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노동전선] 97년 3월

 

'정치적 노동운동'에서 노동자 정치운동으로

  민주노조운동, 현장조직운동과 더불어 8∼90년대 노동운동의 주요한 한 축을 이루어온 '정치적 노동운동'에 대해 살펴보자.

  학생운동을 했던 많은 대학생들이 80년대 초중반에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우고 이른바 '현장 이전'이란 걸 했다. 인천에 있던 100명 규모의 사업장에 그런 '학출'들이 10명씩 되는 경우도 있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나로드니끼 운동이나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 때 숱하게 많은 청년 학생들이 모든 걸 버리고 '인민 속으로' 들어갔던 경험들을 떠올릴만큼 '제적과 현장 이전'은 당시 한국 학생운동의 당연한 '정규 코스'였다.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도 노동운동 '판'에서 '현역'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어림잡아 1%쯤 될 것 같다.

  90년대 초반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가져온 충격 속에서 새롭게 자기 갈 길을 찾아온 '신세대 운동권' 가운데는 80년대(식) 운동을 '낭만적 민중주의'라고 비판(주1)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싸잡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이 '밥줄을 건 대모험'이던 시절, '위장취업자'들은 교정이 아니라 공장에서 '데모'를 '주동'했고 조직을 꾸려갔다. 때로는 성급하게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훨씬 많았지만 '죽음의 고역같은' 임금노예들의 수용소에 반란의 불씨가 지펴지기 시작한 것은 이렇듯 '학출'들이 해고와 구속과 고문(!)을 마다 않고 투쟁했기 때문이다.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은 그것이 아무리 말 그대로 '자생적' 투쟁이었다손 치더라도 83년, 84년, 85년, 86년의 이러한 노동운동 '개척사'가 없었다면 절대 저절로 그냥 일어날 수 없었다.

  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운동은 세 갈래로 발전해왔다. 민주노조운동, 현장조직운동, 정치적 노동운동이 그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은 지난 10년동안 자신의 투쟁과 이념, 그리고 조직을 발전시켜왔다. 단위사업장 안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려는 투쟁에서부터 노동운동 탄압 분쇄투쟁, 94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살인기계 중국 이전 반대투쟁, 97년 총파업으로 일궈낸 노동법개정투쟁에 이르기까지 투쟁의 요구와 내용, 그리고 형식은 꾸준히 발전해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87년의 노동자 선언은 노동자가 더 이상 기계일 수 없다는 인간선언이요, 임금노예로서가 아니라 일터와 사회의 주인으로 살아가겠다는 노동자들의 주인선언이었다. 이 자각은 자주성과 민주성이라는 민주노조운동의 기본 이념으로 구체화되었다. 지역과 업종, 그리고 그룹으로 나뉘어 발전해온 민주노조운동은 전노협과 전노대를 거쳐 민주노총을 건설함으로써 산별 시대를 예비하는 연맹 단계로 접어들었다.

  노동조합과 구별되는 현장활동가조직이자 노동자 정치조직과 구별되는 선진노동자 대중조직인 현장조직 운동은 노조민주화투쟁, '노민추운동의 대중화' 단계, 민주노조 사수와 정상화투쟁, '산개와 집중의 시행착오' 과정을 거쳐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하는 현장활동가조직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7년 이후 정치적 노동운동은 자기 발로 서기 시작한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과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으로 찢겨져 바람직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은 노동운동 바깥에서 정치운동을 쏟아부으려 했다. 노동운동은 정치운동의 '교양' 대상일 뿐이었다.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은 노동운동만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주2)

  '정치적 노동운동'은 노동단체운동과 정치(파)조직운동으로 발전해왔다.

  노동단체운동은 90년 전노협이 건설될 때까지 민주노조운동을 지원하고 '민족민주전선'을 강화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90년 전노협이 건설되면서 지금껏 노동단체가 해왔던 노동조합 지원사업의 대부분을 노동조합 스스로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노동단체운동은 선진노동자조직론자들과 민중당 불참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민중당 참여(동조)세력을 다른 편으로 하여 분리되었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의 1차 분화는, 전노운협을 분리 해 나온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에서 한국사회주의노동당(한사노당)세력이 빠져나오고, 전노운협에서 한국노동운동협의회(한노협)가 다시 분리되는 2차 분화로 마감되었다. 노동단체운동은 93년 전노대가 만들어지면서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공식 참가 자격을 잃어버렸다. 전국회의에서 ILO공대위까지 민주노조총단결대오에 하나의 주체로 참여했던 노동단체들이 민주노조총단결대오가 강화됨과 동시에 '배제'되어버린 것이다. 노동단체는 해마다 그 수가 줄고 있다.(주3)

  정파조직운동은 80년대 중반 NL과 CA에서 80년대 후반 이후 민족해방그룹과 사노맹, 그리고 인민노련, 삼민그룹, 노동계급, 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혁명그룹 등 이른바 PD그룹으로, 그리고 이들 정파운동 전부가 안팎에서 해체된 다음에는 흔히 좌파와 우파라는 구도로 발전해왔다.

  (반)공개 정치조직운동은 정파조직운동의 부침과 궤를 같이 해왔다. 민중당 해체 이후 한노당에서 진정추로, 그리고 사추위와 민중회의로 갈라져온 정치조직운동은 92년 대선 때 백기완 선대본을 함께 만들어 활동했다. 사추위와 민중회의는 민정련으로 통합했고 민정련은 다시 진정추와의 통합 문제 때문에 노진추와 노정련으로 분리됐다. 민정련 안에 있던 구 사추위그룹은 진정추와 통합하여 진정련을 만들었다.

  8∼90년대 정파운동과 노동·정치단체운동은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통일시키지 못했다. 이는 '정치적 노동운동'의 분열로 이어졌다.

  '정치적 노동운동'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노동조합이 직접 정치세력화하겠다는 주장 앞에서, 무장봉기론자가 아닌 바에야 의회를 통한 개량 말고 다른 무슨 수가 있느냐는 현실론 앞에서, 자칫 잘못하면 좌익기회주의로 내몰리는 원칙론의 무기력 앞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전선을 지켰던 동료들의 이탈과 좌절 앞에서 힘겹게 몸부림치고 있다.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의 통일'이라는 화두를 여지껏 부여잡고 '외통수'로 남아 있는 자들은 이제 자기 운동의 십수년 세월과 '내공'을 걸고 '정치적 노동운동'의 공과 위에서 노동자 정치운동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시작'이다. 그러나 이 '시작'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현장 선진노동자들이 노동자 정치운동을 자기 '사업'으로 인식하고 실천할 채비를 갖춰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성과 '정치적 명확성'은 이 '시작'의 전제다.

-----------------------------------------------------------------------

미주

1) 80년대 '학출'들도 70년대 재야운동을 '낭만적 민주주의운동'이라고 비판했다.

2)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의 문제점은 심각하다. 현장의 문제를 중심으로, 현장 활동력을 주력으로 삼지 않는 정치운동은 언제나 현장을 대상화시키고 노동운동을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협소화시킨다. 이 운동은 하청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주민운동을 더 강조한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말하면서 국민과 더불어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노동운동론을 주창한다. 이 운동은 "국민들이 우리에게 왕관을 씌워줄" 때까지 당선 가능한 실력을 갖추자고 설득한다. 결국 이 운동의 최고 목표치는 생존 가능한 제도 야당으로 제한된다.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의 문제 또한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장을 절대화시키는 이 운동은 일체의 정치운동을 외부세력의 음험한 개입으로 단정짓는다. 이는 이른바 바깥에 대한 극단의 피해의식을 반영하는 것이고 협소한 노동자주의의 또다른 재판이다. 이 운동은 결국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자본가들의 선거판에 노동자를 구경꾼으로, 무력한 거수기로 묶어놓는다.

'노동운동 없는 정치운동'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의회주의 선거정당의 건설과 등치시킨다. 이는 선거정당=정치투쟁, 노동조합=경제투쟁이라는 고색창연한 양날개론으로 후퇴하는 것이며 노동운동을 밖으로부터 계몽해야 할 하위의 운동으로 재단하는 것이다.

'정치운동 없는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현장권력 장악 이후의 어떤 것으로 미뤄둔다. 그러나 정치세력화 없이 현장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본다면 이는 현장(경제)과 정치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는 단계론에 지나지 않는다.

[울교협통신] 제7호, '다시 생각하는 정치세력화', 1996.3.4.

3) 미국 정보기관의 어떤 보고서에 한국 노동단체 상근자들을 영세민으로 분류해논 게 있다는데 그 정도로 단체활동가들의 살림살이가 쪼들리는 판이니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 '찬밥 신세'가 된 단체운동의 미래를 개척할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4)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 어지러운 '이합집산' 과정은 '골치 아픈 바깥'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조직운동 안에 이미 이 문제는 '내재화'되어 있다. 노동조합운동과 현장조직운동 내부의 이른바 '대동단결론'과 '바깥 배제론'이란 것도 그 속내를 보면 공공연한 '바깥과의 연결'을 감추고 있는 또다른 '분파성'이 깔려 있기 십상이다. 분열이 아니라 올바른 '정치적 분화'와 '정치적 단결'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장 안팎을 가르는 '노동자주의'로 포장된 이 '감춰진 분파성'부터 극복할 필요가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2/14 10:08 2005/02/14 10:08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plus/trackback/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