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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한겨레] 총독부 무단통치, 임계점 넘었다

등록 :2019-01-02 07:11수정 :2019-01-02 07:18

 

 

경술국치 9년… 총독 말이 곧 법인 시대, 헌병경찰 일상적 폭력 조선인 분노 키워

 

<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1919년 1월2일 경성/오승훈 기자]

 

경술년(1910) 8월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나라가 망한 것이었다. 경술국치.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폐족이 된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 황족의 신하인 이왕가로 격하되었다. 국호는 대한제국에서 조선으로 돌아갔다. 일본만이 제국이었으므로 대한제국은 더 이상 제국일 수 없었다.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한 일본은 칙령 제319호를 공포해 보다 강력하고 보다 직접적인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그 우두머리로 총독을 두었다.

 

경성 남산에 위치한 조선총독부 건물. 한겨레 자료
경성 남산에 위치한 조선총독부 건물. 한겨레 자료
조선 총독은 일왕에게만 책임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였다. 일본의 관제상 최고인 친임관(일왕이 직접 임명하는 직급. 총독·정무총감·조선군사령관·육해군 대장 등)으로 본국의 내각 총리대신, 각 부 대신 및 대심원장(대법원장)과 맞먹는 자리였다. 대만 총독은 대신의 관리감독을 받았지만 조선 총독은 일왕에게 직접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았다. 총리에게 올리는 보고와 재가가 있었지만 이는 형식적이었다.

 

특히 총독은 조선의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총독의 명령, 즉 제령(制令)으로 조선에서 시행되는 법률들을 없애거나 대신할 수도 있었다. 총독의 말이 곧 법이었던 셈이다. 일본 육해군 대장 가운데 일왕이 임명하게 돼 있는 총독은 조선주차군에 대한 통수권도 갖고 있었다. 총독부 관리 중 주임관(참여관 이하 3~9등의 고등관을 뒀고 군수가 고등관 9등)에 대한 인사제청권과 판임관(보통문관시험을 거친 자로 총독이 임명) 이하에 대한 인사권도 가졌다. 총독은 한마디로 조선의 새로운 왕이었다. 임기를 마친 총독은 이후 내각 총리대신으로 영전한다. 일본 내에서 조선 총독의 정치적 입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가 내걸린 모습. 한겨레 자료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었다.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가 내걸린 모습. 한겨레 자료
총독에겐 조선인들의 저항을 제압할 수 있는 헌병경찰이라는 강력한 채찍이 있었다. 사실, 을사년(1905)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조선을 바로 식민지화하지 못하고 보호국이라는 과도기적 단계를 거쳤던 이유는, 한말의 의병전쟁 때문이었다. 그 치열하고 눈물겨운 항쟁을 무차별 학살로 진압한 일본은 군사경찰과 민간경찰을 일체화한 헌병경찰제 도입이라는 강수를 두었다. 헌병경찰을 총괄하는 중앙의 경무총감부와 지방의 경무부 등의 경찰기구는 총독의 직속기관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 통감에서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 마사타케(67)는 이같은 권력을 바탕으로 일종의 계엄령 체제인 ‘무단통치’(武斷統治)라는 식민지 폭력지배를 확립하였다. 하세가와 요시미치(69) 현 총독은 전임 데라우치 총독의 통치방식을 기계적으로 계승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9월 건강상의 이유로 돌연 사퇴의사를 밝혔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 총독. 조선주차군사령관을 지낼 때 의병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 총독. 조선주차군사령관을 지낼 때 의병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헌병경찰의 불법 체포·구금·투옥 행위를 합법화하기 위해 통감부 재판소령을 조선총독부 재판소령으로 바꾼 일제는 조선감옥령을 공포하여 전국 24개소에 감옥을 설치하고 독립운동가와 그 혐의자를 임의로 투옥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배자의 권위를 보이고 위압감을 주기 위해 군국주의적인 복제를 제정·공포하였다. 일반 문관은 물론 교사들까지 금테 제복과 제모·훈도를 착용하게 된 연유였다. 칼을 찬 교사의 등장이었다. 조선인에 대한 일상적인 고문과 거주제한, 집회·결사의 자유 불허, 언론자유 말살, 태형령 남발 등 무단통치의 가공할 폭력성은 민족의 가슴에 거대한 분노를 키우고 있다.

 

한편, 군인 출신 총독들의 무단통치를 두고 일본 내에서도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일본 정계를 중심으로 ‘조선 총독 문관 교체’ 등의 내용을 담은 관제개혁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작년 12월17일 하라(63) 총리가 민비시해사건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정계의 막후 실세 미우라 고로(73) 전 주한공사와 동경에서 비밀회동을 갖고 조선 총독에 민간인도 임용 가능케 하는 내용의 조선총독부 관제개혁안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 사장을 지낸 하라 총리는 일본 정계의 가장 큰 파벌인 조슈번(長州藩)과 사쓰마번(薩摩藩)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제3의 인물로 군인이 아닌 정당세력을 대표한다.

 

미우라는 이날 곧바로 일본 정계의 최고 실권자인 야마가타 아리토모(81) 전 총리대신 겸 육군 원수를 만나 이같은 사항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총리를 두 번 지낸 야마가타는 메이지유신이 낳은 최대 파벌 조슈번의 거두이자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자다. 상황에 따라 조선 총독이 문관으로 바뀔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파국을 맞기 전 일본 스스로 무단통치의 변화를 꾀할 수 있을지 조선 민중의 눈이 일본으로 향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문장. 한겨레 자료
조선총독부 문장. 한겨레 자료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76629.html?_fr=mt1#csidx874b1a1c27970d483e11cadb2b87a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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