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주간울교협통신] 62호 97.4.25

 

  "화폐를 통하여 나에게 존재하는 것, 내가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 즉 화폐가 구매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나, 즉 화폐 소유자 자신이다. 화폐의 힘이 크면 클수록 나의 힘도 크다. 화폐의 속성들은 나의-화폐 소유자의-속성들이요 본질력들이다. 따라서 내가 무엇이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결코 나의 개성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 나는 추하다. 그러나 나는 아름답기 그지 없는 여자를 사들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추함의 작용, 즉 추함이 갖고 있는 사람들을 질색케 하는 힘은 화폐에 의해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나는-나 개인으로 보아서는-절름발이이다. 그러나 화폐는 나에게 24개의 다리를 만들어 준다;따라서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다;나는 사악하고 비열하고 비양심적이고 똑똑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화폐는 존경받으며 따라서 화폐의 소유자 또한 존경받는다. 화폐는 지고의 선이며 따라서 그 소유자도 선하다. 그 밖에도 화폐는 내가 비열하기 때문에 겪는 곤란에서 나를 벗어나게 한다;따라서 나는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가정된다;나는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화폐는 만물의 현실적인 정신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소유자가 똑똑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소유자는 똑똑한 사람들을 살 수 있다. 똑똑한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가 그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속마음이 동경하는 모든 것을 화폐를 통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란 사람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나의 화폐는 나의 모든 무능력을 그 정반대의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1. 화폐는 눈에 보이는 신이며, 모든 인간적 자연적 속성의 그 반대의 것으로의 전환이요, 사물의 보편적 혼동과 전도이다;그것은 불가능한 일들을 친근한 것으로 만든다;

  2. 화폐는 인간과 국민들의 보편적 창녀요, 보편적 뚜쟁이다.

  …만약 내가 여행할 돈이 없다면, 나는 여행의 욕구, 즉 현실적이고 자기 실현하는 여행 욕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만일 내가 연구의 소명은 있으나 연구할 돈이 없다면, 나는 연구의 소명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만일 내가 현실적으로 연구의 소명을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의지 그리고 돈을 갖고 있다면 나는 효과적인 연구의 소명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화폐는 개인에 대해서도 그 자신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적 등등의 끈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전도시키는 힘으로서 나타난다. 화폐는 성실함을 성실하지 않음으로, 사랑을 미움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덕을 패덕으로, 패덕을 덕으로, 종을 주인으로, 주인을 종으로, 우둔을 총명으로, 총명을 우둔으로 전화시킨다."

- 김세균 감수,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박종철 출판사) 88∼91쪽

  돈은 정말 이런 거다. 돈 때문에 짜칠 때마다(하루에 열번 넘게 그러지만), 영혼이 파괴된다고 느낄 때마다, 현실의 이기심들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을 때마다, 가난이 이미 살인보다 더 큰 죄악이 되어 있는 세상을 확인할 때마다 절망감을 넘어 그저 멍해지곤 한다. 지금도 '돈' 그러면 머리부터 묵직해지면서 다른 생각들이 싹 지워진다. 30대 중반에 어쩌구 이러면 가슴이 탁 닫혀버린다. 몸이 먼저 이러는 걸 보면 '방어기제'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 싶어진다.

  근데 멍해지기만 해선 될 일이 아니지 싶다. 돈에 대한 철학이라도 세워서 수세가 아니라 공세로 나아가야지 이대로 뒀다간 내가 제 명에 못살 것 같다. 우리에게 돈은 전부가 아니다. 돈이 전부일 수 없다. 돈이 주인 행세를 하는 사람 관계를 그 뿌리에서 바꾸겠다고 '운동'하는 처지에 돈이 전부라고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은 현실이다.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사람+정보+돈이라는 등식마따나 돈은 구상을 제약하고 기획을 빵구내며 집행을 가로막는다. 구상이 자유롭고 기획이 알차며 집행이 힘이 있으려면 '총알'이 실해야 한다. 그래서 돈은 어쨌든 '필요'하다. 그렇다고 돈이 일을 앞서고 주인 행세하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허나 어렵다고 돈을 모든 것의 앞과 위에 둘 수는 도저히 없다.

  "남에게 피해 안주고 나도 피해 안입겠다"는 생각은 또 다른 개인주의요 이기주의다. 남에게 피해 안입히고 살 도리가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고통이 전담되는 사회를 변혁하려면 전담되는 고통 속에서 다시 고통을 분담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는 때가 많다. 그 고통을 자기로 아무리 집중시킨들 '내공'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럼 나눌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남한테 피해를 안주고는 받을 수 없다. 한 쪽이 받을 수 없으면 나눌 수도 없다. 거꾸로 내가 피해를 입지 않으면 줄 수가 없다. 이걸 인정해야 이기심의 종 노릇 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 "어렵다. 도와달라"는 얘기는 하기 싫은 얘기인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끙끙거리고 제 속 긁을 얘기도 아니다. "자료회비 내주세요"라는 얘기를 자유롭게 못하는 단체 활동가(내가 제일 심한 것 같다)는 거꾸로 자신의 이기주의부터 되비쳐 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

  돈이 주인되는 세상을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에서 언제나 내 영혼을 '위로'해준 다음 얘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면서 어수선한 글을 맺겠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전제하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하고만 등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네가 예술을 향유하기를 바란다면 너는 예술적인 소양을 쌓은 인간이어야 한다;네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너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인간-그리고 자연-에 대한 너의 모든 관계는 너의 의지의 특정한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현실적·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네가 사랑을 하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너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

- 김세균 감수,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박종철 출판사) 91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2/14 10:11 2005/02/14 10:11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plus/trackback/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