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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7/29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하루살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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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머리아퍼. 그리고 부끄러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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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7/01
    블로그 잠시 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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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하루살이씨

 

초보좌파님의 [모기죽이기] 를 읽고.

길거리를 배회하다, 우연히 빠져든 한 모양의 목구멍에서

고통스럽게 미끄러져내려가 끝내 사망한 하모씨를 기억하며.

 

 

평소에 입을 벌리고 다니지는 않는데, 그 날따라 유난히 하품을 자주 했다.

여러마리 있던 것도 아닌데, 절묘한 타이밍으로 목구멍으로 들어온 하루살이씨.

인간보다 길지도 않은 삶으로 매 순간 삶을 위해 고난과 도전을 겪었을 하루살이씨는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끝끝내 생을 마감했다.

그 순간 한모양은 목구멍이 이상해 계속 구역질을 하다가 완전히 넘긴 다음 순간

'단백질 섭취인가'라고만 하고는 유유히 사라지고 말았다는...슬.픈.이.야.기

 

 

----------------------------------------------------------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에 얼마전에 읽은 책이 있어서 몇 줄 끄적거린다.

요즘에 머리를 식히려고, 외국소설부터 다른분야의 책들을 읽고 있는 중인데,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고 (내가) 평가하는 책이 있다.

존 쿠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처음엔 이 책을 선택했던 이유가, 인간은 왜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지 알면서도

이타적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알고자 했으나,

애석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이 명시되지는 않았다.

다만 몇 가지 물음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던져주고 있었다.

 

존 쿠시가 이 작품으로 노밸평화 문학상을 탔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이 전해주는

주요 명제들은 전쟁(정확하게는 유대인 학살문제), 그리고 그것을 방관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다)

나이든 여성 원로작가가 연설의 형식으로 말하는 소설의 형식은 지금도 지구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문제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읽어볼만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의 의의를  다른 것에서 찾았다.

전쟁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위한 전제-인간의 이성은 과연 합리적인가-에 대해 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이 꽤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채식주의자로서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는 방식으로 진행해나갔다.

 

 

 



증명방식으로는 여러 방법이 나오는데, 그 중 하나는 이거였다.

인간의 이성을 증명하려는 심리학자들의 여러 실험 가운데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쾰러의 통찰설이다.

원숭이가 매달아진 바나나를 먹기 위해 사고를 하고(아하!) 도구를 이용해서 먹이를

찾을 수 있다는 실험을 통해 인간의 지능(이성)이 증명된 것이다.

이건 심리학 수업에도 행동주의와 다르게 인지이론의 기본으로 등장하는 실험내용이다.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이 실험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생각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같다.

 

늘 먹이를 주던 사람이 바나나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상자를 던져 주는 순간 원숭이가 생각한다.

왜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하지?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된 걸까?

우리는 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지? 나는 왜 계속 굶어야만 하는걸까?

나는 예전처럼 돌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틀렸다.

 

원숭이는 바나나만 생각하고, 상자를 이용해 먹이를 얻을 생각을 한다.

이 생각은 옳은 것이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이성의 정당성인가.

 

뭐, 이런 내용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까 별 내용 아닌 것 같은데,

책을 읽는 순간에는 신선했던 것 같다. 난 한번도 쾰러의 통찰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못 해봤으니까. 그냥 실험 그 자체에만 집중해왔던 것 같은데,

작가는 그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든 것에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동물의 생각을 인간이 생각해본다는 것.

대단히 관념적이면서도 동시에 그건 인간중심적 사고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앞에 써 놓은 슬픈 하루살이씨의 삶은 나의 생각이다.

그런데 길지도 않은 짧은 하루살이의 생이란 결국 내 삶의 기준에서 짧은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들이 중요한 것은

인간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작. 뭐 그런걸로 의미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꼭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p.s)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 대한 덧붙임.

 

서평을 따로 쓸까 하다가 이왕 쓴 김에 몇 자 더 붙여 놓는다.

이 책에서 또 눈여겨 봤던 점 중 하나는 등장인물이 여성작가로 설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여성소설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들.

요즘 생각하는게 이런고 하니, 눈에 띄는 것도 그렇지.ㅋ

 

엘리자베스 그녀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고,

글을 쓰는 동안 그녀의 두 아이들은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글을 쓰는 동안 집 문을 잠가버렸고,

그 동안 아이들은 문 앞에서 쭈그리고 기다리고만 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엄마의 글쓰기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렸다.

 

이게 통쾌하다고 느꼈던 까닭은 이런 내용의 소설을 우리나라에서는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이후 여성작가들의 글쓰기가 가시화되고,

여성들의 자아찾기가 점차 주류를 형성해 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내용은 자아를 찾고 싶어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와 일탈을 꿈꾸는 그녀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여성작가들은 자신을 옭아매는 가부장제도의 억압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번도 엘리자베스와 같이 자신의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그고 자신의 글쓰기를

진행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아이와 남편, 친정과 시댁 식구간의 굴레 안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이 책이 신선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가가 남성이였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와는 정말 다른 서양문화와 사고방식 때문이었을까?

분명한 건 우리나라의 다양한 여성작가의 개성 가운데에서도 그녀들을 지배하는 관습과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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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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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팽이처럼 돌고 돌아서 심장을 겨냥한다.

이미 상실된 나는

영원히 상실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실한 거기에서부터

모든 나는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오상원,'백지의 기록' 중

 

 

최지영의 다음 글을 기다리며

 

이젠 블로그에 글을 쓰고 안쓰고 이런 말 하지 말아야지.

무슨 개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언행일치'같다. 절대 말과 행동이 일치 안되는 ㅋㅋ습~ 솨~

매번 결심이 무너지는 모습이 꼭 실없는 사람 같아.

 

 

최지영 동지가 글을 내리는 과정을 사이버상으로만 지켜 보고는 화가 났었다.

그간 세웠던 내 결심과 계획을 무너뜨릴 정도로.

지금도 충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대신 화는 누그러졌다.

그녀와 그녀들의 고민과 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의 다음 글쓰기를 기다린다.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기다린다고.

함께 하고 싶었고, 한 편으로 난 이미 내가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힘 내라고. 힘 내보자고.

 

 

 

최지영의 글쓰기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폭력의 기억이 새롭게 떠올라 매 순간 '그만'을 외쳐야했다.

그녀의 글을 통해 새로 깨닫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많지도 않게 사는 동안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 많은 폭력 속에 노출되어 살아왔었다는 사실이다.

잊고 싶었고, 잊혀진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기억은 내가 여덟살  때, 엄마친구의 아들로부터 시작됐다.

옷을 벗기려고 강하게 내 손목을 짓누르는 것으로부터 도망쳐 밖이 잠잠해질때까지,

그리고 외출했던 엄마와 엄마친구가 다시 집에 돌아오기까지

꽤 오랜시간 화장실에서 숨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빠도, 착한 아들을 믿는 엄마친구도 무서워서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나도 그대로 잊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폭력의 시작은 이랬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많은 일이 있었고, 그 기억들은 차곡차곡 쌓이고, 누적되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나를 통제했다.

그래서 성폭력의 문제를 나에게 돌렸을 때, 나는 지금도 자유로운 것 같지 않다.

친구의 조언대로 고통의 기억은 앞으로 내가 사는 동안 품고 살아가야 할 상처로 존재할 것 같다.

그 치유의 방법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고민중이다.

현재로서는 생존자를 지지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최지영 동지의 글쓰기가 진행되면서 나는 두 가지 정도가 달라졌다.

하나는 내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 놓기 시작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글이 진행되면서 예전처럼 앉아서 울고 있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난 점점 울지 않는다.

 

 

 

최근의 논의과정을 지켜보면서

 

과거의 기억들을 되돌이켜볼 때 처음의 시작은 성폭력인건가?라는 질문에서부터였다.

다음은 내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두려웠다. 그리고는 자책이 이어졌다.

왜 난 그 때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가장 괴롭고 참을 수 없던 것은  폭력의 경험으로부터 오는 충격보다도

그 이후의 과정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나에게 최지영의 글쓰기가 괴롭지만 고마웠던 이유는 마지막 사실때문이었다.

반성폭력에 대한 무수한 논의를 했었고, 사람들은 생존자의 고통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의미 이면에는 생존과 치유의 과정이라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자리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내 과거를 돌이키면서 하나같이 공통적이라고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무섭고 공포스러운 성폭력 장면의 그 순간만큼 

그 이후에 잊으려고 노력하고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할 수록

더 바닥으로 치닫고 힘들었던 경험이었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최지영의 글쓰기가 있기 전까지 난 이 사실을 간과했던 것 같다.

과거를 떠올리면서 나는 이제서야 반성폭력에 대해, 그녀의 글쓰기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다.

최지영의 글쓰기는 오롯이 개인의 글쓰기로 치부할 수 없다는 점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그런 일을 겪다니 힘들었겠어요." 가 아니라

"생존의 과정이 쉽진 않지만, 때론 눈물흘리며 다시 일어나는 삶을 같이 살아요."같은

진심을 바라고 또 말하고 싶은게 아닐까?

최근의 논의를 간간히 보면서, 간혹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속상하다.

 

 

 

 

 

 

 

 

 

 

상처는 팽이처럼 돌고 돌아서 심장을 겨냥한다.

앞이 보이지 않게 피 대신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늘 제자리에서 돌고 있는 것 같다.

단단한 심장이 필요하다.

늘 제자리에서 돌고 돌아도 더 이상 나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단단한 심장은 혼자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심장과 함께 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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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머리아퍼. 그리고 부끄러워

아...나 또 금방 썼던 글을 지워버렸다.

 

감자탕이 웬수지. 내가 뭔 이득이 있다고 블로그를 보고, 게시판을 확인하고

또 멍하니 앉아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걸까.

 

제발 그런 글이 올라오지 않기를 바랬는데, 몇 일 컴퓨터를 하지 않은 사이에 올라와있는

진상조사단 글을 보고는 화가 나고 부끄러워서 짜증이 밀려왔다.

평정을 되찾고 내 생각을 정리해보면서 어디에 글을 쓸까 고민도 해봤다.

2-3년 전에도 했던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려는 모습과 침묵에 넌덜머리가 나면서

제발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으면 했다.

제발 그 거짓위선과 조직보위는 집어쳐버리라고.

 

 

난 내 해방세상을 만들고자 운동을 꿈꿨다.

지금도 그 꿈을 이루려고 나를 제어하고 다듬고 있는 중이다.

처음부터 내가 꿈꿨던 운동의 모습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꿔보고 싶다고 말하고

그렇게 시작했다.

 

그 꿈은 늘 현실에서 무너졌다.

한편으로는 동경으로 가득 찬 활동가 선배들의 모습이 늘 완벽하고 짜여지지 않은 모습이 좋았었다.

사람같았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만들어가는 활동의 모습은 완벽하지도 않지만 깨끗하지도 않았다.

그 속에서 난 늘 두려웠다. 혹시나 저 탁류에 휩쓸려 길이라도 잃지 않을까.

아니야, 지금 내가 저 탁류를 만들어나가고 있는것 같아라는 생각들 때문에.

 

그래서 늘 올곧게 서야 한다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성폭력과 관련된 논의가 늘 조직보위와 관련되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났다.

이게 왜 그렇게 연결되어야만 해?

그래 정말 그렇다면 과도하게는 그런 조직은 깨져야 한다고 까지 생각하면서.

급한 물살을 만나 배를 지키기에 급급해 앞으로 나가지 못할 바에야,

배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는게 옳다고 생각하니까.

 

 

 한동안 그 물에서 떨어져 지내다보니,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사람이 사는 곳이니까, 당연히 이런 말도 저런 말도 나올 수 있고, 실수도 반복할 수 있는거라고.

그런데 1년 후에 다시 돌아와보니, 그 물은 여전히 썩어있는 것 같다.

염려한대로 또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다.

 

이번엔 지지 않을꺼야. 질긴 년이 승리할테니까, 좀만 더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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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20

#1.

아...날짜 모르고 살아가는 것 봐라.

금방도 제목에 날짜를 05년으로 썼다가 지웠다.

내 생각은 왜 남들보다 1년은 느리게 가는 것 같은걸까?

 

독서실에서 끝발나게 공부하다가 뼈다귀해장국을 사준다는 어머니의 꼬임에 넘어가

꼬리 아홉개 살랑살랑 흔들며 감자탕 배터지게 먹고 집에 왔다.

소주 없이 점심에 먹는 감자탕이란, 국물의 얼큰함이 덜하고 배는 두배로 부르지만

그래도 먹는게 감사한 삶인지라. 덕분에 얼굴에 기름기 돈다.

어쩐지 오늘은 정신이 말짱하더라니...에이, 오늘도 그냥 보내면 안되는데 ㅠ.ㅠ

 

강사가 무료로 올려놨다는 강의정보에 쾌재를 부르며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또 또 강의는 안듣고 블로그질을 하고 있다.

몇 일 컴퓨터 접속을 안 한 동안 어처구니 없는 말과 글들이 올라온 것 같다.

한편으로는 예상하면서도, 설마 그럴까, 3년이나 지났는데라고 했던 내가 바보같다.

아..짜증나.

생각같아서는 나이나 안면 몰수하고 짜증나니까 그만 하라고 면전에다 말해주고 싶은데.

감.정.다.스.리.기. 그러고보니 누군지도 모르잖아. ㅋ

이럴땐 사이버공간에서 익명성에 기대 막말쓰는 초딩들이 부러워진다.

 

 

좋아. 평정을 되찾고 있어.

 

 

 

#2.

 일기장을 하나 새로 사야겠는데, 도시... 노트 사러 나가기가 귀찮다.

 

저번에 일기를 쓰다가 중간에 생각이 끊겨버린 이후로는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뒤에 한 장 정도의 여백이 남아서 일기를 새로 장만해줘야 한다.

물론 집 앞에 열 걸음만 걸어가면 문방구가 하나있고, 좀 더 걸어가면 네 개가 더 있다.

우리 집은 초등학교 앞에 있으니까.하지만 귀찮다.

 

지금은 뜨는 생각들을 가라앉힐 시기인데...

그래도 한 9월쯤에 사줘야지.

그 전엔 일기 쓰는 것처럼 보름에 한 번 꼴로 블로그를 써줘야겠구나. 쯧쯧.

 

 

 

 

#3.

동네하니까 이래저래 할 말들이 또 떠오른다.

아...나 이렇게 말 많아서 도대체 어떻게 산거야.

 

아, 이번에도 장마기간 부들부들 떨면서 집에 있었다.

우리집은 한강시민공원에서 두 블럭 정도 떨어져 위치해있기 때문에

(꼭 딴지 거는건 아니지만, 시민공원이 모야. 시민만 들어가야할 것 같이~)

한강이 4년만에 침수됐다는 뉴스 속보에 동네 사람 모두가 24시간 특보를 켜 놓고 난리났다.

가까운 목동에서 사재기 열풍을 일으킬 때, 엄마에게 우리도 뭔가 조치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불안하게 물었더니, 어머니 왈,

일단 둑이 무너지거나 침수가 시작되면, 대피령 떨어지기 전에 우린 끝이야.

고립되서 사재기로 버텨도 물이 제일 늦게 빠지니까 문제라구 그니까 티비나 계속 봐.

헐...네~

 

아...비 싫어. 비가 이렇게 많이 오다니. 분명 지구 종말이 다가오는 걸꺼야.

 

동네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좀 길게 써줘야겠다.

9월이 다가오니까. 2월과 8월엔 동네에 싸우는 사람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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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이것도 제목을 달아야하는군

#1.

(출처:네이버블로그)

 

잠을 두 시간정도 잤더니, 마비된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다.

자기 전에 토할 것 같던 증세도 멎었다.

오늘 하루는 그냥 놀아보기로 했다.

그래, 일주일에 하루는 좀 쉬어줘야지 않겠어? 푸하하하하

 

아까 썼던 글을 그냥 삭제해버렸다.

역시 아직 상처가 덜 치유된 것 같다. 좀 지나면 내 마음도 다시 잠잠해 질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거. 표현한다는게 참 이상한 효과가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끊기지 않던 생각이 글을 씀으로 인해 진정되었다.

아직은 환부를 정확히 꼬집어낼 수 없고, 드러낼 수도 없지만

그래, 난 병신과 머저리라고 말하면서 치유될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 같다.

글쓰기는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 옛날부터 주욱 계속되어온 삶의 향유 방식.

역시 국어가 좋아

 

 

 

 

#2.

 

 

블로그 계속 쓰려다가 말기로 했다.

귀찮아져서

 

아. 귀차니즘 완전 사랑. 완전 몰입.

 

복잡한 사고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는 현대인에겐 필수.

바보같이 사는 삶 좋아. 우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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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잠시 쉼

 

 

 

바야흐로 7월이 왔습니다. 여름입니다.

열공모드를 결심하고자 당분간 블로그를 쉬기로 결정했슴돠

뭐, 원래 자주 쓰지도 않았고, 또 이 짓이 몇일이나 가나 싶긴 하지만^^;; ㅎㅎ

분명히 작년과는 다를 것 같아서 기대됩니다.

 

9월쯤엔 확실히 다시 돌아올 것 같습니다요~

그럼 블로거 여러분, 내공쌓고 다시 돌아옵지요

 

 

 

 

 

 

 

 

 

 

 

 

 

 

 

 

 

 

 

 

 

 

 

진리를 탐구하는거야~  a`@.@'a

 

 

 

 

 

 

 

 

 

 

 

 

 

 

 

 

 

 

 

 

 

 

 

 

 

 

 

 

 

 

 

 



푸하하ㅏ하하하하하하하ㅏ하ㅏ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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