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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억 짜리 국정 농단 ‘청구서’ 한동훈 입 주목하는 이유

국제상설중재재판소 엘리엇 일부 승소 판정,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 관련…법무부 구상권 청구 할까?

 

‘국정 농단’의 밀린 청구서가 날아왔다.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대통령이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을 통해 부당한 합병에 찬성한 ‘원죄’를 배상하라고 해외 금융 투기세력이 청구했고, 1,300억원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구상권을 청구할 지 주목된다. 대상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불법 행위 가담자들과 불법행위로 이득을 취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될 테지만, 고려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소송을 담당해야 할 법무부는 아직 대응 방안을 밝히지 않았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투자자-국가 간 분쟁절차(ISDS)’ 중재결과 정부가 690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정이 나왔다. 배상액에 따른 이자와 법률비용을 포함하면 1,300억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는 지난 20일 이같이 판단했다.

2015년 5월 구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을 발표하자,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를 취득한 후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에 불리하다”며 합병에 반대했다. 엘리엇의 합병 반대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세습작업의 걸림돌이었다. 이 회장이 대주주로 있던 제일모직 가치는 부풀리고, 삼성물산 가치는 낮춰 적은 자금으로 삼성그룹을 장악하려던 세습 시나리오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삼성은 대통령에게 뇌물을 줬다. 대통령은 보건복지부를 움직여 삼성물산 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을 압박했다. 국민연금은 부당한 합병에 찬성했고, 결국 이재용 회장 세습 시나리오는 완성됐다.

불법의 전모는 2016년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검사시절 참여했던 ‘국정농단 특검’을 통해 드러났고 2017년 2월 이재용 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등이 기소됐다. 수사와 기소가 마무리되자 엘리엇은 2018년 7월, ‘정부의 부당 개입으로 손해를 봤다’며 상설중재재판소에 중재를 신청했다. 배상요청액은 7억7천만달러, 약 1조원에 달했다. 중재판정부는 엘리엇 요청액 중 690억원만 인정했다.
 

지난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전자 당시 부회장과 한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제공 : 뉴시스

 

구상권 청구, 한동훈 장관의 입에 주목하는 이유


정부는 구상권 청구가 가능하다. 이재용 회장은 ‘부정한 청탁’과 함께 뇌물을 준 혐의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뇌물을 받고 합병에 찬성한 혐의가 모두 인정된 상태다. 문 전 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 역시 국민연금공단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박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하지만, 구상권 청구 주체가 되어야 할 한동훈 장관의 법무부가 소송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무엇보다 ‘중재판정을 끝까지 다퉈 혈세를 절약하겠다’는 입장을 밝힐 공산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앞서 외환은행 론스타 헐값 매각 사건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 판정 당시 한동훈 장관은 “피 같은 세금이 단 한푼도 유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각오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며 판정문 정정 요청을 했고, 실제 판정문이 일부 정정됐다. 법무부는 판정문 정정에서 나아가 판정 취소 소송도 검토중이다.

문제는 기간이다. 구상권 청구는 법적으로 배상금 지급 이후에 청구 자격이 생긴다. 론스타 헐값 매각 사건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의 판정 취소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양국이 합의한 제3국의 재판부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소송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는 것이다. 그사이 일종의 ‘공소시효’가 종료될 가능성이 있다. 당시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동훈 장관이 말한 배상판정 취소 청구는 공소시효만 흘려버리는 일”이라며 “현상동결, 즉 공소시효 중지 조치와 진상조사, 수사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엘리엇에 대한 배상금 역시 같은 문제에 빠질 수 있다. 국제통상전문가인 송기호 법무법인 수륜아시아 대표변호사는 “‘중재판부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 ‘끝까지 다퉈 혈세를 아끼겠다’는 말은 ‘정부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 그 과정에서 이득을 챙긴 사람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의미와 다름 없다”고 지적했다.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검토해야 할 문제다. 관련자들의 범죄 가담 정도에 따라 구상 액수가 달라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중재판정문 원문 공개가 중요하다. 국제분쟁절차의 판정문은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송 변호사는 “한미FTA 협정을 정부가 위반했다는 것이 중재판정부의 판단”이라며 “누가 어떤 행위로 위반했는지 정확히 알아야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다. 판정문에는 상세 내역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법무부는 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재용 회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판정문에 이 회장 범죄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지, 어떤 형태로 기록됐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한동훈 장관은 21일 국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결정문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고 이후 추가 조치 계획에 대해선 숙고한 뒤 말하겠다”고 했다. 엘리엇 측은 같은날 입장문을 내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검찰 재직 당시 수사 및 형사 절차를 통해 이미 입증했다”며 “중재판정에 불복해 근거 없는 법적 절차를 계속 밟아나가는 것은 추가적인 소송 비용 및 이자를 발생시켜 대한민국 국민의 부담만 가중시키게 될 것”이라고 압박했다.
 

한국 역차별은 어쩌나...


한국 투자자의 역차별 문제도 있다. 구 삼성물산 주주들은 2020년 11월 제일모직과 합병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9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합병비율 산정 당시 주당 1만원 이상 낮은 수준으로 비율을 산정한 부당한 합병이었으나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직권을 남용해 위법하게 개입, 합병계약 승인에 국민연금이 찬성하도록 한 불법행위를 했으니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 소액주주들의 주장이다.

엘리엇의 주장과 일치한다. 하지만 한국 재판부는 소액주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2부는 지난해 11월, “복지부 장관 등의 직권남용 행위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면서도 “국민연금공단이 자유로운 의사로 주주권을 행사했다면 위법행위와 주주의 손해 사이 인과관계는 단절됐다”고 판단했다.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다른 여러 사정을 고려해 주주권을 행사했고, 행사 과정에서 절차를 위반하지 않았다는 판단이다. 때문에 주주로서 의결권을 행사한 절차적 문제가 없기 때문에 다른 주주에게 손해를 끼친 것만으로는 불법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것이 1심 재판부 판단이었다.

1심에서 패소한 주주들은 항소했고 현재 서울고법 민사 14부에서 심리중이다. 최근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단이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소액주주 대리인은 중재재판소 판정서를 확보해 증거로 제출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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