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대한민국 사법부의 '부끄러운 판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유서대필' 낙인, 대법원 언제까지 외면할건가

대한민국 사법부의 '부끄러운 판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12.09.24 20:54l최종 업데이트 12.09.24 20:54l
고상만(rights11)

 

 

1991년 5월 8일이었다. 당시 나는 대용감방에 수감 중이었다. 학내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던 그해 3월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이다. 그런데 구속영장이 발부된 첫날, 감방에 입감되는 과정에서 나는 3명의 교도관으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했다. 이유도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상태에서 그야말로 마구잡이 폭행에 속절없이 당했다. 차후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지역 최초의 공안사건 구속자인 나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미리 계획한 폭행이었다고 한다.

여하간 그렇게 시작된 수감 생활 중 뜻하지 않은 병을 얻었다. 심하게 구타를 당하는 과정에서 얻은 병인지, 아니면 온기 하나 없는 감방에서 생긴 병인지 알 수 없으나 심한 허리 통증으로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결국 외부 진료를 해달라고 요구했고 그렇게 해서 정형외과 병원에 외부 치료를 받으러 간 날이 5월 8일, 어버이 날이었던 것이다.

약 1시간여에 걸친 진료를 마치고 약을 받기 위해 병원 로비에 나왔을 때였다. 텔레비전에서 정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시력이 좋지 않은 나는 화면이 안 보여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뉴스를 귀로 듣던 중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에는 안경 렌즈가 유리로 되어 있어 이것으로 자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교정당국이 안경을 수거해 갔기 때문이었다. 그때 귀로 들려온 뉴스였다. 서강대 옥상에서 아침 일찍 또 한 명이 분신 자결을 했다는 것이다.

들려온 이름 석자. '김기설'이었다.

김기설에 대한 설명
ⓒ 김은숙

관련사진보기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내가 김기설을 만난 때는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3일 전인 1991년 3월 23일이었다. 1990년 3월 우리 대학의 학생회장이었던 김용갑의 의문사가 있었고, 이 의문사를 규명해 달라며 1년 후인 1991년 3월 정연석이 분신 자살을 기도했다. 나는 정연석의 피맺힌 절규가 허망하게 묻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학내 점거 농성에 돌입했다.

그때 농성장에 지지 격려차 대여섯 명의 손님이 늦은 밤에 찾아왔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띤 사람이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한 젊은 남자였다. 그는 강원도 원주의 전교조 지부 창립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을 내려왔다가 우리의 사정을 듣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해서 얼결에 내려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말 고마웠다. 너무 큰 일이 벌어져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 찾아와 손을 내밀어준 그에게 나는 깊은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그간의 과정을 듣고난 일행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약 30분 정도 지나서였다. 당일 오전 가두시위 도중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겠다며 경찰서로 가겠는 것이었다. 그때 서울에서 내려온 그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자료를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명함을 주겠다며 주머니를 뒤졌으나 남아 있는 명함이 없자 그는 다른 사람에게 받은 명함의 뒷면에 볼펜으로 자신의 직위와 이름, 그리고 연락처를 써 줬다.

'전국 민족민주 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

그런데 방송에서 그 김기설이 분신 자결을 했다는 것이다. 순간 귀를 의심하며 내가 만난 그 김기설이 맞는지 정서적인 혼란감을 느낄 때 방송에서 화면 가득 분신한 사람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텔레비전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봤다. 김기설이 맞았다. 마음속으로 '털썩'하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몰려왔다.

1991년 4월 29일 명지대 1학년 강경대가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노태우 살인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학생과 노동자의 잇따른 분신 자결이 이어졌다. 전남대생 박승희, 경원대 천세용, 안동대생 김영균 등 학생들의 분신으로 노태우 군사정권의 앞날은 예측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그러던 5월 8일 새벽 6시경, 또 다시 서강대 옥상에서 김기설이 분신한 것이다. 4번째 분신 희생자였다.

감옥으로 돌아온 나는 김기설에 대한 미안함으로, 그리고 그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일주일간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강경대를 타살한 노태우 군사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1인 단식 농성이었다.

분신 자살 특공대를 '만들어 낸' 노태우 정권

지난 1991년 5월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김씨와 강기훈씨의 필적. 가운데 붉은 테두리 안이 고 김기설씨 글씨이고 위쪽이 강기훈씨 필적.
ⓒ 조선일보 PDF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묘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김기설의 분신 자결 후 공안당국으로부터 "잇따른 분신 사건에 배후가 존재한다"는 말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박홍 서강대 총장 의 밑도 끝도 없는 "죽음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말이 있은 후 이른바 '분신 배후설'은 진짜인것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운동권 내부에서 제비뽑기로 분신 순서를 정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도 진짜처럼 돌았다. 감방에 있던 재소자들 역시 나에게 진짜냐며 은밀히 물어올 지경이었다.

처음엔 이러다 말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매일 매일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더니 이번에는 김기설이 분신하는데 이 유서를 대신 써준 사람이 있어 검찰이 수사 중이라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이른바 '유서대필 사건'이 정식으로 세상에 고개를 내민 것이다.

유서대필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사건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당시 검찰은 이 사건 범인이 누구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유서를 대필해줬다는 천하의 파렴치범이 운동권에 있다는 것만 입증하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전민련 동료인 임아무개를 상대로 조작하려다 너무 무리하자 그 다음에 대상으로 삼은 이는 김아무개였다. 그러다가 검찰이 최종적으로 대상으로 삼은 이가 바로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이었다. 그렇게 조작된 사건이기에 재야에서는 이 무리한 검찰의 조작이 끝까지 갈까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편,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시기 유서 대필 조작 기도는 또 하나가 있었다. 1991년 5월 10일 전남대에서 분신 자결한 노동자 윤용하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였다. 당시 공안당국은 초등학교만 졸업한 노동자 출신의 윤용하가 노태우 정권의 유서 대필조작 음모를 비난하는 유서를 쓰고 분신 자결하자 그의 형에게 접근했다.

이어 경찰은 윤용하의 형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노동자 출신인 동생이 뭘 알고 분신했겠냐"며 "우리 말대로 하면 잘해 주겠다. 대학생들이 당신 동생에게 술을 많이 먹여 만취하게 한 후 기름을 부어 죽이고 그 유서도 학생들이 대신 써준 것이라고 형이 기자회견을 하자"며 회유, 협박했다는 것이다. 이후 윤용하의 형은 이들의 눈을 따 돌리고 도망쳐 강경대 범대위를 찾아와 이를 폭로했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날까'라는 속담이 있다. 여전히 일부에서는 김기설의 분신 과정에서 강기훈이 뭔가 역할을 했으니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겠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윤용하 사건에서 보듯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필요한 사건을 조작해서라도 만들어낸 것이다. 완성된 사건이 바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이었다.

사건 발생 21년, 사법부의 부도덕은 계속된다

그 후 감옥에서 석방된 나는 '유서대필조작 강기훈 무죄석방 공동대책위원회'를 찾아갔다. 당시 전민련 인권위원장이었던 서준식 선생이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곳에서 나는 간사로서 첫 인권 운동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는 이 사건에 대해 더 많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김기설이 죽기 전 사람들과 마지막에 나눴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다시 한번 그의 죽음에 고개를 떨구었다.

김기설이 분신 자결하던 날 새벽 1시경, 김기설이 써 둔 유서를 우연히 발견한 동료들이 김기설에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적극 설득하면서 스스로 유서를 찢어버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기설은 자신이 관여했던 두 가지 사건을 언급하며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나는 작업 과정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산업 재해'로 죽어가고 있는데 이들에게 힘이 돼주지 못한다는 미안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속초 동우대학 사태 당시 어린 학생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는 무력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기설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생명을 던져 이 부조리한 세상에 '큰 고함'을 남기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김기설에게 "살아서 싸워야지 왜 죽냐"며 야단도 치고 화도 내며 거듭 거듭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기설은 자신이 쓴 유서를 스스로 찢으며 마음을 바꿨다면서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이내 같이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러던 김기설이 갑자기 "잠깐만 전화 한 통 하고 오겠다"며 대학로의 포장마차를 나갔는데 그렇게 나간 김기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불길한 마음에 일행들은 정신없이 김기설의 행방을 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찾던 김기설의 행방을 알게된 것은 그로부터 약 3시간 후인 새벽 6시,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자결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런 김기설의 분신 항거에 대해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은 윤용하의 그것처럼 터무니없는 조작을 했다.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은 대한민국 법정에서 유죄가 되었다. 진실을 밝혀줘야 할 법원마저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이같은 법원 판결에 의해 끝내 강기훈은 동료에게 잘 죽으라고 유서를 대신 써 준 '세계 최고의 파렴치범'이 되었고, 반면 김기설은 유서 하나 제 손으로 쓰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세계 최고의 바보'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 거지같은 판결 앞에서 강기훈이 받은 마음의 상처는, 그래서 길이와 깊이로는 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고 분하며 억울한 '인격 사형'이었다.

드러난 진실, '유서는 김기설의 필체 맞다'

지난 2007년 11월 14일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공동대표 함세웅)는 서울 중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시 사건 조작에 가담한 관계자들의 사과를 촉구하는 한편 사법부에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안윤학

관련사진보기


한편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1975년 인혁당 사형 판결과 더불어 우리나라 사법부의 '부끄러운 판결' 중 하나로 늘 언급되어 왔다. 다행히 지난 2007년 1월 23일 인혁당 사건은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유서대필 사건 역시 마찬가지로 진실을 바로잡기 위한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2006년 12월 16일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 위원회'를 시작으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역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조사했고, 2007년 11월 그 결과를 발표했다. 결론은 단순했다. '문제의 유서는 김기설이 쓴 것이 맞다'였다. 무려 16년의 세월이 걸린 끝에 찾은 것이 너무나 상식적인 결론이었다.

필적으로 시작한 사건이니 필적 감정으로 진실이 밝혀졌다. 진화위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및 7개 사설 감정기관에 의뢰한 당시 유서와 새로 입수한 김기설의 필적 등을 감정 의뢰한 결과 이들 기관 모두에서 '유서의 필적은 김기설 본인의 것'이라는 결과가 통보된 것이다. 16년 전 그때도 사실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인 김기설의 유서 필적을 노태우 군사정권이 조작했다는 진실이 '깔끔하게'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두 달 후인 2008년 1월, 강기훈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다시 1년 8개월이 지난 2009년 9월. 서울고법 형사 10부는 마침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한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대한민국 검찰은 비열했다. 진실을 인정할 용기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고등법원의 반대에도 이 사건 재심 개시 결정에 불복하는 항고장을 대법원에 냈다. 검찰이 입만 열면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강기훈과 드레퓌스 사건의 '같은 점'과 '다른 점'

검찰의 항고 후 다시 만 3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재심 결정을 위한 대법원 재판은 열리지 않고 있다. 조속한 재판을 요청하는 각계에 호소와 항의에도 대법원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러는 사이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 피해자 강기훈이 말기 간암을 앓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된 것이다. 그의 병세가 너무나 짙어 차마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무색한 지경에 이르러 지인들의 가슴을 애타게 하고 있는 상태이다.

흔히 많은 이들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유사하다고 말한다. 1894년 10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시작된 이 사건 역시 육군 기밀을 담고 있는 명세서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일치한다는 것이 단서였다.

그러면서 반유태계 신문이 유태인 출신인 드레퓌스가 매국 행위를 했다며 그를 단죄할 것을 군부에 요구했고 이 신문의 공격에 당황한 당시 프랑스 군부는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 판결을 내렸다. 그 후 드레퓌스는 남미의 '악마의 섬'으로 유폐됐다.

그러나 2년 뒤인 1896년, 드레퓌스의 군대 동료 중 한 명이 '명세서 필적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에스테라지 소령'임을 밝히고 나섰으나 프랑스 군 수뇌부는 끝까지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오심을 내린 사실이 드러나 군부의 권위가 실추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에 드레퓌스의 가족들은 1897년 11월,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을 정식으로 고발했으나 군부는 형식적인 재판 끝에 진범인 그를 무죄 석방했다.

그렇게 에스테라지 소령이 무죄로 석방되고 이틀이 지난 1898년 1월 13일. 당시 프랑스의 최고 소설가였던 에밀 졸라의 글이 한 잡지에 발표된다. 당시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작성된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대통령 각하,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로 시작되는 이 글 '나는 고발한다'에서 에밀 졸라는 프랑스 군부의 부도덕성을 가차없이 질타하면서 동시에 '프랑스의 양심'을 향해 드레퓌스의 무죄를 호소했다.

그 후 12년. 마침내 드레퓌스는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예전의 직장으로 돌아가 진급도 하고 훈장도 받았다. 하지만 강기훈은 지금 어떤가. 필적을 이유로 억울한 누명을 쓴 것만 같을 뿐 강기훈은 지금 생활고로 인해 항암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 드레퓌스의 12년이 아니라 21년이 지나는 지금까지도 강기훈의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에밀 졸라'의 그 심정으로, '대한민국의 양심'을 향해 고발한다.

"대법원장님. 저는 지금부터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강기훈은 무죄입니다. 강기훈은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한 적이 없으며 그의 자살을 방조한 사실 역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기훈을 유서 대필범으로 여전히 묶어두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던져 사회적 약자들에게 눈물을 보인 김기설의 명예를 한없이 더럽히는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 죄도 없는 강기훈에게 인격적 학살 행위를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당신들만 이 사건의 진실을 외면하는 것인가요. 누구나 다 아는 이 사건의 진실에 대해, 이미 다 드러난 진실에 대해 왜 3년째 대법원 창고에 처 박아두고 꺼내지 않는 것인가요. 대법원 판사들이 모두 치매에 걸려 판단 능력을 상실한 것인가요. 아니면 당신들이 한번 내린 판결을 뒤집는 것이 두려워 문제의 강기훈이 그냥 죽어 버릴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로 작정을 한 것인가요.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줘야 당신들의 비열함에 스스로 만족하겠다는 것인가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잠시 대법원 선고를 유보해 달라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사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잡은 대법원이 왜 강기훈 재심 개시 재판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인가요. 이것이 대한민국의 양심인가요.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정의란 말입니까."

21년 전, 이미 한 번 진실을 짓밟은 대법원이 또 다시 진실을 외면하지 않기를 마지막으로 촉구한다. 지금 강기훈은 죽어가고 있다. 이 병상의 강기훈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희망의 약'은 오직 하나다. 조작된 그의 진실을 밝혀주는 것 말고 더 좋은 약이 어디있겠는가. 대법원의 획기적인 각성과 반성을 기도하는 나의 마음이 부질없는 결과로 남지 않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유서 대필 조작사건' 누명을 쓴 강기훈씨를 후원하는 콘서트 안내문
ⓒ 강기훈지킴이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유서 대필 조작사건' 누명을 쓴 강기훈씨를 후원하는 콘서트가 개최됩니다. '강기훈의 쾌유와 재심 개시 촉구를 위한 모임'(강기훈지킴이)이 주최하는 이 콘서트는 오는 10월 9일 오후 7시 30분에 시작하며 가수 이은미·조관우·안치환·평화의 나무 합창단 등이 공연합니다. 장소는 서울시립대학교 대강당입니다.

또한 박원순 서울시장, 문성근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등도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강기훈씨는 영상 편지 형식으로 참석할 예정입니다. 콘서트 후원금은 3만원이며 수익금 전액은 강씨의 치료비에 쓰일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을 당부드립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