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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미래를] 03년 1월

 

주5일제 투쟁, 반성과 전망

 

달라진 현장

 

98년 이후 노동자에게 가해진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는 그 이전과 견주어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노동자들은 자기가 다니고 있는 지금의 일자리가 평생직장일 거라는 생각과 믿음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노동조합이 자신의 고용을 책임져줄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회사가 그나마 잘 나가고 있을 때, 그리고 한 살이라도 더 나이를 먹기 전에, 지금 있는 일자리에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놔야겠다는 생각으로 특근과 철야에 목을 매고 있다. 365일 가운데 360일 이상을 일한 경우가 있을 정도로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이 제한 없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로 인해 과로사가 속출하고 있다.

한편 전체 노동자 3명 중 2명이 비정규직일 만큼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가 급증했고 일자리의 질이 형편없이 나빠졌다. 남아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경기가 다시 안 좋아질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용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시켜주는 총알받이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는 헛된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힘든 일은 하청 노동자 몫으로 당연시되고 강화된 노동강도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떠넘겨지면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새로운 일자리에 직영 정규직이 들어오는 것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의 노동조합들은 기업별 노조와 산업별 노조 할 것 없이 이들 정규직 조합원들만의 이해를 거의 전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좀처럼 투쟁과 조직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점점 더 경제주의와 조합주의에 매몰되고 있다. 최근 민주노총 산하에 있는 공공부문과 금속 제조업의 몇몇 대규모 사업장들에서 실리주의와 노사협조주의를 표방한 어용노조가 득세하고 있는 걸 보더라도 사태는 매우 심각하다.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의 배일도 집행부는 재선에 성공했고 자신의 모델을 전국화하기 위해 대기업 노동조합 선거 판을 동분서주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의 최윤석 집행부는 지난 15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의 살아 있는 역사로 투쟁의 최선봉에 섰던 해고자들을 노사 합의로 한 방에 정리해고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2002년 마지막 날 집행부 진두 지휘 아래 회사 경비들을 앞세워 44일째 농성 중이던 해고자들의 천막을 거둬가 버리는 만행을 서슴없이 벌일 정도로 막나가고 있다.

현장활동가들 또한 대다수가 운동의 전망을 찾지 못하고 활동가로서의 개인 삶의 미래조차 불투명한 상태로 힘겨워 하고 있다. 많은 활동가들이 노동조합 대의원 되기, 위원장 되기, 상급단체 임원 되기, 지방선거를 비롯한 정치 판의 후보 되기 따위에 자신의 활동 전망을 가두고 있다. 더불어 활동가들 사이에 만연한 천박한 종파주의가 운동의 대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최근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임원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중앙파와 국민파가 벌인 '뻘밭의 개싸움'은 2000년 4.13 총선에서의 울산 북구 사태에 이어 보수 정치 판을 능가하는 또 하나의 '희대의 추태'를 연출하였고 결국 2차 투표마저 무산되는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우리 노동운동에서 가장 힘있고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규모 사업장과 선진 지역에서의 운동 판이 이 지경이다 보니 전체 노동조합운동, 나아가 노동운동 그 자체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매우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바야흐로 87년 이후 쌓아온 민주노조운동의 소중한 성과와 전통들이 현장에서부터 송두리째 부정되고 해체될 절박한 위기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11.5 총파업의 성사와 중단

 

민주노총은 2002년 11월 5일 공무원조합법, 경제자유구역법, 개악 근로기준법 등 3대 악법을 저지하기 위해 168개 사업장 12만 5천명의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날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총파업 집회가 열렸고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1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 승리 결의대회를 가졌다. 그러나 파업 당일 국회 상임위에서 근로기준법 개악안 통과가 유보되는 것으로 결정이 나면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하루만에 총파업을 중단해버렸다. 당장 경제자유구역법의 국회 통과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는데도 총파업을 접고 간부 상경투쟁으로 후퇴한 것이다. 결국 경제자유구역법은 11월 10일 전국노동자대회마저 물리적 충돌 없이 끝나게 되면서 곧바로 통과되고 말았다.

2002년 4월 2일 어이없는 총파업 철회로 민주노조운동의 총체적 위기를 자초했던 민주노총이 비록 하루이긴 했지만 11.5 총파업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11월 4∼5일 공무원 노동자들의 집단 연가파업과 병원, 비정규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던 장기 투쟁들, 그리고 대선과 맞물려 폭발한 농민과 빈민들의 11월 대항쟁이라는 정세 조건에 힘입은 때문이었다. 그러나 11.5 총파업을 가능케 했던 민주노총 내부의 실제 동력은 투쟁의 핵심 주체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제주의적 요구에 있었다. 주5일제 도입을 빌미로 정부와 자본이 들이민 근로기준법 개악안은 대기업 노동자들에게도 노골적인 임금 강탈 공세로 비쳐졌고 자신들이 싸우지 않으면 안될 사안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 민주노총은 근로기준법 개악을 전제로 한 주5일제가 도입되면 월급이 깎이고 연월차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단체협약 강제 적용 때문에 대기업이라고 더 이상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선전했다('현대차 김씨의 주5일 법안 손익계산서', 『노동과 세계』 제211호). 가뜩이나 '돈'에 예민해져 있던 대기업 노동자들은 피부로 위기를 느꼈고 자신의 임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총파업에 나섰다. '노동조건 저하 없는 주5일제 전면 쟁취'라는 공세적 요구 대신에 어느 샌가 '근로기준법 개악 저지'라는 수세적 방어투쟁의 요구가 전면화되었고, 투쟁의 동력 또한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해와 요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손실을 막아내려는 대기업 정규직 조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만을 자극하고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근로기준법 개악안의 국회 통과가 유보되자마자 바로 총파업이 중단되었던 데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총파업을 지속시키지 않고서는 경제자유구역법의 국회 통과를 막아내기 어렵다는 사실이 명확해질대로 명확해져 있었는데도 하루만에 총파업이 중단되었던 핵심적인 이유는 총파업을 지속시킬 핵심 동력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과 그 노동조합의 지도부 상당수가 경제자유구역법이 당장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가져올 것이라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11.5 총파업은 이렇듯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는 정규직 대기업 조직 노동자들의 요구와 동력으로 성사되었고, 또 바로 그것 때문에 중단되었다.

 

신자유주의와 수세적 생존권투쟁의 한계

 

김대중 정부 들어 지난 5년 동안 쉴 새 없이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칼바람은 노동자 민중의 삶을 총체적 위기와 재앙으로 몰아넣었다.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는 실업자와 노숙자를 양산했고 이제 우리 사회에서 실업은 구조화된 일상이 되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잘려나간 빈 자리가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채워지면서 불안정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2/3에 육박할 정도로 고용의 질이 저하됐다. 절대적 노동시간이 심각하게 늘어났고 단위 노동시간에 지출하는 노동량(내포적 노동시간)도 눈에 띄게 증가하는 등 노동강도와 밀도가 강화되었다. 생산 현장은 골병(근골격계 질환) 든 환자 투성이에 과로사와 산업재해로 하루 10명 가까이 매일 죽어 나자빠지는 죽음의 전쟁터가 되었다. 자본의 현장통제와 노동운동 탄압은 2003년 1월 9일 창원 두산중공업 노동조합 배달호 열사의 분신을 불러올 정도로 극심해졌다. 노동자 민중의 절대적·상대적 빈곤이 심화되었고 가계 빚은 가구당 평균 3,000만원에 총 430조원을 넘어섰다. 공교육은 위기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어버렸다 해도 지나치지 아닐 만큼 급속하게 해체되었고 보건 의료는 심각할 정도로 공공성을 박탈당했다. 국가기간산업을 비롯한 주요 공공부문들이 뭐 하나 남아 있는 게 없다 싶을 만큼 국내외 독점자본들에 전면적으로 매각되고 사유화되었다. 그나마 취약한 민중 복지는 장애인으로 영세 노점을 하던 고 최옥란 열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따위의 예에서 보듯 거꾸로 더 악화되었고 그야말로 무복지의 수준으로까지 후퇴했다. 경쟁력 없는 인간들이 냉혹하게 폐기처분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생활공동체들과 그 문화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고 자본의 제한 없는 이윤 추구는 삶의 터전인 생태계마저 대규모로 파괴시켰다.

노동자 민중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말 그대로 '죽지 않고 살기 위해' 투쟁하고 저항했다. 이 투쟁들은 무엇보다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방어투쟁이었다. 그러나 이 방어투쟁은 신자유주의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이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는, 또는 총고용만 유지된다면 나머지 노동조건의 그 어떤 후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노동운동 내부의 얼빠진 계급타협주의 노선에 의해 왜곡되거나 쓰라린 패배로 점철돼왔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와 조합주의에 기대어 조직된 일련의 총파업들이 바로 그 경제주의 때문에 철회되거나 중단되는 사태가 되풀이되어왔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부적절한 관계에 기초한 의회주의 정치노선 또한 생존권투쟁과 선거를 분리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분출하는 경제적 방어투쟁들을 정치총파업과 강력한 민중연대투쟁으로 집중하고 결합시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키워가는 대중정치로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노동자 민중을 투쟁하는 계급으로 통일시키는 대신 파편화된 유권자로 대상화시켜왔다. 때문에 부분적으로 벌어지는 생존권투쟁들은 총자본의 계급분할과 계급해체 전략에 맞서 총노동을 형성·강화하는 계급적 정치투쟁으로 상승·발전하지 못한 채 수세적 방어투쟁에 머물면서 고립된 투쟁으로 장기화되거나 각개격파되어왔다.

 

다시 생각하는 노동시간 단축투쟁의 의의

 

주5일제 투쟁의 초점이 '노동조건 저하 없는 주5일제 전면 쟁취'라는 공세적 요구에서 연월차 휴가 축소, 초과근로수당 할증률 인하,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 등을 막아내기 위한 근로기준법 개악 저지투쟁으로 옮겨감에 따라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과 의의를 강조하는 논의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수세적 방어투쟁만으로는 노동자 민중의 삶과 운동 전체에 드리워진 최근의 총체적 위기를 돌파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노동시간 단축을 공세적으로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전면적으로 투쟁해야 할 절박성이 높아졌다. 노동시간 단축투쟁의 의의를 지금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바로 이 절박성 때문이다.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무엇보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통해 대규모의 고용파괴와 불안정 노동을 양산하는 자본에 맞서 일자리의 양적, 질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너무 많이 일하는 고용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줄여서 아예 일을 못하거나 너무 적게 일하는 실업/반실업 노동자에게 일할 기회와 권리를 나누어줌으로써 전체 노동자의 고용량을 증대시킨다. 이 과정은 실질임금의 유지와 상승을 동반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전제로 노동시간 단축이 전국, 전산업에 걸쳐 일시에 이루어지고 노동자 1인당 하루 노동량이 균등하게 경감된다면 전체 노동자의 내부 차별이 없어지고 고용의 질 또한 나아질 것이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누적이 심화되어 있는 한국사회에서 전체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1일 7시간 이하, 주30시간 미만으로 노동시간이 단축되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의 주5일제 쟁취투쟁은 '주30시간 미만, 1일 7시간 이하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예비투쟁으로 위치지워져야 한다. 투쟁 속에서 노동시간 단축의 적극적 의의를 공세적으로 선동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다음으로 노동시간 단축투쟁은 너무 많이, 너무 힘들게 일해서 부지기수로 다치거나 죽어나가는 전쟁터 같은 지금의 노동현장을 건강한 일터로 바꾸기 위한 노동자 건강권 쟁취투쟁이다. 전산업 취업자의 평균 주당 노동시간은 여전히 51시간 이상이다. 초과노동의 증가와 노동강도 강화로 과로사와 직업병이 급증하고 심야노동과 주야간 교대제 등으로 생활 리듬이 깨어지면서 노동자의 평균 수명이 단축되고 있다. 죽지 않고 골병 들지 않는 작업현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너무 많이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 즉 노동자의 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법정 노동시간 이외의 하루 초과노동에 대해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너무 힘들게 일하지 못하게 하는 것, 즉 적정 노동강도를 쟁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덧붙여 정상적인 생활 리듬으로 건강하게 일하고 생활하기 위해서는 특수하고 불가피한 부문을 제외하고 전산업적으로 야간노동을 철폐해야 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시되어온 주야 맞교대제를 주간 연속2교대제와 같은 근무형태로 전환해야 한다. 자본 재량대로 노동시간이 이랬다 저랬다 변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확대를 막아야 할뿐만 아니라 제도 자체를 폐지시켜야 한다. 대우조선을 기점으로 확산되고 있는 전국적 근골격계 투쟁은 노동자 건강권 쟁취투쟁으로서 노동시간 단축투쟁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상반기 주5일제 투쟁이 노동법 개악 저지투쟁에 머물지 않고 공세적인 노동시간 단축투쟁으로 확산되고 강화될 때만이 우리 운동과 삶의 총체적 위기가 극복되고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미래 삶의 새로운 전망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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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1:17 2005/02/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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