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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식민지·분단…한반도 '굴욕의 20세기' 벗어날 길은?

[김기협-후지이 다케시] 21세기에 민족을 '다시' 생각하라!

안은별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9-27 오후 7:13:55

 

 

2010년 8월 1일부터 만 3년에 걸쳐 546회, <프레시안>의 아침을 장식했던 연재 김기협의 '해방 일기'가 지난달 막을 내렸다. 원고지 1만 6000여 매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그 제목대로 1945~48년 해방 공간에 '타임 슬립'해 집필된 일기였던 연재는 학계와 대중 독자 양쪽에서 화제를 낳았고, 너머북스에서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묶여(2013년 9월 현재까지 6권 출간, 10권 완간 예정)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 김기협은 연재를 마치며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세 번에 걸쳐 실었다. 글 속에서 그는 21세기에는 20세기에 겪었던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길 바란다면서 존재의 가장 큰 측면 중 하나로 '민족'을 강조했다. '해방 일기'라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 이유, 3년간의 대장정에서 건져 올린 생각 속에 왜 민족이 자리하게 되었는지는 다음에 링크된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기협의 '해방 일기' 후기 :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지금, 누가 민족주의를 쓰레기통에 처박나?
"우리는 아직 '근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미국은 진시황, 소련은 흉노…중국의 미래는?"


<프레시안>은 이 글을 토대로, 지난 9월 2일 같은 제목의 강연회를 개최했다. 아울러 자리에는 일본 출신의 한국 현대사 연구자 후지이 다케시(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가 함께 해 김기협과 토론을 펼쳤다.

"한반도에서 민족은 어느 정도 실체를 갖춘 존재"라며 민족 정체성의 회복을 촉구하는 김기협과 "민족이란 개념은 사회정치적 산물"이라며 민족보다 작은 규모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후지이 다케시의 관점은 각자의 논리를 가진 채 평행선을 그었다. 두 사람은 엘리트와 대중, 혁명에 대해서도 생각을 크게 달리 했다. 그 속에서 21세기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개개인의 좌표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날 저녁 마포구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 니콜라오홀에서 열린 강연과 토론의 주요 내용을 지면에 옮긴다. <편집자>

 

▲ 역사학자 김기협. ⓒ프레시안(손문상)


민족주의와 무관하게 자라온 세대의 민족주의

김기협 : 3년간의 '해방 일기' 연재를 마치며, 이 긴 작업을 하게 만든 바탕이 뭘까 생각하다가 '21세기에도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라는 글을 세 번에 걸쳐 실었습니다. 오늘 강연은 이 글들의 핵심 내용을 주제로 삼을까 합니다.

글에서 제 개인사도 적었습니다만,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국어학자 이남덕)와 한국전쟁 중 돌아가신 아버지(역사학자 김성칠,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저자)는 그분들 세대에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투철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부모가 민족주의자면 자식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붕어빵 찍어내듯 단순히 물려받을 수 있는 종류는 아닙니다. 실제로 제 형 두 명도 민족주의와 무관하게 살았고, 저도 이제야 민족주의를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는 민족주의는 부모님이 몇 십 년 전에 생각하던 그것과는 내용이 다를 겁니다. 그건 우리 세대가 갖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조건에 의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 세대'란 1950년생인 저를 포함하여 대략 1940~70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을 말하는데, 아마 이들이 민족주의라는 문제와 관련해 저와 비슷한 조건 속에서 자라왔을 거라고 봅니다.

1940년 이전 출생자들은 한국전쟁 전에 이미 성인이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에 대해 뚜렷한 주관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이후에 성장한 사람들에겐 민족주의에 대해서 생각하고 의논할 수 있는 기회가 심각하게 제한되었죠. 민주주의나 경제 성장 등,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주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즉 저는 타고나길 민족에 대해 애틋한 생각을 가져온 사람이 아니라, 제 딴에는 민족주의와 무관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면서도 결국은 민족주의를 버릴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렀지요.

제가 민족주의를 말하게 된 바탕엔 근대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문명의 흐름'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나름의 공부를 해오면서, 늘 지상과제로 떠받들어지는 근대화, 근대라는 상태가 과연 좋은 것인가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류 대다수를 비참한 상태로 몰아넣는 대형 전쟁 등을 생각해 봤을 때 그것이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근대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무엇이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를 오랫동안 붙잡고 고민해 왔습니다. 몇 년 전에 집필한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게 펴냄)와 <뉴라이트 비판>(돌베개 펴냄)의 바탕과도 비슷합니다. 다만 '해방 일기'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이론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을 접어두고 생각을 잠시 멈추었었죠.

임시 근대와 진짜 근대
 

▲ <밖에서 본 한국사>(김기협 지음, 돌베개 펴냄). ⓒ돌베개

김기협 :

그런데 오히려 접어놓고 지내는 동안, 매달려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길이 나타나는 것 같더군요.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루었다'고 생각한 근대는 사실 임시 근대 혹은 유사 근대였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시대 구분은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사회 조직 원리, 존재 양식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안정적으로 지속된 기간으로 본다는 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는 농업 사회의 안정된 상태가 곳에 따라 짧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천 년 가까이 지속된 것을 이릅니다. 그런데 농업 사회의 적합한 체제가 안정되는 데에는 무척이나 긴 시간과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죠.

즉 농업 사회라는 것도 '농업 기술과 생산력이 이 정도 발달했으니 농업 사회가 더 편하겠다, 그러니 바꾸자' 해서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요. 어떻게 보면 생산력의 급격한 증가라는 변화에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매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중세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도기로 볼 수 있습니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그 정도의 혼란기는 당연히 있을 수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근대 체제'로 이해해 온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가 사실은 산업 사회에 가장 적합한 체제가 아니라 더 안정성 있는 체제를 모색하는 과정의 하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근대는 농업 사회의 다음 단계인 산업 사회가 안정적인 체제로 자리 잡은 시대를 말할 텐데, 근대의 역사가 짧은 동아시아는 물론이거니와 그런 변화를 가장 먼저 겪었다는 서유럽 국가들 역시 지금까지 '안정된 체제'를 이루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던, 즉 탈(脫)근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하죠. 이 말에는 '여태까지 근대를 누렸는데, 이제 한계/모순 직전까지 왔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근대 이후는 무엇이 될지 아직 이름이 붙어 있지는 않지만, 근대는 할 만큼 했고 이제 다음 단계로 간다는 관점이지요.

 

ⓒ프레시안(손문상)

그런데 저는 이 말이 아니라 진(眞)근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까지의 근대를 유사 근대(pseudomodern)로 볼 수 있는 거죠. 산업 사회가 되었다 하더라도 자연과의 관계가 안정되지 않았다면, 인간 사회의 문제도 안정을 취했다고 할 수 없는 거예요. 아직까지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지 않은 자원이 인간을 무한정 기다리고 있다는 환상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자연-인간의 관계가 안정되었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지금까지의 근대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이 70년대입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개정판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에코리브르 펴냄, 2011), 로마클럽 보고서 <성장의 한계> 등 환경과 자원의 한계 문제가 부각되고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이 화두가 됐습니다. 아무리 산업 사회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규모를 지켜야한다는 인식이 공유되기 시작했고, 저는 바로 이때부터 진짜 근대를 향한 노력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탈근대'를 논한다면, 20세기도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지냈는데 지금부터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빠져 있는 셈이니 정말 우울한 이야기가 되겠죠. 거기에 비해서, 여태까지는 산업 사회라는 전망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혼란을 겪었지만 이제는 그런 혼란에서 벗어나 보다 안정된 체제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장래를 바라봄에 있어서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중세의 정상 상태를 위해 겪어야 했던 혼란기와 마찬가지라는 인식을 갖는 겁니다. 우리가 내다버렸던 옛 경험을 진지하게 참고하자는 거지요.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보다 안정된 세계 체제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여태까지의 '소위 근대'를 지배한 원자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유기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할 것으로 보입니다. 원자론적 세계에서 개인은 파편화된 점으로 존재하지만, 유기론적 세계에서 개인의 존재 양식은 공동체-네트워크를 중요한 뒷받침으로 하게 될 거라고 봅니다. 거기서 제가 찾은 것이 민족의 존재입니다.

오늘 여기 오신 분들은 대체로 제가 앞서 말한, 민족주의를 생각함에 있어서 저와 같은 세대에 속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후세대에게, 조금 더 새로운 생각을 키워주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민족을 꾸준히 생각하고 아끼는 것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그것을 잘 누리는 데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자처럼 확실하지는 않아도… 민족은 실재한다?

후지이 다케시(이하 후지이) : '해방 일기'라는 기념비적 작품의 완결을 하면서 대담 상대로 저를 지명해주셔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작업은 이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죠. '자기 전공이니까' 역사에 접근한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지를 고민하고, 함께 고민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화가 결론을 이끌어내지는 못할지라도, 어떤 문제의식을 안겨드릴 수 있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한일 역사가의 대화',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김기협 선생님이 한국사를, 제가 일본사를 말씀드릴 거라고 생각하시면 그 예상은 엇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회 내 다른 위치에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한 두 사람이 한국 사회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면 좋을까를 고민하는 대화로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협 : <프레시안>에서 오늘 대담을 '한일 (역사가의) 대결'처럼 광고해서 약간 불만스러웠는데(웃음), 후지이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제가 이 분을 모신 것은 일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저와 비슷한 시각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뭐랄까, 경계선 주변의 시각을 공유한다고 할까요? 정규 코스를 거친 주류 학자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현대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후지이 다케시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역사비평사

올해 초 제가 선생의 책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역사비평사 펴냄) 리뷰를 했죠. (☞리뷰 바로 가기) 이제 '해방 일기'처럼 틀어박혀서 하는 작업은 그만 두고, 다른 한국 현대사 연구자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 가장 먼저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분이 후지이 선생이었습니다.

후지이 : 오늘 강연 주제가 '21세기에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회라는 것이 무너지고 개인이 파편화된 지금, 어떤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결국 공동체성을 재건해야 한다, 이것이 출발선일 텐데요. 저도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강연 전에 연재하신 세 번의 글에서, 저는 '21세기에 민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끝내 찾지 못했어요.

일단 한국을 민족 사회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시고, '서양 사회의 민족주의는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고, 한국에선 예전부터 역사 속에서 민족이란 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민족은 실재한다'고 주장하셨는데요. 여기에 부연 설명이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윤형숙 옮김, 나남출판 펴냄)를 이야기하셨는데, 사실 이 책만큼 많은 오해를 받은 책이 없습니다. 제목만 보고 앤더슨이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다'라고 주장했다고 오해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저자는 서양인이지만, 그가 여기에서 연구한 분야는 동남아시아의 사례였고요.

앤더슨의 기본 출발점은 1970년대 말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보편적인 공통점을 가진 국가 사이에서 어떻게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가, 왜 거기서 민족주의를 극복할 수 없었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서양 민족주의를 문제 삼은 책이 아니지요. 서양에서 나온 책이기 때문에 우리 실정과 안 맞는다고 이야기되는 것도, 이 책을 둘러싼 오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앤더슨이 말하는 요점은, 민족은 상상을 통해서만 실존한다는 겁니다. 민족이라는 게 눈에 보이면 좋겠는데 볼 수가 없잖아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어느 민족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할 때 존재할 뿐이죠. 그래서 앤더슨은 사람들을 스스로 어떤 민족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다양한 장치가 존재한다고 했고, 거기에서 민족의식이 존재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가령 여기 계신 대부분의 여러분은 '나는 한국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시겠지만, 현행 교육 제도를 폐지하고 신문·방송 매체를 전부 없앤 뒤 50년만 지나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민족의식은 사라질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지금 우리가 민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어떤 효과를 가질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됩니다. 저로서는 '이 사회 구성 속에서 민족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역할을 하기 때문에 민족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라는 논리가 성립되어야만 민족주의를 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글에서는 (한국에서) 민족이 실재한다고 보시기 때문에, 이 점이 빠져 있는 것 같아요.
 

▲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오른쪽). ⓒ프레시안(손문상)


김기협 : 베네딕트 앤더슨의 책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는데, '상상'이란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른 오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말할 때 상상은 나름대로 '실존'의 의미가 있는 상상입니다. 비록 의자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지요. 그런데 '상상해서 만든 거니까 그것은 허구'라는 식으로 해석한 사람이 많았지요.

이런 예를 들어 봅시다. 요즘 같은 시대, 월급쟁이 중산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형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생각할 일은 거의 없어요.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중요할 뿐이죠. 그런데 어떤 사건이 터져서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거래 방식이 아닌 어떤 배려가 필요할 때, 갑자기 형제의 존재가 크게 느껴질 수 있지요.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 가령 1860년대 간도 이주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조선 국왕의 통치를 벗어난 지역에서 '한국인 사회'가 형성된 적이 없었습니다. 17세기 전반에 청나라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그곳에서 조선족 사회를 만들지 못했던 거죠. 중국어를 쓰면서 중국 사회에 동화됐습니다. 기실 그때까지만 해도 외부를 의식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큰 전쟁이나 나야 일반 백성들도 '이민족이 있구나'를 실감했지요. 그런 상태에서는 민족의식이 '잠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까 앤더슨은 '그들이 같은 민족에 속한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게 대체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그것은 그저 상상 속의 관계다' 이런 의미로 그 말을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민족이 의자처럼 확정적인 실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천년 동안, 민족국가를 이루고 살아온 범위의 사람들,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상당히 구체적인 의식이 있다고 봐요.

앤더슨이 책에서 직접 다룬 것은 동남아시아의 경우인데, 지리적으로는 유럽보다 동아시아에 가까운 걸로 보이죠. 그러나 민족의 실체라는 면에서 보면 유럽보다 훨씬 더 멀어요.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인이 오기 전까지 자바 섬 하나 안에만 서로 다른 언어와 종족으로 이루어진 수십 개의 정치조직이 병립해 있었어요. 그것이 동인도회사의 통치라는 공통의 경험을 함으로써 인도네시아라는 국민국가로서 형성된 경우죠.

베트남의 경우 동아시아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되는데, 민족의 형성 과정에서는 차이가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해방 일기' 속에서도 중요하게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바로 가기) 하노이 중심의 북부 베트남과 남부 사이공 지역이 '베트남'이라는 하나의 판도로 들어온 것은 19세기의 일입니다. 한국처럼 오래된 민족국가가 아닌 것이죠. 때문에 조선 반도의 남북 분단의 의미와는 매우 다릅니다. 훨씬 더 복잡하지요.
 

ⓒ프레시안(손문상)


천하체제에서 민족의식이 가능한가

후지이 : 한국이 특정 집단으로 구성된 국가라는 것이 큰 특징이긴 합니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경우인데요. 하지만 민족의식이라는 것은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는 같은 동포다'라고 생각해야 성립되는 것이지 '저 사람들이 이민족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험이 있다고 그 반사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문명 전통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학식과 재산을 가진 엘리트 계층으로서의 선비와 선비 정신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런데 전 이런 질문이 듭니다. 조선의 선비들이 자기 집에서 부리는 조선인 노비와 중국의 문인을 두고, 누가 더 자기와 가깝다고 생각했을까요. 민족주의라는 차원에서 보면 전자겠지만, 실상 대부분은 후자라고 생각했겠죠. 선생님은 한국 민족의 역사로 유교 국가를 설정하시는데, 유교 사상 체계 속에서 민족이 자리할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유교 국가처럼 보편적이고 문명론적인 세계에서 민족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김기협 : 천하체제에는 일차적인 질서의 원리를 보편성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개별성의 보루인 민족에 대해 우선적인 위치를 주지 않았죠. 그러나 이차적인 위치는 주었던 겁니다. '오랑캐'라는 말에는 기본적으로 깔보는 의미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 완전히 문명화된 지역과 문명화가 덜 된 지역의 구분과 그 사이의 관계는 인정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화이부동(和而不同)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었지요.

이런 예를 들어 보죠. 공산주의에서는 원론적으로 민족을 인정하지 않죠. 그런데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 때부터 코민테른의 지침과는 벗어나는 입장을 취합니다. 그런데 저는 민족의 의미를 전면 부정하고 계급만을 인정하는 코민테른의 원론적인 입장에 비해서, 계급을 앞세우되 부차적으로라도 민족을 인정하는 현실적인 노선이 당시 사정에 더 적합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이익을 위해 교조적인 코민테른 노선이 요구되었던 거라고 봅니다.

민족에 부차적인 의미라도 부여함으로써 현실적 운용을 가능케 했던 유교적 천하체제와, '프롤레타리아에게 민족은 없다'는 식으로 인민의 민족 정체성을 부정했던 독단적인 노선의 사례를 이런 차원에서 비교해 볼만 하다고 생각해요.

후지이 : 엄밀하게 말하면 코민테른에서도 계급만 앞세운 것은 30년의 짧은 시기에 불과했습니다. 그 외엔 기본적으로 각국의 민족주의를 지원해야한다고 봤고, 결국 연합전선에서 다시 민족전선으로 돌아갔지요. 현실적인 정황상 계급의식만으로는 나치즘이나 파시즘에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각국 공산당이 각국 단위의 활동을 해야 했던 거죠.

어쨌든 저는 이건 유교 체제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화이질서도 공간적인 개념이지요. '오랑캐'가 하나의 민족 단위라는 발상도, '어떤 민족이기 때문에 어떻다'라는 발상도 없었으며 그 위치는 얼마든지 변경이 가능한 것이었으니까요. 천하체제 속 주변부에서 '상대적으로' 민족이 고정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다소 결과론적인 이야기 아닐까요?

김기협 : 그건 여기에서 쉽게 좁히기 힘든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도 '나란히' 의견을 드리겠습니다. 코민테른이 통일전선을 권장한 것은 대개 전술·전략적인 동기로 해석하지요. 1940년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스탈린과 티토가 맞서는 사태로 이해해 보면, 티토의 입장이 표준적인 민족주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보편성 일변도로만 봐서는 안 된다. 지역 사정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이와 비슷한데요. 저는 다른 모든 질서의 원리에 앞세워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도 천하체제도 민족의 존재를 인정했을 때 현실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처럼, 21세기에 형성되어 갈 세계 체제가 있다면 일차적으로가 아니라 '부차적으로' 민족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차원에서의 민족주의를 말하는 겁니다.

엘리트가 문제인 이유는 무엇인가
 

ⓒ프레시안(손문상)

후지이 :

그렇다면 화제의 중심을 옮겨야겠네요. 민족의 '부차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유교 국가라는 전제에서 다시 출발해 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선비 정신'을 강조하셨는데요. 과연 과거의 선비들이 고민한 천하의 법이 미치는 범위가 어디까지였을까요. 아까도 선비가 노비와 중국 문인 중에 누구를 더 가깝게 여길까 하는 질문을 던졌는데, 선비란 엄격한 신분제가 작동하는 가운데 존재할 수 있었던 거잖아요? 당연히 노비보다는 중국 문인을 생각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테고, 따라서 노비까지 걱정했을까 하는 의심이 남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사고방식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한 공공성의 모델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지요.

선생님이 선비 이야기를 꺼내신 이유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부재를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과연 제대로 된 엘리트가 없어서 한국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걸까요? 엘리트들만이 사회를 주도할 수 있다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고민은 이 사회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편화되었다는 진단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 한국의 경우 구체적으로 이명박 정권 5년을 거치면서 지친 사람들에게 구세주를 바라는 심리가 생겼고, 그것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며 지금의 높은 지지율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렇게 봤을 때 이 사회를 낫게 만들어 줄 존재로서의 엘리트에 대한 염원은, 박근혜 지지와 그 뿌리를 공유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대중의 힘으로는 사회를 구현할 길이 없으니 선지자적 엘리트가 나타나서 구해주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아닐까, 좀 위험하다고 느껴집니다.


김기협 : 그 둘이 어떻게 뿌리를 공유하는지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우리 사회는 관념의 지배를 많이 받는 경향이 있어요.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관념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현재보다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잘 못 하는 거예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요. 현실에 대해 당당히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는 정치·사회 체제를 오래 겪었기 때문이지요.

엘리트라는 말만 해도, 평등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서 반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의 상황에 얽매이지 말고 뭔가 한차례 털어야 할 필요를 느끼는데요. 한국 사회에서, 아니 동아시아 사회에서 엘리트의 존재는 꾸준히 강조되어 왔어요. 엘리트를 가르는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학식과 재산이 일차적이겠지요.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역사 속에서 꾸준히 확대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대중을 무시하지 말라고 하는데, 무시 받는 게 더 편한 사람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잡한 생각을 싫어하고, '싸고 맛있다'는 단순한 이유로만 미국산 소고기 선택 여부를 결정하고 싶어 합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까지 그 뒤에 숨은 위험성이나 정치적 문제들에 신경 써야 할까요? 전 그런 것들을 견제하는 역할은 엘리트에게 맡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거기서 자유로워야 좋은 세상이라고 봐요.

요컨대 특권을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책임을 느끼는 존재로서 학식을 가진 엘리트들은 사회의 불신에 대해서 남들보다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서구에도 젠틀맨십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불리는, 엘리트 계층의 역할에 대한 전통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평균 이상의 학력과 소득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노력이 아주 취약해요.


후지이 : 그런데 실제로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것은 엘리트 계층이 아니었습니다. 4.19 혁명도 흔히 대학생이 주도했다고 생각하지만, 먼저 봉기한 것도 그렇고 최전선에서 희생된 것도 그렇고 대부분이 중·고교생과 길거리의 구두닦이 아이들 등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지요. 바꿔 말하면 '미국산 소고기를 문제없이 소비할 수도 있었던' 그 사람들이 사회를 바꾸는 역사가 있어 왔고, 그것들이 겨우겨우 한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선생님께서 너무 한쪽으로만 한국 사회를 보시는 게 아닌가 싶고, 무엇보다 '대중을 먹여 살려주기 위해 엘리트가 제대로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발상이야말로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박정희를 신화로 만들어버린 원동력 아닐까요? 대학생들에게 유신체제를 물으면 민주주의를 파괴했으나 경제 성장은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양비론이 나온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 사회가 벗어나야 하는 흐름과 맞닿아 있다고 보는데요.


김기협 : 4.19 혁명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통념을 다시 점검해봐야 할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기본 전제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보수주의자이고 혁명을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5년 전 <뉴라이트 비판>을 쓰면서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정치적 보수주의자라고 명시를 했는데요. 곧이 들어주는 분들이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논평하는 사람으로서 제 입장은 여의도나 청와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거리나 광장의 정치에 대해서도 줄곧 분명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등 혁명을 겪은 시대를 살펴보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이 불쌍해요. 저는 저와 같은 시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런 걸 안 겪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엘리트의 역할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는 이유 중 하나도 그겁니다. 사회를 완전히 뒤집기보다는 조금 정의롭지 못하더라도, 약간 불평등하더라도 견딜만한 정도의 일들을 겪도록 하면서 안정된 상태를 제공해 주면, 그 안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인간성을 발현하고 자기 분수를 찾아 자기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죠. 그래서 제 딴에는 공부를 하기도 하는 거고요.

 

ⓒ프레시안(손문상)


우리가 회복해야 할 공동체성은

후지이 : 자기 분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자기 분수를 누가 정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부분 위에서 정해주는 대로입니다. '넌 여기 있어야 한다'고요. 자기 스스로 제 분수를 정해서 '난 이렇게 살아야겠다'라고 결정한다면 문제가 없겠죠.

이른바 자유-속박의 문제에서는 저 역시 무조건적인 자유보다는 어느 정도 속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자유는 가능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적절한 형태와 수준의 속박'이라고 할 때 그 적절성을 누가 정하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신자유주의는 1970~80년대 복지 국가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등장했는데, 그 문제란 누구는 복지를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는 걸 관료들이 결정하는 시스템에 있었습니다. 즉 관료제를 비판하면서 자유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시간이 지나서야 그게 '자본의 자유'라는 것을 사람들도 알게 되었지만, 그런 주장이 먹히는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그 당시의 복지 국가는 '사람의 분수'를 관료제가 정해주는 체제였으니까요. 어쨌든 신자유주의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지만, 그것을 나오게 한 그 이전의 체제로도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도 자명하지요.

김기협 : 복지라든가 자유가 극단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건 후지이 선생이나 여러분 모두 동의하시겠죠. 말씀하신 대로 각자 분수의 수준을 누가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거기에는 고려해야 할 것들이 참 많죠. 정말로 복잡한 시스템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시스템이 구축되고 운용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반 조건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가령 4대강 사업에 수 십 조원의 돈을 쏟아 붓는다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그 예산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데 대해 많은 의혹과 불만을 가지고 있겠죠. 그런데 그게 우연히, 갑자기 벌어진 일인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이 행해질 수 있는 기반 조건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복지를 어느 수준으로 하느냐를 논하기 전에, 그것을 결정하는 시스템에 어떤 요소들이 들어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후지이 : 저는 거기서 비로소 공동체가 중요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수준'을 합의해 정할 수 있는 단위로서 말이죠. 이는 '그게 민족이어야 하는가'라는 비판적인 질문과 함께입니다. 훨씬 더 작은 단위의 공동체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지방 자치의 정상화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지방 단위로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면 현재의 폐해를 많이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선생님은 혁명을 싫어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게 혁명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면, 전 혁명은 그 자체에 대해 찬반을 논할 수 없는 종류라고 답하겠습니다. 혁명은 피하려 한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읽으려 해도 읽을 수 없는 사회 현상입니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죠. 한국 사회도 그렇게 튼튼하지 않아서, 체제가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징후를 곳곳에서 볼 수 있어요. 그래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일 것이고, 그럴수록 공동체성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진정한 공동체성을 위해서는 민족 단위로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더 작은 공동체성과 신뢰 관계를 제대로 구축한다면, 파국적 사태 속에서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가 생기지 않을까요.
 

▲ <해방일기 1>(김기협 지음, 너머북스 펴냄). ⓒ너머북스

김기협 :

저는 우리 민족처럼 민족국가로 오랜 시간 존재해온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민족 정체성'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따라올 수밖에 없는, 어느 정도 실체를 가지는 것으로 봅니다. 계급 정체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전개될 거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전 세계 모든 프롤레타리아와 연대하는 프롤레타리아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고, 전 세계 모든 자산가와 연대하는 신자유주의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 다 골치 아프다며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어떤 정체성이든 누구나 가질 수 있으며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다만 그런 여러 층위의 정체성 중의 하나로서, 대규모 공동체인 (실재하는) 민족의 정체성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사회에 좋은 점이 많다는 게 저의 주장입니다.


후지이 : 결국 오늘 이야기를 좁힐 수는 없었습니다.(웃음) 저는 국민국가 시스템이 온존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민족이 돌출되어 문제가 되는 거라고 봐요. 하지만 그 모습이 당위적인 근거를 갖고 있는 건 전혀 아니지요. 혁명을 통해 전혀 다른 시스템이 생겨날 수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민족 외에 다른 공동체가 더 중요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공동체에 대해 좀 더 열린 자세로 생각하길 바란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안은별 기자(=정리)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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