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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 에어컨이라는 아이디어

티코님의 [강물 에어컨] 에 관련된 글.
 
덧글을 따라가다가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다.

강물에어컨, 강물을 이용해서 도시를 식히자는 아이디어라는데,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외국의 대도시에서 이미 실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름철 냉방용으로만 쓰기 위해 25조원 이상을 들여 12개의 원전을 만들어 가동시키고 있는 셈이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거 원, 원전을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방법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들은 다양하게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원전을 또 짓자고 방폐장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 놈의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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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학교와 계급재생산


학교와 계급재생산 - 반학교문화, 일상, 저항
폴 윌리스 지음, 김찬호 외 옮김 / 이매진
 

영국 고등학교에서 장래에 육체노동자가 될 '싸나이'들에 대한 문화기술지이자 분석인 이 책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관찰이다. 다소 오래되기도 했고 영국의 상황이라는 점에서 시공간적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이데올로기가 주체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고 작동하는지, 이 과정에서 어떠한 모순이 작동하는 지 보여준다.
 
'싸나이'들은 학교의 반항아들, '비순응적인' 아이들이다. 우리나라의 학교에는 이런 식의 '싸나이'들 보다는 '날라리' '양아치'같은 반항아들이 있는데, '싸나이'들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반항적인 아이들이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육체)노동자에 대한 관념, 계급 재생산의 방식이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싸나이'들의 반항성은 단지 청소년들의 일반적인 반항적 기질과 연관시킬 수만은 없다. 그건 어느 시대 청소년들에게나 있겠지만, 왜 '싸나이'들과 같은 특수한 양식으로 발현되는가가 문제이다. 이들이 가지는 반항성의 근원을 저자는 (보다 광범위한 계급 대중 속에 위치하는) 비공식집단이 가지는 계급적 지배구조에 대한 간파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자격증을 강제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노동자의 통제와 분할지배를 위한 것이라는 점이나, 학교에서의 성적이라는 것도 육체노동자가 되는 속에서는 의미가 없다거나, 학교가 가하는 통제가 가지는 본질과 같은 것을 (비록 의식적인 형태는 아니라고 해도) '간파'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간파는 자신들(노동자계급)에 대한 고유한 자존을 확립하는 과정과 동행하는데, 그것은 주로 육체노동자의 남성성을 긍정하고 숭배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고유한 힘과 반항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간파는 항상 '제약'을 동반한다. 자신들을 긍정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로서 남성성은 남성 노동자들의 가부장성과 마초주의, 인종차별주의 등 퇴행적인 이데올로기로 쉽게 전화된다. (이미 그것과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육체노동에 대한 긍정은 역설적으로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단순육체노동에 불만없이 종사할 수 있는 대중을 생산한다.
 
책의 뒷부분에 이러한 결론도 흥미롭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앞 부분의 문화기술지 부분이다. 저자는 '싸나이'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검출하고 있는다. 예를 들어 노동현장에서 테일러주의적인 통제가 발전하면서 자본은 숙련 노동자에 고유한 기술을 포섭해가는 데, 노동자들은 비공식적 집단을 중심으로 작업 태만, 거짓말, 관리자 따돌리기 등으로 다양하게 대응한다. 이러한 방식은 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데 테일러주의적 통제의 전단계로서 시간표를 통해 학생들의 육체를 규율하려는 시도를 '싸나이'들의 비공식 집단은 끊임없이 교란시킨다.
 
저자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분석해 보여준다. 지배이데올로기는 순수하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오히려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이 책에서 보여주는 '싸나이'들, 그리고 그들이 이후 속하게될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가 질문하는 것처럼, 피지배계급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지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역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저자는 급진적인 유래(간파)에서 보수적인 결과(제약)이 왔다고 해고 적어도 저항의 역량은 존재한다는 점, 급진화에 대한 논리적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데 주목한다.
 
사회적 행위자들은 이데올로기의 수동적인 담지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전유하여 투쟁, 주장, 그리고 기존의 구조에 대한 부분적인 간파를 통해서 그 구조를 재생산한다. (349쪽)
 
그리고 노동자들이 그 속에서 발전시키는 문화는 도전적이고 반체제적인 성격을 유지하고 자본주의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존재한다.
 

1.
한편, 저자는 이러한 간파, 제약 등이 일어나는 공간, '싸나이'들 주체가 형성되는 공간이 '문화적 형태'의 독특한 차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게 이것은 물질적 구조는 물론이려니와 이데올로기와도 구별되는 것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문화적인 것의 독특한 차원이 존재하는가는 논쟁적인 주제일 것이다. 오히려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인데, 그 속에서 '싸나이'들이 주체화되는 양식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별도의 '문화적 형태'라는 차원을 상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마치 외부적으로 주어지는 '의식'으로 바라보는 편향에 근거한 것이 아닌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2.
육체노동자들 사이에 형성되는 남성우월주의는 이 책에서 분석하는 영국의 사례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가혹한 육체노동의 조건에서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형성되며, 이는 이들 노동자들이 자본에 맞서 단결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상징의 정치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생산적이고 남성적인 자신들과, 그 반대의 상징을 가진 지본가의 상징을 대비시킨다.)  ※ 비공식 하위집단의 문화(노동현장문화)가 노동자들의 단결에 미치는 영향은 신병현 교수를 중심으로 '시월'등의 몇 개의 연구에서 분석된 바가 있다. [노동자문화론 신병현 지음 / 현장에서미래를]

그렇다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동반되는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성 등도 필연적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물론 현장의 남성적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80년대 말 이후 대공장 남성 육체노동자를 주력대오로 해서 형성된 남한의 '민주노조운동'에서 이 것은 매우 심각한 쟁점이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 활용될 수 있는가? 혹은 정치적으로 부당하기 때문에 활용되어서는 안 되는 이데올로기의 요소인가?
아마도 단결의 초기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상징을 전화시키고, 남성 노동자들의 고유한 자존심이 타자들에 대한 경멸 혹은 지배의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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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진술 몇 가지.
 
이 책은 89년에 처음 번역되어 많이 읽혔다. 당시에 이미 문예패나 몇몇 학회의 세미나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학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의 경우에는 이 책을 이 이전에는 읽어본적이 없는데, 아마 내가 속한 학회의 관심사항과 달랐기 때문에 커리큘럼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아마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주제(교육)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교육문제에 대한 측면도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 주체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보여주는 데 있어서 훨씬 더 탁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서 '탈학교론'의 전제를 발견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그러한 결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마도 이 책의 구도에 따르면, 다소 어정쩡하겠지만) '범생이'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입장에서 '싸나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싸나이'들은 육체노동이나 손노동에 무능하고 수동적이며 순응적인 '범생이'들을 비난하는데, 이는 자신들이 반대로 육체적인 기능에 있어서 유능하고 독립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이것은 육체노동자가 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준비이기도 하고 학교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반항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측면에서 나를 포함한 범생이들은 참 비겁했다고 할 수 있고, 실제로 무능했다고 볼 수 있다.(이들이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지배계급의 일환이 된다는 것은 영국과 비슷한 구도이지만 참으로 짜증나는 일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가지는 육체노동자에 대해서 가지는 콤플렉스의 기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그것은 내가 다른 운동공간이 아니라 굳이 노동조합운동을 택한 이유와도 관련되어 있다.) 물질적 세계에서 마치 만능인 것처럼 보이는 독립적이고 강인한 육체노동자 상에 대한 존경과 경외 혹은 두려움같은 것들. 그것이 운동에 있어서 노동현장에 대한 보다 의식적인 강조와 연결되기도 할 것인데, 한편으로 그러한 '현장성'의 이중성과 모순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것은 나에게 필수적인 과제일뿐더러 매우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현장성의 이중성과 모순이란, 이 책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노동자 대중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적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대중이 가지는 이데올로기와 어떤 식으로든 결합하고 상호전화하지 않고서는 노동자 대중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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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 노동자운동의 혁신에 기여할 것인가?

월간 사회운동 2005년 6월호에 실은 산별노조 관련된 글입니다. 노동자운동 내에서 쟁점이 되는 것이기는 한데,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위해 전진적인 방식으로 논쟁이 구성된다기 보다는 조직형식적 논쟁, 정파적 이해에 근거한 논쟁으로 퇴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몇군데 현장동지들과 토론도 했었는데요, 여러 쟁점들과 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글입니다.
 
월간 사회운동 사이트 원문은 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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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별노조, 왜 문제인가
 
민주노총과 산하 각 산별 연맹들은 산별노조 건설을 최우선의 조직적 과제로 상정하고 조직재편을 위한 논의를 강력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산별노조 추진은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논의되어 왔지만, 산별노조 추진 흐름은 최근 더 강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 산별노조 논의가 불붙는 데는 (아마도 추진주체들 대부분은 더 거창한 이유를 말하겠지만) 2007년부터 기업단위의 복수노조가 허용되고 노조 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되는 등 노동관계 제도의 변화가 임박했다는 점이 실상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현상적인 것이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이른바 '87년 노동정치체제'라 불리던 특정한 노동정치체제가 체계적인 위기에 처했으며 전화의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1)

2007년 변화하는 법·제도도 그러한 압력의 일환이며, 당장 올해 하반기 '노사관계선진화방안'(이른바 노사관계로드맵)에서 다시 다루어지게 되어 있다.
 
노동조합운동의 주요 정치세력들은 모두 '현재의 체제'가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각자가 제기하는 해결의 방안은 다르지만, 그 문제들의 해결 과정에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조직의 변화를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는 동의가 형성되고 있다. 최근 금속연맹 선거와 같이 좌파와 우파의 불안정한 동거가 가능했던 정세적 배경도 여기에 있다.
 
모든 정치세력이 합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결론은 '어쨋든 산별노조 건설'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상급단체를 중심으로 한 일정박기식, 형식적 조직통합 방식의 산별전환 드라이브라는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다.
 

산별노조와 기업별노조
 
산(업)별노조(industrial union)는 같은 종류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에 의하여 직종과 기업을 초월하여 조직된 노동조합이다. 노동조합의 초기형태인 직업별 조직형태를 취하지 않고 직종은 차이가 있더라도 하나의 사업장, 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하나의 노동조합에 가입한다는 점에서 직종을 초월한다. 자본의 구획에 따라 묶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의 필요에 따라 묶인다는 점에서 사업장을 넘는다. 이와 함께 일반적으로 노조의 문제의식, 투쟁과제도 사업장을 넘어 산업과 계급 전체로 확대되는 데 유리하다.
 
남한의 기업별노조가 조합원 가입에 있어서 기업의 취업한 노동자만으로 구성되고, 기업 내에서 정규직 노동자를 배타적인 가입대상으로 하는 것과 달리 해고자 혹은 해당 산업에 종사했던 실업자, 취업 대기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조직형식의 측면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광범위한 단결에 보다 유리하다.
 
남한의 노조는 한국전쟁 이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이 모두 파괴된 가운데 대한노총 산하로 조직되었다. 1961년에 건설되어 대한노총을 이은 한국노총은 1964년 노동법 개정을 거쳐 형식적으로는 산별노조로 조직되었으나 실질적인 운영은 기업별노조로 이루어졌고, 이러한 산별노조 체제는 국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었다. 애초 한국노총이라는 조직자체가 5·16 쿠데타 직후 모든 노조연맹을 해체한 가운데 중앙정보부가 재조직한 것이었다. 조직체계와 무관하게 사용자와의 단체협상(단협)은 기업 노조(당시 조직체계에서는 분회) 수준에서 거의 이루어졌고 산업별 교섭과 투쟁은 부재한 반면, 산별 조직은 분회 해산권을 가져 민주노조를 탄압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었다.2) 이후 1980년 노동법 개정은 기업별노조 체제를 다시 복귀시키면서 노조운동의 기업별 분할을 강제했다. 이는 1970년대 말부터 다시 분출하는 노동자운동을 분할, 노조간 연대를 봉쇄하기 위한 조치로서, 이른바 '노동계 정화지침'과 함께 수행되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도 제3자 개입금지 등 법적 제도적 요인, 기업별 노조를 넘어서는 연대 차단과 상급단체에 대한 불인정, 가혹한 탄압 등의 영향으로 기업별 노조가 관행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 상황에 따라 때로는 산별노조 형태로 때로는 기업별 노조 형태를 강요했다. (오히려 정권과 자본에게 있어서도 노동조합 조직형태는 정세에 종속된다는 점.)
 
그러나 1987년 이후 노동현장의 직접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업별 노조 형태는 단일한 작업장을 중심으로 직접민주주의가 항상 가능하도록 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노조의 의사결정이 작업장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다른 고려 사항이 없다는 점에서 지도부 소환, 협상안에 대한 총회 등 직접민주주의 요소들이 제도적인 수준으로까지 강화되었다. 또한 역설적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노조의 부재는 국가 차원의 코포러티즘 형성에 난점으로 작용한다. 기업 내 쟁점에 노조가 몰두하면서 코포러티즘적 제도 형성에 어려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편 노조의 교섭력보다 기업의 지불능력이 임금, 노동조건 결정의 중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이른바 '종업원의식'과 상호작용하고 노동자 대중의 시야는 개별기업 내에 제한되었다. 임금단체협상(임단협)의 적용범위도 극히 제한적이어서 기업종업원, 노조가입 대상인 정규직 직원 내부에만 적용된다. 특히 제3자 개입금지의 영향 등으로 기업별 노조 외부와의 연대는 항상 제한되었는데, 단위 노조 외곽의 다른 노조, 운동단체와의 연대가 제한되면서 노조의 경제주의가 심화된다.3)
 
또한 이러한 체제는 대공장 정규직--중소 영세 비정규직의 분할로 발전해갔다. 대공장 노조는 자신의 투쟁력과 함께 독점자본의 지불능력 덕분으로 높은 임금 인상률을 쟁취했으나,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조의 경우 기업별 노조로는 조직화도 힘들뿐더러 투쟁을 통해 많은 성과를 얻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사정은 89년 이후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심화된다.
 
산별노조 추진, 현재의 의미
 
민주노총은 2005년 정기대대에 제출된 사업계획 중 산별노조 건설계획으로 ①산별노조 전환 및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②산별 연맹 통합재편, ③산별 교섭 쟁취와 산별 공동투쟁, ④ 2007년 이후 대산별 노조 건설 본격화 및 복수노조 시대 대응, 1국1노총 추진 등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시기의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당위적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①산업구조 변화에 대한 대응, ②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대응 1 : 비정규직화/사회양극화에 대한 대응, ③신자유주의공세에 대한 대응 2 : 노조 무력화대응, ④복수노조허용 /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등의 변화에 대한 대응과 같은 것들이다.4) ①~③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④가 민주노총이 2007년이라는 특정 시한까지 산별노조 건설 시한을 설정하는 이유일 것이다.
 
민주노총의 제 정파들은 산별노조 건설이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합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는 보다 광범위하게 노동자운동의 위기, 노동자운동에 대한 제도들의 위기이며 이 위기를 불러온 자본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른바 '87년 노동체제'의 위기로도 불리는 이 위기에 대해서, 정부, 자본과 노조운동의 정치세력 등 여러 주체들은 각자 제시하는 과제 혹은 쟁점들은 ①사회적 합의기구 구성, ②복수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 노사관계선진화방안(노사관계로드맵), ③비정규법안 + 정규직유연화(노사관계로드맵), ④산별노조 전환과 산별교섭, ⑤1국1노총(양대 노총 통합) 등 다양하다. 현재의 산별노조 전환의 흐름은 ①~⑤까지의 각 주체들의 대응과 함께 종합적으로 평가되어야하고 각자가 제시하는 대안들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트라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특히 정부 내 자유주의자들과 노조운동 안의 우파는 유럽식의 '민주적 코포러티즘' 구조를 지향하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권도 노동자 운동의 관리차원에서 (실현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 노동연구원, 노동교육원 등을 통해서 이러한 모델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그것이 실현 가능하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되는 산별노조 전환은 애초부터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델은, 전후의 특수한 케인즈주의적 타협과 냉전 시기 반공노조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남한에서 그대로 가능할 수 없다. 이른바 '87년 노동체제의 위기'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노동의 불안정화, 노동자운동의 위기의 남한에서의 현상 형태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이 위기에 대한 나름의 체계적인 대안인 셈이다.
 
급진적인 노동자운동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노동의 불안정화와 노동자운동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자신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 속에서 조직적 혁신과 정치/이념적 혁신 과제가 동시에 제기된다. 산별노조와 관련된 쟁점은 주로 조직적 혁신의 쟁점과 연관되어 있으나 정치/이념적 혁신의 과제와 결합한 전체적인 전략 속에서 논의되지 않으면 조직형식적 공론에 그칠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에서 제기되어온 쟁점들
 
산별노조 건설에 제기되는 쟁점에 대한 논쟁은 핵심적인 조직논쟁이라는 점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화의 역사와 함께 계속 이어져왔다. 과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의 주체들도 전노협이 산별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과도기적 조직이라고 규정하고 있었고 1992년 이후 전노협 조직발전논쟁(조발논쟁)과 함께 산별노조는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민주노총 건설과 산별노조 건설 경로를 중심으로 시작된 당시 논쟁의 구도는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를 강화하고, 전노협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 진영을 단결시키고 그 성과를 토대로 업종분과를 산별연맹으로 발전시키자고 했던 전노협 1안과, 전노협의 주도성에 집착하지 말고 전노협 미가입 중간노조를 폭넓게 포괄하는 민주노조 진영의 총단결 조직을 조속히 건설하자는 전노협 2안 사이에서 형성된다.
 
전노협의 조발논쟁은 1987년 이후 지역연대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폭넓게 단결하여 즉각 대산별로 조직을 건설하자는 입장과 업종간 연대의식과 동질성을 살려 단계적으로 업종을 중심으로 한 소산별노조 조직을 우선 건설하자는 입장 사이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은 전노협 사업장이 제조업 중심이었다는 점에서 금속산업연맹 건설 논쟁으로 이어진다. '대산별론'은 1987년 이후 지역차원의 활발한 연대운동이 보여주듯이 이미 업종별 차이를 넘어서는 실천의 성과가 존재하므로 이를 바탕으로 대산별을 건설하자고 주장한다. 민주노총 건설은 대산별 건설과 함께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시기가 늦어지더라도 전노협을 구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단결해야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이에 비해서 '소산별론'은 동질성이 높은 업종끼리 소산별(업종) 조직을 구성하고 이 성과를 바탕으로 대산별로 나가자는 것으로, 조선, 자동차, 금속일반의 세 업종의 소산별노조를 건설하고, 이 업종별 단위를 산별조직의 골간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이 입장은 민주노총을 가급적 빨리 건설할 것을 요구한다.5)
 
이러한 논쟁은 이전 시기의 전노협 조직발전 논쟁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후에도 금속산별노조 건설, 공공산별노조 건설 논쟁 등 대상과 방식을 변주해가며 유사한 구도로 반복된다.
이러한 논쟁 과정에서 제기되어온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자.
 
o 산별교섭과 산별투쟁
 
우선 "산별노조의 필요성이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다. '노동조합=교섭조직'이라고 보고 산별노조는 산별교섭이 핵심이라는 입장은, 조직을 확대할 경우 이에 따라 조직의 역량이 확대되므로 산별로 뭉치자고 주장한다. 교섭을 중시하는 경우에는 산별노조의 핵심이 산별교섭인 만큼 이에 걸맞는 산별교섭을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 몰두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논자들이 산별교섭이 교섭비용을 줄인다는 등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산별교섭 실현을 위해서라도 노사정 사회적 교섭이 필요하며, 산별교섭과 짝을 이루어 진행되어야한다고 보는 입장으로 연결된다. 이에 대한 비판은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의 확대라는 점에서 산별노조를 사고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산별교섭만 놓고 본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전망은 그리 밝지 못한데, 남한의 자본가들이 독일과 같이 산업별로 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산업별로 보다는 재벌기업별로 구획되어 있어 기업별 지불능력에 따른 교섭이 실리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산별노조처럼 단일 조직을 구성한 후에도 내부에 상이한 몇 개의 교섭질서가 가능한 것이라면 산별노조 건설이 교섭구조의 실현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비판할 수 있다.
 
산별교섭을 강조하는 입장은 1국1노총 주장으로도 연결된다. 진정한 산별교섭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1산업1노조, 1국1노총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특히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경우는 꾸준히 1국1노총을 주장해왔다.6) 이후 사회적 교섭, 산별교섭을 위해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식의 주장이 제기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산별교섭을 둘러싼 쟁점은 산별노조 건설을 위한 투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는 쟁점으로 연결된다. '산별교섭 쟁취투쟁'이 쟁점이다. 1998-99년 금속연맹은 산별노조 건설투쟁을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하면서, '기필코 산별'을 기치로 산별노조 건설을 위해서 별도의 투쟁으로 '산별교섭 쟁취'를 내걸고 연맹지도부가 삭발/단식 투쟁을 전개한다. 이는 오히려 당시 쟁점이던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한 투쟁을 방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보건의료노조의 2004년 투쟁도 산별교섭 쟁취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산별교섭에 대한 집착은 보건의료 산별협약 10장2조와 같은 문제를 발생시킨다. 10장2조는 산별협약을 최저기준이 아니라 지부단협에 대해 우선 적용하도록 했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대병원 지부 등 일부지부의 임단협이 하향평준화되는 효과를 만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별협약은 지부의 투쟁과 이를 위한 교섭권, 쟁의권을 억압/봉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우연한 실수는 아닌데, 자본가들이 산별교섭에 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단위 사업장별 교섭비용의 절감과 통제에 있기 때문이다.(노조 측에서도 교섭비용 절감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산별노조로의 단결이 '투쟁'을 통해야 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정치세력이 동의하지만 과연 어떤 투쟁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것이다.
 
2005년의 경우에도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는 사용자단체 구성 등 교섭상대 구성과 관련해서도 다시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는데, 투쟁의 요구가 다시 '산별교섭 쟁취'라는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한편, 2006년을 예상해보더라도, 민주노총이 제시한 '세상을 바꾸는 투쟁'이 사회적 교섭을 위한 압력수단으로 조직될 경우 이를 매개로 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것은 사회적 교섭에서 산별교섭으로 이어지는 교섭구조 구축과 연결될 수 있다.
 
o 대산별노조, 소산별노조, 그리고 건설의 경로와 조직운영의 방식
 
당면한 산별노조 건설이 금속단일노조, 공공단일노조 등 대규모로 구획되어야한다는 입장과, 보다 세분화된 산업 혹은 업종이어야 한다는 입장은 전노협 조직발전 논쟁에서부터 제기되어 왔다. 당면한 산별노조 건설이 세분화된 산업 혹은 업종을 중심으로 해야한다는 입장은 대산별노조로 발전해야한다는 지향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당면과제'의 성격, 단계론적 성격을 강조해왔다.
 
소산별노조 혹은 업종노조도 유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업종별 이해'라는 일종의 경제적 이해가 존재한다고 보고 이를 쟁취하는 실리적 조직형태를 긍정한다. 이는 산별교섭에 있어서도 업종단위로 조직을 건설해야만 이에 따라 사용자단체를 구성하고 산별교섭을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다. 산별교섭을 중시하는 입장이 소산별노조 혹은 업종노조를 옹호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실상은 자본이 업종별로 단결해있지 않은 마당에 교섭을 위해서라도 업종노조가 필요하다는 입장은 자본가가 뭉치는 '사용자단체 구성'을 노조가 요구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쟁점은 건설이후 조직운영의 방식에 있어 지역중심인가, 업종/기업지부 중심인가라는 쟁점과도 연결된다. 산별노조의 발전된 형태가 기업별, 업종별 조직을 유지하지 않고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완성하는 것이라는 데는 전반적인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현실론'은 업종과 기업별 질서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기간을 상당히 길게 상정한다. 대산별노조를 주장하는 입장은 이에 비해 업종별 구획을 부차화하고 지역별로 조직 골간을 구성할 것을 제시한다.
 
산별노조 건설의 일시론, 단계론과도 연결된 이 논쟁은 그러나 금속연맹의 산별노조 전환이 현대자동차노조 등 대기업 노조의 잇따른 투표 부결로 인해 과거와 같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대기업노조의 산별노조 전환이 일시적이든 단계적이든 난관에 봉착한 상황에서 오히려 대기업노조가 산별노조에 전환할 수 있는 방안이 논란이 된다. 이러한 논란의 과정에서 완성차 노조나 철도, 화물과 같은 운수부문 등 자체만으로 충분히 파괴력 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단위는 자기완결적인 소산별노조 혹은 업종노조를 구성하려는 경향이 발생하기도 한다. 가능한 단위, 파괴력 있는 투쟁을 할 수 있는 단위들끼리 모이기는 쉽다는 입장이 제시된다. 그러나 그 '파괴력'이 해당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것에 머무를 때에는 기업별 노조의 전투적 경제주의를 조금 더 확장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산업의 파괴력을 활용할 경우 해당 노조들의 경제적 이해를 관철할 수 있는 투쟁은 힘을 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적 파괴력만을 중심으로 사고할 경우 불안정노동자 조직화 등 기존노조 운동의 혁신과제는 간과될 수 있다. 사회를 바꾸는 변혁투쟁, 정치투쟁도 힘있는 산업만의 파괴력 있는 투쟁이 아니라 이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의 반란 속에서 가능할 것이다.
 
산별노조의 이념이 '완성차 노동자는 하나다'거나 '운수노동자는 하나다'를 넘어서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지향을 가진다면 보다 광범위한 단결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실현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고민, 실천과제는 보다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그밖에 총연맹(내셔널센터)의 위상이 전국적 투쟁본부인가, 정책과 대정부 협의를 담당하는 단위인가 하는 쟁점이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김유선은 임금단체투쟁(임단투)은 산별연맹이 담당해야할 과제이지 민주노총이 담당해야할 과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전국 중앙조직은 노동운동의 이념 정립, 사회개혁투쟁과 정책참가를 포함한 정책 제도 개선 활동, 정치세력화 등을 기본임무로 하고, 산별연맹은 임금인상, 고용안정 등을 둘러싼 단체 교섭과 조직확대, 해당 산업에 걸맞는 사회개혁 투쟁과 산업정책 개발 등에 활동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주장한다.7) 내셔널센터는 사회협약이나 정책참가, 정치세력화를 주임무로 하고 임단투·고용문제 등은 산별노조가 수행한다고 분리하는 것인데, 이러한 관념이 코포러티즘 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서 그간 좌파진영은 산별노조의 투쟁을 전국적인 투쟁전선으로 모아내는 것이 중요하며, 내셔널센터는 이러한 방향으로 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할 수 있도록 강화되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산별노조의 건설이후 조직운영에 있어서 지부 지회 등 현장민주주의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도 중요한 쟁점이다. 금속노조의 경우 단위 사업장 지회의 파업권을 인정할 것인가라는 쟁점으로 드러났다. 지난 해 보건의료노조의 산별협약과 서울대병원 지부의 투쟁과 관련된 논쟁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사업장 지회의 파업권이 인정되더라도 산별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협약이 성립된 후에는 지부 파업권이 규약에 있느냐와 무관하게 지회의 독자 투쟁은 억압되는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산별노조의 운영 속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가 된다. 단지 규약에 정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또한 산별노조는 사업집행의 인적, 재정적 역량을 중앙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럴 경우 현장 간부가 부족하게 되고 이로 인해 '현장 공동화(空洞化)'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8) 단위노조의 집행간부는 단지 '집행실무자'가 아니라 조직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기되어온 쟁점들에 대한 평가
 
기존의 여러 쟁점들은 우리나라 노조운동의 지배적 형태인 기업별 노조를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쟁점은 이미 1990년대 초에 대부분 형성되었다.
 
쟁점은 기존 조직의 구획, 통합 이후의 운영 등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쟁점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산별노조 건설이 주로 기업별 노조 조직간의 통합으로 사고되었기 때문이다. 기업별 노조가 통합하면 그것으로 조직화의 공백은 없을 것이라고 사고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산별노조건설 방식이 주로 존재하는 기업별 노조의 통합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여전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존의 쟁점을 간단하게 기각하거나 무시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으며, 여전히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계급적인 원칙에 입각한 입장이 있어야한다. 조직통합을 넘어서는 노동자운동의 전화에 대한 노력이 있어야 대기업노조의 산별노조 전환 실패가 곧바로 '산별노조실패 = 노동자운동혁신의 실패'라는 식으로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주로 '대공장 이기주의'라고 불리는, 대기업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할 수 없는 이유들을 제거하는 노력도 가능할 수 있다.
 
기업별 노조의 통합을 중심으로 형성된 쟁점은 조직형식적 논쟁으로 전개될 뿐 아니라 기존의 기업별 노조 중심의 조직화 공백을 간과할 수 있다. 이미 노동의 불안정화 속에서 기존의 기업별, 정규직 중심의 노조운동은 급격하게 실리적으로 변화했으며, 불안정노동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왔으나 이를 조직하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이후 노조가 몰락한 중소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 등 불안정노동자, 여성노동자 조직화는 조직통합을 중심으로 한 논쟁에서는 부차적으로 취급된다. 불안정노동자와 여성노동자 조직화의 문제는 산별노조의 장점을 부각하기 위한 여러 수식어 중 하나로 제시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공세와 노동의 불안정화, 기존 노조운동의 이에 대한 대응의 실패와 함께 1990년대에는 미처 사고하지 못했던 노동자운동 혁신의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노동조합이 처한 상황과 노동자 대중의 존재방식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변화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쟁점들이 제기되는 것이다. 따라서 산별노조 건설의 입장을 내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동자운동의 위기에 대한 분석과 이에 대한 대안이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과제는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한 투쟁, 노동조합의 사회운동적 성격 복구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주로 쟁점이 되어온 것들은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혁신이 요구되는 계급지형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논쟁은 확장되고 새로운 논점을 중심으로 전화되어야한다.
 
비정규직의 조직화에서, 조직방식, 자원투입, 조직편제의 문제 등이 제기되고,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비정규직 조직화에 있어서 지역일반노조의 성과, 특수고용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인 수준의 직종노조의 활성화라는 조건은 산별노조 건설에서 기업별 노조의 통합을 넘어서는 쟁점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남한에서 민주노총이 이념형으로 생각하는 서유럽형태의 산별노조가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별도로 발본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전후의 자본주의 황금기에 가능했던 구조라는 점이나 산업적 통일성이라는 측면에서의 차이(재벌지배경제구조), 자본가들의 조직구조, 노동조합 출발의 역사적 차이 등을 볼 때 오히려 제3세계의 노조운동 역사,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후 전평의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것 자체가 쟁점은 아니었다. 제3세계 국가들도 대부분 이미 초기업 노조 형태를 띄었다는 것이 이유이기도 하겠으나 남한에서 추진되는 것과 유사한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방식으로 노조운동의 혁신이 이루어진 경우는 없다. 기존의 노조에서 민주화된 노조 분파가 이탈하여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는 경우에도, 국가-자본가 단체와 안정적인 교섭권을 확보할 수 있는 '산별교섭'을 목적으로 한 경우는 없다. 전평의 경우에도 강력한 투쟁력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산별 단일노조를 건설했던 것이지 '산별교섭'을 위해서 산별노조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잠시 외국과 일제 하, 전평 시기를 검토하자.
 
역사적 사례들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 추진 흐름들은 많은 외국 사례를 참고하고 있다. 그러나 사례들은 하나같이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에 한정되어 있으며, 역사적인 과정보다는 주로 현재 운영되는 '완성된 모델'을 소개하고 이를 적용하기 위한 교훈을 얻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산별노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쟁과정에서도 건설 과정이 아니라 산별노조의 운영모델을 소개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산별노조라는 조직형태의 건설이 단지 조직모델을 수입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산별노조 형태가 특정한 정세에서, 특정한 운동의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노동자운동의 역사에 대한 검토가 먼저 이루어져야한다. 산별노조라는 조직형태는 노동자운동의 역사의 한 항목으로서 다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o 유럽과 미국, 19세기 말 20세기 초9)
 
1890~1914년 기간 동안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새로운 노조주의가 출현한다. 19세기말 세계경제의 불황과 영국헤게모니의 쇠퇴, 대량생산체제의 도입은 이제까지 조직된 직종별노조를 통해서는 조직할 수 없는 새로운 미조직 노동자 대중인 미숙련, 반숙련 노동자층을 형성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은 영국의 신노조주의(new unionism)와 일반노조운동, 독일의 산별노조운동, 미국의 산별노조운동 등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혁명 시기에는 독일의 평의회주의, 러시아의 소비에트 등 대안적 노동자 조직형태가 출현한다.
 
(1)영국: 신(新)노조주의 운동
 
19세기 중반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직종을 중심으로 숙련 노동자들이 주도하여 확립되었다. 이때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조합비로 '파업기금'을 확보하고 개별 교섭 과정에서 조합에서 설정한 임금 이하의 노동력 판매를 거부하고 이를 통해 실업 = 파업을 하는 조합원에게 생계비를 지급한다.(클로즈드 샵(closed shop)) 그러나 이들이 조직하지 못하는 새로운 미숙련, 반숙련 노동자층이 등장하는 데, 이들을 조직하는 영국의 신노조주의는 1889년 런던부두파업을 계기로 폭발한다. 부두의 대중적 파업에서 기존 노조에 포괄되지 못한 미숙련, 임시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파업이 승리하고, 이후 미숙련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파업과 조직화가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숙련노조도 미숙련 노동자 조직화를 시작하여 철도에서도 1889년 저임금·임시직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철도노동자일반노조가 결성되는 등, 이들은 상호부조라는 전통적 노조의 활동을 넘어서는 전투적 노조를 천명하고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위해 투쟁했다. 신노조주의를 주도한 것은 미숙련·저임금·일용직노동자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부문주의를 극복하고 전체 노동자를 하나의 노조로 조직한다는 일반노조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구체적인 조직형태를 넘어 '노동자는 하나다'는 이념적 성격이 운동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일반노조들은 특정 산업에 상대적으로 집중하면서 산별노조 형태를 띄거나 기존의 직종노조와 통합하면서 산별노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여전히 영국의 노조운동의 전통은 업종과 산업을 불문하는 조직형태가 많아 '산별노조'라 부르는 만큼 '일반노조'라 부를 수 있으며 업종별로 무관해 보이는 조직끼리의 통합도 일반적이고, '1산업 1노조' 식으로는 조직되지 않는다.
 
(2)독일의 산별노조운동
 
독일은 후발 자본주의 주자로서 국가를 중심으로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시행했다. 자본가들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은행자본을 중심으로 트러스트, 카르텔을 구성하면서 독점을 심화하고, 기업은 수평적으로 통합되고 자본가들은 국가의 지원아래 산업별로 조직화된다. 이는 독일식의 산별교섭 모델이 가능한 토대가 되는데 노동자의 단결 이전에 자본가의 단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일에서는 19세기 중반, 장인 중심의 노동조합이 있었으나 광범위한 노동조합의 결성 이전에 사회민주당이 우선 활성화된다. 1878~79년의 심각한 경제불황기에 기존 노조조직은 국가의 박해로 거의 파괴되지만, 反사회주의법이 시행된 10여 년 동안 오히려 사회민주당은 성장하면서 노동자 조직을 확대한다. ('영웅적 시기') 1880년대 독립노조 운동이 재개되는데 노조 간부들은 대부분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다. 1888~9년 전국적인 파업의 물결이 있었지만 여전히 숙련공 중심의 직종노조가 주류였다. 1890~1914년 동안 점증하는 기계화와 노동분업에 따라 전통적인 숙련공은 쇠퇴하고 미숙련·반숙련 노동자가 증가하고 노조는 '산별원리'를 채택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직종의 틀을 사실상 넘어서지 못했다. 곧이어 1차 세계대전시기 사회민주당의 전쟁협력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위기에 빠진다. 독일 패전과 함께 독일제국은 붕괴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되면서 이시기 독일 노동자들은 1919년 독일노총을 결성하고 논쟁은 "전국적 중앙노조 vs 평의회", "산별연맹 vs 직종연맹"의 구도로 진행된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영국이나 미국처럼 광범위한 노동의 탈숙련화는 지체되고 숙련 노동자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가운데 직종노조 형태가 계속된다. 나치 시기 노동조합의 파괴 이후 현재 형태의 독일의 산별노조는 전쟁 후 재조직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AFL-CIO와 미군정의 지원을 중심으로 노조에서 공산주의자를 배제(정치적 급진주의의 거세)하고, 현재와 같은 형태의 산별노조 형태가 비로소 정착한다.
 
(3)미국의 산별노조운동
 
미국 사회는 1865년 남북전쟁이 종식된 후 빠른 산업화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자동화된 생산체제는 미숙련·반숙련 노동자들을 증가시키는 반면 숙련노동자들은 점차 약화된다. 1880년도와 1890년도 불황기 노동자대중의 위기는 1886년에는 미국노동총동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 AFL) 건설로 이어진다. 이는 직종별로 조직된 형태(직종별 노조주의(craft unionism))로 숙련노동자들만 가입되었고, 반숙련 혹은 미숙련 노동자, 그리고 흑인노동자들은 가입하지 못했다. 1905년에는 산별노조를 추구하는 생디칼리즘 경향의 노동자조직인 세계산업별노동조합(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 IWW)이 조직된다. 그러나 1차 대전 중 탄압이 가중되고 1918년에만 100명 이상의 IWW 지도자들이 반역죄로 투옥되면서 1924년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조직이 붕괴한다. AFL의 조합원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나 여전히 직종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도입에 따라 광범위한 반숙련·미숙련 노동자, 즉 기존의 숙련 직종 노조로는 조직할 수 없는 노동자대중이 중가한다. 따라서 1930년대에는 많은 반숙련·미숙련 노동자들이 산업별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 : CIO)로 조직되었으며 산별 노조주의가 주류의 움직임으로 되어간다. 약 400만 명의 노동자들이 1934∼1938년 사이에 CIO로 조직되었다. CIO는 주로 대규모 공장(주로 자동차 산업)이 집중된 지역에서 성장했다. CIO의 전략은 낡은 직업별노조와 과감하게 결별하고 새로운 형태의 전국적인 산업별노조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CIO 지도부는 AFL 내부의 개혁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력한 조직화를 진행했다.
한편,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이 도입된다. 뉴딜 정책은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향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는데, 이에 따라 노동자운동에 유화적인 제도가 허용된다.(와그너법) 그러나 대공황 종식 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탄압이 시작된다. 1947년 태프트-하트리법을 통해 노동분쟁에 금지명령제도 부활, 노동조합의 부당노동행위가 규정되고, 클로즈드 샵이 금지된다. 이러한 법안 통과와 조직률 정체, AFL의 산별노조화, CIO 내부의 공산주의자 축출 속에서 AFL과 CIO는 1955년 통합한다. 1959년 제정된 랜드럼-그리핀법은 노동조합 내부의 재정을 국가가 감시하고 사용자로부터 교섭단체로서의 승인을 목적으로 한 피케팅 행위를 제한하는 등 노조활동을 제한한다.(최근 남한에서 노사관계선진화 방안 등 법·제도 개편과의 유사성에 주목할 수 있다.)
 
이들 나라의 사례를 보면 산별교섭과 관련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영-미의 경우에는 자본의 수평적 통합이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식' 산별교섭-산별협약은 정착되지 않는다. AFL-CIO도 독일식의 산별교섭을 시도했지만 사용자단체를 찾을 수 없었다. 반면 독일의 경우에는 자본이 산업별로 수평적으로 조직되어 있었고 산별교섭-산별협약이 가능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의 요구이기도 했는데 독일식 독점자본은 코포러티즘의 물질적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o 라틴아메리카, 1970년대 이후 멕시코·브라질·아르헨티나의 노조운동
 
남한은 세계자본주의의 반주변부로서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보다 남미 등 신흥공업국의 사례와 유사할 수 있다. 특히 어용노조의 민주화과정에서 새로운 노조운동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이들 지역의 사례도 주요하게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들 국가의 새로운 노조운동은 국가의 전국적인 노동통제에 저항하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탈집중화 경향을 보여준다. 이들 국가에서 전형적인 산업-지역별 조직은 국가권력에 의해서 관료화·어용화 되었으며 이에 대항하는 운동은 공장단위의 노조대표 선출, 공장위원회 건설 등을 중심으로 했는데, 이는 사업장 단위 조직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준다. 남한의 경우에도 사업장 조직을 중심으로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사업장 단위의 민주화를 통해서 어용적인 전국조직을 극복하고 새로운 단결을 모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멕시코의 경우 집권 제도혁명당(PRI)의 사실상의 부속조직으로 노총(CTM)이 존재하고 강력한 코포러티즘 정책을 통해 노동조합을 노무관리기관으로 유지해왔다. 1970년대 이후 독립노조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전자산업노조 내 민주파, 자동차 산업노조(기업별) 등의 독립노조운동이 있었으나 산업적 단결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브라질은 국가가 관리하는 어용노총 체제에서 1970년대 후반 중화학공업의 성장과 경제위기라는 정세에서 노동자운동이 폭발한다. 1978~80 대파업투쟁, 상파울로 주변의 ABC 공단의 금속노동자를 중심으로 대파업 진행은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을 형성한다. 대파업 이후 노조의 민주화는 사업장 단위에서 노조반대파, 공장위원회, 전투적인 노조의 공장대표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어용적인 산별노조에 대항해 공장단위로 구성된 공장위원회는 민주적인 노조를 촉진한다. 이후 별도의 공장조직을 구성하는 것보다는 노조의 공장지부를 장악하는 것으로 전개되지만 이들은 이후 독립노조로 발전하거나 노조를 민주화한다. 이들은 1981년 브라질의 민주노총이라고 할 수 있을 노총(CUT)을 결성한다. 사업장 단위의 전투성과 직접교섭 전략이 성공하면서 어용노조를 압도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CUT는 자신들이 만든 노동자당(PT당)과 함께 지속적으로 우경화 되었다. CUT 자체가 관료화되고 국가 보조금에 의존하는 측면이 클 뿐 아니라, CUT의 이전 간부들이 주로 노동자당에서 이후 의회 선거의 후보자에 포함되어있거나 입각 대상자 명단에 포함되는 방식으로 PT당과 결합하면서 제도화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독특한 코포러티즘 전통으로 페론주의가 존재했다. 노총(CGT)은 노동관료가 노조를 장악하고 국가의 대해 협조하는 대가로 일정한 권력과 고용안정과, 사회보장을 약속 받았다. 군사정권과 민간정권의 교체 과정에서 노조의 분열과 통합이 진행되고 여전히 CGT가 주도하였지만, 1969년 산업도시인 코르도바의 지역총파업을 계기로 노조민주화 투쟁이 강화된다. 여기서도 공장단위의 투쟁적인 지도부를 구성이 활성화된다. 1976년 군사정권 하 민주적인 노조활동가의 대량 살해되지만 경제위기와 고용불안 속에서 노조는 다시 급진화 되고 노총은 몇 개로 분열했지만 공장단위에서는 '조합간 조정위원회'를 통해서 사업장단위의 투쟁 전개했다.10)
 
라틴아메리카 사례에서는 노조민주화의 과정에서 사업장 단위 조직이 갖는 중요성이 확인된다. 또한 브라질과 같이 '민주노조'가 초역사적으로 민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o 일제하 노동운동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일제하 운동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산별노조 건설이 단지 '조직통합'의 과정이 아니며, 동시에 현장을 강화하는 노조운동의 재편과 혁신의 과정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30년대 산별노조운동을 먼저 살펴보자.11) 일제하 노동조합은 초기에는 지역별(일반)노조로 결성되었다가 지역별 업종노조로 분화한다.(대표적으로 고무업종, 섬유업종 등) 1920년대 중반부터 직업별노조를 산별노조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조선공산당의 지도방침에 따라 서울에서 인쇄노조를 출판노조로 변경하는 등 각 지역별로 산별조직화가 진행되었다. 산별노조 방침은 이후 1930~31년 사이 전국 각지의 노동단체를 통해 실현된다.
각 지역에서도 인쇄출판업이 산별노조 건설을 선도하고, 다른 부문으로 확대된다. 경성 섬유공조합, 출판노조, 용산의 금속노조, 인천의 금속노조, 항만노조, 함흥의 화학공조합, 부산의 부두노동자조합, 원산의 운수노동자조합 등이 이때 결성된다. 이때의 산별노조란 지역별로 구성된 산별조직을 의미하는데, 대도시에서 시작되어 중소도시로 파급되어 간다.(이에 비해서 현재에는 주로 전국조직만을 산별노조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다만 중소도시의 경우 영세업종의 통합으로 산별노조 건설이 힘든 경우 일반노조 형태인 '합동노조'로 조직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러한 산별노조 운동은 1920년대 중반기의 일시적인 침체를 극복하면서 조직을 쇄신-부활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이 시기의 산별노조 조직방침은 지역내 각 공장에 공장반을 두어 노조의 분회를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 내 산업에 따른 산별노조 지부를 설치한 후, 이를 전국적으로 통일한다는 방침이었다. 따라서 산별노조 건설 흐름과 동시에 공장 내 공장반 설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공장반 설치는 활동과 조직의 중심이 공장과 사업장 현장으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했다. 노조활동에 있어서도 보다 현장에 밀착한 생생한 요구를 수립했는데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현장을 강화하는 작업을 동시에 의미했다는 것이다. 산별노조 재편과정에서 노조 내에 부인부, 청소년부, 실업부를 조직하여 미숙련·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된다.
 
이러한 산별노조 시도는 아직 미약하지만 1930년대 일본의 중화학공업이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군수부문을 중심으로 노동자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자본주의 발달과 이른바 산업합리화 정책의 진전으로 숙련노동의 쇠퇴와 미숙련 노동자의 증가, 실업자 증가, 여성과 청소년 노동이 증가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의 변화, 노동자 증가는 전면적인 수준이라 보기는 힘들었으며 당시의 노동운동가들이 산별노조를 지향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강했다.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의 지침이 산별노조를 지향하고 있기도 했을 뿐더러, 전국적 차원의 단일조직을 조직하여 전국적 연대와 단결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해방 투쟁을 지향한 것이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적 노조운동으로 전환한다. 혁명적 노조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산업별 조직방식을 채택.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인 공장위원회를 강화하고 산별노조 지부 구성, 각 산별노조 지부의 지부협의회와 이를 바탕으로 한 도 협의회, 전국 중앙협의회를 구성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해방이후 노동자운동은 1945년 11월 1~4일 집중적으로 16개 산별노조를 결성하고 11월 5~6일 전국노동조합평의회를 건설한다. 일제 시기부터, 혹은 해방직후 급속히 확대된 직장별, 직종별, 산업별 형태의 각종 조직이 지역산별노조로 결집하면서 전국적인 산별노조 체계를 급격하게 구축된 것이다. 16개의 산별노조로 조직되었고 산별노조는 -- 지역별 산별[지부] -- 공장[분회] -- 직장[반] -- 5명 단위[조]로 구성되었다. 지역일반노조 형태의 지역합동노조는 지방평의회에 직속으로 가입한다. 지역에서는 전평 전체의 도평의회가 구성되고 여기에서 산별지부가 결합했다. 이러한 공식 골간 외에도 현장의 통일전선 강화를 위해 공장(관리) 위원회, 자치위원회, 직장위원회, 투쟁위원회 등이 활발하게 결성된다. 전평의 강력한 활동은 중앙집권적 산별노조를 통한 지도도 중요했지만 강력한 현장조직력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현장 기초단위가 구성되어 가능할 수 있었다. 또한 전평이 계급적 원칙에 입각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공산당 세포모임이 사업장마다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12)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산별노조 건설이 현재 추진되는 방식처럼 반드시 전국조직을 상층에서 구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산별노조 건설이 오히려 현장을 강화하는 의미를 가지고 추진되었다는 점, 산별노조의 힘은 '산업별 조직형태' 이전에 강력한 현장조직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기되어야할 쟁점들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유럽이나 미국, 1970년대 이후의 제3세계의 사례 모두는 노동조합 조직의 심대한 변화(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는 계급구조의 변화와 이에 따른 계급투쟁의 전환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노동정치체제의 동요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의 재편 방향은 노동자운동의 혁신 혹은 실패를 반영하는 것일뿐더러 그 재편방향 자체가 계급투쟁의 장소가 된다.
 
남한 노동자운동에서 위기의 성격이 복합적이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에 대한 대안도 여러 가지로 제기되고 있다. 노동자운동의 재편방향은 이후 더욱 뚜렷하게 분기할 것인데, 이러한 분기는 당분간 '산별노조 건설의 쟁점'이라는 조직발전 전망을 둘러싼 쟁점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것이 초역사적인 과제는 아니라면 지금 시기에 노동자운동에 요구되는 과제를 중심으로 노동자운동의 조직적 발전 전망이 세워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계급주체 형성을 위한 과제의 하위과제로서 조직형태의 재편이 제기될 수 있다. 산별노조에 대한 논의도 이러한 조직형태의 재편의 일부분인 것이다.
 
기존의 기업별 노조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응하기 위한 효율적인 조직화 방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초기업단위 노동조합 형태를 실현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그 해답이 곧바로 현재 논의되는 형태의 산별노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한다. 신자유주의 하 노동자대중에 가해지는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압력에 대응하는 적합한 조직형태는 무엇인가라는 방식의 질문이 필요하며 이에 따라 쟁점이 구성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노조운동이 사업장 단위의 전투적 경제주의로 제한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기업을 넘어선 단결의 확대와 함께 노조운동의 사회운동적 강화를 위한 조직의 혁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운동의 우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산별노조를 통해 '사회공공성' 요구를 제기하고 이를 '사회적 교섭기구'에서 논의하고, 또 이를 압박하기 위해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배치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노조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적 조건 자체의 변화(그리고 장기적 변화를 추동하는 운동의 경향)가 필요한데, 이는 지역을 중심으로 '취업한 노동자'에 제한되지 않는, 기층민중에게 조직적으로 열려있고 활발하게 연대하는 구조로 재편되어 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조직적 과제를 넘어서 노동자 운동의 혁신을 위한 과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한다. 특히 노동자 운동이 축적조건(객관적 조건)과 이념/조직(주체적 조건)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이념'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조직적 재편전망과 아울러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이를 대중운동과 이 이데올로기, 조직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 노동자운동의 혁신은 불가능할 것이다. 불안정노동자 조직화의 측면만 보더라도 이 과제는 조직확대를 위한 사업은 물론이지만 기존 노조운동의 이념이 불안정노동자의 조직화와 투쟁에 적합한 내용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50억 기금 모금이나 조직활동가 배치를 통해서도 성과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노조 운동은 이념과 조직을 포괄하는 하나의 '운동'이지 양적 성과를 중심으로 하는 외판사업 비즈니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한다고 할 때, 그러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이를 추진하는 주체들과 타협이 아니라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토론과 실천을 위한 몇 가지 제안
 
현재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하여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몇 가지 구체적인 쟁점을 논의해보자.
 
o 산별노조와 지역일반노조 - 비정규직 조직화의 쟁점
 
지역을 근거지로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으로 일반노조가 활성화되고 있다. 물론 현재의 지역노조가 지역을 중심으로 단지 조합원을 조직하는 역할을 넘어서, 지역을 운동이 근거지로 복원하기 위한 활동을 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지역 일반노조는 산별노조가 활성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별 노조 형태로 조직을 유지할 수 없는 중소·영세 비정규직 - 불안정노동자에게는 거의 유일한 의미있는 조직형태이다.
 
산별노조 추진주체들에게도, 여전히 기업별 노조의 통합이라는 것이 주된 관심이기는 하지만 지역일반노조의 고민과 수렴하는 측면이 있다는 데 주목해야한다. 금속노조의 지역지부 건설, 공공연맹의 지역공공서비스노조 건설 등은 산별노조를 지역적 차원에서부터 일반노조와 유사하게 확장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지역 일반노조 주체들에게 있어서도, 지역 일반노조가 산별노조의 건설과정에서 결합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단위도 있는데 이는 산별노조가 일반노조를 품어 안을 만큼 충분히 가입대상을 확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정부는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공공, 사회서비스 부문에서 여성 불안정노동자를 확산시키고 있다. '사회적 일자리'에 종사하는 여성 불안정노동자들은 불과 수개월 단위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을 조직하는 것은 기업별 노조로서는 불가능할 뿐더러 기업별 노조의 연합형태로서의 산별노조로서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고민들의 진전은 지역을 근거로 하는 불안정노동자조직화에 있어서 산별노조 건설과 지역일반노조가 경향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준다. (조직적 통합을 직접 지향하는 수렴이라기 보다는 노조 조직화의 문제의식과 그 형태가 수렴해간다는 것. 따라서 조직적으로 함께 할 수 있을지 여부는 토론과 함께 주체들의 실천적인 노력, 상호 파괴적인 조직경쟁을 하지 않는 존중과 예의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향이 19세기말 20세기 초 직종별노조의 산별노조로의 전환과정이나 영국의 신노조운동에서 일반노조 운동의 활성화, 산별노조의 조직화 병행과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산별노조, 일반노조의 건설은 폭발적인 미조직노동자(미숙련노동자)들의 조직화 과정에서 실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조직적 진출이 새로운 조직의 출현을 위한 조건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현재 남한에서 기업별 노조의 통합을 통한 산별노조건설이라는 현재의 시점에 미조직노동자(비정규직노동자)들의 진출이 아직 기존의 노조를 압도, 상대화하고 새로운 조직을 출현시킬 만큼 폭발적이지 않다. 따라서 결국 기존의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의 결의로 산별노조를 건설해야한다는 난점이 발생한다. 산별노조 건설의 과정이 끊임없이 이미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에 결정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난점은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이 가지는 한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불안정노동자조직화에 있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의 중요성에 비추어본다면 이러한 흐름을 강화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또한 조직된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노동자대중의 진출, 새로운 운동의 개시에 어떤 기여를 할 것인가라는 과제와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현재의 산별노조 건설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떤 내용과 형태로 진행되어야할 것인지에 대해서 시사점을 던져준다.
 
o 지역중심, 지역을 골간으로 하는 산별노조의 건설
 
지역을 중심으로 산별노조를 건설하고 실질적으로 지역을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노조가 현장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가운데에서도, △사업장을 넘어서는 공동투쟁이 가능하며, △지역에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는 불안정 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고, △지역의 민중운동, 사회운동과 결합할 수 있다.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의 골간을 구성하고 지역의 사회운동과 연대하거나, 지역의 광범위한 불안정노동자를 조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업별 노조나 그 연합체제로서 연맹, 그러한 수준을 유지하는 산별노조로는 불가능하다. 앞서 예를 든 '사회적 일자리'의 불안정노동자들의 경우와 같이 새로운 형태로 계속 확산되는 불안정노동자를 '업종노조'나 '업종을 골간으로 한 산별노조' 형태의 조직이 조직대상으로 포괄할 수 없으며, 각 업종조직의 지역조직의 규모 상 조직화와 투쟁을 책임질 수도 없다.
 
산별노조가 단지 특정 산업에 제한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리고 '산업적 이해'라는 것을 특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업장을 넘어서는 지역의 사회운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대상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노동-사회운동단체에도 열려야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할 수 있어야함은 물론이지만, 노동자 회원으로 구성된 노동단체는 그 자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조합'의 하나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유기적으로 조직적 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복수노조 제한 규정이 사라진다면 법적으로도 조합원의 이중가입도 가능해지고 사업장단위를 넘어서 노조의 유연한 운영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단지 조합원 가입의 문제만이 아니라 조직적 결합과 함께 이들 사회운동이 제기하는 과제를 산별노조의 운동의제로 결합할 수 있어야한다.
 
한편, 이러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골간 구성을 위해서는 '대산별' 형태가 유리하다. 업종노조의 형태로는 규모의 한계 때문에 지역별 골간을 구성하고 운영할 수도 없으며, 자신의 운동과제, 조직화 대상을 일반화할 수도 없다. 대산별 형태로 조직을 확장하는 것을 통해서 노조의 이해를 허구적인 '산업별 이해'라는 방식으로 협소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을 크게 만든다고 조직의 투쟁과제가 자동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계급적 과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운동주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지역의 연대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속노조는 지역을 골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부지역에서는 산별노조로 재편되면서 금속노조 안의 단결은 증진되었을지언정 지역연대에는 더 소홀해졌다는 평가도 있다. 산별노조가 '무슨무슨 노동자는 하나다'는 식의 조직이 아니라 '노동자는 하나다'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직형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계급형성을 위한 투쟁의 과제들이 있고, 이를 운동의 요소로서 끊임없이 실현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을 지역의 투쟁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산별노조를 지역을 중심으로 강화하는 과제도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지역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조직도'를 멋있게 그려내는 것과는 또 다른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o 노동자운동의 전화를 위한 이념적 전망의 수립
 
산별노조 형태이든 일반노조 형태이든, 조직형태의 변화를 통해서만 노동자운동의 혁신을 이룰 수는 없다. 다만, 조직형태의 변화가 맹아적인 행태일지라도 운동의 특정한 지향을 표현하고 그것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맹아적 지향을 추출-강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 과정에서 요구되는 이러한 이념적 전망을 좌파들은 '계급적 산별노조'라는 방식으로 추상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즉, 산별노조의 건설과정이 노동자운동의 '계급성'을 다시 강화하는 과정이 되어야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계급성'이라는 원칙은 여전히 추상적일 뿐이라는 점에서 보다 구체화되고 명료한 정치적, 이념적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특히 정치적 이념적 전망의 수립은 산별노조 건설이라는 노동자운동의 조직적 재편과정과 분리된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것과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결합되어야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정치적·이념적 지향을 대중 이데올로기로 결합하지 않고서는 이 글에서 제기하고 있는 조직적 재편조차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산별노조를 관통하는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어야한다.
 
산별노조가 현재 남한 노조운동의 주류형태인 기업별 노조보다 나은 형태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단결의 확장이라는 것은 항상 노동자운동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적으로는 산별노조 건설과정에서 노동자 연대의 강화와 계급 형성의 과제를 수행하기 유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산별노조 건설은 당면한 노동운동이 혁신을 위해 추진되는 전략의 일부이며, 산별조직 건설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점은 다시 한번 강조해야한다. 그것을 간과하는 순간 산별노조만 건설하면 노조운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처럼 부풀리는 이른바 '산별 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현재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은 낮은 조직률의 고착과 노조운동의 대표성의 위기, 법·제도의 불리한 변경에 따라 수세적으로 제기되는 대안이라는 점에서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몰두는 밀리고 밀려서 진행되는 노동자운동의 퇴각에 대한 사후적인 반응, 그것도 한발 더 물러선 퇴행적인 반응이 될 가능성도 크다. 보다 공세적으로 노동자운동 혁신의 과제를 실천하는 투쟁에서, 하나의 과정으로서만 산별노조가 고민되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새로운 조직의 전면적인 건설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 ①새로운 미조직 노동자들의 진출 ②새로운 급진적 이념의 수용 ③새로운 조직형태를 통한 단결 폭의 확대 ④동시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장 현장의 강화
이후 남한에서 산별노조 건설 과정을 단지 기업별 노조의 통합이 아니라, 진정으로 노동운동의 혁신의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요소들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과정은 노동자운동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노조운동의 체계를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이다. 따라서 여러 운동 주체들이 이러한 변화 과정에 어떻게 개입하는가에 따라서 새롭게 재구성되는 노조운동의 성격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추진되는 산별노조 건설과 관련된 쟁점을 전화시키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노력은 특히 중요하다. 지역을 중심으로 불안정노동자를 광범위하게 조직하기 위한 조직적 근거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노력이 관건이다. 지역 중심의 운동이 필요하다거나 불안정노동자 조직화가 의미있다는 말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주장해도, 현실에서 그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입증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물질적으로 산별노조 건설 흐름이 지역강화와 불안정노동자 조직화의 과제를 받아안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노조 조직들도 계급형성의 과제를 함께 수행하면서 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노동자 대중의 계급적 진출이 활성화된다면, 어쩌면 산별노조에 관련된 이상의 쟁점들은 모두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에피소드로 끝날 수도 있다.
산별노조 건설의 쟁점을 넘어, 새로운 노동자 대중의 진출을 촉진하고 계급형성의 과제를 실현하는 노동자운동을 재개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비판과 실천을 조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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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정치체제' 개념은 아래 이종래가 정리한 노중기의 개념을 참고한다.
"노동정치(labor politics)를 생산의 정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국가, 자본, 노동 삼자의 정치적 전략적 상호작용 일반이라는 자신의 개념정의 방식에 따라 노중기는 노동정치 개념을 행위개념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노동정치가 과정적으로 반복되면서 일정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응집되어 구조화된 상호작용의 틀이 생산되는데 이것을 노동정치체제라고 말한다."(이종래「노동체제의 개념정의와 논쟁적 지점」『한국사회학비평』, 2002)
한편, 이 글의 논지와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정치체제의 변동과 관련하여 산별노조 건설의 문제를 지적하는 글로는 임영일, 『1987년 노동체제의 성격과 전환의 압박』, 경상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 2001 참고. 본문으로
 
2) 최장집,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열음사, 1988 본문으로
 
3) 임영일, 『한국의 노동운동과 계급정치(1987~1995)』, 경남대학교출판부, 1998 본문으로
 
4) 공공연맹 산별기획단, 「공공산별노조 건설 원칙과 계획(안)」 중 본문으로
 
5) 최광은, 『노동자운동과 산별노조』, 박종철출판사, 1999 본문으로
 
6)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할 점은 단순히 민주노총 소속 산별연맹 만이 아니라, 한국노총 소속 산별연맹과의 통합까지 폭넓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할 때만이 조직의 양적 확대와 질적 강화가 가능하고, 동종 산업내에서 유일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산별노조 건설과 단일노총 건설도 촉진할 수 있게 된다." (김유선「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제언」, 『노동사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1998년 9월호) 그밖에 김금수 노사정위 위원장(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의 각종 인터뷰를 통해서도 연구소의 이러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7) 김유선「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제언」, 『노동사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1998년 9월호 본문으로
 
8) 조효래, 『노동체제 전환과 노동조합 조직구조의 변화』, 경상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 2001 본문으로
 
9) 이하의 유럽 사례는 2000년에 진행된 사회진보연대 불안정노동연구팀 세미나의 정리를 주로 참고했다. 본문으로
 
10) 한국사회연구소, 『노동조합조직연구』, 백산서당 , 1989 본문으로
 
11) 1930년대 산별노조 운동에 대해서는 김경일, 『한국노동운동사 2 - 일제하의 노동운동 1920 ~ 1945』, 지식마당, 2004 참고 본문으로
 
12) 최광은, 앞의 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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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사회진보연대에 실렸던 제 인터뷰

예전에 사회진보연대 기관지(이제는 '사회운동'이라는 제호로 나옵니다)에 실렸던 글입니다. 제 인터뷰인데, 제 블로그에 대한 개인 소개 겸 해서 올려봅니다. 하는 일, 직책 등.. 중심적인 고민은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뭐 대동소이합니다.
 
그러고 보니 밑부분에는 홈페이지 이야기도 나오는군요. 흠흠..
 
 
***
 
[회원코너-바로그한사람]  박준형 회원을 만났습니다. 
진재연 | 편집부장 


4월의 봄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하루 일정을 마친 박준형 동지를 만났다. 박준형 동지는 단위노조일정을 마치고 뒤이어 마련되었던 삼겹살 뒤풀이마저 포기하고 회원코너 인터뷰를 위해 시간을 내 주었다. 그는 공공연맹, 사회진보연대, 그리고 박준형 동지 개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조목조목 자세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대중운동 경험에서 느꼈던 진솔한 이야기를 실타래 풀 듯 이야기했고, 우연적인 계기들 속에서 얻은 교훈과 반성의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하였다. 개인활동의 경험이 하나하나 쌓여서 운동의 원칙을 세우게 됨을 깨닫게 하는 자리였다.
 

Q 공공연맹에서는 언제부터 일 하셨어요?
 
A 연맹 사무처는 2002년 가을부터 일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정보통신관련업무를 했고 작년 하반기부터는 조직실에 있죠. 공공연맹은 업종별 분과위원회로 조직이 편재되어 있는데, 저가 담당하는 곳은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예요. 지방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가 조합원들이죠. 환경미화원이나, 도로보수, 녹지관리 등의 일을 하는 상용직 노조 등을 담당하고 있어요.
 
Q 어떻게 공공연맹에서 활동하게 되셨죠?
 


2002년에는 제가 노조 부위원장을 맡았죠. 임단협을 하면서 임금인상, 연봉제 도입저지,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을 주요 요구로 내걸었죠. 사측은 임금인상은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어요. 임금인상 요구는 양보하더라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만큼은 꼭 이뤄내서 앞으로의 투쟁에 '디딤돌'을 만들자는 것이 노조의 방침이었는데, 특히 이 부분이 진전이 없었죠. 노조는 파업까지 전제로 하는 단계별 투쟁을 시작했어요.
말로는 노조를 인정한다고 하지만, 사실 사장은 회사의 관리방침에 순응하는 의견수렴기관인 노조를 바라고 있었던 거죠. 노조의 투쟁수위가 높아지니까 돌연히 사장이 잠적해버리는 거예요. 당시 회사는 현금 유동성 위기에 처해있었는데 사장의 잠적은 조합원들의 불안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했죠. 회사가 망하냐, 인수되냐 하는 흉흉한 유언비어가 나도는 가운데, 조합원 안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비정규직과 정규직, 물류 부서와 사무직 부서 사이에 갈등도 있었어요. 일부에서는 사장을 불러오기 위해 필요하다면서 '지도부 총사퇴'를 요구했지만 여전히 노조를 중심으로 위기를 돌파하자는 입장도 강경했죠. 그런 상황에서 조합원 총회를 진행했고 '지도부 탄핵' 안건이 상정되었지만 부결됐어요.
사측이 위원장, 부위원장 퇴사를 조건으로 사장이 돌아온다는 안을 던진 게 총회가 끝난 후였어요. 근데 내부적인 진지한 논의 없이 위원장과 제가 이 안을 수락했는데, 당시 그 결정은 알라딘 노조에게나 저에게나 어떤 의미에서든 하나의 중대하고 영구적인 전환점이 되었죠. 당시 지도부의 입장은 회사정상화를 통한 고용안정 확보였거든요. 이 결과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조합원의 단결과 투쟁이 필요한 것이었는데, 반대로 회사에 항복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했던 것이죠. 총회에서 조합원들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꼴이 되었구요. 위원장과 저는 2002년 5월에 퇴사를 했습니다.
대단히 잘못된 결정이어요.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했어요. 이런 패배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의식 있는 활동가'를 지향한다면서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한 것을 반성했고 물론, 그런 '실수'를 하게 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대중들과 올바르게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 나의 문제로써 어떤 결정을 해야하는가, 어떤 점이 취약했을까?" 2002년 발전파업 때 잘못된 지도부의 판단을 비판했지만 결국 나도 같은 판단을 한 것이라는 점에서 올바른 활동의 원칙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새삼 깨달았어요. 당시 대중들의 모습은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었죠. 대중은, 어떤 측면/순간에는 한없이 실망스럽기도 하고 어떤 측면/순간에는 한없이 존경스럽기도 하면서 이런 양면성이 교차하는 모순적인 존재인 것 같아요. 아무튼,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아직도 제 활동의 중요한 목표죠. 아직 저에게 "대중"은 그 자체로 거대한 수수께끼라고나 할까.
퇴사후 반성의 시간을 갖고 어떻게 활동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또 합격했죠. 마침 공공연맹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도 있었구요. "좋은 경험하는 셈치고 한번 해봐라"는 말에 마음을 먹었어요.
 

Q 공공연맹에서 활동하면서 어떤 점을 느꼈습니까?
 
A 공공연맹에 와서 처음 3개월 정도는 조직이 매우 효율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놀랬죠. 규모가 크고 역사가 있는 조직이다보니 나름대로 효율적이고 치밀한 활동의 메카니즘이 있더라구요. 활동가들의 실력이나 판단능력도 대단했구요. 이런 곳에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 설 정도였죠. 그런데 3개월 정도 지나니까 문제점도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효율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관료화, 개량화 되어 있었죠. 그 장단점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배울 점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경험'의 공력은 대단한 것인데, 공부는 너무 안 하거나 할 여유가 없는 게 현실이죠.
개인적으로는 특히 조직실에서 이용석 열사투쟁을 하면서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노조운동의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해 실마리가 아주 조금은 보인다고 할까요. 그걸 각각의 투쟁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역사적 투쟁 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고 또 남겨야 할지가 고민이죠.
최근에는 단위사업장을 넘어서는 수준의, 연맹이나 총연맹, 전체 노동자운동을 조망하는 시각이 대단히 부족하다는 것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정세적인 대응을 위해서는 추상적인 계급대립의 지점에 대한 포착만이 아니라 전체 투쟁의 구체적인 조건과 상황을 조망하는 관점이 절실히 필요하죠.
 
Q '노조운동의 원칙'이 실마리가 보인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글쎄요. 아직 그냥 '감'인데요. (웃음) 아직은 대중간부로서의 원칙정도에 불과해요. 대중에 대한 신뢰가 문제인 것 같아요. 대중조직의 관료는 '대중이 판단해야할 때 자신이 판단하겠다고 나서고, 자신이 판단해야 할 때 대중에게 판단을 미룬다'는 말을 어떤 선배활동가가 했는데, 곱씹어볼 말 아닌가요? 간부에게는 대중에 대한 신뢰가 문제라면, 대중에게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자기결정의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 문제죠. 노동부문 연석회의 할 때 대중단위에 있는 스스로를 가리켜 '관료'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데 사실 매우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관료주의는 대중조직 활동가가 자신의 안팎에서 항상 직면하게 되는 위험이니까요. 주변에 중년의 노조 활동가 중 어떤 분들은 '관료'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그런 고유한 위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활동가의 윤리학 정도에 머무는 고민이고 여전히 알라딘 노조에서의 문제의식의 연장에 있지만요.
 

Q 최근 공공연맹에서는 위원장 성폭력 사건이 쟁점이 되고 있는데요. 사건 해결과정을 보면서 느꼈던 점과 현재상황을 이야기 해주세요.
 
A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좌우파 모두의 기회주의'는 매우 실망스러웠어요. 사건을 올바르게 해결하고 노동자운동을 혁신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내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사건을 이용하려는 모습뿐이었죠. 해결을 위한 활동과정에서 나타난 정파간 상호비방은 올바른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겠죠. 피해자가 사건을 드러낸 것은 '정치적' 제기가 아니었고, 성폭력 자체를 문제제기 하고자 한 거잖아요. 그런데 좌파든 우파든 대부분의 남성활동가들은 시종일관 이 사건을 (노동조합 내부'정치'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마치 그것이 '현상 뒤의 대단한 본질'이라는 식으로 제멋대로의 망상에 빠져있었죠. 오히려 그렇게 망상하는 사람들이 내부정치에 사건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애초에 없던 정치적 의미들이 겹겹이 덧칠해졌구요.
어떤 입장도 피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죠. 안타까운 것은 그 과정에서 여성활동가들도 원칙을 세워 활동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왜곡과 음해가 판치는 상황에 일침을 가하면서 여성이 스스로 세력화 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러지 못한 게 안타깝죠. 사건을 거치며 연맹은 지도부의 지도력이 훼손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상태죠. 위원장 보궐선거는 후보 등록이 없어 무산된 상태구요. 그야말로 오리무중인데, 얼마 후 있을 임시대의원대회(4월28일)에서 대책을 논의하게 될 겁니다.
 
Q 분위기를 전환해서 '겨울철쭉의 독서일기'라는 인기 있는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계시던데요
 
A 말 그대로 '그냥' 만든 건데요. 자기 강제의 측면이 강하죠. 스스로 책 읽고 글 쓰게 하려고, 책 읽을 계기를 주려고 만들었어요. 이거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어서 좋아요. 앞으로도 잘 되든 아니든, 쭉 해볼 생각이구요. 마침 이야기가 나왔으니 최근 읽은 책 중 좋은 책 2권을 추천해 드릴께요. 하나는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들녘)이라는 책인데요 미국의 경제봉쇄 속에서 유기 농업으로 사회전체를 생태적으로 개조하고 스스로 '再生'된 쿠바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어요. 우리가 건설해야 할 사회주의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봤을 때 쿠바가 매우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는 거 같아요. 사회주의자의 사기를 높여주는 책이죠.
또 하나는 '서준식의 생각'(야간비행)이라는 책이예요. 사실 저는 '책'의 가치는 이론적으로 어떤 새로운 사고를 제시하는가에 있다는 생각을 주로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론적인 것만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활동가가 가져야할 '자세'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새로 하게 되었죠. 제 활동에 대한 반성들에 또 몇 개의 목록을 더 해준 책입니다.
 
Q 사회진보연대가 회원들과의 소통을 넓히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A 인천지부에서 회원활동을 하면서 많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낮은 수준부터 회원 활동이 가능해야겠죠. 조직 운영 전반에 대한 논의나,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자리가 아니더라도 회원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논의할 수 있는 자리, 모임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무규정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캠페인식 활동 뿐 아니라 회원들 대상으로 하는 작은 기획들을 실제로 진행해보는 것도 필요하구요.
 
Q 사회진보연대에 바라는 점을 이야기해주세요.
 
A 땅에 발을 딛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대중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대중과 교통할 수 있어야 하겠지요. 사회진보연대는 언제나 정세적으로 올바른 분석으로 사회운동의 내용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 상황에서, 대중들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요합니다. 활동기풍이 바꿔나가야겠죠. 전이뿐 아니라 역전이도 가능할 수 있도록. 사회진보연대를 보면 역전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진보연대 둘레의 안테나를 적극 활용해야죠. 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이 아닌 활동가들과 토론을 하다보면 사회진보연대 '주류' 노선과 쟁점을 형성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마다 활동가들의 입장 속에는 그들의 활동 안에서 형성된 진실이 있을 거고 서로간의 교통 속에서 서로 그것을 배워갈 수 있겠죠. 집행위원들과 대중단위 활동가, 양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죠.
 
인터뷰에 응해주신 박준형 회원께 감사드립니다. PS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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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월례특강21 - 인민주의(populism) 비판

과천연구실에서 새책이 나오나 보군요. 아침해가득핀땅에서 월례특강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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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주의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와 정치제도를 '적'으로 규정하는 '원한의 정치'를 통해 대중을 동원하기 때문에, 기존 정치·경제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파괴적인 힘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민주의는 대중의 능동적·자율적 진출을 확대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민주의 정치는 변혁과 해방의 정치를 표방하는 사회운동과 이단점을 형성합니다.

강의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 부분에서는 인민주의를 역사적으로 규명합니다. 먼저 소유와 공동체를 중심으로 분화되는 자유주의·보수주의·사회주의라는 현대 정치의 3대 이념과 구분되는 인민주의의 특성을 추출합니다. 인민주의는 '장기 20세기'를 특징짓는 축적체계의 순환에 조응하여 나타나지만, 각각의 국면에서 정치적 내용을 달리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20세기 말 유럽통합에 대한 부정적 대응의 한 형태로 나타나는 유럽 인민주의를 분석합니다. 인민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유럽통합에 저항하는 세력의 일부이지만, 배타적 인종주의와 퇴행적 민족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대안세계화 운동과 이단점을 형성합니다. 유럽에서 예외적으로 집권에 성공한 인민주의자의 대표적 사례로서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는 미디어를 활용한 이미지 정치의 가능성과 동시에 정치위기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세 번째 부분은 인민주의적 전통이 뿌리깊은 라틴 아메리카 지역을 분석합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인민주의 세력은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따른 경제위기가 극심한 상황에서 대중의 원한을 효과적으로 동원합니다. 이 지역 인민주의 세력은 인민주의적·민족주의적 수사를 활용하여 도탄에 빠진 인민의 구원자임을 자임하지만, 집권과 동시에 다른 어떤 정부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추진합니다. 이는 인민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위한 정치적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네 번째 부분은 남한의 인민주의를 간략하게 발제하고, 이를 중심으로 종합적인 토론을 진행합니다.

관심 있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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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주의(populism) 비판
과천연구실 - 정인경, 박정미, 박상현, 윤종희

일시: 8월 29일부터 2주간 월,화,수요일 오후 7시 ∼오후 11시 (총 6회)
8/29(월), 8/30(화), 8/31(수), 9/5(월), 9/6(화), 9/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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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재: 정인경·박정미 외, {인민주의 비판}, 공감출판사 (근간)

- 일정
1강 8월 29일 인민주의의 역사 / 정인경
2강 8월 30일 유럽의 인민주의 / 박정미
3강 8월 31일 이탈리아의 인민주의 / 박정미
4강 9월 5일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 / 박상현
5강 9월 6일 아르헨티나의 인민주의 / 윤종희
6강 9월 7일 종합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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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 : 40명
- 회비 : 50,000원 (사회단체 활동가 및 대학생 30,000원)
- 예약 : 070-034522-04-017(기업은행 김상일) 입금 전후 연락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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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카페 아침해 가득 핀 땅
우 151-834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6동 858-5 (2호선 서울대입구역 8번 출구 첫 골목 1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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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반기억의 생성, 평의회 코뮤니즘/ 노동자의 책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노동자의 책'이라는 사이트에서 평의회 관련된 자료들을 번역해서 올려놓았습니다.
 
'노동자의 책'은 노동자들에게 지식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사이트인데, 사실 사이트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러한 시도 자체가 인터넷을 넘어선 하나의 운동이 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이트 후원회원도 모집하니까 여유있으신 분들은 후원을 하시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겁니다. 하여튼,

http://www.laborsbook.org/book.php?uid=76&no=1185

회원 가입해야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하지만 무료니까 가입해서 보세요. 근데 번역은 아직 상당히.. 거시기 하군요. 암튼, 그냥 대략적인 개요가 뭔가는 살펴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 판네쿠크의 '노동조합주의'라는 글에서 묘사적인 일부분을 아래에 따서 붙여봅니다. 아주 놀라울 정도로 최근의 노조운동의 분위기와 일치하는 묘사를 볼 수 있지요. 묘사가 같다고 분석이나 대안까지 같을 수는 없겠지만,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최근에 '평의회'가 나름대로 '유행'이라 할 때, 남한에서 노조운동의 전반적인 관료화와 제도화라는 정세와, 사업장단위 전투적 노조주의의 경험이라는 것이 함께 작동하는 것같습니다. 따라서 평의회주의가 '유행'할 수 있는 정세에 대해서도 비판이 필요하지요.  최근의 노조 관료화에 대한 비판이 평의회주의에서 일면적으로 강조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조주의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라고 할 때도 그것이 '노조주의'이기 때문에 가지는 고유한 한계.. 이런 것을 사고할 필요가 있다고 할 때 고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전체 글은 다운 받아보시구요.. 아래는 읽어보세요.

글 중간에 있는 "...그래서 악마적인 것과 깊고 푸른 심해 사이에서 노동조합이 만약 현명하다면, 자본가 계급은 거짓 투쟁(sham fighting)이 노조 지도자들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라는 구절은 정말 짜릿하군요.
 

자본주의와 대산업의 성장에 따라 조합도 같이 성장한다. 조합들은 모든 도시와 모든 공장에서 수천명의 조합원을 확보하고, 나라 전체로 확장되며, 거대한 기업(corporations)이 된다. 업무를 수행하고,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지역과 중앙에서 관료들(officials): 위원장, 사무총장, 재정담당이 임명된다. 그들은 자본가들과 협상하고, 이런 일들을 통해 특별한 기술을 갖추는 지도자들이 된다. 조합의 위원장은 자본가들만큼이나 큰 힘을 갖게 되고, 자신과 그리고 동등하게, 자신의 조합원들의 이익을 논의한다. 관료들은 노동조합이라는 직업에서 전문가가 되며, 공장일에 전적으로 몰두해 있는 조합원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판단하거나 그들을 지시할 수가 없다.

조합으로서의 거대한 기업은 단순한 개별 노동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은, 그래서 자신의 정책, 특성, 정신, 전통, 그리고 기능을 갖는 조직체가 된다. 그것은 노동 계급의 이익과 괴리된 그 자신의 이익을 갖는 신체가 되며, 자기 실존을 위해 살고, 싸우려는 의지를 갖는다. 만약 노동 조합이 노동자들을 위해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것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해도, 그것들은 순순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자금, 조합원, 그리고 관료들, 이 모든 것들은 즉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조직체의 구성요소로서 그들의 실체를 계속 유지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노조 관료들, 지도자들은 특별한 노동조합 이익의 담지자들이다. 시초에 공장의 노동자였던 그들은 조직의 지도자로서 오랜 실무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특성(character)을 획득한다. 일단 특별한 그룹을 형성하기에 충분히 커지기만 한다면, 각각의 사회적 그룹에서, 그 작업의 본성은 그것의 사회적 특성, 사고와 행위의 양식을 주조하고, 결정한다. 관료들의 기능은 노동자들의 기능과 철저히 다르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지 않고,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당하지 않으며, 그들의 존재는 계속된 실업의 위협을 당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꽤 안정된 지위를 누린다. 그들은 조합의 일들을 처리하며, 노동자들과의 회의를 준비하며, 기업가들과 협상을 해야한다. 물론, 그들은 노동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고, 자본가들에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조직에서 임명되어, 그 조직 구성원들을 대표하여, 그의 全(전)역량을 그들의 이익을 방어하는 변호사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가지 차이점은 있다. 많은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자 계급 출신이기 때문에, 그들은 임노동과 착취가 의미하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 그들은 노동 계급의 일원으로서 느끼고, 그들 내면의 프롤레타리아트 정신이 강한 전통으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그들 삶의 새로운 현실은 계속해서 이 전통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으로 그들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다. 그들은 (자본가들의) 이익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이익을 챙기고, 임금과 노동 시간에 관해 협상하며 마치 반대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자본가들과의 회의석상에 참여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위치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의 위치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그들은 “산업의 필요성”에 관한 시각을 갖게 되며, 그것들을 중재하는 것을 추구한다. 물론 개인적인 예외는 있으나, 대개 그들은 노동자들의 기초적 계급의식을 가지지 못하며, 그들의 적절한 이익을 위해 투쟁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자들과의 갈등에 빠지게 된다.
...

노조가 강력한 조직체로 존재하는 산업에서, 그들의 지위는 이같은 자본의 집중에 의해 약화된다. 그들이 파업을 위해 모은 대규모의 기금은 그들의 적이 가진 금전적 파워와 비교했을 때 무의미했다. 두 번의 공장폐쇄는 그들을 완전히 고갈시킬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가들이 임금 삭감과 노동 시간의 강화를 통해 아주 심하게 노동자들을 쥐어짜더라도, 노조는 투쟁을 할 수가 없다. 계약이 갱신되어야 할 때, 노조는 자신들이 약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노조는 자본가들이 제안하는 나쁜 조건들을 수용해야 하고, 협상의 가능한 기술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이제 현장구성원과 관련된 근심(trouble)이 시작된다.
조합원들은 투쟁을 원한다. 즉, 그들은 싸우기 전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싸워서 잃을 것이 많지 않다. 하지만,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의 재정력과 아마도 노조의 존재 자체 등 잃을 것이 많다. 그들은 투쟁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그들은 희망을 고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조합원들에게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낫다고 설득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자본가들의 조건을 노동자에게 강요하는 자본가들의 대변인처럼 행위 해야만 한다. 노동자들이 조합의 결정에 반대하며 투쟁을 주장할 때는 더 심해진다. 그러면 노조의 힘은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무기처럼 사용된다.

그래서 노조 지도자들은 산업 평화를 보장하는 자본주의적 과업의 노예가 된다 - 비록 그들은 최대한으로 노동자들에게 기여하려 하지만, 이제는 노동자들의 비용으로 그 일을 한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가 없고,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자본주의의 지평선 내에 존재하며, 투쟁은 쓸모없다는 생각이 옳다고 믿는다.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노동조합이 그 권력의 한계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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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해 자본가 계급과의 투쟁을 벌일 때, 자본가 계급은 그들을 증오하나, 그들의 힘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다. 만약 노동조합이 그들의 투쟁에서 계급 전체의 힘을 동원해서 투쟁한다면, 자본가 계급은 그들의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그들을 탄압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이 반역으로 탄압받는 장면, 그들의 사무실이 구사대에 의해 파괴되는 장면, 그들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벌금을 무는 장면, 그들의 투쟁기금이 몰수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 노동조합이 그들의 조합원들을 투쟁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자본가 계급은 그들을 보존되고, 보호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집단으로 여길 것이고, 그 지도자들을 대우받을 만한(deserving) 시민으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악마적인 것과 깊고 푸른 심해 사이에서 노동조합이 만약 현명하다면, 자본가 계급은 거짓 투쟁(sham fighting)이 노조 지도자들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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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주의는 공산주의를 혐오한다. 공산주의는 그것의 존재의 근간을 제거해버린다. 공산주의에서, 즉 자본가들이 부재한 상황에서, 노조와 노조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노동자 집단이 사회주의자들인, 강력한 사회주의 운동이 존재하는 나라들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기원에서뿐만 아니라, 환경에 의해서 노조 지도자들 역시 사회주의자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파 사회주의자들이고, 그들의 사회주의는 욕심 많은 자본가들을 대신해 정직한 노조 지도자들이 산업 생산을 관리하는 복지의 이념으로 제한된다.

노동조합주의는 혁명을 싫어한다. 혁명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모든 일상적 관계를 뒤집어엎는다. 그 격렬한 충돌 속에서, 모든 세심한 관세 규정들은 쓸려 사라지고; 그 거대한 힘의 투쟁 중에 온건한 협상 기술을 가진 노조 지도자들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전력을 다해 노동조합주의는 혁명과 공산주의의 사상에 반대한다.

이런 반대는 의미가 없지 않다. 노동조합주의는 그 자체 힘이 있다. 노조는 자신의 처분권 내에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고 있고, 그것은 힘의 물질적 요소를 이룬다. 노조는 또한 정신적 힘을 가지는데, 그것은 힘의 정신적 요소인 정기적인 신문을 통한 지지와 선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권력은 지도자들의 손에 쥐어진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특수 이익이 노동 계급의 혁명적 이익과 갈등을 일으킬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사용한다. 비록 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성되지만, 노동조합주의는, 정부가 민중들을 지배하는 권력이 되듯, 노동자들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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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책 사이트 : http://www.laborsboo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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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최근에 만난 인터넷 포탈 사이트에서 미디어 관련된 업무를 하는 한 선배에게서 흥미롭지만 섬뜩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젊은 세대에 극우적 정서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단지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정치세력이 없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같은 보수주의자들의 무능은 이들을 동원하지 못하고, 따라서 파편적이고 분산되어 있지만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유능한' 우파세력이 등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 책의 장점은 무엇보다 파시즘을 그 지도자들이나 이론가들의 담론이 아니라, 실재 역사 속에서 전개된 사실을 중심으로 고찰한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권력장악'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일관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중심적으로는 민족의 갱생, 혁신, 정화와 같은 목표가 선언되었지만, 세부적으로는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서 편의적인 공약이 남발되었다. 대중을 동원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법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어법이 달랐다.
 
역사적 과정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저자는 파시즘을 이렇게 요약한다.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양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된다.
 
파시스트들의 주장에 대한 검토보다 역사적 과정에 대한 검토를 우선한 덕분에 우리는 파시즘이 도래한/할 수 있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저자는 그것을 (1) 파시즘의 탄생 (2) 정치제도 안에 뿌리내리기 (3) 권력장악 (4) 권력행사 (5) 파시즘 정권이 급진화나 정상화 중 한가지를 선택하게 되는 장기지속 기간으로 시기구분한다. 저자는 특히 파시즘이 하나의 대중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열정적으로 대중을 동원하려고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급진화'가 필연적이었으며 브레이크없는 폭주기관차가 될 운명이었다고 암시한다.
 
저자의 단계구분을 통해 우리는 실용적인 접근을 할 수 있는데(다소 실용주의가 과한 것이 문제다. 미국적 특성인가?) 어떤 정체에서 파시즘의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이 2위의 대선득표를 한 프랑스의 경우 (2)의 과정에 있다고 볼수 있다. 이 경우 파시스트들은 제도정치 안에 안착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급진적인 담론을 완화한다.
 
앞서 우리나라의 최근 분위기를 언급했지만, 이들은 어떤 조건에서는 하나의 운동으로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는 있다는 점에서 우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기존의 보수세력이 연합해야하고 제도정치에 안착해야한다. 물론 그러한 우려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 다음은 정세의 문제가 될 것이다.
 
각 과정을 통해서 성공한 파시스트들만이 권력을 잡았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그렇다. 다른 나라의 경우 운동으로서는 존재했지만 유연한 전술을 구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제도정치에 진입하지 못했거나 제도정치에 진입했다라도 이런저런 정세적 요인 때문에 세력을 확대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저자는 파시즘의 득세와 집권은 객관적 조건만이 아니라 정세적인 요인과 함께 해당 인민들의 판단이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몇가지 논쟁점이 발생한다. 정치에서 구조와 주체의 문제. 저자는 이 문제를 계속 양자택일의 문제로 인식한다. (경향적으로 주체의 문제로 나간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중이 특정한 판단을 하게 되는 정세는 단지 주체의 의지이거나 우연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저자는 파시즘을 피하기 위한 특정한 정책의 실현가능성을 믿는 것같은데, 그런 점에서도 미국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의 "구조적 인과성, 과잉결정 그리고 적대"를 인용해보자.
우선 과잉결정된 그리고 과소결정된 인과성 개념은 즉각 '구조'와 '정세'의 전통적인 대당을 제거한다. ; 더 낫게 말한다면 그것은 이 두 용어가 상호적임을 제안한다. 그것은 정세를 구조의 한 짧은 국면으로, 또는 구조의 연속적인 단계들간의 이행으로 더 이상 보지 않는데, 구조의 실재성은 정세들의 예측불가능한 연속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정세는 단지 구조의 특정한 전위로 결정된다.
 
저자는 물질적 조건에 우선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을 계속 유보한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득세할 수 있었던 정세적인 요인은 물질적인 것, 특히 경제적인 요인과 계급투젱의 지형에 있었다. 문제는 경제적인 것이 어떻게 정치를 과잉결정하는가, 그것이 특정한 정세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저자의 유보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 자체를 그것을 충실히 서술하고 있다.
 
또 한편, 저자는 파시즘을 매우 협소한 의미로 사용하며, 프랑코의 스페인이나 2차 대전 이전의 일본까지도 파시즘으로 보기에는 힘들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것들이 열정적인 대중동원형 운동에서 기원하고 그것을 계속 수반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이런 점에서 제3세계의 개발형 독재들을 파시즘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발적 대중운동의 형태를 띄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중을 파시즘과 같은 논리에 따라서 동원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면 파시즘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지배계급이 위로부터 대중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민족적 생활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목표, 외부에 대한 공포를 조직하고 그것을 탄압하는 등 파시즘의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했다.(일본을 제외한 것은 지나치게 서구중심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남한의 군사독재의 경우에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고유한 정치적 동원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이지는 않을지라도 파시즘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파시즘이라는 것이 여러 정세적인 조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저자의 지적처럼 다른 정세에서는 심지어 다른 이름으로, 다른 의식을 가지고 등장할 수 있다. 최근의 유럽에서 처럼 유태인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공격하면서 등장할 수 있다. 밀로세비치처럼 반대당을 노골적으로 금지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파시즘의 위협은 현재적이다.
 
특히, 세계화와 경제위기 과정에서 특정한 국가가 더 이상 계급투쟁을 관리하지 못하고 붕괴했을 때가 문제가 된다. (마치 1919년 이후의 이탈리아처럼)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해 좌파적인 대안이 부재할 경우 파시즘은 손쉬운 대안이 된다.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는 가까운 사례이다. 이런 유형의 새로운 '파시스트'들은 세계화의 파괴적인 효과로서 절멸적인 인종갈등 전쟁을 확대하고 이 속에서 또한 확대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시즘은 '대중들에 대한/대중의 공포'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한다. 저자는 파시즘의 대중을 공포를 통해 지배했다고 말한다. 외부의 적에 대한 공포, 국가의 무능이라는 공포(파시스트들은 거리의 노골적인 폭력을 통해 이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계급투쟁의 공포, 내부의 적에 대한 공포, 파시스트 자신들에 대한 공포까지. 더구나 보수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과 연합하는 과정에서는 지배자들의 '대중에 대한 공포'가 작동했다는 점, 대중은 자신들의 다른 모습은 파시스트 대중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는 점 등을 유념해보아야한다. 이러한 대중들에 대한/대중의 공포에 대해서는 역시 발리바르의 논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 반오웰 : 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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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전에 파시즘과 관련된 책의 독서일기를 쓴 적이 있다.
 
 
'우리안의 파시즘' 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파시즘의 역사적인 형태와 정세에 주목해야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점에서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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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경제저격수의 고백


경제 저격수의 고백
존 퍼킨스 지음, 김현정 옮김 / 황금가지
 
표지에 '세계경제의 뒷무대에서 미국이 벌여온 은밀한 전쟁의 기록'라고 쓰여있다.
 
미국의 정부와 정보기관이 제3세계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면서 이들 나라를 외채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한 매우 의도적인 작전을 전개했다는 것이 중심내용이다. 저자가 직접 한 일이라고 하는데, 현재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봐서는 다소간의 과장은 몰라도 믿을만한 이야기같다.

대부자본이 남아돌던 발전주의의 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외채 대부를 제3세계에 유리한 방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잡행했다는 점에서 놀랍다. 전형적인 방식은 이런 것이다. 외채 대부를 제안하고, 이를 '경제발전을 위한' 에너지, 도로 등에 투자하도록 한다. 핵심은 이때 예상되는 에너지, 도로 등의 필요치를 최대한 높게 계산해서 과잉대부를 받도록 하고, 갚을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든다. 이를 약점으로 잡고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등등.
 
이런 종류의 개입을 정보기관이 구체적으로 개입하면서 창안했다는 점(다소 불확실하게 서술되어 있기는 하지만) 놀라운 일이다.
 
이런 방식은 현재도 큰 골격에서는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의 컨설팅 회사가 더욱 번창하고 있으며, 외채 대부가 IMF, IBRD 등을 매개로 더욱 정치화되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까. 최근 공공연맹과 공무원노조 등이 주빌리사우스와 함께 진행한 "물, 에너지 사유화 국제워크샵"(물·에너지 사유화 반대 아시아 노동자·사회운동 선언)를 통해서 들어본 제3세계의 사례는 아주 똑같은 내용이었다. 에너지, 물에 대한 투자를 이를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채를 통해서 하도록 하고, 이후에 사유화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것이다.
 
아래 기사를 더 참고할 것.
이를 통해 외채 문제와 금융세계화, 기업인수, 공공성 파괴, 인권침해 등등과 연결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런 측면 외에 책을 읽으면서 흥미로운 구절은 음모이론의 기원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다. 이데올로기론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지적이다.
 
음모론은,
 
1. 현상에 원인에 대한 대중의 무지가 상상을 만들어낸다는점

2. 혹은 진실을 알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 물질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없는 이들(프리메이슨, 유태인 집단)의 음모로 몰아간다는 점

경제저격수의 고백 356쪽
"제국은 기업정치를 지탱하는 대형은행, 기업, 정부가 만든 것이지 음모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미국인들이 기업정치를 만들어냈으며 기업정치가 바로 미국인 자신들이다. 그래서 기업정치에 맞서 싸우지 못한다. 그들은 대개 이런 은행, 기업, 정부에서 일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이들이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를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에 기업정치를 직시하기보다 어둠속에 숨어 있는 음모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한다. 그동안 그들을 지탱해온 기업정치를 배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두번째가 중요하다.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무의식 속에서 물질적 이해 때문에 진실을 거부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대중의 상상을 왜곡된 방향으로 고착한다는 것. 따라서 현대에 음모이론이 만연한 원인을 생각할 수 있으다.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의 다른 측면으로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계급은 이러한 물질적 이해때문에 현실적 관계에 대해서 상상적 관념, 이데올로기를 갖는다. 비극은 미국의 시민들의 경우(노동자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물질적 이해를 공유한다(혹은 그렇게 믿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어디에서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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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대하여] 걸으면서 생각하기와 뛰고나서 생각하기

오랜만에 만난 윤병우 선배가 말했다.
 
"천천히 걸으면 걸으면서 생각할 수 있는데 뛰면 생각할 수 없고 그뒤에 숨을 고르기에 급급하다"
는 선배의 말.
 
책을 읽을 때도 급하게 읽으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도 하지 못하고 생각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할 수 있다. (그냥 책을 하나씩 '떼는'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려러고, 권수를 늘이려고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더 빨리 더 많이 라는 소비자본주의의 덕목과도 유사하다.
 
오히려 중요한 책, 몇번이고 읽어야할 책을 그렇게 읽고, 찬찬히 보아야한다. 보면서 자기 머리로 책의 내용을 생각하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자신의 것으로 되씹어 소화해야한다.
 
그렇지 않고 뛰듯이 읽어서는 모두 잊혀질 뿐이다.

** 독서일기를 다시 쓰는 것이 이런 점에서 필요하다. 속도보다 제대로된 책을 꼭 제대로 읽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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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만들다

새 블로그를 진보넷에 만들었습니다. (여기군요)
 
만들어 놓고 잘 사용하던 개인 홈페이지를 한참동안 관리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거든요.
 
(타이틀바에도 링크는 걸려있습니다)
 
뭐랄까, 오래살던 집에서 이사가는 느낌입니다. 안그래도 얼마있다가 사는 집도 이사할 형편인데 기분이 묘하군요.  이사를 가서는 책장을 하나 장만할 생각입니다. 집에 있는 책장이 모자라서 책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는데 늘 마음이 아팠거든요.
 
아마도 이 블로그도 하나의 책장이 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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