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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느린 희망


느린 희망 -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해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유재현 지음 / 그린비

 

 

소설가 유재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말>지에 실린 몇개의 글을 통해서였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 그것을 신화가 아닌 현실로 바라보게 해 준 글들이었다. 여전히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어쩌면 알튀세르가 소련에 대해서 했던 것처럼, 그것은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좌익적 비판이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대해서 몇개의 글을 쓴 소설가 방현석은, 죄송하지만 여기에 결정적으로 미달한다.) 

 

유재현은 그런 방식으로 쿠바를 보고, 보여준다. 많은 사진과 알맞은 분량의 많지 않은 글을 담은 이 책은 우리의 이상인 사회주의와, 쿠바를 사고하게 한다.

 

이미 알려져있다시피 쿠바는 구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소련과 이루어지던 교역의 중단, 미국의 야만적인 경제봉쇄로 크게 고통받는 과정에서 사회 자체를 재조직했다. '지속가능한' 생태-사회주의 사회로 말이다. (이러한 사회의 재구성과 관련해서는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예전에 쓴 이 책에 대한 독서일기.)

 

유재현은 묻는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지속가능한 사회'를 일굴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태 위기를 '관리'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확대할 수 있다는 관념, 오히려 생태위기의 '관리'를 새로운 이윤 창출의 영역으로 만들어내는 전략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 자체를 의심할 수 있어야한다. 쿠바가 보여주는 것은(물론 모순들로 가득찬 속에서 털털거리면 전진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후퇴하더라도' 사회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낸 경험이다.  (따라서 우리가 쿠바를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소박하고 느린 삶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주로 도시농업을 중심으로 했다면, 유재현의 이 책은 그것과 함께 얽힌 쿠바 사회 전반을 보여준다. 도시농업이든 생태-사회주의이든 사회 전체의 역사와 현실, 하나하나의 사람살이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흥미로운 책이다.

 

유재현의 눈은 또 다른 사회주의의 로망으로만 쿠바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속에는 모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경제를 유지하는 것은 생태-사회주의적인 농업생산만이 아니라 미국의 관광객들이고, 그들이 사용한 달러('컨버터블 페소'로 환전되어 국영 달러상점에서 사용되는)이다. 이들의 달러를 쿠바 국영 창고에서 훔친 물건으로 구한 쿠바 사람들은 국영 달러상점에서 자본주의 상품을 찾는다. 이중경제와 암시장은 쿠바 사회주의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쿠바가 만난 정세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쿠바는 그 속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다만 최근에는 볼리바르-베네수엘라와 맺은 무역협정을 통해 석유와 의료인력을 교환하고 있고 FTAA(미주자유무역지대, 스페인어로는 ALCA라는군)에 대항해 ALBA(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을 주창하고 있으니 희망을 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쿠바의 어린이들은 15살이 될 때까지 생일 때마다 생일케이크를 배급받는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만들어달라는 모양으로 빵집에서 구운 케이크. 하지만 누구도 굳이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의 생일을 알지 않는다. 밭을 갈던 늙은 농부와 아낙은 저녁 도시의 음악 회관 앞에서 열린 춤판에 나타나 멋진 살사춤을 춘다. 시골 마을에 눈망울 맑은 총각이 꽃을 파는 꽃집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현명한 당신 알아두세요,

         홀수 날에는 사랑을,

         짝수 날에는 우정을."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좀 더 잘살게 되겠지만 소비사회로 가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한다."

부디! 그래서 나도 유재현처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들의 세계를 지켜주세요."

 

사진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쿠바의 한 벽화.

 

교살된 모든 혁명에게,

박물관에 모셔진 모든 혁명들에게,

 

혁명이란 영구한 것임을

적의 이름으로, 발전의 이름으로,

탐욕의 이름으로 부정해버린 자들에게 주는

가장 소박한 진리 한점,

 

'모든 거리에 혁명을! En Cada Barrio Revolucion! '

 

 


 

덧붙여 ;

한편, 쿠바의 농업은 90년대 경제위기 이후 대단위 국영농장을 협동조합농장을 중심으로 재편한다. 국영대농장의 상당수는 기초단위생산자조합UBPC으로 전환되었다. 국유지를 무상으로 임대받은 이들 조합은 자율적으로 생산하고, 국영기업의 수매분 외에는 농민시장을 통해서 처분하기도 한다. 중국의 인민공사와 유사한 형태일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진행중인 실험이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예상한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를 앞당기는 것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유재현은 이후에 쿠바에 더 다녀오고, 최근에 한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다.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
유재현 (지은이) | | 2006년 11월

 

주문만해놓고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쿠바의 희망과 모순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이 신자유주의가 아닌 대안세계의 희망과 모순, 무엇보다 우리들의 그것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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