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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수사관조차 존경했던 신향식”

 

“고문수사관조차 존경했던 신향식”
남민전 신향식 선생 30주기 추모제 열려
 
 
2012년 10월 07일 (일) 22:25:28 이계환 기자 khlee@tongilnews.com
 
   
▲ 남민전 신향식 선생 제30주기 추모제가 7일 낮 경기도 광주공원묘원에서 진행됐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남민전도 인혁당처럼 재평가 받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싸우자”

“신향식 선생은 고문하는 사람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가을하늘이 눈부시도록 화창한 일요일 한낮. 경기도 광주공원묘원에서 7일 남민전 신향식 선생 제3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신향식 선생의 남민전 동지였던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추도사를 통해 “고문수사관이 피고를 존경하는 경우를 처음 봤다”며 이같이 회고했다.

   
▲ 신향식 선생의 남민전 동지였던 임헌영 소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임 소장은 “1970년대 유신시절 제가 신향식 선생을 처음 뵌 게 남산 3호 터널 근처 골목에서였다”면서 “얼굴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그날. 그게 감방 밖에서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며 밝은 햇살 아래 담담하게 추도사를 이어갔다.

이른바 ‘남민전 사건’으로 남민전 관련자들 모두가 구속돼 옥고를 치를 때 임 소장은 감방을 순회하던 한 수사관과의 대화를 잊지 못했다.

임 소장은 “한 수사관이 제 감방을 순회하면서 남민전 얘길 하길래 내가 ‘신향식을 아냐?’고 묻자 그 수사관이 ‘너무나 존경하는 분이다. 이런 분의 경력이라면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면서 “이 말을 듣자 나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부심이 격상되었다”고 회고했다.

임 소장은 “수사관이 피고를 존경하는 경우를 처음 봤다”면서 “고문하는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사람이 있는가”하고 거듭 고인에 대한 예를 표했다.

   
▲ 비전향장기수 선생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임 소장은 1970년대 유신체제 시 민주화 운동의 실상도 전했다. 그는 “70년대 유신시대를 두고 1975년경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예상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이들에게 분노한다”면서 “그때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이 100명도 안됐다. 비밀리에 했다. 지하활동 방식밖에 없었다. 아무도 안 했지만 남민전은 싸웠다”며 당시 상황에서의 남민전식 투쟁을 평가했다.

이어 임 소장은 “얼마 전 인혁당의 무고함이 벗겨졌다”면서 “남민전 관련자들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살아왔다. 인혁당처럼 재평가 받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싸우자”며 참석자들을 격려했다.

☞ 남민전 사건이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이라는 비교적 긴 이름의 ‘남민전 사건’이란 1976년 2월 비밀단체를 조직해 유신반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79년 84명이 검거된 유신말기 최대 공안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이라고 발표했고 법원은 관련자에게 사형, 무기, 징역 15년 등 대부분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2008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가 남민전 사건 관련 신청자 중 고(故) 김남주 시인을 비롯한 29명에 대하여 민주화 운동을 이유로 유죄판결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즉 남민전 관련자들이 행한 ‘봉화산작전’ ‘땅벌작전’ ‘GS작전’ 등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행위로 판단해서 이들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위원회는 당시 남민전 사건의 지도급 인사인 이재문, 신향식 씨에 대해서는 심의를 보류했다.

추도사가 계속됐다.

김규철 범민련 서울연합 의장은 “여기 와보니 그동안 한 게 없어 부끄럽다”고는 “그래도 선생은 죽어서도 동지들을 모아서 여기에 오게 했다. 이게 민족대단결이지 않은가”하며 고인과 통일운동을 연결시키며 기렸다.

황선 통합진보당 전 비례대표 후보는 “제가 출연하고 있는 라디오 반민특위에서 조만간에 남민전 사건을 다루려 한다”면서 “그래서 남민전을 공부하던 중 신향식 선생님의 이름과 삶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며 고인과의 최근의 인연을 강조했다.


“1982년 10월 8일 정오 12시 사형 집행”

 

 

   
▲ 이날 추모제는 신향식 선생의 부인 이계영 여사와 큰 며느리 박윤경 씨의 참배로 시작됐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날 신향식 선생 30주기 추모제는 남민전 관련자인 김부섭 씨의 사회로 신향식 선생의 부인 이계영 여사와 큰 며느리 박윤경 씨의 참배로 시작됐다.

신향식 선생의 약력 역시 남민전 관련자인 곽선숙 씨의 낭랑한 목소리로 소개되었다. 그가 약력을 천천히 소개하다가 “1982년 10월 8일 정오 12시 서울구치소 교수대에서 형 집행”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자 주변의 초목도 잠시 떠는 듯했다.

이어 진관 스님이 추모자작시를 낭송했으며, 또한 남민전 관련자인 최광운 씨가 시인이자 남민련 관련자인 김남주의 시 ‘전사2’를 낭송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남주는 시에서 “오늘 밤 / 또 하나의 별이 / 인간의 대지위에 떨어졌다 / 그는 알고 있었다 투쟁의 길에서 /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 그 죽음이 결코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하며 마치 신향식의 죽음과 현재를 암시했다.

추모제는 참가자들이 고인의 묘소 앞에 길게 늘어서 손에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정리했다.

 

   
▲ 신향식 선생과 동년배이자 동지인 김영옥 선생이 잔을 올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어 분향재배는 유족부터 시작해 각 참가단체별로 진행됐다.

신향식 선생과 동년배이자 동지로서, 최근 큰 수술을 받았던 김영옥 범민련남측본부 지도위원은 “오늘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무척 힘들었다. 나도 이제 자네 곁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가 보다”면서 “좀 있다가 만나자”고 말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이날 추모제는 남민전 관련자들을 비롯해 양원진․김영식 선생 등 비전향장기수들, 노중선 선생 등 사월혁명회 회원들, 권오헌 선생 등 양심수후원회 회원들, 김규철 선생 등 범민련남측본부 회원들, 김명운 의장 등 추모연대 회원들 그리고 자주민보피해대책위원회 회원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신향식 선생에 대한 회고
 

 

   
▲ “남편이지만 존경합니다.” 신향식 선생의 부인 이계영 여사(왼쪽 두 여성 중 우측)와 그 옆에 선 며느리 박윤경 씨.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이계영 (신향식 선생 부인) : 성실하고 훌륭한 분이셨다. 남편인데도 존경한다. 평생 존경해 왔다. 지금도 존경한다. 너무 눈물이 난다. 남편이 통혁당 할 때는 통혁당 하는 줄 몰랐다. 출소 후 1975년에 사회안전법이 나오자 남편이 이내 집을 나갔다. 그때 뭔가 하는가보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남민전이었다.

□ 김영옥 (범민련 남측본부 지도위원) : 의지가 곧고 불같은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든 한번 결정되면 두 말 않고 추진했다.

□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 : 신향식 선생은 이재문, 김병권 선생과 함께 남민전을 결성한 3인중의 한 사람이다. 통혁당 사건에도 연루돼 학사주점을 운영했다. 비전향으로 출소한 뒤 1975년경에 지하로 들어갔다. 1976년 남민전을 결성할 때 가장 열렬히 현장활동을 하신 분이다. 당시 부유층 집을 터는 ‘응징사건’을 실질적으로 지도했다.

정이 많았고 원칙에 철저했다. 약속시간에 1초도 안 늦었다. 당시 강남쪽 신사동에서 자주 만났다. 1979년 남민전 사건이 발생하기 전 당시 제3한강교에서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다. 자기 수준이 아니라 상대편의 수준에 맞춰 대화를 하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 추모제 후 참가자들이 묘지 주위로 모였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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