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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과 다른 듯 다르지 않은 오늘...한 해고 택배기사의 외침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0/11/13 08:38
  • 수정일
    2020/11/13 08:38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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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전태일의 외침은 오늘날 택배기사 등 특수고용직 목소리로 이어진다

이승훈 기자 lsh@vop.co.kr
발행 2020-11-13 06:52:56
수정 2020-11-13 06:5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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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전태일 열사 영정.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의 전태일 열사 영정.ⓒ양지웅 기자  개발과 성장이 최우선 가치였던 1970년. 전태일은 햇볕조차 들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10~15살 어린 여공들이 하루 16시간가량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워했다.

뒤늦게 근로기준법을 알게 된 전태일은 동료들과 바보회·삼동친목회 등을 결성해 평화시장 노동환경 실태를 조사하고, 노동청에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등 어린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 결과, 1970년 10월 경향신문에 “나이어린 여공이 좁은 방에서 하루 16시간이나 고된 일을 하며 보잘 것 없는 보수에 직업병까지 앓고 있어 근로기준법을 무색케 하고 있다”는 짤막한 기사가 났다. 전태일과 동료들은 이 짧은 기사에 기뻐했다. 하지만 그는 평화시장에서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일자리를 잃었다. 그나마 노동청으로부터 근로감독을 약속받고 희망을 품었으나, 이 또한 국정감사 기간이 지나자 노동청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근로기준법이 존재하나 평화시장에선 누구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직시한 그는, 그해 11월 13일 동료들과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 시위를 벌였다. 시위도 경찰의 제지로 무산될 위기에 놓이자, 그는 휘발유를 자신의 몸에 붓고 불을 붙였다.

그때 전태일은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의 외침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절실하다고 하면, 누군가는 그런다. “그래도 50년 전이랑 지금은 다르지”라고. 맞다. 많이 달라지긴 했다. 광복 후 선진국의 노동법을 그대로 번역만 하다시피 들여올 때만 해도 사용자들은 “너무 선진화된 법”이라며 반대했지만, 오늘날 사용자들은 아예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직군을 만들어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가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런 고용형태의 변화다. 오히려 특수고용직 등 새로운 직군의 종사자가 많아지면서 근로기준법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같은 현실의 결과로 나타나는 잇따른 노동자의 죽음은 ‘50년 전 상황으로 회귀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준다. 대표적인 게 특수고용직이 제도화된 택배다.

새벽에 일어나서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버텨내고 밤늦게 집에 돌아가는 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가 잇따르지만, ‘주 40시간’ 규정이 명시된 근로기준법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노조를 만들어서 처우개선을 요구하려고 했더니 계약을 해지해 버린다. 누가 봐도 부당해고다. 그런데도 ‘개인사업자에 가까운 특수고용직’이기에 근로기준법에 접촉되지 않는다고 한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게 아니니, 부당해고가 아니라 한다.

그런 점에서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찾아가고 있는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이하, 택배연대노조)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택배연대노조는 이 같은 활동을 인정받아 올해 전태일 재단의 ‘전태일 노동상 단체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散華)한 지 50주년인 오는 11월 13일,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서 전태일 재단은 이 상을 택배연대노조에 수여할 예정이다.

김태완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위원장 자료사진
김태완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위원장 자료사진ⓒ임화영 기자

수많은 태일이가 세운 노동조합
“전태일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택배연대노조는 2017년 1월 8일 ‘또 다른 전태일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노동조합이다.

2016년 중순경 택배기사들은 ‘택배기사 권리찾기’라는 모임을 만들고 어떻게 하면 장시간 노동 문제와 택배사·대리점의 갑질 등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을지 논의했다. 처우개선을 위해선 회사와 교섭을 해야만 하고 이를 위해선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본 택배기사들은 그해 말부터 노조설립을 준비하고 다음해 1월 8일 지금의 택배연대노조를 창립했다.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노조설립을 준비하는 택배기사가 모여 있는 대리점이 갑자기 폐업을 하거나, 부당한 계약 해지를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특수고용직은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허점을 이용한 부당해고였으며, 노조와해였다.

김태완 현 택배연대노조 위원장 또한 노조를 만들다가 일자리를 잃은 해고자다. 당시 CJ대한통운은 김 위원장이 있는 대리점에서 노조가 세워질 기미가 보이자 대리점을 통째로 폐점시켰다고 한다. 이날로 김 위원장과 10여명의 동료 택배기사들은 모두 해고자가 됐다.

지난 11월 10일, 홈플러스 온라인배송기사의 해고투쟁 집회에서 만난 김 위원장은 해고 당시를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 “노조하기 전 ‘고용안정’이라는 말은 책에서만 접한 단어였다. 이게 왜 중요한지 잘 몰랐다. 그런데 막상 당하고 보니, 해고는 파괴였다. 2016년 12월에 노조를 만들다가 해고가 됐는데, 그해 12월 2일에 둘째가 태어났다. 우리 집에 수입은 저밖에 없었고, 형제들도 다 어려워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급여가 들어오지 않는 날을 일주일 앞두고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집에 들어가는 게 무서웠다. 평소 만나지 못했던 고등학교·대학교 친구들에게 연락 돌리며 돈을 빌리고. 이 생활을 한 3개월 했다. 내가 노조를 하는 건지 돈 빌리러 다니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해고는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그는 “지금도 아내와 첫째는 내 눈치를 살핀다. 매일 저를 위로한다”며 “해고는 한 사람을, 그리고 그 가정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택배기사의 노동자성이 국가로부터 인정돼 택배연대노조가 합법노조가 된 지금도, 김 위원장의 복직 문제는 풀지 못한 과제로 남았다. 그 또한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이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이 문제를 CJ대한통운과 교섭할 수 있게 되는 날 반드시 풀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그를 만난 현장도 사실 특수고용직 해고 문제를 다루는 집회였다. 홈플러스 온라인배송기사인 이수암 마트산업노조 온라인배송지회 지회장은 노조 준비위원회 활동을 하던 올해 3월 18일 홈플러스 운송사로부터 일방적인 계약해지를 당했다. 그는 다행히 “이 사건 근로자와의 운송계약 해지는 부당노동행위”라는 지방노동위원회의 판정을 받고 복직의 기회를 얻었으나, 최근 복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시장이 만들어낸 특수고용직이란 신분 때문에 근로기준법 제23조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 등 징벌을 하지 못한다’는 규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니, 사용자는 해고나 마찬가지인 계약해지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관련기사:“계약해지 부당” 지노위 결정 후 복직 준비 중 또 계약해지된 홈플러스 배송기사)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처한 상황 탓인지, 김 위원장은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 여전히 절실하다고 말했다. 집회가 끝나고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특수고용노동자’라는 게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게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지 않나. 그렇다 보니 노동자들이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무권리 상태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권리를 찾으려고 하면 오히려 불법행위로 치부되고 해고된다”며 전태일의 구호가 오늘날에도 절실한 까닭을 설명했다.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한진택배 본사 앞에서 열린 ‘택배노동자 과로사 주범 재벌택배사 규탄대회’에서 택배노동자 김모씨가 과로사로 사망 전 동료에게 남긴 문자 메세지 앞에  택배 노동자가 앉아 있다. 2020.10.24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한진택배 본사 앞에서 열린 ‘택배노동자 과로사 주범 재벌택배사 규탄대회’에서 택배노동자 김모씨가 과로사로 사망 전 동료에게 남긴 문자 메세지 앞에 택배 노동자가 앉아 있다. 2020.10.24ⓒ정의철 기자

특수고용노동자 노조의 탄생

전태일의 산화가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노동문제에 큰 관심을 불러오고 수많은 노동운동의 기폭제가 됐던 것처럼, 택배연대노조의 투쟁 또한 다른 특수고용노동자들이 용기를 낼 수 있는 거름이 됐다.

택배연대노조가 2017년 11월 3일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조설립필증을 받은 이래, 다양한 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설립이 이어지고 있다. 가장 최근엔 배달노동자들의 노조인 라이더유니온이 노조설립필증을 받았고, 회사와 위수탁 계약을 맺고 건당 수수료를 받던 특수고용노동자인 코웨이 방문판매노동자들 또한 올해 5월 13일 노동부로부터 노조설립필증을 받았다. 마사회 경마기수들과 경륜 선수들도 올해 노조신고필증을 받았다.

이들 특수고용노동자는 활발한 노조 활동을 통해 처우개선과 단체교섭 등을 요구하며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가고 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9월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택배 분류작업 인력 투입을 촉구하는 기자회을 마친 뒤 택배차량 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은 추석이 있는 9월 물량이 평소보다 50% 이상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택배 분류작업 인력 확충 등 택배물량 증가에 대한 택배사와 정부의 실질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2020.09.07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9월 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택배 분류작업 인력 투입을 촉구하는 기자회을 마친 뒤 택배차량 행진을 하고 있다. 이들은 추석이 있는 9월 물량이 평소보다 50% 이상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택배 분류작업 인력 확충 등 택배물량 증가에 대한 택배사와 정부의 실질적인 대책을 요구했다. 2020.09.07ⓒ김철수 기자

“뭉치면 주인 되고 흩어지면 노예 된다”

국토교통부·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1992년 택배서비스가 시작된 이래 택배물량은 연평균 12.1%씩(2014년 16억개→2016년 20억개→2018년 25억개) 증가했다. 또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팬데믹 사태로 수요가 폭증했다. 택배물량 폭증은 안 그래도 과로노동이 심각한 택배기사의 고강도·장시간 노동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문제는 잇따른 택배기사의 과로사로 나타났다. 올해 사망한 택배기사 10명 중 9명은 모두 심혈관질환으로 쓰러져 숨졌으나, 대부분 산재보험 적용에서도 제외된 것으로 드러났다. 택배가 국민 보편서비스로 자리매김 하는 양적 성장 이면에 ‘택배기사의 과로사’라는 그늘이 짙어지고 있던 것이다.

택배연대노조는 이 같은 상황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렸고, 시민들도 이런 택배노동자들의 아픔에 ‘늦어도 괜찮아 해시태그 달기’ 등 다양한 운동으로 공감을 표했다.

덕분에 택배기사들의 처우개선 대책이 나오고 있다. 12일 관계부처 합동 브리핑에서도 고용노동부·국토교통부는 택배기사의 장시간·고강도 노동, 불공정 계약 관행, 산재보험 적용제외 등의 문제에 대한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지속적인 처우개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택배사의 외면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단체교섭 등이 그것이다. 택배를 비롯해 특수고용직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고 있는 업계 대부분은 이들을 본인들이 고용한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교섭도 회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택배연대노조가 출범하고 합법노조로 인정받은 지 3년이 넘었건만, 택배사들은 여전히 직접적인 계약관계가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택배기사들과 대면하는 교섭 자리를 회피하고 있다.

2020년 기준 5만4천여 명의 택배기사 중 노조에 가입한 인원이 4천여 명 정도에 머물고 있다는 점 또한 아쉬운 부분이다. 궁극적으로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상시 해고 등의 위협에 노출돼 있는 문제도 해결해야할 과제다.

과제가 많긴 해도, 택배연대노조는 그래도 희망적이다. 비록 위원장의 해고 문제는 아직 풀지 못했지만, 수많은 해고 문제를 해결해 왔고, 사회적 관심을 끌어내며 잃어버린 권리를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동료를 지키는 일이 곧 자신을 지키는 일이며, 사업장 밖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는 일임을 자각하고 행동한 덕택이다. 집회에서 김 위원장도 이 부분을 강조했다.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해선 내 동료의 권리가 중요하다. 동료의 권리를 찾아낸다면 내 권리도 찾을 수 있다. 동료가 해고된다면 그다음은 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뭉쳐야 한다. 뭉치면 주인 되고 흩어지면 노예 된다. 우리가 수많은 해고 투쟁을 겪으면서 얻은 진리는 이것이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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