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이 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펄럭이는 태극기 물결, 대한독립 만세 소리 등을 떠올린다. 1949년과 1964년·1965년 3·1절은 그런 연상을 더 많이 하게 될 정도로 식민 지배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을 때였다. 이런 시기에 어떤 메시지가 3·1절 경축사에 담겼는지 살펴보면, 매년 3월 1일마다 동상이몽을 품는 한국 국민과 한국 정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승만 "3·1운동의 힘을 반공으로"
▲ 미군정청 광장에서 열린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만이 축사하고 있다(1945. 10. 20.). ⓒ NARA/ 눈빛출판사
3·1운동 30주년인 1949년 3월 1일은 정부 수립 뒤에 처음 맞는 3·1절이었다. 이날 3·1절 경축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3·1 독립선언이 1776년 미국 독립선언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나왔음을 강조하면서 이 운동의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지금의 극우세력이 들으면 서운할 만한 발언도 내놓았다. "우리가 지금 건설하는 민주국은 탄생한 지 아직 1년이 못 되었으나, 사실은 30세의 생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말한 대목이 그것이다.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고 선언한 당시의 헌법 전문에 따라, 그는 대한민국은 국가 형태가 제대로 갖춰진 것은 아직 1년이 안 됐지만 "사실은 30세" 된 국가라고 발언했다. 대한민국의 법통과 정통성이 3·1운동에 있음을 재차 선언함으로써 이 운동의 의의를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법통이 1919년에 있음을 부정하는 건국절 논쟁을 제기해 3·1운동의 정통성을 은근히 부정하는 오늘날의 극우파들이 들으면 실망할 만한 발언이었다.
이승만은 3·1운동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 운동의 열기를 현대적으로 적용하는 문제에서는 엉뚱한 말을 했다. 제국주의 식민 지배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지,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올바로 재정립할 것인지 등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가 강조한 것은 3·1운동 열기로 반공 국가를 건설하자는 메시지였다. 공산주의 배격을 빌미로 대중을 흑백 이념에 가둬두고 억압하는 반공 국가 건설로 그 열기를 돌리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해방 이후의 좌우 대립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우파 단체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민간 각 단체의 민족운동과 아울러 청년과 부녀들이 열렬한 애국심을 발휘해서 3·1 정신을 부활함으로써 능히 우리 단체도 보존하고 개인 생명도 보전하며 국권도 공고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3·1 정신을 기초로 우파 주도의 반공 국가를 세우자는 엉뚱한 의중을 표시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기념사와 별도로 발표한 3·1절 담화문에서는 3·1운동의 의의에 관한 부분을 축소하고 우파 단결 및 반공 투쟁 부분을 더 강조했다. '3·1 정신으로 일본과의 문제를 해결하자'가 아니라 '반공 문제를 해결하자'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3개월 뒤인 1949년 6월 6일, 이승만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했다. 이로 인해 반민특위가 약해지고 친일 청산도 흐지부지된 뒤인 1950년 3월 1일, 이승만은 3·1절 기념사에서 한층 노골적으로 3·1정신과 반공을 연결했다.
그는 "이만치라도 광복 성취한 것을 우리가 경축하는 동시에 삼팔선 이북에서 여러 백만 동포들이 외국인 압제하에 자유를 빼앗기고 신음하는 것을 우리가 잠시라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라며 3·1정신을 반(反) 소련 감정과 연결하려 했다.
경축사 후반부에서 그는 1919년이 1950년으로 이어졌음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1919년은 만세 혁명의 해로, 1950년은 자유 전쟁의 해로 규정했다. 3·1운동 에너지를 반공 전쟁으로 승화시킬 것을 주문한 것이다. 반민특위 문제로 반일 감정이 고조됐던 시절에 이 열기를 반공 투쟁으로 돌리려 애썼던 이승만 정권의 시도를 알 수 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이지만, 친일파들에 둘러싸인 대통령이었다. 3·1 정신이 반일 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은 그에게 불리했다. 이는 그가 친일 세력이 좋아하는 반공 이념을 경축사에 '듬뿍' 뿌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박정희 "3.1운동의 힘을 경제로"
▲ 1961년 11월 11일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이케다 하야토 일본 수상을 만나 환담하고 있다. 당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일본의 고위 정객들과 만나 머리를 깍듯이 숙이며 "일본을 형님으로 모시겠소"라고 말했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의 주역인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은 당시 이 만남과 관련 "결국 박 대통령이 꺼져가던 한일회담이란 장작에 다시 불을 지핀 셈이다"라고 회고록에 썼다. ⓒ 연합뉴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하고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실질적인 집권 1년 차인 1964년부터 국민들과 대립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1961년 11월 11일, 그는 도쿄에서 '일본을 형님으로 모시겠다', '식민 지배 청구권은 없어도 그만이다'라며 식민 지배 해결 없이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국민들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는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런 식의 한일관계 복원이 자신의 역사적 사명이라도 되는 듯 취임 익월인 1964년 1월 대국민 연설을 통해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다짐했다. 그런 박정희에게 반발해 3월 24일 약 8만 명이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다(3·24 시위). 우리 국민들이 그런 식의 관계정상화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런 속에서 1964년 3월 1일의 경축사가 발표됐다. 박정희가 처음 발표하는 3·1절 기념사였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에 빼앗긴 강토 위에 일제의 무단정치가 점차 혹심해가던 즈음, 우리의 선각자들은 민족자결의 원칙 밑에 분연히 식민통치자들에게 반항하여 조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했던 것입니다"라며 만세운동의 의의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윤석열 정권과 비슷한 발언을 했다. 식민 지배 청산 및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에 관한 대목에서 "오늘 항일투쟁의 기념일을 맞아 전체 민족의 이름으로 그들의 자성과 대승적이며 투철한 성의를 다시 한번 촉구하는 바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강제동원) 배상은 한국 정부가 떠맡되, 일본이 약간의 성의 표시는 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상황에 맞지 않는 '성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박 정권도 "대승적이며 투철한 성의"의 표시를 일본에 촉구했다. 성의 표시로 끝날 수 없는 일을 그 정도 선에서 무마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나마 그 성의표시 운운도 실상은 거짓이었다. 1961년 11월 일본에서 했던 발언과 명백히 상반되는 발언이었다.
이날 그가 특히 강조한 메시지가 있다. 3·1운동 에너지를 빈곤과의 대결, 근대화의 추진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건설적인 듯했지만 실상은 복선을 깔고 있는 메시지였다.
1962년 10월 13일 자 <조선일보> 기사 '사억불 선으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박 정권은 군사정권 시절부터 유·무상 경제협력 자금을 받는 선에서 식민 지배 문제를 봉합하려 했다. 3·1운동 에너지를 경제문제에 쏟아붓자는 발언은 이를 합리화하려는 의도와 무관치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964년 6월 3일 6·3운동이나 6·3사태로 불리는 한일 협정 반대 및 박정희 하야 요구 운동이 벌어져 서울 일대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그는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이 이뤄진 뒤인 1965년 3월 1일 한층 노골적으로 한일 친선을 강조했다.
이날 경축사에서 그는 3·1정신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이요 활용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한 뒤 "지금 우리 민족은 지난날 항쟁의 상대자였던 바로 그 일본과 더불어 막혔던 국교를 정당화하지 않으면 안 될 미묘한 국제정세하에 놓여" 있다며 자신의 스타일로 진행되는 정상화 작업을 합리화했다.
그런 뒤 3·1 에너지를 북한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비록 같은 민족일망정 우리와 사상을 달리하고 조국을 해치는 북괴의 공산 도배들과는 이미 피를 흘려 싸우기도 했고, 또 끝까지 싸워야 할 기구한 운명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1965년에도 계속된 격렬한 국민적 저항에 맞서 그해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 협정 체결을 강행한 박정희는 1966년 3월 1일에는 더욱 자신감 있게 3·1절 경축사를 발표했다. 그는 "아시아의 구석구석까지 침략의 마수를 뻗치려고 하는 공산 세력"에 맞설 필요성을 거론한 뒤 이런 과제를 위해 한일 협정을 체결했노라고 선언했다. "한일 국교의 타결과 국군의 월남 파병을 통하여 우리는 세계 속의 한국의 위치를 뚜렷이 부각시켰습니다"라며 협정 체결을 높이 평가했다.
이승만·박정희 접근법과 유사한 윤석열
▲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2023년 2월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항일운동 에너지를 한일관계가 아닌 반공 문제로 돌리려 한 이승만·박정희의 접근법은 지금의 윤석열 정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윤 정권은 일본과 연대해 북한·중국·러시아를 방어한다는 명분으로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등을 대충 봉합하려 하고 있다. 이에 관한 한일 협의가 진행되는 와중에, 이른바 다케시마의 날인 지난 2월 22일 독도 인근에서 일본군과 연합군사훈련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은 식민 잔재 해결을 원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임기 초반부터 무시했다가 초장부터 민심 이반을 자초했다. 윤 정권이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고 자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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