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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농담, 아주 오래된 / 홍세화

등록 : 2013.09.1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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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사상의 자유란 꿈꿀 수 있는 자유 
여야 한다. 그것이 어떤 꿈이든, 설 
사 지금은 이루어질 수 없는 농담처 
럼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인간에게 
초월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무엇이 
남을까. 진보정치의 새로운 영토는 
더 열리고 확장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 있다.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오류를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힐 뿐이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상은 머릿속에 오래 남아 있던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에 나오는 어떤 구절이다. 1967년에 발표한 이 소설 때문만이 아니었겠지만, 쿤데라는 1968년 이후 공직에서 해직되고 책이 압수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몇년 뒤 파리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혁명’ 이후 귀향의 이야기를 다룬 그의 소설 <향수>를 나는 무척 좋아했다. 새삼스런 이야기가 되겠지만, 나의 처지 역시 동유럽 망명자들의 처지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시간 향수에 사로잡힌 자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서두에 떠올린 쿤데라의 냉소적인 서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향수란 기억과의 싸움에 다름 아니었다. 그 싸움에는 당연히 나를 내동댕이쳤던 과거로 되돌아가 사태를 되돌려놓고 싶다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현재의 시간 속에서 과거의 역사가 바로잡히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고 싶다는 욕구가 자리잡고 있었을 터이다. 그래서 기어이 귀향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제 그 귀향으로부터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은 지나간 인생 전체를, 방금 앞에 지나간 과거의 시간 전체를 짓궂게도 한순간에 하찮은 ‘농담’처럼 여겨지도록 만들기도 한다. 내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민주화’ 덕분이었다. 그리스어로 귀향은 ‘노스토스’(nostos)다. 여기에 ‘괴로움’을 뜻하는 ‘알고스’(algos)가 합쳐져 ‘노스탈지’(nostalgie)가 되었다. 귀국 후 나는 간혹 어느 자리에서 긴 시간의 기억과의 싸움에 담겨 있던 괴로움을 잊고서 과거 어두웠던 시대를, 그 시대와 맞서고자 했던 나 자신까지 포함한 우리의 싸움을 농담처럼 가볍게 이야기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늘 돌아서 오는 길이 문제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의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낯설고, 이 낯섦의 틈으로 자기 환멸이 스며들곤 했다.

 

<농담>의 주인공 루드비크는 여자친구 마르케타에게 보낸 엽서에 담긴 짧은 농담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진 자이다. 엽서에는 단 세 마디가 적혀 있었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에는 우둔의 악취가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스탈린이 해방시킨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트로츠키 만세!’를 부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것이 설사 치기 어린 농담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1970년대를 지배했던 유신독재 시절도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내가 속한 ‘남민전’의 ‘10만장의 삐라’와 ‘무기 탈취’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그저 실없는 농담 취급 당할 수도 있는 것들이 아니었을까.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버릴 수도 있다고 호언할 수 있는 군사정권에 대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여덟 사람의 목숨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유신권력에 총신이 없는 카빈소총으로 맞서보겠다던 나의 벗들은 얼마나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몽상가들이었던가. 땅에 떨어져보지도 못하고 애드벌룬에 묶여 날아가다 어디엔가 추락하여 버려졌을 ‘10만장의 삐라’는 또 어떤가.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죽임을 당했고, 나의 벗들은 긴 세월 감옥에 내던져졌으니 농담이라면 이것은 얼마나 잔인한 농담인가.

 

모든 것은 잊힐 뿐이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쿤데라의 말을 나는 박근혜 시대에 다시 상기하고 있다. ‘민주화’가 과거의 암흑시대를 농담처럼 이야기하게 하는 동안 잊고 있던 과거의 망령이 다시 현실이 되어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일거에 사회적·정치적 이성의 작동을 멈추게 만드는 국가정보원. 이미 처음 군부 라인이 청와대에 포진한 때부터 예고된 것이기는 하나 ‘민주화 이후’를 운위하던 우리를 하루아침에 무색하게 만드는 이 공안통치에 우리는 다시 운명을 건 싸움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될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어떤 말과 행위든 그 시대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고 그것과 더불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실존적 떨림도 동반하지 않고, 지하실에서는 혁명이 되던 말이 마이크 앞에서는 농담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인가. 나의 과거는 정당했고 지금 누군가는 부당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무거운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 미숙한 자들이 불러낸 극우의 망령과 싸워야 하는 것은 어차피 우리 모두의 몫이므로, 우리는 ‘우리 안의 미숙아’들의 ‘사상의 자유’를 두둔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국정원을 두둔할 수는 더더욱 없는 이 곤경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나는 묻고 싶은 것이다. 한편으론 ‘뼛속까지 평화주의자’가 되고 다른 한편으론 ‘총 한 자루의 사상’으로 무장하자고 선동하는 혁명가가 되기도 하는 이 변모의 바탕에는 어떤 사고가 자리잡고 있는 것일까. 얼굴 한쪽은 희화적이고 다른 쪽의 얼굴은 순교자의 표정을 짓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심리적 바탕에는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 엄연히 진보운동의 지배적 주류라는 의식이 깔려 있으며, 나아가 여기에는 이제 와서 그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가 된 진보정치의 다른 일파도 함께 공유했던 ‘민중권력’에 대한 그릇된 갈망(혹은 환상)이 드리워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압력밥솥 폭탄’이 농담이었다고 태연히 말하는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말보다 그들(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이 비밀리에 활동해서 그런 사람들인지 몰랐다고 이야기하는 정의당 심상정 대표의 말이 내 귀에는 더 얄궂은 농담처럼 들렸다. 경기동부가 지배주주인 민주노동당과 서둘러 통합을 하여 만든 통합진보당에서 이석기 의원은 비례대표 2번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노동사회를 비롯한 진보진영의 다수인 이른바 엔엘(NL)의 지지로 국회에 진출한 사람들이 지난 당내 선거부정 사태로 탈당하여 만든 당이 지금의 정의당인 것이다. ‘과연 몰랐을까?’라는 질문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는 공안권력의 법적 제재에 단호히 반대하지 않고 ‘낡은 진보’를 앞장서 비판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노동사회, 언론과 정치 부문에서 이른바 진보에 속한다(고 믿어지)는 우리 모두의 어떤 ‘비겁함’에 대해서도 재론하고 싶지 않다.

 

그들의 말처럼, 북한 체제는 진부하며 이 체제를 미래의 체제로 인식하는 이른바 주사파도 너무 낡았다. 그러나 진보의 전면적 갱신이 이석기 일파와 결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안이할 뿐 아니라 기회주의가 엿보인다. 오늘 공안세력들에 의해 폭로된 ‘어긋난 혁명가’들 초상은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남긴 업보가 맞다. 이 상처의 극복은 극우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그 속에서 생성되는 언어와 행위 속에서 치유되고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정치 질서에 적응하거나 생존하기 위해 극우적 히스테리 앞에 체념하는 것, 바로 그것이 다른 진보의 꿈들을 외면하고 서둘러 낡은 진보와 통합함으로써 진보정치를 황폐하게 했던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헌법’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대의제 민주주의로부터도 도망쳐 버려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민주주의의 과정은 결코 압축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다른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조차 오늘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 때문에 묵살하거나 배척해 버리는 자유주의로의 투항을 ‘합리적 진보’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사상의 자유란 꿈꿀 수 있는 자유여야 한다. 그것이 어떤 꿈이든, 설사 지금은 이루어질 수 없는 농담처럼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인간에게 초월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무엇이 남을까. 진보정치의 새로운 영토는 더 열리고 확장되어야 한다. 지금 오지 않은 미래를 살려는 사람들에게 오늘의 시간은 그래서 모욕인 것이다.

 

홍세화 <말과 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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