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주간울교협통신] 51호 97.1.31

 

한보와 총파업

  한보가 터졌다.

  "50억?"

  "에이…"

  "500억?"

  "아니."

  "그럼, 5,000억?"

  "으이그. 쫀쫀하긴. 거기다 0 하나 더 붙여 봐."

  "그…그럼 5조?"

  "그래."

  5조원이 한낱 종이쪼가리가 돼버렸다. 5조원이면 우리나라 한해 살림살이(국가예산)의 10분의 1이 되는 돈이다. 정부가 부랴부랴 뒷감당한다고 6조원을 풀었다. 이 틈에 슬그머니 기름값이 올랐다. 지난 해 끝무렵부터 벌써 세번째다. 아파트값도 갑자기 치솟았다. 대통령선거 앞두고 풀릴 돈들 생각하면 물건값 뛰오를 걱정에 벌써부터 아득한데 해머리부터 이 지랄이다. 이 판에 정부와 재벌들은 올해 임금 못올린다고 택도 아닌 으름장을 놓고 있다. 한보에 총파업이 뭍혀 어물쩡 넘어가면 "감원보다야 임금 동결이 낫지" 어쩌고 하면서 우리 노동자들만 개피 볼 판이다. 뭐가 잔뜩 어지럽다. 하나씩 추스려 가닥을 잡아놔야지, 안그랬다간 어물쩡 설쇠고 된통 뒷통수 맞지 싶다.

  온갖 설(說)들이 어지럽지만 사람들은 다 안다. 통큰 정태수가 어디어디 돈질을 해댔는지, 어설프게 조금 먹은 놈들만 죽상이고 크게 먹은 놈들이야 말짱하리라는 것쯤 탁하면 척이다. 법원에서 내준 영장 하나 집행 못하는 검찰이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라는 걸 파헤쳐 벌집 쑤셔놓을 턱이 없다는 것도 다 안다. 더구나 "여기도 PK, 저기도 PK, PK가 판"치는 세상 아닌가? 우리나라 은행이 재벌들 돈 창고가 된지 오래고 파란 기왓집 사람들 한마디면 밑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뭉탱이 돈을 빌려줄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 참에 정부가 금웅개혁이랍시고 일을 벌여놨지만 이 정부가 하는 개혁이라는 게 늘 그렇듯 뭐 하나 제대로 손 보는 일이 없으니 이번에도 재벌들 좋은 일만 시킬 게 뻔할 뻔이다. 다 안다 사람들은.

  세상 굴러가는 꼴이 이 모양으로 개판인데도 망하지 않은 까닭은 오로지 이 나라 백성들이 피땀으로 바닥에서 버팅겼기 때문이다. 우리 노동자들이 하루 8명꼴로 죽어나자빠지는 현장에서 낮밤으로 뺑뺑이 돌아 자동차와 배를 만들고 집을 짓고 옷감을 짜내지 않았다면, 썩어빠진 세상 질서와 맞붙고 맞버티면서 끈질기게 싸우지 않았다면 이 나라가 이 따위로라도 지탱이나 될 수 있었을까? 우리네 농꾼들이 빚더미에 속이 숯덩이가 되더라도 논일 밭일 차마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도 안거르고 이 나라의 새벽을 열어온 시장 사람들과 달동네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에 세상이 이나마라도 굴러가는 거다. 헌데 이제 우리네 삶은 점점 더 힘겹고 가파르다. 바닥에서 버팅기는 것도 힘에 부치다.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일자리가 불안하고, 뛰는 물건값 쫓아가기 빠듯한 월급 봉투가 불안하고, 하나밖에 없는 몸뚱아리가 불안하고, 애들 공부시킬 일도 막막하다. 해서 우리는 총파업에 나섰다. 가만 앉아 있다간 꼼짝없이 죽게 생겼으니까 너나없이 스무나흘을 줄기차게 싸웠다. 싸우면서 우리는 이 나라가 굴러가는 꼴을 우리 힘으로 바꿀 수도 있겠구나 깨달았다.

  힘! 저쪽이 돈이라면 우리 힘은 뭉치는 거다. 우리가 뭉치니까 그렇게도 어지럽고 속시끄럽던 세상이 거짓말처럼 아주 간단하고 분명하게 바뀌었다. 우리 사회는 이쪽과 저쪽으로 뚜렷하게 갈라졌다. 국회 금딱지들이 정치랍시고 떠들어대던 말장난이 없어졌다. 공장에서 거리에서 이쪽과 저쪽이 부딪히는 게 곧 정치였다. 이른바 '제도권 보수정치'는 쓰레기통에 쳐박혔다. 이쪽 힘이 커질수록 저쪽이 휘청거렸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던 이른바 '중간계층'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쪽이든 저쪽이든 힘이 센 쪽에 붙는 것밖에 없었다. 재벌과 정부가 온 국민을 정리해고자로 내몰고 이 나라를 숨막히는 경쟁의 도가니로 한사코 몰아넣으려 할 때 이에 맞붙어 싸울 수 있는 세력이 노동자 말고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제 '3김을 누른 총파업 정치'의 싹을 키우는 것만이 우리 삶의 밑바닥을 뒤흔드는 불안들을 씻어낼 수 있고 세상 돌아가는 꼴을 사람답게 바꿔놓을 수 있는 길이거니 누구나 한몸 가득 느꼈다.

  한보가 총파업을 먹느냐, 다시 총파업이 한보로 불거진 이 나라 썩은 속내를 도려내느냐 하는 건 오로지 우리 하기 나름이다. 우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정치를 키워 밀고나갈 정치조직이 없는 마당에 공이 어쩔 수 없이 국회로 넘어갔지만 이 공은 금방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거고 설 지난 큰 판에서 다시 맞붙을 채비를 단단히 하는 게 우리 몫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2/14 10:07 2005/02/14 10:07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plus/trackback/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