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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줄 알고 천에 싸다가 뛰는 심장에…

등록 : 2014.01.17 20:29수정 : 2014.01.18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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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5년 전 용산 생존자 이충연·정영신 부부이야기
2009년 이전 삶은 부끄러워, 이젠 우리가 희망 되고파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은 이제 없다.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을 집어삼켰던 불탄 망루도 없다. 유가족이자 생존자인 이충연(왼쪽)·정영신씨 부부는 용산을 떠나지 못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친다. 13일 오전 ‘용산참사 5주기 범국민 추모주간 선포 기자회견’을 마친 뒤 부부는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한 남일당 터를 둘러싼 가림막에 국화를 꽂았다.

 

 

인터뷰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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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전 삶은 부끄러워, 이젠 우리가 희망 되고파

 

[토요판] 커버스토리 / 용산참사 생존자 이충연·정영신 부부

 

 

▶ 2003년 이충연(41)씨는 정영신(42)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답니다. 이씨는 무려 전라남도 장흥까지 밥 먹으러 가자고 하고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 깜깜한 길이 무섭다며 손을 잡아달라 했습니다. 이씨는 정씨의 손을 잡은 채 아주 천천히 운전했다고 하더군요. 2009년 1월20일 ‘용산참사’ 뒤 두 사람을 덮은 어둠은 그 밤보다 짙었습니다. 부부는 그 5년 동안 손을 꼭 잡고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2009년 1월19일 새벽 3시, 아버지와 아들은 깨어 있었다. 두 사람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앞에 섰다. 트럭의 짐을 하나하나 건물 안으로 옮겼다. 옥상에 오르자 물대포가 날아들었다. 아들은 물대포를 맞으며 망루를 지었다. 일흔한살의 아버지는 옆에서 거들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겐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함께 올라온 30여명을 다독이며 일을 마무리했다. 오후 5시 망루가 완성됐다. “이제 대화하자고 할 거다”라며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 부자가 있었다. 14시간 뒤인 이튿날 아침 7시께 아버지와 아들은 망루 4층에 있었다. 망루에 불이 붙었다. 아들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들은 ‘용산 4구역 상가·공장 철거민대책위원회’(용산 4구역 철거대책위) 위원장 이충연(41)씨였다. 망루 주변에 있던 이들은 그가 죽은 줄 알았다. 죽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건 아버지 이상림(당시 71살)씨였다. 아버지는 1년 뒤 차가운 땅에 묻혔고 아들은 4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망루에서 뛰어내린 이충연씨가 의식을 잃고 중앙대병원 중환자실에 있던 21일 새벽 1시께 아내 정영신(42)씨는 순천향대병원에서 시아버지의 주검과 만났다. 장례를 치른 건 355일 뒤었다. 하지만 아직 감옥에 징역 5년형을 선고받은 남편이 있었다. 아내는 용산을 떠날 수 없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 상근활동가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유가족이자 생존자로, 또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활동가로 이충연·정영신 부부는 처음으로 함께 1월20일을 맞는다. 올 1월20일은 생계 대책을 요구하며 용산 4구역(국제빌딩 주변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 철거민 등 30여명이 남일당 건물 옥상에 망루를 짓고 농성하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불이 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죽은 ‘용산참사’ 5주기다. 부부를 8일 용산구 원효로 1가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진상규명위) 사무실에서 만났다.

 

망루 농성자 30여명 중 유일하게 부자가 망루에 올랐다.

 

이충연 “나는 당시 용산 4구역 철거대책위원장이었고, 아버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반년 전 용산 4구역 조합 앞에서 생계 대책을 마련하라는 펼침막을 달다 용역과 싸웠다. 경찰은 30대 건장한 용역은 무혐의 처분하고 아버지만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용산 4구역 개발 문제가 해결돼야 본인 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망루에서 최후 맞은 시아버지 
살아남았으나 감옥에 간 남편 
폐인처럼 지내다 기운 차리고 
진상규명 상근활동한 아내 
4년 만에 남편도 돌아와 함께

 

 

“경찰이 망루 양쪽 잡아당기자 
불기둥이 아래서부터 올라왔다 
폭발할 듯해 밖으로 뛰어내렸다 
태양처럼 빨갛고 뜨거운 벽에 
얼굴 녹아내린단 생각 들었는데…”
 
 

 

 

 

죽은 줄 알고 천에 싸다가 뛰는 심장에…

 

망루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2008년 5월30일 관리처분인가가 났다. 관리처분인가가 나면 철거가 시작된다. 대화하자고 하면 돌아오는 건 용역의 주먹과 찬바람뿐이었다. 당시까지 용산 4구역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본인이나 아이가 장애인이거나,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거나, 무허가 노점이란 이유로 보상도 못 받은 정말 힘든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우리 같은 철거민밖에 없었다. 그냥 내쫓기는 게 억울해 대화하고 생계대책 만들어 달라고 망루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망루만 기억한다. 철거민들을 망루로 내몬 시간은 잊혔다. 공식 명칭이 ‘국제빌딩 주변 제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인 용산 4구역 기본계획은 2001년 7월 수립됐다. 주거 아닌 상업지 중심의 재개발인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로 지정·고시된 게 2006년 4월이다. 조합의 재개발 계획을 확정하는 ‘사업시행인가’는 2007년 11월, 주민의 비용 부담이 정해지는 ‘관리처분인가’는 2008년 5월 결정됐다. 남은 절차는 철거와 공사뿐인 상황에서 용산 4구역 상가세입자는 7월 조합의 감정평가에 따른 영업보상비를 통보받았다. 보상은 턱없이 적었다. 이충연씨 부부가 부모님과 함께 운영하던 ‘레아 호프’의 보상금은 1억500만원. 권리금과 시설비용이 3억 이상 들어간 호프집이다. 그나마 많은 편이었다. 용산 4구역 상가세입자 평균 보상비는 2500만원이었다. 상가 주인인 조합원 1인당 개발 이익이 5억4000여만원으로 추산됐다. 자릿세인 권리금은 인정되지 않았고, 생계 보장을 위한 임대상가는 언급도 안 됐다. 세입자들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용역의 폭력도 무서웠다. 2007년 겨울 나타난 용역은, 이듬해 2월부터 세입자가 떠난 빈집에 살기 시작했다. 시공사였던 삼성물산·대림건설·포스코와 철거 계약을 맺은 무허가 철거용역업체 두 곳의 직원들이었다. 빈집에 오물을 쌓아두거나 장사하는 가게에 매일 찾아가 해코지했다. 2008년 6월30일까지 철거를 못 끝내면 하루에 1인당 510만원씩 지체 보상금을 시공사 쪽에 물어주기로 한 용역업체는 주민들에게 강압적으로 떠날 것을 종용했다. 나가자니 생계가 막막하고, 머물자니 용역이 위협하는 상황이지만 대화 통로는 막혔다. 용산 4구역 철거대책위는 망루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가족들은 걱정하지 않았나?

 

정영신 “망루가 뭔지도 몰랐다. 위험한 곳 아니라고, 며칠 지나면 나도 왔다갔다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더라. 어쨌거나 용산은 서울 중심지니까 망루 만들면 며칠 안에 대화하자고 할 거라고 했다.”

 

남일당 건물에서 하루 동안 어떻게 지냈나?

 

 “경찰의 호위를 받은 용역이 망루 짓는 우리에게 물대포를 쐈다. 옷이 다 젖어 너무 추워 교대하며 만들었다. 망루를 완성하자 곧 대화가 될 거라는 생각에 축제 분위기였다. 실제 생활은 4층에서 했다. 난로 켜고, 침낭 놓고, 가스버너로 밥도 해 먹었다. 하지만 용역들이 계속 1층에서 불을 피우거나 화학탄을 쏴 연기를 올려 보내 숨쉬기가 어려웠다. 잠도 거의 못 잤다. 건물에 들어간 뒤 얼마 안 돼 경찰이 입구를 막아 짐만 옮겨주고 가기로 한 사람들까지 갇혔다. 그래서 하루 만에 마실 물도 다 떨어지고 음식도 쌀밖에 없었다. 급하게 진압하지 않아도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9년 1월20일 오전 6시30분 경찰 진압이 시작됐다. 농성 하루 만의 진압이었다. 건물 안 상황은 어땠나?

 

 “진압 전 남일당 건물 앞 한강대로 차량을 통제했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방에서 물대포가 갑자기 비처럼 쏟아졌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최루액이 든 물대포를 얼굴에 맞고 눈도 못 떴다. 사람들은 물대포를 피해 건물이나 망루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 경찰이 진압하면 연대하러 온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연행되고, 용산 4구역 철거민들만 망루에 남아 싸우기로 했다. 하지만 우왕좌왕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망루 안에 들어가 발전기를 돌려 불을 켜고 4층으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 컨테이너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오는 경찰을 봤다. 경찰이 망루 안으로 들어와 1층부터 연행해 갔다. 쇠파이프나 골프공으로 못 올라오게 막았다. 화염병은 망루 안에 안 던졌다. 불이 나지 않겠나.”

 

 “그 새벽에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 제안이 와 희망이 생겼다. 방송 나가면 이제 곧 대화하자 할 거고, 대화하면 곧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경찰특공대가 유리창을 방패로 깨면서 진압을 시작하더라. 그 방패로 내 가슴을 치는 것 같아 무서워 울었다. 그때부터 남편과 연락이 안 됐다. 경찰이 올라가는데 건물 안에 있던 용역도 무서워서 건물 옆 임시건물 지붕 위로 뛰어내리더라. 안에 있던 지석준씨가 난간에 매달린 것도 보이고. 그러다 어느 순간 불이 확 끼쳤다. 그리고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오전 7시20분 불이 나던 순간을 기억하는지?

 

 “경찰이 망루 양쪽을 잡아당겨 옆을 벌렸다. 그 틈으로 채증카메라가 보이더니, 불기둥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불이 주변으로 확 퍼지자 폭발한다는 생각에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때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내 옆에 태양처럼 빨갛고 뜨거운 벽이 서 있어 얼굴이 녹아내린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화염병을 든 ‘도시 테러리스트’들의 ‘무장농성’ 기사가 담긴 아침신문이 집집마다 배달됐을 무렵, 현실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2009년 1월20일 오전 6시30분 경찰특공대 3·5제대원 남일당 1층 계단 진입. 6시45분 경찰특공대 1제대원 10여명 컨테이너 타고 옥상 진입. 7시6분 1차 화재로 7시10분 경찰특공대원 일시 철수. 7시18분 경찰특공대 1·2·5제대 소속 10여명 망루 2차 진입. 7시20분 화재 발생. 용산 4구역 철거민 이상림·양회성(당시 56살)씨와 연대하러 망루에 오른 다른 지역 철거민 한대성(당시 53살)·이성수(당시 50살)·윤용헌(당시 48살)씨 5명과 경찰특공대원 김남훈(당시 31살) 경사가 숨졌다. 불이 나기 전 16명, 불이 난 뒤 8명이 경찰에 연행되거나 병원에 실려갔다.

 

창문에서 뛰어내린 이후 어떻게 된 건가?

 

 “옥상 벽과 망루 사이 80㎝ 틈으로 떨어졌다가 불이 다 꺼진 뒤에야 소방관들에게 발견됐다.”

 

 “온몸이 까매서 죽은 사람인 줄 알고 망자라면서 천으로 쌌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떤 소방관이 가슴에 손을 댔는데 심장이 뛰니까 구급차로 병원에 옮겼다. 안 그랬으면 그대로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원)로 갈 뻔했다.”

 

이충연(왼쪽)·정영신씨 부부는 2009년보다 더 웃고, 더 밝고, 더 건강해 보였다. 상처가 아물어서가 아니다. 지금도 밤에 잠을 설치고 소리에 예민하다. 부부를 넘어 동지가 된 서로가 곁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8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1가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 사무실에서 부부를 만났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감옥서 편지도 안 써

 

1월20일은 유가족들에게 긴 하루였다.

 

 “하루종일 망루에 오른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아무도 생사를 확인해주지 않았다. 밤이 돼서야 시아버지 주검이 있다는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보고도 믿을 수 없어 유전자 검사를 한다고 했는데, 다음날부터 이상림씨라고 보도됐다. 경찰에 따지니 그제야 ‘신분증도 있고 지문도 나왔다’고 하더라. 신분증이 있다면 미리 말해줄 수 있었는데 왜 얘길 안 했나. 그때부터 숨기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덕 어머님(고 양회성씨 부인)이 시신을 전부 봤는데 손목, 발목이 잘리거나 이빨이 다 빠지거나, 갈비뼈가 튀어나온 사람도 있다고 했다. 화재사가 아니었다. 부검 시간을 벌기 위해 우리를 하루종일 애먹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장례식을 미루게 됐다.”

 

유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한 건 1월21일 새벽 1시께다. 경찰은 유가족 통보 없이 국과수에서 부검한 뒤, 순천향대병원에 주검을 안치하고도 유가족을 막았다. 주검 5구를 모두 보고 나온 김정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는 당시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웅크리는 등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유가족은 공권력 폭력이 있었는지 봐달라고 했는데 시신이 많이 훼손됐다.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부검한 건 감춰야 할 게 있던 게 아니었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주검은 2010년 1월9일 장례식 날까지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에 있었다.

 

중환자실로 옮겨진 이충연씨의 상태는 어땠나?

 

 “의식이 거의 없던 채로 3일 있다 일반실로 옮겼다. 폐에 매연이 고여 있어 그 치료부터 1주일 받고 검찰에 체포됐다. 다리와 등도 많이 다쳤는데 구속되면서 병원 치료도 못 받고 휠체어 탄 채 검찰 조사를 받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언제 알았나?

 

 “일반실로 옮긴 날 뉴스 보고 알았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기 전 마치 다른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막아주겠다는 듯이 4층 계단 앞에 있던 아버님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뉴스 본 심정을… 표현하기 너무 어렵다. 내게 이런 일이 닥칠 거라 생각하지 못해 감당하기 힘들었고 두려웠고 막막했다. 무엇보다 죄송했다. 난 살아났고…. 내가 그 상황에서 냉정하게 정신 차렸다면 그분들부터 망루 밖으로 모셔야 했는데.”

 

2009년 1월28일 병원에서 검찰에 체포·구속된 이충연씨는 화염병을 던져 망루에 불을 내 경찰관 1명을 숨지게 한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 등으로 다른 철거민 23명과 함께 기소됐다. 하지만 경찰의 살인, 업무상 과실치사 등 무리한 진압에 대한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됐다. 죽음을 당한 철거민 5명은 망루에 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경찰을 죽인 가해자로 몰렸다.

 

구속된 뒤 상황은 어땠나?

 

 “구속될 때부터 출소할 때까지 일부러 독방에 있었다.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죄송함이 컸다.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자괴감. 아내에게 편지도 안 썼다. 동지들은 죽었는데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에 아내에게 편지 쓰는 것마저 죄송스러웠다.”

 

2010년 11월11일 대법원은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은 어땠나?
남일당 건물 철거 장면.

 

 “재판 과정은 부당했다. 검찰은 수사기록 3000쪽을 공개하지 않았다. 검찰이 내놓지 않은 수사 자료에는 경찰이 무리한 진압을 인정한 내용이 있었다. 화재 원인도 납득이 안 된다. 우리는 망루 안으로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다. 국과수는 당시 영하 10도라 몸에서 나는 정전기도 발화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망루 2층에서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국과수가 그 발전기 스위치를 잃어버렸다더라. 17명의 경찰이 채증하고 있었는데도 불이 나는 7시20분 전후 영상만 모두 없다. 경찰의 과잉진압은 조사도, 기소도 안 됐다.”

 

이송범 당시 서울경찰청 경비부장은 “현장 상황을 잘 전달받았으면 중단시켰을 텐데 지도부가 상황을 잘 몰라 역부족이었던 것이 안타깝다”고 검찰 조사에서 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경찰특공대가 성급하게 2차 진입을 시도했다며 경찰력 행사가 위법이라는 의견을 법원에 제출했다. 검찰이 망루 안에서 화염병 공격 대상이 됐다고 지목한 경찰특공대원 2명은 재판 과정에서 ‘화염병이 터져 불이 붙는 걸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변호인단은 발전기나 정전기 등 다른 화재 원인을 제시했다. 하지만 법원은 경찰에 불리하고 농성자들에게 유리한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감옥에 홀로 갇힌 이충연씨만큼 밖에서 유가족·구속자 가족으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싸웠던 정영신씨도 외로웠다.

 

2009년 한 해를 집 없이 거리에서 떠돌았다.

 

 “2009년은 내게서 많은 걸 뺏어갔다. 내가 그동안 믿었던 대한민국이 고작 이건가 싶었다. 내 삶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던 국가가 내가 필요 없고 걸림돌이 된다며 쓰레기 취급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뒤 우리도 시청광장에 빈소를 만들었다. 노 대통령 조문 행렬은 줄이 길게 서 있는데 우리는 텅 비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 발길도 끊어지자 정말 답답했다. 그럴수록 나라도 힘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더더욱 어머니들과 남편 이충연 위원장 곁을 지키려 했다.” 
 

 

 

 

“그날 새벽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 제안이 와 희망이 생겼다 
방송 나가면 대화가 재개 될 거라고 
그런데 경찰특공대가 유리창을 
방패로 깨면서 진압 시작하더라”

 

 

“뉴타운 되면 잘살 줄 알았다 
그들 사탕발림에 이용당한 건데 
우리도 같이 허황된 꿈 꾸며 
개발을 부추긴 게 아닌가 싶다 
용산의 가장 불편한 진실이다”
 
 

 

 

 

도움 줬던 그분들은 지금 강정과 밀양에

 

정부와 장례식·보상 등에 합의해 사건 발생 355일 만인 2010년 1월9일 장례식을 치렀다. 그 뒤에는 어떻게 지냈나?

 

 “장례 치르고 나니 마음이 너무 편했다. 진실 규명이 돼서 한 장례는 아니지만 유가족을 그렇게 놔둘 수 없었다. 장례 뒤부터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다. 망루에서 떨어져 바로 옆에서 불이 났는데도 멀쩡했던 건 ‘너는 살아서 억울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돌아가신 분들 뜻인 것 같았다. 그래서 공부를 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자본론> 같은 어려운 책도 읽고, <임꺽정> 같은 소설도 보며 그동안 몰랐던 세상을 알려고 노력했다.”

 

 “나는 피해자가 가해자·살인자로 뒤바뀌어 감옥에 있는데 그들을 두고 장례 치르는 게 너무너무 화가 났다. 하지만 어머님들의 삶을 알기에 고집부릴 수 없었다. 2009년 12월30일에 정부와 협상 타결되고 맞은 신정 때 용산 4구역에 있던 집도 철거돼 어머님과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미치겠더라. ‘내가 왜, 뭐 때문에 싸웠지?’ 하면서 갑자기 사람이 싫어졌다. 2010년은 내게 없는 해다. 매일 술만 마시고 폐인처럼 살았다.”

 

하지만 정영신씨는 2011년부터 진상규명위 상근 활동을 시작했는데.

 

 “경기도 성남 위례신도시 행정대집행을 막으러 갔다가 용산에 있던 용역을 만났다. ‘너네 용산 모르냐, 용산처럼 되고 싶냐’고 하더라. 그들이 여전히 용산을 훈장 삼아 자랑하고 다니는 걸 바꾸고 싶었다. 그즈음 진상규명위가 강제퇴거 금지법을 만든다고 해서 활동을 시작했다.”

 

친구의 친구였던 두 사람은 6년 연애 끝에 2008년 5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생활은 8개월에 그쳤다. 용산 참사는 두 사람을 갈라놨다. 이별은 2013년 1월31일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이충연씨가 4년 만에 가석방되면서 끝났다.

 

출소 뒤 어떻게 지냈나?

 

 “장례 치르게 도와준 분들께 인사하고 다녔다. 시민사회 모든 분들이 도와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분들이 지금 강정과 밀양에 있다. 그곳은 주민 간의 다툼, 공권력의 탄압 등 용산과 닮은 점이 많다. 아픔을 겪어 봐서 그런지 아내와 함께 그런 아픔 있는 곳을 계속 찾아다녔다.”

 

4년 만에 함께 지낸 1년은 어땠나?

 

 “남편이 동지가 됐다.(웃음) 유가족 어머님들과 구속자 가족 중간에 있던 나는 그동안 이야기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할 사람이 있어서 좋다. 솔직히 어머님들 앞에서는 죄송하다. 똑같이 고생했는데, 제 신랑만 옆에 돌아왔으니….”

 

이 “집사람이 힘든 시간을 견뎌내고 더 성숙해졌다. 저 하나만 보며 버티면서, 재개발 정책 바꾸고 진상규명 노력 하는 모습을 보면서 믿음도 존경심도 커졌다.”

 

정영신씨의 싸움은 이제 외롭지 않다. 남편은 새 가게를 여는 대신 유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진상규명 활동과 연대를 다녔다. 두 사람은 “최소한 5주기 추모제까지는 유가족 어머님들이 해온 만큼은 해야 돌아가신 아버님들께 면이 설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유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나?

 

 “어머님(고 이상림씨 부인 전재숙씨)은 한국외대 앞에서 도시락 가게를 하고, 형님은 수원에서 호프집을 열었다. 김영덕 어머님(고 양회성씨 부인)은 숙명여대 앞에서 이자카야를, 권명숙 어머님(고 이성수씨 부인)은 두 아들과 치킨집을 운영한다. 유영숙 어머님(고 윤용헌씨 부인)은 서울시 중구 순화동 철거 투쟁을 계속 해야 하는 상황이고, 신숙자 어머님(고 한대성씨 부인)은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다른 일을 못하고 있다.”

 

 “김석기 한국공항공사 사장 취임 반대 투쟁을 하는데, 경찰들이 앞에서 2009년처럼 우리를 막고 욕하더라. 자칫하면 다시 2009년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싶어 고문피해자 모임인 ‘진실의 힘’에서 제안한 치유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했다.”

 

 

내 가족의 행복과 남의 행복, 그 사이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참사 이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나?

 

 “해결된 게 없다. 돌아가신 분들 주검에 타살 흔적이 있다. 죽음의 이유와 경찰 진압 과정은 재조사돼야 한다. 책임자도 여전히 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 진상규명위의 질문에 ‘진상규명 조사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경찰 진압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을 공기업 사장에 앉혔다.”

 

유가족의 삶은 멈췄지만 경찰 진압 책임자와 검사·판사들은 안녕했다. 김석기 한국공항공사 사장이 대표적이다. 당시 서울경찰청장으로 경찰청장 내정자였던 그는 사건 발생 직후 사퇴했다. 그러나 2011년 오사카 총영사가 되더니 2012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경북 경주에 출마했다. 이충연씨 대법원 판결 주심이었던 양승태 대법관이 현재 대법원장이다.

 

용산참사의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용산 4구역이 포함된 국제업무지구 개발은 서울역부터 한강까지 이어지는 ‘서울부도심’ 개발 사업에 포함돼 있었다. 이는 당시 차기 대선 주자로 꼽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꿈이기도 했다. 서울시장 때 청계천 복원과 재개발·뉴타운 사업을 진행했던 이명박 대통령을 이어받은 거다. 재개발로 이익과 권력 잡은 이명박 정권, 오세훈 서울시장과 경찰청장 내정자였던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의 과잉충성이 핵심 원인이다. 그리고 우리의 무지함도 있을 것이다. 18대 총선 때 뉴타운 공약으로 내세운 사람 다 당선됐다. 개발 소식 들으면 ‘나도 거기 땅 사놓을걸’ 하며 부러워하지 않나. 사실 나도 그랬다. 뉴타운 개발되면 다 잘사는 줄 알았다. 그들의 사탕발림에 이용당한 건데, 우리도 같이 허황된 꿈을 꾸며 개발을 부추겼다. 용산의 가장 불편한 진실이기도 하다.”

 

용산참사 이후 삶은 어떻게 변했나?

 

 “전에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내 가족만을 위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아무도 못 돕고 살았는데, 많은 사람이 도와준 덕분에 장례나마 치를 수 있었다. 이제 알았다. 내 가족만을 위한 행복은 남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고, 모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후회 안 한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지금이 행복하다.”

 

 “2009년 전의 삶은 부끄러웠다. 바로 옆 용산 5가 철거 투쟁 하는데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이웃의 어려움을 알았다면 무지하게 당하지도, 억울한 일 당하고 외면받지도 않았을 거다. 이제는 내가 희망이 되고 싶다. 내가 가는 곳마다 아픔은 사라지고 행복이 솟았으면 좋겠다. ‘제2의 용산참사’라는 말을 없애고 싶다.”

 

2010년 12월1일 남일당 건물 철거 날, 근처의 한 정육점을 찾았다. 주인아저씨가 말했다. “저 건물을 보면 없는 게 죄지 싶지만, 나는 저렇게 싸우기보단 빨리 돈 벌고 상가를 장만해 나가고 싶다.” 용산을 지켰던 문정현 신부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2010년 1월9일 장례식 전날 만난 신부님은 루카(누가)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길에서 강도 만나 쓰러진 사람을 구한 건 사제나 레위인이 아닌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이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예수가 들려준 이야기다. 신부님이 말했다. “강도 만난 이를 그냥 지나친 사람은 이웃이 아닌데, 이 절절한 용산 참사를 보고 그냥 지나간다면….” 용산은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물었다. 그 용산에서 살아남은 부부는 이제 강도 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자 한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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