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광경은 계몽주의 재난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불과 10여년 전, 인류사회 전체가 생생하게 목격하며 다 함께 종말론적 상상을 하도록 만들었다.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로 인하여, 일본사람들은 예외 없이 심각한 트라우마를 앓는 집단이 되었다. 후쿠시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키나와의 주민들이라 해서 덜하지 않다. 실로 안쓰러운 일이지만, 일본사람들과 일본열도의 숙명이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실은 이는 인류사회 전체의 숙명이고 아픔이다. 열도가 형성되고,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 지속된 현상으로, 언제든, 누구에게든, 어느 지역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일본이 2차대전 패망의 결과, 그 폐허 위에 이룩한 문명은 어느 모로 보나, 사뭇 기적적이다. 한편으로는, 두 가지 점에서 위태롭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하나는 아무리 높은 탑을 튼튼하게 쌓아올린다 하더라도, 동일본 진재(東日本 震災)의 비극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열도인들의 그 심리가 타자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공격성으로 나타날 가능성이다.
공포와 공격의 함수관계
작은 일에도 두려워서 벌벌 떠는 소심한 겁쟁이들이 뭉치면, 억눌려 지내던 시간 동안, 높은 퇴적층처럼 쌓인 억압은 언제든지 타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돌변할 수 있다. 두려움과 불안이 집단화되면, 외부에 대한 공격성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공인된 이론이다. 그 집단 안에서는, 개인의 자아와 책임감은 약화된다. 평소에는 결코 하지 못할 행동을 저지른다. 전쟁 중에 적지(敵地)를 점령한 부대원들이 폭력집단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흔한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 아군의 피해를 과장한 정보가 집단에 공유되면 그 메시지를 명분 삼아 야만성이 점차 고조된다. 메시지에 독한 ‘양념’을 집어넣으면 만행은 최악이 된다.
신적인 권위의 천황을 받드는 병력은 그 어떤 악행도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쉽고 편하게 합리화한다. 제국은 그 만행들을 표창한다. 이 언어도단의 전도현상(顚倒現狀) 앞에서, 정상적인 심리상태와 올바른 판단력을 유지하거나 발언할 수 있는 사람들은 희소하다. 그들의 제안은 채택되지 않고 도리어 보복을 당한다. 죽거나, 정신병자가 된다. 양심의 편에 서는 것은 그런 일이다.
심리학이론 중에 공포-공격 가설(Fear-Aggression Hypothesis)이 있다. 자연재해나 사회적 불안이 길게 지속되고 오래 누적되면, 집단의 상층부는 이를 외부를 공격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 휘하 조직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성을 야만적으로 발휘하며 역사에 피묻은 족적을 남긴다. 일본은 기나긴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그 당사자였다.
500년 전, 이순신과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싸움은 건너뛰겠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1876년)부터 1945년 항복할 때까지, 일제가 조선과 중국, 그 민초들에게 자행한 만행들만으로 국한하더라도, 일제는 150년 동안, 필설로는 형언키 어려운 잔혹함을 실행했다. 그렇게 천인공로할,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질렀던 당사자는 아직도 당당하다. 큰소리친다. 오늘의 일본 우익은 그 ‘잔인 유전자’와 언제든 무기산업과 무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굴지의 산업경제력을 믿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이종자, ‘대륙낭인’
나는 몇 년 전, 한상일 교수의 ‘일제의 대륙팽창과 대륙낭인’이라는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으면서도, 속으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대륙낭인’(大陸浪人)이라는 특이한 젊은이들이 비공식 신분으로 만주와 시베리아, 조선과 중국을 종횡무진하며 활약했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종종 거명되는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1874~1937)다. 이 사람은 불과 20대 초반 나이에 대륙낭인이 되었다.
그는 서른 살도 되기 전에, 1901년 도쿄에서 흑룡회(黑龍會)라는 대륙낭인 모임을 창설했다. 황제나 다름없던 이토 히로부미와 거래도 하고, 그를 너무 온건하다, 며 공개비판을 하기도 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파견으로 일본 수뇌부가 격노하여 고종을 압박할 때, 우치다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며, 강경론을 주도했다. 조선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동학군들을 만나 협상도 하고,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어야 한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펼쳤다. ‘러시아 망국론’은 그의 저작이다. 중국쪽으로는 일찍이 쑨원(孫文)과 절친이 되어 신해혁명(1911년) 때도 도움을 주었으며, 손문이 죽을 때(1925년)까지 혈맹으로 지냈다. 이때는 ‘지나관’(中國觀)을 집필했다.
일본에서는 그를 학자로 분류한다. ‘대륙낭인’으로 활동한 일본의 극우 우국지사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비용을 받지 않았다. 이권에 개입하여 사업도 하고, 거기서 번 돈으로,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으면서 일본에 도움이 되는 일을 알아서 하면서 뛰어다녔다. 21세기 일본 우익 강경파들은 100년 전, 그 ‘대륙낭인’의 정신을 착실하게 잇고 있는 후손들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카이치 사나에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대륙낭인들은 개인의 정치경제적 성공과 일본의 대륙지배가 목적이었고, 우리 독립군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 나라를 되찾는 것이 목표였다.
초토화작전과 삼광작전
간도참변
일제가 공식적으로 ‘초토화작전’(焦土化作戰),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는 표현을 문서에 남긴 것은 중일전쟁(1937년) 이후라고 하지만, 훈춘사건(일제가 현지 마적패와 짜고 자국 영사관을 공격하여 10여 명의 자국 요원들을 살해하고, 우리 독립군들이 공격한 것으로 조작한 사건) 이후, 간도에서 자행한 무차별적 살육과 그 잔혹함의 내용은 전형적으로 삼광작전(三光作戰)에 의한 초토화였다.
일제는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6개월 넘도록 북간도 전역의 한인촌 초토화작전(焦討化作戰)을 펼쳐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렀다. 이 기간 동안, 3만 명 이상의 우리 동포들이 살해되었으며, 요인들 150명을 검거되었다. 가옥 3,500채, 학교 60여 개소, 교회 20여 개소, 양곡 6만 석을 소각했다. 현지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서방언론에 제보하여 이 지옥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역임한 백암 박은식 선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겨놓았다.
“아아! 세계민족 중에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 겨레처럼 남녀노유(男女老幼)가 참혹하게 도살당한 자 있을 것이오. 역대 전쟁사에서 군사를 놓아 살육 약탈한 자 수없이 많지만, 저 왜적처럼 흉잔포학(凶殘暴虐)한 자는 들은 적이 없다.
저 왜적이 우리 서·북간도의 양민 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일찍이 있었던 일이겠는가. 각처 촌락의 인가·교회·학교 및 양곡 수만 석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노유를 총으로 죽이고 칼로 죽이고, 생매장하고 불에 태우고 결박하여 죽이고, 주먹으로 때려죽이고 발로 차서 죽이고 찢어 죽이고, 불에 태우고 가마에 삶고, 해부하고 코를 꿰고 옆구리를 뚫고 배를 가르고, 머리를 베고 눈을 파내고 가죽을 벗기고, 허리를 베고 사지를 못 박고 수족을 잘라서, 인류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저들은 오락으로 삼아 하였다.
조손(祖孫)이 함께 죽고, 혹은 부자가 함께 참륙(斬戮) 당하고, 혹은 남편을 죽여 아내에게 보이고, 형을 베어 아우에게 보이며, 혹은 상인(喪人)으로 혼백(魂魄) 고리를 가지고 난을 피하다가 형제가 함께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산모가 기저귀에 싼 어린애를 품고 화를 피하다가 모자가 같이 명을 끊었다. 그밖에 허다한 일을 종이에 다 적을 수 없으며, 우리와 화양(華洋) 각처의 조사보고도 그 참상을 다 말할 수 없었다.”
이를 간도참변이라고 부른다(*華洋:중국과 서양. 동서양이라는 뜻).
삼광작전은 살광(모조리 죽인다, 殺光), 소광(모조리 태운다, 燒光), 창광(모조리 강탈한다, 搶光)의 단계를 거쳐 초토화한다는 일제의 전쟁기술이었다. 서양학자들은 이를 학술용어로 ‘Scorched Earth Policy’라고 쓰고 있다.
관동대지진
관동대지진(1923년)은 공포가 공격성으로 돌변한 대표적인 사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는 순식간에 살육의 명분이 되었고, 군과 자경단은 조선인 5천 명을 색출해 죽였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던 함석헌은 이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함석헌은 이를 우발적 현상이 아니라, 일본사회에 깊고 짙게 뿌리내려 있는 국가주의와 집단적 불안이 결합하여 제노사이드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했다.
이와 같은 ‘집단적 불안의식’은 일본열도에 내재되어 있는 자연환경의 특성과 유관하다. 그는 훗날 자연의 붕괴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의 마음”이었다고 갈파했다. 연약한 인간들이 거대한 공포 앞에서 연대하지 않고, 증오와 살육으로 돌진했다. 관동진재는 일본 사람들에게 잠재된 공포심이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집단적 잔혹성으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원형적 사건이었다.
난징대학살
일제는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난징(중국 남경)의 민간인과 비무장 병사들 합하여 30만 명을 죽였다. 2만 건이 넘는 강간을 저질렀다. 피해자들 안에는 어린이와 노인이 포함되었다. 도시 안의 가옥들 대부분과 상점들은 약탈당했고, 불태워졌다. 간도참변의 규모에 비하여 10배다. 잔혹함의 내용은 동일하다. “지옥 같은 폐허”로 기록되었다.
대만 이민자 부부의 딸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아이리스 장(1968~2004)은 1984년에 난징사건에 관한 사진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잔혹한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난징의 강간’을 썼다. 1997년 출간 후, 일본의 우익세력과 극우민족주의자들로부터 지속적인 협박과 위협을 받았다. 일부는 ‘난징대학살’ 자체를 부정하며 그를 공격했고, 살해위협과 모욕적인 편지를 했다. 그는 끝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진실을 밝힌 대가였다.
위에 서술한 살육의 역사는 극히 일제가 저지른 만행들의 극히 일부다. 일제의 만행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하여 단 한 가지 점에서 다르다. 나치는 인간을 숫자로 환원해 제거했다. 살육을 산업화했다. 일제의 폭력은 달랐다. 일본군은 피해자를 끝까지 인간으로 남겨둔 채, 그 인간성을 파괴했다. 참수, 고문, 강간, 생체실험 등은 단순한 군사행위가 아니라 제도화된 잔혹성이었다. 이는 살해가 아니라, 인간을 부수는 일이었다. 존재를 붕괴시키는 악마의 파괴공학이었다.
나는 일본열도의 자연재해가 일본인의 잔혹성을 결정지었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끝없이 반복되는 공포가 사회 전반에 축적되었고, 그것이 군국주의와 결합했을 때 외부를 향한 무제한적 공격성으로 분출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 폭력은 생존의 논리가 아니라, 공포를 외화하는 방식이며, 오랜 전통이었다. 더욱 심각하고 우려되는 것은 그 특징은 항구적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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