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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가던 중 김정은이 눈 앞에!

[시베리아 시간여행] 2. 블라디보스토크上 : 개척리부터 독수리전망대까지
2019.05.25 11:41:29
 

 

 

 

두근두근,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다

익숙해질 만하면 떠난다. 여행자라면 그 아쉬움을 모를 리 없다. 하바롭스크에서 꼭 그랬다. 떠날 때가 다 되어서야 하바롭스크 길이 익었다. 대장 박흥수 철도기관사의 안내 없이도 어느새 좌회전, 우회전이 자연스러워졌다. 걷고, 걷고 또 걸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바롭스크 역으로 가는 길이 못내 아쉬웠다. 쉼 없는 도보 행진에 피곤에 절었는데도 시선은 차창 밖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인투어리스트 호텔에서 15분가량 택시를 타고 달려 역에 도착했다. 초록 지붕과 넓은 광장이 먼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기차에 오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저녁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역 근처 마트에 가 보이는 대로 집어 들고는 다시 역으로 뛰어갔다. 

 

 

▲하바롭스크역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프레시안(서어리)

▲횡단열차 티켓. ⓒ프레시안(서어리)

▲열차 탑승에 앞서 표 검사를 받는 모습. ⓒ프레시안(서어리)


드디어 이번 여행의 대망의 일정,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이 눈앞에 다가왔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 문을 여니 우리가 하룻밤 묵을(?) 열차가 1번 플랫폼에 서 있었다. 키릴 문자의 홍수 속에서 '1'이라는 낯익은 숫자를 보니 반가울 지경이었다.  

표 검사를 마치고 열차 위에 올랐다. 벌써 열차는 덜컹거리고 있었지만 통로가 워낙 비좁아 넘어지진 않았다. 통로를 조금 걷다 보니 왼편에 방이 연달아 있었다. 침대 4개가 1, 2층으로 나뉜 4인실이었다. 바깥에서 보기엔 굉장히 좁아 보이지만 막상 들어와 보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침대 아래 수납공간에 짐을 넣고는 박 기관사의 지휘하에 각자 침대보를 씌웠다. 

 

 

 

▲열차 바깥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프레시안 조합원들. ⓒ프레시안(서어리)

 

 

▲횡단열차에서 먹는 저녁식사. ⓒ프레시안(서어리)

 

 

짐 정리를 마치고 나니 그제야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심은 이미 멀어져 나무 숲이 스쳐지나갔다. 어느덧 해도 뉘엿뉘엿 지려하고 있었다. 호숫가를 지날 때면 해가 물 위에 길게 늘어져 반짝반짝 빛났다. 

 

몸도 마음도 편하니 이번엔 시장기가 돌았다. 마트에서 사온 빵, 한국에서 공수해온 컵라면 등을 꺼냈다. 가장 맛있는 라면은 산 위, 비행기 안에서 먹는 라면이란 말이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 바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먹는 라면'이다. 뜨끈한 국물에 종일 덜덜 떨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횡단열차 2등칸 4인실 실내. ⓒ프레시안(서어리)

열차 안은 의외로 안락했다. 넷이서 오순도순 대화하기 딱 좋았다. 가끔 다른 방 조합원들이 난입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자리를 내줄 정도로 작은 공간에 모두들 적응해갔다. 꽤 고된 일정을 소화하느라 서로 알아갈 시간이 부족했던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각자의 생업, 프레시안 조합원이 된 계기, 최근 사회 이슈에 대한 생각을 늘어놓느라 얼마나 밤이 깊었는지도 몰랐다.

"우악!" 별안간 옆방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의아해하던 찰나, 우리 방에 불이 탁 꺼졌다. "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때 깨달았다. 옆방에서 흘러나온 괴성(?)의 정체를.

루지노 역에서의 깜짝 공연

은하수였다. 새까만 밤하늘에 하얗고 반짝이는 별들이 무수히도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감탄사를 내뱉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차 덜컹거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차창에 액자처럼 걸린 밤하늘을 넋 놓고 바라봤다.  

"이 광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저 별들을 본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다한 것 같아요."

불을 켜고 확인한 조합원들의 상태는 '황홀경'에 가까웠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새벽 1시가 조금 넘어 루지노 역에서 열차가 섰다. 여기선 차량 점검을 위해 40분 간 정차한다고 했다. 기차 내부 공기가 워낙 후끈했던 터라 시원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다른 방에 있던 조합원들과 만나 별 풍경을 본 소감을 나누던 사이,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한국 사람들?" 

키 큰 러시아 여성 예닐곱 명 말을 걸었다. 무리 가운데 한 명이 유창한 한국말로 예전에 한국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며,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이 부르는 '아리랑'을 듣게 될 줄이야! 놀랍고도 기쁜 마음에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반응이 좋았던 덕분인지 이번엔 나머지 일행도 다함께 노래를 불렀다.

"Ой! ты песня песенка девичья(오! 노래야 처녀의 노래야) / Ты лети за ясным солнцем вслед(날아라 밝게 빛나는 태양을 따라 날아라) / И бойцу на дальнем пограничье(그리고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 От Катюши передай привет(까츄샤로부터의 사랑을 전해다오) / И бойцу на дальнем пограничье(그리고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 От Катюши передай привет(까츄샤로부터의 사랑을 전해다오)" 

'카츄사'라는 러시아 전통 민요였다. 전쟁터에 나간 사랑하는 이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내용의 가사로, '러시아답다'는 느낌이 드는 멜로디의 곡이었다. 러시아 여성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신나게 이 노래를 불렀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멜로디에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박 기관사는 여러 번 불러본 듯 정확하게 가사에 맞춰 불렀다. 

'깜짝 공연'을 선사해준 러시아 여성들에게 '쓰바시바(Спасибо ;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우리는,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열차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 : 한인 디아스포라의 빼앗긴 땅 '개척리'

커튼 없이 무방비하게 아침 볕을 받아 저절로 눈이 떠졌다. 해가 아주 쨍쨍하진 않았다. 오히려 차창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마땅히 씻을 데도 없던 터라, '쿨하게' 씻는 것을 포기하고 비를 맞기로 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내린 곳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9288킬로미터의 여정이 끝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역이었다.

역 출구와 이어진 다리에서 플랫폼을 내려다보던 박 기관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래 플랫폼에 횡단열차 종점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는데 그 인근을 다 막아 놨네요. 제가 블라디보스토크역에 숱하게 와봤지만, 폐쇄된 모습을 본 건 처음입니다"라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방러 일정으로 인해 횡단열차 종점 표지석 부근이 폐쇄된 블라디보스토크역 플랫폼. ⓒ프레시안(박정연)


그렇다.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에 앞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고, 더욱이 열차를 타고 왔던 터라 선로 일부가 통제된 것으로 보였다. 답사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일단 걱정은 뒤로 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이틀 밤을 보낼 숙소로 향했다. 이번엔 '소련'이 아닌 첨단의 러시아가 느껴지는 4성급 신식 호텔이었다. 체크인 시간 전이라 카운터에 짐을 맡긴 뒤 로비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만 마치고 본격적인 블라디보스토크 탐방에 나섰다.

첫 답사지는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개척리'였다. 일제 강점 시기 개척리는 미국으로 따지자면 로스앤젤레스(LA) 같은 곳이었다. 굳이 러시아어를 안 써도 살 수 있는, 그만큼 많은 한인들이 많은 동네였다. 대부분 질등일꾼같은 하층민이었다. 한 끼 챙기기도 버거운 이들이지만,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해선 밥값도 마다치 않았다. 가난하디 가난한 동네에서 모금을 할 때마다 엄청난 액수가 모였다. 그만큼 조국 독립에 대한 이들의 열망은 컸다.

박 기관사가 개척리 터 어드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길가에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이었다. 그는 이번엔 여행 전 배포한 안내서에 있는 사진을 짚었다.

 

 

 

▲개척리 일대 전경. ⓒ프레시안(박정연)

▲100여 년 전의 개척리 모습.


"사진에서, 큰 건물 뒤에 있는 건물 보이나요? 지붕 모양이 독특한데, 저기 보이는 저 건물이에요. 어때요, 지금과 똑같죠?" 

조합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을 바쁘게 움직이며 사진 속 건물과 눈 앞의 건물을 비교해봤다. 100년 전 사진 속 건물이 바로 눈앞에 있는 건물이라니, 괜시리 반가웠다. 

척박했던 이 개척리 일대는 100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아르바트'라는 이름을 가진 이 동네는 한국의 '홍대입구'와 같은 젊은이들의 성지다. 어둑해질 즈음이면 버스킹 하는 이들이 속속 모여들고, 레스토랑, 펍이 불빛을 반짝이며 손님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과연 100년 전 개척리에 살던 한인들은 지금도 이곳에 그대로 살고 있을까? 정답은 '아니다'. 한인들은 척박했던 땅을 갈고 닦아 어렵사리 삶의 터전으로 일궈낸 이곳을 1911년 러시아 당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장티푸스가 퍼지는 것을 막는다는 게 명분이었다. 그러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러일전쟁 발발 이후 바다를 낀 블라디보스토크는 전략적 요충지로 급부상했다. 개척리 일대는 해안가와 가까웠다. 일본과 전쟁에서 한 차례 쓴맛을 본 러시아로선 해전에 대비해 해안지대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날, 러시아 기마병들이 개척리를 덮쳤고, 한인들은 다시 디아스포라가 되어 새 터전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몰려난 한인들의 발길이 닿은 곳은 우리가 마지막 날 가게 될 신한촌이었다. 

하얼빈서 술 마시고 평양서 냉면으로 해장하는 상상을 하다

다음 목적지는 해양공원에 자리한 요새박물관이었다. 언덕 위에 방벽이 길게 둘러져있었다. 계단을 올라 박물관 입구에 이르니 '요새'라는 이름답게 사방이 탁 트여 주변 지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깥에는 곳곳에 거대한 대포들이 포진해있었고, 실내에는 총칼 등 무기들이 진열돼있었다. 이 가운데에는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사용한 무기도 있었다.

 

 

 

▲요새박물관. ⓒ프레시안(박정연)

▲블라디보스토크 초기 이주 한인들의 모습. ⓒ프레시안(박정연)


험악한 구시대의 유물들 사이로, 사진 한 장이 벽에 걸려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초기 정착한 한인 이주민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다들 꼬질꼬질한 차림새지만 얼굴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얼기설기 만들어놓은 집 뒤로는 황량한 터가 보였다. 이 척박한 땅을 일구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빤히 그려졌다. 간신히 살만한 땅으로 만들어 놓았을 땐 다시 쫓겨난 신세가 되었으니, 디아스포라의 삶이란 얼마나 애처로운가. 안타까운 마음에 속이 쓰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한인들은 개척리를 일궜고 신한촌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쫓겨났다. 이 비극을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오늘 우리가 타고 온 시베리아 횡단열차였다. 횡단열차 낭만 이면에는 이러한 비극이 숨어있었다. 

박 기관사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러시아 철도공사 직원이 총 몇 명일까요? 참고로 한국철도공사 직원 수는 2만 7000명 정도 입니다." 

가늠이 안 되어 서로 눈치만 봤다. "10만 명?", "30만 명?" 여기저기서 대답이 나올 때마다 박 기관사는 "땡"을 외쳤다. 

"정답은 95만 명입니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박 기관사가 한 마디 덧붙이자 우리는 입이 더 쩍 벌어졌다.

"구조조정 안 했으면 108만에서 110만 명 왔다 갔다 할 겁니다."

역시 드넓은 땅덩이를 가진, 그리고 단일 노선 최장 길이의 철로를 보유한 나라답게 철도 인력 규모도 대단했다. 

"한국 철도에서 제일 긴 노선이 경부선인데 441킬로미터예요. 그리고 전체 선로를 다 합치면 4000킬로미터 조금 넘어요. 그런데 러시아는 단일노선만 해도 9288킬로미터니까 대단하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남북 철도가 연결되어서 단절 구간이 사라지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동유럽까지 다 합쳐서 28만킬로미터가 돼요. 지금은 남북철도가 단절된 상황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이게 연결되면 엄청나게 재밌는 일들이 생길 거예요.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는 거죠. '나 어제 하얼빈에서 네가 알려준 맛집 가서 연태 고량주에 하얼빈 맥주 섞어 마셨더니 머리가 아팠는데, 겨우 단둥에서 압록강 건너면서 술 깨고 평양에서 냉면 먹으면서 해장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꿈이야, 생시야? 김정은이 눈 앞에 

"엇! 김정은 이따가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환송식 한대요. 기사 떴어요!"

박물관 문을 나서자마자, 정경아 협동조합팀장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조합원들이 "김정은 보러 가자"며 방방 뛰었다. 예정된 일정 대신 역 근처에서 밥을 간단하게 먹고 다 같이 '김정은 직관'을 하기로 했다. 

역 바로 맞은 편에 자리한 식당 '리퍼블릭(Republic)'과 레닌동상 주변에는 이미 취재진들로 붐볐다. 우리도 질세라 급하게 자리를 잡았다. 조악하지만 A4 용지에 'PRESSIAN'라고 휘갈겨 쓴 다음 바닥에 놓고 돌멩이를 올려뒀다.  

헛수고였다. 밥을 먹고 나오니, 러시아 경찰들이 뒤로 이동하라며 내쫓고 있었다. "우리는 기자"라고 항변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틀 전 미리 당국에 사전 취재를 신청한 매체 외에는 근접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환송식을 취재하기 위해 대기 중인 외신 기자들. ⓒ프레시안(박정연)


아쉬운 마음을 안고 김 위원장 환송 행사장과 200미터쯤 떨어진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이 거리라면 진정한 의미의 '직관'은 무리였다. 바늘구멍만큼도 안 보일 터였다. 경찰 측 통제로 본의 아니게 식당에 발이 묶인 조합원들에게 긴급히 'SOS'를 청했다. 혹시 창문을 통해 김 위원장이 보이거든 영상을 찍어달라 부탁했다. '바깥팀'은 함께 쫓겨난(?) 한국 매체 ENG 영상 기자들, 카메라 기자들, 그리고 관광객과 뒤섞여 김 위원장을 기다렸다.

대기 시간이 30분을 넘어서며 슬슬 다리가 저리기 시작한 3시 13분께, 김 위원장을 태운 것으로 추정되는 검은색 세단이 행사장 앞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군악대 연주가 시작되며 환송 행사가 거행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역 일대에 아리랑 반주가 흐르고, 이제는 더욱 친숙해진 '카츄샤'도 흘렀다. 그렇게 식이 끝나갈 때까지도 김 위원장의 실루엣을 끝내 볼 수 없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환송식. ⓒ프레시안(박정연)


행사가 끝나자 비로소 경비 상태가 해제됐다. 그렇게나 기다렸는데, 허무했다. 아쉬운 마음에 행사장 바로 앞에서 취재를 마친 미국 NBC 방송국 소속 기자들을 붙잡고 김 위원장의 반응이 어땠는지 등을 물었다. 사실 별것 없는 취재였다. 

정작 '땡' 잡은 것은 식당에서 편안히 쉬고 있던 조합원들이었다. 식당 한 면이 통창이어서 행사 장면을 생생하게 다 볼 수 있었던 것.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으로 영상을 '득템'한 김태승, 김화수 조합원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직접 찍은 영상을 자랑했다. 나머지 조합원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다소 허무하긴 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김 위원장과의 조우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금각만 대교를 바라보며 키릴 문자를 생각하다 

오늘의 마지막 도착지인 독수리 전망대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하바롭스크 버스와 달리 안내 방송이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이쪽이 더 새 버스에 가까웠다. 버스를 타고 둘러보는 블라디보스토크는 하바롭스크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바롭스크가 구소련을 연상하게 하는 시크(chic)한 느낌이 강했다면, 블라디보스토크는 좀 더 세련되고 밝은 느낌이었다. 어떤 도시가 더 좋은지 조합원들과 나름 진지한 고민을 나누던 차에 박 기관사의 "내립시다" 하는 소리에 따라 내렸다. 

아기자기 예쁜 대학 건물이 늘어선 푸시킨 거리를 지나, 산악열차 '푸니쿨라'에 올랐다. 1량짜리 열차 내부는 계단식으로 돼 있었다. 25석 될까 말까 한 자그마한 열차가 중력을 거스르며 힘차게 언덕 위를 향해 움직였다. 2분여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푸니쿨라. ⓒ프레시안(박정연)

▲독수리전망대 가는 길에 발견한 조명희 선생 비석. ⓒ프레시안(박정연)


전망대로 가는 길에 박 기관사로부터 반가운 이름을 들었다. 조명희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었다. 조 선생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기에 여기에 비석이 세워졌다고 했다. 전날 하바롭스크 중앙묘지에서 그의 이름을 찾은 터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비석 근처를 둘러봤다. 

조명희 선생 비석에서 얼마 가지 않아 독수리전망대에 도착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일 높은 언덕으로, 금각만 대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다리 구경에 앞서 전망대에 있는 동상 하나를 감상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책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책에는 키릴 문자로 추정되는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박 기관사는 '키릴 형제' 동상이라고 했다. 

"키릴 형제는 러시아의 세종대왕같은 분들입니다. 키릴 문자가 로마 알파벳을 차용하는데,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 하는 개그 같은 게 있습니다. 키릴 형제가 글자를 보급하기 위해 로마 그리스까지 가서 쟁반에다가 알파벳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국경을 건너다 쟁반이 떨어져서 주워담다 보니까 문자가 섞이고 뒤집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러시아인들이 영어와 '사맛디 아니하게 되고'..." 
 

▲키릴형제 동상. ⓒ프레시안(박정연)

▲금각만 대교를 배경으로 찍은 단체사진. ⓒ프레시안(박정연)

 

 

키릴 문자를 볼 때마다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 공부하기 힘들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박 기관사는 "웃자고 하는 소리"라며 "어쨌든 키릴형제 덕택에 러시아 사람들이 말에 맞게 비로소 문자를 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몸을 반대로 돌려 다시 금각만 대교를 바라봤다. 다리를 중앙으로 양 쪽에 우뚝 솟은 기둥이 서있고, 하프 현처럼 가느다란 철근 여러 개가 기둥과 다리를 연결하는 형태였다. 아찔한 모양이었다. 배경으로 삼아 기념사진 찍기 좋아 보였다. 돌아가면서 '인생샷'을 남기는 것으로 특별했던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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