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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생태적 자아와 생명권

황대권 문명전환

bau10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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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명권’의 일개 구성원일 뿐, 겸손해야

인간 자체가 다른 생명체와의 협동의 산물

생태적 자아>공동체>생명지역>생명권으로 확장

생태계 총체적 위기 몰고 온 서구 제국주의 발상

생명 그물망 ‘생명권’, 인간지성의 그물망 ‘지성권’

‘지성권’(노오스피어)의 주체, 인간인가 AI인가?

황대권 생명평화운동가 '야생초 편지' 작가

불교에서는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고 말하지만, 관계적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 크게 네 개의 범주에 둘러싸여 세상을 살고 있다. 그것을 도식화하면, “나 – 지역 – 국가 – 국제사회”로 그려 볼 수 있다. 나 개똥이는 개인이면서 동시에 종로구 유권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세계시민으로서의 자각은 별로 없다. 이것이 지난 세기까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나’의 정의였다. 이 범주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국가’이다. 왜냐면 국가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국민이라면 무조건 지켜야 하는 6개의 의무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국제사회가 국가를 단위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의 국가들이 크건 작건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지내면 좋으련만 꼭 깡패 같은 국가가 나타나 세상을 자기 멋대로 주무르기 때문에 나라마다 국가를 강화하기 위해 국민을 달달 볶아댄다. 전통적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다 이 범주에 든다. 생명평화 철학에 의하면 세상의 평화를 위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어야 하는데, 어떤 제국주의 국가도 먼저 평화를 실천하는 일은 없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촌부가 평화를 실천한다고 해서 미국이 평화 정책을 펴는 일은 없다. 설사 미국민의 90%가 평화를 원한다고 해도 국가 정책을 좌우하는 엘리트 그룹이 전쟁을 원하면 전쟁으로 나간다.

생태적 자아>공동체>생명지역>생명권으로의 개념 확장

이래 가지고는 세상이 좋아질 리가 없다. 힘없고 가난한 나라는 영원히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부자 나라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을 갈궈댈 것이다. ‘나’를 규정하는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기존의 사회학적 관점 대신 생태학적 관점으로 ‘나’를 규정해 보자. 나를 둘러싼 동심원의 중심에 생태적 자아가 있고 순차적으로 공동체, 생명지역, 생명권으로 자아가 확장된다.

이를 그림으로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나는 특정 공동체에서 산다. 그 공동체는 인간 사회와 자연 생태계, 그리고 그 안에 사는 동식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내가 몸 붙여 사는 공동체의 모든 생명들과 함께 살아간다. 공동체를 넘어선 자연생태계는 생명지역(Bioregion)으로 범위가 확대된다. 생명지역은 생태적 조건이 동일한 지역을 말하는데 이는 주로 유역(流域) 또는 수계(水系 watershed)로 구분된다. 예컨대 메콩강 유역은 동일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지만 무려 6개의 국가(중국,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를 관통한다. 같은 강에 붙어사는데 강 이쪽은 캄보디아라고 부르고 강 저쪽은 태국으로 부르면서 서로 적대시한다. 중국은 메콩강 상류에 댐을 수십 개나 지어 하류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이 메콩강 상류에 댐들을 건설하면서 수량이 줄어든 메콩강 바닥이 말라 갈라지고 있다. 연합뉴스

왜 인간은 강에 사는 메기나 붕어처럼 서로 어우러지지 못할까? 왜 인간은 강 위를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새처럼 살지 못할까? 생명지역에 국가라는 인위적 경계는 무의미하다. 오히려 국경선에 설치한 철조망과 방어벽이 생물의 이동을 가로막을 뿐이다. 나를 생명지역에서 노니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생각하면 세상의 평화는 바로 실현될 것이다.

 

남북 미주와 카리브해 등을 미국이 패권적 지배권을 지닌 '서반구'라 선포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은 2026년 2월 20일,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그의 관세 정책 대부분이 위헌이라고 한 대법원 판결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2026.2.20.EPA 연합뉴스

생태계의 총체적 위기 몰고 온 서구 제국주의 발상

세계의 모든 생명지역을 합해 생명권(Biosphere)라고 부른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와 그린란드를 협박하면서 서반구를 미국의 독점적 이해가 걸린 앞마당이라고 공표했다. 서반구(西半球·Western Hemisphere)는 지구를 본초 자오선(경도 0°)을 기준으로 동서로 나눌 때 그 서쪽에 해당하는 절반을 가리킨다. 미국의 땅덩어리가 아무리 크다 한들 지구 반쪽이 자기 것이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정신병자나 하는 말이다. 세계를 이렇게 단순한 지리 용어로 인식하면 땅 따먹기식의 발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서구 백인들이 세계를 인식하는 기본 틀이 되었다. 이 인식에 따라 서구는 지난 몇백 년 동안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고 20세기 들어 더 점령할 땅이 없자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작업은 서구 기독교가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지속적으로 해 온 일이었으나 그 영역이 종교에 국한되어 있고 식민지 독립과 함께 자신들의 원래 종교를 회복하면서 효력이 의심스러워졌다. 게다가 제국의 본토에서는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디지털 혁명에 힘입어 인간 지성의 모든 영역을 서구가 다시 장악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초거대 IT 기업들이 이 작업의 선두에 서 있다.

이제 다시 얘기를 동심원의 중심인 ‘생태적 자아’로 돌아가자. 나를 사회적 관계로만 규정하면 힘센 놈이 지배하는 정글 사회에서 약자는 영원히 고개 숙이고 살아야 한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다 삼권분립이다 인권 보호다 해서 온갖 장치를 마련했어도 기득권 카르텔이 지배하는 세상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세상에 마치 인간만 사는 듯 다른 생물종과 자연생태계를 쓸모있는 도구나 자원 정도로 여기고 있다. 자기들 눈으로 쓸모없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파괴하거나 없애버린다. 그 결과가 생태계의 총체적 위기이다.

심지어 미국은 국제사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공들여 구축한 온갖 기후협약과 국제평화를 위한 기구로부터 전면적인 탈퇴를 선언했다. 기후위기 대처와 평화를 위한 국제 협력은 돈만 처들어갈 뿐 다 거짓이라는 것이다. 미국과 서구는 잘못된 개념에 기초한 문명이 어떻게 세계를 망치고 몰락하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이다.

 

2월 15일, 파나마시티의 신타 코스테라 거리에서 너구리와 고양이가 관광객들이 던져 준 음식을 먹고 있다. 2026.2.15. AFP 연합뉴스

인간 자체가 다른 생명체와의 협동의 산물

자연에서 태어나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은 마찬가지 운명의 다른 생물종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가 몸담은 자연생태계 자체가 뭇 생명의 협동과 조화의 산물이다. 예컨대 생명 활동의 절대 조건인 산소는 수십억 년에 걸친 광합성 생물의 활동 결과인데 오늘날 대표적 광합성 군집인 숲을 대량 파괴하면서도 뻔뻔하게 기후위기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태도인데 도끼로 제 발등 찍는 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인간 자체가 다른 생명체와의 협동의 결과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은 태생부터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적 존재’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생명 현상 자체가 ‘공동체적 진화의 산물’이다. 이 장구한 공동체적 진화의 여정을 음미해 보는 것만으로 자신과 이웃(동식물 포함)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한번 고요한 방안이나 나무 그늘에 앉아서 깊은 사유의 늪에 빠져보시길 바란다. 내 몸에서 출발해 이웃과 마을을 넘어 생명지역에서 노닐다가 지구 생명권과 하나가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이것은 어찌 보면 내 몸의 확장이기도 하고, 지구 생명권의 축소(내 몸으로)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 최초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에서는 이를 두고 “人中天地一”이라고 표현했다. “천지가 내 몸에 들어와 하나가 되었다, 또는 나는 천지와 더불어 하나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나에 대한 ‘생태적 자아’의 깨달음이야말로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한 출발이자 종착점이다. 불행히도 지금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 가운데 이러한 깨달음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정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초강대국 미국의 지도자인 트럼프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한 인물이다. 이런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한 인류 문명의 멸망은 피할 도리가 없다.

 

2월 21일, 인도 구와하티 외곽의 한 논에서 인도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 2026.2.21. AP 연합뉴스

생명 그물망 ‘생명권’, 인간지성의 그물망 ‘지성권’

생명권(生命圈)의 개념을 이해했으면 이제 그를 넘어선 조금 다른 범주를 알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에 앞서 단어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영어 ‘바이오스피어’(Biosphere)는 한국의 거의 모든 매체에서 ‘생물권’으로 번역하는데 나는 ‘생명권’으로 쓴다. 이는 ‘바이오리전’(Bioregion)을 ‘생물지역’이 아니라 ‘생명지역’으로 번역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생물은 물질적 느낌이 강한 자연과학 개념이다. 그에 반해 생명은 물질이기는 하지만 거기에 정신 또는 영적인 움직임이 느껴진다. ‘살아 움직이는 신령한 물질 또는 기운’의 의미가 들어있다. Bioregion이나 Biosphere나 모두 살아있는 생명 또는 그에 해당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생물보다는 생명이란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본다.

생명권이 살아 있는 생명의 그물망이라면 보이지 않는 인간 지성의 그물망을 ‘노오스피어’(Noosphere, 지성권智性圈)라고 부른다. 노오스피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가톨릭 신부이자 고생물학자인 테이야르 드 샤르댕이다. 그는 창조론과 진화론을 결합한 가톨릭의 이단아로 인간 지성이 언젠가는 초연결망을 만들어 궁극적인 한 점(오메가 포인트)으로 수렴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넷을 꿈도 못 꾸던 시절인 1920년대에 이런 대담한 주장을 했으니 정말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들어 전 지구적 인터넷 연결망에 AI까지 결합하여 인류는 전대미문의 초연결 사회에 진입했다. 문제는 인간 지성의 초연결망인 노오스피어의 주인이 인간일지 아니면 인공지능일지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든 인간을 형상화한 일러스트. 로이터 연합뉴스

‘지성권’(노오스피어)의 주체, 인간인가 AI인가?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 노오스피어의 운영 주체가 인간이건 인공지능이건 안전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운영 주체가 만약 트럼프 같은 폭군이라면 차라리 인공지능을 그리워할 것이다. 인간의 불완전성을 염두에 둔다면 인공지능이 더 안전할 수도 있다. 엉터리 재판을 경험한 사람들이 AI 판사 도입을 주장하듯이 말이다. 만약 인공지능에 안전장치를 장착할 수만 있다면 인공지능이 더 안전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비교적 잘 아는 인공지능에 바둑 AI가 있다. 바둑 AI는 이미 오래전에 인간을 넘어섰다. 인간 최고수가 인공지능에게 두 점을 깔고 두는 수준이다. 가로세로 19줄이 교차하여 만든 361개 착점에 놓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거의 무한대이기 때문에 바둑 AI는 계속 진화할 것이고 인간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바둑 AI의 착점을 보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둘 수 없는 수를 곧잘 둔다. 모든 경우의 수를 종합한 결과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간단한 바둑의 규칙과 상대를 이겨야 한다는 두 가지 목적만 주입하면 인공지능이 바둑판을 갈아엎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노오스피어를 관장하는 현존 최고의 인공지능에게 지구생태계를 보전해야 한다는 목적을 주입하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몇몇 국가들은 그린 인공지능(green AI)을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이 인공지능을 악용하려 할 때 이를 누가 통제할 수 있을까? 결국,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해도 인간이 문제로 남는다.

 

2025년 8월, 팜 비치 동물원 및 보존 협회가 제공한 사진. 생명을 위협하는 눈 감염을 앓고 있는 멸종 위기종 흰코뿔소가 짐바브웨 불라와요에서 먹이를 먹고 있고, 동물 행동 전문가들이 그 뒤편에 모여 있다. AP 연합뉴스

인간중심적인 ‘노오스피어’ 개념의 한계

노오스피어 개념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유용하기는 하나 나는 제한적으로만 인정한다. 그 이유는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개념이고 오로지 인간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이다. 노오스피어에 과연 비인간 지성이 차지하는 영역이 있을까? 나는 지성권에 비인간 존재의 지성이 상당히 차지하리라 추측한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인간의 지성이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비인간 지성이 훨씬 뛰어난 경우가 많다. 그것을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노오스피어 개념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생명권 자체에 이미 모든 생명의 지성이 작용하고 있다. 그 생명권의 당당한 일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생태적 자아’를 깨우쳐야 한다.

일부 학자들은 디지털 문명이 가져온 초유기체적 지성이 인류 진화의 새로운 단계를 열 것으로 예측하지만, 나는 그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초유기체적 지성도 그저 생명권 지성의 일부이다. 중요한 것은 “생태적 자아 – 공동체 – 생명지역 – 생명권”을 하나로 꿰는 깨달음이다. 여기에 굳이 인류의 지성이나 사이버 지성, 또는 노오스피어 같은 인공적 지성권을 따로 설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기 때문에 “人中天地一” 정도의 인간 편향은 인정한다.

 

아랍에미리트 라스알카이마의 아시마 지역에 위치한 UAE 꽃 농장에서 한 여성이 꽃들 사이를 걷고 있다. 이 농장은 에미리트 농부 모하메드 오바이드 알 마즈루에이가 소유한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개인적인 프로젝트에서 시작하여 인기 있는 농업 및 생태 관광 명소로 성장했다.2026.1.30. 로이터 연합뉴스

인간은 ‘생명권’의 일개 구성원일 뿐, 겸손해야

오늘의 얘기는 일반 생활인의 처지에서 보면 뜬구름 잡는 얘기일 수 있다. 그것은 언어가 가진 표현의 한계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길을 가다 마주친 한 떨기 야생화를 보고 울컥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그저 변덕스러운 나의 기분이 아니라 생명권 지성의 작용이라고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여 그 일대가 불모의 땅이 된 것을 인간의 반지성적 행위에 대한 지구라는 초유기체의 반발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대량살상 무기를 이용한 잦은 전쟁과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코로나 팬데믹을 인간 개체 수를 조절하려는 생명권의 작용으로 볼 수는 없을까?

분자 단위의 미세한 변화에서 대륙을 가로지르는 자연재해에 이르기까지 생명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다. 인간은 이 변화를 오로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해하려 들지만 자연은 무자비하다. 장자가 말한 대로 ‘천지불인’ (天地不仁)이다. 우리는 천지의 변화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권의 일개 구성원에 지나지 않는다. 디지털 혁명이니 인공지능이니 하며 마치 인간이 자연계를 새롭게 변화시킬 듯이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결국 생로병사라는 대자연의 법칙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 겸손해야 한다. 생명권의 진지한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익히는 것도 좋지만 오래된 미래의 지혜를 구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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