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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의문사 전후, 중정-보안사- 청와대는 이랬다

장준하 의문사 전후, 중정-보안사- 청와대는 이랬다
(블로그 '사람과세상사이' / 오주르디 / 2012-10-05)

 

 

장준하 유족이 청와대에 의문사 사건 재조사와 진상규명을 요구하자 청와대는 이 사건을 국가권익위원회를 통해 지난 8월 31일 행안부의 ‘과거사 관련 권고사항 처리 실무위원회’에 배당했다.


장준하 의문사 재조사 요구가 ‘단순 민원’?

 

행안부는 이삼걸 제2차관 주재로 국방부 등 관계부처가 참석한 대책회를 가졌으나, ‘정부 차원에서 재조사하기는 어렵다’는 쪽으로 결론을 낸 것으로 보인다. 박동훈 행안부 지방행정국장은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이 산하에 있어 행안부에 이 사건이 배당되기는 했지만, 조사권한이 없어 민원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이렇게 나오자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는 민관합동 조사를 정부에 다시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자체 진상규명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대책위는 현재 암살의혹규명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홈페이지( www.who-how.or.kr )에서도 접수를 받고 있다.

 

지난 24일 박근혜 후보는 기자회견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가진 분들을 만나고 더 이상 상처로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다르다. 새누리당은 장준하 선생 의문사 관련 재조사에도 말로는 ‘하겠다’면서도 행동을 보여야 할 때는 ‘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나온다.


새누리당, 말로는 ‘재조사’ 막상 닥치면 ‘필요 없다’

 

지난달 26일 박근혜 캠프는 ‘과거사 문제 실천의지’를 보이겠다며 “전태일 기념관 건립과 고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대한 재조사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피해자 및 유족들에 대한 진정성을 담은 다양한 방안이 추진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바 있다.

 

▼9월 26일(박근혜 기자회견 3일 후)

하지만 새누리당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실천의지’를 천명한 이틀 뒤(28일) 장 선생 의문사 문제를 국감에서 다루자는 민주당의 요구를 거절했다. 장 선성의 아들 장호권씨와 2003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고상만 전 조사관,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씨를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국감의 취지가 왜곡된다’며 반대한 것이다. 국회 행안위 새누리당 간사인 고희선 의원의 말이다. “국정감사 기간에 행정자치부 등 살펴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아 바쁘다.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관련한 증인을 채택할 가능성은 없다”

▼9월 28일(박근혜 기자회견 5일 후)

박근혜 후보는 장 선생 의문사에 대해 “이미 조사가 끝난 일”이라고 일축한다. 이에 대해 2003년 이 사건을 조사했던 고상만씨는 “박근혜 후보가 ‘진상규명 불능’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설명하는 것”이라며 “장준하 선생 존안자료 중 국가정보원과 기무사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단 한 장의 문서도 협조 받지 못해, 추가 조사 가능성을 열어둘 목적으로 ‘규명 불능’ 판단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과 기무사, 결정적 증거 가지고 있나?

 

 

 

장 선생이 암살당했다는 정황과 흔적은 부지기수다. 단지 타살로 확정지을 수 있는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고 있을 뿐이다. 고 전 조사관의 주장대로 결정적인 증거는 국가정보원과 기무사 등이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장 선생이 변을 당하기 직전과 직후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 기무사의 전신인 보안사령부의 움직임을 어땠을까? 박정희 정권의 개입과 조종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사건 전후해 특별한 움직임이 감지돼야 한다.

 

중앙정보부가 장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한 때는 1973년 장 선생이 유신헌법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한 시점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 유신 반대 운동이었던 ‘100만인 서명운동’은 박 정권을 크게 긴장시켰다. 긴급조치 1호는 장 선생을 감옥에 가두기 위해 나온 것이다. 1974년 4월 장 선생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다.

 


'유신철폐 100만 서명운동’에 긴장했던 박정희

 

 

 

협심증과 간경화 등 지병 악화로 10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 정권에 대한 미국정부의 압력도 작용했다. 출소 후 입원을 하며 잠시 휴식을 취한 장 선생은 1975년 봄부터 김대중, 함석헌, 홍남순 선생 등과 접촉하며 박정희가 그토록 싫어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다시 준비한다.

이러자 중정은 장 선생을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1975년 3월 31일자 장 선생 감시 보고서에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에 ‘공작 필요시 보고 후 조치’라고 적혀 있었다고 전했다. ‘공작’이라? 무슨 의미일까? 아무튼 의미심장한 단어임에 분명하다.

 

장 선생 ‘암살 프로젝트’로 의심되는 ‘위해분자 관찰보고서’의 장 선생 관련 부분은 1975년 4월부터 장 선생 사망 다음 날인 8월 18일까지 3급 비밀로 분류됐다가 해지됐다. 보고서 작성 담당자는 장 선생 사망 후 일주일간 휴가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30분 단위로 감시, “공작 필요...” 암살 프로젝트?

 

 

 

수상한 점은 또 있다. 중정요원이 장 선생을 감시해 30분 단위로 상부에 보고를 했다는 사실을 의문사진상규명위가 밝혀낸 바 있다. 그렇게 감시에 철저했던 중정요원이 장 선생 사망 당일 약사봉 등산과 관련된 보고는 하지 않았다. 왜 일까?

 

당시 중정은 거짓말을 했다. 장 선생 댁에 전화로 사망소식을 알린 사람이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씨라는 중정의 주장은 거짓이었다. 당사자 김씨는 극구 부인하며 중정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약사봉 인근에는 마을에 전화기는 한 대뿐이었다. 이장 집에 있던 행정전화가 유일했다. 이장은 “그날 누구에게도 전화기를 빌려 준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장 선생도 ‘변고’를 예감했던 것 같다. 사망 며칠 전 신변정리를 했다. ‘아들 장호권씨는 장 선생이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며 “특별한 방법으로 박정희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거사’ 준비하던 장 선생, 거사 3일전 주검으로

 

거사라는 게 ‘100만 서명운동’인지 또 다른 무엇이 계획돼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장 선생이 박 정권에 타격을 줘 ‘독재의 광란’을 약화시키거나 멈추게 하고자 뭔가를 계획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8월 20일이 ‘거사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사를 앞두고 장 선생은 소중하게 보관해 오던 중경임시정부의 태극기를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하고, 백범 선생과 부모의 묘소를 참배했다. 부인과는 천주교식 혼례를 치렀다.

 

당시 중정부장은 신직수였다. 군 법무관 출신이었지만 5.16쿠데타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고문을 거쳐 검찰총장을 지냈다. 검사 출신이 아닌데도 8년이나 검찰 총수에 앉을 만큼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웠다. 유신헌법 제정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다. 박정희가 직접 유신 헌법의 골격을 구상했고, 법무부장관 신직수와 당시 법무부 법제과장이었던 김기춘(전 한나라당 의원)이 실무를 맡았다.

바쁘고 수상하게 돌아간 ‘박정희의 청와대’

 

장 선생 사망 이튿날(8.18) 청와대도 바쁘게 돌아갔다. 박정희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진종채 당시 보안사령관을 청와대 서재로 불러 50분 정도 독대를 한다. 그 다음날(8.19) 움직임이 더 수상하다. 사체 수습과 사건 조사 등을 담당할 법무부장관과 언론의 개입과 통제를 조정할 문공부장관이 청와대를 찾아 서재에서 박정희를 만났다.

 

 

대통령이 주재한 대책회의도 두 차례나 열렸다. 안건이 무엇인지, 참석자가 누군지 전혀 알려진 게 없는 대책회의다. 1차 대책회의는 8월 19일 오후에 열렸고, 2차 회의는 이틀 후인 8월 21에 열렸다.

 

8월 21일 오후에는 대책회 직후 신직수 중앙정보부장과 보안사령부를 관장하는 국방부장관(당시 서종철)의 보고를 받았다. 무슨 보고를 받은 걸까? 그때 청와대 밖에서는 장 선생 장례식이 막 끝나려는 참이었다.

<당시 청와대 의전일지>

보안사, 중정, 법무, 문공 부르고 대책회의 두 차례

 

8월 21일 아침 발인예배를 마친 장 선생의 영구가 참석자들의 오열과 함께 명동성당에 도착했다. 태극기가 덮혀 있었다. 장 선생이 이화여대에 기증했던 바로 그 태극기였다. 영구차는 국회의사당을 거쳐 장 선생이 옥살이 했던 서대문 형무소에 잠시 머물렀다가 파주군 광탄면 묘소로 향했다.

<장준하 선생 장례식>

 

21일 오후 분주하게 돌아갔던 ‘박정희의 청와대’는 장 선생의 장례식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장례식이 어땠으며, 참석자가 누구였고,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또 이후에 야권과 민심의 동요가 있을 것인지 등에 대해 보고를 받지 않았을까?

 


조사권 부여된 재조사기구 설채해야

 

진실이 규명돼야 한다. 그래서 아직도 장 선생을 꽁꽁 묶고 있는 유신독재의 잔혹하고 어두운 거둬내야 한다. 야당이 나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 국정원과 기무사를 조사할 수 있도록 직권조사권이 부여된 재조사기구 설치가 필수적이다. 전문가를 통해 선생의 유골을 재검하는 일도 필요하다.

 

장준하 선생 추모비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오호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평화,

통일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이 맨 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뿌리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리라.

 

 

오주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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