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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느린 희망


느린 희망 -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해 인간의 걸음으로 천.천.히
유재현 지음 / 그린비

 

 

소설가 유재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말>지에 실린 몇개의 글을 통해서였다.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해서, 그것을 신화가 아닌 현실로 바라보게 해 준 글들이었다. 여전히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어쩌면 알튀세르가 소련에 대해서 했던 것처럼, 그것은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좌익적 비판이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로 베트남에 대해서 몇개의 글을 쓴 소설가 방현석은, 죄송하지만 여기에 결정적으로 미달한다.) 

 

유재현은 그런 방식으로 쿠바를 보고, 보여준다. 많은 사진과 알맞은 분량의 많지 않은 글을 담은 이 책은 우리의 이상인 사회주의와, 쿠바를 사고하게 한다.

 

이미 알려져있다시피 쿠바는 구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소련과 이루어지던 교역의 중단, 미국의 야만적인 경제봉쇄로 크게 고통받는 과정에서 사회 자체를 재조직했다. '지속가능한' 생태-사회주의 사회로 말이다. (이러한 사회의 재구성과 관련해서는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예전에 쓴 이 책에 대한 독서일기.)

 

유재현은 묻는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포기하지 않고서야 '지속가능한 사회'를 일굴 수 있는 어떤 방법이 있단 말인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태 위기를 '관리'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확대할 수 있다는 관념, 오히려 생태위기의 '관리'를 새로운 이윤 창출의 영역으로 만들어내는 전략과 연관되어 있다면 그 자체를 의심할 수 있어야한다. 쿠바가 보여주는 것은(물론 모순들로 가득찬 속에서 털털거리면 전진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후퇴하더라도' 사회를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낸 경험이다.  (따라서 우리가 쿠바를 하나의 대안으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소박하고 느린 삶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이 주로 도시농업을 중심으로 했다면, 유재현의 이 책은 그것과 함께 얽힌 쿠바 사회 전반을 보여준다. 도시농업이든 생태-사회주의이든 사회 전체의 역사와 현실, 하나하나의 사람살이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흥미로운 책이다.

 

유재현의 눈은 또 다른 사회주의의 로망으로만 쿠바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 속에는 모순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바 경제를 유지하는 것은 생태-사회주의적인 농업생산만이 아니라 미국의 관광객들이고, 그들이 사용한 달러('컨버터블 페소'로 환전되어 국영 달러상점에서 사용되는)이다. 이들의 달러를 쿠바 국영 창고에서 훔친 물건으로 구한 쿠바 사람들은 국영 달러상점에서 자본주의 상품을 찾는다. 이중경제와 암시장은 쿠바 사회주의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쿠바가 만난 정세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쿠바는 그 속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다만 최근에는 볼리바르-베네수엘라와 맺은 무역협정을 통해 석유와 의료인력을 교환하고 있고 FTAA(미주자유무역지대, 스페인어로는 ALCA라는군)에 대항해 ALBA(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대안)을 주창하고 있으니 희망을 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쿠바의 어린이들은 15살이 될 때까지 생일 때마다 생일케이크를 배급받는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만들어달라는 모양으로 빵집에서 구운 케이크. 하지만 누구도 굳이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의 생일을 알지 않는다. 밭을 갈던 늙은 농부와 아낙은 저녁 도시의 음악 회관 앞에서 열린 춤판에 나타나 멋진 살사춤을 춘다. 시골 마을에 눈망울 맑은 총각이 꽃을 파는 꽃집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현명한 당신 알아두세요,

         홀수 날에는 사랑을,

         짝수 날에는 우정을."

 

피델 카스트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좀 더 잘살게 되겠지만 소비사회로 가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한다."

부디! 그래서 나도 유재현처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부디 당신들의 세계를 지켜주세요."

 

사진은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 쿠바의 한 벽화.

 

교살된 모든 혁명에게,

박물관에 모셔진 모든 혁명들에게,

 

혁명이란 영구한 것임을

적의 이름으로, 발전의 이름으로,

탐욕의 이름으로 부정해버린 자들에게 주는

가장 소박한 진리 한점,

 

'모든 거리에 혁명을! En Cada Barrio Revolucion! '

 

 


 

덧붙여 ;

한편, 쿠바의 농업은 90년대 경제위기 이후 대단위 국영농장을 협동조합농장을 중심으로 재편한다. 국영대농장의 상당수는 기초단위생산자조합UBPC으로 전환되었다. 국유지를 무상으로 임대받은 이들 조합은 자율적으로 생산하고, 국영기업의 수매분 외에는 농민시장을 통해서 처분하기도 한다. 중국의 인민공사와 유사한 형태일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진행중인 실험이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예상한 '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를 앞당기는 것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유재현은 이후에 쿠바에 더 다녀오고, 최근에 한권의 책이 더 출간되었다.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
유재현 (지은이) | | 2006년 11월

 

주문만해놓고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쿠바의 희망과 모순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이 신자유주의가 아닌 대안세계의 희망과 모순, 무엇보다 우리들의 그것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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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
폴 호크 지음, 김희수.박경애 옮김 / 사람과사람
 
 
제목 그대로 우울증을 스스로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글쓴이는 '인지-정서-행동-치료요법(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REBT;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명한 이론인 듯)'이라는 정신의학의 한 이론을 토대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제시하고자한다. 갖가지 사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길게 설명하기는 그렇지만,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다. 우울증에는 세가지 요인이 있는데, (1) 자기비난 (2) 자기연민 (3)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세가지에 대해서 각각의 대책이 수립되어야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전반적으로 '뻔뻔스러워지라'고 주문하는 것같다. 내용을 보자면 이렇다. 실수와 죄의식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걸로 죄의식을 가지거나 자신을 비난하지 말라는 것이다. 능력이 안되어서 실수할 수도 있는데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관대하고,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 실수할 수도 있지만 자신도 습관의 희생물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라는 것.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나의 권리라는 것이다.
 
또 자기연민은 우울증의 요인이기 때문에 주의하라고 충고한다. 사실 많은 슬픔의 원인들이 생각해보면 별 것아닐 수도 있는데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일 수도 있는만큼 신경끄라는 말씀. 특히 우울증 환자들의 경우, 자기연민을 통해서 타인들의 연민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증세가 호전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만큼 주의하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타인동정.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으로서 타인동정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타인동정은 비합리적인 신념이며, 자신의 정신건강에 해롭지 않을 정도로 '적절한 정도'만 허용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타인동정은 타인의 '정서적 협박'에 이용당하는 경로가 될 수 있는 만큼 주의해야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타인동정은 자기동정까지 불러올 수 있어서 특히 좋지 않다.
 
이 정도가 대략의 내용이다. (잘 요약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기조는 우울한 감정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서 과도한 감정의 반응을 무뎌지게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죄의식을 약화시키고, 자기연민을 (어떤 경우에도) 방지하고, 타인동정도 쓸모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념의 동요를 방지하라는 것.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안타깝게도(게다가 나에겐 책값이 아까운 일일 수도 있지만)  저자가 충고하는 대로 할 수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다소 윤리적인 이유고, 또 하나는 현실의 효과 측면에서 문제다.
 
과연 타인에 대한 동감-이에 따른 깊은 자기연민이 없이 살수 있는가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규제하는 죄의식없이 살아가도 되는가라는 점. 이건 특히 사회운동의 활동가의 입장에서 난감한 일이다. 활동가 주체에게 있어서 운동의 정서적인 동력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항상적인 규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만으로 운동하는 활동가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정념을 가진 존재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이런 자세가 우울증의 요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본 클로저 (Closer, 2004)라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망적일 것을 알고 행복해지지 않으려 하고 더이상 절망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 하지"

 

위의 이야기와 연관해서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사고구조 속에서 필연적으로 신경증을 유발하는 요인이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가는 모르겠고 사실 운동권 얘기는 핑계인지도 모르겠지만  -.-+, 그러나 많은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가진 정신적 고통은 이런 사정과 어느정도는 관련이 있을 것이다. ) 따라서 저자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정념을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활동가들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권할 수 있는 처방은 아니라는 데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정념의 교통이 필수적일 텐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동정과 죄의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죄의식의 경우에는 (소문자) 주체를 규제하는 (대문자) 주체의 효과일 텐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없이는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저자는 우울증 환자들이 '과도한' 그런 정념들을 제거하라는 것이지만, 이건 마치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서 위 자체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치료 자체가 개인의 정념이 가지는 사회적 기능에 근본적인-영구적인 상실을 불러오게 된다.)

  
자, 여기까지는 윤리적인 이유. 그 다음은 현실의 효과의 문제. (이 밑 부분은, 내가 정신분석, 정신의학에는 무지하다는 이유때문에 엄밀하게 이론적으로는 부정확한 지적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정념을 교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죄의식과 자기연민, 타인동정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윤리적일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 실효성이 의심될 수밖에. (수많은 임상 성공사례를 제시한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저자 뿐 아니라 정신의학 일반이 가지는 문제이다. 정신의학(특히 아메리카식 심리학)은 정신적 문제에 대해 증세를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일 수는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현실의 문제, 모순 때문에 정신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신의학은 이를 해결할 수 없다. 물론 현실의 대상은 주체에게는 상징이나 가상으로 인식되는만큼 이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현실의 문제와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정신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 물질적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이상 정신의학이 해답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어느 정도는 내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이다. 좋은 정신분석가나 정신과의사를 만나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의학 치료를 통해서 문제를 인식하는데까지는 이를 수 있을 지라도 그것이 문제의 해결로 곧바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

이것은 마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가 불가능한 이유와도 연관된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대상은 마르크스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하여」) 이 말은 정신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과학과 현실의 물질적 모순(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면 '역사의 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마르크스의 과학이 대상이 다르다는 것, 따라서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발리바르가 지적했듯히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시도로서 라이히의 작업(<파시즘의 대중심리>)은 '정당하지만 불가능한' 작업이 된다.
 
게다가 난감한 일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정신적) 문제의 원인을 인식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인을 단지 '인식'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하는 현실의 물질적 조건을 변혁하지 않고서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대상과 마르크스의 대상이 다른만큼, 조만간 다른 대상에 대한 과학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그 '과학'은 단지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을 임무로하는 인식-실천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그런 점에서 동형적이다.) 마르크스의 노선대로,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자, 하지만 그렇다면 정신의학적인 실천은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적 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물질적 현실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닌 이상 독자적인 해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심리치료'의 대증요법이 아닌, 혹은 이 책의 저자가 제시하는 치료요법같이 정서적 기능을 손상시키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어야할 것이다.

 

알튀세르같은 경우도 정신분석에 정통했는데도 불구하고정신의학적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현재의 수준에서 정신분석을 통해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고, 현실의 문제가 투명한 반영으로 정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과 가상으로 정신에 존재하게 된다면 정신의학적 치유는 불가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도 믿을만한 정신의학치료자/기관이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방식들이 필요하고 또 가능할까?
나는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정념이 발생하는 방식을 인식함으로서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인식하는 것, 또 하나는 개인이 슬픈 정념에 직면했을 때(우울증) 어떤 자세를 가져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전자는 스피노자를 통해서 가능할 것같다.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희망과 공포와 같은 양가적 정념 때문에 정신적 동요가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정념이 주체의 어떤 상태와 관련되고 어떻게 발생-작동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있어서 스피노자가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다. ("자기존재를 파괴하려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그런 양가적 정념 또는 정신적 동요"이다. -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윤소영) 이 때문에,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알튀세르의 현재성』, 발리바르)부터『스피노자와 정치』,발리바르/진태원 까지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저작의 원래의 용도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후자는? 이것은 슬픔을 표현하는 예술적 형식으로서 비극에 대해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비극적 예술형식인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주체가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는지-혹은 가져야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와 같은 탁월한 그리스 비극을 읽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책을 발견했는데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김상봉/한길사) 라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별도로 소개하기 위한 글을 쓰겠지만, 그리스 비극이 위대한 이유를 통해서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반성을 던져준다.
  
(이러한 접근들은 여러가능한 방식들 중 한 두가지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나의 수준에서는 사고할 수 있는 범위가 여기까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

이러한 접근들을 통해서, <우울증 스스로 극복하기>라는 책의 저자가 제시한 방법대로는 아닐 지라도, 자기치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조금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이건 혹시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에 남은 한가지, '헛된 희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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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인류의 미래사 - 21세기 파국과 인간의 전진


인류의 미래사 - 21세기 파국과 인간의 전진
W. 워런 와거 지음, 이순호 옮김 / 교양인
 
 
예전 어느 신문에 " 미리 예측해 본 한국과학 2030년"이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기사의 부제가 '우주관광 인기―무병장수 활짝'이라고 붙었다. 대부분의 미래 예측이라는 것이 이렇듯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예상하기는 하지만 예측 자체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얘기들이다. 더구나 이 예상을 발표한 기관은 정부 산하기관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 기술예측위원회. 위원장으로는 그 이름 찬란한 황우석 교주님이 얼마전까지 활동하신 곳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예측이 왜 과학과는 동떨어졌는고하니, 이런 예측에는 '사회'가 전적으로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도 사회적 필요에 따라 구성되고 그러한 사회적 필요라는 것이 사회구조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면, 결국 사회구조의 변화를 예상하지 않고서는 모든 예측은 말장난에 불과하게 된다. 사회구조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변화를 추동하는 사회적 모순을 밝혀내는 것이 관건일 텐데, 결국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 사고하지 않는 미래 예상이란 대부분 헛소리에 불과하게 되기 쉽상이다.
 
이 책, <인류의 미래사>는 사회적 변화와 과학의 발전까지 포괄하는 전반적인 미래를 예상하고자 한다. 저자는 겸손이라는 미덕을 갖고 있어서, 자신이 쓰는 것들이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상당한 공을 들여 가능한 미래상을 찾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저자가 그리는 미래는 거칠게 요약하자면 대략 이렇다.
- 2010년대, '세계무역컨소시엄'이라는 자본가들의 초국적 연합기구가 세계를 실질적으로 장악
- 2040년대, 세계무억컨소시엄과 빈곤국들의 핵전쟁으로 인류의 상당수 사망
- 2060년대 , '세계당' 주도의 '세계화'로 사회주의적인 국제정부인 '세계연방' 출범
- 2110년대, '세계연방'을 통해 세계적인 사회주의적 이상이 완숙하게 현실화
- 2130~40년대, 지역적인 수준의 공동체주의를 옹호하는 '작은당'에 의한 '세계연방' 해체
 
말하자면 자본의 세계화가 심화되면서 세계적인 자본독재가 성립되고, 이어서 자본동맹과 빈곤국들의 연합의 세계대전, 국제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완성과 보다 공산주의적(?)인 사회로의 이행과 같은 것이 시나리오다.
 


저자가 그리는 각각의 사회의 상은 흥미롭다. 사회주의의 이상이(이어 공산주의적 이상) 세계당의 '세계화'라는 식으로, 현재의 사회주의 이념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현실화된다는 예상은 가장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미래의 사회주의 이상은 과거의 것을 어떤 식으로든 계승하겠지만 전혀 다른 형태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재로 차베스는 아직 모호하지만(또한 이념에는 아직 한참 미달하는 것이지만) '신사회주의'를 슬로건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의 (발리바르_「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사회주의』 수록_에 의하면 네번째) 공산주의 이념은 첫번째 공산주의의 형태라고 할만한 중세말  프란체스코회-청빈형제회의 그것과는 상이하다. 마찬가지로 포스트마르크스적(다섯번째?) 공산주의는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발리바르는 그것을 국제주의와 페미니즘을 예상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 점에서는 저자와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 '세계당'의 이념이란 오히려 볼세비키에 가까워보이고 이것은 공산주의의 변화가 오히려 과거로 역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적 이상의 가치를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개인적 소유의 재건'이라는 공산주의 이념과 보다 친화성을 가지는 작은 생산 공동체들로 분할된다는 것도 흥미로운 예측이다.(작은당의 집권과 세계연합의 해소) 물론 작은당이 허용한다는 자치 공동체에 따른 자유로운 정체체제의 선택이라는 것은 마르크스적인 '생산자 연합'과는 상이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이것은 공산주의-코뮤니즘communism 보다는 공동체주의-코뮤날리즘communalism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상이한 역사적-이념적 맥락을 가진다.
 
하지만 저자의 탁월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몇몇 부분에는 선뜻 그 예측에 동의하지 못할 내용들이 있다.
 
우선 자본주의 세계체제 동학. 저자는 민족국가의 약화가 자본가들의 국제적 연합인 '세계무역컨소시엄'을 구성하게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발리바르와 브뤼노프의 지적대로 모든 부르조아지들은 국가 부르조아지이다. 국가는 약화되기는 커녕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선택적으로 자신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약화시킨다. 물론 주변-반주변에서 민족국가가 실패하기는 하지만 금융자본이 집중된 중심부 국가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세계무역 컨소시엄'의 지배를 예상하는 것은 섣부르다. 이러한 예상은 미국이 빈국의 대열에 합류하여 연합하고 급기여 '세계무역 컨소시엄'과 전쟁을 벌이게 될것이라고 예상하는 데 이른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계는 세계 헤게모니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 게다가 헤게모니를 넘겨준 국가가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불과 일이십년만에 빈국으로 몰락한 경우는 없다는 점(마찬가지로 더 긴 기간을 본다고 해도 각각의 민족국가가 주변에서 반주변으로, 반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한 사례도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그렇다면 미국이 비록 헤게모니를 상실한다고 하더라도 빈국연합에 포함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저자는 미국 헤게모니의 소멸 이후에 '순수한' 자본의 지배를 상정하는데, 이는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가능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상이다. 자본주의는 민족국가와 그 세계체계를 전제하지 않고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묘사하고자한 '세계무역 컨소시엄'의 지배가 미국 헤게모니 이후의 자본주의를 대신하는 또 다른 세계체계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닐 수 있겠지만.) 미국헤게모니 이후는 자본의 '순수한' 지배라기 보다는 자본주의 자체의 몰락이든 새로운 헤게모니의 구성이든 양자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세계연합을 해체하고 지역공동체로 분할하는 운동을 펼치는 운동조직은 '작은당'이라는, '당'형태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자. 왜냐하면 모든 운동조직의 이데올로기는 조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즉, '작은당'이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해소하고 분권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중앙집권화된 당형태를 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가능하려면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이념을 가지는 지역운동-사회운동들의 네트워크가 출현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 사회주의가 '세계당'이라는 형태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 등 현재의 대안세계화 운동은 중앙집권화된 당형태 보다는  '운동들의 연합'이라는 형태로 출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념은 모든 정치운동은 당형태를 취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저자의 정치관념이 20세기말 미국의 것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드러나고 저자의 미래예측이 일정한 스펙트럼 안에 갇히게 만든다. 사회주의 이후에 공산주의communism보다는 공동체주의communalism을 예상하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미국이 빈국들의 연합에 속할 수 있다는 예상에서도 드러난다. (비록 먼 미래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국가가 자본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을만큼 자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놀랍다.
 
http://member.jinbo.net/maybbs/pds/rudnf/pds/realth_15_m.jpg또한 저자는 미국 헤게모니 시대의 유산인 발전주의,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이라는관념을 전 역사에 관통하는 것으로 적용시킨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가 파멸적인 전쟁과 이후 급격한 사회-정치 체제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을 꾸준히 발전시킨다고 예상한다. 그 결과 우주 식민지를 건설하고 소행성을 개발하며,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운 인류를 탄생시키고, 인간의 정신을 이식하는 기술로,  항성간 탐사까지 나간다고 예상한다. 마치 '문명'(Cid Meier's CIVIZATION)이라는 게임에서 알파-센타우리星에 우주선을 발사하는 것으로 엔딩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결말이다. (나도 이 게임에서 여러번 우주선을 발사해본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항성간 우주선이라는 것은 미국인의 민족적 로망인 것같다. 우주공간에서 실현되는 새로운 변경frontier.)

그러나 20세기 과학기술-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에 의존하였고, 이에 적합한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기억해야한다. 사회적 필요가 달라진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양상도 달라질 것이다. (혹은 인간지성의 발전이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완전히 분권화된 지역 공동체들의 세계에서 성간탐사로켓은 왜 어렵게 자신들이 거부한 세계적인 연합형태를 구성하여 발사하는지 알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저자가 미국식 과학기술관을 미래에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미래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예측하려하지만, 그것이 과학기술에 대해 가지는 연관을 사고하지 않음으로서, 결국 대한민국 국과위 황우석 교주님 것을 연상하게 하는 예측이 전개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체 역사의 구도를 한눈에 바라보자. 그러면 이 구도가 20세기 초반 사회주의자들이 생각한 미래 역사의 반복이라는 것을 곧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최고 최후 단계로서 제국주의와 그 전쟁으로 인한 자본주의의 붕괴, 군사적 규율을 가진 국제적 당에 의한 (필요하다면 무력을 이용한) 세계혁명의 완수,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 이러한 20세기 초(혹은 후반까지도) 사회주의자들의 미래상은 이 책에서 변주되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역사는 전개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최대한 과학적으로 사고했고 부르조아보다 수천배는 탁월하게 역사의 전개방향을 인식했더라도 예측할 수 없었던 역사적 변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독일이 아닌 제3의 자본주의 대안으로서 미국 헤게모니의 등장은 전쟁 이후 자본주의의 몰락이 아니라 냉전체제를 낳았고 국제적인 사회주의 혁명은 무산되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이행하지 못했으며 끝내 자본주의 세계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몰락했다.

20세기의 역사가 예상되는 달리 진행된 상황에서 우리가 21세기를 예상할 때는 어떤 입장이 필요할까? 그것은 20세기의 실패한 예상을 그대로 21세기에 대입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미래는 20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더욱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체적인 분석에 근거한 미래상보다는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방향을 미래적 규모로 확장할 뿐인 것으로 보인다. 불확정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과학적인 입장일 것이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소립자의 위치와 궤적이 불확정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따라서 예측불가능하며 확률로만 존재한다는 것자체가 과학적 인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저자가 단지 소설가였다면 이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상상하면 되고 그것은 무한히 열려있기 때문에. 그러나 미래학자가 쓴 이 책에는 월러스틴의 추천사까지 붙어있다.)
 
그런 점에서 비록 또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곧 다가올 미국 헤게모니 이후, 장기20세기의 종결 이후에 대해서 현실에 근거한 예상이 필요하다.(문학적 상상력이라면 SF소설에 맡겨두면 될 것을!) 이 책은 탁월하게 역사적 요소들을 분석에 활용하여 먼 미래를 예상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다 단기적이라고 하더라도,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신자유주의 경제학 비판에 입각한 보다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이다. 
 

 
최근에 발간된 아래의 책은 그런 점에서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에 입각해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미래, 그리고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사회운동의 미래)에 관해서 더 유용한 사고를 개방시켜준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지은이) | 그린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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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살려주세요!

민주노총의 대시민 유인물인데, 제목이 보는 것처럼 '살려주세요'

 

 

물론 어린이가 파도 앞에서 하는 말인거 같기는 한데.. 내가 보기에는 민주노총이 시민들에게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민주노총 슈퍼맨'에게 어린이가 외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을만도 한데 말이지. 왠지.)

 

뭐 선전물 카피 하나가지고 또 트집잡는다 하겠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다. 카피보다도, 이것이 현재 민주노총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것같다는 느낌이 확 다가왔다. 총파업 조직화도, 대정부 교섭도 안되고 되는 것이 없는 마당이니 '살려주세요' 할만 한 건가.

 

그리고, 아..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긍지와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 싶다. 이제는 투쟁으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하지 못하고 '살려주세요'라니.

보고 있는 내가 다 비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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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지난 주 서울 강남구에 똥푸는 노동자들, 정화환경노조 한성지부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연대집회를 하는 중에 벌어진 일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3때 읽은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중 하나가 박완서의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다.  고3때는 내 삶을 바꾸는 여러가지 일들과 결정이 있었는데(사실 누구나 그런가? 하지만 대부분은 쓰잘데 없는 결정이었을걸.), 그 중에 책이 원인이 된 여러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것같다.

 

고3 올라기기 직전인 1월 혹은 2월 경이었나? 보충수업이 끝나고 "자율"(푸하~)학습을 하고 있을 때였다. 1000명은 들어가는 거대한 도서관 2층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도서관을 그딴 식으로 지은 건 순전히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박완서의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를 읽고 있었다. 누군가 막대기 같은 것으로 머리를 쳤다. "따라와!"

 

책과 함께 끌려간 나는 "자율"학습 시간에 "공부"와 상관없는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책을 압수당하고 반성문을 써야했다.(한참후에야 돌려받기는 했다.) 여기까지도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일이지만, 나를 끌고간 선생은 "국어" 과목 교사였는 데다가 그 책은 내가 학교 도서관에서 대출받은 책이었다. 수업시간에 술을 덜 깨서 들어오곤 했던 그 선생은 고3때 우리반 담임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수십명이 맨앞줄에서부터 맨뒷줄까지 연결되는 '드래곤볼'만화책 돌려보기 줄에 속해있었다.  그리고 자칭 "명문고" 입시교육이 하는 광대짓이 그야말로 "웃겨졌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박완서 지음

◁ 바로 이 책이다.


박완서는 책에서 말한다. 왜 나는 콩나물 50원 어치의 분량에 대해서 구멍가게 주인과 싸우고 분개하지만, 수천명을 죽인 독재자에 대해서, 수십억을 횡령한 기업인에 대해서 분개하지 않는가라고. 박완서의 반성에 나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당시는 바로 91년이었다. 노태우 군사파쇼정권이 '보통사람'어쩌구 하다가 3당 합당하던 그때말이다. 나는 내가 나의 삶 주변에서 얼마나 작은 일들에 분노하고 있는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분노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박완서와 함께 반성했다. 적어도 민중의 정당한 요구를 탄압하는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를 전제하지 않고 작은 일에 대한 분개라니! 이런 나의 결심은 대학에 진학한다면 어떤 방식이든 반드시 학생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여기까지 가는 데는 몇가지 계기가 더 필요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직 이 글에서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 며칠전의 일을 겪으면서, 정작 작은 일에 분노하지 않으면 '큰 일'에 분노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떠올리게 되었다. 그 '작은 일'이 지난 목요일 한성지부 집회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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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지부 조합원은 11명. 사측은 1조1항, 전문부터 하나도 합의를 하지 않고 버티다가 조정기간이 끝나자 정식으로 파업도 들어가기 전에 공격적인 직장폐쇄를 해버렸다. 그게 현행법상 불법이거나 아니거나 아랑곳없다.(벌금 몇푼이나 나오거나 말거나지.) 똥푸는 노동자들은 거리로 내몰렸지만 사장은 현대아이파크, 30억짜리 타워팰리스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그 밑에는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이 산다. 대~한민국의 축소판, 그게 강남이었다. 그들이 연대하는 투쟁, 이렇게 40여일이 지난 날 연대집회. 집회는 청담동 사무실 앞에서 열렸다.

 

강남, 가진 놈들이 더 한다고 정말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연대대오는 주로 포이동 주민들, 200일 다되어 가도록 사측의 온갖 해괴망칙한 탄압에도 파업을 사수하는 건설엔지니어링노조 만영지부 동지들, 강남구에서 생활쓰레기를 치우는 서울지역환경관리노조 강남지부 동지들이었다. 이들에 대해서 건물 1층에 입주한 부동산 주인이 시끄러워 장사가 안 된다며 마구 쌍욕을 퍼붓더니만 급기야 대야에 물을 채워서 퍼부으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급히 연맹 간부 동지가 온몸으로 막은 바람에 쌀쌀한 가을날씨에 그 여성동지는 그만 온몸이 흠뻑젖어 버렸다. 광분한 부동산 주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막으려는 포이동 주민을 대야로 때려 이마가 찢어지기 까지 했다. 옆가게 '파리바케트' 여주인은 나와서 혼절할 정도로 조합원들에게 욕설을 해댔다. 집회 사회를 보다가 생각이 들었다. 저것들이 돈에 영혼을 팔았구나.저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갖지 않았구나.

  

그 곳, 집회를 하며 연대하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강남 땅에 한때는 강제로 유폐되었다가 이제는 바로 그들 가진자들의 국가권력, 지방자치단체(지방'자치'단체라니 웃기는 짓거리다)에 의해서 ㅤㅉㅗㅈ겨날 위기에 있는 포이동 주민들, 그들이 싸고 버린 것들을 치우는 정화조 노동자, 환경미화원들이었다. 나는 정말, 분개했다.

 

아마 작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똥푸는 노동자가 감히 인간답게 살겠다고 사장에게 대들다가 일자리에서 ㅤㅉㅗㅈ겨나서 수십일 동안 집회를 하는 것이. 쓰레기 치우는 노동자가, 감히 강남땅에서 빈민촌 가건물에 사는 포이동 주민들이 연대집회라고 와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얻어맞는 것이.

하지만 과연 누가 '인간'인가. 30억 아파트에 이미 몇개의 업체를 소유한 사장에게는, 근처 재건축 아파트 땅값 계산하기 바쁜 부동산 주인에게는, 부자들 먹을 유럽스타일 빵을 만드는 파리바게트 주인에게는. 작은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이런 작은 일에 광분해야하는 가을 오후가 그들에게는 더러울 수도 있겠지.

 

아마 한성 사장이나, 부동산 주인이나, 빵집 주인이나, 북핵실험이나 이명박, 고건, 박근혜,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를 보면서 어쩌구저쩌구 할게다. 그런 국가의 운명과 세계 정세에 큰 일들이 있는데, 무식한 노동자년놈들이 와서 빨갱이 짓거리(정말 이렇게 말하더군)하는 것을 보니 한심할 수밖에.

 

그럼 대체 과연 '작은 일'이란 뭐고 '큰 일'이란 무엇인가?,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무현, 이명박, 고건, 박근혜 떠드는 것이 큰 일이라면 똥푸는 노동자의 집회나 이들이 부동산 주인에게 엊어맞은 일은 어느날 오후의 작은 집회에서 일어난 일은, 그야말로 '작은 일'일지 모른다. 어쩌면 이 투쟁이 어찌되든 '국가의 운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분개한다.

 

그것이 비록 그들이 보기에는 영업을 귀찮게 하는 소란스러운 '작은 일'일지 몰라도, 그것은 인간답게 살겠다고 20년 직장에서, 50을 넘어 처음 사장에게 대들어본 우리 조합원들에게 그건 자신의 존재를 넘어서 자신이 하나의 존엄한 인간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빨갱이 짓거리 한다고 물벼락을 맞고 얻어맞을 지라도 돈에 영혼을 팔아먹은 자들보다는 훨씬 고귀한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운명을 바꾸는데는 어쩌면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르는 '작은 일'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작은 일에 분개하지 않는다면 큰 일에도 분노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노예생활을 끝내고 인간임을 증명해가는 50대 정화조 노동자들의 투쟁 같은 것들이 세상을 바꾸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의 권력놀음과 세계적 규모의 협박과 착취와 폭력이 아니라, 이런 투쟁에 연대하는, 삶의 터전에서 몰려날지 모르는 포이동 주민, 쓰레기 치우는 환경미화원들의 연대가 세상을 바꿀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작은 일에 분개하지 않는다면 자본가 계급의 착취체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큰 일에도 분노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십수년만에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작은 일에 분개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큰 일에 대한 분노는 텅 빈 것일지도 모른다는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거리에 내몰린 사람들의 '작은 일'들에 대한 분노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독재자에 대한 분노도, 착취의 경제체제에 대한 분노도 허망한 것일 수밖에.

 

그날 그 일이 벌어졌던 집회 장소는, 고개를 돌리면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를 읽었던 바로 그 고등학교 정문이 사거리 건너 지척에 보이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 질문을 하고 십수년만에 학교밖에서 답을 얻은 셈이다.

  

 


  

원래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구절은 김수영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첫구절이다. 김수영은 좋아하지만, 이제는 작은 일에 제대로 분개하는 법을  우리가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 억센 민주화 투쟁을 지나서도 사회가 이 모양 이꼴이라는 말씀을 드려야겠다.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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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

창원대학교 노동대학원 석사논문

김창우 씀


 



△ 사진은 전노협 해산대회, 전노협 깃발을 안은 양규헌 위원장.(노동자뉴스제작단)

 


우리가 발견한 것은 전노협이라는 노동자계급의 강렬한 빛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굴의 투지로 삶 전체를 부딪쳐감으로써, 자기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자유롭고자 했던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인간들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었다.
전노협 백서는 바로 역사속의 그들에게 바친다.
설사 그들이 지금은 탕아가 되고, 적이 되고 자신들이 경멸했던 산업사회의 쓰레기가 되고, 노동귀족이 되었다 할지라도 망설임없이 그들의 1980∼90년대 삶에 바친다. - 전노협 백서 중

 

왜 '전노협 청산'이 문제인가? 저자는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는 우리 노동운동의 빛나는 역사와 정신을 놓아버린데 있다"고 진단한다. 그것은 "민주노총이 전노협의 역사적 성과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정, 청산하고 갔다"는 데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전노협이 해산되는 과정--이것은 곧 민주노총이 건설되는 과정이다--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고자한다.

 

이를 통해서 전노협 백서에서 비어있는 공백, 어쩌면 차마 말하지 못한 역사의 고리들을 채워넣는다. 이 공백은, 왜 '전노협 정신 계승'을 말하는 민주노총이 전노협 정신을 '청산'하였는지, 전노협이라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표상은 급작스럽게 사라졌는지 알기 위해서 찾아야할 진실들이다. 개인적으로도 돌이켜보면 95년초에 군대에 입대했던 나는 제대하고 나자 갑작스럽게 전노협이 아니라 민주노총 시대를 맞았던 것인데, 그 변화된 이미지란 당혹스러울 정도였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저자가 이러한 탐색을 진행하는 것은 사라진 고리를 찾아서 메우려는 지적 흥미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현실의 운동 전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 연대성, 변혁지향성이라는 전노협의 정신이 여전히 운동의 쟁점이고 문제라면, 그것을 청산하는 과정은 하나의 노선투쟁이고 그것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전노협과 민주노총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물을 지도 모른다. 간단한 예를 인용해보자.

 

..강령이나 운동노선 등의 면에서도 전노협 정신은 완전히 부정되었다. '노동해방'과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으로 표현되는 전노협 정신은 민주노총 강령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에는 '노동해방'이라는 표현이 한 구절도 없다. '노동해방' 대신 '사회개혁'이라는 말로 대체되어 있다. 운동노선도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 아니라 '사회의 민주적 개혁을 통한 전체 국민의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내적 개혁으로서의 사회개혁투쟁노선으로 대체되었다. - 본문171쪽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를 주도하던 사람들은 이미 중간노조까지 포괄하여 규모를 키워야 힘을 가질 수 있다는면서 전노협처럼 투쟁적인 조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해왔던 것이다. 당연히 전노협 정신이란 청산대상일 수밖에.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이었다는 것도 전노협 운동의 의미가 계승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대중적으로 건설되고 공동투쟁의 성과를 받아안는 방식이 아니라 상층의 회의를 통한 일정박기 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이 과정을 보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상층의 회의를 통한 일정박기 식'이라는 것이 어떤 방식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전노협 안에서도 지노협 혹은 대의원대회까지 대중적 논의는 배제되고 중앙위와 전노대 운영위원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민주노총의 시급한 건설을 주장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97년 대선대응이었다고 하니, 할말 다한 셈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전노협 자신의 대응도 매우 문제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특히 전노협 내에 전노협 한계론자들은 노골적으로 전노협을 부정하고 새로운 틀을 짜고자했다. 이들은 전노협 외--업종회의나 대공장연대회의--의 같은 흐름과 함께 민주노총을 주도한다. 이들이 바로 지금은 열우당에 가있는 김영대를 비롯해 이목희, 배석범 같은 자들이다. 문제는 전노협 강화론자같은 경우에도 94년 이후에는 사실상 '대세'는 끝났다고 판단하고 금속산업 재편 문제에 몰두하고 전노협을 사실상 방기하였다는 점이다. 전노협은 결국 이렇게 좌우합작으로 청산된 셈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노협과 함께 지노협도 완전히 청산되고 민주노총의 말단 행정기구 혹은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 임의기구(지구협)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대의기구에 대표조차 파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오히려 김영대가 지역본부에 대의원을 배정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고 하니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연대 투쟁의 의미는 완전히 주변적인 것으로 배제된다. (한편, 당시 이를 주도했던 한노사연 등 우파와 금속산업 재편에만 몰두하던 좌파/중앙파가 최근에는 지역운동의 중요성 주목한다고 하니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특히 한노사연이 말하는 지역운동은 결국 사회적 합의제도를 지역적 수준으로까지 보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논문의 첫 페이지를 펴고 끝까지 놓지 못한 이유는 이런 역사 자체가 흥미로왔기 보다는, 이 역사가 현재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 페이지씩 읽어가면서 마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는 것같은 기시감.

 

민주노총은 조합원은 물론 간부들조차 제대로된 토론을 진행하지 않은 가운데 상층에서 정한 일정대로 추진되었다. 민주노총 준비위는 조직체계도 인선조차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선포부터 하고 출발했던 것이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공공)산별노조 건설이나 공공-운수 4연맹 통합은 어떤가? 두 경우 모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출범 일정만 잡혀있는 상태이다. 그것도 상층의 주요 정파의 논의를 통해서 일정을 결정하고 대의원대회에서 추인하는 식이었다. 대의원대회에서는 이미 더 이상 토론이 불가능하도록 논의는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제기하는 대의원에 대해서 다른 대의원들이 짜증을 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산별노조 건설은 더 문제이다. 조직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서 산별노조를 건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층의 결의를 통해 이를 하급 조직에 강제하는 방식이 진행되고 있다. 민주노총 건설과정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존재했다. 이것은 지역에서부터 연대투쟁을 통해 지노협을 건설하고 이를 모은 전국적 연대투쟁(89년)을 통해서 전노협을 건설한 것과는 완전히 전도된 방식이다.  상층의 결의보다 현장 조합원의 참여와 결의가 중요하다고 하면 다른 경로가 필요했을 것이다. (지역공공서비스노조 운동과 같은 방식을 통해 지역으로부터 그것을 만들어보려했던 시도가 우리에게 없었던 것도 아니고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정된 활동가의 헌신만으로 가지는 한계, 그것을 하나의 운동을 확산하지 못한 우리의 한계, 보다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던 한계에 대해서는 이제야 평가할 수 있을 뿐이라니, 반성할 수밖에.)

 

이러한 점은 산별노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입장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쟁점이 된다. 예를 들어 '산별노조의 강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중앙 조직의 통제력과 집중력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혹은 지역과 현장의 활성화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운동의 강화를 의미하는가? 이러한 쟁점은 산별노조를 어떠한 경로로 건설할 것인가, 산별노조의 조직을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할 것인가라는 쟁점과 연결되어 있다. 바로 지금 현실에서 이러한 쟁점이 논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조차 상층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미 건설의 첫단추가 잘 못 꿰어졌다는 점에서 현장과 지역의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강화할 수 있는 어떠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점점 더 비관적이다. 다만 얼마나 그 '여지-틈'을 확보하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할 수 있을 뿐인 것같다.)

  

물론 전노협의 청산-- 그리고 민주노총의 건설을 다루는 이 논문이 현재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답해줄 수있는 것은 아니다. 10년 동안 민주노총 조직이 운영되는 과정에서 이제 우리는 자기파괴적인 내부 투쟁과 이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막힌-절망적인 무관심에까지 직면하고 있다. 점점 더 회의적으로 되어 가는 2006년 하반기 총파업은 사회적 대화(합의)노선이나 총파업 노선이나 모두 불가능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그렇다면 민주노총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전노협이 스스로 역사로 증명한 투쟁과 청산의 교훈을 다시 생각해야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과제를 다시 생각해야한다. 또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조건을 아직 사고할 수 없었던 당시의 운동조건을 넘어서야하는 과제까지.

 

그러나 그 당시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당연히 일의 첫순서라고 할만하다. 현재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어떤 답도 87년 이후 민주노조 운동의 가장 빛나던 상징이자 조직인 전노협의 역사를 배제-청산한 가운데에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역사 속에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다. 

 

'논문'이라는 형태의 글을 읽으면서 가슴뛰고 코끗이 찡해지고 눈물을 글썽일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괴테)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문을 읽으면서 과연, 그것이 빛나게 푸르른 현실-역사의 대상을 다루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푸르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논문의 마지막 절, 전노협 해산 대의원대회 설명을 마무리하는 이 부분에서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새 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잔악한 자본의 음모 독재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총파업 깃발이 솟았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갈라진 조국의 역사 외세가 판쳐도/ 새 역사 동트는 기상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 전국의 노동자 뭉쳤다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노동자 주인 될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한편, 전노협에 대한 연구로서 또 읽어볼만한 글은 무엇보다도 김진균 선생께서 쓰신 글입니다. 김창우씨도 다시 추천하고 있군요.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구조와 특징 - '전국노동조합협의회'라는 글이죠. 여기를 클릭하면 읽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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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핑퐁


핑퐁
박민규 지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깔깔 웃으면서 읽은 기억이 있다. 박민규의 이번 책은 읽는 내내 깔깔 웃게 만드는 책은 아니지만 좀 더 대담하고, 황당무개하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더 짜임새있게 느껴진다.

 

왕따에 얻어맞고 다니는 중학생 두 주인공인 모아이와 못(이건 둘다 '별명'이지만, 사실 '본명'이라는 것이 더 의미없는 상황에서 그런 구별은 이상하다)이 던지는 질문들은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있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럼 점에서 박민규는 대담하다.

 

둘이 던지는 질문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당신은 폭력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서, 오히려 그것을 즐긴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은 없는지, 왕따가 될까봐 남을 '선제공격'한 적은 없는지, 그러면서도 그 남들이 무서워진 적은 없는지, 그리고(혹은 게다가) 그런 고통을 박민규처럼 '가상적으로' 해결한 적은 없는지 말이다.

 

확실히 박민규는 모든 문제의 가상적 해결방법을 찾아내고 소설에서 현실화시킨다.(어차피 소설이 가상인 바에야 자기 소설에 뭘 하든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세계를 그냥 간단하게 <언인스톨>시키는 것이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를 보면서 엔딩이 참 황당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문제를 전개시켜나가다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때, 감독은 두 명의 주인공을 절벽 위로 날려버린다. 이번 경우에는 두 명의 주인공 대신 세계를 날려버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더 대담하긴 하지.

(나중에 찾아본 신문의 한 작품평에서도 비슷한 점을 지적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한겨레]'인류운명'걸고 탁구 한판?)

 

그렇지만 소설 전체에는 상상력이 넘친다. 그런 점에서 박민규가 만들어낸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더 흥미롭다. 소설 중간 중간에 삽입한 존 메이슨이라는 작가의 작품들은 60~70년대 미국의 SF 작가의 단편을 닮았다. 세상이 주인공을 <깜빡>한다는 <여기, 저기, 그리고 거기>라는 이야기는 마치 필립.k.딕의 단편 <작은 도시>을 연상하게 한다. 하긴 존 메이슨이라는 이름도 리처드 매드슨을 또 올리게 하지 않는가. (리처드 매드슨은 좀비 영화들의 원형이라고 할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작품을 써낸 작가.)

 

여튼, 결론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 메이슨을 통해 들려주는 세상이 우리는 <깜빡>한다는 아이디어가 더 맘에 들기는 하지만, 과로사로 마감하는 핑퐁 게임 끝에 세상을 <언인스톨>한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는 않다. 이따위로 돌아가는 세상이라면 깨끗하게 <언인스톨>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솔직히 안해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어려운 사람들이 '전쟁이라도 나서 뒤집어 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단 훨씬 인도적이잖아?)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이런 해결방법이 현실의 문제의 상징적 해결책에도 다가가지 못하는 가상적 해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 <인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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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인민주의, 태국의 정세

주빌리사우스 노동자총회준비회의를 다녀와서 생각하게된 몇가지(1) 에서 연결된 글


지난 번에 쓴 글에서는 주빌리사우스의 시도와 같은 것이 노동자운동이 대안세계화 운동을 의제로 사회운동과 결합할 수 있는 의미있는 조직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빌리사우스의 시도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세계사회포럼 등 다양한 연대운동에서 노동자들의 투쟁과제가 함께 논의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여러가지 활동이 같은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이번에 진행되었던 회의 중에서 세계사회포럼 동남/동아시아 다중심포럼 준비를 위한 지역 워크샵 (WSF Regional Workshop to prepare for the Southeast/East Asia WSF in Thailand October 2006) 은 사실 논의가 잘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처음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사정도 있겠지만 태국의 정치상황과 관련된 논쟁이 외삽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올해 각 지역의 다중심포럼 중 가장 늦게 준비된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국제연대운동이 가지는 취약성을 반영하기도 하겠죠.

여튼,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회의 기간 내내 진행되었던 탁신총리 하야 집회에 참석해야할 것이냐, 회의를 하고 있어야할 것이냐는 논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상황을 봐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한데, '밖에서 큰 투쟁이 전개되는 중인데 회의나 하고 있어서 되겠냐' 뭐 이런 거죠. IS 계열의 조직인 '노동자민주주의'라는 단체의 활동가들이 계속 발언하면서 이 문제를 제기하더군요. 어떤 입장이 맞는지 굳이 코멘트할 것은 없겠지만, 당일 방콕에서는 10만명이 결집한 대규모 밤샘시위가 벌어졌습니다.(지금도 대규모 시위가 연일 끊이지 않고 있고, 탁신 총리 측은 의회해산, 재선거 공고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태국 총리 퇴진 요구 시위
▲ 26일(일) 밤 10만명이 결집한 시위 장면


신자유주의와 인민주의, 탁신의 위기

태국의 정치위기는 표면적으로는 탁신총리의 가족 비리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제하는 민중생활의 위기, 그리고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민주의 정치의 취약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필리핀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나라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동아시아 반주변 국가들에서 유사한 방식의 정치위기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남미와는 또 다른 양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이 글 밑에 첨부한 글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쟁점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탁신은 물, 에너지와 같은 공공서비스의 사유화, FTA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공세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의료보험을 도입하고 빈곤층을 위한 경제지원도 병행합니다. 이를 통해서 빈곤층의 정치적 지지를 확보하는 인민주의 정치를 펼치는 것이죠. (따라서 연일 대규모 시위가 벌이지고 있지만 총선을 하게되면 사실상 탁신이 다시 승리할 것이 예상되고, 이 때문에 야당들은 총선을 보이콧하겠다는 경고를 보내는 상황)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이러한 인민주의 정치도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탁신 일가의 부패가 금융투기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금융화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모순이 폭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FTA추진 등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도 정권반대 운동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태국에서도 이러한 인민주의 정치의 위기를 반동적으로 전유하려는 세력이 존재하고 힘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탁신과 경쟁하는 미디어 재벌(사진에 나온 당일 집회에 갔을 때 연설을 하고 있더군요, 황당.)이 탁신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있고 재정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도 보면 있지만 태국 국기와 함께 사람들이 흔들고 있는 노란깃발은 왕실의 깃발입니다. 이러한 정치위기의 해결방법으로 왕실이 나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죠. 인민주의 위기에서 정권에 대해서는 함께 반대하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들이 경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너무나 유사합니다.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면서도 사회복지 정책을 일부 실행하면서 '개혁적'이라는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소외된 지역과 계층의 지지를 조직하는 것이죠. 정권의 위기가 금융투기와 연관된 비리로 인해 가속화된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 한나라당과 진보진영이라는 다른 대안이 경합하는 것도 유사한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인민주의 정치에 의해서 추진되더라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지는 모순이 해결되지 못하고 지속적인 정치위기를 낳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를 대체하는 지배계급의 대안이라는 것은 또 다른 방식의 인민주의 정치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밖에, 아래에 첨부한 글을 보면 태국의 사회운동 안에서는 정권반대투쟁에서 보수파-왕당파들과 연대해야하는가 등의 쟁점이 존재하는 것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스탈린주의적 좌파의 도구적, 혹은 실용적 정치관, 그리고 자율주의자autonomist들의 무정부주의적 정치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많은 사회운동이 이 투쟁을 전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시위 현장에는 왕당파의 노란깃발도 있었지만, FTA반대 선전물, 공공서비스 사유화 반대를 위한 플랭카드도 많이 눈에 띠었습니다. 공공부문 노조들은 탁신의 물, 에너지 등 사유화정책에 반대하면서 이 투쟁에 결합하고 있습니다. 주빌리사우스회의에서 만난 태국의 노조활동가들은 총파업을 조직하고 있다는 말도 하더군요. 사태의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 대중들에게 폭로하기 위한 활동이죠.

태국이 사례도 그렇지만 필리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행사에 오기로 했던 필리핀의 일부 활동가들은 아로요 정권의 탄압 때문에 출국하지못해서 참석을 못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회의가 진행되는 날에는 주빌리사우스 사무국을 경찰이 침탈해서 PC등을 모두 압수해갔다고도 하더군요. 필리핀의 경우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가 아로요의 인민주의 정치를 파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다른 방식의 인민주의 정치도 대안으로 가능하지 않을 때, 적나라한 폭력이 재등장한다는 것을 필리핀 사례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반주변에서 이런 상황은 라틴아메리카의 최근의 '좌경화'와는 또 다른 경향인 것같습니다.  아직 사회운동이 취약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세계체계 안에서 가지는 또 다른 지정학적 요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아시아 반주변 국가들의 최근 정세는 이런 상황을 변화시켜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더 많은 고민을 하게 해줍니다. 특히 인민주의 정치의 위기에 마주칠 때, 어떤 이데올로기와 전략이 필요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말이죠.


[앞으로 연재할 글 순서]
이번 일정을 보면서 배우고 느낀 것들(3) : 노동의 불안정화, 남한의 독특한 쟁점?
이번 일정을 보면서 배우고 느낀 것들(4) : 운동 조직에 필요한 것은 교육?




아래는 다중심포럼 준비를 주관하는 태국단체에서 메일로 보내온 글인데, 태국 내의 쟁점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Thailand:
Anger and Confusion in the Anti-government movement
Giles Ji Ungpakorn

In the past few weeks over a hundred thousand people have demonstrated in the streets of Bangkok and in other provincial cities, calling for the resignation of Prime Minister Thaksin Shinawatra. The issue which unites this opposition to the government, is a disgust against the vast wealth of the Prime Minister and the fact that this wealth fuels the system of “money politics” in Thailand. Thaksin recently sold his shares in Shin Corporation, a vast telecom company, for 70,000 million baht. He did not pay a single baht in tax. This is probably legal. But this has cause immense anger among many who rightly see “corruption” as a moral issue rather than a legal one.

The anti-government movement was initially sparked by a fall out within the business class. Sondhi Limthongkul, a media tycoon, was once a friend of Thaksin. After the fall out he found that some of his programmes were blocked by the government. He then started a conservative royalist campaign to oust Thaksin and to “return power to the King”. Sondhi’s supporters attended rallies in yellow T-shirts, waving yellow monarchist flags. Thailand has had a constitutional monarchy since the 1932 revolution and considering the events in Nepal, the demand to return power to the King is obviously extremely reactionary. Yet Sondhi was able to tap into the anger against the government among people who might not share such conservative views.

 The weakness of the Peoples Movement in Thailand has meant that many sections of the trade union movement and democracy campaigns attached themselves to this conservative royalist movement. The principle reason for this was that they have no faith in the independent strength of the Peoples Movement. As far back as a year ago, just before Thaksin’s landslide victory in the February 2005 General Election, leaders of the Peoples Movement were calling for a united front with conservative royalists. Those still under the influence of Stalinist and Maoist ideas of the now defunct Communist Party are also happy to form cross-class Popular Fronts with business leaders. In the past the Communist Party sought unsuccessfully to form alliances with military dictatorships.

The Thaksin government and the Thai Rak Thai Party enjoy significant support from the urban and rural poor. This is because it is the first government in decades which seeks to improve welfare and the incomes of the poor. The government introduced a universal health care system and other measures to stimulate the economy at grass roots level, all of which were attacked by neo-liberal academics and opposition parties. Of course, these “populist” policies were not paid for by progressive taxation of the rich. The government also pushed ahead with privatisation and neo-liberal Free-trade agreements. This government has also committed gross human rights abuses in the Muslim South and in its “war on drugs”.

Rather than calling for an anti-government movement which goes beyond Thaksin’s populism in order to create real income equality and a welfare state, the conservative section of the anti-government movement sees ordinary people who support Thaksin as ignorant, stupid and easily bought by the government. Thaksin has thrown down the gauntlet by dissolving parliament and calling a snap election in early April. He calls this “returning power to the people” in marked contrast to the royalists. The opposition parties have announced a boycott of the election because they know they will lose. Thaksin has responded to this by saying that if more than 50% of those who vote, register an abstention (which is possible on Thai ballot papers), he will step down. But the conservative opposition has dismissed this, claiming that much of the electorate are badly educated.

These events have split the Peoples Movement right down the middle. The more progressive sections of the Peoples Movement are unhappy with the close association with Sondhi and the conservatives. Some have reluctantly joined the demonstrations, while others have stayed at home. We in the Peoples Coalition Party are pushing for a progressive political reform agenda among anti-government forces, both in the demonstrations and in other circles. We are trying to build a new student movement following years of decline.  We need for progressive taxation of the rich in order to fund social welfare and health. State violence and repression is a real issue, which needs to be addressed. The Free Market in all its forms, whether it be Free Trade Agreements, Patent laws on drugs, or Privatisation of public utilities and universities, must be vigorously opposed. We also need to link all these issues with the international situation. In October this year a South-east and East Asian World Social Forum will be held in Bangkok and we shall be looking for dialogue between the Thai social movements and movements in neighbouring countries, especially the Philippines and South Korea.

The mainstream in the Peoples Movement has long taken the Autonomist view that we don’t need our own political representation or theory and that loose networks of social movements are enough. Events are proving this to be a mistaken strate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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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빌리사우스 노동자총회준비회의를 다녀와서 생각하게된 몇가지(1)

정말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쓰네요. 썰렁해졌습니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고 보니까 파이어폭스에서도 작동하는 새로운 편집기도 생겨서, 이제는 파이어폭스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분 좋군요.

***

2월말부터 3월초까지 태국 방콕에 출장으로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주빌리사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화 반대 아태지역 노동자 총회’ 준비회의와 함께 이 일정에 맞추어 세계사회포럼 동남/동아시아 다중심포럼 워크샵, post-WTO 전략회의가 함께 진행되어 참가했습니다.

공공연맹은 주빌리사우스(아태지역)와 이런저런 사업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주빌리사우스-아시아태평양(APMDD)은 외채 상환거부 운동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해왔습니다. 특히 90년대 이후 채권국들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방법으로 ‘외채-주식 전환 debt-equity swap’을 이용하는 데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외채-주식 전환’은 공기업의 사유화를 강제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특히 문제가 된 물, 전력(에너지) 사유화 반대운동을 조직하였죠.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작년 한국에서 일련의 국제연대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습니다. o 노동과 환경의 연대를 통한 에너지 체제 전환 국제 심포지움,  o 물 사유화 저지 워크샵,  o 전세계 FTA 현황과 투쟁 워크샵  등이 그것입니다.  작년 한국에서 논의과정에서 ‘사유화 반대 아태지역 노동자 총회’가 제안되었고 , 이번에 이 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실무 준비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일정은 저에게는 매우 운이 좋았던 사건입니다. 국제 사업의 직접적인 담당자가 아니면서도  가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물사유화 투쟁 관련해서 공무원노조가 우연히 담당자를 보내지 못하게 되면서 연맹 내에서 관련사업을 했던 제가 가게 되었으니까요.) 주빌리사우스 회의의 의제는 물론이려니와 세계사회포럼(다중심포럼) 준비회의를 참관할 수 있었다는 점이나, 많은 국제 사회운동단체들이 공동으로 주최한  WTO반대투쟁 전략회의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계기였습니다.

이번에 참가한 세 개의 일정은 모두 공통적으로 국제적인 운동을 건설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사회운동의 역사와 조건이 모두 상이한 나라들에서 온 활동가들이 공동의 합의를 도출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조건은 서로 다르지만, 그러한 조건들의 공동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인식하고 이에 대한 투쟁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빌리사우스 노동자총회 준비회의는 물론이고, 다중심포럼 준비회의, 특히 WTO 반대투쟁 전략회의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교통을 통해서 조정되는 과정은 인상적이더군요. 물론 이 과정에서 몇몇 ‘선수’들이 활약하기도 하던데, 실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http://member.jinbo.net/maybbs/pds/rudnf/pds/s_S4300510.JPG
△ WTO반대투쟁 전략회의(방콕, 2/28~3/1)

이번에 함께 진행된 일정들
: 세계사회포럼 동남/동아시아 다중심포럼 준비를 위한 지역 워크샵 (WSF Regional Workshop to prepare for the Southeast/East Asia WSF in Thailand October 2006)
: 기본서비스의 사유화에 대한 아태지역 노동자 지역총회 준비위원회 회의 (MEETING of the PREPARATORY COMMITTEE for the ASIA/PACIFIC WORKER'S REGIONAL ASSEMBLY on PRIVATIZATION of BASIC SERVICES) = 주빌리사우스, 노동자총회 준비회의
: 홍콩투쟁에 이은 지역전략회의 (Regional Trade Strategy Meeting, The Battle of Hong Kong continues)

이미 많은 동지들이 국제연대활동을 통해서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저도 이번 일정을 통해서 그밖에 몇가지 운동적 쟁점들에 대해서 새롭게 느끼고 사고하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대안세계화운동을 쟁점으로 하는 사회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의 결합의 방식이라든가, 노동의 불안정화에 대항하는 투쟁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에서 가지는 위상 등등에 대해서 말이죠. 몇번에 걸쳐서 글을 써볼까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주빌리사우스 회의는 ‘기초서비스 사유화에 반대하는 아태지역 노동자 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남한에서는 주로 공공서비스라는 표현을 쓰는데 외국에서는 기초서비스 basic service라는 개념을 쓰더군요. 각각이 함의하는 운동적 쟁점이 있을 텐데 좀더 고민해봐야하는 문제인 것같습니다.) 주빌리사우스 운동 자체가 외채를 매개로 (반)주변부의 자원을 착취하는 금융세계화를 반대하는 운동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운동은 또 한편, 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노동자운동을 조직하고자했고, 그 성과가 작년 서울에서 진행된 일련의 프로그램입니다. 올해에는 이 성과를 더욱 공고하게 하기 위한 ‘노동자총회’ 형태의 프로그램(실제로는 워크샵 형식을 띄지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안세계화운동의 과제로 노동자운동을 조직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운동이 직접적으로 금융세계화의 피해당사자가 되면서도 단지 ‘구조조정 반대’ 투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자체를 문제 삼고 투쟁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것을 통한 국제적인 노동자운동의 연대를 시도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빌리사우스가 조직하고 있는 이 운동은 각국의 (금융세계화가 강요하는) 공공서비스 사유화 반대투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그것을 국제적인 운동으로 만들어내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연대의 네트워크에 함께 하는 조직들이 각자의 운동경험을 교통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 과정에서 스스로의 운동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해내고 자신의 운동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연관이 있다는 인식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서 광범위한 대안세계화운동의 과제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노조운동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출장일정에 함께 하기도 했고 지속적으로 주빌리사우스, 세계사회포럼 등에 연대활동을 해온 발전노조의 경우, 선거에 출마한 후보가 (그것이 에너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아직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WTO, FTA반대운동을 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습니다. 구조조정 문건에 구체적으로 나와야 그 때야 움직일까 말까하는 노조들의 상황을 보면 매우 의미있는 문제의식인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선거에서 이 후보진영은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새로 당선된 집행부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국제적인 운동의 조직화를 통해서 각국의 노동자운동이 자신의 운동을 대안세계화운동이 일부로 재조직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일자리와 관련된 구조조정의 문제로 사고하는 것을 넘어서 사회운동적인 과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이  운동은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노동자운동의 국제적인 연대를 조직하고, 또 한편으로는 개별 노동자운동이 (대안세계화 운동을 주제로 하는) 사회운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 연재할 글 순서]
이번 일정을 보면서 배우고 느낀 것들(2) : 신자유주의, 인민주의, 태국의 정세
이번 일정을 보면서 배우고 느낀 것들(3) : 노동의 불안정화, 남한의 독특한 쟁점?
이번 일정을 보면서 배우고 느낀 것들(4) : 운동 조직에 필요한 것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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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을 돌아보며

철폐연대 기관지 '질라라비' 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작년 공공연맹 안에서 비정규직 조직화/투쟁 과정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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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을 돌아보며]
공공부문에서도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


요즘 2005년 공공연맹 사업평가를 진행하는 중이다. 평가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치열하게 진행된 투쟁의 상당수가 중소영세, 비정규직 사업장의 투쟁이었다는 점이다. 굳이 2005년에 전면화된 것은 아니겠지만, 일부 사업장을 제외하고는 정규직 노동조합의 투쟁이 지속적으로 침체되고 있으며, 중소영세, 비정규직 사업장의 투쟁은 장기화되는 경향이 더 뚜렷해졌다. 이런 점은 공공서비스의 사유화 공세가 대규모 공기업 자체의 전면적인 사유화보다는 이른바 ‘핵심-비핵심 업무의 분할’, ‘비핵심 업무’에 대한 위임위탁 활성화 등을 통해서 진행되는 정세와도 관련되어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맞선 공공부문 대규모 사업장의 투쟁이 다소 다른 전선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전선은 훨씬 분산되어 있고, 정부와 자본이 자기 책임을 회피하기 용이한 곳에 설치되어 있다.

 

햇수로 3년째를 맞는 경마진흥노조의 투쟁부터, 해고투쟁 1년이 다가오는 대경공공서비스노조 칠곡환경지회 투쟁, 200여일을 넘기면서 이제 마무리된 시설노조 코펙지부 투쟁 등 장기투쟁 사업장들이 많다. 현대기림지회, 경찰고용직공무원노조, 경기도노조 안양지부, 서울시설환경노조 성북태한지부, 학교비정규직노조, 건설엔지니어링노조 건축사협회지부, 세종문화회관지부 등 예술노조의 각 사업장 투쟁, 새마을호/KTX 승무원 투쟁도 장기간 진행되었거나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밖에도 상애원, 정립회관 등 사회복지기관의 투쟁은 전면적인 파업이 지속되지는 않더라도 일상적인 탄압과 투쟁이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보면 지난 연말 64일간의 파업을 끝내고 다음 투쟁을 기약하면서 현장에 복귀한 산업인력공단비정규직노조는 상대적으로 많은 성과를 남긴 셈이다.


투쟁의 이러한 장기화에는 공공서비스 업무의 민간위탁 등을 통한 간접고용화와 이 과정에서 공공서비스 업무를 중소영세 민간자본이 수탁하는 사정이 연관되어 있다. 공공부문의 중소영세 사업장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민간위탁 사업장으로 간접고용인 상황이다보니 중소영세=비정규직 사업장이 되고 장기투쟁으로 연결된다. 고용형태가 형식적으로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의 문제보다도 민간위탁, 외주화의 확산을 통해 다각적인 방식의 노동의 불안정화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2005년을 돌아보면 이런 장기간, 전투적으로 진행된 투쟁들은 공동의 의제를 제기하거나 연대투쟁 전선을 형성하는 데는 거의 나가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위에 열거한 투쟁들이 한 개의 산별연맹 소속이고, 상당부분 공동의 쟁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지역적으로도 가까운 경우가 있지만 개별화되는 경향이 있다. 공공연맹 수준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서도 실태조사, 정책과제 제기 등 추상적인 수준의 사업과 구체적인 사업장 투쟁 지원이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했다. 사업장의 분산성이 제조업보다 심하고 연대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점, 연맹차원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대정부요구를 구호, 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인 연대투쟁으로 조직하고 있지 못한 등의 한계가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투쟁사업장 간의 연대는 물론,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투쟁에 책임있게 연대하거나 조직하는 활동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서울지방본부를 중심으로 한 철도노조 동지의 활발한 활동과 정보통신노조의 시도 정도를 제외하면 비정규직 조직화, 투쟁에 정규직 노조가 자기 문제로 결합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전력기술(KOPEC), 인천지하철에서는 시설관리노동자들이 시설노조에, 대구지하철에서는 정비용역노동자들이 대경공공서비스노조에 가입하는 등, 연맹 내에서조차 비정규직 산별노조가 조직화를 대리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동차산업 대공장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정규직-비정규직 분할과도 유사한 상황이지만, 논쟁보다는 오히려 무관심이 특징적이다.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풀어가려는 운동적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산별노조 건설 논의에 있어서도 비정규직 조직 문제가 제대로 제기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금속산업 부문보다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논의가 훨씬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정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고민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 조직화와 계급적 연대를 위한 산별노조 건설의 원칙은 추상적으로만 확인될 뿐이고, 구체적인 쟁점에 들어가면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자기 (정규직) 노조의 당면한 이해를 우선하는 입장이 더 자주 드러난다. 정규직 노조들이 가지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비정규직 노조들끼리 독자적인 조직전망을 논의하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한다. 특히 근래 가장 급속하게 신규조직화된 지자체 직간접 고용 비정규직의 경우 독자적인 전국적 규모의 산별노조로 결집하려는 시도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공공연맹은 정규직 조직까지 함께 하는 산별노조, 더 열악한 하위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산별노조를 건설할 것을 제안하고는 있지만, 현재와 같은 논쟁 지형에서 ‘같이 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는 제안의 설득력은 점점 더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지역공공서비스노조의 건설을 중심으로, 아직 많은 한계가 있지만 지역차원의 비정규직 연대의 수준을 좀 더 높여낸 것이 성과라면 가장 큰 성과다. 3개 지역에서 지역공공서비스노조를 건설하고 지역차원의 산별적인 조직화를 시작하고 있다. 공공연맹의 입장에서 보자면 새롭고 귀중한 경험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민주노총의 50억 기금 사업의 지체에 따라 후속 지원이 중단된 상황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정규직 조직화에 대한 지속적이고 책임있는 지원이 없이는 곧장 조직적 침체, 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여기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비정규직 조직화는 1회성 사업으로 진행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다.

 

차고 넘치는 추상적인 논의 속에서 정작 구체적인 연대를 실현하고 전선을 모아내기 위한 노력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공부문 노조운동의 얕은 활동가층의 문제부터, 활동가들 사이에 논쟁이 부족한 것이 또한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다. 건강한 정규직 활동가들도 비정규직 활동가들과 논쟁할 수 있는 기회도 접점도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 좀 더 많은 논쟁이, 활동가들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 논란이 발생하고 더 시끄럽게 쟁점에 대해서 토론하는 과정 없이는 개별 사업장의 고립된 투쟁, 정규직 노조의 무관심, 겉도는 연맹사업과 같은 상황이 2006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떤 종류의 교훈이라기보다는 고민의 항목들이 더 늘어간 2005년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난점, 한계들에 직면했을 뿐아니라 그것을 만든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들이 난점과 한계로만 기억되지 않고 건강한 공동의 논쟁으로 활성화될 때, 운동이 한걸음 더 진전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어쩌면 공공부문에서는 아직, 우리가 마주친 난점들이 기억되지 않고, 고민들이 제대로 논쟁되지 않는 것이 우리 한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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