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서울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강제병합 100년 즈음한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2010년 8월 서울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강제병합 100년 즈음한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역사학자로서 통일에 대한 사유를 개척한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가 23일 오후 1시경 별세했다. 향년 90세.

193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강 명예교수는 고려대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다 1967년 모교 교수로 임용됐다. 1980년에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됐다가 4년 만에 복직했다. 이후 근현대사 연구와 저술 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월간 '사회평론' 발행인,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 발행인을 맡았다.

상지대 총장, 국가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장, 청명문화재단 이사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위원장,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내일을여는역사재단과 민족문제연구소는 23일 부고를 통해 “고인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한국민족운동사론』 등 180여 권에 이르는 선구적인 업적을 남겨 한국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에 앞장서는 등 역사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였다”고 기렸다.

빈소는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이다. 발인은 25일 오전 8시30분이며, 장지는 고양시 청아공원이다.

 

〈강만길 선생 연보〉

1933년 10월 2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강재갑(姜在甲)씨와 진야묘치(陳也妙致)씨 사이의 2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남.
1937년 부모님의 열성으로 세는 나이 다섯 살부터 독접장(獨接長)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배움.
1940년 마산의 완월(玩月)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에 입학.
1941년 소학교 2학년 때 제국주의 일본이 ‘대동아전쟁’이라 부른 태평양전쟁 도발.
1945년 국민(초등)학교 6학년 때 8・15 해방을 맞음.
1946년 미군정시기 변경된 학기제에 따라 9월에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에 입학. ‘해방공간’의 극심한 좌우대립 상황을 여러가지 형태로 겪으며 역사공부에 흥미를 가지게 됨.
1950년 중학교 5학년 때 6・25전쟁을 겪음. 8월경 마산이 최전선지역이 되면서 마산 학도의용대에 편입됨. 8월말~9월초 학도의용대 해산 이후 숙부가 살던 부산으로 감. 약 9개월에 걸쳐 부산부두 하역 노동자, 포탄 운반 노동자 생활, 미군부대 ‘체커’ 생활을 하고 1951년 5월 하순 마산으로 돌아감.
1952년 학제 변경으로 마산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졸업함. 마산 근처 한 농촌의 초등학교 임시교사로 취직할 예정이었으나 담임교사가 구해준 대학입학원서를 받아 응시해 합격함으로써 피난지 대구에서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함.
1953년 7월에 휴전이 조인되고 9월에 대학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면서 군입대 전까지 서울생활을 시작함. 이 시기부터 식민사학 극복론에 관심을 가지고 백남운, 이청원, 김한주 등 사회경제사학 계통의 연구들을 접하기도 함. 한편 1954년 학부 3학년 때 홍이섭 교수의 강의를 통해 처음으로 민족주의사학의 신채호를 알게 됨. 은사 신석호 선생의 도움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도서정리 아르바이트를 함.
1956년 현역병으로 군입대. 논산훈련소 교육 이후 광주포병학교에서 측량병 교육을 받음. 동두천 근처의 1군 산하 독립포병부대에서 군생활. 늑막염을 앓게 되어 병원생활 끝에 의병제대함.
1958년 신석호 선생의 부름으로 상경하여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조교로 근무하게 됨.
1959년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 국사편찬위원회 촉탁으로 취직. 식민사학에 의해 잘못 해석된 문제들을 골라 바로잡는 논문집 『국사상의 제문제』 발간 업무를 맡음. 『조선왕조실록』 색인 작업에도 참여함.
1960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무원으로 있으며 4・19‘혁명’을 목격함. 1961년 1월 장성애(張聖愛)와 결혼. 1남2녀를 둠. 5・16 군사쿠데타 발발 이후 ‘국편’ 내의 군 기피 직원들이 사표를 내고 모두 국토개발단에 끌려가게 되어, 촉탁직원으로 취직한 지 2년여 만에 편사주사와 편사 관보를 거쳐 서기관급인 부편사관으로 승진함. 같은 해 고려대학교대학원에서 「조선왕조 전기의 공장(工匠)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 석사학위를 받음. 한국사학회 연구지 『사학연구』(제12호)에 「조선전기 공장고(工匠考)」라는 석사논문을 발표함. 이후 『사학연구』에는 ‘사회경제사적’ 논문이 다수 실리는데, 이들 연구자 중심으로 자본주의맹아론 연구가 본격화됨.
1967년 성균관대학교 학장으로 자리를 옮긴 신석호 교수의 후임으로 고려대학교 사학과 전임교원(조교수)이 됨. 같은 해 한국사연구회 창립에 참여함. 이 시기 식민사학 극복의 일환으로 조선후기 상업자본 발달과 그것의 수공업경영, 즉 ‘상인 매뉴팩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한국근대사를 강의함.
1970년 반년간 교환교수로 일본을 방문. 『역사과학』 등을 통해서 처음으로 북녘의 역사학 연구현황을 접하게 됨. 한편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 일본어 번역본을 읽고, 김산 즉 장지락(張志樂)의 삶에 크게 감명받음.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1930년대 후반기 이후 좌우익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주목하게 됨.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10월유신’을 겪으면서, 역사학이 현실문제를 외면해도 되는가 하는 물음에 부딪힘. 「이조후기 상업구조의 변화」를 『창작과비평』 1972년 여름호에 실으면서 ‘창비’와 인연을 맺음.
1973년 고려대학교 학술총서 제1권으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발간. 이 책이 박사학위논문이 되어 1975년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함.
1974년 창비로부터 천관우의 『한국사의 재발견』 서평을 청탁받음. 이 글에서 처음으로 ‘분단시대 사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함.
1975~76년 『이조의 상인』(한국일보사), 『한국 상공업의 역사』(세종대왕기념사업회) 출간. 성균관대학교 이우성(李佑成) 교수 등과 함께 ‘다산연구회’를 만들어 『목민심서』 번역을 시작함.
1978년 ‘유신’ 이후에 쓴 논설문과 전국역사학대회 기조발표논문 등을 모아 창비에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간행. 이해 여름 해직교수협의회가 계획한 국민교육헌장 반대운동 대학교수 성명 관계로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에서 취조 받음. 개항 후 상공업문제 연구를 위한 자료수집의 목적으로 8월부터 1년간 일본 와세다대학교 파견교수로 생활함. 이 시기 하따다 타까시(旗田포), 카지무라 히데끼(梶村秀樹) 등 일본의 한국사학자들과 만남을 가졌고, 1970년 일본 방문 당시 ‘조총련’계라 만날 수 없던 박경식(朴慶植), 강재언(姜在彦), 이진희(李進熙), 박종근(朴宗根), 강덕상(姜德相) 등 재일 한국역사학자들과도 교류함.
1979년 귀국 후 고려대학교 박물관장을 맡음.
1980년 ‘10・26 박정희살해사건’과 ‘서울의 봄’ 이후 학생회와 교수협의회등이 조직됨. 지식인 130여명 선언과 주요 대학 교수 대표들의 ‘교육민주화 성명’에 참가함. ‘광주민중항쟁’ 이후 성북경찰서로 연행되어, 서울에서의 광주학살 항의집회 때 읽을 성명서 작성과 학생선동강연 등을 계획했으며 김대중으로부터 선동자금을 받았다는 등의 이유로 취조를 받음. 한달 동안의 유치장 생활 후 석방됨. 7월, 이문영(李文永) 김윤환(金潤煥) 조용범(趙容範) 김용준(金容駿) 이상신(李相信) 교수 등과 함께 고려대학교에서 해직됨. 다산연구회 소속 교수 거의 절반이 해직됨. 창비로부터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 집필을 의뢰받고 생활비를 보조받음. ‘해직교수협의회’ 결성에 참여함.
1982년 학문 연구의 대상이 우리 근현대사 쪽으로 기울면서 좌우익 통일전선문제에 대한 관심이 깊어감. 「독립운동과정의 민족국가건설론」 「좌우합작운동의 경위와 그 성격」(1983) 등을 씀.
1983년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한길사) 출간. 일본 토오꾜오여자대학의 초청으로 3개월간 일본 체류. 이해 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민족분단과 통일과정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던 내용이 문제가 되어 12월말 치안국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된 후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됨.
1984년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출간. 2학기 개강과 함께 만 4년 만에 복직, 강단으로 돌아옴.
1985년 해직교수 시절 분단 극복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민족주의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쓴 글을 『한국민족운동사론』(한길사)으로 묶어 출간. 2008년 증보판(서해문집)을 냄.
1987년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장을 1989년까지 맡음. 민족해방운동의 경제적 기초가 되는 식민지시대 민중의 삶을 규명하기 위해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를 창작사(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
1990년 1980년대 후반 시점에서 식민지시대 민족해방운동과 해방 직후 민족통일운동의 역사성을 살펴보고 민족운동으로서의 통일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쓴 글을 묶어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청사) 출간. 2008년 증보판(서해문집)을 냄.
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 당시 고문으로 참여하고,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을 맡음. 월간 『사회평론』 발행인 취임.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화평사) 출간. 2003년 증보판(역사비평사)을 냄.
1994년 지난 10년간의 역사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특히 1930년대 이후 민족해방운동사와 좌익세력의 활동을 대폭 보충해 『고쳐 쓴 한국근대사』 『고쳐 쓴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를 출간함.
1996년 민족해방운동 좌익전선의 활동을 규명하기 위해 성균관대학교 성대경 교수와 함께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을 엮음. 역사에쎄이 『역사를 위하여』(한길사)를 출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통일협회 이사장을 2000년까지, 동아시아 평화・인권국제회의 한국위원회 대표를 2001년까지 맡음.
1998년 청명 임창순 선생이 설립한 청명문화재단 이사로 활동. 임창순 선생 작고 후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그리고 2007년부터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음. 청명문화재단에서 평화통일 진전을 위해 발행한 계간 『통일시론』 편집인 겸 발행인(1999~2001)을 역임함.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을 2000년까지, 정부의 통일고문회의 통일고문을 2008년까지, 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회 위원을 2003년까지 맡음.
1999년 2월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정년퇴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제자들과 공동집필한 『통일지향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역사비평사 2000) 『한국자본주의의 역사』(역사비평사 2000), 조선후기 전공 제자들이 공동집필한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창작과비평사 2000) 등이 함께 간행됨. 인터넷강의를 묶어 『20세기 우리 역사』(창작과비평사)를 출간함. 2009년 김대중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담은 증보판(창비)을 펴냄. 역사기행 『회상의 열차를 타고 — 고려인 강제이주 그 통한의 길을 가다』(한길사) 출간. 2003년까지 한일문화교류회 위원을 맡음.
2000년 역사학의 현재성과 대중성 확립을 위해 역사학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를 창간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을 2007년까지 맡음. 6월 13일 제1차 남북정상회담 수행원으로 북녘땅을 밟음. 이후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등의 업무로 20여차례 남북분계선을 넘나듦. 제주4・3사건위원회 위원을 지냄.
2001년 ‘분규학원’ 상지대학교 총장을 맡아 2005년까지 학교운영 정상화와 민주화를 위해 노력함. 청명문화재단의 『통일시론』 발행이 필진 구성 등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상황에서 일부 예산을 월간 『민족21』 간행비로 지원하기로 하고 2005년까지 그 발행인을 맡음. 청암언론문화재단 이사장을 2005년까지 맡음.
2002년 사론집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창작과비평사) 출간.
2003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국내외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풀어 정리한 『우리 통일, 어떻게 할까요』(당대)와 사론집 『역사는 변하고 만다』(당대)를 출간.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을 2004년 까지 맡음.
2004년 2001년부터 시작된 네차례의 남북역사학자대회를 통해 북측과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결성에 합의하고, 북측 허종호 박사와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결성에 관한 합의서」를 교환함.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위원회 위원장을 2007년까지 맡음. 7월, 평생 모은 장서 1만권 중 정부에 의해 허가된 8200여권을 북녘에 기증함. MBC 통일방송정책자문위원을 2005년까지, 국가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장을 2007년까지 맡았고, 독립기념관 이사를 2007년까지 맡음.
2005년 노무현정부 출범 이후 시작된 과거사 진상규명의 일환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2007년까지 2년 동안 맡음. ‘6・15공동선언 발표 다섯돐 기념 민족통일대축전’(평양)에 남쪽 준비위원회 상임고문 자격으로 참가. 광복60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2006년까지 맡음.
2007년 재단법인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을 설립하여, 계간 『내일을 여는역사』를 간행하고, 한국 근현대사 연구를 북돋우기 위해 매년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 중 선별하여 연구비를 지원하고 있음.
2010년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출간. 『역사가의 시간』으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함.
2013년 『분단고통과 통일전망의 역사』(선인) 출간.
2016년 『강만길의 내 인생의 역사 공부』(창비) 출간.
2018년 『강만길 저작집』(전18권, 창비) 간행.

|저서목록|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3
『이조의 상인』, 한국일보사 1975
『한국상업의 역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6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창작과비평사 1978
『조선시대 상공업사 연구』, 한길사 1983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84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84
『分斷時代の歷史認識』, 宮嶋博史 譯, 旗田巍 監修, 東京: 學生社 1984
『한국민족운동사론』, 한길사 1985
『韓國民族運動史論』, 水野直樹 譯, 東京: 御茶の水書房 1985
『韓國近代史』, 小川晴久 譯, 東京: 高麗書林 1985
『韓國現代史』, 高崎宗司 譯, 京東京: 高麗書林 1985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창작사 1987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 청사 1990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화평사 1991
『韓國近代史』, 賀釗城.周四川.楊永..劉渤 共譯, 北京: 東方出版社 1993
『고쳐 쓴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역사를 위하여』, 한길사 1996
『韓國現代史』, 陳文壽.金英姬.金學賢 共譯,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1997
『20세기 우리 역사』, 창비 1999
『회상의 열차를 타고 . 고려인 강제이주 그 통한의 길을 가다』, 한길사 1999
『21세기사의 서론을 어떻게 쓸 것인가』, 삼인1 999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 창작과비평사 2002
『역사는 변하고 만다』, 당대 2003
『증보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2003
『우리 통일, 어떻게 할까요』, 당대 2003
A History of Contemporary Korea, John B. Duncan trans., Global Oriental 2005
『한국민족운동사론』(증보판), 서해문집 2008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증보판), 서해문집 2008
『20세기 우리 역사』(증보판), 창비 2009
『역사가의 시간』(자서전), 창비 2010

|상훈경력|
1988년 제3회 심산학술상
1992년 제18회 중앙문화대상 학술상
1999년 제13회 단재상
2000년 제2회 한겨레통일문화상
2002년 제6회 만해학술상
2005년 제3회 민족화해상 개인부문
2007년 청조근정훈장

(자료출처-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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