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성 선생의 페이스북에서 옮겼습니다.
1980년 사북항쟁이 있기 전 탄광촌, 일자로 집을 크게 지어 놓고는 부억하나 방하나 똑 같이 6칸에서 10칸 씩 나누어 놓은 사택이 즐비했다.
탄광 일 끝나고 한 잔 술에 휘청거리며 방문을 열고 들어가 '여보....마누라.'하며 푹 엎어지는데, 잠이 덜깬 부인이 '이 냥반이......오늘 돼지비게라도 드셨나.....'하며 마주 안으면서 종종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옆집을 제 집으로 알고 들어간 것이다.
일 끝나고 탄가루 묻은 시커먼 얼굴을 씻지도 못했으니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았겠지.
몇 천명이 '폭동'을 일으키고, 몇 십명이 끌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사람까지 생겨난 뒤에야 샤워실이 설치되고, 복지관에 목욕탕도 생겨났다. 그 뒤 문제도 많이 줄어 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