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화] 02년 겨울
사표(死票)심리
사표심리와 비판적 지지론
2002년 12월 19일은 16대 대통령선거가 있는 날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신물을 내고 선거에 점점 무관심하다. 이번 대선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또 반면, 많은 사람들이 투표장에서 누구를 '찍을'까 고민을 많이 한다. 이 고민 중에 가장 흔한 것이 이런 것이다. "후보들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후보가 있긴 있는데 이 후보는 대세로 보아 당선되지 못할 사람이다. 그럼 내가 이 후보에게 던진 표는 '사표'가 될 게 뻔한데 그럴 바에야 차선이라도,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밀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이른바 '사표(방지)심리'다.
이 심리에 기대어 87년 13대 대선 이후 민중운동 내부에서 반복해서 등장해온 것이 바로 '비판적 지지론'이다. 87년과 92년 대선에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했던 사람들은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아직은 시기상조이고, 또 현실적으로 민중후보에 대한 투표는 사표로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대중과의 '민주대연합'만이 반독재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중에 대한 이들의 짝사랑은 97년 대선에서도 '암암리'에 계속되었고, 결국 그들이 그토록 염원하던 '국민의 정부'가 탄생되었다. 한편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에 대한 이른바 '신(新)비지론'이 새롭게 등장했는데, 지난 9월 12일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개혁과 통합을 위한 노동연대'는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노무현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이들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투표가 사표에 그칠 것이므로 현실정치에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노무현과의 '개혁세력대연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5년을 두고 5년마다 '똑같은 논리'가 현실에서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비판적 지지론이 이처럼 형태를 달리 하며 때만 되면 재생되는 이유는 대중들의 사표심리가 그만큼 뿌리깊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대선 시기에 자기가 생각하는 최악의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기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후보에 대한 투표를 포기하고, 차선이나 차악의 후보에게 표를 던져왔다. 물론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녹색평화당 등 진보정당들이 획득한 11%의 득표율은 대중의 사표심리가 그만큼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곧이어 있었던 8.8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진보정당들은 다시금 고전을 면치 못했고, 결과는 선거 시기 두드러진 사회심리로서 사표심리가 여전히 대중들의 마음 속에 완강하고 두텁게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대중들의 사표심리가 또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선이 아닌 차선·차악에 대한 선택이 의무처럼 강요되는 현실의 선거 판을 바꾸기 위해서, 지금 시기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선,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지난 15년의 경험 속에서 최악이든, 차악이든, 차선이든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대중들의 정치불신은 이제 명백히 '보수정치 일반'을 향해 있다. 그런데 그 불신이 곧바로 진보정치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아직' 아니다. 여기에 우리의 첫 번째 과제가 있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삶의 총체적 위기에 맞서 아래로부터 봇물 터지듯 생존권투쟁이 분출하고 있다. 이 산발적인 투쟁들을 대중정치투쟁으로 집중하고 '투쟁하는 대중의 정치'로 상향시킬 때만이 선거정치의 협소한 대리주의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데, 이 점이 바로 우리의 두 번째 과제이다.
진보정치, 한계와 가능성
권영길을 후보로 내세운 민주노동당은 적어도 이번 대선에서는 지난 15대 대선에서 보였던 "일어나라 코리아" 같은 얼치기 애국주의 구호를 외치고 있지는 않다.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무엇보다 소리 높여 외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반대'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신자유주의 반대를 얘기하면서 동시에 '진보적 구조개혁'을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의 핵심은 신자유주의 없이도 성장과 분배 정의를 둘 다 이룰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러나 이 주장은 심각한 자기모순을 안고 있다. 우선, '신자유주의 없는 자본주의'라는 것 자체가 이미 존재할 수 없는, 실현불가능한 전망이다. 이것은 이른바 '제3의 길'의 파산에서도 증명되었고, 현실의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기는커녕 지구상에서 둘 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적극적인 신자유주의 추진세력이라는 점을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신자유주의는 '전면적 위기가 재격화된 시기의 자본주의' 그 자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없는 자본주의란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슬로건이 현실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반대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 변혁의 전망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 민주노동당과 권영길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한편, 김영규를 후보로 앞세운 사회당은 지난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대선에서도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걸고 있다. 그런데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여전히(!), 또는 아직(?) 그 '내용'을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회당 스스로도 표방하고 있는 '반(反)자본주의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실현해갈 '주체'가 비어 있다. 여전히(!), 또는 아직(?)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당에게 선거는 이제 더 이상 전술이 아니라 전략으로 절대화되고 있다. 2002년 대선, 2004년 총선,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17대 대선으로 이어지는 '선거들'을 향해 사회주의라는 빈 깡통을 달고 요란스런 소리를 내며 돌진하는 외발자전거야말로 현재의 사회당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비유가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이나 자신의 딜레마와 한계를 뛰어넘어 진보정치의 희망으로 대중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이번 대선에서 신자유주의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대중투쟁과 전면적으로 결합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이 길 말고 선거 판에서 진보정치가 '경쟁력'을 갖기는 무망한 노릇이다. 보수정치의 50년 자금력과 조직력, 그리고 권력의 최상층에서부터 맨 밑바닥까지 선거를 매개로 치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저들의 권력재생산-재분배 시스템에 맞서서 '바람'만으로, 또는 '부유세' 등의 매가리없는 정책이나 '사회주의'라는 선언만으로 승부를 걸고자 한다면 이처럼 순진한 발상도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대중투쟁의 힘으로 대선을 '정면돌파'하는 것, 그리고 이 속에서 신자유주의를 넘어 자본주의가 아닌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는 것을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제시하는 것, 이것만이 지금 시기 진보정치의 유일한 활로(活路)이다.
신자유주의 반대투쟁과 대중정치
신자유주의는 우리 삶을 총체적 위기와 재앙으로 몰아넣고 있다. 경쟁력이 없는 인간은 폐기처분된다. 정규직이 잘려나간 자리는 비정규직으로 대체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른 수건도 다시 짜내는 '유연화'의 대상이 되어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으로 내몰린다. 실업은 구조화되고 민중 전체가 가난해진다. 가계 빚은 쌓이고 절대 빈곤층이 늘어난다. 교육과 보건의료는 공공성을 박탈당하고, 국가기간산업을 비롯한 주요 공공부문들은 남김없이 사유화된다. 그나마 취약한 민중복지는 심각하게 후퇴한다. 생활공동체와 생태계가 대규모로 파괴된다. 바야흐로 "1%도 안되는 독점자본가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 80%의 국민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20%가 훨씬 넘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야만사회"가 도래한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한' 투쟁,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생존권투쟁들은 따라서 불가피하고 대선 시기와 맞물려 지금 그만큼 폭발적이다.
11월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3대 악법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11월 4∼5일 공무원 노동자들은 '공무원조합법'의 폐기와 노동3권 완전쟁취를 위한 연가파업을 벌였다. 행정자치부의 집요한 방해에도 3만여명의 공무원들이 이 파업에 참여했다. 11월 5일 주5일 근무제 도입을 빌미로 '근로기준법'을 개악하려고 하는 정부에 맞서 민주노총 168개 사업장 12만 5천명의 조합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다. 이날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총파업 집회가 열렸고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1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 승리 결의대회를 가졌다. 11월 7일에는 '경제자유구역의 지정과 운영에 관한 법률안'의 폐기를 촉구하는 민주노총 간부들의 국회 앞 노숙투쟁이 벌어졌다.
'철도·가스산업 구조개편법안', 남동발전회사 매각, 한전 배전부문 분할 매각 등 공공부문을 사유화하려는 정부에 맞서 철도, 발전, 가스, 전력노조와 공공연맹은 2기 '사유화저지공동투쟁본부'를 출범시키고 총력 대응하고 있다.
가톨릭중앙의료원 3개 병원(강남성모, 여의도성모, 의정부성모병원), 목포가톨릭병원, 제주한라병원 노동자들은 용역깡패와 경찰병력을 동원한 파업현장 침탈과 직권중재, 폐업 등 전근대적 노동탄압에 맞서 170일 넘게 장기파업을 벌이고 있다. 보건의료노조는 명동성당 지도부 농성을 사수하면서 15일간의 파리-로마 원정투쟁을 전개하는 등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800만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투쟁은 절박하다. 보험모집인, 레미콘 노동자, 위수탁 화물차량 운송노동자, 학습지 노동자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한진관광면세점 노동자들은 간접고용을 철폐하기 위해 대한항공과 계속 싸우고 있고, 집배원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장시간노동 철폐와 인력충원, 정규직 쟁취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일반노조와 시설관리, 사회복지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보장받기 위해 싸우고 있고, 장애인과 실업노동자들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바꾸기 위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강제단속과 추방에 맞서, 그리고 노동비자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시그네틱스, 까르푸, 비비드광학 노동자들의 장기투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폭력 단속으로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렸던 최옥란, 서용운, 최윤복 등 영세 노점상들의 잇단 자살은 8월 23일 청계천 3∼4가에서 노점을 하던 박봉규 열사의 분신투쟁과 노점상들의 끈질긴 생존권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철거민들은 용역깡패를 동원한 강제철거에 맞서 힘겨운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대전 용두동 주민들의 중구청 앞 농성은 지금도 백일 넘게 계속되고 있다. 도시빈민들은 이 투쟁들을 모아 11월 7일 종묘공원에서 전국빈민대회를 열었다. 더 이상 '벼랑 끝에 매달려 살 수는 없다'고 나선 도시빈민들은 '영세노점상에 대한 노점단속 박살, 철거민에 대한 영구임대주택·순환식 개발 쟁취, 용역깡패 해체, 민중복지 확대' 등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농민들은 정부의 농업 포기·해체 정책에 맞서 결사항전을 벌이고 있다. 총 9개 도 68개 시·군에서 6,796명의 이장들이 WTO 쌀 수입 개방 반대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전국 이장단 선언을 선포하고, 11월 13일 30만 전국농민대회와 11월 25일 2차 농민대회를 통해 갑오농민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농민 대항쟁'을 벌여나갈 결의를 모아가고 있다.
노동자, 농민, 빈민들의 생존권투쟁은 11월 7일 빈민대회, 11월 10일 노동자대회, 11월 13일과 25일 농민대회를 거쳐 12월 민중대회로 모아지고 있다. 이 투쟁의 정점에 12월 19일 16대 대선이 자리하고 있다. 만일,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이 생존권투쟁들과 대선이 "투쟁은 투쟁이고 선거는 선거"라는 식으로 따로 놀게 되고, 대선 판 자체가 빅2 혹은 빅3의 보수정치 재편구도로만 휩쓸려가게 된다면, 진보정치는 대중적 희망이 아니라 또 다시 사표심리의 희생 제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진보정치가 이러한 '최악의 사태'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앞서 보았듯이 대중정치로 선거정치를 '돌파'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96∼97년 김영삼 정부의 노동법 개악에 맞선 민주노총의 총파업에서 이 대중정치의 맹아를 본 적이 있다. 당시 투쟁이 최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우리 사회에서의 정치는 오로지 투쟁하는 총파업 대오와, 청와대와 직접 힘을 겨루는 명동성당의 민주노총 지도부가 '독점'하고 있었다. 국회는 개점휴업이었고, 하릴없는 국회의원들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어 있던 명동성당을 기웃거릴 뿐이었다. 시사 주간지에는 "3김을 누른 권영길"이 표제로 등장할 정도였다. 신자유주의 공세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새로운 대안을 목말라 하던 유럽과 미국의 노동운동·진보운동 세력들은 자신들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신자유주의에 정면으로 맞부딪쳐 싸우고 있는 민주노총의 총파업을 투쟁의 현장에서 직접 보고 배우려고 한국으로 몰려들었다. 만약 당시 민주노총 권영길 지도부가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였더라면, 그리고 이 '총파업 정치'를 97년말 15대 대선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일어나라 코리아" 식의 탈계급적 '국민(?)정치'로 협소하게 왜곡시키지 않았다면 우리의 진보정치는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전투적으로 투쟁하는 민중들에 굳건히 뿌리내린 대중정치로 좀더 일찍, 좀더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진보정치의 본령은 선거정치가 아니라 대중정치에 있다. '부르주아권력에 국민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절차'인 선거는 따라서 대중정치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한에서만, 그리고 대중을 단순한 유권자가 아닌 사회-정치과정의 진정한 주체로 상승시키는 데 복무하는 한에서만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뿐이다. 선거정치와 대중정치가 분리되거나 선거정치와 대중정치의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된다. 투쟁하는 대중들의 자기운동과 진보정치운동은 대중정치를 중심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만일 이 둘이 의회주의 선거정치라는 협소한 전망 아래 결합하게 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대중조직=투쟁, 진보정당=선거'라는 양날개로 다시 분리될 것이고, 대중을 선거정치의 동원대상이나 구경꾼으로 묶어놓는 앙상한 대리정치만을 양산하게 될 것이다.
11월, 12월의 민중투쟁을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단일한 정치투쟁으로 집중하고 이 투쟁을 대중정치로 끌어올릴 때만이, 유권자로 한 표, 한 표 찢어져 원자화되어 있는 '평등'한 개인들을 현실의 극단적 불평등과 참을 수 없는 삶의 피폐에 분노하여 투쟁하는 '계급'으로 회복시킬 것이고, 이렇게 계급으로서 정치화되고 주체화된 민중들은 자신의 투쟁이 일구어내는 폭과 강도만큼 사표심리라는 망령을 떨쳐내고 진보정치라는 '최선'을 향해 표를 던질 것이다. 오로지 이런 과정을 통해 획득된 진보진영의 득표율이야말로 그것이 5%든 10%든 미래를 위한 희망이 될 것이고, '다음 선거'에서의 정치가 아닌 지금 일상에서의 대중투쟁과 생활대중정치의 힘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