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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books] 질베르 리스트의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

조효제 성공회대학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5-31 오후 7:04:32

 

 

아주 희한한 약물이 있다. 트넴폴레베드라는 약이다. 거의 기적과 같은 약효를 자랑한다. 사람을 계속 자라게 하고 똑똑하고 세련되게 만든다. 아픈 사람을 고치고 평균수명도 늘린다. 생활을 편리하게 만드는 데 이만한 명약이 없다. 세상살이의 모든 면에서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이 약은 우리 삶이 계속해서 더 더욱 좋아질 거라고 약속한다.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해서 트넴폴레베드를 처음 접한 사람은 충격과 경이로 넋을 잃기 마련이다. 그것은 선망으로 이어진다. 더욱 더 이 약을 갖고 싶어 한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트넴폴레베드를 좋은 약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약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요컨대 트넴폴레베드는 이제 보편적 약물, 인간 삶의 목표 자체가 된 듯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트넴폴레베드를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나눠 가지기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해도 이 약이 늘 부족한 다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약이 부족한 다수와 약이 넉넉한 소수 사이에는 늘 긴장과 갈등이 발생한다. 또한 트넴폴레베드를 일단 복용하기 시작하면 끊을 수가 없다. 아편보다 중독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복용량을 늘려야 한다. 한번 중독된 후 자발적으로 이 약을 끊을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트넴폴레베드를 만들려면 엄청나게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 이웃의 재료를 빼앗아서라도 이 약을 생산하려고 기를 쓰게 된다. 사실 이 약을 처음 개발할 때부터 자기들에게 없는 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온갖 무리수를 둬야 했다. 약재가 점점 줄어드는 것도 문제다. 이 때문에 전쟁도 일어난다. 게다가 재료를 뽑아내는 과정에서 쓰레기가 엄청나게 많이 발생한다. 그동안 약을 너무 많이 생산해서 이제 사람들이 쓰레기더미 속에 살게 되었다. 쓰레기의 악취와 독한 기운이 사람과 자연을 죽이고 있다.

이런 현실 때문에 요즘 들어 트넴폴레베드를 보는 시각이 다양해졌다. 아직도 '이대로'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제일 큰 그룹이다. 이들은 트넴폴레베드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약 없이 살 순 없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다른 방식의 중독'을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웃의 재료를 강탈하지 말고, 정의롭고 착한 방식으로 이 약을 만들어 내자고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중독 탈출'을 부르짖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나쁜 중독이든 좋은 중독이든 중독은 중독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질베르 리스트 지음, 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펴냄).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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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아차렸겠지만 문제의 약물 '트넴폴레베드'(Tnempoleved)는 '발전'이라는 단어 'Development'를 본 평자가 거꾸로 표현한 것이다.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펴냄)의 저자 질베르 리스트는 발전 담론으로부터 완전히 빠져 나와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탈출파'를 대표하는 학자라 할 수 있다. 리스트는 원래 인류학자로 출발한 사람이다. 그래서 발전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인식론의 근저까지 살피는 입장에 서 있다.

프랑스어로 쓰인 이 책의 원제목은 <발전: 한 서구 신앙의 역사>다. 발전이라는 것 자체가 확고한 믿음 체계에 입각한 신앙(croyance)이자 종교라는 말이다. 종교가 무엇인가? "하나의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논박할 수 없는 특정 진실에 대한 믿음"이자, "의무적인 행위들을 규정함으로써 해당 집단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실행 체계다(55쪽). 발전이 현대적 종교가 되었으므로 "발전은 하나의 신앙이자 서로 모순되면서도 하나의 총체를 구성하는 일련의 실행들"로 나타난다(61쪽). 신앙생활은 절대적 사유의 토대를 요구한다. 따라서 종교나 마찬가지인 발전 담론은 다른 의견이나 다른 가치관을 허용하지 않는, 전적인 복종과 동의를 그 특징으로 한다. 발전이 이렇게까지 확고한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면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반대하는 논리가 통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발전 중독에서 탈출하자는 주장은 주류 발전론에서 볼 때 신성모독의 대죄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리스트는 자신의 작업을 이처럼 어려운 과제, 즉 '연금술의 환상'을 깨는 일과 같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발전, 성장, 진보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오랜 기원을 지니고 있다. 4세기의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직선적 역사관이 개진되었고 계몽주의 시대가 되면서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사상이었던 진보와 사회진화가 당연시되기 시작했다. 이런 발전 사관과 자본주의, 산업혁명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결합하여 근대의 핵심사조가 되었다. 이런 논리 위에서 리스트는 식민지배 시기에 서구가 비서구를 착취하고 수탈했던 구도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발전과 저발전의 구도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전자가 일방적인 지배-종속의 대립관계였다면, 후자의 관계는 '발전'을 보편 이상으로 일단 전제한 후 그것의 실행 방안을 두고 벌어진 논쟁 관계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발전과 발전은 같은 식구"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아시아-아프리카 비동맹운동의 원조가 된 1955년 반둥회의가 대표적 예다. 서구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강렬한 제3세계주의의 기치였다는 통념과 달리, 반둥회의의 최종 공식선언문은 발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지지를 천명한 문헌이었다. 결국 발전 자체가 좋다는 점을 재확인한 입장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근대화론 자체가 편의적으로 사용되었다. 북반구 국가들에게 근대화는 공산주의에 대응하는 방안이었고, 남반구 국가들에게 그것은 "새 지배계층에게 일임된 미래에 대한 약속"에 불과했다. 새 지배계층은 "서구화의 선물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채워 넣었다"(169쪽). 당시 등장했던 급진 종속이론 혹은 제3세계 자립주의도 새로운 패러다임이긴 했으나 낡은 전제에 기대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의 신국제 경제질서(NIEO) 역시 남반구의 집단적 저항처럼 받아들여졌지만 발전 패러다임 내에서 자원 분배를 둘러싸고 남북 간에 벌어진 권력 투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크게 보면 위에서 말한 '다른 방식의 발전'을 벗어나지 못한 몸부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세계화 시대로 이어지는데, 세계화 역시 당대에 적합하게 변형하고 새롭게 단장한 신앙과 신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신화의 몰락과 종말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지금 당장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은 발전 담론의 사상사 책으로 분류하는 게 제일 적합할 것 같다. 실제 현실의 움직임이나 구체적 사례를 다루기보다, 중요 문서, 선언, 학설, 이론을 중심으로 발전론을 통시적으로 일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독 탈출론'답게 리스트의 논지는 분명하고 신랄하다. 추호의 타협도 없이 문제의 근원을 끝까지 파고든다. 발전 담론에 있어 가장 발본적인 사유를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로'를 되뇌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방식의 발전'에 속하는 여러 입장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비판이 날아든다. 예를 들어 역성장(탈성장), 현재의 발전은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일정한 성장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신중론, 대안적이고 공정한 발전론, 인권과 같은 보편기획,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성장관도 리스트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모두 경제적 사고와 근대적 진보관에 중독되어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저자의 대안이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라는 질문이 당장 나올 수 있다. 저자는 다소 추상적이긴 하나 전면적인 '개종'을 권한다. "환상에 매달리기보다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바를 상상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이해"하라고 촉구한다(386쪽). 지구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다원적 가치들을 상상하고, 근대 경제학의 기본전제들을 거부하며, 세상을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인식을 가지라고 한다. 죽을힘을 다해 보릿고개를 넘었지만 다시 소비고개, 경쟁고개, 자살고개를 넘어야 하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리스트의 주장은 가장 본질적인 차원에서 수긍할 수밖에 없다. 권말의 해제를 쓴 하승우의 문제의식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김종철·최성현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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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리스트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다른 방식의 발전' 패러다임 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저자의 근원적 비판은 정말 곤혹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근원적 사유에 동의한다고 해서 '착한 발전론'을 배척하는 것이 능사일까? 착한 발전론에 한계가 있고 문제가 많지만 그와 같은 상황적 계기(momentum)를 상상력의 단초로 활용해 근원적 행동으로 옮겨갈 운동적 계기(movementum)로 승화시킬 수는 없을까? 이는 한가한 가상적 질문이 아닌 우리 발등에 떨어진 화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본서는 발전론에 관한 수많은 참고서적 중에서 반드시 언급될 가치가 있는 확실한 논점을 지닌 책이다. 본서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는 의미심장한 저술이다. 또한 진보-보수의 단순한 스펙트럼에서만 벌어지기 쉬운 발전의 논쟁에 인류학적 차원의 비판을 제공하는 중요한 저작이다. 베블렌과 폴라니를 잇는 지성적 전통의 자장 속에서 잘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거대한 역설>(필립 맥마이클 지음, 조효제 옮김, 교양인 펴냄).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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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히의 <행복자전거를 타고 온다>(박홍규 옮김, 미토 펴냄),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김종철·최성현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볼프강 작스의 <반자본 발전사전>(이희재 옮김, 아카이브 펴냄), 팀 랭의 <먹거리 정책>(충남발전연구원 옮김, 따비 펴냄),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어제까지의 세계>(강주헌 옮김, 김영사 펴냄), 그리고 필립 맥마이클의 <거대한 역설>(조효제 옮김, 교양인 펴냄)과 비교해 가면서 이 책으로 한 학기 세미나를 진행해도 좋을 것 같다. 조만간 한국에 출간될 저자의 <경제학은 과학적일 것이라는 환상>도 기다려진다. 인식 변화 없이 세상을 바꾸기 어렵고, 공부 없이 인식을 바꾸기란 더 어렵다. 발전 담론의 뿌리를 끝까지 사유하고, 기존의 인식을 확실히 바꾸고 싶은 사람들에게 리스트의 책은 필수적 관문 역할을 할 것이다.

(사족: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은 의례적인 인사말을 넘어, 보기 드문 통찰과 지적 겸손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 자체로 한 편의 명문장이라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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