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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유재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말>지에 실린 몇개의 글을 통해서였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 그것을 신화가 아닌 현실로 바라보게 해 준 글들이었다. 여전히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어쩌면 알튀세르가 소련에 대해서 했던 것처럼, 그것은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좌익적 비판이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대해서 몇개의 글을 쓴 소설가 방현석은, 죄송하지만 여기에 결정적으로 미달한다.)
유재현은 그런 방식으로 쿠바를 보고, 보여준다. 많은 사진과 알맞은 분량의 많지 않은 글을 담은 이 책은 우리의 이상인 사회주의와, 쿠바를 사고하게 한다.
이미 알려져있다시피 쿠바는 구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소련과 이루어지던 교역의 중단, 미국의 야만적인 경제봉쇄로 크게 고통받는 과정에서 사회 자체를 재조직했다. '지속가능한' 생태-사회주의 사회로 말이다. (이러한 사회의 재구성과 관련해서는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예전에 쓴 이 책에 대한 독서일기.)
유재현은 묻는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지속가능한 사회'를 일굴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태 위기를 '관리'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확대할 수 있다는 관념, 오히려 생태위기의 '관리'를 새로운 이윤 창출의 영역으로 만들어내는 전략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 자체를 의심할 수 있어야한다. 쿠바가 보여주는 것은(물론 모순들로 가득찬 속에서 털털거리면 전진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후퇴하더라도' 사회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낸 경험이다. (따라서 우리가 쿠바를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소박하고 느린 삶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주로 도시농업을 중심으로 했다면, 유재현의 이 책은 그것과 함께 얽힌 쿠바 사회 전반을 보여준다. 도시농업이든 생태-사회주의이든 사회 전체의 역사와 현실, 하나하나의 사람살이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흥미로운 책이다.
유재현의 눈은 또 다른 사회주의의 로망으로만 쿠바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속에는 모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경제를 유지하는 것은 생태-사회주의적인 농업생산만이 아니라 미국의 관광객들이고, 그들이 사용한 달러('컨버터블 페소'로 환전되어 국영 달러상점에서 사용되는)이다. 이들의 달러를 쿠바 국영 창고에서 훔친 물건으로 구한 쿠바 사람들은 국영 달러상점에서 자본주의 상품을 찾는다. 이중경제와 암시장은 쿠바 사회주의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쿠바가 만난 정세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쿠바는 그 속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다만 최근에는 볼리바르-베네수엘라와 맺은 무역협정을 통해 석유와 의료인력을 교환하고 있고 FTAA(미주자유무역지대, 스페인어로는 ALCA라는군)에 대항해 ALBA(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을 주창하고 있으니 희망을 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쿠바의 어린이들은 15살이 될 때까지 생일 때마다 생일케이크를 배급받는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만들어달라는 모양으로 빵집에서 구운 케이크. 하지만 누구도 굳이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의 생일을 알지 않는다. 밭을 갈던 늙은 농부와 아낙은 저녁 도시의 음악 회관 앞에서 열린 춤판에 나타나 멋진 살사춤을 춘다. 시골 마을에 눈망울 맑은 총각이 꽃을 파는 꽃집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현명한 당신 알아두세요,
홀수 날에는 사랑을,
짝수 날에는 우정을."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좀 더 잘살게 되겠지만 소비사회로 가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한다."
부디! 그래서 나도 유재현처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들의 세계를 지켜주세요."
사진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쿠바의 한 벽화.
교살된 모든 혁명에게,
박물관에 모셔진 모든 혁명들에게,
혁명이란 영구한 것임을
적의 이름으로, 발전의 이름으로,
탐욕의 이름으로 부정해버린 자들에게 주는
가장 소박한 진리 한점,
'모든 거리에 혁명을! En Cada Barrio Revolucion! '
덧붙여 ;
한편, 쿠바의 농업은 90년대 경제위기 이후 대단위 국영농장을 협동조합농장을 중심으로 재편한다. 국영대농장의 상당수는 기초단위생산자조합UBPC으로 전환되었다. 국유지를 무상으로 임대받은 이들 조합은 자율적으로 생산하고, 국영기업의 수매분 외에는 농민시장을 통해서 처분하기도 한다. 중국의 인민공사와 유사한 형태일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진행중인 실험이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예상한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를 앞당기는 것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유재현은 이후에 쿠바에 더 다녀오고, 최근에 한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다.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
유재현 (지은이) | 강 | 2006년 11월
주문만해놓고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쿠바의 희망과 모순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이 신자유주의가 아닌 대안세계의 희망과 모순, 무엇보다 우리들의 그것일테니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우울한 감정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감정의 반응을 무뎌지게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죄의식을 약화시키고, 자기연민을 (어떤 경우에도) 방지하고, 타인동정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념의 동요를 방지하라는 것.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안타깝게도(게다가 나에겐 책값이 아까운 일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충고하는 대로 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다소 윤리적인 이유고, 또 하나는 현실의 효과 측면에서 문제다.
과연 타인에 대한 동감-이에 따른 깊은 자기연민이 없이 살수 있는가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규제하는 죄의식없이 살아가도 되는가라는 점. 이건 특히 사회운동의 활동가의 입장에서 난감한 일이다. 활동가 주체에게 있어서 운동의 정서적인 동력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항상적인 규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만으로 운동하는 활동가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정념을 가진 존재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이런 자세가 우울증의 요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본 클로저 (Closer, 2004)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망적일 것을 알고 행복해지지 않으려 하고 더이상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 하지"
위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사고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신경증을 유발하는 요인이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가는 모르겠고 사실 운동권 얘기는 핑계인지도 모르겠지만 -.-+, 그러나 많은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가진 정신적 고통은 이런 사정과 어느정도는 관련이 있을 것이다. ) 따라서 저자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정념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활동가들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권할 수 있는 처방은 아니라는 데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정념의 교통이 필수적일 텐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동정과 죄의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죄의식의 경우에는 (소문자) 주체를 규제하는 (대문자) 주체의 효과일 텐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없이는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저자는 우울증 환자들이 '과도한' 그런 정념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지만, 이건 마치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위 자체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치료 자체가 개인의 정념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에 근본적인-영구적인 상실을 불러오게 된다.)
자, 여기까지는 윤리적인 이유. 그 다음은 현실의 효과의 문제. (이 밑 부분은, 내가 정신분석, 정신의학에는 무지하다는 이유때문에 엄밀하게 이론적으로는 부정확한 지적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정념을 교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죄의식과 자기연민, 타인동정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윤리적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실효성이 의심될 수밖에. (수많은 임상 성공사례를 제시한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저자 뿐 아니라 정신의학 일반이 가지는 문제이다. 정신의학(특히 아메리카식 심리학)은 정신적 문제에 대해 증세를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현실의 문제, 모순 때문에 정신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신의학은 이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현실의 대상은 주체에게는 상징이나 가상으로 인식되는만큼 이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현실의 문제와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 물질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상 정신의학이 해답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어느 정도는 내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좋은 정신분석가나 정신과의사를 만나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의학 치료를 통해서 문제를 인식하는데까지는 이를 수 있을 지라도 그것이 문제의 해결로 곧바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
이것은 마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가 불가능한 이유와도 연관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대상은 마르크스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이 말은 정신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과학과 현실의 물질적 모순(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면 '역사의 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마르크스의 과학이 대상이 다르다는 것, 따라서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지적했듯히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시도로서 라이히의 작업(<파시즘의 대중심리>)은 '정당하지만 불가능한' 작업이 된다.
게다가 난감한 일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정신적) 문제의 원인을 인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인을 단지 '인식'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하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변혁하지 않고서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대상과 마르크스의 대상이 다른만큼, 조만간 다른 대상에 대한 과학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그 '과학'은 단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을 임무로하는 인식-실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점에서 동형적이다.) 마르크스의 노선대로,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자, 하지만 그렇다면 정신의학적인 실천은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적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물질적 현실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닌 이상 독자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심리치료'의 대증요법이 아닌, 혹은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하는 치료요법같이 정서적 기능을 손상시키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어야할 것이다.
알튀세르같은 경우도 정신분석에 정통했는데도 불구하고정신의학적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의 수준에서 정신분석을 통해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고, 현실의 문제가 투명한 반영으로 정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가상으로 정신에 존재하게 된다면 정신의학적 치유는 불가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도 믿을만한 정신의학치료자/기관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방식들이 필요하고 또 가능할까?
나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념이 발생하는 방식을 인식함으로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는 것, 또 하나는 개인이 슬픈 정념에 직면했을 때(우울증) 어떤 자세를 가져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전자는 스피노자를 통해서 가능할 것같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희망과 공포와 같은 양가적 정념 때문에 정신적 동요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정념이 주체의 어떤 상태와 관련되고 어떻게 발생-작동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있어서 스피노자가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다. ("자기존재를 파괴하려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런 양가적 정념 또는 정신적 동요"이다. -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윤소영) 이 때문에,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알튀세르의 현재성』, 발리바르)부터『스피노자와 정치』,발리바르/진태원 까지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저작의 원래의 용도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후자는? 이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으로서 비극에 대해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비극적 예술형식인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주체가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는지-혹은 가져야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와 같은 탁월한 그리스 비극을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책을 발견했는데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한길사) 라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하기 위한 글을 쓰겠지만, 그리스 비극이 위대한 이유를 통해서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을 던져준다.
(이러한 접근들은 여러가능한 방식들 중 한 두가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나의 수준에서는 사고할 수 있는 범위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
이러한 접근들을 통해서,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라는 책의 저자가 제시한 방법대로는 아닐 지라도, 자기치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조금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건 혹시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에 남은 한가지,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민주노총의 대시민 유인물인데, 제목이 보는 것처럼 '살려주세요'
물론 어린이가 파도 앞에서 하는 말인거 같기는 한데.. 내가 보기에는 민주노총이 시민들에게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민주노총 슈퍼맨'에게 어린이가 외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만도 한데 말이지. 왠지.)
뭐 선전물 카피 하나가지고 또 트집잡는다 하겠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다. 카피보다도, 이것이 현재 민주노총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것같다는 느낌이 확 다가왔다. 총파업 조직화도, 대정부 교섭도 안되고 되는 것이 없는 마당이니 '살려주세요' 할만 한 건가.
그리고, 아..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긍지와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 싶다. 이제는 투쟁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하지 못하고 '살려주세요'라니.
보고 있는 내가 다 비참해진다.
지난 주 서울 강남구에 똥푸는 노동자들, 정화환경노조 한성지부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연대집회를 하는 중에 벌어진 일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3때 읽은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중 하나가 박완서의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다. 고3때는 내 삶을 바꾸는 여러가지 일들과 결정이 있었는데(사실 누구나 그런가? 하지만 대부분은 쓰잘데 없는 결정이었을걸.), 그 중에 책이 원인이 된 여러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것같다.
고3 올라기기 직전인 1월 혹은 2월 경이었나? 보충수업이 끝나고 "자율"(푸하~)학습을 하고 있을 때였다. 1000명은 들어가는 거대한 도서관 2층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도서관을 그딴 식으로 지은 건 순전히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박완서의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를 읽고 있었다. 누군가 막대기 같은 것으로 머리를 쳤다. "따라와!"
책과 함께 끌려간 나는 "자율"학습 시간에 "공부"와 상관없는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책을 압수당하고 반성문을 써야했다.(한참후에야 돌려받기는 했다.) 여기까지도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지만, 나를 끌고간 선생은 "국어" 과목 교사였는 데다가 그 책은 내가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받은 책이었다. 수업시간에 술을 덜 깨서 들어오곤 했던 그 선생은 고3때 우리반 담임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수십명이 맨앞줄에서부터 맨뒷줄까지 연결되는 '드래곤볼'만화책 돌려보기 줄에 속해있었다. 그리고 자칭 "명문고" 입시교육이 하는 광대짓이 그야말로 "웃겨졌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박완서 지음
◁ 바로 이 책이다.
박완서는 책에서 말한다. 왜 나는 콩나물 50원 어치의 분량에 대해서 구멍가게 주인과 싸우고 분개하지만, 수천명을 죽인 독재자에 대해서, 수십억을 횡령한 기업인에 대해서 분개하지 않는가라고. 박완서의 반성에 나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전의 일을 겪으면서, 정작 작은 일에 분노하지 않으면 '큰 일'에 분노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떠올리게 되었다. 그 '작은 일'이 지난 목요일 한성지부 집회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한성지부 조합원은 11명. 사측은 1조1항, 전문부터 하나도 합의를 하지 않고 버티다가 조정기간이 끝나자 정식으로 파업도 들어가기 전에 공격적인 직장폐쇄를 해버렸다. 그게 현행법상 불법이거나 아니거나 아랑곳없다.(벌금 몇푼이나 나오거나 말거나지.) 똥푸는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지만 사장은 현대아이파크, 30억짜리 타워팰리스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그 밑에는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이 산다. 대~한민국의 축소판, 그게 강남이었다. 그들이 연대하는 투쟁, 이렇게 40여일이 지난 날 연대집회. 집회는 청담동 사무실 앞에서 열렸다.
강남, 가진 놈들이 더 한다고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연대대오는 주로 포이동 주민들, 200일 다되어 가도록 사측의 온갖 해괴망칙한 탄압에도 파업을 사수하는 건설엔지니어링노조 만영지부 동지들, 강남구에서 생활쓰레기를 치우는 서울지역환경관리노조 강남지부 동지들이었다. 이들에 대해서 건물 1층에 입주한 부동산 주인이 시끄러워 장사가 안 된다며 마구 쌍욕을 퍼붓더니만 급기야 대야에 물을 채워서 퍼부으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급히 연맹 간부 동지가 온몸으로 막은 바람에 쌀쌀한 가을날씨에 그 여성동지는 그만 온몸이 흠뻑젖어 버렸다. 광분한 부동산 주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막으려는 포이동 주민을 대야로 때려 이마가 찢어지기 까지 했다. 옆가게 '파리바케트' 여주인은 나와서 혼절할 정도로 조합원들에게 욕설을 해댔다. 집회 사회를 보다가 생각이 들었다. 저것들이 돈에 영혼을 팔았구나.저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갖지 않았구나.
그 곳, 집회를 하며 연대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강남 땅에 한때는 강제로 유폐되었다가 이제는 바로 그들 가진자들의 국가권력, 지방자치단체(지방'자치'단체라니 웃기는 짓거리다)에 의해서 ㅤㅉㅗㅈ겨날 위기에 있는 포이동 주민들, 그들이 싸고 버린 것들을 치우는 정화조 노동자, 환경미화원들이었다. 나는 정말, 분개했다.
아마 작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똥푸는 노동자가 감히 인간답게 살겠다고 사장에게 대들다가 일자리에서 ㅤㅉㅗㅈ겨나서 수십일 동안 집회를 하는 것이. 쓰레기 치우는 노동자가, 감히 강남땅에서 빈민촌 가건물에 사는 포이동 주민들이 연대집회라고 와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얻어맞는 것이.
하지만 과연 누가 '인간'인가. 30억 아파트에 이미 몇개의 업체를 소유한 사장에게는, 근처 재건축 아파트 땅값 계산하기 바쁜 부동산 주인에게는, 부자들 먹을 유럽스타일 빵을 만드는 파리바게트 주인에게는. 작은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이런 작은 일에 광분해야하는 가을 오후가 그들에게는 더러울 수도 있겠지.
아마 한성 사장이나, 부동산 주인이나, 빵집 주인이나, 북핵실험이나 이명박, 고건, 박근혜,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를 보면서 어쩌구저쩌구 할게다. 그런 국가의 운명과 세계 정세에 큰 일들이 있는데, 무식한 노동자년놈들이 와서 빨갱이 짓거리(정말 이렇게 말하더군)하는 것을 보니 한심할 수밖에.
그럼 대체 과연 '작은 일'이란 뭐고 '큰 일'이란 무엇인가?,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무현, 이명박, 고건, 박근혜 떠드는 것이 큰 일이라면 똥푸는 노동자의 집회나 이들이 부동산 주인에게 엊어맞은 일은 어느날 오후의 작은 집회에서 일어난 일은, 그야말로 '작은 일'일지 모른다. 어쩌면 이 투쟁이 어찌되든 '국가의 운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분개한다.
그것이 비록 그들이 보기에는 영업을 귀찮게 하는 소란스러운 '작은 일'일지 몰라도, 그것은 인간답게 살겠다고 20년 직장에서, 50을 넘어 처음 사장에게 대들어본 우리 조합원들에게 그건 자신의 존재를 넘어서 자신이 하나의 존엄한 인간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빨갱이 짓거리 한다고 물벼락을 맞고 얻어맞을 지라도 돈에 영혼을 팔아먹은 자들보다는 훨씬 고귀한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운명을 바꾸는데는 어쩌면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르는 '작은 일'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일에 분개하지 않는다면 큰 일에도 분노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노예생활을 끝내고 인간임을 증명해가는 50대 정화조 노동자들의 투쟁 같은 것들이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의 권력놀음과 세계적 규모의 협박과 착취와 폭력이 아니라, 이런 투쟁에 연대하는, 삶의 터전에서 몰려날지 모르는 포이동 주민, 쓰레기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의 연대가 세상을 바꿀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작은 일에 분개하지 않는다면 자본가 계급의 착취체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큰 일에도 분노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십수년만에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작은 일에 분개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큰 일에 대한 분노는 텅 빈 것일지도 모른다는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거리에 내몰린 사람들의 '작은 일'들에 대한 분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독재자에 대한 분노도, 착취의 경제체제에 대한 분노도 허망한 것일 수밖에.
그날 그 일이 벌어졌던 집회 장소는, 고개를 돌리면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를 읽었던 바로 그 고등학교 정문이 사거리 건너 지척에 보이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질문을 하고 십수년만에 학교밖에서 답을 얻은 셈이다.
원래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구절은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첫구절이다. 김수영은 좋아하지만, 이제는 작은 일에 제대로 분개하는 법을 우리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 억센 민주화 투쟁을 지나서도 사회가 이 모양 이꼴이라는 말씀을 드려야겠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창원대학교 노동대학원 석사논문
김창우 씀
△ 사진은 전노협 해산대회, 전노협 깃발을 안은 양규헌 위원장.(노동자뉴스제작단)
우리가 발견한 것은 전노협이라는 노동자계급의 강렬한 빛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굴의 투지로 삶 전체를 부딪쳐감으로써, 자기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자유롭고자 했던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인간들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었다.
전노협 백서는 바로 역사속의 그들에게 바친다.
설사 그들이 지금은 탕아가 되고, 적이 되고 자신들이 경멸했던 산업사회의 쓰레기가 되고, 노동귀족이 되었다 할지라도 망설임없이 그들의 1980∼90년대 삶에 바친다. - 전노협 백서 중
왜 '전노협 청산'이 문제인가? 저자는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는 우리 노동운동의 빛나는 역사와 정신을 놓아버린데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민주노총이 전노협의 역사적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 청산하고 갔다"는 데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전노협이 해산되는 과정--이것은 곧 민주노총이 건설되는 과정이다--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고자한다.
이를 통해서 전노협 백서에서 비어있는 공백, 어쩌면 차마 말하지 못한 역사의 고리들을 채워넣는다. 이 공백은, 왜 '전노협 정신 계승'을 말하는 민주노총이 전노협 정신을 '청산'하였는지, 전노협이라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표상은 급작스럽게 사라졌는지 알기 위해서 찾아야할 진실들이다. 개인적으로도 돌이켜보면 95년초에 군대에 입대했던 나는 제대하고 나자 갑작스럽게 전노협이 아니라 민주노총 시대를 맞았던 것인데, 그 변화된 이미지란 당혹스러울 정도였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이러한 탐색을 진행하는 것은 사라진 고리를 찾아서 메우려는 지적 흥미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현실의 운동 전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 연대성, 변혁지향성이라는 전노협의 정신이 여전히 운동의 쟁점이고 문제라면, 그것을 청산하는 과정은 하나의 노선투쟁이고 그것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전노협과 민주노총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물을 지도 모른다. 간단한 예를 인용해보자.
..강령이나 운동노선 등의 면에서도 전노협 정신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노동해방'과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으로 표현되는 전노협 정신은 민주노총 강령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에는 '노동해방'이라는 표현이 한 구절도 없다. '노동해방' 대신 '사회개혁'이라는 말로 대체되어 있다. 운동노선도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아니라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통한 전체 국민의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내적 개혁으로서의 사회개혁투쟁노선으로 대체되었다. - 본문171쪽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를 주도하던 사람들은 이미 중간노조까지 포괄하여 규모를 키워야 힘을 가질 수 있다는면서 전노협처럼 투쟁적인 조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해왔던 것이다. 당연히 전노협 정신이란 청산대상일 수밖에.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이었다는 것도 전노협 운동의 의미가 계승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대중적으로 건설되고 공동투쟁의 성과를 받아안는 방식이 아니라 상층의 회의를 통한 일정박기 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이 과정을 보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상층의 회의를 통한 일정박기 식'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전노협 안에서도 지노협 혹은 대의원대회까지 대중적 논의는 배제되고 중앙위와 전노대 운영위원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민주노총의 시급한 건설을 주장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97년 대선대응이었다고 하니, 할말 다한 셈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전노협 자신의 대응도 매우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전노협 내에 전노협 한계론자들은 노골적으로 전노협을 부정하고 새로운 틀을 짜고자했다. 이들은 전노협 외--업종회의나 대공장연대회의--의 같은 흐름과 함께 민주노총을 주도한다. 이들이 바로 지금은 열우당에 가있는 김영대를 비롯해 이목희, 배석범 같은 자들이다. 문제는 전노협 강화론자같은 경우에도 94년 이후에는 사실상 '대세'는 끝났다고 판단하고 금속산업 재편 문제에 몰두하고 전노협을 사실상 방기하였다는 점이다. 전노협은 결국 이렇게 좌우합작으로 청산된 셈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노협과 함께 지노협도 완전히 청산되고 민주노총의 말단 행정기구 혹은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 임의기구(지구협)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대의기구에 대표조차 파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김영대가 지역본부에 대의원을 배정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하니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연대 투쟁의 의미는 완전히 주변적인 것으로 배제된다. (한편, 당시 이를 주도했던 한노사연 등 우파와 금속산업 재편에만 몰두하던 좌파/중앙파가 최근에는 지역운동의 중요성 주목한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특히 한노사연이 말하는 지역운동은 결국 사회적 합의제도를 지역적 수준으로까지 보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논문의 첫 페이지를 펴고 끝까지 놓지 못한 이유는 이런 역사 자체가 흥미로왔기 보다는, 이 역사가 현재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 페이지씩 읽어가면서 마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는 것같은 기시감.
민주노총은 조합원은 물론 간부들조차 제대로된 토론을 진행하지 않은 가운데 상층에서 정한 일정대로 추진되었다. 민주노총 준비위는 조직체계도 인선조차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선포부터 하고 출발했던 것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공공)산별노조 건설이나 공공-운수 4연맹 통합은 어떤가? 두 경우 모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출범 일정만 잡혀있는 상태이다. 그것도 상층의 주요 정파의 논의를 통해서 일정을 결정하고 대의원대회에서 추인하는 식이었다. 대의원대회에서는 이미 더 이상 토론이 불가능하도록 논의는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제기하는 대의원에 대해서 다른 대의원들이 짜증을 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은 더 문제이다. 조직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서 산별노조를 건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층의 결의를 통해 이를 하급 조직에 강제하는 방식이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존재했다. 이것은 지역에서부터 연대투쟁을 통해 지노협을 건설하고 이를 모은 전국적 연대투쟁(89년)을 통해서 전노협을 건설한 것과는 완전히 전도된 방식이다. 상층의 결의보다 현장 조합원의 참여와 결의가 중요하다고 하면 다른 경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과 같은 방식을 통해 지역으로부터 그것을 만들어보려했던 시도가 우리에게 없었던 것도 아니고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정된 활동가의 헌신만으로 가지는 한계, 그것을 하나의 운동을 확산하지 못한 우리의 한계, 보다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던 한계에 대해서는 이제야 평가할 수 있을 뿐이라니, 반성할 수밖에.)
이러한 점은 산별노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입장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쟁점이 된다. 예를 들어 '산별노조의 강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중앙 조직의 통제력과 집중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혹은 지역과 현장의 활성화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운동의 강화를 의미하는가? 이러한 쟁점은 산별노조를 어떠한 경로로 건설할 것인가, 산별노조의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 것인가라는 쟁점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지금 현실에서 이러한 쟁점이 논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조차 상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미 건설의 첫단추가 잘 못 꿰어졌다는 점에서 현장과 지역의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강화할 수 있는 어떠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점점 더 비관적이다. 다만 얼마나 그 '여지-틈'을 확보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할 수 있을 뿐인 것같다.)
물론 전노협의 청산-- 그리고 민주노총의 건설을 다루는 이 논문이 현재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답해줄 수있는 것은 아니다. 10년 동안 민주노총 조직이 운영되는 과정에서 이제 우리는 자기파괴적인 내부 투쟁과 이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막힌-절망적인 무관심에까지 직면하고 있다. 점점 더 회의적으로 되어 가는 2006년 하반기 총파업은 사회적 대화(합의)노선이나 총파업 노선이나 모두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그렇다면 민주노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전노협이 스스로 역사로 증명한 투쟁과 청산의 교훈을 다시 생각해야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과제를 다시 생각해야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조건을 아직 사고할 수 없었던 당시의 운동조건을 넘어서야하는 과제까지.
그러나 그 당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당연히 일의 첫순서라고 할만하다. 현재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어떤 답도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가장 빛나던 상징이자 조직인 전노협의 역사를 배제-청산한 가운데에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역사 속에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논문'이라는 형태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뛰고 코끗이 찡해지고 눈물을 글썽일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괴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을 읽으면서 과연, 그것이 빛나게 푸르른 현실-역사의 대상을 다루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푸르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논문의 마지막 절, 전노협 해산 대의원대회 설명을 마무리하는 이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새 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갈라진 조국의 역사 외세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전국의 노동자 뭉쳤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주인 될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핑퐁
박민규 지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깔깔 웃으면서 읽은 기억이 있다. 박민규의 이번 책은 읽는 내내 깔깔 웃게 만드는 책은 아니지만 좀 더 대담하고, 황당무개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더 짜임새있게 느껴진다.
왕따에 얻어맞고 다니는 중학생 두 주인공인 모아이와 못(이건 둘다 '별명'이지만, 사실 '본명'이라는 것이 더 의미없는 상황에서 그런 구별은 이상하다)이 던지는 질문들은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있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럼 점에서 박민규는 대담하다.
둘이 던지는 질문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당신은 폭력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서,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은 없는지, 왕따가 될까봐 남을 '선제공격'한 적은 없는지, 그러면서도 그 남들이 무서워진 적은 없는지, 그리고(혹은 게다가) 그런 고통을 박민규처럼 '가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확실히 박민규는 모든 문제의 가상적 해결방법을 찾아내고 소설에서 현실화시킨다.(어차피 소설이 가상인 바에야 자기 소설에 뭘 하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세계를 그냥 간단하게 <언인스톨>시키는 것이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보면서 엔딩이 참 황당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문제를 전개시켜나가다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감독은 두 명의 주인공을 절벽 위로 날려버린다. 이번 경우에는 두 명의 주인공 대신 세계를 날려버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더 대담하긴 하지.
(나중에 찾아본 신문의 한 작품평에서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한겨레]'인류운명'걸고 탁구 한판?)
그렇지만 소설 전체에는 상상력이 넘친다. 그런 점에서 박민규가 만들어낸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더 흥미롭다. 소설 중간 중간에 삽입한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작품들은 60~70년대 미국의 SF 작가의 단편을 닮았다. 세상이 주인공을 <깜빡>한다는 <여기, 저기, 그리고 거기>라는 이야기는 마치 필립.k.딕의 단편 <작은 도시>을 연상하게 한다. 하긴 존 메이슨이라는 이름도 리처드 매드슨을 또 올리게 하지 않는가. (리처드 매드슨은 좀비 영화들의 원형이라고 할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작품을 써낸 작가.)
여튼, 결론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 메이슨을 통해 들려주는 세상이 우리는 <깜빡>한다는 아이디어가 더 맘에 들기는 하지만, 과로사로 마감하는 핑퐁 게임 끝에 세상을 <언인스톨>한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는 않다. 이따위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면 깨끗하게 <언인스톨>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솔직히 안해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어려운 사람들이 '전쟁이라도 나서 뒤집어 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단 훨씬 인도적이잖아?)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이런 해결방법이 현실의 문제의 상징적 해결책에도 다가가지 못하는 가상적 해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 <인스톨>.
철폐연대 기관지 '질라라비' 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작년 공공연맹 안에서 비정규직 조직화/투쟁 과정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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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을 돌아보며]
공공부문에서도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
요즘 2005년 공공연맹 사업평가를 진행하는 중이다. 평가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치열하게 진행된 투쟁의 상당수가 중소영세, 비정규직 사업장의 투쟁이었다는 점이다. 굳이 2005년에 전면화된 것은 아니겠지만, 일부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정규직 노동조합의 투쟁이 지속적으로 침체되고 있으며, 중소영세, 비정규직 사업장의 투쟁은 장기화되는 경향이 더 뚜렷해졌다. 이런 점은 공공서비스의 사유화 공세가 대규모 공기업 자체의 전면적인 사유화보다는 이른바 ‘핵심-비핵심 업무의 분할’, ‘비핵심 업무’에 대한 위임위탁 활성화 등을 통해서 진행되는 정세와도 관련되어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맞선 공공부문 대규모 사업장의 투쟁이 다소 다른 전선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전선은 훨씬 분산되어 있고, 정부와 자본이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용이한 곳에 설치되어 있다.
햇수로 3년째를 맞는 경마진흥노조의 투쟁부터, 해고투쟁 1년이 다가오는 대경공공서비스노조 칠곡환경지회 투쟁, 200여일을 넘기면서 이제 마무리된 시설노조 코펙지부 투쟁 등 장기투쟁 사업장들이 많다. 현대기림지회, 경찰고용직공무원노조, 경기도노조 안양지부, 서울시설환경노조 성북태한지부, 학교비정규직노조, 건설엔지니어링노조 건축사협회지부, 세종문화회관지부 등 예술노조의 각 사업장 투쟁, 새마을호/KTX 승무원 투쟁도 장기간 진행되었거나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밖에도 상애원, 정립회관 등 사회복지기관의 투쟁은 전면적인 파업이 지속되지는 않더라도 일상적인 탄압과 투쟁이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지난 연말 64일간의 파업을 끝내고 다음 투쟁을 기약하면서 현장에 복귀한 산업인력공단비정규직노조는 상대적으로 많은 성과를 남긴 셈이다.
투쟁의 이러한 장기화에는 공공서비스 업무의 민간위탁 등을 통한 간접고용화와 이 과정에서 공공서비스 업무를 중소영세 민간자본이 수탁하는 사정이 연관되어 있다. 공공부문의 중소영세 사업장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민간위탁 사업장으로 간접고용인 상황이다보니 중소영세=비정규직 사업장이 되고 장기투쟁으로 연결된다. 고용형태가 형식적으로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의 문제보다도 민간위탁, 외주화의 확산을 통해 다각적인 방식의 노동의 불안정화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2005년을 돌아보면 이런 장기간, 전투적으로 진행된 투쟁들은 공동의 의제를 제기하거나 연대투쟁 전선을 형성하는 데는 거의 나가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투쟁들이 한 개의 산별연맹 소속이고, 상당부분 공동의 쟁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지역적으로도 가까운 경우가 있지만 개별화되는 경향이 있다. 공공연맹 수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서도 실태조사, 정책과제 제기 등 추상적인 수준의 사업과 구체적인 사업장 투쟁 지원이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했다. 사업장의 분산성이 제조업보다 심하고 연대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점, 연맹차원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대정부요구를 구호, 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인 연대투쟁으로 조직하고 있지 못한 등의 한계가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투쟁사업장 간의 연대는 물론,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투쟁에 책임있게 연대하거나 조직하는 활동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서울지방본부를 중심으로 한 철도노조 동지의 활발한 활동과 정보통신노조의 시도 정도를 제외하면 비정규직 조직화, 투쟁에 정규직 노조가 자기 문제로 결합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전력기술(KOPEC), 인천지하철에서는 시설관리노동자들이 시설노조에, 대구지하철에서는 정비용역노동자들이 대경공공서비스노조에 가입하는 등, 연맹 내에서조차 비정규직 산별노조가 조직화를 대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동차산업 대공장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정규직-비정규직 분할과도 유사한 상황이지만, 논쟁보다는 오히려 무관심이 특징적이다.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풀어가려는 운동적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 논의에 있어서도 비정규직 조직 문제가 제대로 제기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금속산업 부문보다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논의가 훨씬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정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고민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 조직화와 계급적 연대를 위한 산별노조 건설의 원칙은 추상적으로만 확인될 뿐이고, 구체적인 쟁점에 들어가면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자기 (정규직) 노조의 당면한 이해를 우선하는 입장이 더 자주 드러난다. 정규직 노조들이 가지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비정규직 노조들끼리 독자적인 조직전망을 논의하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한다. 특히 근래 가장 급속하게 신규조직화된 지자체 직간접 고용 비정규직의 경우 독자적인 전국적 규모의 산별노조로 결집하려는 시도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공공연맹은 정규직 조직까지 함께 하는 산별노조, 더 열악한 하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산별노조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고는 있지만, 현재와 같은 논쟁 지형에서 ‘같이 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는 제안의 설득력은 점점 더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지역공공서비스노조의 건설을 중심으로, 아직 많은 한계가 있지만 지역차원의 비정규직 연대의 수준을 좀 더 높여낸 것이 성과라면 가장 큰 성과다. 3개 지역에서 지역공공서비스노조를 건설하고 지역차원의 산별적인 조직화를 시작하고 있다. 공공연맹의 입장에서 보자면 새롭고 귀중한 경험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민주노총의 50억 기금 사업의 지체에 따라 후속 지원이 중단된 상황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 조직화에 대한 지속적이고 책임있는 지원이 없이는 곧장 조직적 침체, 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여기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비정규직 조직화는 1회성 사업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차고 넘치는 추상적인 논의 속에서 정작 구체적인 연대를 실현하고 전선을 모아내기 위한 노력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공부문 노조운동의 얕은 활동가층의 문제부터, 활동가들 사이에 논쟁이 부족한 것이 또한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다. 건강한 정규직 활동가들도 비정규직 활동가들과 논쟁할 수 있는 기회도 접점도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좀 더 많은 논쟁이, 활동가들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논란이 발생하고 더 시끄럽게 쟁점에 대해서 토론하는 과정 없이는 개별 사업장의 고립된 투쟁, 정규직 노조의 무관심, 겉도는 연맹사업과 같은 상황이 2006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떤 종류의 교훈이라기보다는 고민의 항목들이 더 늘어간 2005년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난점, 한계들에 직면했을 뿐아니라 그것을 만든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들이 난점과 한계로만 기억되지 않고 건강한 공동의 논쟁으로 활성화될 때, 운동이 한걸음 더 진전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어쩌면 공공부문에서는 아직, 우리가 마주친 난점들이 기억되지 않고, 고민들이 제대로 논쟁되지 않는 것이 우리 한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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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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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mber.jinbo.net/%7Erudnf/red/board.php3?table=reading&query=view&l=73&go=34&p=3 이 글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인천이면 가까운 곳에 계시네요. 저는 부천에 삽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