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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예수전> 발췌 - 3

25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하려고 서 있을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있으면 용서하시오.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도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잘못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예수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설파했다는 것이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그의 말(마태 5:39)은 불의와 폭력에 대한 무기력한 순응을 강요하는 데 활용되어 온 가장 유명한 경구다. 그러나 오늘 좀 더 섬세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의 이 경구가 오히려 저항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챈다. 사람은 대개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은 ‘바른손’이며 고대사회에선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뺨을 때린다는 건 오른손으로 상대의 왼빰을 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오른뺨을 때리면”이라고 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으로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하찮은 상대를 모욕할 때 사용되곤 했다. 그렇게 모욕당한 사람에게 예수는 ‘왼뺨도 갖다 대라’고 말한다. ‘나는 너와 다름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제대로 때려라’하고 조용히 외치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용서하고 순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저항하라, 불복종을 선언하라는 것이다.


결국 이 유명한 경구는 사람 취급 못 받는 사람들, 매일처럼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가슴 아픈 위로다. 예수는 그들 앞에서 애끊으며 입술을 깨물며 말한다. “여러분이 당장 여러분의 현실을 뒤집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러분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편이 아니라 여러분의 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인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부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자존심을 잃지 마세요.”


불의한 사회 현실 속에서 분노와 용서는 늘 균형을 잃곤 한다. 현실에 분노하고 싸우는 사람들은 대개 용서를 모른다. 그래서 많은 경우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으로 빠져 들어간다. 한편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은 분노할 줄 모른다. 그들의 분노 없는 용서,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 않는 무작정한 용서는 불의 한 현실을 덮고 그 현실에서 영화를 누리는 세력에게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에게 분노와 용서는 늘 병행한다. 성전 뜰에서 그의 생애 중 가장 분노하는 모습을 보인 예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용서를 말한다. 두 가지 모습은 얼핏 개연성이 없어 보이나 모두 예수의 모습이다. 예수는 분명히 분노하여 진실과 정의를 가리지만, 끝내 용서함으로써 증오와 보복의 고리를 끊어 낸다.


우리는 흔히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의 순서를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되 죄는 분명히 미워하라.’ 우리는 끝내 용서하되,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와 용서는 실은 하나다.


(187-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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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축제 때마다 그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었다. 7 마침, 폭동 중에 살인을 한 폭도들과 함께 바라빠라는 사람이 구속되어 있었다. 8 이윽고 군중이 빌라도에게 올라가서 그가 자기들에게 해 온 관례대로 해 주기를 청하기 시작하였다. 9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대답하여 “내가 유다인들의 왕을 여러분에게 놓아주기를 바라오?” 했다. 10 대제관들이 시기하여 그분을 넘겨주었음을 그는 알아차렸던 것이다. 11 그러나 대제관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빠를 자기들에게 놓아 달라고 청하게 하였다. 12 그러자 빌라도는 다시 대답하여 “그러면 [여러분이 말하는] 유다인들의 왕을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랍니까?]”하고 그들에게 말했다. 13 그러니 그들은 다시 소리 질렀다.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시오.” 14 그러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가 무슨 나쁜짓을 했단 말입니까?” 그러니 그들은 더욱 소리 질렀다. “그를 십자가형에 처하시오.”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은 (11:9~10) 왜 고작 나흘 만에 “죽여라!”라고 외치는 걸까? 학자들은 대개 군중들의 생각이 달라져서라고, 혹은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의 사주와 선동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에 의한 사주와 선동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그러나 군중들의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군중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과 “죽여라!”를 외치는 군중은 실은 다른 군중인 것이다.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던 순례객들, 즉 성전 지배세력의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던 갈릴래아 인민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고, 지금 “죽여라”라고 외치는 군중은 예루살렘 사람들, 즉 성전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다. 예루살렘의 평소 인구가 5만 명가량인데 성전에서 상근하는 사람이 1만 7,000명에 달했으니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조리 성전에서 일하거나 성전 덕에 먹고사는 사람들인 셈이다. 성전의 적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적이었다. 안 그래도 ‘갈릴래아 놈들의 괴수’예수를 마땅치 않아 하던 그들은 지난 며칠 동안 예수의 행태 덕분에 분노가 폭발했다. 그들은 예수가 성전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꾼들을 내쫓으며 “강도들의 소굴”이라 고함칠 때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고 싶었다. “호산나!”는 그렇게 이해관계의 이동을 통해 “죽여라”로 변한 것이다.


유년 주일학교에서 ‘강도’라 가르치는 바라빠는 “폭도 중에 살인을 한 폭도들”가운데 한 사람, 즉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장 항쟁을 벌이던 조직의 성원이었다. 군중들은 “차라리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외친다. “차라리”. 그들은 바라빠도 죽이고 싶지만 둘 중 한 사람만 죽일 수 있다면 바라빠를 풀어 주고서라도 예수를 죽이고 싶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반하여 폭동과 살인(다른 입장에서 볼 때 정치적 테러리즘, 혹은 의거이기도 한)까지 한 사람을 석방해서라도 예수를 죽이려 하는 걸 보면 당시 예루살렘 사회가 예수에게 가진 적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혹은 예수에게서 얼마나 강력한 위협과 공포를 느꼈는지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는 정치적인 혁명가가 아니었다.’는 상투적인 견해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치적 혁명성이 ‘주장’되는 게 아니라 지배체제에 의해 ‘증명’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겉보기엔 제아무리 혁명적이라 해도 지배체제가 별 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더 이상 혁명적인 게 아니다. 학술적, 문화적 차원에 머무는 혁명 이론 따위가 그렇다. 반대로 겉보기엔 그다지 혁명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데 지배체제가 어떤 과격하고 급진적인 혁명운동보다 더 위협을 느끼고 적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혁명적인 것이다. 예수는 비폭력주의자였고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건 다 안다. 그런데 왜 지배체제는 폭력을 사용하고 국가권력 접수를 목표로 싸운 바라빠보다 예수에게서 더 큰 위협을 느끼는가? 예수의 정치성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총독 빌라도가 예수를 죽이기를 꺼리는 모습은 빌라도에 대한 다른 역사적 기록들과는 거리가 있다. 요세푸스를 비롯한 유력한 역사가들은 빌라도를 매우 냉혹하고 영악한 인물로 기록한다. 빌라도는 예수가 죽고 7년 후 해임되어 송환되는데 그 주요한 이유도 소요 사태를 지나치게 잔인하게 진압했기 때문이었다. 빌라도에 대한 호의적인 묘사는 「마르코복음」집필 당시 기독교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로마에 의해 탄압받고 있던 그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가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정치적 반역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며 로마 총독도 예수를 죽이고 싶어 죽인 게 아니라 유다 지배세력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음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종교가 로마와 적대적이지 않음을 애써 주장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분명 사실과 다르지만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아 숨 쉰 예수보다 ‘죽음으로서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 예수, 즉 신학과 교리 속에 갇힌 예수를 선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46-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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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끝이 없다. 기독교도들은 ‘부활이 없엇다면 기독교도 없었다’며 굳세게 예수의 부활을 주장한다. 반면 부활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불신하는 가장 주요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은 역사 속에 실재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예수가 부활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가장 극적인일은 예수가 잡히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예수가 부활했다!”를 외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달라진 모습 사이에 예수의 부활 사건이 있다.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부활이 무엇인가다. 예수의 부활을 둘러싼 모든 주장과 논란은 예수의 부활이 육체의 부활, 즉 예수의 죽은 세포들이 재생한 사건이라는 전제를 갖는다. 그러나 부활이 단지 죽은 육체가 되살아난 것이라면 부활은 ‘영원한 생명’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살아난 육체는 즉시 노화를 시작하고 어쩌면 그날 다시 죽을 수도 있다. 죽은 육체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건 단지 육체가 사흘 동안 노화를 멈추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이적이지만, 그런 이적이 우리의 존경이나 신앙을 불러일으킬 수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는 이미 제자들 앞에서 충분히 이야기한 바 있다. 사람은 대개 육체를 사용하는 시간을 목숨이 유지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유한함은 우리를 겸허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집착에 빠지게 한다. 금방이라도 인생이 지나가 버릴까 아쉬워, 혹은 반대로 인생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집착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렇지 않다고, 육체의 목숨은 진정한 목숨이 아니라고, 육체의 목숨에 연연하면 진정한 목숨을 영원히 잃고 만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은 몸이 살아난 광경을 본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다라면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살아 있는 예수를 떠났었다. 그들은 예수가 말한 ‘진정한 목숨’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죽지 않았다고, 영원히 살아 있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목숨이란, 살아 있다는 것이란 지정 무엇인가? 육체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그것이 찬미되는 순간에도 이미 늙고 있다. 엄청난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보다 힘차게 살아 있는 듯 보이나, 그들은 둘러싼 모든 인간적 호의와 관계들은 대개 그들이 가진 돈과 권력을 향한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이 그들의 시체를 쓰고 살아 있는 것이다 . 스무 살짜리 노인도 있고 여든이 넘은 청년도 있다. 몸은 살아 있되 목숨은 죽은 사람도 있고, 몸은 죽은 지 오래이나 목숨은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 목숨이 소중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지만 지정한 목숨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묵상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그래서 육체의 목숨에 집착하느라, 그 목숨이 지속하는 시간 동안의 안락과 이런저런 부질없는 욕망의 충족에 매달리느라 정작 그 시간조차 허비하고 마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 내 삶 속에서 예수가 부활하게 함으로써 영원한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오랜 종교적 수련이나 특별한 구도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바로 이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던 사람이 이 순간 그런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권력을 얻은 후에 낮고 약한 사람들 편에 서겠다던 사람이 이 순간 스스로 권력을 잃어 낮고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옳다는 건 알지만 현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좀더 경제적 안정을 얻고 나서’라고 되뇌며 제 삶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사람이 이 순간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으로 새처럼 훌쩍 날아오른다면 예수가 그 안에서 부활한 것이다.


(261-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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