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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학살은 어떻게 냉전 해체를 가로막았나?

[기고] 5.18과 1980년 한반도 주변 역학 관계

 

 

 

1980년 5.18 광주 항쟁에 대한 극우 진영의 왜곡이 도를 넘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북한군 개입설 등이 공론장에서 떠돈다. 이는 민주 진보 진영의 광주 항쟁에 대한 진상 규명 작업이 그간 주춤했던 탓도 있다. 한국 현대사를 똑바로 살피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반성이 나온다. 광주 항쟁을 다룬 대표적 저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어판 내는 일을 했던 설갑수 씨의 글을 싣는다. 2017년 5.18 기념재단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을 설 씨와 재단 측의 동의를 받아 다시 소개한다. 지만원 박사 등이 주장하는 북한군 개입설은 실증적인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1980년 당시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글이다. 당시 북한은 한국에 대해 군사 행동을 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 당연히 광주 항쟁에 개입할 의사도 없었다. 당시 미국 정부 역시 같은 판단을 했었다. 탐사보도 전문기자 팀 셔록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보한 미국 정보기관 자료로 확인된 내용이다. 반면, 광주 항쟁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폭력 진압은 미국과 중국이 손 잡는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을 가로막은 사건이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쿠데타 세력의 역사적 과오는 광주 시민 학살과 성폭행 등에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다 일찍 완화될 수 있었던 냉전 질서를 다시 굳혔다. 다음은 설 씨의 글 전문이다.   

 

소위 보수 정권 기간 동안, 즉 이명박의 임기가 시작된 2008년 2월부터 박근혜의 탄핵에 이르는 2017년 3월까지 광주 항쟁의 집단적 기억과 역사는 극우세력에 의해 극심한 왜곡에 시달려 왔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빛나고, 가장 비극적인 열흘이었던 광주항쟁은 진상 규명이 활발했던 199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의 버금가는 사건으로 대중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디게나마 도약하는 시기에는 북한 특수 부대 개입설 등과 같은 광주 항쟁에 대한 왜곡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왜곡은 한국 민주주의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방증일 뿐이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광주항쟁에 대한 탐사보도와 학문 연구가 사실상 정체했다는 것도 극우의 왜곡을 가능케 한 다른 요인이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다시 불붙기 시작한 진상규명 노력조차, 여전히 과거에 이미 거론됐거나, 찾아냈던 사실을 복기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한국 내 진실규명 상황이 착잡하게 더딘 탓도 있겠지만, 한국 전쟁 이후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었던 광주 항쟁에 대한 국제적 역학 연구는 미국의 항쟁 진압을 규명하는데 국한돼 왔다. 광주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의 역학과 세계 경제정치적 맥락에 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다.


사실상 첫 시도이므로, 글의 범위를 1980년 전후의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역학에 제한한다. 또한 논증을 위한 데이터 역시 1차 자료, 외교, 정부 문서 그리고 언론 자료 등으로 제한한다. 


기존의 연구가 거의 부재한 탓이다. 또한 자료 접근성의 극심한 제한 때문에 중국 측 1차 자료를 인용할 수 없었다. 보다 많은 1차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중국이 어떤 논리와 목적을 갖고 한반도의 1980년 5월을 접근했고 개입했는지를 보다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광주항쟁 : 신냉전시대의 길목 


광주항쟁은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 카터-레이건 행정부를 잇는 신냉전 시대의 중심인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관계 역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국전쟁에서 총을 겨누고 싸운 27년 만에, 미국과 중국은 1979년 1월1일을 기해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에 앞서, 1978년 8월 12일, 일본과 중국이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서로 손잡고, 소련을 견제하면서 서로의 시장에서 경제적 활로를 찾으려는 미국과 중국이 새로 짠 거대한 장기판을 비집고 나온 시험대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각자의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의 분쟁이 군사행동으로 격화할 수 있는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에 대한 첫 시험대였던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구도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해체될 기미조차 없던 동서 양극체제 하에서, 미국과 중국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가 필요했다. 

미국이 구상하고, 중국이 적극적이었던 미국-남한-북한의 3자회담이 그것이다. 미중 국교 정상화 7개월 이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와 한국 대통령 박정희는 공동성명에 3자 회담 제안을 포함시킨다. 


미국의 의도는 중국의 지지 하에 미국-남한-북한 세 주체가 모여 서로 교차 승인 후, 남북 불가침 선언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식한다는 게 회담의 장기 목표였다. 남북의 교차 승인은 물론, 북미, 한중 관계 정상화를 포함한 장기적 프로젝트였다. 유념할 것은 이것은 단순히 평화체제는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이 손잡고 소련을 견제하려는, 냉전체제의 한계 안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주변 열강의 의도와 무관하게, 남북한 민중들에게는 고단한 군사대결 체제를 종식하고, 냉전 체제 하에서 평화 공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였다. 빈약한 기회였으나, 한반도의 대전환이 가능한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이 기회가 무산된 결정적 계기는 광주 항쟁의 무력 진압과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학살 정권과 당장에 평화를 대화한다는 것은 실리도 명목도 없었다. 대화를 줄다리기하던 남북관계는 급속히 냉각됐다.  

 

중국의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항쟁의 유혈 진압과 관련해서 미국을 비판했다. 광주항쟁의 무력 진압과 그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미중의 냉전적 동맹 하에서조차, 한반도에서 남북을 둘러싼 두 열강이 이해가 상충되며, 서로의 영향권에 대해 계속 갈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 후, 급속히 냉각된 남북관계는 간헐적 해빙기를 제외한다면,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가 체결까지 냉전 상태를 지속했다. 이 또한 노태우 정권 하의 제한적 국내 민주 역량이 이끌었 다기보다, 동구권의 해체와 탈냉전 구도의 영향 등 국제 정세에 대한 남북 지배층의 적극적 대응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80 년 5월 항쟁 전후로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어떻게 재편하려고, 광주의 무력 진압과 전두환의 집권이 그것을 결정적으로 종결 했는지 살펴보자.


여력이 없는 북한 


1970년대 중반과 말기에 접어들어서, 격변하는 한반도 주변 정세와 더불어, 남북의 국내 정세도 녹록지 않았다. 1970년대 말, 남한은 중공업 과잉 투자로 말미암아, 경제는 급작스럽게 냉각됐고, 기층 민중의 불만이 기존의 지식인과 학생 중심의 민주화 운동과 접목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는 점증하는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의 경제지표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북한 경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장기침체에 들어갔다는 게, 좌우를 아우르는 합의다. 또한 이런 정치경제 상황에서,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권력승계는 마무리되고 있었으나, 적어도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압도할 여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남과 북 모두,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남한에서는 1979년 부마 항쟁에 이어, 10.26 그리고 이듬해 5.18에 이르는 정변이 일어났다. 외부에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지만, 북한도 비슷한 시기에 정치 불안을 겪었을 가능성이 있다. 1980년 5월 28일, 평양주재 헝가리 외교관이 본국에 보고한 전문은, 시민의 자발적 봉기라는 초유의 비상사태가 남한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정보부에 해당하는 국가안전보위국의 국장 이진우가 조선 만주 국경의 소요 대응을 현장지도하고 있었다고 밝힌다. 


헝가리 외교관과 면담한 부국장은 "남한의 최근 소요(광주 항쟁) 이래, 북한 당국은 남한이 (항쟁 진압에) 쏠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남측의 도발보다, 북쪽에 자리잡은 적대 세력의 체제전복 활동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Wilson Center Digitnal Archive 1980) 미국 정보기관 사이의 협의체인 국가 정보 위원회(National Intelligence Council)에 미 중앙정보국(CIA)가 제출한 1980년 6월 2일자 회의의제에서 정보국은 미국의 단호한 군사공격 의지 표명이 북한이 광주 항쟁에 개입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 한다. (CIA, Agenda Items for 10 June NUC Warning Meeting 1980)


그러나 사실상 북한은 남한의 정치 혼란을 이용할 의사도 능력도 이미 고갈되어 있었다. 미국 탐사전문기자 팀 셔록(Tim Shorrock)이 미국 정보공개법(FOIA)을 활용해 입수한 북한 지도자들의 대화는 이 점을 드러낸다. 김일성과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등이 나눈 대화다. 1980년 5월 30일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정보 보고서는 "'최종 검증이 안된' (not finally evaluated) 첩보(intel)"를 담고 있다고 적시된 것으로 봐서 제3국이나 북한 내부 인적 첩보(humint)를취합한 자료로 보인다. 정보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월 19일 남한에서 학생 시위에 이어, 광주에서 학생 소요가 일어나는 와중, 북한의 주석궁에서는 김일성 주석과 무력부장 오진우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비밀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북한의 지도자들은 광주 소요가 전국적 인민 반란으로 확대된다면, 남한을 침공하는 일을 자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김일성이 실제로 침공을 준비한다고 시사하는 이상 징후는 없다." 


요약하면, 광주 항쟁이 전국 반란으로 번지면, 군사행동을 한번쯤,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북한의 입장이었고("자제하지 않겠다"), 실제로는 그조차 아무런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의사도 능력도 없는 말의 성찬이었다. 이 점은 2017년 5.18 기념재단이 CIA FOIA 웹사이트에서 찾아낸 광주항쟁 관련 20여 개의 기밀해제 문건에서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1980년 7월, 미국 정치인으로서 북한을 최초 방문한 스티븐 솔라즈(Stephen Solarz) 하원의원을 만난 김일성은, 비록 외교적 수사라 할지라도, 광주에 개입을 하지 않은 이유는 미국의 경고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조금 길지만 인용한다.

 

"광주사태(incident)가 일어나자, 미국은 제3자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발언이 우리를 향한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봉기에 개입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역시, 이러한 문제에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남한 당국이 말하는 북조선의 남침 위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북한이 남한의 혼란상을 이용해 남침하려 한다는두려움도 사라졌다. 미국의 가장 큰 우려인 즉, 남한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남한으로 전진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하자만, 이번 사태는 우리가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StephenS. 1980,9-10) 


이에, 솔라즈는 "북 측이 남한의 소요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이며, "그러한 북의 입장은 건설적이었다"고 답한다. (242. Memorandum of Conversation 1979) 북으로 출국 전, 국무부와 정보부의 대북 브리핑을 받은 미국 하원의원의 화답이었던 셈이다. 


3자회담 : 북한의 대담한 제의, 중국의 후원, 그리고 미국의 화답


위에서 인용한 김일성의 발언은 북한이 1970년대 중반부터 취한 외교 노선의 논리와 같은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은 군사력을 통한 남한의 무력 점령 전략을 점차 포기하고 있었다. 


열전 대신, 북한은 스스로를 둘러싼 냉전구도의 재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미국과 중국이 데탕트의 일환으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1970년대 중후반, 북한은 중국과 함께 미국을 상대로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서명한 당사자의 지위를 활용 한반도에서 유일한 자주국가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그리하여, 체제 안전 보장을 확보하려 했다. 1974년 최고인민회의 제5기 3차 회의에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결의했고, 1977년 1월,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공식 제안했다. 한편 남한에 대해, 연방제 구성과 단일국호 유엔 가입을 제안했다. 박정희는 남북 불가침 조약 회담을 역제안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 박정희 유신정권 하에서, 한미 관계가 소원해졌다 해도, 미국이 한국을 완전히 배제한 채, 냉전체제 하에서 북한과 한국 전쟁의 강화 조약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온 미국의 제안이 남북미 3자 회담 제안이다.


카터 행정부 당시, 국무부 파일을 살펴보면, 미국은 1979년 7월 카터와 박정희 정상회담의 코뮤니케를 통해 3자 회담을 제안하려고 했고, 1979년 초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내부입장이 정리되자, 5월에는 중국과 이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한다. 5월 4일 백악관 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nski)는 주미 중국대사 차이 제민(柴泽民)과 만난다. 하루 전, 차이 대사와 카터 대통령과 미소 군축회담에 대한 면담의 내용을 재확인 것을 제외한다면, 3자 회담이 유일한 대화 주제였다. 미국은 3자 회담을 실현시킬 방법을 중국에게 물었다. 브레진스키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통한 극동 지역의 안정이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이해이지만, 소련의 이해는 아니라며, 3자 회담을 통한 남북 긴장 완화의 목적이 종국적으로 소련 봉쇄 전략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242. Memorandum of Conversation 1979)


차이 대사가 북한이 남한이 참여하는 3자 회담 틀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하자,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대북 대화는 남한의 의구심을 사게 될 것이며, 미국과 중국이 3자 회담을 실현할 수 있는 창의적 해결책(creative solution) 을 모색하자고 제의해 중국의 동의를 얻는다. 중국의 지원을 확인하자, 미국은 3자 회담 제안 준비를 재빠르게 진행한다. 5월 23일에는 정상회의 준비 명목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전 주한대사 필립 하비브(Philip Habib)를 특사로 서울로 보내, 이를 조율한다. 그리고 대중 접촉을 통해, 북한의 입장과 의중 변화를 계속 확인해 간다.


미국의 뜻대로, 그리고 중국의 의도대로, 7월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남북한 미국의 고위당국자 회담이 제안됐다. 북한은 7월 10일 외교부 성명을 통해, 한미 공동 제안을 거부하고, 종전 서명의 당사자인 미국과 북한이 주도하고 남한이 옴저버 자격으로 참석하는 3 자 군사회담을 역제안 한다. 이 시기부터 미국은 중국과 루마니아와 같이 미국과 통하지만 북한의 우방인 나라를 통해 북한을 설득해 나간다. 급기야, 1979년 10월 13일, 당시 루마니아 외상이었던 스테판 안드레이(Stefan Andrei)을 통해 북한의 3자 회담 거부가 최종 입장이 아니며, 이 제안을 계속 고려하겠다는 전언을 듣는다. (Romanian Remarks on the Korea Trilateral Proposal 1979) 


그러나 이 모든 움직임은 10.26 박정희 암살로 시작한 남한의 정변과 5.18 광주 항쟁의 진압과 신군부의 집권으로 중단되었다. 무엇보다 광주의 유혈진압과 그에 대한 지지로 말미암아, 한국과 미국 모두 남북 긴장 완화를 위한 정치적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상실했다.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의 회고록(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한국판 제목은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의하면, 1980년 5월 22일, 국무성 아태 차관보 리차드 홀부르크(Richard Holbrooke)는 중국 대사 차이를 국무성으로 불러, 중국이 북한이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고무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광주에서는 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한지 하루가 채 되지 않고, 미국이 전두환의 유혈 진압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백악관 회의와 같은 날 만난 이 두 사람이 당시 남북한 사정에 대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중국은 일면 미국을 제한적으로 비판하고, 북한을 단속함으로써, 한반도의 안정을 조기에 확보하고, 자신의 대북 영향력을 확인 받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맞닿아 있었다.

체로키 파일 
 

3자 회담 협상 무산과 더불어 주목할 지점은 소위 체로키 파일(Cherokee files)이다. 팀 셔록이 1996년 정보공개법을 통해 입수해서 세상에 알려진 체로키 파일은,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10.26 이후 한국 상황을 점검하고 비상사태를 대비하려고 구성된 것이 아니라, 3자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 국무성은 1979년 6월 8일을 기해 3자 회담 관련 모든 전문들에 "Cherokee"라는 분류 캡션을 넣으라고 지시한다. (DepartmentState 1979) 보안등급이 높은, 한반도 담당 고위관리만 3자 회담 전문을 읽고, 토론하고 회담의 성사를 진행할 사실상의 태스크 포스가 이 즈음 시작된 것이다. 체로키 팀은 최소 13명의 고위관리들로 이뤄져 있었다.


한반도의 긴장 완화를 위한 회담을 촉진하기 위해 구성된 테스크 포스가 이듬해 5월에는 신군부의 군사쿠데타를 인정하고, 광주의 유혈진압을 사실상 승인한 것은 언뜻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전혀 모순된 상황이 아니다. 위에서 서술한대로, 당시 한반도의 긴장 완화는 목적이 아니라, 지역을 재편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수단이었다. 수단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서 언제나 폐기될 수 있다. 미국은 신군부 지지를 통한 질서회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지역구도 재편을 위한 한반도 긴장완화라는 수단을 버렸다. 요컨대 기존의 냉전질서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쉽게 진압을 결정한 것이고, 중국은 이러한 미국의 움직임을 묵인하거나 방조하면서, 지역에서의 자신을 영향력을 유지했다.

 

결론을 대신해서. 

 

1. 1980년 5월, 광주 항쟁은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었다. 주변 열강의 어느 정부도 광주 시민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중국과 미국은 극동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긴밀히 협조했다. 양국 모두 광주 항쟁이 신속히 종결될 것을 원했고, 그러한 구도를 만들어 나갔다. 

 

2. 이러한 구도 속에서, 북한이 광주 항쟁을 획책하거나,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극우 지만원의 북한개입설은 실증적으로나 지역 역학적으로나 어불성설이다.

 

3. 현재까지는, 남북미 3자 회담 더하기 중국이라는 구도 하에서 한반도의 긴장완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표면 상, 1970년대 말 시도됐던 3자 회담의 구도가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때와 다른 점은 긴장 완화와 화해가 회담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점이다. 

 

4. 주변 열강 구도를 비집고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의 화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통성 있는 건강한 민주정부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 화해 구도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주체가 촛불혁명 이후 집권한 문재인 정부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5. 또한 1970년대 말 당시, 열강 구도의 재편 속에서, 미국과 중국의 3자 회담 구상을 적극 활용하지 못한 남북한 권위주의 체제의 경직성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남북 모두, 이 빈약하지만 새로운 기회를 적극 활용하지 않고, 상대방을 고립시키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6. 광주 항쟁의 유혈진압으로 주변 열강들의 긴장 완화 흐름을 한반도에 주입하는 게 불가능해지자, 남북관계도 냉각되어 갔다. 한반도 내부에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남북화해도 불가능하고, 세계열강에 자기 운명을 내맡길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7.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격동과 동북아시아의 세력의 재편 속에서 중국이 광주항쟁을 어떻게 평가했고, 정책 행동을 취했는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충분한 자료와 논쟁을 통해 그런 연구가 진행된다면, 광주항쟁의 세계사적 의미를 올곧게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mendrami@pressian.com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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