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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오픈 기념 …함세웅 신부 - 김종철 이사장

 

˝제2민주화, 5월광주 - 6월항쟁 힘으로˝
[특집 대담 ①] 홈페이지 오픈 기념 …함세웅 신부 - 김종철 이사장
 
 
기사입력 : 2015.05.18 03:51  |  최종수정 : 2015.05.19 17:52  페이스북  트위터
 
자유언론실천재단 홈페이지가 광주민중항쟁 35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 5월 18일 문을 열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횃불로 살아 있는 그 항쟁의 의미를 되새기며 홈페이지의 첫 번째 기사로 함세웅 신부(민주주의국민행동 상임대표, 자유언론실천재단 고문)와 김종철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의 대담을 싣는다. 김 이사장이 묻고 함 상임대표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인터뷰를 정리했다. 2회에 걸쳐 연재된다. - 편집자.
 



‘암흑 속 횃불’ 광고로 유신독재 대대적 고발 

▷김종철(이하 김) : 올해로 5월 광주민중항쟁이 35주년을 맞았습니다. 그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해주실까요?

▶함세웅(이하 함) : 그날의 ‘광주’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것은 민중의 용감한 투쟁인 동시에 민족사의 비극이자 참사였습니다. 저는 1987년 6월항쟁 직전에 한 수녀님의 말씀을 듣고 새삼스럽게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서강대 3학년인 청년이 어느 날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전국을 여행하다가 광주 망월동묘역에 갔답니다. 그는 13살 된 중학생의 묘비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저렇게 어린 학생이 총탄을 맞아 숨진 것을 알았을 때 부모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겠지. 나는 저 중학생보다 10년이나 더 살았구나.’ 그 청년은 묘지 앞에서 깊은 묵상을 하면서 그 중학생을 항쟁의 대열로 이끈 어떤 신비한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울에 와서 성당을 찾아가 고백성사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셨습니다. 수도자와 사제의 권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그 청년을 하느님께로 인도한 것은 바로어린 학생의 숭고한 죽음이었습니다. 저는 5월 광주의 정신은 십자가의 힘과 같다고 믿으면서 신자들과 함께 망월동묘역 참배를 계속했습니다. 신자들도 그 중학생의 묘비 앞에서는 숙연해지더군요. 

전두환 일파는 망월동묘역을 없애려고 갖은 공작을 벌였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 같은 그곳을 군사독재의 힘으로 지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갈릴리지방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들과 기쁨과 희망을 함께하셨습니다. 망월동은 한국의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곳입니다. 따라서 광주는 고난의 땅이지만 동시에 민족의 부활, 희망의 횃불이기도 합니다. 
 



▷김 : 광주민중항쟁의 정신과 이념을 오늘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구현하면 좋겠습니까? 

▶함 : 민주화를 향한 연대의식으로 박정희의 후계자들인 전두환과 노태우 일파에 맞서 떨쳐 일어난 것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이른바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들은 침묵을 지켰지만 광주의 전남대 학생들이 과감하게 쿠데타에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항쟁 기간에 광주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동지애를 다졌습니다. 거기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것이 광주공동체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남한의 5천만 겨레는 바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광주를 방문할 때마다 안타깝고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광주 정신’을 물려받고 있다고 자처하는 여러 단체들이 그때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서로 대립하거나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는 모습 때문입니다. 

현재 제일야당과 많은 국민들이 보이는 자세도 유감스럽습니다. 지난 2012년 12월 대통령선거 기간에 국정원과 보훈처, 국군사이버사령부 등이 저지른 선거부정이 명백히 드러났고, 투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행위에 대해 시민 28만여명이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는데도 새정치민주연합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정부 당시의 국정원장 원세훈이 구속되었는데도 소수를 빼고 많은 국민이 침묵했습니다. 이것은 권력의 불의에 맞서 싸운 광주항쟁의 정신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물려받은 박근혜를 응징하고 제2의 민주화를 이루는 과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40여년 동안 민주·민족·민중운동을 함께 해온 동지들, 그리고 젊은 세대의 일꾼들과 뜻을 한데 모아 지난 3월 24일 민주주의국민행동 발기인대회를 가졌습니다. 선조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3·1운동 때의 투지를 이어받고, 미군정과 야합한 이승만의 독재를 물려받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후예들인 현재의 집권세력을 타파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단을 구실로 민족의 통일을 가로막는 수구보수세력을 척결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고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층을 더 부유하게 하는 신자유주의를 추방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경제체제를 이룩해야 합니다. 저는 제2의 민주화운동이 광주항쟁과 1987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황새 부상 크게 보도… 학생데모는 안 실려” 

▷김 :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보겠습니다. 신부님이 언론에 관심을 갖게 되신 것은 언제인가요?

▶함 : 1973년에 로마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이 민청학련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습니다. 그리고 5월에는 “북한을 추종하는 노농정권을 세우려고 정부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인혁당사건을 발표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두 사건 모두 중앙정보부가 살인적인 고문으로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구속된 분들의 가족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야만적인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심한 일은 언론이 그런 사실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요. 

박 정권은 그해 7월에는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혐의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님을 구속했습니다. 지 주교님은 구속되기 직전에 유신독재를 강하게 비판하는 양심선언을 발표하셨는데 그 사실조차 신문과 방송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언론의 속성을 잘 모르던 저는 얼마 뒤에야 그 원인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앙정보부 간부나 직원이 동아일보사를 비롯한 언론사에 상주하면서 편집이나 제작에 일일이 간섭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저항하는 언론인들은 ‘남산’이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고문이나 폭행을 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당시 사제단 총무와 대변인을 맡고 있었는데 기자들은 이런 하소연을 했습니다. “천연기념물인 황새가 다치면 신문 사회면 머리에 나오는데 학생들이 데모를 하면 1단기사도 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명동성당에서 기자들을 만나면 특히 KBS 기자에게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치곤 했지요. 그리고 주변에서 감시를 하는 중앙정보부원이나 사복경찰도 나가라고 요구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참담한 현실에서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빼앗긴 언론자유를 되찾고 ‘기관원’이라고 불리던 정보기관원들의 언론사 출입을 거부한다는 내용이었지요. 저와 동료 사제들은 그 소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튿날부터 동아일보에 민청학련이나 인혁당에 관한 기사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김 : 그런 현상을 깨뜨리려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이 그해 11월 12일 일으킨 제작거부 운동을 기억하시는지요?

▶함 : 네, 며칠 전 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바로 그 전날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 교구 주교좌 성당들에서 일제히 인권회복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가족들이 고문의 진상을 폭로하고 사제, 수도자, 교우와 많은 시민들이 그들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었습니다.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은 그 기도회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니 11월 12일자 석간 1면에 사진을 곁들여 5단으로 보도하거나 사회면 머리에 올리고 동아방송 뉴스에도 맨 앞에 내보내라고 편집국장과 경영진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경영진이 거절하자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이 농성을 하면서 신문과 방송의 제작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날 하루가 지난 뒤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는 인권회복기도회가 크게 보도되었지요. 
 



동아일보·방송 기자들 자유언론 투쟁 지원

▷김 :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박 정권이 저지른 만행이 보도되기 시작한 뒤 구속자 가족들의 호소, 천주교의 인권회복기도회와 개신교의 목요기도회 소식이 크게 보도되자 박정희는 최대의 위기라고 생각하고 1974년 12월 하순부터 중앙정보부를 통해 동아일보사에 대해 광고탄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백지로 변하게 된 동아일보 광고면에 격려광고가 실리면서 놀라운 민중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사제단은 그때 동아일보에 많은 격려광고를 실었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광고는 무엇이었습니까?

▶함 : 12월 31일자 동아일보 8면 전체를 차지한 ‘암흑 속의 횃불’이라는 광고입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비롯해서 지학순 주교님의 양심선언 등 박정희 유신독재의 실체를 대대적으로 알리는 내용이었지요. 당시 언론은 물론이고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실렸으니 박정희가 보고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 광고를 싣기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께 문안을 보여드렸더니 이런 내용이 어떻게 신문에 나가겠느냐고 걱정하시더군요. 그러나 정작 ‘암흑 속의 횃불’이 나온 동아일보를 보시고는 매우 놀라시면서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특집대담②]에서 계속)
 


▲ 김종철 이사장(좌)과 함세웅 신부(우)가 대담을 마치고 담소를 나누고 있다.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김종철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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