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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애, 하산

 윤선애, 하산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냉큼 주문했는데, 오늘 늦게 사무실에 들러보니 도착해있었습니다.

 

새벽 때와도 많이 다르지는 않지만, 목소리 속에 이제는 고요함이 있군요.

노래들이, 조금 쓸쓸하고, 차갑고 촉촉하지만, 아득하기도 하네요, 윤선애 스스로의 표현으로 '습한 공기와 투명해서 빛나는'.

하지만, '하산'한다는 것의 의미.

 

앨범제목과 같은 '하산'은 맨 마지막곡입니다.

 

하산 (김정환 작사, 이현관 작곡)

 

저 아래 사람들 사는 아파트 상가
아스팔트 길 건너 산동네 불빛
멀수록 아늑하게 반짝이는데
그래 약속 하는 거야.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산다면 세상은 이리 아름답지 않아.
스스로 간절한 줄 모르는 빛일 뿐이지.
세상을 포옹하는 늦은 하산
발걸음은 어둔 산에 묻히고
삶이 저 아래 사람들 사는 곳으로 이어진다.

 

 

아래 사이트에서는 샘플을 들을 수 있습니다.

http://www.puljib.com/bluealbum/?S_Type1=album&S_Type2=06&table=greenmusic&Mode=View&B_SEQ=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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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혁신, 절망이거나 희망 혹은 미망

민주노총 강승규 비리 사건 이후, 그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보다 더 뻔뻔스러운 민주노총 지도부에 절망했다. 그러고도 계속 자신있게 버틸 수 있는 조건이 참담하다. 또 이를 막을 수 없는 우리의 한계, 나의 한계가 가슴 답답하다.

 

민주노총 사무총국 15명의 동지가 사직서를 냈다. 사회단체와 각 연맹과 지역본부 활동가들의 성명서, 호소문이 쏟아지고 있다. 오늘은 시국토론회도 진행되었다. 나 역시도 이러한 작업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같이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지도부가 사퇴하는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것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민주노총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시도들은 애당초 성공을 거의 기대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민주노총을 혁신하고, 이를 통해서 노조운동의 혁신에 계기로 삼자는 우리의 주장은, 그래서 슬프게도 미망(迷妄)일 수 있다.

 

"어느 쪽도 운동의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참세상뉴스에 실린 김승호 사이버노동대학 대표의 글이다.

 

거친 댓글들이 이어 달린다. 소부르조아, 운동을 그만해라는 말까지.

 

그러나 가치판단들과는 무관하게 민주노총의 건설과정과 그 한계에 대한 그의 지적은 그 자체로 사실명제들이다. 민주노총은 건설 당시부터 변혁지향적 민주노조의 구심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총을 혁신한다고 하는 것은 애당초 이 프로젝트가 가진 한계, 그리고 그의 논리적 귀결인 국가권력과의 타협, 그리고 그 효과로 나타난 오늘의 비리사건 전체를 바꾸어내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노총 혁신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노총을 넘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은 과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투쟁은, 어쩌면 정세의 호기를 만나 이수호 집행부를 퇴진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민주노총'을 쟁점으로 하는 한 애초의 목적은 달성할 수가 없을 것이다. 구조적 한계. 그런 점에서 우리의 투쟁은 미망일 수 있다.

 

우리에게 비극은, 이것이 미망일지라도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서 시작된다.(그런 점에서 다시 비극일 지라도 김승호 대표와는 달리 한번 더 그것에 대면해야한다. 그리고 스스로 비극의 조건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가 '진정성'의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진정하기 때문에 비극일 수 있다.) 

지금은 다만 여기서 시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조건을 분명하게 인식해야할 것이다. 운동의 결과로 그 한계들을 집단적으로 깨닫게 될 때, 비록 비극적이었을지라도 이 운동은 어떤 종류의 성과를 남길 수 있다.

 

나 역시 김승호 대표가 던진 아래의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예 질문으로 구성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지금 시작하는 이 투쟁 속에서, 계속 걸으면서 우리들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과연 한국의 민주노동운동이, 기존의 정파 혹은 계파들 그리고 거기에 속한 활동가들이 이런 역사적 과업을 짊어지고 나갈 수 있을까? 과연 이 진통을 산고로 삼고서 노동운동의 신새벽을 열어 제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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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노동운동의 위기'가 몇가지 사건을 통해서 가시화되면서 올해 상반기에 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것이 상층조직들의 위기가 아니라 현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은 '노동운동의 메카'라고 하는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이다. 정규직 노동자들과 사내하청 방식으로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나마 좌파적인 집행부라고 하는 이상욱 집행부마저도 애초의 기대에 한참 미달하는 합의안을 비정규직을 위한 것이라고 들고 나왔다.
 
여기서 당연해보이기 때문에 주목하지 않았던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왜 남한 노동운동의 핵심부대는 자동차 공장들인가? 그리고 위기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이를 통한 노동자운동의 분할을 통해 시작되는가?
 

이 책을 읽는 것이 놀라운 독서경험인 것은, 이렇게 남한의 노동운동사의 특수한 역사를 세계체계의 변화와 함께하는 세계 노동자운동의 일반적 경향 속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의 힘>은 노동운동을 하고 있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보아야할 책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이 제시하는 수많은 쟁점을 모두 언급하거나 소개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눈에 띄는 몇가지를 언급하자.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20세기의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예를 통해서 노동자운동의 세계적 동학을 이해할 수 있다. 실버는 "자본이 가는 곳에 갈등이 따라간다"고 말한다. 생산의 재배치에 따라서 노동자 집단이 형성되고 투쟁이 시작된다. 실제로 2세기, 세계의 전투적인 노동자 투쟁은 자동차 공업의 이동에 따라서 미국->서유럽->남유럽->제3세계(남아공, 브라질, 한국)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순서는 중국이 될 것이며, 중국에서 일어날 거대한 노동소요는 노동정치만이 아니라 중국과 세계의 운명에도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노동자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정치적 변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노동소요가 민족국가의 정치변동에 주는 영향은 새로운 투쟁의 주체들이 해당 국가의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는지 통합되어 있는지도 영향을 준다. 그리고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투쟁이 집중되는 지역이 정치 중심지와 가까운지 여부도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다. 이에 따라 북유럽과 남유럽, 남한과 브라질의 경우를 비교할 수 있다. 우연성에 기반한 물질성의 요소들을 사고해야한다.)
 
노동자들의 작업장 교섭력은 포드주의 생산 덕분에, 그리고 이후에 도입된 JIT(Just In Time:적시생산시스템) 때문에 오히려 증대했다. 비교적 소수의 인원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라인을 멈출 수 있었다. 자본의 대응은 생산을 공간적으로 이동하고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의 이동에 따라 갈등도 이동했으며 기술혁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일본의 경우다. 이 경우는 완성차 핵심 노동자들에 대한 종신고용의 보장과 광범위한 하청계열화에 의해서 갈등이 예방된다.(이중적 린생산) 다른 국가에서도 이런 방식은 모방되었지만 핵심노동자들에 대한 '종신고용' 보장없이는 효과가 없었다.(인색한 린생산) 이 전략의 성공은 하청 체계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는데, 일본 외에는 이런 조건을 창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60년대까지는 농촌지역 노동예비군과 주로 상근남성노동자들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여성노동력을 활용함으로써 별다른 저항없이 하청체계를 관리했고, 그 이후에는 이 체계를 동남아시아로 확대했다.)
 
저자는 따라서 세계자동차산업의 주요추세가 이중적 린생산으로 나가는 한, 미래에 발생할 자동차 노동자들의 주요한 소요는 하청체계의 하층 노동자들에 의해서 주도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이들의 강력한 불만이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과 병행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 상층 노동자들은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갖고 있지만 불만은 훨씬 작은 듯하고 또한 불만은 높지만 구조적 힘은 적은 하층 노동자들과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격리되어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분할은 중심-주변의 지리적 분할에 조응하고 종족성, 거주지, 시민권의 차이와 중첩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세계노동정치에도 중요한 함의를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남한의 노동자운동의 상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일정한 양보와,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비타협적 탄압'이라는 현대자동차 사측의 입장은 (불완전하더라도) 이중적 린생산을 지향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작업장 교섭력의 문제나, 노동자들이 가지는 불만에 대한 진단도 일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한 노동자운동의 약화는 단지 자동차 산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운동의 주력인 자동차산업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약화는 전체 노동자운동에 파급된다. 생산의 (중국으로의) 공간적 이동을 통한 '산업공동화'와 함께 벌어지는 '정규직-비정규직 분할'은 이렇게 해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이런 난점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면,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들 또한 우리만의 것은 아닐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럼 21세기에도 자동차 산업이 계속 노동소요를 몰고 다니는 선도산업일 것인가? 여전히 노동소요를 동반하겠지만 20세기와 같은 파금력을 갖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소요를 피해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부문간에도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새로운 선도산업'을 검토한다. 반도체산업, 운수산업 등이다. 이러한 비교를 위해서는 자동차 산업 이전, 즉 19세기의 선도산업과의 비교가 필요하다. 바로 섬유산업인데, 여기서 저자는 중요한 비교지점을 보여준다. 자동차산업만큼 작업장 교섭력을 갖지 못했던 섬유노동자들은 (비록 자동차노동자들처럼 실질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또한 그 때문에) 강력한 전투성을 보여주었다. 부족한 작업장 교섭력을 '연합적 힘'으로 극복해야했기 때문에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연대성을 보여주었다. 많지는 않지만, 이들이 성공한 경우도 민족해방 운동과 결합하는 등을 통해 연합적 힘을 배가시킬 때 가능했다.
 
반도체 산업과 같이 21세기에 선도산업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업종에서 노동자들의 처지가 20세기의 자동차 산업보다는 19세기의 섬유산업과 유사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그렇다면 새롭게 형성되는 노동자운동은 지역을 근간으로 연합적 힘을 확보할 수 있어야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한편, 남한에서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전투적인 투쟁이 가지는 의미를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사고해볼 수 있다.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전투적인 투쟁을 시작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이 구축한 연합적 힘은 80년대 자동차노동자들의 강력한 구조적 힘과 결합하여 폭발적인 투쟁과 성과를 만들어냈다.)
 
자동차 산업 이후, 새로운 부문의 노동자운동에서 주목할 업종은 운수부문과 도시의 시설관리부문이다. (우연찮게 이 두 부문 모두가 현재 민주노총 안에서는 공공연맹이 포괄하고 있는 업종이라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생산의 세계화는 필연적으로 운수/물류의 중요성을 증대시킨다. 이 부문은 지역적 재배치를 의식적으로 할 수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강력한 작업장 교섭력을 가진다. 이러한 강력한 구조적 힘이 이미 주어진 것이라면 문제는 이 운동이 전체 노동자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가 된다.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까지 대변하면서 노동자운동을 진전시킬 것인가 혹은 적절한 양보에 타협할 것인가는 이들이 가진 힘에 비추어 중요한 운동적 쟁점이다. 현실에서는 당장 진행되는 운수산업부문의 조직적 재편과 관련된 쟁점이 연관된다. 운수부문의 노동자만 별도로 뭉치자는 입장과 보다 광범위한 공공부문으로 뭉치자는 입장이 구체적인 쟁점으로 형성되고 있는데, 운수/물류 부문 노동자들이 가지는 구조적 힘의 향방은 노동정치 전반과 관련하여 중요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남한의 국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운수의 전략적 중요성을 '동북아 중심국가 - 동북아 물류허브'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한편, 남한의 민족주의적 좌파는 민족적 발전전략 속에서 남북철도 연결을 통한 TKR-TSR 구축이라는 전망을 제시하는 데, 이는 남한의 국가가 가지는 발전 전략과 일치한다. '민주노동자전국회의'의 일부는 '통일운동의 활성화에는 운수산별노조가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가지는 데 이런 맥락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는 국가에 대한 타협성, 코포라티즘 성향을 생각한다면 운수/물류 부문이 가지는 전략적 중요성은 노동자운동이 아닌 국가에 활용될 우려가 크다.)
 
한편, 도시의 시설관리노동자들도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차지한다. 도시가 쉽게 이동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도 구조적 힘을 가진다. 특히 금융화된 '세계도시'에서 그렇다.(관련해서는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사스키아 사센  참고) 그러나 이는 충분히 지역에 근거한 연합적 힘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LA에서 SEIU가 진행했던 "건물관리인을 위한 정의" 켐페인-조직화 전략은 이들의 힘을 보여준다.(영화 '빵과 장미'에 생생하게 그려졌던 그 운동이다.) 
 
남한에서도 특히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주력은 이러한 도시의 시설관리노동자들로 형성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공연맹의 조합원 10만명 중 비정규직 조합원이 약 1만명 정도 된다고 추정할 때, 이 중에서 최소한 7500명 이상은 지방자치단체나 공기업 또는 민간기업에 고용된 공공시설환경관리분야의 노동자들이다.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내 환경미화원, 도로보수원 등과 시설관리노조 조합원. 민주노총에 직가입된 각 지역일반노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한편, 이런 상황은 이 부문의 노동자들이 지역에 강하게 기반한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데, 아직 부족하지만 지역일반노조나 지역공공서비스노조의 사례가 그것을 예증하고 있기도 하다.
 
실버는 책의 끝 부분에서 "이 책에서 수행한 분석은 전후의 세계적인 사회협약들이 노동에게도 자본에게도 안정된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했으며, 특히 단순히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게 만들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노동운동의 우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협약이 해결책이 아니며, 좌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다. 여기에 현재의 논쟁 구도 속에서 좌우파 모두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구성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처방은 물론, 운동의 노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가는 시도 모두를 요구한다. (백승욱 선생은 옮긴이 후기에서, 지역적-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연합적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복수의 보편성에 대한 사유와 사회운동적인 노동자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책의 어느 부분을 읽는다고 해도, 이 책은 다른 세계의 문제를 서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어제 오늘 참세상 뉴스,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노동기사를 보면서 드는 의문, 바로 지금 방금 누군가와 논쟁한 운동의 쟁점과 연결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처한 노동운동의 조건이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저자들이 그 보편성을 탁월하게 추출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남한 노동운동의 전투성에 대한 과장된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처한 물질적 조건을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가장 강력하게 '보편적인' 구절 중 하나인 책의 마지막 구절을 읽어보자. 이 말은 당위적이거나 예의 하는 말이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소요가 세계정치에 미친 영향에 대한 분석에 입각한, 구체적인 진술이다.
 
"...따라서 21세기 초에 세계의 노동자들이 마주한 궁극적인 도전은 단순히 노동자들 자신의 착취와 배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윤을 만인의 생계에 종속시키는 국제체제를 향해 나아가는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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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을 보며, 전태일 동판을 고민하다.

어제(10월7일 금요일) "노동자·장애인·서민 외면 서울시 규탄 및 민생 국감 촉구 기자회견"을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가운데 민주노동당 서울시당과 민주노총 공공연맹,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공무원노동조합 서울본부, 장애인이동권연대, 노숙인 인권과 복지를 실천하는 사람들, 은평뉴타운 한양주택공동대책위 등의 단체가 참가했다.
 
* 관련 내용은 링크 참조 :
 
이명박 피해자들이 모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명박의 불도저식 개발정책이 서울의 노동자, 빈민, 장애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지 보여주는 압축적인 자리였다. 이명박은 거대한 청계천 테마파크 행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자들'은 철저하게 배제되고 탄압하고 있다. 정명훈을 초빙하기 위해서 서울시향을 해체하고 단원들을 해고하고, 예술단체를 민영화하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청계천 공사를 위해서 노점상은 폭력적으로 철거된다. 이미 친환경적인 '한양주택'은 뉴타운 아파트 건설을 위해서 철거 위기다. 주민들의 공동체는 파괴될 것이다. 
 
최근 민주노동당 서울시당과 공공연맹 등이 함께 진행한 서울시 산하기관 비정규직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비정규직의 처지는 열악하기 짝이없다. 수천억, 수조원이 드는 공사들을 위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이 강요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자 피땀을 착취해서 테마파크를 '시민'의 이름으로 만들고 있다. 노동자는 시민이 아닌가?, 상황이 이렇게 부당할 수가 있는가! 분통이 터진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 마침 청계천 길목이었다. 공사가 끝난 청계천 길을 지나가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주변 광경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당장 기자회견에서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한 장애인 동지들이 이야기한 좁거나 군데군데 끊어진 인도(휠체어는 커녕 목발도 짚고 갈 수가 없을 정도다 '청계천 새물맞이' 그들만의 축제 ),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노점상과 또 한번의 노점상 철거가 예정된 동대문운동장 등이 눈에 들어왔다. 청계천은 시멘트 덩어리였고, 주변의 상가들은 새로 맞춘 '일관된' 간판을 달고 있었다. 새간판을 달았더라도 구식 상가들은 곧 철거되고 이런 저런 '타워'들이 들어서겠지.
 
이명박의 청계천 복원 정책은 강북 구 도심을 재개발하고 금융세계화에 조응하는 '세계도시'를 만들기 위한 시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스키아 사센은 금융세계화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세가지 지역 유형으로 수출자유지역, 역외금융센터, 세계도시를 들고 있다. 세계도시는 세계 경제활동에 필요한 운영과 관리, 금융이 집중되는 장소다. <경제의 세계화와 도시의 위기>/사스키아 사센 )
 
그런 목적에서 진행되는 만큼 청계천 복원이 생태적이거나 문화적이거나, 약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청계천 복원에 대한 비판들은 정당하지만,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해온 실망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한계적이기도 하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전태일 기념사업회의 노력으로 '전태일 거리'가 조성되었다. 전태일 동상과 함께 전태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글을 담은 동판이 모금으로 제작되었다.
 
전태일을 기억하고 이것을 공간에 남기는 문제는 무척 중요하다. 그런데 고민은, 그것이 이명박의 이벤트 속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전태일이 지키고자했던 사람들을 희생하면서 만든 공간에 전태일의 공간이 조성된다는 역설.
 
전태일 거리 조성을 위한 동판 모금이 9월22일 마감 이후 이달 30일까지 추가로 진행된다. 애초에, 10만원 하는 동판을 여자친구와 함께 신청할까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나 역시도 청계천 복원의 의미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지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청계천을 지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사라져버렸다. 공간에 물질적으로 기념물을 남기고 이것을 통해서 기억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태일 다리, 거리 조성은 여전히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뜻 '나도 하겠소'라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가슴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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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옮긴이 후기

 

노동의 힘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이 책에 대해서 혹은 이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전에 우선 이 책의 "역자후기"를 소개한다. 역자후기를 모두 그대로 타이핑해서 옮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저작권 침해일 수 있는데, 책 홍보도 되는 셈이니 그린비 출판사에서도 너그럽게 봐주지 않을까 싶다. ** 저작권 침해 지적이 들어오면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 '펌'하지는 말아주세요.)
 

금융세계화는 노동운동을 최종적 위기에 빠뜨렸는가? 노동운동은 역사적으로 지양된 운동 또는 사멸중인 잔여적 종인가? '노동의 종말'이라는 선고는 어떠한가? 이런 의문들이 떠나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한국사회에서 달아오른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논쟁 역시 이런 위기가 20세기 말에 비로소 시작된 최초의 경험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장기 20세기에 노동(운동)의 위기는 계속 반복된 경험이었으며, 위기의 시간에 노동운동은 운동의 새 동학과 토대를 발견하며 재정립하였다는 점을 역사는 보여준다. 우리가 비비러 J.실버의 저작에 주목하는 첫번째 까닭은 바로 여기, 즉 이 책이 좀더 장기적인 역사적 동학을 분석할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서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자리를 검토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실버가 20세기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을 분석하며 노동소요에 주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험공간의 변동속에서 위기를 지양할 수 있는 토대와 지평을 발견하는 대중운동의 실천이성에 착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점 때문에 실버의 작업은 그 동안 세계체계 분석의 대표적인 취약점인 대중운동의 동학에 대한 분석을 본격화하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이다. 세계체계 분석은 근대자본주의 세계체계라는 분석단위에 전지구적인 접근을 시도해왔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의해 체계구조가 전환되어온 측면에만 초점을 맞춰왔다는 비판에 늘 취약했다. 그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된 반체제 운동에 관한 논의도 1968년을 전후해 세계 사회운동의 지배적 담론에서 벌어진 전환에만 논의가 한정되어 왔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노동과 노동운동이 겪어왔던 역사적 존재형태의 전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분석이 소홀했다고 할 수 있다. 실버의 작업은 바로 이런 공백을 메우고, 세계체계 분석과 대중운동의 장기동학 분석을 접합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이것이 우리가 실버의 저작에 주목하는 두 번째 이유이다. 이런 시도는 노동운동을 노동운동의 경험공간에 가둬둔 채 논의하기보다는 논의의 지평을 노동운동 외부에서 노동운동을 약화시켜온 요인들로까지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바로 그런 장점이 있기에 노동우동의 최종적 위기론에 대한 세계체계 분석의 정면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버는 노동--자본의 동학을 전지구적·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최종적 위기론을 거부하는 동시에 노동운동의 진정성과 의지의 낙관만이 길은 아니라는 점도 인식하고 있다. 근대의 세계-역사적 과정은 노동계급과 노동자운동이 카타르시스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비극적·위기적(파국적) 상황을 겪어왔다는 것을 모두 보여준다. 실버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현상과 새롭고 유례없는 현상을 구별하여 안내하는 곳은 바로 이런 두 상황 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장점은 바로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을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현상과 유례없는 현상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는 바, 이런 인식지평은 그녀가 노동운동의 역사를 지역적 수준과 세계적 수준을 가로지르는 장기동학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비로서 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과 노동계급이 지속적인 형성과 재형성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런 문제설정 덕택에 우리는 노동계급이 형성을, 통상적으로 제기되는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 속으로 던져버릴 위험성에서 비껴서 있게 된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존재형태라는 문제가 자본에 의한 노동시장의 분단, 인종·민족·젠더 등 비계급적 토대에 따른 노동계급의 배타적 자기동일성의 형성, 국가에 의한 시민권의 경계 분할 속에서 이뤄지는 지속적인 경계긋기의 과정으로 역사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건은 (재)형성을 추동하는 기제를 어떻게 분석하느냐가 된다. 실버가 자본이동, 제품주기, 세계정치의 측면에서 노동운동의 지역적·세계적 추세와 근대세계체계의 변화가 맞물리는 지점, 즉 시간의 동학과 공간의 동학이 맞물리는 접합을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계체계 수준에서 자본이동과 제품주기의 변화(역사적 자본주의와 공간·기술·제품·조직·금융적 재정립)는 특정 지역에서 노동운동의 위기를 낳는 요인이기도 했지만 노동운동의 중심지를 새로운 곳으로 옮기는 요인이기도 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런 계기들이 맞물리면서 노동계급이 새롭게 형성되고 노동운동이 중심지가 비서구로 옮아온 주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중국으로 가는 전지구적 자본이동과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는 노동운동의 중심지가 중국으로 옮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중심지 이동이 기존 지역적 노동운동의 최종적 위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실버의 논지 중 하나이다. 자본의 공간 재정립은 기존 노동운동의 중심축을 지역적으로 이동시킬 수는 있지만, 다른 형태의 새로운 재정립들 때문에 기존의 공간에 새로운 노동-자본의 갈등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방식은 단순히 갈등이 영원하리라는 선언이 아니고 노동-자본간 모순 관계의 역사적 전화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요청으로 읽어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버에 따르면 현재 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위기에 대한 해답이 출현할지(즉, 노동운동의 재정립이 이뤄질지)는 두고봐야 할 일로, 경험과 그에 적절한 새로운 대응만이 말해줄 수 있는 일로 남아있다.
 
여기서 출발해, 우리가 이 책에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실버가 과거를 보면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개념의 창을 제시하여 이를 구체적인 조사분석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이 두가지 시계추식 진동, 즉 맑스식 노동소요와 폴라니식 노동소요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인식과 발견이 그것이다. 폴라니식 노동소요는 생계의 권리를 약속한 기존의 사회협약(노동의 부분적 탈상품화)이 파괴되거나 약화되면서 일어나는 사회적 정당성의 위기에 대한 반격에서 기인한 노동소요를 가리킨다. 전지구적 수준의 경제변화와 자기조절적 시장의 확산은 노동자들의 시장교섭력을 약화시켜 노동의 (허구적) 재상품화를 강화함으로써 이런 정당성의 위기를 낳고 있다. 폴라니식 노동소요가 노동의 허구적 상품화와 사회의 자기방어 운동이라는 이중적 운동('시계추 운동')에 관계한다면, 새로운 차이--경향, '단계'(실버)--에 연루되는 것은 맑스식 노동소요라고 할 수 있다. 맑스식 노동소요는 수익성의 위기를 해결하고자하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재정립들이 (새로운 중심지와 산업의 등장을 포함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잇달아 새로운 노동계급을 형성하고 강화시킴에 따라 나타나는 노동-자본 갈등의 산물이다.
 
이처럼 유형화하게 되면, 결국 노동의 힘이 어디에 원천을 두고 있느냐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실버가 도입하는 것이 에릭 올린 라이트의 구조적 힘과 연합적 힘이라는 개념화이다. 구조적 힘은 노동자가 놓여있는 경제체계 안에의 위치 때문에 얻게되는 힘, 즉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의 공급이 부족한데 따른 시장교섭력(이것은 폴라니식 노동소요와 관련있다.)과 특정 노동자 집단이 핵심산업의 작업공정 내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에 따른 작업장 교섭력(이것은 맑스식 노동소요와 관련있다)을 가리킨다. 새로운 산업의 등장은 시장교섭력을 약화시킬 수 있지만, 작업장 교섭력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구조적 힘의 새로운 도약을 향한 새로운 경향은 아직 미약한 상태이다.
 
이럴 때 노동운동의 장기동학에서 요청됐던 힘의 원천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포함해) 기업과 산업차원을 초과하는 지역적·사회적·국제적 수준에서 다양한 형태의 집단 조직을 형성한 결과 얻게된 연합적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노동운동이 임금과 작업조건의 개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자들의 운동, 즉 '노동운동'(labor movemebt)에 한정되지 않는 '노동자운동'(worker's movement)이라는 표상을 자기화해야한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합적 힘은 결국 노동운동이 경계긋기 전략들, 즉 노동시장의 분단, 노동계급과 시민권의 분절에 도전하는 국내적·국제적 수준의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으로 재정립되어야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노동운동이 시대적 성취를 이뤄낸 과거의 특정한 역사적 조직형태에 고착되어서는 안되며, 노동운동은 늘 그것을 둘러싼 더 큰 사회운동의 일부로서 존재해왔다는 것을 새삼 다시 확인해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길은 보장되지 않은 길이다. 더욱이 현재 새롭고 유례없는 현상 중의 하나는 노동자운동의 동학과 세계정치의 동학이 맺고 있는 관계의 변화이다. 금융세계화가 기존 노동운동을 약화시키고 있지만,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는 아직 뚜렷이 부상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적 규모의 전쟁, 즉 대규모 군사동원없는 하이테크 군사세계화는 20세기의 세계전쟁과 달리 노동자-병사의 동원을 극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동원과 노동자-시민권의 근대적 연계고리가 끊어지고 있다. 중심부 노동자들이 군사세계화를 시민권의 확장과 연계할 여지는 거의 없다. 용병활용은 상징적이며, 군사세계화는 재정을 악화시켜 외려 사회보장에 대해 역진성을 갖는다. 세계화 시대에 국제적인 교섭력이 취약한 비서구 세계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서구 중심부 노동자들에게도 금융세계화와 군사세계화에 맞서는 새로운 국제체제의 수립이라는 의제가 아킬레스 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버의 작업은 오늘날 노동과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향을 정립하는 데 필요충분한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만 실버 역시 이 문제를 의식하고 있는데 이는 실버가 '누가 노동자인가?'라는 질문에 해독제를 제시하고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노동의 중심성은 계속 전위되어왔기 때문이다. 노동의 역사는 노동의 개념과 노동의 조직방식이 일의적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에 따라 노동자의 개념도 변해왔다. 가치와 사회관계(구체적 노동의 추상적 노동, 즉 자본으로의 전화로 표현되는 노동-자본 관계)의 생산이라는 맑스적 노동의 형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노동의 새로운 형상들이 문제가 된다.
 
오늘날 노동은 가치와 자본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 일반, 따라서 사회성의 (재)생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돌봄노동을 포함한 가족 안팎의 정동노동/감정노동과 그 상품화, 폐미니즘의 기여). 우리가 노동의 일반화 또는 일반화된 노동으로 개념화해 보려고 하는 이런 경향은 노동의 최종적 위기론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의 방향이다. 유럽의 대령실업과 사회적 위기는 노동의 소멸이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예증한다. 사회적 삶 일반, 즉 사회성의 (재)생산이 노동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노동이 잠재적으로 정치적인 행위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란 공동체·사회성을 어떻게 구성·조직할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의 전화는 여전히 공동체의 재구성에서 핵심을 차지한다.
 
문제는 노동중심성의 전위(표상, 의미, 조직, 실천 등)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와 함께 사회적 삶 일반을 (재)생산하는 일반화된 노동은 노동자들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의 (잠재적) 주체라는 것을 함의하면서도 노동자운동의 방향이 달라져야함을 뜻한다. 노동의 현실과 개념 자체의 역사적 변화에 토대를 둔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이 그에 대응하는 하나의 길이 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실버(그리고 라이트)의 연합적 힘에 관한 논의에 동의하면서도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를 보완해 발전해 나갈 필요성을 느낀다. 연합은 다양한 (잠재적) 정치주체들의 동일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노동자운동의 과제와 페미니즘의 과제는 노동의 일반화와 노동-가족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감의 계기를 확장하고 있다. 두 운동은 기차의 레일처럼 어느 한쪽 없이 자신의 과제를 온전히 이루어낼 수 없다. 하지만 두 운동이 추구하는 보편성은 서로 감축 불가능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복수(複數)의 보편성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며, 이렇게 감축 불가능한 차이 때문에 소통이 더욱 필요하다. 이런 소통없이 기업이나 산업에 토대를 둔 노동 중심성을 전위해 지역적·국가적·국제적 수준에서 연합의 힘을 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운동적 노동자운동은 이런 인식에서 출발해야할 것인데, 이는 지난 노동운동의 추세를 연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버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페르낭브로델센터의 연구집단이 실시한 공동작업에서 시작된 실버의 연구는 한편에서 노동(운동)의 역사를 다룬 이 책의 발간으로 진행됐고(이 책 『노동의 힘』은 출판된 이후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20005년에는 미국 사회학회의 최우수 출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서 세계자본주의의 헤게모니 교체를 분석하는 지오반니 아리기와 공동작업으로 진행됐다. 아리기와 함께 펴낸 『근대세계체계의 카오스와 거버넌스』(1999) 이후 실버는 아리기와 함께 20세기말 이후 세계체계의 변화를 19세기와 대조하는 여러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노동의 힘』은 실버와 아리기의 장기 20세기에 대한 다른 작업들과 함께 읽을 때 비로소 그 온전한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번역작업에는 기획에서 출판까지 약1년의 기간이 걸렸다. 공동작업은 시간을 줄여주기도 하지만 번역용어의 통일에서 문체의 조정까지 예상치 못한 작업에 시간을 쏟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번역을 할 때 늘 그렇듯이 이 책을 번역하면서도 적절한 번역어를 찾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일례로 실버가 데이비드 하비에게서 빌려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 데 중요하게 사용한 'fix'라는 용어를 우리는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재정립'으로 번역했는데, 본래의 함의를 완전히 담아냈다고 할 수는 없다. 하비는 이 용어를 사용하면서 영어 'fix'에 담겨 있는 이중의 의미인 '수선'이라는 함의와 특정한 방식으로 '고정' 시킨다는 함의를 동시에 포함시키려 했는데, 한국어에는 그에 상응하는 단어를 찾기 힘들어, 이 두가지 함의를 어느정도 담을 수 있는 '재정립'으로 번역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백승욱이 서문과 I~II장을, 윤상우가 III장과 부록을, 안정옥이 IV~V장을 번역한 뒤 번역자들이 번역을 서로 돌려보며 오역을 수정하고 용어와 문체의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했다.
 
위기의 시대에 사회과학적 분석력의 중요성에 다시 힘을 실으려 노력하는 도서출판 그린비가 있기에 이 책의 출판이 가능했다. 편집과정에서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준 데 대해 편집부에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이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논쟁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005년8월
옮긴이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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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자치단체비정규직노조와 울산 북구청, 민주노동당

울산북구에서 당선된 조승수 의원이 법원 판결로 의원직이 상실되었다. 민주노동당에 비판적인 나로서도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또 법원의 노골적인 편파 판결이라는 점에서 분통터지는 일이다.
 
이 결과로 울산 북구 상황은 운동 진영 내부정치에 있어 앞으로 대단히 복잡하게 진행될 것이다. 단지 보궐선거와 이를 위한 후보선출 등의 문제만이 아니다. 울산 북구청의 최근 상황을 보면서 민주노동당이 지방자치단체장을 당선시킨다거나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다. 울산 북구 보궐 선거에도 주는 시사점이 있을 것이다.
 
공공연맹 산하의 울산자치단체비정규직노조는 지자체에 직접고용된 상용직, 일용직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 작년 노조 설립이후 단협 체결을 위한 교섭과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노조의 역량이나 지역적 상황이나 만만치 않다.
 

민주노동당 구청장이지만 동구청과 달리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북구청은 집요하게 다음 조항을 문제삼고 있다.
 
제32조(외주 또는 하도급) 조합원이 수행하는 업무의 일부를 외주 처리하거나 하도급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갑’은 사전에 ‘을’과 합의하여야한다.
 
최근 공공부문의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산의 주된 경로가 간접고용이라는 내용은 얼마전 이 블로그의 포스트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몇개의 토론 (1) )이러한 간접고용 확산을 막기 위한 조항이다. 북구청은 이러한 내용을 체결하는 것이 구청장의 월권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는데, 행자부의 지침 등이 내려오면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결국, 민주노동당 중앙당에 대한 공공연맹 차원의 요구, 지역에서 울산시당에 대한/을 통한 항의 등을 통해서 나온 최종적인 입장(9월29일)은,

이를 수용하되 단서조항으로,
현재 일용직인 조합원 6명을 이후 상용직으로 전환하고
민간위탁을 원하는 조합원에 대해서는 민간위탁이 가능하다는 내용을
넣자는 것이다.
 
단협 이전에 개별조합원과 합의를 통해서 민간위탁이 가능하게 하겠다는 내용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는 노조 위원장 출신인 이상범 구청장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조합원들의 실망도 크다. 민주노동당 출신의 구청장이 보여주는 입장이 정확히 '사용자'에 걸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조 입장에서는 북구청까지 정리가 되어야 이어서 다른 한나라당 지자체장의 구청들과 울산시에 대한 투쟁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에 울산 북구에 대한 정리가 시급한 실정이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지자체장에게도 합의가 안되는데 다른 지자체에 어떻게 무슨 요구를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투쟁의 수위, 지속시기가 어떠해야하는지 등이 고민된다.)
 
민주노동당이 지자체 장이 된다는 것은 곧 해당 지자체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에게는 사용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이 어떤 입장을 견지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 필요하다. 공공성과 노동권을 어떻게 보장할것인가, 지자체에서 공공성의 성격, 그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한다.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 속에서 지역적 정책의 자율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도 문제이다.
 
(그렇다고 지역적 자율성 증진을 입장으로 채택하는 것도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 또 하나의 쟁점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지방분권이란 지역의 불균등 발전을 인정하고 강화하는 가운데 지역을 분할하는 효과를 가진다. 또한 지역 상호간의 발전주의 경쟁을 통해 신자유주의 정책과 친 기업 정책을 경쟁적으로 도입하게 한다. 바닥을 향한 경주.)
 
이런 원칙이 세워지지 않는 한 '사용자'로서 지위를 가지는 민주노동당 출신의 지방자치단체장의 입장은 매우 임의적이고 동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공공성을 '예산절감'으로 이해하고 이를 위해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지자체만이 아니라 다른 공공기관에서도 그럴 수 있는데, 조건은 다르지만 최근 민주노동당 인사가 책임자로 있는 여주장례식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전국시설관리노조 소속)도 유사한 맥락이다.
 
민주노동당이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경유하면서 지역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중앙정치'보다도 지역에 대한 개입은 민주노동당 활동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화시켜주는 의미가 있다. 또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운동의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이런 의미들로 인해서 민주노동당의 지역활동이 중요한 활동의 하나로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대응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울산 북구청에서 제기되는 것과 같은 쟁점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민주노동당의 지자체 진출은 득보다 독이 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이 신자유주의 하 갈등이 증폭되는 지역문제에 대한 관리정책을 대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쟁점이 무상의료 무상교육에 대한 것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예산의 문제가 제기된다. 무상의료/교육을 빨리 실현하기 위해서는 예산절감이 필요하게 된다. 이럴 경우 1차적인 타겟은 해당 부분의 노동자가 된다. 예산절감을 이유로 비정규직화가 강요되고 낮은 임금이 책정된다. 최근 학교비정규직노조가 투쟁하고 있는 학교운영지원비 폐지 문제라든가 보육교사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 이른바 100% 비정규직들로 채워지는 노동부의 '사회적 일자리 사업'등이 그렇다. 따라서 무상의료/교육의 요구는 반드시 해당 부문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저임금을 방지하는 대안과 함께 제기되어야한다. 이런 문제들이 해당 노조들로부터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 단편적인 문제제로만 이해될 뿐 무상의료/교육 사업의 내적인 맹목을 교정하는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울산 북구의 경우,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노동자 출신 지자체장이 노동자를 무시하는 곳에서 다시 노동자 국회의원을 뽑자고 선거를 해야할 판이다. 과연,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은 커녕 최소한 그 확대를 방지하자는 조항마저도 합의하지 못하는 지자체에서 국회의원 후보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어떤 발언을 할 수는 있을 것인가 의문이다.
 
울산지자체비정규직노조의 입장은 원칙적이다. 동구에서 가능한 협약이 북구에서 가능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기왕 수용할 조항이라면 굳이 이런저런 단서조항 없이도 노조와 추후에 협의해도 충분한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구청이 최소한 동구청과 같은 수준으로 합의하지 않는한,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 북구청에 대해 자치단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투쟁 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는 논란이 증폭되겠지만, 민주노동당의 지자체 정치가 어떤 내용이어야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계기를 강렬하게 던져줄 것이다.
 
또한 북구청이 뒤늦게 요구안을 수용하고 노조가 다른 구청을 상대로 투쟁을 전환한다고 해도, 이 상황이 던지는 질문들은 민주노동당에게 회피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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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최근 상황에 대한 공공연맹 울산지구협 박주석의장(발전노조 해고자)의 글 링크(올린 순서대로.)
 
 
아래는 북구청 앞 천막농성에 들어간 울산자치단체비정규직노조의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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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선생님을 기억하기

로젤루핀님의 [대학서곡과 신포도] 에 관련된 글.

 
정운영 선생이 타개하셨다는 이야기를 지난 주말이 지나고야 전해 들었다. 듣고나서 인터넷을 보니 정운영 선생 타개에 대한 기사가 있다.
 

각 학과마다 조직된 사회과학학회는 운동권을 길러내는 의식화 셀로 활발히 조직되어 있었다. (아마 91년 투쟁의 성과로 조직된 91학번들이 92학번을 대량으로 조직한, 이후에는 쇠퇴한 학회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나도 물론 학회에 가입했지만 당시에 1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세미나는 '철학에세이'부터 시작하고 있었고 그나마 이런 저런 1학기 행사일정들과 투쟁일정으로 세미나는 별로 진행되지 못했다. 92년 4월에는 전대협 총회까지 학교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전대협의 당파적 강화'라는 구호를 보고 나서 선배의 설명을 듣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지금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당없는 당파성이라..)
 
여튼, '철학에세이'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것을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어리둥절했는데, 중고등학생용 철학우화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초를 공부해보자는 당시의 시도는 재생산 경로로서 사회과학학회가 양적으로 성장한 부작용이었다. '쉬운' 책으로 새내기를 조직해보자는 선배들의 맹목이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여름방학 동안은 도서관에서 보냈는데, 학회 세미나에서 얻을 수 없었던, 또 고등학교 과목과 다를게 하나없는 교양과목 강좌로 얻을 수 없는 지식을 얻는 공간이었다. 그 때 열심히 읽었던 책이 정운영 선생이 쓴 <광대의 경제학><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 등이었다.
 
당시에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용이었지만 열심히 읽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정치경제학의 주요 개념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역설이다. (말하자면 교과서가 아니라 컬럼을 통해서 '야매'로 배운 셈이다.) 정운영 선생의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언급도 이 컬럼집에 있었는데, 이를 통해서 국가독점자본주의 개념을 처음 접했고 곧 이어 사회구성체논쟁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이어서 읽은 책들을 통해서 (아직 어정쩡하기는 하지만)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노동가치이론연구> 등 책은 나중에 '공부로' 읽게 되었지만 선생의 시원시원한 문체는 잊혀지지가 않는다.
 
선생을 처음 뵌 것은 내가 사무국장을 맡은 학생회에서 새내기 수련회인 '새터'를 진행하면서다. 새내기를 위한 강연으로 누구를 섭외할까 논의하다가 정운영 선생을 섭외하자는 제안을 하고 결정되었다. 정작 새터를 진행하면서는 실무에 치여서 강연을 전혀 듣지 못했지만 그 때 처음 직접 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로젤루핀님이 올여놓은 [대학서곡과 신포도]가 그 내용이었을 것같다. 선생의 사후에야 못들었던 당시 강의를 문자로나 접하게 되는 셈이다. 거 참..
 
그 이후에 뵌 것은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진행한 정치경제학 강좌에서다. (veloso 선배가 기획했던 강좌) 10강으로 진행되었는데 마지막 강좌에서 정운영 선생이 던진 고민이 아마 선생이 마지막까지 가져가셨던 고민이 아닐까 싶다.
 
자본의 세계화 시대에, 우리의 선택지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 질문이었다. 국민국가 내의 계급투쟁의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유지하고 국민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본을 국가 내에 묶어두는 것이 답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좌파의 대안은 무엇인가 등등. (최근에 읽고 있는 실버의 <노동의 힘>이 언급하는 논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선생이 마지막 몇년간 중앙일보 논설에서 모호한 입장으로 보였다면 이런 질문들이 관계되어 있지 않을까 예상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정운영 선생에 대해서 쉽게 비난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는데, 최소한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고민이 전제되는 가운데 비판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운영 선생의 질문을 다시 생각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시대에 좌파의 대안, 대중운동의 전략이 무엇이어야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그것을 고민하고 풀어갈 때 정운영 선생을 애도하고, 떠나보낼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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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권서 전비연 의장의 인터뷰와, 에 대한

 
 

비정규직 운동주체들이 정규직노조에 대해서 가지는 양가감정에 대한 지적과 같은 것은 중요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정규직노조의 극악무도한 행태'를 비판하는 가운데 간과되기 마련이다. 정규직 노조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가운데 자기 논리의 함정에 빠지고 점점 스스로가 설정한 제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점에 대한 중요한 지적들.
 
또한 대리주의, 시혜 등에 대한 지적도 중요하다. 민주노총의 비정규노동법안 투쟁에서 늘 느끼던 것이었는데 사실상  정규직 조직인 민주노총이 교섭도 하고 투쟁도 해서 비정규직에게 '좋은 법안'을 선물해준다는 식의 인상을 받아왔던 것이다. 구권서 위원장은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권, 스스로 투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정규직 주체들 스스로의 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투쟁, 그 조건을 만들기 위한 투쟁이 필요한 것이다. 노사정 협상으로 생색내기 하고 언론발 타서 '권리보장 입법 쟁취 국면'이 되었다는 자화자찬이 아니라 말이다.
 
인터뷰 내용 중에서,
 
선택적 포섭과 배제라는 개념을 흔히 말하는데 바로 그렇게 관철해 간다. 정규직 노조를 끊임없이 공격,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고 이제는 대기업 비정규직마저 동일한 논리로 대중과 분리시키려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자대중에 대한 분열이 어떤 정치적 결과를 낳을 지를 생각해보면 중요한 지적이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운동 마저 수혜받은 자로 인식되거나 혹은 인민주의 정치에 직접 동원될 가능성.
 
신자유주의는 노동자 민중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이 결과로서)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하고 통치성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대중동원 양식을 창출한다. 삶의 위기 속에서 대중은 원한의 정치를 통해 인민주의(포퓰리즘) 정치에 동원되고 대중운동은 이 속에서 분열된다.
 
최악의 경우 ;
* 정규직으로 주로 구성된 기존의 노동조합운동이 실현불가능한 코포라티즘을 미망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 위기관리 정권에 동원되고
* 불안정노동자들은 원한의 정치 속에서 인민주의 정치가에 직접 동원되고 자율적 조직(노동조합 형태든 아니든)을 건설하지 못하는 가운데 파편화될 수 있다.
 
이중적인 동원과 노동자운동의 분열과 종속. (정규직에게도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신의 조건의 불안정성은 합의를 미망하게 한다. 더구나 불안정노동자에 대한 직접적인 인민주의 정치의 동원은 그러한 불안을 심화한다.)

이와 다른 노동자운동의 전망을 열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과제들은 ;
* 노동자 계급의 해방은 그 자신의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스스로를 ‘계급’으로 구성하는 역량을 증진하고,
* 자기 운동 속에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파괴적 효과에 대해 ‘사회를 재건하는’ 대안을 스스로 형성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되어야할 것이다.
 
인터뷰의 첫 구절
 
"굉장히 절망했고 엄청난 벽을 느꼈습니다. 열사냐 아니냐의 논란. 대공장 기업별 노조가 쌓아 온 성벽같은 걸 느꼈습니다. 그 힘은 사회를 진보시키는 역량이기도 했지만 거꾸로 그 방향성이 잘못될 땐 어떻게 되나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최근,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에 기고한 공공연맹의 한 부위원장의 글. 그 글에서 사회를 진보시켜온 힘으로서 정규직 노조운동을 무조건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점잖게 충고하는 구절을 읽었다. 아래는 인용
 
"결론에 대신해서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겠다. 흔히들 기업별노조의 저규직 노동자의 책임을 심심치 않게 거론한다. 이미 60% 수준에 달하고 있는 이땅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과 소외를 인식하지 못하고 기업별 체제에 안주하며 노동자 내부의 양극화로 인한 반사적 과실을 취하는 데 대한 질타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20년 가까운 민주노조운동, 10년의 성장과 발전을 눈앞에 둔 민주노총을 과연 누가 지금까지 지탱해오고 있으며, 비정규 개악법안 저지와 권리입법 쟁취를 위해 총파업을 준비해온 것은 누구였던가? 더 나아가, 기업별노조의 정규직 노동자의 지원없이 독자적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 과연 가능했었는가?"
 
정규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역사적 성과를 오늘날 어떻게 하고 있는지 스스로 다시 생각해보라는 이런 비판의 격에 맞는 답변은, 정규직 노조 활동가들에게 기대하기 힘든 것인가? 이 두 진술 사이에 심연이 놓여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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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디트마르 로터문트 지음, 양동휴, 박복영, 김영완 옮김 / 예지
 
 

저자는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나 대공황이 확산되는 경로에 대한 설명에서 주로 케인즈의 논지를 따른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의 주기적 파동과 이윤율 하락을 대공황의 중심적인 원인으로 설명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접근과는 상이하다. 그러나 이 점은 공황의 양상을 설명하는 데는 어쩌면 더 유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고민했던 문제들과 직접 마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금본위제, 평가절상/절하, 재정정책 등에 대해서 그렇다.
 
저자는 대공황이 1929년의 월가의 주가폭락이라는 한번의 사건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 이미 1920년대부터 밀, 설탕, 커피 등 농산물 가격의 파동과 하락이 존재했고 이는 대공황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추세를 보여준다.
 
저자의 설명에서 주목되는 것은 대공황의 다양한 영향이다. 유럽에서도 독일에서 파시즘의 발호부터 스웨덴에서 사민주의의 안착까지 상이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영국은 자유주의 체제를 유지했지만 인도를 초과착취한 덕분이었다. 미국은 경제정책에서 갈팡질팡했으며 자신만이 아니라 세계 다수 국가들에서 대공황의 고통을 심화시켰다. (많은 칭송을 받는 로저벨트의 '뉴딜'도 수사학적 가치에 불과했으며 달러의 평가절하가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도 대공황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정정해준다.) 결국 미국의 정치적 고립주의(그러나 채무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독일에서 파시즘이 발호하는 한 원인이 된다.
 
유럽에서 위기는 중상주의적인 방식의 처방이 이루어졌지만 식민지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식민지는 유럽의 위기 극복을 위한 초과착취의 대상이 되어야했다. 식민지 지배자들은 고율의 관세를 유지하거나 관세수입이 줄어들 경우 인두세를 물리는 방식으로 손실을 보전하려고 했다. 또한 제국주의자들은 베기에령 콩고에서 자행되었던 강제경작과 같은 억압적 방식으로 착취를 강화했다. 이 결과는 온전히 농민의 부담이 급증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나마 사용가능한 모든 현금과 장신구를 빼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대륙별로 상이한 영향을 받았지만, 대룩 내에서도 상이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대공황은 수출대체공업화가 시작된 계기로 알려져있지만 그 정치적 결과는 상이하다. 아르헨티나는 1946년 페론이 집권하기 이전에 1930년대 '악명높은 10년'의 보수적 체제가 지배했다. 맥시코에서는 '제도혁명당'을 통해 '혁명'이 '제도화'되는 다른 결과가 진행되었다.
 
대공황이 과정을 겪으면서 각국에서 포퓰리즘 정치가 확산된다.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발호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코포라티즘으로 발전하며, 식민지 국가들에서는 민족해방운동으로 전개된다. 대공황에 강타당한 농민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식민지 지배 문제와 연결하여 인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1945년 이후의 세계를 크게 바꾸어놓게 된다. 한편으로는 전쟁을 불러오고 또 유럽의 약화와 함께 식민지 민족해방을 불러온다.
 
(포퓰리즘-인민주의-에 대해서는 최근에 출판된 <인민주의 비판 /정인경.박정미, 윤종희, 박상현> 참고. 개인적으로는 아직 책의 앞부분을 읽는 중. 다만, <인민주의 비판>은 축적체계와 헤게모니의 위기 시기에 기존의 정치이념이 쇠퇴하는 공백을 인민주의가 메운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서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은 대공황의 경제적 위기가 선동적이며 임기응변에 능하고 희생양을 찾아내는 인민주의 정치를 활성화하는 조건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치이념의 위기와 경제적 위기를 동시에 사고하고, 특히 그 위기가 대중 이데올로기에 작동하면서 특정한 정치적 결과를 낳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특정한 계기들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인도가 중요한데, 인도에 대한 영국이 의존은 전쟁시기에 더욱 강화되었고 전후 인도의 발언력을 높이게 된다. 결국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막을 수 없었다. 이는 대영제국을 붕괴시키는 축이 된다. 또 이 결과 대영제국을 근간으로 한 유럽의 식민지배 체제도 모두 붕괴한다. 미국이의 전후 구성에서 직접지배 식민지를 폐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러한 역사적 과정이 없이는 식민지 폐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전쟁-공황-전쟁으로 이어진 20세기 초반의 30여년은 19세기의 세계체제를 붕괴시켰다. 이 과정은 영국헤게모니의 붕괴와 미국 헤게모니의 등장, 법인기업 자본주의의 새로운 축적체계의 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대공황은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극적이고 중심적인 사건의 하나이다. 그것은 영국 헤게모니의 경제적 붕괴가 최종적이고 폭력적으로 정치적 붕괴까지 이어지게한 계기이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다양한 정치적 귀결은,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의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적지않은 시사점을 준다. 똑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경제위기와 정치위기, 전쟁 등의 어려운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책은 대공황기 좌파들의 운명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비극과 그 원인-한계를 알고 있다. 그리고 물론 식민지 국가들에서 민족해방 운동이 어떻게 사회주의와 결합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대공황의 세계적 양상을 통해서 그 경제적 영향은 물론 정치적 영향, 이에 대한 좌파의 대응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부분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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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대한 또 다른 소개는 '말'지의 아래 기사를 참고. 아래 소개 덕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달의 책 |『대공황의 세계적 충격』  
대공황 연구의 사각지대였던 식민지에 대한 역사적 조망 - 정지영
 
 
 
* 참고할 책
 

인민주의 비판 - 과천연구실세미나 27
정인경.박정미, 윤종희, 박상현 지음 / 공감
== 이 책을 통해서 대공황 등으로 대표되는 축적체계의 전환기의 정치적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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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몇개의 토론 (1)

최근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토론을 할 기회가 몇번 있었다. 토론들을 거치면서 시사점들과 이어진 내 생각들. 첫번째는 철폐연대 회원토론(기관지 읽기 모임)을 다녀와서 메모.
 

1. 최근 공공부문 비정규직 확산의 주요한 양태 - 간접고용의 확산
 
곧이 공공부문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최근 비정규직 확대는 간접고용 확산이 주요한 추세인 것으로 보인다. 직접고용 비정규직의 확대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과 이에 따라 (대단히 기만적이기는 하지만)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이 제시되면서 '자기 기관/부서'에 비정규직을 확산하는 방식은 피하고 있다. 이에 따라 광범위하게 이른바 '비핵심업무'를 외주화하는 것이 전략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 대해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있는 주체들 사이에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점은 향후에 비정규직의 문제가 단지 '기간의 정함이 있는' 노동자에 대한 노동계약의 문제가 아니라, 정규직을 포함하는 구조조정의 문제, 전반적인 노동의 불안정화 문제로 접근되어야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추세는 최근의 공공부문 구조조정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최근 공공부문의 사유화는 반드시 공기업/기관 전체를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발전노조의 파업, 철도노조의 사유화저지 투쟁 등을 거치면서 변화된 측면도 있고 신자유주의 관료들도 전면적인 사유화는 정치적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는 것같다.
 
그 결과 '비핵심업무'의 외주화가 주된 우회로로 나타난다. 이것은 '민간위탁'이라도 불리는 데 제조업 사업장에서 사내/사외 하청과 유사한 형태다. 이런 업무를 사기업에 외주화하면서 노무관리에 대한 부담이나 구조조정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예처에서도 경영평가의 명목으로 명식적으로 이를 요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전 자회사인 한국전력기술은 업무의 30% 이상을 재위탁할 것을 한전으로부터 요구받는다.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전면적인 사유화보다는 지분참여 방식이 도입되기도 한다. 이런 방식은 시장개방에도 유용하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는 시장개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업종에 대해서도 초국적 자본의 '투자'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물시장 같은 경우에는, WTO FTA 협상에서도 타결이 쉽지 않아 개방 일정이 나오고 있지 않지만 이미 지분참여의 형태로 국내에 광범위하게 진출해있다. 공공서비스를 국내의 '민간기업'에 넘기면서 외국자본의 자연스러운 침투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비정규직 확산 문제와 구조조정 문제, 정부 지침/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또한 간접고용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나타나는 비정규직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이 수립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정규직 노조들이 업무의 외주화가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 한편, 일정한 시기에 운동의 흐름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자리에 있더라도 공동으로 느끼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상반기를 거치면서 연맹 안에서도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문제가 간접고용 확대(와 이에 따른 구조조정)의 문제로 전환되고 있다는 판단이 공유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서로 토론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몇몇 활동가들과 의견이 일치했던 것에 놀랐던 적이 있다. 철폐연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 철폐연대와 별도로 토론을 진행해본 바도 없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상황에서도 대상에 대해서 일치하는 분석이 진행된다는 것은 현실의 추세가 그 만큼 명확하기 때문일 것이다.
 
2. 상급단체 사업작풍에서의 몇가지 문제 : 큰 문제-구체적인 문제의 연결
 
여기서 어려운 점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확산-구조조정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대응과 이와 관련되어 당장 터진 현안 사업장의 투쟁을 어떻게 관계 맺도록 할 것인가, 각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더군다나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비정규사업 담당자로서 무엇에 우선순위를 두어야하는가에 대한 현실적인 업무상의 문제까지 제기된다.
 
전반적인 인식 속에서 나올 수있는 추상적인 투쟁계획은 있지만, 이 것은 상당한 시기 동안 기획해서 이루어져야하는 투쟁이다. 그나마 이렇게 할 수 있는 조직들은 여유가 있는 경우다. 갑작스런 사용자의 공격으로 인해 당장 해고투쟁을 진행하는 사업장에 대한 지원, 연대의 조직화와 함께, 이 속에서  전반적인 정부 정책기조에 대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여기에는 간극이 발생한다.
 
당장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이 두가지 투쟁을 어떻게 관계맺도록 할 것인가도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모든 투쟁은 구체적인 사안에서 벌어지며, 어떤 기획된 투쟁이라고 해도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를 경유하지 않고는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공공부문에서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의 양상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은 더 심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업무가 유사한 경우에는, 입직구(입사경로)의 차이로 인한 차별이 중요하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의 사례가 그랬는데 업무의 내용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데도 공채를 통해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의 소개로 들어왔는지가 결정적인 문제가 되는 식이다.
 
(이 '시험'의 문제는 투쟁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도 결국 '내부공채'라는 시험을 통한 정규직화를 극복-거부하지 못하고 개별화되어 힘을 잃었다. 최근의 경찰청고용직공무원노조의 경우도 유사한데, 경찰청이 제시한 공채를 통한 신규채용을 원칙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험방식을 인정할 경우 정규직화의 문제는 개인의 능력의 문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야말로 자본이 가장 원하는 방식, '능력주의'의 수용이다. "비정규직이 된것은 네가 능력이 없어서야!" 난감한 점은 이렇게 시험을 통한 채용방식을 인정하면서도 조합원에 대한 전원채용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경찰청고용직공무원노조가 처한 딜레마.)
 
업무의 차이가 존재하는 경우은 앞서 언급한 '비핵심업무'의 외주화이다. 이 경우 주로 육체노동이 단순노동='비핵심'노동으로 구별되어 차별된다. 사무실에서 펜대 굴리는 것은 핵심이고 삽질하는 것은 비핵심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시설관리부서 등 부서의 고유한 업무가 육체노동을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부서에서도 육체노동은 비핵심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사실은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분과 차별이 정신노동-육체노동에 대한 차별에 의해 과잉결정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이 단지 고용형태로 인한 차별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에 있어서 다른 종류의 사회적 차별에 의해 과잉결정된다. 정신-육체노동의 구별만이 아니라 여성 노동에 대한 차별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 장애인노동자에 대한 차별, 연소자에 대한 차별 등등..
 
여성적 일자리는 대부분 비정규직 일자리로 인식되며, 연소자의 일자리는 당연히 비정규직으로 사용된다. 여기에는 어떤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기 보다는 사회적 차별의 다양한 모순들이 고용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형식적인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에는 다양한 사회적 모순들이 작용하면서 모순을 심화시킨다.
 
따라서 비정규직문제라는 것은 단순한 고용형태의 문제라기 보다는 노동을 둘러싼 사회적 모순의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결과, 이 문제는 빈곤 문제와도 연결된다.)
 
4. 정규직노조 안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하기
 
정규직노조의 비정규직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는 조합원이 문제가 된다. 모든 정규직노조들은 '조합원 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문제는 이런 말이 면피용으로 만병통치가 되어서 그나마 할 수 있는 노력조차 방기하는 명분이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간부들조차 관심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대해서 철도노조의 사례는 흥미롭다.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는 노조 내에서 급진적인 경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걸맞게 새마을호 여성 승무원 투쟁, 철도매점 투쟁 등에 선도적으로 임했다. 문제는 철도노조 본조직이었는데, 애초에 새마을호 여성 승무원 투쟁이 시작될 시점만해도 투쟁방향, 결합 문제 등에 대해서 서울지방본부와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다.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런 입장은 이후에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는다. 비정규직 기금 모금 결의, 철도매점 투쟁에 대한 지원 등 어느 정규직노조보다 진전된 입장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철도노조 서울지방본부의 '내부투쟁'이 작용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조 내부에서 선도적인 그룹이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할 경우에 대기업 정규직노조도 전반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후에 정규직 노조 집행부를 넘어서 조합원들의 문제의식까지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또한 지난한 과제이기는 하겠지만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5. 조직경쟁
 
공공부문의 비정규직만큼 노조 조직간의 조직경쟁이 심한 영역도 없다. 민주노총 안에서도 공공연맹만이 아니라 여성연맹, 일반노조 등이 조직경쟁을 하고 있는 형세다. 여성연맹은 100% 공공부문이며 일반노조도 70% 정도는 공공부문이다. 그밖에도 전국여성노조도 공공부문이 주된 조직화 영역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는 것은 공공부문의 조직화가 상대적으로 쉬운 측면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업장별로 비정규직의 대규모로 결집되어 있거나 사용자가 함부로 노동탄압을 할 수 없는 조건 등이 작용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소모적인 갈등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누가 해당조합원을 조직하는가 문제를 두고 낯뜨거운 일들이 발생한다.
 
이런 일은 이들 조직이 조합원들을 자주적인 주체가 아니라 마치 자신들의 사유물처럼 사고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조직적 성과를 내는 데 필요한 조직을 뿐이라는 것인데, 이건 비단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문제만은 아니다. 산별연맹들 사이에서도 많이 발생하는데, 특히 일부 산별연맹들은 규모있고 안정된 사업장 확보에 집착하면서 상대적으로 중소영세 투쟁사업장에 소홀하다는 비판도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노조운동의 기본을 다시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조합원의 자주성이 기본이라는 점과, 계급적 단결이 우선이라면 어느 노조에 속하든 무슨 문제냐는 것. 즉 계급적 입장에 따라 연대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점.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사심없는 '연대'가 보증되어야한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조직경쟁이 발생하는 것은 자조직이 아니면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자조직의 세를 불리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되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모적인 조직경쟁을 계급적 입장에 따라 지양하는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계급적 연대를 복원하는 것이 병행되어야한다. 조직경쟁도 문제지만 그것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인 측면이 더 강하다.
 

** 이 글의 후속으로 지역공공서비스노조 토론 등에서의 시사점 올릴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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