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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여성 공산주의자 김알렉산드라를 따라 걷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1. 하바롭스크 : 아무르강변부터 중앙묘지까지
2019.05.19 19:26:01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이 항일 독립 운동의 발자취를 좇아 러시아에 다녀왔습니다. 소비자 조합원 20분이 이 뜻깊은 여정에 함께했습니다. 조합원들과 해외 기행에 나선 적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이번 여정에서 우리가 다녀온 도시는 하바롭스크와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100년 전 어느 날 어느 독립 투사가 되어 들리지 않는 총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선연한 핏자국을 보았습니다. 고국을 그리워하며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기도 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인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탔습니다.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끝없이 이어지는 자작나무 숲, 황량한 대지 위에 빛나는 태양과 해가 진 뒤 떠오른 수많은 별들을 보았습니다. 

 

러시아에서 보고 듣고 느낀 많은 것들을 여러분께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매주 주말 1회씩 총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따라오다 보면 여러분도 어느새 러시아에 와있을지 모릅니다. 자, 그럼 가슴 뜨거웠던 4박 5일간의 여행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 바라본 바깥 풍경. ⓒ프레시안(서어리)

 

 

하바롭스크 : 잊힌 한인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였던 이들을 따라

 

 

 
'여기가 국제 공항이 맞나?' 
 
마치 어느 시골의 고속버스터미널 같았다. 자그마한 하바롭스크 국제공항에 막 도착한 우리 일행은 마땅히 앉을 의자가 없어 출입문 근처에 옹기종기 서 있었다. 큰 창문도 없어 밖의 풍경도 잘 보이지 않았다. "밖에 날씨는 어떤가요?" 한 조합원이 물었다. 러시아에 오기 전 가장 고민했던 것이었다. 한국에는 이미 봄이 만연해있는데, 러시아라니 왠지 추울 것 같고. "바람막이라도 걸치세요", "생각보다 덜 추울거에요" 우리끼리 소박한 걱정을 나누고 있을 때 호텔로 가기위한 택시가 도착했다. 러시아의 날씨가 어떨지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출입문을 나섰다. 
 
웬 걸, 비가 섞인 우박이 내렸다. 노을이 지는 구름 사이로 얼음 알갱이들이 투둑투둑 떨어졌다. 비와 우박을 맞으며 택시에 짐을 실었다. 을씨년스럽다고 생각할 때쯤 누군가가 "날씨도 참 '러시아스러워'요. 너무 러시아다"라고 말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러시아스러운 날씨'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옷깃을 여미며 조합원들과 짝을 맞춰 택시를 탔다.
 
계획된 아파트 단지처럼 일정한 모양의 주택들, 전기선으로 동력을 공급받는 트롤리버스, 사람 머리에 닿을 듯 뒤엉켜 내려온 트롤리버스의 전선, 레닌 동상이 세워진 광장, 키릴문자가 가득한 표지판. 하바롭스크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순식간에 지나쳐갔다. 택시 안의 한국인들은 키릴문자가 적힌 표지판을 읽어보려 골몰했다. 키릴문자는 알파벳과 모양이 비슷했지만 영 읽히지 않았다. 그런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택시 운전사였던 요한은 몇몇 표지판을 읽어주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우린 알아듣지 못했다.) 택시 운전사 요한과 러시아어, 한국어, 영어 그 어디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소련 공산주의' 느낌이 물씬 나는 건축물 앞에 당도했다. 
 
 

▲하바롭스크 숙소였던 인투어리스트 호텔. ⓒ프레시안(서어리)

 
우리가 묵을 인투어리스트 호텔이었다. 간판 이외의 장식은 찾아볼 수 없는 정직한 사각형의 회색 시멘트 건물, 일정한 창문 크기, 같은 간격으로 설치된 환풍기. '소련 공산주의식' 건축물의 딱 떨어지는 깔끔함이 느껴졌다. 실제로 볼셰비키 고위 간부들이 묵었던 공간이기도 했단다. 비로소 러시아에 도착한 것 같았다. 
 
짐을 풀고 호텔 뒤편의 아무르 강변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그곳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알지 못했다. 박흥수 철도기관사이자 시간여행자(그는 그의 저서 <시베리아 시간여행>(후마니타스 펴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1918년 9월 김알렉산드라와 조우한 장면을 기록했다)는 한반도에서는 해방과 분단이,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격변의 순간의 시베리아로 우리를 데려갔다. 
 
조선인 혁명가 김알렉산드라의 열세 걸음 
 
은은한 안개가 낀 아무르 강 건너로는 광활한 중국의 대지가 펼쳐져있다. 아무르 강의 또다른 이름은 헤이룽강(흑룡강). 러시아 극동의 관문이자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특성 때문에 항일 독립 운동가를 비롯한 한인들은 자연스럽게 하바롭스크에 둥지를 틀게 된다. 이렇게 모인 한인들 중 일부는 제국주의 타파와 무산계급 해방을 내세운 러시아 사회주의와 자연스럽게 결합하기도 했다.  
 
아무르 강을 따라가면 보이는 높은 절벽 우쵸스엔 아무르 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박흥수 기관사는 1918년 9월 이 자리에서 김알렉산드라가 반혁명군(멘셰비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뒤 아무르 강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조합원들이 하나둘 전망대에 오르자 아무르 강에 서글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김알렉산드라. 원래 이름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 한국인 최초의 볼셰비키 당원이자,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책임자이자,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인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을 창당한 멤버이자, 페미니스트였던 여성 혁명가다.
 

▲ KBS '역사저널 그날' 갈무리.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 2세였던 김알렉산드라. 그의 아버지였던 김표트르(김두서)는 함경도 경원에서 일찍이 러시아로 건너가 북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철도 건설 현장에서 통역을 했다. 현장 노동자로 고용된 조선인, 중국인들의 불합리함을 대변해 노동자들의 존경을 받았고 아버지 김두서는 "네가 커서 일을 하게 될 때 나처럼 항상 노동자 편에 서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에서 공부한 김알렉산드라는 자연스레 볼셰비키 사상을 접하게 된다. 1914년 전쟁에 가담한 제정 러시아는 조선인과 중국인 등을 징집했다. 이 과정에서 김병학이라는 청부업자가 등장한다. 김병학은 선금으로 1만 루블을 받고 조선인 1000여 명을 우랄스크 지역의 나제즈진 벌목장에 팔아넘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드라는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그는 스물 여섯살 때에 우랄스크 지역으로 가 한국인 노동자들의 통역관이 된다. 러시아 관리를 상대로 임금 체불 소송을 진행해 승소했으며 한국 및 중국 노동자들과 함께 우랄스크 노동자 동맹을 결성해 이들을 해방시킨다. 이 과정에서 그는 볼셰비키와 관계를 맺고 당원이 되고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는 러시아 혁명에 가담하게 된다. 그는 제국주의가 타도되면 일본의 제국주의도 타도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1918년 러시아 연해주는 일본군과 러시아 반혁명군에 의해 함락된다.  
 

▲ 아무르 강가와 우쵸스 전망대. ⓒ프레시안(서어리)

 
마지막까지 연해주에 남아 투쟁하던 김알렉산드라는 러시아 반혁명군에 의해 체포당했다. 주민들이 모인 아무르 강의 높은 언덕, 총살을 앞둔 그는 흰 천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자 그 천을 벗겨내고 열 세 걸음을 걸었다.  
 
"조선의 후손들이여! 지금 나의 걸음이 바로 조선의 열 세개의 도다. 각각의 도에 공산주의의 씨앗을 뿌리고,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유와 독립의 꽃을 피워라. 우리의 후예들이 조선을 해방시키고 사회주의를 어떻게 건설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조선독립 만세! 소비에트 만세! 볼셰비키당 만세!" 
 
이후 총성이 울렸고, 김알렉산드라의 시신은 아무르 강에 잠겼다.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잘못 새겨진 이름 
 
'탕'. 아득한 총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일행은 저만치 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동양인 여성이 우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일행을 놓칠까 걸음을 재촉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다시 그 동양인 여성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그가 김알렉산드라였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르 강변을 따라 걸었지만 우초스 절벽 어디에도 김알렉산드라를 설명하는 안내판 하나 없었다. 말없이 아무르 강을 바라보던 이정희 조합원은 "어떻게 김알렉산드라에 대한 표식이 이곳에 하나도 없을 수 있냐"며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름다운 아무르 강의 풍경을 바라보며 탄성을 외치던 조합원들이 입을 꾹 다문채 발걸음을 옮겼다.
 
혁명 전사 동상과 정교회 성당이 함께 놓여있는 어색한(?) 사회주의 혁명 광장을 지나 시내 쪽으로 난 횡단보도를 건너 도착한 무라비예프 아무르스카야 22번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에서 김알렉산드라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의 외무책임자였던 그의 집무실이었던 곳.  
 

▲ 김 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이었던 건물. ⓒ프레시안(서어리)

 
건물 입구 오른쪽 벽에는 번지수를 나타내는 숫자 22가 쓰인 하얀 명판이 붙어있다. 박흥수 기관사에 따르면 이 명판 바로 아래에 '김알렉산드라가 집무했던 건물'이라는 명판과 함께 그의 얼굴 부조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얼굴 부조는 떼어진 듯했다. 당시 명판에는 "김 스탄케비츠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가 1917~1918년 이 건물에서 사업했다. 볼셰비키 공산시위원회 정치부 위원, 하바롭스크시 소비에트 외부인민위원부 전권이었던 여사는 1918년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쳤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 명판이 사라진 채 엉뚱한 이름이 적힌 동판이 김알렉산드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의 명판에는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스탄케비치А.П.КИМ-СТАНКЕВИЧ'라고 이름이 올바르게 표기되었으나 새 판에는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쿰 스만케비치А.П.КЦМ-СмаНкеВцч'라고 잘못 박혀 있었다. 
 

▲ 김 알렉산드라의 이름이 잘못 새겨진 동판. ⓒ연합뉴스

 
다행히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은 러시아 당국이 보호건물로 지정한 상태였다. 조합원들은 입을 모아 "얼굴 부조상을 찾아 다시 붙이고 이런 독립 운동가이자 혁명가가 있었다는 한글 표기도 같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을 몇 차례 방문했던 박흥수 기관사도 "이곳에 저 잘못 표기된 명판마저 없어진다면 여기가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이었는지 누가 기억할 수 있을까. 한국 정부도 북한 정부도 이 곳을 기념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옷가게의 흔적이 남아있는 채로 지금은 텅 비워진 김알렉산드라의 집무실을 바라보며 김알렉산드라가 반혁명군에 체포됐을 때 동지들에게 말한 대목이 생각났다. 
 
"직접 조선의 혁명을 보고 싶다. 괜찮지 않은가. 우리의 사업은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선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이룰 수 없다면 우리의 아들딸들이 이룰 것이며, 그들이 못해낸다면 손자 손녀들이 해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후손들의 힘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우리는 커다란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1918년 김알렉산드라는 총살당하기 직전, 두렵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미래의 후손들을 생각하며 희망을 가졌다. 결국 그의 바람처럼 조선의 독립은 도래했지만, 친일청산이 실패하고 독재정권이 집권한 남한에서도, 김일성 1인 수령 체제를 구축한 북한에서도 조명받지 못한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렇게 잊혀 가고 있었다. 혁명가이면서 일본의 총칼과 맞서 싸운 김알렉산드라. 그의 이름이 제대로 새겨진 한글 동판 하나 걸릴 수 없는 것이었을까.
 
이름 찾기 대작전 
 
둘째 날. 러시아 혁명과 떼 놓을 수 없는 레닌 광장에 갔다. 칼 마르크스 거리의 레닌 광장은 하바롭스크의 중심지로 버스와 트램 노선이 꼭 거쳐 가는 지점이다. 레닌 동상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모자를 쓴 채로 한 쪽 손으로 마이를 잡고 있는 레닌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그의 포즈를 따라 사진을 찍기도 했고, 근처의 작은 매점에서 핫초코를 사 먹기도 했다. 레닌 동상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고, 동상이 있는 턱에 걸터앉아 쉬는 사람도 있었다. 한때는 혁명의 기운이 가득했을 공간이, 혁명이 사라진 시대에 일상적인 공원이 되어있었다. 
 

▲ 레닌 광장에서 본 레닌 동상. ⓒ프레시안(서어리)

 
레닌 광장에서 칼 마르크스 거리를 따라 걷다 보면, 한국 사람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나온다. '김유천 거리'다. 김유천은 독립운동가 김유경의 잘못된 표기로 알려져있다. 1900년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고려인 2세 김유경은 스물한 살에 혁명군에 가담해 76연대에서 소대급 지휘관을 맡게된다. 1929년 10월 반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그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듬해 하바롭스크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이 거리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 하바롭스크의 김유천 거리. ⓒ프레시안(서어리)

 
거리에 붙은 표지판에는 'Ким Ю Чена'이라는 키릴문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우리 일행은 키릴문자를 독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 러시아어가 한국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는 이 길을 따라 곧게 자라있었고, 거리는 생각보다 길었다. 문득 이 거리를 지나가는 러시아 사람들이 이 거리의 이름을 자주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레닌 광장에서 김유천 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하바롭스크 중앙 시장이 나온다. 그곳에서 1번 트롤리버스를 타고 공항 쪽으로 가다 보면, 하바롭스크 중앙묘지에 도착한다. 묘지 안의 작은 정교회 사원에는 스탈린 대숙청 시기에 반혁명을 이유로 학살된 수많은 이름들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이름 찾기 대작전'을 펼쳤다. 
 

▲ 하바롭스크 공동묘지에서 이름을 찾고 있는 조합원들. ⓒ프레시안(서어리)

비석에서는 한인들의 이름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찾고자 했던 이름은 '조명희'였다. 이주한 한인 2세들에게 모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항일운동과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한 조명희. 연해주 한인 문학의 뿌리로 불리는 조명희 선생의 추모비가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하바롭스크에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대신 이 비석에서 그의 이름 석 자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우리 일행은 비석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리현숙ЛИ ХЕН СУК, 리호산ЛИ ХО САН, 리산ЛИ САН, 양철운ЯН ЧЕР УН, 박선한ПЯК СЕН ХВАН, 류한민ЛЮ ХАН МИН, 김도윤КИМ ДО УН, 김은순КИМ ЕН СУН, 김은춘КИМ ЕН ЧН, 김찬석КИМ ЧАН СЕКИ, 김찬윤КИМ ЧАН ЮН 
 
박흥수 기관사는 한인들의 이름 몇몇을 읽어주었고, 우리도 비슷한 문자의 이름들을 발굴해냈다. 하지만 조명희라는 이름을 발견하기는 묘연해 보였다. 비석에 적힌 이름들은 한인을 제외하고도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그때, 한 조합원이 "어? 이거 조명희 같은데요?"라고 외쳤고, 우리 모두 그곳에 우르르 모였다. 유일하게 키릴문자를 발음할 수 있었던 박흥수 기관사가 와서 "오! 이름을 찾았네요"라고 판독을 완료하며 우리의 이름 찾기 대작전은 성공으로 끝났다.  
 

▲ 조명희 선생의 이름이 적힌 묘비. 위에서 세 번째에 조명희 선생의 이름이 키릴문자로 적혀 있다. ⓒ프레시안(서어리)

 
그 비석에 적힌 한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그들이 살아냈던 삶을 상상해봤다. 연해주로 살기위해 도망친 자의 자식이었거나, 독립운동가였거나, 혁명가였거나. 우리는 이 곳에서 돌아가신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 김유경, 조명희를 비롯한 수많은 이름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이름들은 자신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그들을 추모해주길 기다렸으리라. 먼 이국땅 하바롭스크에서 눈을 감았을, 그들의 역사를 생각하며 잠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다음 편에 계속) 
 

▲ 하바롭스크 공동묘지에서 묵념하는 조합원들. ⓒ프레시안(서어리)

 
 
박정연 기자 daramj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서어리 기자 naeor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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