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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울교협통신] 60호 97.4.11

 

바뀐 노동법과 97년 임·단투

  노동법이 바꿔졌다. 바뀐 노동법은 어찌 됐든 총파업투쟁의 결과고, 우리나라 자본과 노동 사이의 힘 관계를 더없이 냉정하고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앞으로 벌어질 새로운 투쟁의 기본 조건이다.

  민주노총의 합법화(주1)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조건과 환경이다. 중앙노사정협의회 말고도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차원의 정책 결정에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직·간접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러 길이 생긴다. 말 그대로 '창구(窓口)'에 지나지 않는다는 한계는 있지만, 이 참여는 민주노총이 우리 사회 여러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대안을 어떻든 갖지 않으면 안되는 조건으로 작용한다(주2). 이 조건은 다시,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한된 창구로 정부 정책에 참여하는 한계를 뛰어넘어 노동자가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넓혀낼 것이다. 다음,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한국노총 아래 노조들의 민주화가 활발해지고, 중간노조들이 민주노총에 들어오기가 쉬워지며,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게 그만큼 나아진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합법화될 수 있다는 사실 말고 바뀐 노동법은 온통 개악 투성이다. 교사와 공무원은 여전히 단결권을 갖지 못한다. 정리해고제, 단시간근로제, 변형시간제, 선택적 근로시간제 들이 새로 생겼다. 파업시 대체고용, 무노동무임금,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교섭권과 체결권 일원화, 비공인 파업 금지 따위가 버젓이 저쪽 손에 무기로 쥐어졌다. 하나 하나 따지고 보면 죄다 끔찍한 것들 뿐이다. 올해 임단투에서 이 조항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민주노총 합법화로 주어지는 이점(利点)들이란 것도 거꾸로 제대로 살려질 수 없다. 단위 현장이 박살나고서야 상층 교섭이란 게 힘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민주노총의 조직력 확대라는 것도 새로 노조 만들기가 어찌 보면 더 어려워진 상태에서 한계가 뻔하기 때문이다.

  올해 임단투는 바뀐 노동법 아래 치러지는 첫 싸움이다. 자본이나 노동이나 이번 노동법에 반영된 힘 관계를 앞으로 좀 더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려면 이 첫 싸움이 굉장히 중요하다.

  자본은 이번에도 '비타협적 전투성'으로 똘똘 뭉쳤다. "경제가 어렵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위기다. 경제를 살리자. 올해 임금 가이드 라인은 0%다. 임금을 깎자. 유급 휴일도 무노동무임금이다. 새로 생기는 노조 전임자는 처음부터 임금 없다. 이미 있는 노조 전임자 임금도 2002년까지 해마다 적어도 20%씩 깎자." 이런 '상대'를 놔두고 지난 총파업투쟁이 정부와의 투쟁이니 사용자 하고 문제 일으킬 건 없다는 둥 어쩌구 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순진한 건지 와락 소름이 돋는다.

  경제가 위기라는 것부터 하나씩 보자. 경제가 위기냐?(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위기라면 그 위기는 어떤 위기냐?(경기 순환 속에서 불황 국면이라는 사람도 있고, 이른바 '구조적 위기'라는 사람도 있고, 경기 양극화로 한 쪽만 잔뜩 어렵다는 사람도 있다.) 위기는 뭣때문에 생겼는가?(임금이 높아서라는 얼빠진 주장도 있고, 재벌 때문이라는 사람도 있고,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을 들먹이는 입장도 있다.)

  위기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다시 말해 경제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임금 낮추고 노동력 이용을 '유연화'해야 살아남는다는 막되먹은 소리도 있고, 재벌을 해체하여 경제개혁을 이뤄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이 질문들에 뭐라고 답하든 자본의 경쟁력을 높여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한다면, 우리는 아주 곤란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정경유착이니 뭐니 해서 엄한 데 돈 쓰지 말고 기술개발에 투자해라, 그래서 경쟁력을 높여라고 우리가 주장한다면(오늘날 우리나라 독점자본이 엄한 데 돈 쓰는 법은 결코 없다!), 자본이 이걸 싫다고 할 까닭이 없다. 이 살벌한 국제경쟁 시대에 독점자본이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다른 독점자본이나 중소자본을 먹어치워야 하고, 생산방식을 합리화해야 하며(이게 곧 기술개발이고 자동화며 임노동을 쫓아내는 거다!), 고용한 노동력을 쥐어짜야 한다. 고통의 결과만 놓고 보면 이렇게 그 결과의 해결이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되어버린다. '건강한 자본주의'라는 게 도대체 어떤 건지, 그리고 그게 정말 가능한 얘긴지 모르겠으나, 재벌이 해체된다고 고용불안이나 노동강도 강화의 원인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확실하다. 재벌이 해체되더라도 독점자본의 지배력은 그냥 그대로 남는다.

  이렇게 본다면, 올해 임단투는 자본의 '비타협적 전투성'에 맞서 고통의 원인을 해결할 힘(현장 장악력, 정치력, '국제적'으로까지 넓혀야 할 연대력)을 기르기 위한 학교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난 10년 고통의 결과에 맞서 싸우면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제 우리는 해마다 되풀이 되는 싸움 속에서 고통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힘을 기르는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선 셈이다. 97년 임단투는 이렇듯 긴 호흡에 바탕한 '대안 모색'과 여전히 우리에게 모든 것인 '현장성'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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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1) '다 된 밥'으로 알았던 민주노총의 합법화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바뀐 법대로라면 전교조와 현총련은 불법 조직이다. 불법 조직을 아래(산하) 조직으로 둔 위(상급) 조직을 합법 조직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게 시비거리다. 또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 단병호 민주금속연맹 위원장, 배범식 민주노총 부위원장 들의 조합원 자격을 둘러싸고도 되니 안되니 말들이 많다. 4월말쯤 민주노총이 지금 조직 그대로 노동부에 설립신고서를 내면 이 문제를 둘러싸고 또 다시 서로 밀고 당기는 힘 겨루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2) 민주노총은 7월께 '우리 사회 개혁 방향 프로젝트'를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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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0:10 2005/02/1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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