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2006/08 | 5 ARTICLE FOUND

  1. 2006/08/22 괴물
  2. 2006/08/16 [노래] 기도
  3. 2006/08/14 이력
  4. 2006/08/07 정은임 아나운서
  5. 2006/08/02 堯임금이 말씀하시길

괴물

2006/08/22 18:49

영화 '괴물'을 보았다. 시네큐브에서 보았다. 이미 천만명이나 봤다고 하더니, 그 작은 극장에 관객이 10명도 없는 것이었다. 괴물의 위력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살인의 추억'에서 진일보한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거대한 세상의 시스템들 속에서 초라할 수 밖에 없는 인간, 특히 한국사람들이라는 기본주제에다가, 돈으로 만든 괴물을 별첨부록으로 제시한 형태였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거나, 돈이 아깝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나온 많은 전문적인 영화평들의 한결같은 얘기처럼, 한국사회의 이야기를 하는 한국영화니까 절반은 먹고 들어간 것이다. 나도 절반은 먹혔다.

 

가족의 사투라는 테마도 새로울 건 없다. 이건 IMF 체제 하에서 기다렸다는 듯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사회과학 담론들이 주구장창 떠덜어대던 것이다. 즉, 한국사회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가족체계가 담당하고 있다는 고상한 말들. 다시 말하자면, 한국사회에서는 국가도 사회도 해주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재난통제나 미래를 위한 복지 같은 것은 가족의 부담으로 남는다는 것이겠지.

 

인간의 의지에서 소외되어 나온 거대권력이라는 '큰타자'도 명징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한국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미국도, 무책임한 한국정부와 언론 및 시민단체들도, 관습화된 이미지에서 더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 못 실은 채, 그냥 나왔다가 들어갔다.

 

인물들이 담고 있는 전형성도 살인의 추억에서 더 나가지 못한 것 같다. 가족의 수장인 변희봉 아저씨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한 목숨 희생하는 것이 아깝지 않은 우리 부모님들 이야기에서 더 나가지 못했고, 송강호가 연기한 어리버리 애아빠의 이미지도 이전 송강호 이미지에서 더 새로운 것이 추가되지 못했다. 양궁선수 고모 배두나는 마지막에 불화살 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역할이 없다.

 

그런 가운데, 왕년의 '민주투사' 박해일만이 내 눈길을 좀 끌었다. 송강호의 동생, 배두나의 오빠, 변희봉의 아들, 그리고 괴물에게 잡혀간 현서의 삼촌인 박남일은,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백수로 지내는 청년실업자이다. '조국 민주화'를 위해 투신했으나, 우리 사회는 취직도 시켜주지 않는다고, '씨발'을 섞어 가며 말한다. 현서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이동통신사 다니는 대학 선배를 찾아갔는데, '왕년에 데모질만 하더니 언제 그렇게 좋은 회사에 취직했는지' 모를 그 선배는 사실, 포상금에 눈이 어두워 남일을 경찰에 넘기기 위해 그리로 유인한 것이다. 연봉이 6천이냐고 묻는 남일의 질문에, 카드빚이 6천이라고 말하던 선배. 경찰들에게는 '저 새끼 도바리 천재니까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역시 '도바리' 천재 박남일이 함정을 빠져 나와 쫓겨간 곳은 한강 다리 밑의 거지집. 거기서 그는 거지와 함께 택시를 타고 현서를 찾아 가면서 화염병을 제작한다. 휘발유와 광목과 솜과 나무젓가락, 그리고 역시 2홉들이 소주병, 즉 두꺼비 소주병. 휘발유를 제외한 모든 재료는 거지집에서 가져온 것 같다. 택시 안에서 화염병을 제조하니 택시기사가 짜증을 부리며 승차거부를 한다. 박남일이 '따블'을 준다고 하니 군소리 않고 가는 택시기사. 그러나 목적지인 원효대교 북단은 시위 인파로 교통정체가 심한 곳. 라디오에서는 교통방송이 흘러 나온다.

화염병은 괴물을 퇴치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김영삼 정부의 화염병 및 쇠파이프에 대한 강경조치 이후 자취를 감췄던,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까지도 가끔 시위 현장에 등장하던) 화염병은 거대권력을 닮은 괴물을 향해 날아간다.

 

화염병이 중요한게 아니다. 거기에는 군사독재라는 터널을 지나온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있는 것이다. 이동통신사 취직한 선배의 연봉이 얼마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다. 거기에는, 한때 꿈이 있었던 젊은이들이 세상이라는 진정한 거대권력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때로는 당연한 듯이) 삶의 급선회를 감행할 수 밖에 없는 2000년대 후반의 한국사회가 있는 것이다.

 


※ 이 풍자적으로 과장된 자칭 왕년 '민주투사'의 액숀을 보라.(사진은 네이버의 어떤 블로그에서 가져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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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2 18:49 2006/08/22 18:49

[노래] 기도

2006/08/16 02:41

                기도

 

눈을 감고 잠잠히 기도 드리라

무거운 짐에 우는 목숨에는

받아 가질 안식을 더하려고

반드시 도움의 손이 그대 위해 펼쳐지리

그러나 길은 다하고 날 저무는가

애처로운 인생이여 애꿎은 노래만 우네

 

멍에는 괴롭고 짐은 무거워도

두드리던 문은 머지않아 네게 열릴지니

가슴에 품고 있는 명멸의 그 등잔을

부드런 예지의 기름으로 채우고 또 채우라

삶을 감사하는 높다란 가지

신앙의 고운 잔디 그대 영혼 감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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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6 02:41 2006/08/16 02:41

이력

2006/08/14 11:08

고등학교때와 재수할 때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표였고, 대학에 들어가면, 내 주위의 문과반 친구들이 대개 그랬듯이,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만난 첫번째 지적 충격은, 물론 '계급'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론적 기여를 했다고 하고, 마르크스까지 관여시킬 것도 없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사는 것. 그만큼 흔한 주제였기 때문에 나에게도 쉽게 찾아온 고민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된 일련의 지식 체계를 흡수하고, 또 뱉어내는 것이 그 시절의 나의 지적 일상이었다고 기억된다.

 

이 개념으로부터, 나의 가치지향이 투쟁, 특히 정치투쟁이라는 방식을 용인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미 낡은 것이 되어가던 방식이었지만, 시골에서 갓 올라온 어린 사람에게 다른 선택의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는 '다른 방식의 삶'이라고 하는, '방식' 자체의 문제를 많이 생각했다.

 

이로부터 대안적 삶의 형태를 고민하는 일에 호감을 느끼게 되었고, 군대에 갔다와서 석사논문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고려한 주제가 '대안학교'에 대한 것이 되었다. 물론, 이 고민을 사회학적 주제로 용해시키기에 내 역량이 부족했던지, 이 주제는 나에게서 쉽게 잊혀졌다.

 

학부를 졸업할 무렵 두번째 충격이 찾아왔는데, 그것은 '식민성'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신입생 시절의 고민은 그 자체로 전 세계 모든 장소에 적용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매력적이었지만, 보편성에 대한 추구는 그만큼 많은 허술함을 노정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때의 내가 느끼기에 구체적인 '바로 이 장소'에 대한 고민을 결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첫번째 충격이 통시적인 문제, 곧 자본주의의 역사라고 하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는데, 두번째 충격이 더해져서 공시적인 문제, 즉 비동시성에 관한 주제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사실, 이것은 학부때 사회학과에서 제시하는 커리큘럼만 잘 따라갔어도 일찌감치 배움을 통해 얻을 수 있었을 지식들이었을지 모른다. 가령, 발전사회학(사회발전론)을 3학년때 열심히 들었다면, 세계체제론에서 제시하는 비동시성의 문제들에 대한 인식을 조금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그 이후로 대학원에서 한국사회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편성에 대한 특수성의 문제설정은 식민지 시기라고도 할 수 있을 일제시대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대안적 삶의 방식이라는 문제는 교육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석사논문, "일제의 대한(對韓) 식민지 교육체계의 구상과 실행"은, 물론 여러 사건과 요소들을 포함하여, 나의 이러한 관심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들어간(온) <태동고전연구소>는 동양학 전공자들을 위해 한문지식을 전수하는 기관이다. 동양학이란 말에 이미 포함되어 있듯이, 한학이라고 하는 전통적 지식이  아니라 '동양학'이라고 하는, 근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성립된 현대적 학문범주를 위한 기초지식의 습득이 이 기관의 목표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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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4 11:08 2006/08/14 11:08

정은임 아나운서

2006/08/07 06:53

 

정은임 아나운서.

내가 대학 다닐때, 어쩌면 그 이전부터 MBC 라디오 방송에서《FM 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아나운서.

 

혁명이 일이 아니라 로망인 것처럼 보인 사람들에게, 아니 어쩌면 진짜 혁명가들에게도, 밤은 찾아왔을 것이고, 그들은 그들이 낮동안 부르짖던 무거운 구호와는 전혀 다른 조용한 이 아나운서의 음성에 끌렸을 것이다. 분위기 있는 용모에, 착한(듯한) 마음씨에, 아나운서로는 드물게(아니, 전국의 아나운서 분들께 죄송합니다만,) 사회성 있는 행보 - (그는 MBC 노동조합의 열렬 조합원이었다.)

 

아직 서슬퍼른 레드컴플렉스가 이 사회의 저류를 흐러던 때에, 어느 고별 방송에서였다던가, <인터내셔널>가를, <철의 노동자>를, 영화음악이랍시고, (영화음악인건 분명하지) 공중파 방송에서 틀어주었다던 사람.(물론 피디가 더 대단하다.) 이때문에(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TV는 꿈도 못꾸고 라디오만 나오고, 또 그나마 여러번 종영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사람.

 

미인은 박명이라던가, 2004년 7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다, 결국 8월 4일날 저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2년이 지난 지금, 물론,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이 사실이 포털사이트 다음에 올라와 있길래, 나도 여기서 한 번 언급하고 지나간다.

 

이 사람, 그런데, 이름난 4년제 대학 나온, 아마도, 집도 잘산다던 사람. 대학 다닐때 자기 집 가정부 아주머니랑 계급의식에 대해 얘길 나눴다던가?(이건 풍문으로만 듣던 얘기라 확실치 않음.) 어떻게 생각하면, 이 사람이 보인 첨예한 사회성도, 이 사람의 그런 유한계급의 풍모에서 나온 건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나도 그렇게 많이 생각했고.

 

이런 경우 사람들은, 십중 팔구 세계관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뭐 고민할 것 있겠는가. 이 사람이 '진짜'이든, '사이비'이든, 그건 이 사람의 진심만이 아는 문제인걸.

 

아래, 어느날 방송의 오프닝 멘트라고 하는군.(daum에 난 기사에서 퍼왔음. 사진도 거기서 퍼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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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22일 고공 크레인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저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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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7 06:53 2006/08/07 06:53

【 堯임금이 말씀하시길, 「누가 이 일을 순리대로 처리하겠는가?」 하니,

放齊가 말하길, 「임금님의 아드님인 丹朱가 깨여 있고 또한 명석합니다.」 하니,

堯임금이 말하길, 「아! 고집스럽고 흉악하다. 안된다.」

堯임금이 또 말하길, 「누가 마땅한 者인가?」 하니,

驩兜가 말하길 「共工이 두루 백성을 모아서 공을 펴고 있습니다. 쓸만합니다.」 하니,

堯임금께서 말씀하시길,  「共工은 말은 잘하는데, 일하는 건 편벽되어 있다. 공손한 것 같으면서도 하늘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안된다.」

堯임금이 또 말하길, 「아, 四嶽아! 엄청난 洪水가 하늘에 넘치고, 콸콸 넘쳐 산을 둘러싸고 언덕에 넘실댄다. 백성들이 근심할 것이니, 이를 다스릴 수 있는 者가 있는가?」

모두들 鯤이 可하다고 하니,

堯임금이 말하길, 「鯤은 命을 어기고 동료들을 어지럽혔다. 안된다.」 하니,

嶽이 말하길, 「그래도 말입니다. 한 번 시켜보고 못하면 그때 그만두게 하십시오.」 하니,

堯임금이 이에 嶽의 말을 듣고, 鯀을 등용했다. 그런데 9년이나 했는데도 功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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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堯임금의 일화다.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일이란, 물론 치수사업이다. 관심을 끄는 점은 堯임금의 조직 장악능력이다. 신하들보다 더 잘 알고 있으면서, 더 많이 물어본다. 그러면서도, 여기서는 안나오지만, 결국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킨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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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2 14:39 2006/08/02 1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