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강기훈 "나는 무죄다"

1991년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강기훈 "나는 무죄다"
(블로그'사람과세상사이' / 오즈르디 / 2012-10-21)

 

“참모본부 전체가 기소되지 않은 한 드레퓌스 혐의는 물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국방부를 고발합니다. 여론을 오도하고 죄악을 은폐할 목적에서 <에코 드 파리>와 <레 끌레르>를 위시한 언론들이 저열한 정치선전을 주도했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군사법정을 고발합니다. 피고인에게 증거를 비밀로 하고 유죄 판결을 내려 인권을 침해했음을 고발합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이 외침으로 인해 내가 법정으로 끌려간다 해도 나는 그것을 감수하겠습니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L'Aurore> 1898.1.13)

드레퓌스 사건 뒤집은 한 편의 글

1894년 프랑스 군부가 유대 인이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에게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한다. 그로부터 2년 뒤 프랑스군 정보국 피카르 중령이 다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레퓌스가 범인이 아니라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파카르는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드레퓌스가 무죄로 밝혀지는 것을 꺼려한 군 고위층은 에스테라지를 무죄로 방면하는 대신, 피카르를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한다. 일부 언론이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증거를 보도하자 프랑스는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요구 여론과 반대여론이 충돌하며 격량에 휩싸인다.

<드레퓌스와 에밀 졸라>

에스테라지가 무죄 석방된 이틀 뒤인 1898년 1월 13일 언론사상 기념비적 양심선언인 에밀 졸라의 ‘J'accuse...! Lettre au President de la Republique(나는 고발한다-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이 <L'Aurore(여명)>지 1면에 게재된다. 애당초 에밀 졸라는 이 서한을 <르 피가로>에 발표하려 했지만, 드레퓌스 재심 반대를 외치는 보수세력의 압력에 밀려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드레퓌스 사건을 은폐하려 했던 군 수뇌부는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해 반유대 정서를 촉발시켰다. 보수 언론들은 이 작업을 충실하게 거들며 여론을 호도해 갔다. 에밀 졸라는 군법정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영국으로 망명했고, 보수언론들은 드레퓌스 사건 재심요구를 “군부와 프랑스를 전복시키려는 유대인 국제조직의 음모”라고 떠들어댔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반유대주의 촉발시켜 진실 은폐하려 했던 프랑스 군부

진보 지식인들의 끈질긴 투쟁과 영국 등 유럽 주변국의 비난 고조로 마침내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이 이뤄진다. 하지만 군사법원은 자신의 체면과 군 수뇌부의 입장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종신형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됐을 뿐 유죄판결을 뒤집지 않았다. 1904년에야 제대로 된 재심이 이뤄져 드레퓌스에게 무죄가 선고(1904년)된다. 그 사이 에밀 졸라는 난로 가스 중독으로 사망한다. 당시 누군가 굴뚝을 막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드레퓌스에게 무죄가 선고됐지만 프랑스 군부와 정부의 공식사과는 사건 발생 100년이 지난 뒤에야 이뤄진다. 1995년 무뤼 장군은 드레퓌스 사건이 ‘반유대주의 정서에 편승해 무고한 군인을 간첩으로 몰아세운 군사적 음모’라는 점을 인정했다. 1998년 1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발표 100주년을 맞아 드레퓌스와 졸라 가족에게 공식 사과 서한을 전달했다.

100년 전 포르 대통령 당시 군부의 잘못을 정부를 대신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사과한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

 

드레퓌스 사건과 흡사한 일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이른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씨가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는 전국적인 시위가 격렬해지며 5월 8일에는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이 서강대에서 분신 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위는 불에 기름 붓듯 더욱 격렬해졌다.

분신자살 조장 배후설로 위기 모면하려 했던 노태우정권

다급해진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운동에 타격을 줘 시위의 명분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드레퓌스 사건을 유대주의와 연결지었던 프랑스 군부처럼, 노 정권은 분신자살을 ‘배후설’과 연결지었다. 보수언론이 노 정권을 거들었다. “순번을 정해 놓고 분신을 시도한다” “시위대를 조종하는 세력에 자살특공대가 있다” “죽음마저 혁명 도구로 사용한다”등의 선동적인 기사가 쏟아졌다.

이때 눈부신 활약을 했던 인물이 있다. 바로 서강대 총장이었던 박홍이다. 분신자살이 북한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며 “죽음의 배후에 죽음을 선동하는 검은 세력이 있고, 주사파 배후에 김정일이 있다”고 주장했고 ’‘조선일보’는 그를 ‘용기 있는 지식인’으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당시 시위의 심각성을 보도한 동아일보/1991.5.19>

검찰도 나섰다. 분신자살을 조장하는 배후가 있다는 ‘증거’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검찰은 분신자살을 한 김기설씨의 유서가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누군가 대신 써준 것이라며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던 강기훈씨를 지목한다. 공안정국의 폭압에 의해 동료의 죽음을 사주한 범인이 돼 3년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분신자살 사주 세력 있다 ‘증거’ 필요했던 검찰

2005년 경찰청 과거사위원회가 1991년 당시 국과수의 필적감정 결과에 의혹을 제기했지만 검찰은 유서의 원본 필정감정을 허용하지 않았다. 2007년 11월 진실화해위가 필적감정을 통해 “유서 작성자는 김기설씨”라고 밝히면서 강기훈씨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처를 하라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의 권고에 따라 강기훈씨는 2008년 1월 서울중앙지검에 재심을 청구했고, 2009년 9월 15일 서울고법은 재심 개시를 결정한다. 하지만 검찰이 이에 반발해 그해 9월 21일 대법원해 항고를 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대법원은 3년 동안 결정을 미뤄왔다.

어제(19일)서야 재심을 개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이중적이었다. 당시 유죄인정의 근거였던 국과수의 필적감정이 허위였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서 작성자가 강기훈씨가 아닌 고 김기설씨라는 진실화해위의 판단에 대해서는 예단이 개입됐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심 결정 됐지만 내용은 드레퓌스 1차 재심과 흡사

사건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다. 대법원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 강기훈씨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재판을 다시 하자는 것”이라며 “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더라도 검찰이 상고하면 또 대법원에 가야한다...이제 본안을 다루는 것이니까 부지하세월이고, 10년도 걸릴 수 있다."

최근 간암 수술을 받은 강씨는 “(암 투병으로) 시간이 별로 없으니 재심 진행을 서둘러줬으면 좋겠다”며“내가 바라는 것은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의 진솔한 사과”라고 밝혔다. 당시 강씨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 중 한 사람이 박근혜 후보 캠프의 클린정치위원장을 맡고 있는 남기춘 변호사다.

재심 결정까지 결린 시간은 모두 4년 9개월. 서울고법 결정까지 1년 8개월 걸렸고, 대법원의 결정 지연으로 또 3년 1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을 질질 끌다가 내린 결정이란 게 진실화해위의 무죄 취지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건을 원점으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암과 싸우며 속히 진실이 규명돼 억울한 누명을 벗기 원하는 강기훈씨>

“진실은 전진하고 있다”

드레퓌스 사건이 반유대주의 정서를 촉발시켜 진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했던 것이라면, 강씨 사건은 민주화운동을 용공세력의 난동으로 왜곡시기 위해 사건 자체를 날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차 재심에서 드레퓌스를 여전히 범인으로 봤던 프랑스 군부처럼, 우리 사법부도 재심결정을 하면서 진실화해위를 판단과는 달리 유죄 취지의 입장을 보였다. 드레퓌스 사건과 참 유사하다. 에밀 졸라의 말이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 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오주르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