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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5.18 전두환 신군부는 왜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을 죽였나

[5.18 또 다른 역사 ①] 전남경찰청 TF, 故 이준규 서장 징계·형벌 검토 보고서 작성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19-05-12 17:48:11
수정 2019-05-12 17:4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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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이 현직에 있었을 때 자료사진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이 현직에 있었을 때 자료사진ⓒ유족 제공

5.18 민주화운동 39주년입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밝혀져야 할 진실이 많습니다. 5.18 당시 전남경찰에 대한 진상도 그중 하나입니다. “지난 과오를 반복할 순 없다”며 신군부의 강제진압 명령을 거부했다가, 쫓겨나고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경찰관들이 이제껏 경찰 역사에서 가장 부끄러운 존재로 치부됐습니다. 故 안병하 전남도경국장과 故 이준규 목포경찰서장이 대표적입니다. 이들의 사연은 2017년 이후에서야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면서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 최근 보훈처는 안 국장의 순직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가장 강도 높은 징계와 고문을 당한 이준규 서장의 명예회복은 더디기만 합니다. 알려진 내용도 별로 없거니와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핵심 관계자들도 이미 고인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지난해 일부 경찰관들의 노력으로 이준규 서장에 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2019년 1월, 관련 보고서가 작성됐습니다. 이 보고서는 현재 이 서장에 대한 특별재심 근거자료로 제출됐지만, 외부엔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민감한 진술 등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죠.

‘숨겨진 의인’에 관한 진실은 알려져야 합니다. 그게 ‘바람직한 경찰 정신 찾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에, 지난해부터 5.18 전남경찰에 대한 취재를 해 오던 <민중의소리>는 이준규 서장 진상조사에 참여했던 경찰관을 직접 만났습니다. 또 당시 전후 상황을 구체적으로 그리기 위해 전문가와 인터뷰를 하고, 목포민중항쟁의 중심지를 찾아 자료를 모았습니다. 유족과 만나 39년간 반복되어온 아픔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번 5.18 특별기획은 이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보고서에 대한 최초 보도이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 시작합니다.

1) 신군부는 왜 이준규 서장을 죽였나

“절대 시민을 향한 발포를 금지한다.”

1980년 5월 21일 수요일, 목포경찰서 내부 방송시설에서 흘러나온 구내방송이다. 이준규(당시 53세) 목포경찰서장의 명령이었다. 39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다행히 그때의 구내방송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다.

전남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전남경찰 역할 진실규명 TF’(이하, TF팀)는 지난해 3월경부터 8월까지 ‘전두환 신군부가 이준규 서장에게 가한 형벌과 징계가 합당했는지’에 대해 자체 진상조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청 TF는 당시 근무했던 경찰관들로부터 이 같은 진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사를 담당했던 전영득 영암경찰서 수사과장은 “방송과 관련한 여러 사람의 진술이 있었다. 방송은 분명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그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 서장으로선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그런데 기록을 보면, 이 서장은 이날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경찰서 내 모든 총기를 116전경대로 옮겼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100명이 넘는 시민군이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과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목포로 진입한 상태였다. 또 목포역엔 분노한 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언제 총기로 무장한 시위대가 경찰서에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준규 서장의 선택은 ‘경찰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었다. 투항의 의미가 아닌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 당시 군부를 장악하고 정권을 넘보던 전두환은 그해 5월 30일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직무유기 경찰관 보고’라는 문건에 직접 사인했다. 이준규 서장의 직위는 그날 곧바로 해제됐다. “강제진압 하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이 서장은 6월 23일 파면됐으며, 6월경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3개월 동안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5년을 채 못 버티고 숨졌다.

고문 당시 면회 갔던 동료 경찰관의 진술에 의하면 “얼굴이 퉁퉁 부어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일어서질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또 유족에 따르면, 생전에 그는 병상에서도 “상을 받아도 모자란 일인데…”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단다. 그리고 고문 뒤 항상 “속이 거북하다”는 말을 많이 했고, 결국 위암으로 숨을 거뒀다.

이준규 서장의 명령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시민들을 살린 행위였다. 신군부는 그런 이 서장에게 직무유기 혐의를 씌워, 목포를 강제진압하지 않은 책임을 물었고, 사실상 그를 죽였다.

전두환 씨가 올해 3월 11일 광주지법에서 열릴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연희동 자택을 나서고 있는 모습.
전두환 씨가 올해 3월 11일 광주지법에서 열릴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연희동 자택을 나서고 있는 모습.ⓒ민중의소리

“강제진압 하라”는 신군부의 명령
전남청 지휘부 “과오 반복할 수 없다” 거부
유독 이준규 서장에게 가혹했던 신군부

현재의 전남경찰청이 39년 전 전남경찰에 대해 조사를 한 계기는 2017년 4월 발행된 ‘전두환 회고록’에 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광주사태 초기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계엄군이 시위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라며 경찰책임론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5.18 당시 경찰 활동에 대한 진상조사는 물론, 자료와 기록을 정리해 놓지 않았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전남경찰 총수였던 강성복 전남경찰청장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5.18에 대한 경찰의 주체적 보고서 한 권은 남겨야 한다”며 TF팀을 꾸리고, 진상조사를 추진했다. 그 결과, TF팀은 2017년 10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지난해 국가기록원에도 등재된 이 보고서에는, 1980년 5월 광주 상황과 故 안병하 국장(지금의 전남경찰청장)을 비롯한 전남경찰 지휘부가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상세히 담겼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직무대리였던 정 모 씨는 안병하 국장에 대해 “4.19 때 김주열의 시체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이 생생하고,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으며, 경찰이 피해를 보더라도 민중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보고서 표지 사진
보고서 표지 사진ⓒ민중의소리

‘지난 과오를 되풀이할 수 없다’는 것은 당시 전남청 지휘부의 뜻이었다. 안병하 국장은 이런 전남청 지휘부의 뜻을 모아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인권에 유의한 집회 시위 관리’를 강조했다고 한다. 이런 조치는 상부에서 내려온 “강경하게 대응하라”는 지시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안 국장은 “경찰과 시민이 정면충돌해서 경찰의 희생이 발생하면, 계엄군에 강력진압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며 상부지시를 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안 국장은 참모들과 협의 끝에 ‘경찰은 무장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안 국장은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된 이후 사태가 점차 심각해지자, “경찰무기를 소산(疏散)하라”고 수차례 지시를 내렸다. 이런 지시에 따라, 상당수의 경찰무기는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이동이 어려운 총기는 경찰이 미리 노리쇠와 공이 등을 분리시켜, 시민군이 이를 탈취해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1980년 5월 21일 이준규 서장 또한 이런 지휘부의 뜻에 따라, 시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총기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이준규 서장은 당시 전남청 지휘부 중 가장 강도 높은 징계인 ‘파면’을 당했다. 당시 전남청을 비롯해 전남지역 경찰서장 24명 중 유일하게 당한 파면이었다. 지시를 내린 안병하 국장도 직위해제를 당한 뒤 사직을 종용 당했지만, 파면을 당한 건 아니었다. 또 이준규 서장은 안병하 국장보다도 더 오랫동안, 더욱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신군부는 왜 그토록 이준규 서장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했던 것일까?

의문을 풀기 위해 TF팀의 조사활동은 이듬해인 2018년에도 계속됐다. 이어진 조사는 1980년 5월 목포민중항쟁을 강제진압 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파면’을 당한 이준규 서장에 관한 조사였다.

이렇게 조사된 내용은 올해 1월에 보고서로 작성됐지만, 전남청은 조사에 참여한 진술자에게 가해질 수 있는 피해 등을 고려해 현재까지 외부엔 공개하지 않고 있다.

기자는 올해 초 故 안병하 국장의 아들 안호재 씨와 故 이준규 서장의 사위 윤성식 씨 등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올해에도 보고서가 작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에 이달 7일 전남 영암에서 조사를 담당했던 전영득 영암경찰서 수사과장을 만났다. 보고서를 작성한 TF 관계자와도 수차례 통화를 통해 관련 내용을 확인했다.

또 이준규 서장이 처했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목포민중항쟁을 연구한 곽재구 목포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과 인터뷰를 했고, 목포시에서 발행한 목포시사(木浦市史:목포시가 발행한 목포를 소개하는 5권의 책)와 관련 연구 자료들을 참고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신군부에서의 이준규 서장에 대한 징계는 매우 부당한 조치였다.

지난해 5월 17일 금남로에서 열린 제38주년 5·18민중항쟁 전야제. 민주평화대행진단이 1980년 5.18 당시 학살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5월 17일 금남로에서 열린 제38주년 5·18민중항쟁 전야제. 민주평화대행진단이 1980년 5.18 당시 학살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김주형 기자

금남로에 울려 퍼진 애국가
전남 전역으로 뻗어나간 민중
유혈사태 막기 위한 이준규의 선택

1980년 5월 광주에선 계엄군이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학생·시민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21일 광주 금남로에 쏟아져 나왔다. 18일 1천명에 그쳤던 시위는 이날 20만 명까지 확대됐다.

금남로에 세워진 시계탑 시침이 오후 1시를 가리키자, 광주 금남로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애국가는 시민을 향해 총을 발사하란 명령이었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많은 광주시민이 쓰러졌다. 친구, 연인, 가족, 이웃이 계엄군이 쏜 총에 목이 꺾여 쓰러지는 등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날 이 시각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50여명. 총상자만 해도 500명이 넘었다. 학살이었다. 계엄군이 시민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었다. 하지만 당시 국내 어느 언론도 이 참상을 보도하지 않았다. 침묵했다. 모든 통신 시설도 차단된 상태로, 광주는 고립무원이었다.

이를 알리려면 광주시민들이 직접 외부로 나가야만 했다.

계엄군의 총격 이후, 일부 광주시민들은 시외 무기고로 향했다. 이들은 무기를 확보해 시민군을 편성했다. 이 중에는 “자기 형의 원수를 갚겠다”는 어린아이도 있었다. 이렇게 편성된 시민군은 참상을 알리기 위해 전남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목포도 그중 하나였다. 경찰기록에 따르면, 광주 시민군이 목포에 도착한 시각은 2시 15분. 일부 무장한 120명가량의 광주 시민들이 고속버스 4대와 승용차 1대를 타고 목포로 진입했다.

광주 시민들이 진입하는 도로는 93연대 계엄군이 지키고 있었다. 시민군이 목포로 진입한다면, 광주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목포에서도 커다란 항쟁이 일어날 것임은 충분히 예상되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계엄군은 이들의 진입을 막지 않았다. 이준규 서장의 요청이 있었는데도, 계엄군은 이 서장의 요청을 듣지 않은 것으로 TF팀 조사에서 확인됐다.

전영득 수사과장은 “그때 도로가 지금과 같지 않았다”며 “군부대 앞에 도로만 막아버리면 목포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대로라면 그 길밖에 없었다. 그런데 군부대는 길목을 튼다”고 설명했다.

목포 시내로 들어온 광주 시민군은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전하며, 목포 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내 목포역 광장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강제진압 하라”는 신군부의 명령이 하달된 상황에서, 이준규 서장이 선택한 길은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만약 이 상황에서 신군부의 명령대로 경찰을 무장시키고 목포로 진입하는 시민군 또는 목포역에 운집한 시민들과 대치했다면, 어땠을까?

이에 대해 곽재구 이사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공권력이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했다면, 목포도 광주처럼 됐을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나가면 죽거나 다칠 수 있는 상황에서 수만 명이 역 광장에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권력이 물리력을 가한다고 목포시민들이 집으로 갔겠나?”

만약 이준규 서장이 신군부의 바람대로 강력대응 했다면, 유혈사태는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 계엄군 투입에 대한 가장 강력한 명분을 만들어주는 꼴이 되지 않았을까?

광주참상을 전해 듣고 목포역 광장에 모여든 목포시민들 자료사진
광주참상을 전해 듣고 목포역 광장에 모여든 목포시민들 자료사진ⓒ목포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관계자 제공

“군중을 자극하지 않고 무기회수”
이준규 서장의 끊임없는 노력

목포시의 기록(목포시사)을 보면, 21일 오후 5시쯤 분노한 목포시민들이 광주의 실상을 보도하지 않은 MBC를 파손한다. 오후 8시 이후엔 법원 검찰지청, 시청, 파출소, 세무서 등이 파손된다. 오후 10시엔 무안·함평 지역에서 자체 봉기한 시위대가 목포 시위대와 합세해 더욱 규모가 커진다.

TF팀 관계자에 따르면, 시위대와 차마 싸울 수 없었던 목포경찰은 시내 곳곳에 정보경찰을 심어 놓고 21일 오후 늦게 경찰서에서 철수한다.

경찰이 철수한다고 하더라도, 경찰서 내에는 사용할 수 있는 총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준규 서장의 지시에 따라, 이미 총기에서 공이를 분리해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리된 공이는 목포 인근 섬인 안좌도와 고하도 등지로 이동시킨 것으로 조사됐다. 전영득 수사과장은 인터뷰에서 ‘목포에서 탈취한 무기 중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는 당시 시민사회 핵심 관계자의 진술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후에도 이준규 서장은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재야인사들과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했다.

전영득 수사과장은 “다음날인 22일 8시 무렵, 당시 재야지도자 격인 안철 씨 집에 이준규 서장이 나타난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계엄군 표현대로라면, 경찰서를 버리고 도망간 이준규 서장이 폭도 우두머리의 집에 나타난 것이다. 이 자리엔 이준규 서장 외에도, 목포시장과 목포대학장 등이 참석해 ‘수습 대책 회의’가 열렸다.

목포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동아약국 자료사진.
목포 민주화 운동의 성지인 동아약국 자료사진.ⓒ목포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관계자 제공

■ 목포민중항쟁의 중심 동아약국:당시 안철 씨는 목포 해안로237번길 24번지에 동아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목포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안철 씨의 집도 약국 앞에 위치해 있었으며, 당시 목포경찰서(1983년에 헐림)도 이곳에서 약 5분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소통을 통해 무기 회수도 빠르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영득 수사과장은 “거짓말처럼 22일 자정까지 대다수의 무기가 회수된다”며 “목포대학장의 협력으로 시위대에 들어간 대학생들이 무기를 회수해 왔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항쟁을 수습하려 했던 재야인사들과 관공서 대표자들의 대책회의는 오래가지 못했다. 학생들이 반발했기 때문이다. 군부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항쟁을 수습하려고 해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당시 재야인사인 안철 씨가 경찰인 이준규 서장을 만나 대화를 하는 것에 대해 학생들의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대책기구는 ‘수습’에 대해 논의하는 기구가 아닌 ‘투쟁’을 조직하는 기구로 변모한다. 그 이름도 ‘목포 시민민주투쟁위원회’(이하 시민투쟁위)로 변경됐다. 대책회의 성격이 변모하면서 자연스럽게 회의에서 빠지게 됐지만, 이후에도 이준규 서장은 안철 씨를 만난 것으로 파악된다. 24일에도 안철 씨는 이 서장을 만나 “경찰은 시내에 나오지 말 것” 등을 요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관련해서 곽재구 이사장은 “안철 선생님 생전에 이준규 서장이 상당히 협조적이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 탓일까, 목포항쟁은 광주와 비교해 큰 인명피해 없이 진행됐다.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인근 섬 등으로 이동시켰던 경찰력도 23일 복귀했다.

목포항 부근에서 바라본 고하도
목포항 부근에서 바라본 고하도ⓒ민중의소리

신군부는 왜 그에게 그토록 가혹했나

10만 명까지 운집 인원이 불어났던 목포항쟁은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군을 완전히 진압된 이후에도 하루가량 더 지속됐다. 그럼에도 목포관내사태보고에 기록된 목포항쟁 인명피해는 사망 1명, 부상자 11명에 그쳤다. 계엄군의 강제진압으로 사망자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된 광주의 상황과 크게 비교된다.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이준규 서장의 각종 조치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까마득하다.

그럼에도, 전두환 신군부는 그를 직무유기 혐의로 파면시키고 3개월에 걸쳐 고문한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이라는 이유로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은 이준규 서장. 그는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신군부에 의해서도 죽임을 당했다. 왜 그의 인생은 이토록 가혹했어야만 했을까.

곽재구 이사장도 왜 신군부가 유독 이 서장을 강하게 처벌하려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당시 광주 이외에 유일하게 전시민이 나서서 체계적으로 시위를 한 곳은 목포뿐이다. 또 목포에서의 시위는 광주 진압 이후에도 하루가량 더 진행됐다. 그런데 왜 계엄군이 광주는 강제진압하면서 목포엔 들어오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그 과정에서 이준규 서장이 어떤 역할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남아있는 기록이 너무 없다. 이 서장이 그렇게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았다. 계엄군 측에서 봤을 땐, (시민 편을 든 것 같으니) 괘씸하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준규 서장이 그렇게 당해야만 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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