민주당내 시민사회 세력이 (특히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주 자유민주당지역대표 쿠비키 등이) 가우크를 내걸고 나섰다. (여기서 자유민주당의 당권이 시민사회 세력권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메르켈 기민당은 가우크 후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유 설명은 생략) 근데 범정당회의를 30분 연기하고,  그 30분만에 다시 한번 곡예사를 방불케하는 번복의 묘미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관건은  „책임속에 있는 자유“(Freiheit in Verantwortung)가 얼마나 „사회연대“를 (헤겔적 의미로) 지양하고 금융위기로 폭락한 정치인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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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0

"눈물은 아래로 흐르고 숟가락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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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통령 크리스티안 불프의 퇴임과 독일 전통보수진영의 행보 3

„Wohlstand für alle ist mehr als eine Phrase„(만인을 위한 복지는 빈말이 아니다.)

글쓴이: 토마스 스트로블(Thomas Strobl), 기민당 소속, 연방하원의원, 원내 바덴뷔르템베르크주 기민당의원그룹 의장  

 

2009.5.5

출처: 독일 정통보수일간 FAZ지가 진행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미래“ 제하 논쟁 시리즈 1회 (원문은 여기)


(번역)

독일에 새로운 종교가 들어섰다. 사회시장경제다. 신자유주의가 산산조각나 무너지고 사회적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오래전에 사라진 지금 우리는 다시 사회시장경제를 신봉하고 있다.    

어디를 보나 그렇다.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시장경제란 깃발을 치켜들지 않은 정당이 없다. 새로운 믿음의 유일하고 참신한 크루세이더로 인식되려고 각 정당지도부는 분주하다.

그러나 실천적으로는 믿는 척만 하는(aufgekkärt) 세속화된 사회가 - 예전에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시장경제의 지대한 요구에 보잘 것 없어 보이기 짝이 없는 공간만을 허용하고 있다. 저렇게 믿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짝을 이룰 수 있다는 관념아래 안위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정치적 선전 이면에는 사회시장경제가 정말 조촐하게 연명하고 있다.

(…)

독일은 한 때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의) „만인을 위한 복지“(„Wohlstand für alle“)라는 주도이념(Leitbild)아래 집결한 적이 있었다.  (…) 에르하르트의 계산은 아주 단순했다. 정치는 단지 케이크가 계속 크게 하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그에 따라 만인에게 더 큰 조각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었다.

[경제성장이 둔화되었지만 그래도 지난 10년동안에는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하르트의 정치적 후손들은 그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국민총생산의 실질성장은 거의 모두 기업이윤과 자본이윤의 몫이였고 일하는 사람들은 실질임금이  제자리 걸음하는 것을 감내해야만 했다.

자유화-만트라가 사회전반을 지배하게 된 것과 동시에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우연인가? 정치수뇌부는 우연이라고 믿는 것 같다. 메르켈총리는 최근에 절대적으로 외예적인 경우에만, 즉 가만 놔두면 항상 모든 것을 최적으로 조정하는 시장이 – 왜 그런진 알 수 없지만 – 이런 이상에 미달하는 경우에만 정부의 경제질서 개입이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변한 것은 분명 하나도 없다. 이것이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하게 될 미래의 경제사회정책에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계속“을 최상(Maxime)으로 삼고 감내하기를 원한단 말인가? 어제의 페러다임과 단지 다시 건 „사회시장경제“라는 간판으로밖에 구별되지 않는 경제체제를 감내하란 말인가?  

이건 민주주의자로서 받아들여선 안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유“와 „정의“라는 이름하에 제창된 모든 구호가 자유와 정의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명백하게 가리키는 사실 앞에서 주민 대다수에게 이미 텅빈 말장난으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외 [지금의] 경제위기가 시장경제의 두번째 체계적 오류, 즉 금융불안전성을 적나라하게 까바르고 있기 때문이다. 성급하게 잘못한 사람을 추정하여 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위기의 원인은 강도질하는 은행가에 있거나 불투명한 금융상품에 있지 않고 또 뭘 모르는 감독기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본질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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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통령 크리스티안 불프의 퇴임과 독일 전통보수진영의 행보 2

[사회시장경제의 모태가 된 규율자유주의 본고장]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전총리 에르빈 토이펠(Erwin Teufel)의 분노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Ich schweige nicht länger.“)

 2011.7.9 기민당 „Seniorenunion“ 모임에서 발표한 연설 (연설 전문은 여기)



(…)

내가 16세의 나이로 기민당(CDU-Christlich-Demokratische Union/기독민주연합)에 입당한 이유는 기민당의  „기독“과 사회시장경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우리 (기민당은) 기독교인들의 세계적인 사명, 즉 이웃사랑 및 가난한 자와 주변화된 사람들과의 연대를 이곳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긍정한다. 우리는 좌표는 현실이며, 공동의 복지이고, 인간의 기본권이며 기독교의 기본가치들이다. (…) (그래서) 기민당은 기독교를 좌표로 삼지 않는한 „기독“이란 간판을 사용할 수 없다. 

슈바벤 출신 국민경제학의 거장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160년 전에 돼지를 키우는 것은 국민총생산에 포함되지만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16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한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 아니다. 지난 160년 동안 변한 것이 하나 있다. 오늘날에는 금전가치로 환산되는 것만 가치있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교육에 모든 것이 달려있고 또 거기서 기초가  놓여지지만 가정에서의 교육은 [여전히] 전혀 값어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

가족정책에서도 „기독[교의 이념]“이 엿보여야 한다. 어린이의 안녕이 경제의 이익보다 앞장서야 한다. (…) 예전엔 기민당이 도입한 연방아동양육수당(Bundeserziehungsgeld)이 있었다. 2년간 지급되었다. 일정 소득이하의 가정에 지급되었다. 즉, 가장 필요한 부모들에게 지급된 수당이었다.


오늘날에 와선 기민당이 부모수당(Elterngeld)이란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수당은 1년만 지급되고 또 최종 실질소득과 연동되어 있다. 즉, 수퍼마트 캐쉬어로 일했던 엄마는 월 약 600유로 정도 받고, 은행직원으로 일했던 엄나는 월 1200 유로, 석사자격이 필요한 직장에서 일한 엄마는 월 1800유로를 받는다는 말이다. 가장 적게 벌었던 엄마들이 가장 낮은 수당을 받는다. 인간이 구상하는 불공평이 이보다 더 클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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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통령 크리스티안 불프의 퇴임과 독일 전통보수진영의 행보 1

2012.2.17 독일 연방대통령 크리스티안 불프의 전격 사임에 관한 몇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사건경위를 요약하자면 보수진영의 언론이 앞장서서 지난 두달 동안 크리스티안 불프를 상대로 니더작센주 총리라는 권력을 남용해  자기 이익을 챙겼다는 혐의를 지속적으로 제기했지만, 받았다는 것만 포착되었지 주었다는 반대급부의 정황이 포착되지 않아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반대급부제공 정황을 포착한 하노버 검찰청이 연방하원에 면책특권 철회를 요청함으로써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퇴임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 언론공세,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회적 풍토, 정치계의 신뢰하락 등이 여론화되었지만 여기선 좀 다른 시각에서 이 사건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사건의 중심에는 자기정체성 위기에 빠진 독일의 [자유, 카톨릭 사회윤리에 기초한 사회시장경제,  그리고 가치보수주의로 요약되는] 전통보수진영(Bürgertum)이  지금까지 행사해온 정치적 헤게모니를 사수하려는 허우적거림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왜  깡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언론이 보수진영이 뽑은 대통령을 이토록 못살게 굴었을까?

전통보수진영이 자기 정체성 위기를 느낄만도 하다.  녹색당의 „다문화사회“정책을 방불케하는 „다채로운 사회“, „이슬람도 독일에 속한다“ 등 크리스티안 불프의 독일 전통보수진영이 주창하는 주도문화(Leitkultur)이데올로기에 정면 대립하는 발언, 에너지정책 전환 등 앙겔라 메르켈의 ‚기민당의 사민당/녹색당화’ 등 독일 전통보수진영의 불만은 팽배했다. 그러나 본질적인 위기의식은 지속되는 금융위기에 그 원인이 있다.  2008년 금융위기도래 이후 신자유주의의 허구적 이상에서 점진적으로 깨어나고 있는 전통보수진영은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첨예한 비판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 비판의 전개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보고자 한다.    
 
크리스티안 불프의 퇴임은 우선 흑황 연정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독일 대통령은 별 볼일 없는 직위지만,  (좌우)정권교체 전야에 항상 차기 정권을 창출하는 진영이 먼저 자기쪽 대통령을 관철했다는 점에서 독일 정치세력의 현황을 읽게 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 기민당/사민당의 합의하 차기 대통령이 추대될 것인바 순수 신자유주의를 주창해온 흑황연정의 쥬니어 파트너 자유민주당이 견디기 힘든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안 그래도 자유민주당은 금융위기도래로 지지율이 2%선까지 하락한 이후 회복하지 못하고 아직 5%를 밑도는 수준이라 차기선거에서의 의회진출이 희박해진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직접 칼 맞은 사람은 크리스티안 불프이지만 사실은 신자유주의가 만든 사민당 소속 전총리 슈뢰더류 정경유착의 정치인 타입이고,  또 그 칼은 메르켈을 겨냥하고 있다.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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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부르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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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부르주아 ( 메이플소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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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inside my heart (루이스 부르주아/트레이시 에민, "Do not abandon m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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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so I kissed you. (루이스 부르주아/트레이시 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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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parrows heart (루이스 부르주아/트레이스 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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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스 부르주아, Fillette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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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7

몇가지 관찰.

1.
„Hälfte des Lebens“의 첫 행에 왜 „mit gelben Birnen“이라고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 ‚노란 배’라고 하는데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호루병 모양의 독일산 배가 노랗지 않기 때문이다. 잘 읶어도 누렇지 노란색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란 꽃’이라고 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노란 배’라고 하니까 한참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리 루이제 카쉬니쯔의 추측이 맞다면 횔더린은 이 시에서 보덴제 호수 근방의 전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최근 가서 본 결과 배보다 사과가 더 많다 (횔더린 당시엔 배가 더 많았을 수 있지만). 암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 표현이다.

그래서 그랬나? 이 시가 처음 출간될 땐 ‚mit gelben Blumen’(노란 꽃)이었다고 한다. 근데 Nobert von Hellingrath가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분석하고 „mit gelben Birnen“으로 바로 잡았다고 한다. (시 세개를 하나로 엮고 첫 두행을 새로 창작하고 거기다 제목을 „Die letzte Stunde“에서 „Hälfte des Lebens“로 바꾼 것을 볼 때 이 시의 출간이 시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리저리 생각하다 다시 음률을 분석해 보면서 이 시의 첫 두행이 현실전경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목가적인 전경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몇자 적어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첫 두행이 묘사하는 전경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제도된(konstruiert) 전경이다.

첫 두행은 약강이 엇갈리는 약강격으로써 각 3개의 강(Hebung)을 가지고 있다. 이 강을 따로 표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e (gelb-en) – i(Bir-nen) – ä(häng-et)
o (voll) – i(wild-en) – o(Ros-en)

다시 나는 소리에 따라 음성기호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Ɛ – i – Ɛ
o – i – o

일정한 규칙성이 엿보인다. 끝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마치 원과 같이 갇힌 구조다.

이렇게 보니 첫 두행이 그리는 전경이 그저 목가적이지 않다. 뭔가 썰렁하다. 그리고 „mit gelben Birnen“이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합법칙성에 따라 선택된 표현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2.

Und trunken von Küssen
Tunkt ihr das Haupt

 이 대목에서 일종의 수행적 자기모순이 엿보인다.

백조가 하는 행동을 보면 입맞춤에 만취하여 머리를 굽혀 물에 적시는 하향동작이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고 대려 상향한다. „trunken“의 u에 따르는 ü는 반음 정도가 더 높고 다음 행 „tunkt“의 u는 다시 반음 더 올라가 „trunken“의 u 보다 한음이 더 높다. 여기서 수행적 자기모순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읽을 수 있다면 이게 내가 이 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맥락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직 명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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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더린 - "Hälfte des Lebens"에 관한 몇가지 단상 6

부론: 1798년 11월 12일 횔더린이 노이퍼에게 보낸 편지

 

원문은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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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생각과 바램은(Gedanken und Sinne) 온통 시가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것이 될까(das Lebendige in der Poesie)란 질문을 놓고 왔다갔다해. 내 시가 아직 그런 살아있는 것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한없이 느껴. 까마득하지만 내 혼은 전심을 다해 그것을 향해 몸부림하고 있어. 그리고 내 작품들로부터 살아 있는 것의 이런저런 모습이 빠져있는 것을 느끼고 또 느끼면서도 [잘못된] 시적 행보에 휘말려 방황하는 날 잡아 건져내지 못하는 무능함이 엄습하면 난 어리아이처럼 자주 눈물을 흘려. 컨트롤이 안돼. 답답해. 세상은 어릴적부터 내 정신을 후려쳐 내면으로 기어들어가게 했고 나는 아직 그런 상황에 매달려 시달리고 있어. 시인이 되려다가 나처럼 [방황하고] 실패한 시인이라면 누구나 체면을 잃지 않고 도주할 수 있는 철학이란 병원이 있지. 그러나 난 내 첫사랑, 어릴적의 희망들로부터 손을 땔 수가 없어. 대려, 뮤즈의 달콤한 고향, 단지 우연에 의해서 쫓겨난 고향에 이별을 고하기 보다는 아무런 성과와 명예없이 몰락하는 편을 선택하겠어. 날 하루 빨리 참다운 것(das Wahre)1으로 데려다주는 좋은 조언이 있으면 일러줘.  내게 부족한 것은 [묵직한] 힘(Kraft)이라기보다는 가벼움(Leichtigkeit)이고, 큰 줄기들(Ideen)이라기 보다는 뉘앙스들(Nüancen)이며, 하나의 큰소리(Hauptton)라기 보다는 굽어굽어 펼쳐지는 다양한 소리들이며(mannigfaltig geordnete Töne), 빛(Licht)이라기 보다는 그림자들(Schatten)이야.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딱 하나, 내가 현실적인 삶에서(im wirklichen Leben) 천박한 것(das Gemeine), 그리고 일상적인 것(das Gewöhnliche)을 너무 두려워했다는데 있어. 네 말이 맞아. 나는 어쩜 이런 것들을 멀리하는 앞뒤가 꽉 막힌 사람(ein rechter Pedant)이야.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Pedanten), 내가 제대로 봤다면, 보통 냉정하기 짝이 없고 사랑이 없지만 내 마음(mein Herz)은 오히려 달빛 아래(unter dem Monde) 있는 [모든] 사람 및 사물과 망설이지 않고 형제자매하기 바빠. 내가  꽉 막힌 이유는 순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어도 돼. 현실에 의해서 나만 찾는 내 이기심이 흐트려질까봐 두려워서 꼼꼼하게 천박한 것과 일상적인 것을 꺼려했던 것이 아니야. 그런 것들에 의해서 마음 속 깊은 참여(innige Teilnahme)가, 나로 하여금 다른 것들과 기꺼이 하나가 되게 하는 참여가 흐트려질까봐 두려워서 그랬어. 난 내 안에 있는 따스한 생명이 대낮의 차가운 역사에 노출되면(an der eiskalten Geschichte des Tages) 차갑게 식어버릴까봐 두려워. 이 두려움은 내가 어릴때부터 날 때리고 파괴하는 모든 것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드렸기 때문인 것 같아. 그리고 이 예민함은, 내가 경험해야 했던 것에 견주어 볼 때, 내 자신이 그런 것들을 넉넉하게 이겨낼 만큼 견고하지 않았고 파괴되지 않게 조직되지 않았다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아.  이제 그런 것들이 보여. 보인다고 도움이 될까? 그렇다고 믿어. 뭐 이 정도야.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쉽게 파괴되기 때문에 나는 그 만큼 더 나에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물들에게서 뭔가 이익이 되는 것을 얻어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사물들을 그대로(an sich) 취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내가 지향하고 또 지향하는 삶(meinem wahrsten Leben)에 유용한 범위내에서 취한다는 말이야. 나는 이제 그런 것들을 접하게 되면 [버리고 멀리해서는 안되고] 애당초부터 절대 빠져서는 안되는 소재로 취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것들 없이는 내 혼이(mein Innigstes) 절대 완벽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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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횔더린이 말하는 "참다운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