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평론] 13호, 2002년 가을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하여
1. 97년 1월, 한 노동자의 분신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에 맞선 총파업이 한창이던 97년 1월 10일,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태화강 둔치에서 집회를 마친 울산 노동자들이 태화 로터리를 지나 시청 쪽으로 행진하려는데 그 길목을 무장한 전투경찰들이 막아섰다. 다른 지역에서는 연일 최루탄이 터지고 화염병이 날아다니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울산은 이상하게도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는데, 김영삼 정권으로서는 전국으로 흩어진 병력 탓에 ‘진압’ 인원도 마땅찮고 총파업의 핵인 울산을 잘못 건드려서 ‘비폭력’과 ‘질서’를 외치며 투쟁의 수위를 가까스로 ‘조절’해나가던 파업 지도부를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전날 시위대가 들고 나간 ‘근조 김영삼 정권’이라는 만장이 끝내 문제가 되면서 ‘한판’이 불가피해졌다. 바로 몸싸움이 벌어지고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한두 차례 밀고 당기는 싸움 끝에 이쪽과 저쪽은 사이를 두고 팽팽히 맞섰다. 거리는 돌맹이와 최루탄 조각들로 어지러웠다. 그 때 한 노동자가 길거리를 막아선 전투경찰 쪽으로 걸어나갔다.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온몸을 휩싼 불꽃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쟁! 노동악법 철폐까…” 불꽃이 외쳤다. 놀란 사람들이 불꽃을 뒤쫓아 달려나갔다. 뒤쪽에서 성난 돌맹이들이 전투경찰 쪽으로 날아들었다. 최루탄이 무차별로 폭사되었다. 최루탄 연기로 한 치 앞을 보기가 어려웠다. 연기가 잠깐 잦아드는 사이에 뒤쫓아간 몇몇 노동자들이 전투경찰의 소화기를 빼앗아 불을 끄고, 날아오는 최루탄과 돌맹이를 막으려고 쓰러진 분신 노동자를 에워쌌다. 119 구급차가 전투경찰 뒤쪽에서 달려온 건 10분쯤 지나서였다. 구급차에 함께 올라탔다. 제 몸을 불태운 노동자가 현대자동차 의장2부 정재성 소위원이라는 걸 안 건 구급차 안에서였다. 함께 탄 현대자동차의 한 활동가는 곁에서 내내 울음을 참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습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기꺼이 바칠 수 있습니다…저 괜찮습니다…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끝까지 투쟁해주십시오.”
95년 5월 12일, 정재성 소위원과 같은 사업부에서 일했던 해고 노동자 양봉수 대의원이 다른 해고자 4명과 함께 공동소위원연합회 출범식에 참석하기 위해 현대자동차 정문으로 들어가려던 길이었다. 20여명의 회사측 경비들이 4~5명씩 조를 이뤄 해고자들을 한 명씩 붙들고 문 밖으로 밀어내며 강력히 저지하자, 양봉수 대의원이 기름을 몸에 뿌리고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오늘도 내 몸에 손댄다면 불을 붙이겠다”며 가로막는 경비들을 밀치고 정문 안으로 3~4미터 밀고 들어갔다. 손에 든 기름병을 빼앗으려는 경비들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양봉수 대의원 사이에 밀고 당기는 몸싸움이 벌어졌다. 몸싸움 끝에 기름병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곧바로 경비 1명이 양봉수 대의원의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나머지 2~3명의 경비들이 달라붙어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그 순간 격분한 양봉수 대의원이 라이타 불을 당겼다. 순식간에 양봉수 대의원의 온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양봉수 대의원은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몇 발짝 움직였지만 결국 앞으로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옆에서 불길을 잡기 위해 달려든 해고자들이 급히 웃옷을 벗어 덮고 공동소위원연합회 깃발까지 덧씌워봤지만 불길은 쉬 잡히지 않았다. 황급히 경비실에 있던 분말소화기로 겨우 불을 끄고 구급차로 병원에 옮겼다. “나는 3만 조합원을 사랑하고 노동조합을 사랑합니다.” 후송된 대구 동산병원의 한 병상, 처절한 고통과 죽음의 문턱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토해낸 양봉수 대의원의 이 말은 현대자동차 3만 조합원의 가슴 속에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되살아났고, 빼앗겼던 민주노조와 무너졌던 현장조직을 ‘회복’시켰다.
양봉수 열사는 자본의 신경영전략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내린 현장을 되살려 ‘작업현장을 민주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노사협조주의와 실리주의를 내세워 자본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전락한 어용 집행부를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조합원들이 있는 공장의 정문에서 분신했다. 반면 정재성은 김영삼 정권과 신한국당에 의해 날치기로 통과된 개악 노동법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2단계 노동자 총파업투쟁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치열한 거리투쟁의 맨 앞장에서 분신했다. 97년 1월의 정재성과 한국 노동자계급에게 이 땅, 곧 우리 사회는 결코 민주적인 곳이 아니었다. 87년 이후 10년간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현장에서의 ‘노동자 민주주의’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지켜왔던 노동자들로서는 자신의 일자리를 뿌리째 흔들어대는 정리해고, 변형근로, 파견근로제 등의 법제화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단위사업장의 벽을 뛰어넘어 김영삼 정권과의 한판 승부에, 한국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정치총파업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재성의 분신은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작업현장의 민주화’를 넘어서 ‘이 땅의 민주화’, 곧 우리 사회에서의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극적 사건이었다. 노동자 정치운동은 이제 97년 1월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대중적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2. 노동자 정치선언, 96~7년 총파업
96년 12월 26일, 신한국당 소속 국회의원 154명은 새벽 6시에 자기들만으로 임시국회를 열어 7분만에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비롯한 11개 법안을 날치기 기습 통과시켰다. 노개위 공익위원 안보다도 훨씬 후퇴한 노동법 개악이 ‘노사관계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법제화된 것이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투쟁에 들어갔다. 12월 26일 83개 노조 14만명, 12월 27일 165개 노조 20만명이 총파업투쟁과 지역집회투쟁을 전개했다. 12월 28일 민주노총 175개 노조 21만8천여명이 총파업투쟁을 벌임으로써 1단계 총파업투쟁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해를 넘기면서 수그러들 줄 알았던 총파업의 열기는 97년 1월 6일 민주노총 150개 노조 19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대오에 복귀함으로써 되살아났다. 2단계 총파업투쟁은 1월 15일 민주노총 431개 노조 37만여명의 3단계 총파업투쟁과 한국노총의 시한부 파업동참으로 이어져 사상 최대규모를 기록했다. 전선은 전면 총파업투쟁에 이은 범민중항쟁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1월 17일, 제10차 투쟁본부(투본) 대표자회의에서 전면파업을 중단하고 수요파업으로 후퇴함으로써 20일 넘게 진행된 정치총파업투쟁은 마지막 순간에 완전승리를 거머쥐지 못한 채 사실상 막을 내렸다. 보수언론들조차 (파업 종결과 더불어) 정부의 일정한 양보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시점에, 김영삼 정권이 일정하게라도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것이 객관적으로 드러난 시점에, 사회 각계각층의 연대투쟁과 국제적 연대투쟁이 전면적으로 확산되고 최정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시점에-그리하여 파업투쟁에 대해 유보적이었던 시민단체들조차 연대를 표명하면서 투쟁진영에 합류하기 시작하고, 초기에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던 야당 국회의원들이 대거 파업장소로 찾아와 밤을 새기 시작한 시점에-, (민주노총도 참여한)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가 중심이 되어 정권에 마지막 압박을 가할 대규모 집회·시위 투쟁이 준비되고 있던 시점에, 정권과 자본에 대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핵심적인 부분에서 양보를 받아낼 수 있는 최상의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던 시점에, 다시 말해 한번 더 일격을 가하면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바로 그 시점에, 대통령을 만난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정부가 민주노총의 합법화를 약속했다는 언질을 단지 전해 듣는 것으로, 그것도 투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범대위 측과는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민주노총 지도부는 내부동력의 소진, 국민여론의 존중 등을 명분으로 ‘사실상의 총파업투쟁 철회’를 결정해 버렸다.(김세균, 「‘국민승리21’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장에서 미래를』 제41호, 99년 2/3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인간선언’이었다면 96~7년 총파업투쟁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정치선언’이었다. 민주노총은 이 투쟁으로 합법화를 뛰어넘는 지위를 얻어냈고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의 한국노총 탈퇴와 민주노총 가입이 늘어났으며 이름만 있고 활동이 없던 ‘휴면노조’들이 상당수 정상화되었다. 미조직 노동자들 또한 이 투쟁으로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세계 노동자들에게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공세에 대한 투쟁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투쟁으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이 국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3김을 누른 권영길’이라는 어느 시사 주간지의 표제에서 보듯 여야 할 것 없이 제도권 정치가 제 할 일을 못찾고 헤매는 동안에 민주노총은 우리 사회 보수정치를 뛰어넘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과 힘을 보여주었다. 투쟁이 한창일 때 국회는 개점휴업이었고, 오로지 투쟁하는 대중들과 명동성당의 지도부가 청와대와 직접 힘을 겨루는 ‘총파업정치’만이 한국사회 정치를 대표하고 ‘독점’했다. 국민들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힘있는 세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은 그만큼 보수정당들의 거짓 정치를 투쟁으로 제압하고 청와대와 직접 ‘정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치’는 겨우 싹을 틔웠을 뿐이고 가능성만을 보여줬을 뿐이었다. 민주노총 투본 대표자회의가 1월 17일 제도정치권으로 공을 넘겨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것은 이 새로운 정치의 싹을 좀더 풍부하게 키울 수 있는 길을 너무 일찍 막아버렸다. 뿐만 아니라 97년말 15대 대선에서 보여준 국민승리21의 “일어나라 코리아” 류의 어처구니없는 ‘국민’정치는 노동자 정치의 싹을 왜곡시키면서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 국민승리21(운동), 97년 15대 대선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글은 김세균, 앞의 글 참조.)
3. 정치적 노동운동에서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87년 이후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한 정치적 노동운동 진영의 각고의 노력들이 있어왔다. 이 과정은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87년부터 91년까지.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로 대표되는 노동단체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을 ‘지원·지도’하고 ‘민족민주전선’을 강화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뿐만 아니라 ‘ILO 기본조약 비준과 노동법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ILO공대위) 등 ‘민주노조총단결대오’의 한 주체로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파조직운동은 주체사상그룹(주사파)과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그리고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삼민, 노동계급, 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혁명그룹(제파PD) 등 PD 그룹으로 나뉘어 자신의 ‘정치’와 민주노조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2) 92년부터 94년까지. 이 시기에 정치적 노동운동은 ‘분해’와 ‘해체’의 길을 걷는다. 노동단체운동은 선진노동자조직론자들과 민중당 불참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민중당 참여(동조)세력을 다른 편으로 하여 분리되었다. 전노운협의 1차 분화는 전노운협을 분리해 나온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에서 한국사회주의노동당(한노당)세력이 빠져나가고, 전노운협에서 한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한노협)가 다시 분리되는 2차 분화로 마감되었다. 노동단체운동은 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가 만들어지면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공식 참가 자격을 잃어버렸다. 88년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 91년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노동운동탄압분쇄를 위한 전국노동자대책위원회’(박창수노대위), ILO공대위까지 민주노조총단결대오에 하나의 주체로 참여했던 노동단체운동이 민주노조총단결대오가 강화됨과 동시에 ‘배제’되어버린 것이다. 정파조직운동은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몰고 온 충격과 정권의 탄압으로 안팎에서 ‘해체’되었다. 민중당 해체 이후 한노당에서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로, 그리고 사회당추진위원회(사추위)와 민중회의로 갈라져온 (반)공개정치조직운동은 92년 대선 당시 백기완선대본에서 함께 했다가 사추위와 민중회의는 민중정치연합(민정연)으로 통합했고 민정연은 다시 진정추와의 통합 문제로 노동자중심의진보정당추진위원회(노진추)와 노동정치연대(노정연)로 분리됐다. 민정연 안에 있던 구 사추위 그룹은 진정추와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진정연)을 만들었다. (3) 95년부터 97년까지. 정치적 노동운동은 이 시기에 복원된 현장조직운동과 결합하면서 민주노총과 산업별 연맹 단계에 접어든 민주노조운동을 둘러싸고 새로운 노선 분화를 준비한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한노사연),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한노정연), 영남노동운동연구소(영남노연) 등 전국 단위의 연구소가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출범했다. 거의 활동을 중단했던 진정연은 96~7년 노개투총파업 이후 대선을 앞두고 국민승리21로 ‘부활’했다. 노동단체, 연구소, 학술진영, 청년운동, 공개정치조직운동 등에서 좌파적 흐름을 형성해온 세력들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로 모였다. 정치연대는 97년 대선에서 국민후보 대신 노동자·민중후보를 주장하며 국민승리21에 참여했다. (4) 98년부터 현재까지.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을 등에 업고 진정추를 거쳐 민주노동당으로 전환했다. 정치연대는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예비모임’(새정조)으로 전환되었다. 새정조 논의에 함께 했던 노진추는 민주노동당에 합류하여 그 내부에서 평등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고 한국노동청년연대(한청연)는 정치연대의 국민승리21 참여를 비판하며 청년진보당→사회당으로 독립했다. 새정조는 99년 8월 노동자의힘으로 전환했다.
87년 이후 민주노조/현장조직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의 결합에서 두 가지 편향이 존재했다.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과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이 그것이다.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은 언제나 현장 노동자를 대상화시키고 노동운동을 밖으로부터 계몽해야 할 하위의 부문운동으로 협소화시켰다. 반면에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은 현장을 절대화시키고, 일체의 정치운동을 외부세력의 음험한 개입으로 단정지었다. 이는 이른바 바깥에 대한 극단의 피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협소한 노동자주의의 또 다른 재판이었다.
정치적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통일을 제대로 이루어내기 위해 필요한 전제는 정치적 명확성과 현장성이다. 97년 이후 정치적 노동운동은 본격적인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전화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조운동, 현장조직운동, 연구소운동, 노동자 정치운동 등이 자기 자리를 잡아나가면서 그 모든 영역에 관여했던 노동단체운동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노동자 정치는 이제 뭉뚱그려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민족주의냐, 사민주의냐, 사회주의냐를 분명히 할 것을 요구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조직형식 또한 이제는 정당 수준에서 민족민주정당이냐, 진보적 국민정당이냐, 노동자계급정당이냐를 명확히 해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4. 민주노총의 정치방침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은 2000년 1월 18일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후보는 단위노조, 연맹, 지역본부의 승인을 전제로 민주노총 중앙위원회의 동의를 거쳐 민주노동당 후보로 추천한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1월 26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정치위원회가 보낸 “민주노동당원이 아니더라도 민주노총 후보가 될 수 있느냐?”는 내용의 질의에 대해 2월 1일자 답변에서 “총선에 출마할 의사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 민주노동당 후보로 추천되는 것을 거부한다면 ‘민주노총 후보’의 자격을 가질 수 없다”고 하여 민주노총 각급 의결 단위에서 승인된 후보는 반드시 민주노동당의 ‘예비’ 후보여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이러한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99년 8월 23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결정한 “부르주아 보수정당이 아닌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의 대의에 입각하여 활동하는 제정치조직에 민주노총 조직원이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민주노총은 제정치조직과의 관계에서 대중조직 고유의 상대적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제정치조직과 연대·지지·지원을 강화하되 구체적인 내용은 조직의 결정에 의한다”는 방침에 정면으로 위배될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를 마치 상하부 관계인 것처럼 왜곡시킴으로써 거센 항의와 다양한 문제제기를 불러 일으켰다.
2000년 2월 11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대의원대회에서 현장조직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를 중심으로 한 대의원들은 “현대자동차 전체를 통틀어 민주노동당원은 2~300명 밖에 안되고 대의원들의 경우도 민주노동당원은 얼마 되지 않는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4만 조합원을 대변할 수 없다. 노동자 정치조직은 민주노동당만 있는 게 아니다. 노동자의힘도 있고 청년진보당도 있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만이 민주노총을 대변해야 한다는 방침은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의 특수성을 무시한 것이고 노동조합이 앞장서서 조합원의 정치활동의 자유를 억압하는 패권적이고 비민주적인 잘못된 방침이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의 하부조직이 아니다. 민주노총의 승인을 얻은 후보가 반드시 민주노동당원이어야 한다면 민주노동당 내에서 후보를 추대하면 될 일이지 왜 복잡하게 당원 아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가? 민주노동당원이 아닌 사람이 민주노동당의 예비후보를 선출해야 하는 이런 모순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민주노총이 하나의 정치조직만 승인하고 지지하고 지원하겠다는 것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이는 대단히 큰 잘못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민주노총이 가장 비민주적인 독재의 전형을 보여주는 꼴이 될 것이며 조합원 대중의 다양한 정치의식을 강제로 묶어두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4.13 총선 후보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아니라 노동자 후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동조합 후보의 성격을 둘러싸고 5시간 이상 격론을 벌였다. 팽팽한 논란 끝에 민주노총 지침을 따른다는 안과 안 따른다는 안으로 표결에 부쳐져 166:80으로 민주노총 방침대로 한다는 안이 통과되었다. 결국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4.13 총선 후보는 민주노동당 ‘예비’ 후보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에 반발한 민투위 강성신 후보는 “절대 다수가 민주노동당 당원이 아닌 조합원의 의견을 무시한 결정”이라며 유세를 마치고 총선 후보를 사퇴했다. 실천하는 노동자회(실노회) 박상철 후보와 현대자동차노동자신문(현노신) 이상범 후보가 표결에 들어갔고 1차 120:114로 박상철 후보가 이겼으나 과반수에서 1표가 모자라 2차 투표까지 가는 경합 끝에 110:121로 이상범 후보가 역전 당선되었다.
애당초 민주노동당 내부 경선으로 치르면 그만일 문제가 무리하게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대의원대회의 예비 경선을 거치게 된 데는 울산 민주노동당 내의 ‘역학관계’가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기정사실화’하여 민주노동당 내부 절차를 유리하게 끌고 가겠다는 ‘계산’이 예비 경선 과정의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계산’은 결과적으로 ‘오산’이 되고 말았다.
2000년 3월 9일 민주노동당 울산광역시지부 총회에서 이상범 현대자동차 예비후보와 세종공업 최용규 후보 사이에 북구 지회 경선이 벌어졌다. 이상범 후보에 대한 찬반 투표 절차만 거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경선까지 가게 된 것이다. 투표 결과 전체 당원 90.8%가 투표에 참여하는 치열한 접전 끝에 466:513으로 최용규 후보가 당선되었다.
민주노동당 내 경선과정의 ‘후유증’은 4.13 총선 패배와 6.8 보궐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를 내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2000년 6월 2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6차 운영위원회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요청에 따라 시의원 후보 김주희 동지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의 지지 후보로 한다”고 결정했다. 민투위 소속이었던 김주희 후보는 민주노동당원이 아니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이 결정 과정이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에 어긋나는 부분도 있”지만 “지난 총선투쟁의 패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한 순간도 멈춰서는 안된다는 대의”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6월 2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가 내린 결정은 분명 2000년 1월 18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정치방침’에 “어긋나는” 것이지만, 99년 8월 23일 15차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일반 원칙’에 비추어 본다면 ‘올바른’ 결정이었다. 게다가 이 결정은 4.13 총선을 전후한 울산지역 노동운동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활로’였다. 2000년 1월의 잘못된 민주노총 정치방침은 ‘현실’에서 이미 ‘교정’된 셈이었다.
그러나 2002년 1월 15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논란 끝에 “200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후보로 추인받고자 하는 조합원은 민주노동당을 통해 출마한다”고 결정함으로써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현재 민주노동당원은 민주노총 조합원의 2%도 채 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만의 결정으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지지를 끌어내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게다가 올해 정세는 98년과 달리 매우 불리하다. 그리고 4.13 총선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승복할 수 있는 후보 경선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점을 들어 민주노동당 총회가 아닌 민주노총 조합원 총투표의 필요성을 강변했고, 결국 ‘관철’시켰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의 이러한 결정은 민주노동당원이 아니더라도 민주노총 후보가 될 수 있다고 한 점에서, 그리고 민주노총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민주노동당의 결정과 무관하게 후보가 사실상 확정된다는 점에서 민주노총 정치방침을 어느 정도 바로잡은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대중적, 민주적 절차를 통해 후보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결정의 이면에는 지난 4.13 총선에서 작동했던 울산 민주노동당 내부의 분파 역학이 증폭되어 작용하고 있었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지방선거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하루 앞둔 2002년 3월 7일 최용규 금속노조 울산지부장의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운영위원 자격을 문제 삼았다. 알칸사 노조가 금속노조를 탈퇴함으로써 금속노조 울산지부의 조합원이 2,000명이 안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태광 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했기 때문에 태광 정리해고자들에게 투표권을 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태광정리해고저지투쟁위원회(태광정투위)로 하여금 “민주노조를 빼앗긴 것도 억울한데 민주노총이 투표권까지 박탈할 수 있느냐?”는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태광정투위에도 투표권을 주는 것으로 결정이 번복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송철호 변호사는 민주노총 조합원 총투표가 임박할 때까지도 무소속 시민후보로 나설 뜻을 계속 비추다가 총투표 직전에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이렇게 된 사정은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에서 송철호 변호사가 무소속으로 총투표에 나선다면 이갑용 전위원장을 시장 후보로 내세우겠다고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송철호, 김창현, 이갑용의 3자 경선으로 총투표가 치러진다면 송철호 변호사나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지부장의 경우 결코 유리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막판 ‘조정’이 이루어졌는데, 송철호 변호사가 민주노동당에 가입하고 이갑용 전위원장이 동구청장 후보로 나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되자 결국 “민주노동당, 사회당, 노동자의힘, 시민사회단체 등 지방선거에 후보를 출마시키고자하는 모든 민주진보세력은 민주노총 조합원 총회를 ‘부분개방형 예비선거’로 인정하고 후보를 출마시켜 그 결과에 승복한다”는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의 결정과 달리, 실제 총투표는 ‘부분개방형 예비선거’가 아니라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만’의 합동총회로 치러짐으로써 애초 노동자 민중운동세력의 총의를 모아나가는 총투표로서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과정상의 결과로서 당연한 것이겠지만, 노동계와 시민운동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출마한 송철호 후보는 초반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이전보다 더 큰 표차로 낙선하고 말았다. ‘현상 유지’와 민주노동당의 선전이라는 ‘자위’ 속에서도 4.13의 ‘악몽’은 되풀이되었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이 과정에서 현실 운동세력의 ‘역학’에 따라 사실상 ‘폐기’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합동총회라는 형식 속에서 명맥은 유지되었고, 민주노동당이 자민련을 누르고 우리 사회의 제3당으로서 대중적 정치집단으로 부상하면서는 오히려 더 강화되게 되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부적절한 관계’는 최근 이른바 ‘진보진영의 대통합 작업’에서도 삐걱거리고 있다. 2002년 7월16일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10개 단체는 ‘2002 대선 승리를 위한 범진보진영 주요단체 지도부 간담회’를 열고 “2002년 대선승리와 범진보진영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범국민추진기구(범추)를 8월말까지 구성하고, 예비경선을 통해 단일후보를 선출하며, 그 후보는 진보정당의 이름으로 출마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합의’의 이면에는 2002년 울산 지방선거에서 작동했던 동일한 정파역학이 숨겨져 있다. 다만 여기서는 이 역학이 전국적 범위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날 간담회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자통협),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예비 경선을 통해 뽑힌 후보가 범추 후보인지, 아니면 민주노동당 후보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전국연합은 7월 18일 비상중앙상임위원회에서 “예비경선에 참여하고 후보 방침을 8월 9일 임시 대의원대회를 통해 최종 결의한다”는 방침을 결정함과 동시에 오종렬 의장의 후보 출마를 가시화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내부의 일각에서 ‘예비경선’ 또는 ‘국민경선’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7월 24일 전국집행위원회에서 “범추의 예비경선에 참여할 민주노동당의 후보를 당원 직선으로 늦어도 9월초까지 선출한다. 예비경선의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향후 공동기획단이 안을 제출하되 10월말까지 범진보진영 단일후보 선출을 완료한다”고 결정했다. 한편 민주노총은 사회당이 7월 19일 상임집행위원회에서 범추에 불참할 것을 분명히 하자 “7월 16일 진보진영 주요단체 지도부 간담회 합의사항에 따라 사회당 등 대선 후보 출마 가능성이 있는 조직이 모두 참여하는 범추 구성을 8월말까지 추진한다. 대선 후보 출마 가능성이 있는 사회당이 범추에 참여하지 않을 때에는 범추의 명칭과 역할을 재조정한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한 지붕 아래 사민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위태롭게 동거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원은 민주노총 조합원의 2%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2001년 민주노총이 결의한 김대중정권 퇴진투쟁을 거부했고,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대신에 상가임대차보호법과 같은 소상인 보호와 선거 캠페인에 매달렸다. 게다가 2001년 전국연합의 9월 테제에 따른 민족민주정당 건설 방침은 한총련을 비롯한 그들 세력의 대거 입당을 낳았으며 이는 민주노동당의 이념적 지향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조만간 그들 세력이 다수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으로까지 접어들고 있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이 현저하게 다른 정치 세력보다 노동자계급정당이라는 공식적 상표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1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결정에 의한 민주노동당 지지, 지원 그리고 중앙위원 삼분의 일에 대한 민주노총의 파견 조항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노조 상층 간부의 정치 진출을 위한 통로 역할을 하면서 ‘정치는 당, 경제는 노조’라는 이분법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이 이분법은 민주노동당 탄생의 기원이었던 ‘사회적 조합주의’ 또는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형태로 완성될 것이다. (박영균, 「특집-현시기 계급투쟁의 상태와 좌파의 모색」, 『노동자의힘 기관지』 12호, 2002. 8. 5.)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과의 이러한 왜곡된 구도에 언제까지 ‘볼모’로 잡혀 있을 것인가?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지금으로서는 2002년 4.2 총파업 철회 이후 최대 위기에 직면해 있는 민주노조운동을 총체적으로 혁신하고, 조합주의·의회주의적 정치세력화노선을 타파하는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운동’이 대중적으로 본격화되지 않는 이상 쉬 바로잡히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5. 노동자 정치세력화-민주노조운동, 투쟁과 조직의 무기
“노동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자!” 98년 이후 투쟁 현장과 선거 공간에서 자주 외쳐지는 구호다. 노동자 정치운동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노동자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87년 이후 한국 노동자계급이 ‘쟁취’하고 키워온 힘, 특히나 계급대중운동으로서의 민주노조운동이 지난 15년간 획득해온 투쟁력과 조직력을 점검하고 과제를 뽑아내는 일이야말로 현시기 노동자 정치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기 위한 기본 전제가 될 것이다.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풍부한 역동성을 갖고 전개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부단히 자신의 힘을 키워왔다. 먼저 지난 15년간 전개된 민주노조운동의 대표적 투쟁들을 살펴보고, 민주노조운동 내부에 경험으로 체화되어 있는 이 투쟁의 힘이 노동자 정치운동에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지를 검토해 보자.
(1)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과 전노협 5월 총파업투쟁. 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을 이끌었던 지도부에 대한 재판에 참가하기 위해 조합원을 동원했다는 이유로, 어렵게 탄생한 민주집행부의 이영현 위원장과 우기하 수석부위원장이 구속되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이갑용 사무국장을 의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90년 4월 25일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4월 28일 새벽 전국 각지에서 동원된 만여명의 전투경찰병력이 백골단을 앞세우고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진격을 개시했다. 육·해·공 삼면에 걸친 이른바 ‘미포만’ 작전이었다. 실제 전투상황을 방불케 하는 이 작전은 노동자들을 국가안보의 ‘적’으로 규정하고 입안되었다. 그러나 ‘공권력’은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현대중공업으로 향하던 경찰병력을 저지하면서 격렬한 가두 바리케이트전을 벌였던 것이다. 4.28 연대투쟁으로 불리우는 이날의 투쟁은 “현중이 깨지면 현자도 깨진다”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연대의식과 “여기서 더 물러설 수는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예기치 못한 기습으로 한 시간 이상을 지체한 공권력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저지선을 간신히 뚫고 현대중공업으로 진격해갔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현대중공업 정문의 1차 저지선이 무너지자 노동자들은 비상식량과 식수를 챙기고 난공불락의 요새 골리앗 크레인으로 올라가 결사항전에 돌입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이 되었던 골리앗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은 몰리고 몰린 마지막 벼랑 끝 골리앗 상공에서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설 수는 없다!”고 선포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투쟁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과 마창노련의 동맹파업으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5월 1일, 5월 3일, 5월 4일 전국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중간노조들의 광범위한 파업 동참으로, 국민연합의 5월 9일 반민자당 전국동시다발투쟁과 5월 18일의 국민대회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현대자동차 4.28 연대투쟁→마창노련 동맹파업을 비롯한 선진 지노협의 동맹파업→전노협 5월 총파업(정치파업)→한국노총 산하 중간노조의 임투 참여(경제파업)→국민연합의 반민자당 전국동시다발투쟁으로 발전한 이 투쟁은 우리 사회 대중투쟁의 합법칙적 발전경로를 보여주었으며 90년 1월 22일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구심체로 출범한 전노협을 투쟁으로 사수해냈다. 뿐만 아니라 이 투쟁은 7~80년대 반독재 민주화투쟁에서 보여진 ‘가두에서 촉발되어 가두에서 끝나는 무계급적 전민항쟁노선’의 한계를 ‘왼쪽에서’ 실질적으로 극복해냈는데 이후 전민항쟁노선을 ‘오른쪽에서’ 폐기한 일군의 사람들은 90년대 초중반 시덥잖은 ‘고백’ 어쩌고 하면서 ‘선거혁명’의 달콤쌉싸름한 길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골리앗투쟁은 한국사회 변혁의 ‘물리력’이 어떻게 생성·발전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법칙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물리력은 노동자계급 선진층의 ‘정치력’과 결합되지 못한 것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투쟁의 정점에서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은 눈물을 머금고 깃발을 내려야만 했다.
(2) 91년 5월투쟁. 91년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진압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연합을 위시한 재야단체들이 신속하게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를 꾸렸고 전국적 가두시위가 폭발했다. 범대위는 이 투쟁을 ‘보수대연합에 반대하는 민주대연합-민주정부 수립’으로 모아가고자 했다. 한편 평민당을 비롯한 제도권 야당들은 투쟁 수위를 조절하면서 지자체 협상의 유리한 교두보로 이 투쟁을 활용하고자 했다. 87년 6월 항쟁에 무차별 가두 대중으로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부산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이 옥중에서 의문사하자 5월 6일 전노협과 업종회의, 노동운동단체들이 모여 박창수노대위를 결성하고 조직적으로 5월투쟁에 참여했다. 5월 7~8일의 거리투쟁, 5월 9일의 시한부 파업투쟁, 5월 11일의 대규모 거리투쟁은 5월 18일, 전국 16개 지역에서의 총파업투쟁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민주대연합-민주정부 수립’이라는 슬로건에 만족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노동자들은 ‘민중권력’과 ‘노동자권력’을 소리높여 외쳤다. 아직 정식화되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범민중적인 정치투쟁 공간의 한복판에서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정치 구호를 제출했던 것이다. 5월투쟁은 단위사업장의 이해관계가 당장 걸려 있지 않더라도 노동자들이 특정한 정세에서 민주주의투쟁전선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직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전노협이라는 개별 기업노조들의 협의체라는 조직틀과 노대위라는 사안별 공동투쟁체계만으로 당면한 정치적 쟁점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는 ‘현장에서는 임투, 가두에서는 정치투쟁’이라는 이분법적 한계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또한 완성된 형태의 정치파업이 조직되지도 않았고, 90년 골리앗투쟁에서 보여졌던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의 광범한 결합과 이에 기초한 민중연대투쟁으로의 역발전 역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고 개별 기업 단위로 힘겹게 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3) 96~7년 노동법개악저지 총파업투쟁. 이 투쟁은 앞서 본 바대로 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정치총파업이었고 노동자정치, 총파업정치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준 투쟁이었다. 90년의 정치적 총파업이 노동운동탄압분쇄, 전노협 사수를 위한 방어적 투쟁이었다면 96~7년 정치총파업은 노동법 개악과 재개정을 둘러싼 공세적 투쟁이었다. 91년 5월투쟁에서 가두정치와 현장정치가 분리되었고 가두정치를 현장정치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면, 96~7년 총파업은 이 둘을 역동적으로 통일시켰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정당의 부재로 인해 이 ‘정치’총파업은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조합조직이 전적으로 지도해야 했고 범대위가 결정적 순간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조합주의적 정치투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한국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단결은 이제 현실의 과제로 제기되었고 이 과제는 사민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연합한 민주노동당의 선거·의회주의 정치세력화와 사회주의 세력의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운동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4) 2002년 발전노조 파업투쟁. 98년 현대자동차 노조의 정리해고 반대투쟁과 이번 발전노조의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투쟁을 비교해 보면 몇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98년 정리해고 문제가 우리 사회 전체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을 때 현대자동차 노조는 “노동조합이 희망퇴직으로 1차 양보하고 임금삭감으로 2차 양보했는데도 회사가 정리해고를 강행하려고 한다. 회사가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면 무급 순환휴가든지 다른 다양한 방법을 찾아볼 수 있다”고 버티다가 막판에 정리해고 최소화에 합의하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처음부터 ‘실질임금 삭감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정리해고 그 자체를 쟁점화시킨 것이 아니라 잔뜩 웅크려서 수세적인 자세로 일관했던 것이다. 36일 동안의 공장점거 파업투쟁, 조합원과 그 가족들이 보여줬던 강력한 투쟁 의지와 공권력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자신감, 매일 뉴스 머리를 장식하면서 정리해고 문제를 전사회적 쟁점으로 선도했던 그 투쟁의 규모와 파급력을 생각한다면 ‘논리’가 너무 빈약했고 초라했다. 거인이 아기 목소리를 내고 호랑이가 고양이 목소리로 운 꼴이었다. 이에 반해 발전노조는 처음부터 민영화·사유화 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끝까지 버텼다. 노동조합과 정부 사이에 공방은 오로지 사유화 문제로 집중되었고 우리 사회 전체가 그 문제에 대한 찬반의 입장을 강요받을 정도로 발전산업을 사유화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그 자체로 선명하게 쟁점화되었다. 그 결과 노조 출범 이후 협상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단협과 같은 나머지 문제들을 자동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파업 한번 안해본 노동조합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현대자동차 노조 지도부조차 웅크러들었던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부딪쳤던 것이다. 발전파업은 이렇듯 “가장 원칙적일 때 가장 현실적일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줬다. 지금까지 제조업, 특히나 금속 대공장 노조의 파업투쟁은 공장점거투쟁이고 공권력과의 물리적 충돌까지 불사하는 투쟁이었다. 98년 현대자동차가 그랬고 99년 한라중공업이 그랬다. 현재까지 금속 대공장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투쟁의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 것은 한라중공업 노동조합이다 그러나 파업의 적극적 형태인 공장점거투쟁에 이르면 지배계급과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대립의 긴장 정도나 수준은 차원이 달라진다. 공장점거 투쟁은 단순히 노동력 판매를 거부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준이든 ‘생산수단’을 노동자가 장악하는 형태를 띤다. 이럴 경우 과연 ‘생산수단’의, ‘공장 전체’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심각한 긴장이 발생한다…또한 공장점거 파업투쟁은, 노동자가 장악한 공간(공장)에 국가권력의 힘이 미치는 정도를 약화시킨다. 그 곳에서는 국가와 자본의 진짜 모습에 대한 정치 폭로를 훨씬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으며, 노동자의 정치학교, 노동자 정치의 장이 된다. 이제 그 곳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그들에 의해 강제된 질서는 힘을 잃고, 노동자 스스로 규율과 질서를 새롭게 세워나갈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이 된다. 노동자대중은 자신이 만든 규율과 질서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이제까지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훈련과 경험을 쌓게 된다. 한라중공업 공장점거 투쟁에서 이 점 역시 현실화되었다. 그들은 단지 공장이라는 공간을 장악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곳을 자신들의 정치적 해방구로 만들었다. 파업기간 동안 교육과 토론이 계속되었다. 그 곳에서는, 노동자들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수직적 전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각 정문별로 스스로 파업 프로그램을 짰으며, 민주적 토론을 거쳐 세운 규율과 질서에 따라 강고한 노동자 군대가 되어 갔다. 공장점거 투쟁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그것이 매우 강고한 전투성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소수에 의해 진행되는 투쟁 형태가 아니라 가장 대중적인 투쟁 형태라는 데 있다. 공장점거 투쟁은 절대 다수의 대중이 참여하지 않고는 성립이 불가능하며 유지될 수 없다. 사실 가두에서의 집회나 투쟁은 오히려 선진적인 소수가 동원되는 형태이다. 그리고 가두 투쟁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일회적 투쟁임에 비해 공장점거 투쟁은 일단 성립하면 그 특성상 일정한 지속성을 갖게 된다. 다수의 대중이 참여하여, 상당 기간 동안, 강고한 전투성을 발휘할 수 있는 투쟁이 바로 공장점거 투쟁이다…결론적으로 말해…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적, 정치적 해방을, 다수의 일반대중이, 일정기간에 걸쳐, 전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공장점거 파업투쟁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험이다.(노동자의힘(준비모임), 『결코 꺾이지 않은 미완의 투쟁 : 한라중공업 노동자투쟁 공장점거파업투쟁 분석』, 1999, 32~34쪽.)
. 반면 공공부문 파업투쟁의 전형은 이번 발전 파업에서 가장 잘 보여졌듯 상징 거점에서의 지도부 점거투쟁과 조합원들의 산개투쟁이다. 이전에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전지협),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의 산개파업 시도가 있었지만 이번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이번 산개파업에서 핸드폰과 인터넷은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38일 동안 가족들은 남편 말만 믿고, 남편인 조합원들은 위원장 말만 믿었다. 산개파업은 그러나 숨어지내는 투쟁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산개파업 대오의 번개집회와 조별 피켓팅 등의 전술이 선보였지만 좀더 공세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수도권 일대의 노조 상급단체와 노동단체 사무실에서 산개 조들을 묶거나 섞어 실시했던 교육과 토론은 좀 더 일찍 적극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보여지는 투쟁은 그래서 가족들 몫이 되었고 4월 2일 민주노총 지도부에 의해 파업이 어이없이 마무리된 후에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 큰 혼란과 패배감을 맛봐야 했다. 4월2일 마지막 파업타결이 TV속보로 보도되었을 때 나는 믿고싶지 않았다…난 절망을 보았다. 사택에 도착해서 집사람을 보고 나는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가방만 던져놓고 사택앞 집회장소로 가는 골목에서 엉엉 울었다. 무엇이라 말해야 하나. 무엇을 하고 왔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지금까지도…하지만 도려내어진 양심과 가슴들은 역사 앞에 다시 등장해 살아날 것이라 믿는다. 나와 함께 했던 많은 민주노총 동지들과 잊을 수 없는 추억들과 함께.(성용, 「38일 동안의 화두」, 『노동자의힘 기관지』 5호, 2002. 4. 20.)
(5) 2002년 철도파업. 이 투쟁은 비록 여러 면에서 많은 오류와 한계를 드러냈지만 기계를 세워 생산에 직접 타격을 주는 투쟁만이 아니라 유통을 중지시키는 투쟁도 훨씬 위력적인 ‘파업’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요 고속도로와 철로를 점거함으로써 유통과 생산을 ‘타격’하는 아르헨티나의 실업자운동과 같은 투쟁들이 철도파업 이후 우리 사회에서 또 어떻게 ‘생산’될 것인지는 과제로 남는다. 철도파업이 2002년 인천택시의 65일 파업투쟁과 같은 택시파업과 화물차 운전노동자들의 고속도로투쟁, 버스파업, 2001년과 같은 항공사 조종사들의 파업투쟁 등 운수노동자 전체의 투쟁으로 모아지고 지역별 실업자운동이나 기층 주민운동과 결합된다면 지금까지의 그 어떤 투쟁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것임에 틀림없다.
지난 15년간 대표적인 다섯가지 투쟁을 통해 살펴본 민주노조운동의 이 역동적 투쟁력은 그러나 98년 2월 정리해고 노사정 합의와 합의안 부결, 비대위의 총파업 결의와 철회에서 시작해 2001년 7.5 총파업 무산, 2002년 4.2 총파업 철회에 이르면서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98년 이후 총파업은 민주노총의 일반적 지침이 되었다. 그러나 ‘총파업’은 철회되기 일쑤였고 단위사업장의 긴박한 투쟁들과 결합되지 못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은 대정부·대자본 교섭을 위한 압력용 일정으로 ‘선포’될 뿐이고 시기별·연맹별로 분리되면서 철회되거나 하루 이틀 ‘단타’로 진행될 뿐이었다. 당연히 단위사업장의 파업투쟁은 ‘외로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36일 파업투쟁과 만도기계, 조폐공사 파업투쟁, 99년 서울지하철 8일 파업투쟁과 한라중공업 52일 파업투쟁, 한국중공업 빅딜·민영화 반대 파업투쟁이 그랬다. 2000년 대우자동차 해외매각을 반대하는 자동차 4사 파업투쟁은 (특히 현대자동차에서) 명백히 ‘총선용 투쟁’으로 ‘변질’되었고 그렇게 ‘활용’되었다. 2001, 2002년, 민주노총은 이제 현장에서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렸고 대공장 노동조합들의 일시적 ‘개량화 현상’과 더불어 민주노조운동 전체의 ‘관료화’가 심화되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위로부터의 투쟁이 괴리되는 민주노조운동의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민주노총을 근본적으로 혁신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는 일이 급선무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이 개별 연맹들에 휘둘리지 않는 전국투쟁의 실질적 지도부로 위상을 회복·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파업투쟁 지도부, 특히나 그 투쟁이 총자본과 총노동 사이의 첨예한 정치전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 그 지도부는 노동조합만이어서는 안되고 노동자정치조직이 마땅히 그 지도부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지난 93년 전노대 이후 계속되어온 노동조합운동의 과잉결정권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 정치운동의 핵심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대중투쟁에 있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이 대중투쟁의 경험과 무기를 풍부하게 갖고 있다. 그러나 아래로부터의 이 풍부한 대중적 역동성은 위로부터 관료제적인 방식으로 조직되는 총파업과 합법주의·의회주의 정치라는 협소한 전망에 막혀 있다 (박성인, 「민주노조운동과 대중파업」, 『진보평론』 3호, 2000년 봄.)
. 관건은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조합주의적 정치총파업에 제한하거나 선거와 의회 진출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변질시키고 협소화하는 구닥다리 ‘양날개론’을 타파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조직적 측면에서 민주노조운동이 키워온 힘들을 살펴보자. 87년 이후 지역과 업종, 그룹으로 나뉘어 발전해온 민주노조운동은 88년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와 지역·업종별노동조합전국회의를 거쳐 90년 전노협을 중심으로 업종회의, 91년 연대를위한대기업노조회의로 발전해오다가 91년 박창수노대위와 ILO공대위, 93년 전노대로 이어지면서 ‘민주노조총단결대오’로 모아졌고 95년 민주노총에 이르러 일단락되었다. ‘민주노조총단결’에서 ‘천만노동자총단결’로 전진할 교두보로서 출범한 민주노총은 교수노조와 공무원노조에 이르기까지 외연을 넓혀가고 있으며 산별노조 건설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노총의 조직률은 전체 노동자의 5%를 밑돌고 있고 산별노조 건설 또한 단위 연맹의 조직형식을 단순 전환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의사결정과정과 집행과정, 집행에 대한 대중적 평가와 통제과정 전체에서 민주노조운동은 ‘총회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해왔다. “숙명적으로만 받아들였던 자신의 삶의 현실을 계급적 단결과 투쟁을 통해 능동적으로 변화시켜 낼 수 있다는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 노동시장을 둘러싸서 단지 경쟁상대에 불과했던 동료 노동자를 노동과 투쟁의 동지로 조직해 나갈 수 있는 자세, 요구를 모아내고 투쟁의 목표와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체득, 자본에 의해 분할된 모든 울타리와 경계를 뛰어 넘어 하나의 노동자계급으로 서고자 하는 자각” (박성인,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95년 민주노총 출범’까지」,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이념 정립을 위하여』,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창립기념토론회 자료집, 1995, 25쪽.)은 민주노조운동이 획득한 소중한 성과였다. 일상시기 대의원회와 집행부로 나뉘어져 있던 의결과 집행체계는 투쟁시기 쟁의대책위원회로 통일되고, 잠정합의에 대해서는 반드시 조합원총회에 찬반을 물었다. 이 전통이야말로 민주노조를 ‘민주’노조이게끔 한 가장 큰 힘이었다. 그러나 최근 ‘투쟁의 위기’가 ‘조직의 위기’로 전환되면서 민주노총은 출범 이후 현장으로부터 총체적으로 불신받는 가장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키워온 투쟁의 힘과 조직의 힘이 더 이상 괴리되는 일없이 제대로 통일되고 세상을 바꾸는 무기로 온전히 쓰여지기 위해서는 산발적으로 분출되고 있는 비정규직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는 (1) 기간제고용노동자-계약직노동자, 시간제노동자(파트타임), (2) 간접고용노동자-파견노동자, 사내하청노동자, 용역노동자, (3) 특수고용형태노동자로 유형화된다.(윤애림, 「비정규직노동자의 실태와 요구」, 『민중의 복지, 노동권/생활권 쟁취를 위한 연대한마당 공동토론회 자료집』, 2001. 10. 26.), 장애인노동자, 산재노동자, 이주노동자, 실업노동자, 중소영세사업장노동자의 투쟁을 ‘불안정노동철폐투쟁’으로 모아내고 800만에 이르는 불안정노동자들을 획기적으로 조직화해야 하며, 산별시대로 접어든 노동조합운동의 개량화와 관료화를 현장의 힘으로 뿌리부터 차단·분쇄하는 노력을 집중해야만 한다.
6. 현장조직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
87년 이후 대공장 중심의 노조민주화투쟁으로 출발한 현장조직운동은 대중적 노민추운동을 거쳐 95년 자본의 신경영전략에 맞선 현장투쟁 속에서 재건되어 발전해왔다. 97년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 이후 현장조직운동은 민주노동자전국회의, 공공현장조직연대모임, 연대와전진을위한전국노동자회 등으로 금속 대공장 중심에서 점차 다른 산업과 공공부문, 중소사업장 현장조직으로까지 확대·일반화되어왔으며 활동노선에 따른 ‘분화와 통합’의 현장조직 재편을 가속화해왔다. 현장조직은 현장활동가조직과 현장대중조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장활동가조직은 현장활동가들이 노동운동 내부의 일정한 경향과 노선에 따라 결집하여 활동하는 조직이다. 지금까지 현장활동가조직은 집행부를 장악하기 위한 선거조직의 위상을 뛰어넘어 아래로부터 일상적으로 민주노조를 강화하고 노동조합과는 다른 질의 조직운동을 통해 현장활동가들을 훈련시켜왔으며 그 힘으로 노동조합운동을 견인하고 비판해왔다. 민주노총과 상급연맹에 대해서는 현장활동가조직들이 전국적으로 회의체계를 꾸려 주요 투쟁사안과 선거 등에 대응해왔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와 같은 경우는 민주노총의 심각한 위기에 대해 현장의 목소리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도 못했고 노동조합 상층운동의 오류와 한계를 날카롭게 비판해내지도 못했다. 소속 단위 현장활동가조직들의 활동력과 조직력은 매우 약화되었고 대표자회의는 의사결정과 집행이 괴리되고 집행에 대한 책임이 담보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전국적 노동조합조직의 중앙집중성이 높아지고 조직의 구성과 운영에서 계통성이 강화될수록 전국적 현장활동가조직의 연합체는 중앙집중화된 노동조합의 관료화를 저지할 수 있을만큼의 강력한 영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스스로가 전국적으로 집중되고 지금보다 더 높은 조직적 계통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연합적 질을 높여 전국단일현장활동가조직으로 재편되고 발전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노동자전국회의나 연대와전진을위한전국노동자회는 그런 점에서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보다 한발 앞선 조직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장 내부의 직영-하청간 차이, 현장 안팎의 노출-학출간 차이, 사업장별·규모별 차이’를 뛰어넘어 정치적·조직적 통일성을 높여내는 것만이 현장활동가조직운동의 지금의 침체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한편, 한국에서 현재 노동자계급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스스로를 노동자계급정당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으며 또 그럴 의사도 없다. 사회당은 스스로 밝히듯 ‘아직’ 노동자계급정당이 아니다. 민족민주정당으로 민주노동당을 재편하려는 민족주의세력들의 총체적 공세 앞에 민주노동당 내부의 사민주의적 경향들과 이른바 ‘당 개혁을 위한 입당파’들의 입지가 보존될 수 있을지도 심히 의문이다.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그래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라는 그 양자의 지향점을 두고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는 사회당 또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통일시켜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의 한 주체로 설 수 있을지, 아니면 사민주의세력과의 ‘동거’(?)까지를 포함한 이벤트적 선거정당의 길로 완전히 어그러질지 지금으로서는 확실치 않다. 노동자의힘은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자신의 직접적인 조직 과제로 제출하고 있는데, 그 과제를 ‘계급적 좌파진영의 혁신과 연대, 정치적 재조직화’를 통해, 그리고 ‘현장정치활동의 전형 창출과 노동자대중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계급정치의 실천’을 통해 이루어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현장활동가조직은 계급적 좌파진영의 정치조직들과 ‘함께’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의 주요한 일 주체가 되어야 한다. ‘혁신과 연대를 통한 계급적 좌파진영의 정치적 재조직화’라는 과제는 ‘현장활동가들의 조직운동’에 대한 ‘정치적 재조직화’ 없이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현장대중조직은 노동조합과는 다른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아래로부터의 독자적인 투쟁과 활동을 벌여내는 다양한 현장의 대중조직들이다. 예를 들자면 과거 현대자동차연합투쟁위원회(현연투), 현대자동차의장부총연합(의총련), 지금의 공동소위원회연합(공소위)과 같은 조직들이 현장대중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91년 현연투는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노민추), 구속해고동지회(구해동), 공동소위원회(공소위), 민주연합대의원회(민대), 풍물패연합 등이 모여 결성되었다. 현연투는 91년 5월투쟁에서 노동조합을 제낀 채 연일 4~5,000명의 조합원들을 직접 이끌고 공장 안 대규모 집회와 시내 거리행진을 감행한 후 격렬한 반민자당 반노태우정권 거리투쟁을 벌여냈다. 현연투는 더 이상 투쟁하지 않는 노동조합 집행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대중투쟁 지도부가 되어 자발적인 정치투쟁까지 벌여냈던 것이다. 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당시 파업지도부 또한 어용 집행부에 맞서 부단히 현장의 이중권력을 만들어내면서 투쟁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직접 반영하고 그 지도력을 즉각적으로 검증받았던 명실상부한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기관이었다. 95년 현대자동차 양봉수 열사 분신투쟁 당시 현장활동가들이 사업부별로 즉각 투쟁대오를 꾸리고 노동조합과는 무관하게 바로 파업투쟁을 벌였던 것도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대중투쟁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의총련은 콘베어 타는 의장부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현장대중조직이었다. 사업부별 대표자들과 전공장 회의체계를 꾸리고 일상 선전사업과 콘베어수당 인상투쟁 등을 대중적으로 벌여냈다. 의총련은 자동차 생산공장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콘베어 노동자들의 처지와 열망에 근거하여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조직되었고, 콘베어수당 인상을 쟁점화시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공소위는 규약상 노동조합 공식체계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의 공식 의사결정과정에서 아무런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없고 집행에서의 권한 또한 없다. 그래서 실제 공소위는 스스로 부서별, 사업부별, 전공장 체계를 꾸리고 출범식도 독자적으로 해왔다. 노동조합의 맨 밑바닥에 있으면서 동시에 노동조합 바깥에 있는 셈이다. 공소위는 주요 시기에 자신의 입장을 대중적으로 표명하여 현장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대의원회와 대립하여 소위원회 독자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소위원회는 활동가를 발굴하고 훈련하는 풀이고,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소위원회를 통해 활동에 ‘입문’해왔다. 그렇다고 소위원회가 초보 활동가들의 훈련코스인 것만은 아니다. 집행부나 대의원을 하지 않는 경우 경험 많은 활동가들이 소위원회에서 다시 활동함으로써 소위원회 자체 내에 활동 경험이 축적되고 새로운 활동력들이 보충된다. 공소위는 노동조합 대의원체계와는 달리 현장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의 ‘일부’로 인식되고 그만큼 소위원과 대중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소위원이 현장 대중들 안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지는 않지만 전공장 공소위는 노동조합의 다른 체계들과는 달리 현장의 직접성을 담보로 커다란 대중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실제 소위원들이 현장에서 직접 선출되고 그 소위원들의 부서별, 사업부별, 전공장체계가 꾸려진다면 이야말로 공장평의회에 가장 가까운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장대중조직은 아직 평의회라고 할만한 대중조직으로 구체화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노동조합과는 다른, 현장 대중들의 직접적인 투쟁기관이자 현장권력체로서 말 그대로 ‘평의회’로 발전해갈 수 있는 ‘맹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현장활동가조직과 노동자정치조직의 정치적 재조직화를 통해 건설될 노동자계급정당은 노동조합을 민주적·계급적으로 강화할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이 아닌 평의회적 현장대중권력의 창출과 그 전국화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노동자정치조직은 명실상부한 현장활동가들의 자기조직으로 발전해야 하고 현장활동가조직은 정치적으로 강화됨으로써 노동자정치조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가 된 노동자정치운동은 계급적 좌파진영의 혁신과 연대를 통한 노동자계급정당 건설로 전진해야 한다. 그리고 현장대중조직의 평의회적 맹아를 풍부하게 하는 다양한 실천을 통해 아래로부터 현장대중권력을 창출해내고 그것이 노동자대중의 직접적인 자기권력으로 성장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사실 평의회적 대중권력이란 노동자대중 스스로의 창조물이고 노동자계급정당은 대중의 그 창조력을 촉진하고 조력할 수 있을 뿐이겠지만.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그 계급적·민주적 발전을 위해 노력함과 동시에 노동조합운동의 과잉결정권을 바로잡아야 한다. 노동조합만이 정치총파업의 투쟁지도부를 ‘독점’하고 있는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고 노동자계급정당이 그 투쟁의 지도부로 ‘복권’되어야 한다. (이종호, 「현장조직의 위상과 전망」, 『현장에서 미래를』 76호, 2002. 4/5월.)
7. 노동자 정치세력화, ‘돌파’해야 할 과제들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노동자계급이 착취와 억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대중투쟁과 정치활동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서나가는 과정 총체를 말하며, 이는 노동자계급의 선진층이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하고 노동자계급 대중이 정치의 주체로 서나가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렇게 이해하고 이대로 실현시켜나가기 위해서는 첫째, 노동자계급의 정체성을 저해하고, 노동자계급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전략의 하위 동반자로 체제내화하려는 모든 ‘계급화해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 둘째, 노동자 정치운동 차원의 의회주의적·선거주의적 경향과 노동조합운동 차원의 노동자주의적 경향이 극복되어야 한다. 셋째,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형식주의적 경향이 극복되어야 한다. 그리고 넷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계급주체가 노동현장과 긴밀하게 결합된 상태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김영수, 『한국 노동자 계급정치운동』, 1999, 380쪽~386쪽.)
한국에서 노동자정치운동은 96~7년 총파업을 기점으로 대중적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97년 대선 이후 민주노총의 일방적 지지를 등에 업고 민족주의와 사민주의세력의 연합체로서 의회주의정당 민주노동당이 출범했으며, 이에 대한 반정립의 형태로 새로운 의회정당인 사회당이 만들어졌다. 한편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계급적 좌파진영은 노동자의힘으로 결집했다. 노동자정치운동은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키워온 투쟁력과 조직력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집중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제조업(특히 금속) 대공장 노조의 공장점거파업, 공공부문 노조의 산개파업, 정치총파업과 반정부 거리시위, 유통과정을 타격하는 운수노동자들의 파업,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들과 중소영세사업장노동자, 실업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산재노동자들의 투쟁 등은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노동해방’세상을 건설해갈 노동자정치운동진영의 가장 큰 자산이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총은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위로부터의 투쟁이 괴리되고 투쟁의 위기가 조직의 위기로 전환되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이 총체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첫째,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위로부터 관료제적 방식으로 조직되는 조합주의적 정치총파업으로 가두어놓거나 선거와 의회 진출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변질시키고 협소화하는 의회주의·조합주의 정치세력화노선과 노동자정치를 근본에서 왜곡하는 양날개론이 타파되어야 하며 그 노선의 왜곡된 귀결인 현재의 민주노총 정치방침이 99년 8월의 민주노총 정치방침 일반원칙 수준으로 재정립되고 정상화되어야 한다. 둘째, 총파업투쟁의 지도부, 특히나 그 투쟁이 총자본과 총노동 사이의 첨예한 정치전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 그 지도부는 노동조합만이어서는 안되고 노동자정치조직이 마땅히 그 지도부의 한 축이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지난 93년 전노대 이후 계속되어온 노동조합운동의 과잉결정권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산별시대로 접어든 노동조합운동의 중앙집중성과 계통성이 강화될수록 관료화와 개량화의 위험 또한 점점 더 현실화되고 있는데 아래로부터 이를 억제·분쇄하고 민주노조운동을 계급적·민주적으로 강화함과 동시에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현장권력을 부단히 창출해내기 위한 현장조직운동이 정치적으로 강화되고 조직적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한편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노동자계급의 선진층이 노동자계급정당을 건설하는 과정으로 집약된다. 현시기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운동은 계급적 좌파진영과 현장활동가조직의 정치적 재조직화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현장활동가조직은 변혁적 정치조직이 되어야 하고 정치조직은 변혁적 현장활동가조직이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만 노동운동없는 정치운동, 정치운동없는 노동운동의 문제와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조합주의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양날개로 다시 분리되는 의회주의 정치세력화의 문제가 극복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에서 중요한 과제는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의 결합, 제도정치권에 대한 개입의 문제이다.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선거 공간이 갖는 막대한 계급적 의미를 도외시하지 않는다면, 변혁적 노동자정치운동진영은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선거투쟁을 적극 결합시켜야 한다. 그리고 지방의회와 지방행정기구에 대한 개입을 통해 현장과 지역을 잇는 ‘노동자자치’의 상과 내용을 구체화하는 노력들을 좀더 풍부하게 전개해야 한다 미디어운동에 국한되어 얘기되긴 했지만,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생활과 투쟁의 구체적인 공간인 지역 차원의 미디어 운동 전략은 논의의 주제로조차 별로 떠오른 바 없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아무리 지역적 이슈가 쉽게 전국적 전선의 이슈로 전환되는 한국의 특수한 조건이 있다 할지라도-지역에 대한 좌파 진영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시켜나가는 과정이 지니는 중요성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매체를 통한 다양한 의사소통 구조의 모색과 정착이 지니는 결정적 의미에 동의한다면, 정치적 전략은 곧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필연적으로 함축할 수밖에 없는 것일텐데 말이다. 어쨌든 이제 이 문제를 올바로 해명하고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해서 그것을 노동조합, 정치조직, 지자체 등의 수준에서 적용시켜나가며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강령적 수준의 내용을 확보해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운동은 절름발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김명준, 「지역, 미디어, 운동의 함수관계」, 『노동자의힘 기관지』 9호, 2002. 6. 20.)
. 국회와 대선이라는 공간은 전적으로 ‘대중투쟁의, 대중투쟁에 의한, 대중투쟁을 위한’ 부차적 공간이며,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전력을 기울여 ‘활용’하고 개입해야 할 또 다른 투쟁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