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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산자와 죽은자


산 자와 죽은 자 1,2
제라르 모르디야 지음, 정혜용 옮김

  

(※ 열심히 썼다가 글이 등록이 안되고 날아갔는데 아주 힘빠지네요. 시스템을 탓할 것인가, 부주의를 탓할 것인가. 그래도 오기 발동. 다시 작성.)

 

프랑스의 소도시 로셀, '코스'라 불리는 공장폐쇄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한다. 한 신문은 이 소설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제르미날"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삶을 강요하는지는 프랑스나 남한이나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같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무 전형적이고 따라서 사실주의적인 소설. 등장하는 노동자 인물들의 대사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같기도 하다. (그래도 그만한 인식들이 어느 정도는 퍼져있으니 이런 묘사가 가능하겠지. 부럽다.)



생산에서 철수하는 자본, 금융세계화

 

이 소설의 주된 무대인 공장은 플라스틱필름을 제조하는 공장이다. 이 공장이 결국은 폐쇄되고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수밖에 없는 과정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과정에서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고 금융투기로 전환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1) 경쟁력이 약화된 공장을 한 초국적 기업이 인수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공적자금과 물질적, 행정적인 편의를 제공받는다.

(2) 그러나 이 기업은 생산을 남부유럽, 동유럽에 재배치하면서 물량을 감축하면서 수익성을 이유로 구조조정을 강요한다. 이를 이유로 다시 한번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을 받는다.

(3) 이 회사는 다시 미국계 금융투기자본인 한 페이퍼컴퍼니에 매각된다. 이제 완전히 청산. 이 투기자본은 공장이 가지고 있는 특허권만 매각하고 나머지는 폐기한다.

전체 과정 속에서 국가는 자본의 금융화를 재정적으로, 제도적으로 지원하면서 노동자의 불만을 적절히 관리하는 역할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어떤일이 벌어졌을까? 구조조정 과정에서 300여명의 노동자들 중 70여명이 정리해고되고 임금은 삭감된다. 그리고 최종적인 공장폐쇄 과정에서 전체 노동자들은 해고된다.

 

이런 과정은 자본이 생산에서 철수하여 완전히 금융화되는 과정이나, 생산의 초국적 재배치와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중심부, 반주변부 제조업이 처하게 되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작가가 이런 과정을 면밀하게 묘사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이런 식의 자본의 생산철수가 빈번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로서 금융화라는 쟁점이 대중적으로도 인식되는 사정도 더 이해할 수 있다.(ATTAC과 같은 대중적인 사회운동을 생각해보자.)

 

이에 비해서 남한에서 공장폐쇄는 주로 '해외이전', '산업공동화'로 이해된다. 강력한 생산기지로 부상하는 중국이 인접해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사회운동 진영에서조차 문제가 '금융화', '생산에서의 철수'에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중국으로의 공장이전에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보다는 중국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외환은행과 론스타, 오리온전기 사태 등에서도 보이는 것과 같이 금융투기, 금융화의 효과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뚜렷히 드러나는 중이다.

 

프랑스의 노동관행, 제도, 투쟁

 

이 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에서 노동제도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행동양식. 구조조정과 공장폐쇄가 진행되고 지방 소도시의 거의 유일한 공장인 300명짜리 직장이 사라질 위기가 되자, 이 문제는 지자체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그리고 중앙정부 차원의 관심사로 등장한다. EU-정부-지자체가 해고 노동자들의 특별퇴직금을 분담하는 안까지 논의된다. (남한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노동조합과도 이러한 보상 방안을 두고 정부와 지자체가 직접 협상한다. (역시 남한에서는 거의 어림없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국가의 폭력적인 본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투경찰이 등장하는 광경은 남한과 똑같다. 마지막 대규모 지역시위 과정에서 연대투쟁온 다른 공장의 노동자와 지역주민 여성이 각각 전투경찰 폭력으로 사망하고, 전투경찰도 한 명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역주민 여성은 직격발사된 최루탄에 맞아서(이한열 열사처럼), 연대투쟁온 노동자는 곤봉에 맞아서(강경대 열사처럼) 죽는다.

 

한편, 정부가 이런 식의 교섭에 나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동조합의 입장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코스'공장 안에는 세 개의 노동조합 조직이 있다. (복수노조니까 당연하겠지. 사실, 노동자가 자기가 속하고 싶은 조직에 가입한다는 것은 시민적 권리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이를 노동법으로 규제하는 남한의 현실은 웃음거리가 되기 알맞다.)

 

노동총동맹CGT, 노동자의 힘FO, 민주노동동맹CFDT 새개의 조직이 있다. 일반적으로 CGT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FO는 우익적, 실리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것으로, CFDT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들에 대한 묘사는 흥미로운데 아마도 현실에서 이들이 취하는 입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려는 것같다.

 

CGT는 입으로는 원칙적인 입장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런 입장을 갖고 투쟁을 하지도 일관되게 밀고 가지도 못한다. CFDT는 온건하게 '합리적인' 입장을 가지지만 반여성적인 구조조정에 동의하고 인종주의적인 모습도 보인다. 차라리 경제주의적인 입장에 충실한 FO가 솔직하게 자기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다. 여튼간에 이들은 시종일관 조합원들을 통제하려고 하지만 시종일관 실패한다. 현장의 자발적인 투쟁(와일드캣 스트라이크가 빈발한다)에 밀려서 협상장에 나서는 것이 이들의 포지션이다.

 

CGT의 모습은 공장에서 지부대표의 모습 뿐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나온 간부의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파견나온 중앙 간부는 시종일관 공장폐쇄를 기정사실화하고 특별해고수당을 더 확보하고, 직업훈련기간과 그 기간의 임금을 더 확보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하는 순간에도 이들을 기만하고 현장에서 합의되지 않은 안을 갖고 협상을 진행한다. 더구나 간부는 현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아니라 정부(노동부와 지자체)와 협상하기 위한 '조정자'라는 신분으로 왔다.

 

이러한 모습은 민주노총의 '국민파 '보다도 우익적인 것으로서, 공산당을 지지하는 조직이라는 말이 민망한 일이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공장점거와 투쟁을 주도하는 급진적인 젊은 노동자들이 대부분 CGT 조합원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시종일관 CGT의 방침을 거부하고 투쟁을 밀고 나가지만 말이다. 결국, 마지막 국면에서 CGT 대표가 쓰러져 병원에 옮긴 사이에 FO, CFDT 대표들은 후퇴된 합의안에 '직권조인'하고 공장에 합의를 (노동자에게) 강요하러 온다.

 

여튼, 이런 모습을 보면 그나마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은 전투성이나 원칙에 있어서는 '양반'인가 싶기도 한데, 씁쓸한 일이다.

 

지역투쟁

 

이 소설의 절정이라고 할만한 대규모 지역시위. 인근지역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결정도 없이 비공인파업에 돌입하여 연대한다. 지역주민들도 거리에 나선다. 지역주민들은 '코스' 노동자들의 친척이자 친구이며, 이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이런 방식의 지역투쟁이 가능한지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지역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단체, 연대기구같은 것이 없이도 지역의 공동체성만 갖고 투쟁을 조직해서 나서는 모습은 놀랍다. 지역차원의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지역민중연대'같은 조직도 중요하겠지만, 지역의 노동자`시민들이 공동체라는 관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와 여성노동자

 

첫번째 구조조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여성노동자들이다. 회사는 근속연수, 나이 등 여러가지로 '기준'을 만들지만 그것은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여성노동자들을 해고대상으로 이미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에 불과하다. 기준자체가 젠더편향적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여성들이 해고된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지자체는 직업훈련과 재고용을 약속했지만 정작 훈련받은 직업에 취직된 경우는 없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마당이니 취업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나마 취업한 경우라면 가정부, 보육, 웨이트리스 등이 저임금, 비공식, 하인 노동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여성들을 어디로 내모는지 보여준다. 여성의 권리가 증진된 국가로 알려져있지만 그 근본적인 양상은 남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국제적인 '통일성'을 새삼 확인한다.

 

놀라운 여남관계 ; 다중성과 개방성

   

이 소설의 주요 플롯에서는 조금 떨어져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소설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여남관계가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일 뿐 아니라 다중적이라는 점. 주인공 루디를 포함해서 많은 등장인물들이 결혼한 배우자가 아닌 남성, 여성과 성적 관계, 애정관계를 맺는다. (동성애도 있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가책을 느낀다거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전히 결혼한 배우자를 사랑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의 애정관계 때문이라기 보다는 이전에 이미 관계가 안좋은 경우.) 우리나라에서의 관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다.

 

이 책을 읽은 한 동지는 이 책을 보면서 '폴리 아모리'라는 개념이 떠올랐다고 이야기했다.  비독점 다자연애, 혹은 개방결혼이라고 번역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아내가 결혼했다> 소설로 알려진 개념. 소설에서와 같은 상황을 나타낸다는 것인데, 이성애, 동성애에 대한 관념이 사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다시 발견한다.

 

이러한 관계방식은 콜론타이의 자유결합과도 또 다른데, 같은 시기에조차 동시에 복수의 이성과 애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페미니즘적인 입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제르미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책을 "탈공업화 시대의 제르미날"이라고 한 평가가 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이 소설은 제르미날의 구도와도 매우 유사하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구조 자체와 연결된 자본가의 착취와 폭력에 맞서 투쟁하고 그 과정에서 폭력도 돌발한다. 그러나 결국 노동자들은 패배하고 누군가는 죽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개별 투쟁이 패배하더라도, 자본가들이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손해를 보고 상처를 입는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단결이 가지는 힘과 한계를 모두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함부로 다룬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으로 얻는데, 따라서 당면한 투쟁에 자본가가 승리하더라도 무작정 착취를 강화할 수만은 없게 된다. 제르미날Germinal, 혁명력, '싹트는 달'이라는 의미에 맞게.

 

이 책에서 주인공 격인 루디도 제르미날의 주인공인 에티엔느처럼 외지에서 온 사람이며, 젊은 노동자이고, 사회주의자이고 투쟁에 나서고, 또 패배한다. 그리고 작품의 맨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19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넘어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유사한 방식(사실주의)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이 어떻게 보면 놀랍다.

   

산자와 죽은자

 

소설의 제목은 산자와 죽은자. 이것을 작가가 어떤 의미에서 붙였는지 알수는 없지만, 산노동과 죽은노동이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자본가들에게 구조조정은 자본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 숫자를 통제하고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익률을 확보하기 위해 몇명의 노동자를 해고할 것인지, 해고수당을 얼마로 할 것인지 같은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자본가에게는 수익률과 다를 바없는 의미를 가지는 해고 노동자의 숫자는, 하나 하나가 한 노동자의 운명에 걸려있다.

 

이 소설에도 등장하는 노동자들도 그렇지만, 노동자들은 하나하나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 구체적인 노동을 수행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죽은 노동의 대리인일 뿐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인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노동자들이 쟁취하는 것은 시민권의 가장 중요한 실현. 이 책의 추천사에서 소설가 신경숙은 "새삼 훌륭한 시민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깊이 하게 하는 대작"이라고 썼다. 인간=시민으로서의 노동자의 권리가 곧 시민권이자 인권이라는 점에서, 신경숙의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시사적이다.(노동자가 시민이라는, 이 중요한 쟁점은 많은 경우에 잊혀지기 쉽상이지만 말이다.)

 

루디는 말한다.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공장장님이 옳습니다. 그 기계는 코스의 재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코스를 지배하고 있는 회사의 재산이겠죠.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직원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기계는 우리 것입니다. 이 기계에 그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노동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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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덤으로.

루디를 비롯한 젊은 급진적 노동자들이 점거중인 공장의 작업실 하나를 폭파시킨 후. CGT 공장지부 대표인 피냐르와 루디의 대화.

"지금 자네들이 한 짓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나? 급진주의라고. 그럼, 급진주의란 뭔가? 그건 고용주들이 제일 반기는 것 아닌가?"

"그런 말은 신물나게 들었어요! 그러니 제발 더는 하지 마세요. 공산당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로 죽 그런 소리를 해대지 않았나요!"

 

 


 

덤으로 하나 더. '제르미날'과 같은 프랑스혁명 후 혁명력에 대해서.(펌)

 

1793년 10월 5일 국민회의가 소집되어서 달력 체계를 완전히 바꾸는 법령을 통과 시킵니다. 그 내용으로는

1. 1년은 가을에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즉 추분에 시작된다. 옛 달력으로는 9월 22일에 해당한다. 이 날은 최대한 정확한 천문학적 측정을 토대로 정해진 것이다.

2. 1년은 모두 30일씩 갖는 12달로 나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가을 1월 : 포도 수확의 달(Vende'maire, 방데미에르)
   2월 : 안개의 달(Brumaire, 브뤼메르)
   3월 : 서리의 달(Frimaire, 프리메르)
겨울 4월 : 눈의 달(Nivose, 니보즈)
   5월 : 비의 달(Pluviose, 플뤼뷔오즈)
   6월 : 바람의 달(Ventose, 방토즈)
봄     7월 : 싹의 달(Germinal, 제르미날)
         8월 : 꽃의 달(Floreal, 플로레알)
      9월 : 풀의 달(Prairial, 프레리알)
여름 10월 : 추수의 달(Mseeidor, 메시도르)
   11월 : 더위의 달(Thermidor, 테르미도르)
   12월 : 열매의 달(Fructidor, 프뤽티도르)

3. 나머지 5일은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세력의 이름을 따라 상퀼로티드(Sansculottide)라고 통칭한다.

4. 윤년에는 여섯 번째 상퀼로티드를 추가한다. 윤년은 예전처럼 4년마다 오는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정해지는데, 이것은 정확한 천문학적 관측을 통하여 새해 첫날, 즉 포도 수확의 달(방데미에르) 1일이 정확히 춘분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혁명 달력에 따른 윤년은 공화국 2년, 7년과 11년 이었다. 그레고리우스 달력에 의하면 1793년 1798년과 1802년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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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으로 남성들에게; 그녀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자.

내가 밑에 포스트 <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에서 언급했던 가족 내  불평등 호칭 바꾸기 켐페인이 있습니다.


아래 <조선일보의 여성혐오>라는 포스트에서 언급한 조선일보 등의 기사가 나간 이후에 켐페인 홈페이지가 난리입니다. '분노한 남성'들이 몰려왔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제가 언급하지 않아도 상상들이 되실 겁니다.

그래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자는 차원에서 게시판에 글을 썼는데, 아래 글입니다. 원문은 여기



남성으로 남성들에게; 그녀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자.

이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서 남성으로서 한편으로 (익숙하게 보아온 광경이면서도) 다시 한 번 놀라기도 하고 답답한 느낌이다. 여성에게 차별적인 호칭을 바꾸자고 시작한, 그것도 "여성이 여성에게 쓰는 호칭"을 여성들 스스로 바꾸자고 제안한 이 켐페인에 오히려 남성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로 그런 남성들에게 같은 남성으로서 같이 생각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고, 몇몇 주장들은 호칭의 언어학적 기원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견을 밝히는 글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아냥, 조롱, 분노를 담은 글이다. 일부는 성폭력적인 글도 있다. 이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그래서 '남성들의 분노'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어원 등에 대한 의견이 다르면 그냥 깔끔하게 그에 대한 입장만 밝히면 될 일이다.) 여성민우회는 남성들의 분노를 촉발시킬 만한 일을 한 것일까? 성평등한 호칭을 쓰자는 주장이 왜 남성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일까?
 
여기에는 복잡한 이유들도 많겠지만, 주로 남성들의 사고가 여성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평등은 남성 자신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어와 같은 상징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상징들은 물질적인 힘을 갖고, 언어의 평등은 관계의 평등으로 연결된다. 인간은 상징들 속에서 사고하기 때문이다.
 
(어떤 남성들은 '왜 경제도 어려운데 호칭 따위를 갖고 '국론'을 분열시키냐"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도 진정으로 호칭과 상징이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게시판에 개입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런 논쟁에 '경제'와 '국론분열'이라니, 히틀러와 스탈린도 혀를 내두를 전체주의 사회가 따로없다.)
 
이 켐페인에서 여성들의 주장은 우리 언어 속에 내재되어 있고, 따라서 여전히 상징으로 작동하고 우리 행동에 영향을 주는 호칭들을 반성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예 적극적인 대체 호칭을 제시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것을 '함께 고민해보자'고 열어두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자신의 성적 편견,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각을 스스로 반성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차별을 부정하고 눈을 감는 순간 자기반성이란 불가능하며, 자신에게 무의식적인 영향을 주는 호칭과 상징에 대한 비판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기반성이 불가능한 사람이란 타인과의 열린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게시판에서, 어쩌면 자신들과 상관없을지도 모르는 문제에 열을 올리는 남성들을 보자면, 같은 남성으로서 씁쓸해진다. 이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차별에 대해서 눈을 감고, 적극적으로 부정할 뿐더러(이렇게 하려면 세상을 자신의 관념에 따라 색안경을 끼고 바라봐야하는데, 그 개인들에게도 슬픈일이다), 성적 차별을 상징적인 수준에서부터라도 해결하자고 하는 여성들의 노력을 마치 자신의 권리에 대한 침해인 것처럼 반응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남의 권리를 억압할 권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서 평등하고 그에 따라 권리를 갖고 있다. 호칭에 있어서도 차별적인 언어에 상처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 수천년 동안 (아마 수억명은 될) 여성들이 받았을, 이 호칭에 내재된 차별과 멸시로 인해 받았을 정신적 상처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따라서 여성들이 호칭에서조차 평등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존중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이 어떻게 불리기를 원하든, 그것은 여성들의 권리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의바른 토론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남성들이 고려했으면 하는 것은,(나 자신도 남성으로서 반성하지 않을 수 없지만) 여성들이 평등한 권리를 찾아가는 것이 남성들의 권리를 빼앗는 어떤 행위는 아니라는 점이다. 양성이 호혜-평등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때, 남성도 자신에게 부과된 억압을 깨고 권리를 찾을 수 있다. 남성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부과하는 전쟁과 폭력의 의무(우리 모두에게 군대는 얼마나 끔찍한 경험인가. 나도 30대 중반의 남성으로 철원 6사단에서 화기중대 보병으로 26개월을 복무했다. 그것은 다른 남성들처럼, 말로는 뭐라 하더라도 자신은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이 그런 폭력의 경험이다. 군대를 찬양하는 친구 중에도 군대 다시 가겠다고 하는 녀석은 한명도 보지 못했다.)를 져야하고, 뼈골빠지게 생계부양자라는 의무를 져야한다. 가족의 대소사에서 부담되는 '어른'노릇, '남자'노릇을 해야하고, 또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정확하게는 결혼한 여성에게 '아들'을 강요하는 끔찍한 역할이다.) 도대체 이런 양성 차별과 억압 속에서 부여되는 남성으로서의 권리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호혜평등한 관계를 서로 편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면 알량하고 사소한, 남의 권리를 침해해서 얻는 남성들의 '기득권'은 버리는 것이 속편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여성-남성의 권리를 제로섬게임인 것처럼 만든 데에는 군가산점 논쟁과 같은 것이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마땅히 시정되어야하는 것이었지만, 남성과 여성의 권리를 상호 침해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운동'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쟁점들, 그리고 남녀관계의 근본적인 측면에서 양성의 권리는 서로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호칭 문제로 촉발된 게시판 논란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성민우회라는 단체, 혹은 다른 여성단체들도 이런 호칭 문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을테니, '왜 호칭만 갖고 시비냐, 딴거나 해라'라는 말씀들은 그만하시길. (물론 그들이 언제나 옳다는 것은 아니며, 여성가족부의 '연말회식켐페인'처럼 진짜 뻘짓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호칭의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여성들이 수천년간 받아온 멸시와 상처를 치유하자는 제안이다. (언어 폭력을 포함해서) 폭력은 언제나 가하는 자들은 직접 느끼지 못하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물론 폭력을 가하는 자들도 무의식과 영혼에 상처를 받고 인간성을 점차 상실해가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들도 성차별 구조의 희생자라고 말했다.) 이 켐페인은 그런 상처를 여성들이 서로 치유하기 위한 '그녀들의 일'이니 당신들과 나 같은 남성들은 그냥 좀 지켜보자. 여성들의 자기치유에 조차 욕설과 성폭력 언어를 가하는 잔인함이 당신들은 즐거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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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비정규직 대량해고 시작...!

작년 비정규법안 통과에 대해서 우려했던 것 것처럼, 대량해고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2년 기한을 설정한 만큼, 사용자들이 정규직전환이 아니라 2년단위의 주기적 해고로 대응할 것이라는 비판이 불과 법안 통과 한달여만에 현실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연말 재계약을 맞아 고용계약이 갱신되지 않은 경우들이 나타나고 있고, 새로 이루어지는 계약도 법안 시행일인 7월1일에 맞추기 위해서 6개월짜리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도시철도공사의 경우 지난 해 재계약을 하나마니 하다가 6개월로 재계약)

오늘자 경향신문에 관련된 기사가 크게 나왔군요, 작년말부터 민주노총, 연맹, 단병호 의원실에 많은 상담과 '민원'이 있습니다. (문제는 아직 조직화와 투쟁으로 연결되고 있지는 못하다는 점. 아무래도 우리쪽의 조직적 대응이 미흡하기 때문인 것같습니다만.)

벌써 비정규직 ‘해고 사태’…반발 거세질듯
기업 11%만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 전환”
“7월이 오기전에…” 公기관 비정규직 칼바람
 


예산문제 같은 것이 있으니 미리 연초부터 선수치는 것이기도 하고, 행자부에 외주용역관련 예산검토, 무기계약대상선정이 1월까지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가 비정규직 처리에 '모범사용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죠. 법원 사례도 그런 것이구요. 자본의 '모범사용자'!

또한 기업들이 거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전환보다는 외주, 용역, 해고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보이는 것도 예상된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합니다.(111%라는 수치, 상공회의소 설문 결과가 기사화된 내용) 지금부터 7월까지 이러한 대량해고 사태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사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비정규법안과 함께 최저임금 일부 인상과 감시단속 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감액적용(70%) 도입에 대해서 사용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아 파트 관리 쪽 사용자 협회에서 만든 자료에서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  최근 경향은 △ 미화원(주로 여성고령)의 경우 계약상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인건비 절감. △ 경비원·시설관리(감시단속)의 경우 임금인상에 따른 구조조정(정원감축) 혹은 휴게시간 강요를 통한 임금인하가 흐름입니다. 휴게시간 강요 내용을 보면, 식사시간 2시간으로 잡고, 야간에 휴게시간 2시간 형식적으로 달아주는 식, 물론 모두 현장에서는 근무를 강요하겠죠. 기상천외합니다. 정말 머리들 좋습니다.

문 제는 운동진영의 발빠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인데, 지금 늦어도 너무 늦습니다. 정부의 비정규법안에 대한 공격은 물론이고 조직화와 투쟁으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한데 말입니다.(물론 전비연 등 단위가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렇게는 부족합니다.) 민주노총이 당장 조직화와 투쟁은 못한다고 해도 여론화작업 같은 것이라도 해야합니다. 그러나 선거국면이 되어서 그런지 올스톱. 다른 단위들도(제가 있는 곳을 포함해서, 반성) 지리멸렬.

당장 광고,  선전전부터 시작해서, 비정규법안 피해사례에 대한 상담센터(노동법 상담과 함께 노동조합으로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설치, 주요사업장에 대한 조직화 등이 이루어져야합니다. 나름대로 이런 저런 사업들을 진행하고, 준비하는 것들도 있지만 사용자측은 훨씬 공세적이군요. 발빠르게 준비해도 너무 늦을까봐 걱정입니다.

그리고, 이건 여론화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단결하고 투쟁하는 계기가 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해야합니다. 정부의 비정규법안 대응에 대해서 '예산확충'등 제도적 문제를 제기하고 요구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당사들의 투쟁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죠.

경향신문의 이 기사에 대한 네이버 댓글을 보면 여러가지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차피 보수화된 포탈사이트 댓글이기는 하지만, 대중들의 관심과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왜 문제이고 어떻게 대응해야하는지를 빨리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 역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와 자본은 다시 정규직이 양보해야하는 식으로, 우리은행사례를 부풀리면서 선전해댈 겁니다.  

비정규법안 저지 투쟁을 하던 긴장감으로 다시 긴급하게 나서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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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여성혐오

조선일보의 패악질을 보려면 포탈사이트 뉴스가 적당하다.(포탈사이트의 뉴스메뉴가 문제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이다.) 다른 신문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에 검색된 사회>여성 페이지.
여러 기사 중에서 조선일보 기사만 골라보자.

(1)"며느리·올케는 여성비하적 표현"…여성민우회 캠페인 논란
(2) 20~30대 여성 55% “난 페미니스트 아니다”
(3)여성운동, ‘거리’에서 ‘일상’ 속으로
(4)"여성부 폐지하라" 네티즌 서명운동에 관련사이트 다운

뭐 이런 것들이 있나 싶다. 단연 돋보이게도, 올라오는 족족 이런 기사.


(1)의 경우에는 내가 밑에 포스트 <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에 서 링크했던 호칭바꾸기 켐페인(호락호락)에 대한 기사. 다른 언론들은 '이런 켐페인도 하더라', 혹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거리가 되네', 이런 기조인데 반해서 조선일보는 "정말 먹고 살기 편해져서 할 짓 없는 사람들이 별 것도 아닌 것에 신경 쓰는 걸로 밖에 안보인다"라는 악플을 당당하게 기사에 실으면서 '논란'이라고 한다.

(2)의 경우, 여성들조차 페미니즘을 거부한다는 식의 주장. 여성들이 사회적 문제에 어떤 관점을 갖고 있나를 보기 보다는 "페미"라는 딱지붙이기를 시도하고, 이걸 거부하게 만드는 교묘한 기술. 역시 조선일보.

(3) 페미니즘의 위기 어쩌구하면서, '포스트페미니즘'을 소개한다.(조선일보, 니들이 페미니즘의 위기를 알아?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이야기하면서 각종 포스트주의 선전하던 행태가 생각난다.) 권력에 관심 안 갖고, "늘어난 고무줄 치마로 숄더백 만드는 법" 나누는 것이 페미니즘이 할 일이라는 말씀. 그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역시 조선일보의 논지는, 그러니 "너희 여성들은 집안으로 들어가라"는 얘기다. 조선일보의 공포가 드러나는데, 그놈들은 여성이 어떤 식으로든 마초들의 배타적인 권력을 조금이라도 나누려고 한다는 데 견딜수 없어 하는 것이다.

(4) 뭐, 얘기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기사. 조선일보 전체가 완전히 여성혐오주의자(misogynist )라는 걸 고백한다. "감히" 정부 부처에 "여성"부라니!, 뭐 이런 욕지거리.

마지막 사례와 같은 경우에 조선일보는 '여성가족부'라는 풀네임을 쓰진 않는다. "여성부"라고만 표현한다. 영리하다. 한편으로 이들은 여성혐오주의자들의 전통에 따라 "어머니(처녀)/창녀" 이분법에 빠져 있는데, 이들이 보기에 "여성가족부"라는 이름은 도저히 자기 머리로는 사고가 불가능한 개념이 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두뇌에서 언어형태로 처리가 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라는 부처 명이 조선일보 기자들의 골통을 괴롭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도 짜증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여성가족부"라는 부처명 자체가 여성문제,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완전히 왜곡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와는 다른 이유에서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조롱조의 기사의 원인이 된 사건이 "연말 회식 후 성매매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회식비를 주겠다"는 여성가족부의 ─내가 봐도─황당한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벤트에 대해서 네티즌들이 여성가족부 홈페이지를 공격한다는 것인데, 거참,참,참,참!

관련해서 여성가족부의 행태를, 마초적이지 않은 시각에서 비판한 기사도 있다. 여성가족부도 조선일보 못지 않게 한가닥 한다. 성매매 문제에 대한 여성가족부와 주류여성운동의 입장이 가진 문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정말 너무들 하시네.
‘방지’ 안된 여성부 성매매방지 ‘폭탄광고’
튀는 방식 선호 이벤트 번번이 말썽


한편, 조선일보의 이런 패악질은 증상으로서 '여성혐오'(Misogyny)라고 볼 수 있겠다.
여 성운동의 '성주류화전략'에 대한 우익적인, 마초적인 비판인 셈이다. (뭐, '비판'이라기 보다는 거의 정신병이지만.) 이들 사회적 위기에 대해서 여성혐오를 처방으로 제시한다. '여성들이 깝치기 때문에' 사회가 이 모양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자세는 박근혜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데, 조선일보가 왜 그런지를 최보은─대선에서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프리미어>편집장─씨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노동자 혐오, 이주노동자 혐오도 곁들여져있고 분리될 수 없다.

놈들이 노리는 효과는 위에 (1)번 기사에 이른바 "네티즌 의견"이라는 댓글로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굳이 찾아가서 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좋다.)

성주류화전략이 여성문제를 해결할수 없어보이지만, 조선일보는 이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을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비방에 활용하는 셈이다. 주류여성운동과 여성가족부와도 논쟁해야할 여성운동의 건강한 내부 토론과 발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는 더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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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스쿨 오브 락(The School Of Rock)

재밋다는 이야기만 듣다가 이번 연휴기간에야 본 영화. 2003년에 나왔으니 꽤 됐다. 스쿨 오브 락(The School Of Rock). 깔깔거리며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

줄거리나 영화소개는 여기저기 많고, 이미 본 사람들도 많을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궁금한 분은 포탈사이트 영화정보를 검색해보면 될 일이다.
다만, "가짜"교사 듀이 핀(잭 블랙)이 범생이 학교에서 아이들과 밴드를 만들고 아이들 스스로도 미처 몰랐던 재능들을 발견할 뿐더러, 멋진 공연까지 한다는 내용.

영화를 보고 나니, 얼마전에 후배가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숨어있는 재능이 무언가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과 기대가 다시 떠올랐다. 혹시 누가 알겠는가?

http://member.jinbo.net/~rudnf/blog/s_sor.jpg
△ 공연장면, 1등은 못했지만,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politically correct한 결론까지.

영화 중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밴드의 이름을 학생들이 제안하는 장면.

스쿨 오브 락
락의 학교라...
세상에 락을 가르치는 거야
멈출 수는 없어!

그렇다. 락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있어야한다. 이에 더해서 자기들끼리 지지고볶는 것뿐 아니라 '세상에' 가르칠 수 있는 학교.(제도화된 '학교'가 아니라.) 이 학교는 제도화된 공간으로서 학교가 아니라, 그것에 독립해서 교사와 학생이 스스로 만든 학교다. 어떤 제도라기 보다는 하나의 실천으로서 학교. 교사는 학생의 작곡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학생들은 스스로 배워간다. 지적 위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평등한 '밴드'를 구성하는 것이 목적인 학교. 서로의 노래를 연주해주는 우애로운 관계. 그리고 이러한 실천의 내용을 '세상에' 가르칠 수 있는 학교.

(아무래도 교사인 '듀이 핀'의 이름은 존 듀이에게서 빌려온 듯. 하지만 이것은 듀이의 교육철학이 '주류'라곤 하지만 현장에서는 정반대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학교제도에 대한 풍자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는 듀이보다 더 많은 시사점이 있는 것같다.)

(듀이;교사) 좋아, 모두 연주 준비
(잭:학생) 뭐 하시는 거예요?
(듀이;교사)네 노래를 배울 거야
(잭:학생) 왜요?
(듀이;교사) 원래 밴드는 그래, 서로의 노래를 연주해주지

마찬가지로 영화가 다소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지만 클래식 음악을 배울 수도 있어야하는 것.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고급 사립 초등학교가 아니고선 오히려 클래식을 배울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하지만 배우지 못한 것들의 더 많은 항목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떠오른 것은 콜론타이의 '사랑의 학교'라는 개념.
콜론타이는 경제적 관계의 변혁과 마찬가지로 성적 관계의 변혁에도 '사랑의 학교'라는 이행기가 요구된다고 보았다. 사랑의 학교를 통해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더 이상 사랑을 삶의 본질로서 간주되지 않게 될 것이다.
- 「1세대 페미니즘」, 이미경, 『페미니즘 역사의 재구성 : 가족과 성욕을 둘러싼 쟁점들』中

여성에게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마찬가지로 필요할 이러한 '학교'는 시민들이 알고 익혀야(學習)할 것들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제도적이고 비제도적인 기관들 혹은 과정들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교사-학생의 자발적인 실천의 형태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런 실천들 속에서 이렇게 서로 격려할 수 있겠지. 단순히 가르치고 결과를 알아서하라는 제도화된 '학교'가 아니라, 그것은 교사-학생의 구별을 폐지하는 과정이자, 무엇보다 그/녀들 공동의 실천이기 때문에. (공연에 나서기 직전에 듀이 핀의 대사.)

너희는 열심히 했어
모두가 무척 자랑스럽다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내자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위엄만은 잃지 말자
손에는 기타 심장에는 락을!
락을 하는 그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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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보니, 이런 조회수가 " 총방문자수 33333명"이군! 오호, 3이 다섯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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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그리스비극에 대한 편지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지음 / 한길사


비극과 혁명, 그리고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

결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신의 개념화에 입각해서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정치에 대한 비전은 비극적tragique이라는 점을 인정하자...(중략).. 그것은 '대중들'(피지배 계급들, 인민계급들에 속하는 개인들의 잠재적 통일성)이 돌이킬수 없도록 분할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비극적이다. 대중들이 두개의심금들, 그들 자신의 가상의두 개의 실존및 조직양식들 사이에서 내재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자.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또그 힘이 단순한 '관념들'의 힘과는 비교될수 없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의 기능작용에 부합하는 '정상적' 행동과그 핵심에서는 항상 이미 잠재적 반역이 살아있는 그들의 경험의 공동체적,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적 결과들 사이에서 말이다. 그런데 후자의 측면이 전자의 측면보다 우세할 것이라는 어떤 보장도 절대로 없다.그 역도 마찬가지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혁명적 정치가 비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혁명적 낙관주의가 아니라 왜 비극이며, 또 그것은 비관주의 혹은 종말목적론과는 왜 구별되는 것일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어떠한 보증도 없는 현재의 운동이다.(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를 위한 11개의 테제/발리바르)  따라서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정세의 변화, 대중의 움직임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실패해왔다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주체가 이데올로기적 미망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실패를 예상하면서도 투쟁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전에 쓴 포스트 <판의 미로, 랜드 앤 프리덤, 카탈로니아 찬가> 에서 언급한 것처럼, 숭고한 가치를 위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운명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80년 광주에서 도청에 남은 시민군에게서, 1944년의 스페인 반군에게서 발견한다. 이것은 안티고네가 죽음의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나,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파멸에 이르는 운명 앞에서도 진실을 대면하려는 것, 자신이 죽을 운명으로 예언된 전투에 스스로 나서는 아킬레우스와 같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의 의미는 이러한 운명 앞에 선 주체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것에만 있지 않다.저자는  예술형식으로서 그리스 비극은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시민의 시대'에 적합한 형태, 폴리스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서사시는 세계(존재)의 총체성을 반영하고 정신의 완전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서사시가 보여주었던 질서있고 조화로운- 완전한 삶의 모형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 해체되면서 개인을 자각하는 서정시가 나타난다. 기원전 600년경,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Sappho는 이때 등장한다. 시인이 자신을 기억 속에서 반성할 때, 자신은 자립적인 정신으로 나타난다.

서사시의 비극성은 죽음과 삶의 비극성도 완전한 삶의 일부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으로 긍정된다. 이에 비해서 서정시의 비극성은 주체의 갈등과 분열에 뿌리를 둔다.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주체(조건과 정념)의 변화에 따라 주체가 타자가 되는 속에서 발생하는 슬픔을 보여준다.(아마도 그것은 시간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 순간 안에도 존재하는 주체의 분열과 갈등을 생각해보자.)

(한편, 저자는 비극은 자기연민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극은 정신의 숭고함을 표현하지만, 특히 서정시의 경우에는 나르시시즘이나 자기연민으로 후퇴할 수 있다. 그런 예로 김수영의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를 든다. 우연찮게도, 나는 다른 글(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에서 김수영의 이 시를 비판한 적이 있다.)

자, 이제 서사시와 서정시의 시대를 지나 비극의 시대. 비극이라는 예술형식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고립된 주체를 공동체의 시민으로 도야하기 위한 예술. 사람들이 함께 비극 공연을 감상하고 광장에서 만날 수 있게 한다. 예술의 형태에 있어서도 코러스와 대화로 구성된 공연방식은 시민들의 교통을 상징한다. 그래서 코러스보다는 대화가 더 중요하다. 그것은 (코러스가 나타내는) 공동체로의 고양 이전에 시민들이 자신의 주체성을 보존하는 가운데에서도 서로 마주치고 교통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러한 교통이 비극을 통해 느끼는 슬픔 속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단지 그/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그/녀가 내 속에 들어와 머물고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고 그것은 그/녀의 슬픔이 내 속에서 쉴 때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 속에서 타인의 슬픔이 고요히 움직이는 것을 느낄 때인 것".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서로 다른 입장이지만 모두 고통받았고, 슬픔 속에서 평등하게 서로 만나게 된다.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눈물 속에서 자신의 슬픔을 발견하고 공감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예술인 그리스 비극이 가장 위대한 정치적 예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혁명적 정치의 비극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 한, 혁명적 정세를 이유로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은 지양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을 보증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점에 대해서는 최원씨의 <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이라는 글 참고) 책의 서문 한 구절을 인용하자.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정치는 내가 너와 만나 우리가 되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가장 본질적인 계기는 만남이다. 그런 한에서 정치적 예술이란 단순한 저항예술도 아니고 반대로 관변예술도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적으로 만남을 지향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참된 의미에서 타인과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우리가 슬픔 속에 있을 때이다. 만남은 슬픔이 주는 선물인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이것에 대한 가장 심오한 증거이다. 그것은 정치적 예술로서 만남의 총체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만남이 오직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정치적 예술은 비극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 25쪽

물론, 경험 속에서는 유사한 슬픔을 공유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다. 만남의 그런 불가능성은 슬픔을 주체 안에 가두어 둘 것이지만, '자기연민'이 아닌 '교통'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처음 인용했던 발리바르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자. 비극적 관점은 착취의 모순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해후, 과잉결정으로서의 혁명에 대한 사고.  혁명은 "낙관도 비관도 아니고 승리도 패배도 아닌 비극"인 이유.(『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 윤소영)

그러나 비극적 관점이 비관적pessimiste 관점은 아니며, 종말목적론적fataliste 관점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모든 '계기'에서(모든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모순들 속에 착근된 하나의 가능성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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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 한 권. 슬픔을 정념으로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준 책. 따라서 슬픔에 마주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나의 슬픔 때문에/에도 불구하고 타인들-그/녀들과 만날 수 있어야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책. 따라서 마침내 '나'라는 자명하지 않은 주체에 대해서 반성하고 고통의 원인을 인식하며, 그것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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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 활동가와 나눈 대화

연말이라 이런저런 송년회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자리에서 여성단체 상근하는 동기도 함께 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인사동에서 송년 번개 자리.

 

편한 술자리이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많은 걸 배우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여성'(類로서의 여성이나 개인으로서의 여성이나)에 대해서나 '여성문제'에 대해서 정말 더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역시 이걸 확인한 자리. 특히 몇가지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별칭 부르기 운동

 

이건 딱히 여성문제라고 보긴 힘든 것이지만, 이야기하는 중에 운동단체 안에서 별칭부르기와 관련된 화제가 있었습니다. 전 이제까지 이런 별칭부르기가 그냥 일부 단체들 안에서 '재미있는 대안문화'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더군요. 잘 몰랐습니다.

 

자신의 이름(별칭)을 자신과 동료들이 정하는 과정도 그렇고, 호칭에 부여된 자신의 정체성을 주어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더군요. 직책과 나이를 떠나서 단체 안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를 호칭 속에서 만들어간다는 점도 인상깊었습니다. 별칭부르기는 나이에 따라 존대말을 쓰는 관행을 폐지하는 것과 병행되는 데, 적극적으로 나이에 따른 위계를 폐지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노조와 같은 조직에서는 <담당--차장-부장-국장-실장-임원 > 등으로 이어지는 관료적 위계가 호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호칭 자체가 위계를 강화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호칭에 반대하는 한 동료를 함께 놀려먹었던 우리 사무실 분위기, 깊이 반성합니다.) 이런 관료적 위계는 활동가 사이에서도 호혜-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구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권위체계를 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본과 권력과 '동등'해지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규노조 교육을 하면서 항상 위원장, 혹은 지부장을 호칭 속에서나 다른 대우에서 존대해야 사측이 노조를 무시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교육을 해왔습니다. 위원장이나 지부장은 사장, 기관장과 동급이라는 인상을 주어야한다는 것이죠. 저도 이렇게 교육을 해왔습니다만, 별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까, 과연 이게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됩니다. 노조를 구성하는 동지들간에 호혜-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기존에 자본이 부여한 관계방식(위계와 복종)과 다른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는 않은지하는 것이죠. 사장, 기관장과 동등해지기 전에 조합원들 상호가 동등해져야하는 것은 아닌가.

 

노조가 조직적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현실적인 유용성이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미 자본이 부여한 위계가 판을 치고 있고 그것에 노동자들도 익숙한 상황도 있지요. 게다가 노조같은 경우에는 대중기관이라는 점에서 별칭을 쓰게 되면, 조직운영에 있어서 노조가 책임지는 대중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를 호칭이 반영하고 호칭이 다시 관계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이념에 맞게 그것을 개조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과도적이고 절충적인 방식이라도, 현재의 것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한다면 방법은 없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노조 등의 대중조직이 적극적으로 운동의 하나로 수용하면서 운동조직을 바꾸어갈 수는 없을까요?  현존하는 대중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수용-적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운동조직이 적극적으로 변용하는 과정으로서 말이죠. 사회운동단체에서 시작해 대중조직으로 확산되면서 조직문화를 바꾸어왔던 이제까지의 많은 시도들을 생각해보면, 의지가 있다면 방법이 없을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동지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행'이 지나는 중이라는.. ─_─;; 암튼 '유행'은 아니어야할 것같네요.)

 

(다만 나이를 전제하지 않고도 존중받을 만한 사람에게 상호 존칭을 사용하는 것이나 존대말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는 더 고민이 필요해보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교사)와는 관계가 친근하더라도 존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지적 위계를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철폐하는 과정에서 존경과 존중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모두 폐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편, 사회진보연대같은 곳에서는 "~씨"라는 존칭을 붙이는 것이 관행이기도 한데, 서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존중한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서적 관계가 증발된 너무 메마른 호칭으로 느껴집니다. 결국 나이, 직책의 위계가 아니라, 호혜-평등하고 우애로운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면서도, 그것이 관계의 무정부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 되어야할 듯.)

 

그리고 이런 호칭 문제는 가족 안에서도 문제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미 익숙하게 쓰여지는 가족관계의 호칭들, 형수, 올케, 며느리 등등 주로 여성과 관련해서 쓰여지는 호칭에 문제가 많더군요. 예를 들어 '올케'는 '오라비의 겨집'이라는 것이 어원이고, '며느리'는 '내 아들에게 딸려 더부살이 하는 이'라는 식으로 편견이 반영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점 놀랍습니다. '집사람', '아내'와 같은 호칭이 문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부인'이라는 낱말도 문제가 있군요.(놀라움의 연속! 한편으로는 그럼 뭘로 칭해야하는지 오리무중.) 그래서 호칭을 변혁하는 문제, 대안을 만들어가는 문제가 가족 안에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지적.

 

이런 호칭들을 바꾸자는 취지에서 여성단체가 진행하고 있는 켐페인입니다.

 

열악한 여성노동권

 

상담사례를 이야기하다가 나온 이야기들도 다소 놀라운 것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결혼을 이유로 여성이 당연퇴직하도록 공공연하게 강요하는 회사가 많다는 겁니다. 잘 알려진 어느 유명 제약회사는 여성들이 결혼과 함께 퇴사하게 하는 데, 이런 식으로 매년 엄청난 여성이 강제로 해고된다는 것이죠. 또 다른 어느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있지만, 결혼을 이유로 하는 퇴직에 대해서 어쩌겠냐하는 반응이라고 하고 말이죠. 마치 80년대에 여성에 대해서 25세 정년 폐지 투쟁을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아직도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많은 여성들이 이런 것들을 여전히 '체념'하고 그만둔다는 것이고 싸울 엄두를 두지 못한다는 것. 상담을 했던 여성들의 경우에도 결국 사측의 회유, 압력이나 가족의 만류에 의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고, 적절하게 사회적 문제로 제기하고 싸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죠.

 

특히 이런 종류의 상담이 노조보다는 여성단체에 가는 것같은데, 이는 한편으로 노동조합이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신뢰가 가는 집단으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사례들에 놀랐던 이유가, 노조에 찾아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이런 일에 분노하고 뭔가 해보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소극적인 태도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을 텐데요, 여성들의 경우에는 더 나서기 힘든 조건이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그나마 나서려고 해도 노조가 적절한 대안으로 생각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고 말입니다.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할지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한편, 제가 아래에 썼던 "우리은행, 그게 과연 '정규직화'일까"라는 포스트에서 주류여성운동들에 대해서 비판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연, 여노회 등이 우리은행의 조치가 가진 여성차별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환영을 표하는 데 대해서 여성단체로서의 역할이라도 충실히하라는 비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여성단체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여성민우회같은 경우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제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성명]우리은행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박수는 시기상조) 싸잡아서 여성단체 비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해되었다면 사과할 일입니다.

 

은폐와 부풀리기

 

마지막으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노조가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었는데요, '은폐와 부풀리기'라는 평가가 있다고 합니다. 조직 내에서 발생한 문제인 경우에는 '은폐', 자본과의 관계에서나 다른 정파와 관련된 경우 '부풀리기'.

어느 경우에나 다른 조건에 대한 종속변수가 됩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조합이 투쟁 중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해당 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폭로'하고 '활용'하는 것도 좋게만 볼 수는 없다는 지적. 그것이 투쟁과정에서 여성의 권리라는 측면으로 제기된다고 해도 여전히 가지는 한계가 있다는 점. 특히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은폐'하기 쉽상인 노조들이 말입니다. 이런 운동구조 속에 있는 저도 뭐라 말하기 힘든 일인 것이 사실이지만 말이죠. 어려운 문제입니다.

 

매번의 사건들이 다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일반화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하나의 경향으로서, 그것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의 어떤 일을 보면서도 다시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성폭력 문제를 노조 내 정치와 연관시키면서 제기하는 일들을 보면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이번에는) 다른 또 한번조차도 비극으로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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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끝나고 집에 오면서도 '정말 어려운 일들'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특히 남성의 입장에서는) 어렵기는 하지만 반드시 해결해나가야할 문제들.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지속적으로 배워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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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자세 (대우센터빌딩 투쟁에서.)

대우센터빌딩 투쟁이 해를 넘기고 있습니다.

28일,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진행할 '개관식', '점등식' 등 행사를 앞두고, 사측이 교섭을 요청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역시나 한때를 모면하기 위한 기만적인 행태라는 것이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역시, 자본가놈들에게는 양심이란 것이 터럭만큼도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군요.

 

△ 금호아시아나가 대우건설을 인수하면서 로고도 이렇게 바꾼 것이지요. 이 간판 점등식을 한다고 천막을 치워달라는 요구로 교섭을 하자고 했던 겁니다. 노조는 요구안의 핵심인 '일괄재계약'을 전제로 사측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사측은 24시간도 안되어서 말을 바꿉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날 28일 집회는 간단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 쓰려고 한 것은 이런 사정은 아니구요, 서울경인공공서비스노조(이제는 전국공공서비스노조의 지부가 되었지만,)의 독특한 연대의 자세입니다.

 

집회가 끝나고 노조 집행부와 연대단위의 간담회가 진행되었습니다. 구권서 위원장 진행.

△ 노조사무실에서 진행된 연대단위간담회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이번 투쟁의 진행경과와 의미, 이후 전망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투쟁방향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아직까지 연대단위들과 이런 수준의 이야기를 나누는 투쟁은 본 적이 없습니다. 경험이 일천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투쟁일정에 동원하거나 지원방안 정도를 논의하는 정도였지, 투쟁의 의미 등에 대해서 토론하고, 투쟁전망, 조직상황에 대해서 깊은 수준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은 보지 못했었습니다.

 

이번 투쟁에 많은 연대단위가 함께하고, 연대가 확장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이건 단순히 당일 설명회의 문제라기 보다는 연대의 자세의 문제일 겁니다. 연대를 위한 이런 '성의'는 이제까지 계속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집회참가가 아니라 자신들의 투쟁으로 만들 수 있게 하는 과정.

 

특히 이 자리에는 학생동지들이 많이 있었는데, 학생동지들에게는 일종의 '교육'적인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 같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물론 이렇게 연대하는 학생동지들이 대견하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투쟁에 이렇게 열심히 연대하는 모습이 말이죠. 여기에 비하면 제가 학생운동을 할 때에는 '거창한' 정치적-정세적 목표가 있는 큰 집회에는 좀 나갔던 것같지만 이렇게 열악한 노동자들의 어려운 현장 투쟁에 연대한 경험은 별로 없다는 점에서 반성을 하게 됩니다.(사후적으로 반성하자면, 당시에는 '민중연대'의 의미를 너무 추상적으로, 정치적으로만 사고했던 것같습니다.)

 

이번 투쟁이 사측의 기만에 다시 한번 속은 셈이 되고 좀 더 길어질 전망입니다.(그렇다고 28일 당일 어떤 선택이 가능했을지는 고민입니다만..) 이런 속에서 연대의 힘은 계속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단지 연대단체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공유하고 자신들의 투쟁으로 만들어가는 이러한 과정이 더 중요할 수밖에 없겠죠. 이번 투쟁의 주체들을 보면서 또 하나 중요하게 배우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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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운수 4연맹 통합대회 유회 & 운수노동자의 구조적 힘과 연합적 힘

풀소리님의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 잔치] 에 관련된 글.

4연맹 통합대회 유회, 이해하기 힘든 통합논의 과정

공공-운수 4연맹 통합대회는 어제(26일), 5시반 정도에 시작해서 8시 정도, 두시간 반만에 정족수 부족으로 유회되고 말았습니다.

어제 유회 사태에 대해서, 여러가지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대의원들이 많이 안오고 일찍갔다'는 식의 일반적인 문제제기는 별로 적당치 않다고 봅니다. 논의하는 과정 자체, 최종적으로 통합을 하자고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나 파행적이고 졸속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위에 풀소리님이 포스트에 쓴 것과 같이 말이죠.

지난 주말 통합이 무산되었다는 판단 이후에도, 연휴기간인 23,24,25일에도 계속 재논의가 반복되었을 뿐더러 최종적으로 하루를 남기고 심야에 '결국 통합' 결정이 이루어지고 맙니다. 이렇게 며칠을 두고 계속 엎치락 뒤치락하는 과정에서 대중적 공유는 물론 간부들 사이에도 엄청난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조직을 새로 만든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닌데 너무한다 싶었던 과정이었죠.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그랬으니 실제로 논의를 진행하신 동지들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결국, 투쟁을 통해 조직을 건설하지는 못할 망정, 논의라도 제대로 해야하는데 그 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이러니 상층논의, 일정박기식 조직건설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지요. 통합대회에서 질의, 의견을 퍼부은 대의원동지들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발언을 하는 것 자체는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특히나' 이런 상황이었으니 발언을 자제하라는 의장의 발언에 대해서 발끈하는 대의원의 항의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고 봅니다.) 조직의 의결단위의 핵심인 대의원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결이 제대로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후 공공연맹은 1월10일경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하고 통합방침을 재확인하며, 중집을 비상대책위원회로 전환하여 운영하기로 했습니다.(중집위원회 결정) 아마 민주노총 선거 등의 일정을 고려해서 통합대회는 1월 중하순(17일?)에 다시 열리게 되겠죠.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중적 공유, 토론이 전혀 이루어질 수 없는 결정과정을 반복한다면 그 결과는 다시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남은 기간동안 정말로 통합의 의지가 있다면 조직 내 토론에 총력을 다해야겠죠.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전개된 데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교훈이라도 얻지요.

사실 어제 통합대회 중 어느 조직 대의원의 발언은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운수노조만 만드는 줄 알고 왔는데, 와보니 연맹도 통합해서 만든다고 한다. 그럼 상급단체가 하나 더 늘어나는건데 이래도 되는거냐? 산별노조를 '또 하나의 상급단체'로 보는 시각도 시각이지만, 최소한 대의원들에게조차 어떤 논의와 합의가 있었는지도 공유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조직 내 공유가 안되었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는 점. 그러나 더 문제는 이것이 자기 조직 내에서 충분히 토론하지 못한 무책임함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말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운수부문의 전략적 중요성 : 구조적 힘

암튼, 회의 자체는 그렇다치고,
이런 상황이 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운수-공공을 분리하려는 경향은 신자유주의 정세에서 노동자 운동이 나갈 전망을 보아도 별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 이런 입장들이 오히려 논쟁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논의 과정에서 '봉합'된 이후에 이런 식으로 뒤에서 치고 들어와서 정상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가 문제입니다.

운수부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점은 실버가 <노동의 힘>에서 언급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운수노조 출범 자료집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남한의 물류-운수 산업도 확장되고 있고, 중국의 팽창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물류산업도 크게 팽창하고 있습니다. (유라시아 철도나 동북아 물류중심국가와 같은 구상은 그 일환인 셈이죠.) 특히 신자유주의 하에서 생산의 국제적 팽창은 물류 산업이 확장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듭니다. 그러나 또 한편 적기생산방식JIT은  물류가 잠시라도 중단되면 생산 전체가 차질을 빚는 상황을 만들어 냅니다.(부품, 원자재 재고가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운수 부문 중 특히 화물운송의 경우 전략적 중요성이 있고, 그 때문에 이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구조적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업종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야말로 '세상을 멈추는' 힘이 있습니다.


(남한의 노동조합운동이 대부분 그렇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구조적 힘을 해당 노조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장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주체들의 노력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워낙 노동조건이 열악한 상태에서 착취를 받고 있기 때문이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들의 문제를 보다 사회적인 문제, 다른 노동자들(예컨데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문제와 연결된 것으로 제시할 때만 보다 넓은 연대도 확보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운수노동자들이 이러한 힘을 '자신들만을 위해서'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이제까지 민주노조 운동이 밟아온 한계를 그대로 따라 밟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운수에만 갇히지 않는 조직적 전망을 가져야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라는 구호는 정당하고, 또 사실이지만, 새상을 멈춰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까지 고민을 함께 하자는 것이죠. ('구조적 힘'이 가지는 한계는 이미 제조업 대공장의 투쟁이 가지는 한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 산업의 대공장 노동자들은 구조적 힘을 갖고 있고 이것이 많은 성과를 가능하게 했지만, 노동의 불안정화, 자본의 생산에서의 철수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는 그 조차도 지키기 힘든 상황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노조는 크게 늘어나는 비정규직노동자들과 울산 지역에서조차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운수부문의 노동자들은 이제 막 크게 일어나고 있지만 마찬가지 한계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연합적 힘에 대한 사고가 더 필요해지는 것이죠.)

신자유주의 하에서 도시 교통의 노동자 : 연합적 힘

화물운송에 비해서 여객운송, 특히 도시교통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부문은 도시의 시민들로부터 지지가 필수적이고, 이 과정에서 힘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지역별로 노동이 이루어지고 지자체와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노동자, 사회운동과의 연대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부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구조적 힘을 가지는 화물운송 분야와는 약간 다른 조건에 처할 텐데, 지역을 중심으로 보다 '연합적 힘'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가 중요하게 됩니다. (버스노조의 여러 지역에서의 투쟁들은 지역연대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런 점에서 버스 뿐 아니라 택시의 경우에도 지역연대를 중심으로 사고해야할 조건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운수를 넘어서는 지역연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는 이들 조직이 더 힘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하지만 택시는 반대의 방향으로 가는 것같군요.) 이를 위해서는 지역연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슷한 조건에 있는 공공노조 쪽 조직들과도 연대를 강화하고 통합할 필요도 있을 겁니다. (또한 이런 점에서 거의 업종본부만을 중심적인 편제로 하는 운수노조의 구조는 안타깝습니다. 지역으로 확장하기 위한 계획이 --철도나 화물은 전국적인 구획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버스, 택시 쪽에서는--적극적으로 제기되어야하는 상황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어쩌면 '남의 조직'이지만 전망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같은 조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좀 주제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운수쪽 동지들에게 무례하다면 죄송.) 암튼, 결론적으로는 △ 운동의 전망을 갖는 데 있어서 구조적 힘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는 사업장-업종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인 변혁의 일환으로 구조적 힘을 사용하기 위한 고민이 더 강화되어야한다는 점, △ 운수 안에서도 연합적 힘을 강화해야할 부문이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측면에서는 조직 안팍으로 지역적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해야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운수동지들이 당장은 공공부문과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이후에는 더 확장된 고민을 더 함께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겁니다.

어제 통합대회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많이 나갔네요.
통합이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대중적 논의를 함께 할 수 있도록 진행되어야한다는 점, 운수부문이 공공과 통합까지 발전을 사고하는 데 있어서 구조적 힘을 더 확장된 요구를 위해서 사용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역을 중심으로 연합적 힘을 강화할 필요가 있겠다는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군요. 아마도 모든 과정이 다시 시작되겠지만, 정말 '제대로' 되어야한다는 생각에서 끄적거려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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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랜드 앤 프리덤, 카탈로니아 찬가

스페인 내전에 관한 세 개의 작품.

최근 개봉한 영화,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그리고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를 꼭 보라는 친구의 소개(소개만 하지 말고 같이 봐줄 것이지, 쳇 ^^;)에 따라서 보려고 준비하다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된 작품을 아예 더 살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예전에 읽었고, 지난 홈페이지에 관련 글을 쓰기도 했다. 번번히 볼 기회를 놓쳐서 부끄럽게도 아직 보지 못했던 '랜드 앤 프리덤'은 이번에야 보게 되었다. (eMule 프로그램을 열 몇시간 돌린 끝에 겨우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 그래도 결국 파일을 다 받았으니 다행.)

 

1936년 스페인 :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영화포스터에 보이는 붉은 깃발에 쓰여진 POUM은 '통일노동자당'의 약호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자신도 이 당이 주도한 민병대에 참가했다고 밝히는 바로 그 당.

 

영화는 혁명을 지키려는 투쟁과, 그것이 소진되는 과정을 그린다. 파시스트와 전투에서 죽은 동지를 묻는 처음 장례식 장면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를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영원할 것이라는 결의로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당(통일사회당PSUC)의 탄압으로 숨진 동료를 묻을 때, 부르는 'A las Barricadas'(To The Barricades)는 참담하다.

 

영화는 혁명의 교과서라고 할 만큼 명대사로 가득하다. 아래 몇가지는 꼭 인용하고 싶은 것들.

 

해방된 마을에서 토지를 집단경작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 마을에서 혁명을 계속할 것인지, 혹은 적당히 미봉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 한 늙은 농부가 말한다.

 

"혁명은 새끼 밴 암소와 같아서,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암소와 송아지까지 잃게되고, 아이들은 굶게 돼"

자본주의 외국들에게 경계심을 갖게해서는 안된다는 둥 갖가지 핑계로 '온건한' 조치를 요구하는 데 대한 간명한 답변이다. 혁명은 중단하는 순간 후퇴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손녀딸이 낭송하는 윌리엄 모리스의 시(詩).

전투에 참여하라
아무도 실패할 수 없다

육신은 쇠하고 죽어가더라도

그 행위들은 모두 남아

승리를 이룰 것이므로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가장 아름다운 국제적 연대가 이루어진 투쟁이었지만, 가장 더러운 배신이 망쳐놓은 투쟁이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자들(PSUC)는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민중을 관리하려하고 혁명을 압살했다. 전선에서 부르조아 군대와 같이 계급과 위계제를 다시 도입하고 여성을 밥짓는 일로 축출했다.  도시에서 경찰을 부활시키고 '통제'를 도입하며 노동자의 파업을 금지한다. 아나키스트-공산주의자들이 접수한 공공기관을 정부가 '관리'하기 위해서 병력을 투입했다.

 

베르나르라는 의용군의 말을 더 들어보자.

"이봐, 민병대는 투쟁의 심장이라구. 스탈린은 우리를 두려워해. 서방세계와의 협정에 싸인하고 싶으니까. 이미 그렇게 했어. 프랑스와 협정을 맺었지. 협정에 싸인하기 위해서는 거부감을 없애고 우호적으로 보일 필요가 있지. 그런데 우리와 우리의 혁명을 지원하면 신뢰를 잃게 되는 셈이야. 그게 우리가 스탈린을 비난하는 이유야."

 

실제 역사는 진행된 대로. 스탈린은 배신하고 히틀러는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게르니카에서의 학살(피카소).

게르니카

 

주인공격인 데이빗(사실 이 영화에선 모두가 주인공이다)은 PSUC의 입장을 지지하는 영국공산당 당원증을 찢어버리면서 이렇게 편지에 말한다.

"스탈린은 노동 계급을 장기말 처럼 이용할 뿐이야.

팔아 먹고 이용해 먹고 희생시킬 장기말."

 

데이빗은 이렇게 해서 (지금의 우리들이 그런 것처럼) '당없는 공산주의자'(알튀세르)가 되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당운동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미리 보여주는 듯한 장면.

 

아이러니한 것은 21세기 지금 우리 주변에도 여전히 한편으로 스탈린을 용인하면서 한편으로 당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화된 스탈린주의(주체주의자)들은 어치피 죽어다 깨어나도 스탈린주의자들일 수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노동자 계급의 자발적 투쟁을 관리하려 들고, 협상하려드는 노조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당관료주의를 상징하는 스탈린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용인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혹은 그렇게 비판하는 주체주의자들(관료주의)이나 노조관료주의와 자신들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감기(맹목) 때문에?

(스탈린주의자들은 곳곳에서 혁명을 질식시켰는데,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르주님의 블로그; "북한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으로 침묵하는 계급인가?" 를 읽어보자. 아래로부터 대중의 자발적 투쟁을 혐오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마드리드의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나, 평양의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나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영화에 삽입된 노래 중 'A las Barricadas' (가자! 바리케이트로)라는 곡은 폴란드 혁명가인 La Varsovienne (The Song of Warsaw)라는 곡을 스페인 무정부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개사해서 부른 노래다.  참세상 겨울잠프로 중 구닥다리노래창고 13회. "우리가 알고 모르는 번안가요들 1"에서도 소개와 함께 들을 수 있다. 김정환의 번안으로 메아리가 부르기도 했다.(새벽인가?) 암튼, 여기 링크를 따라가면 들을 수 있다.

 

가사가 이렇다. (Wikipedia 홈페이지에서 인용, 가사끝에 Confederation은 최대의 노동자조직-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이었던 CNT(전국노동자협회)를 뜻한다고 한다.)

△ '랜드 앤 프리덤'에 삽입된 곡

 

Black storms shake the sky
Black clouds blind us
Although death and pain await us
Against the enemy we must go

 
The most precious good is freedom
And we have to defend it
With courage and faith

 
Raise the revolutionary flag
Moving us forward with unstoppable triumph

(original: carrying the people to emancipation)
Working people march onwards to the battle
We have to smash the reaction (aries)

 
To the Barricades!
To the Barricades!
For the triumph
of the Confederation

 

 

1944년 스페인 :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El Laberinto Del Fauno'.

감독은 비극적인 현실을, 판타지라는 양식을 통해서 예술적인 비극으로 형상화해낸다. 판타지라는 장르가 이렇게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본 것도 놀라운 경험.

 

영화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이 거의 파시스트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 '랜드 앤 프리덤'에서부터 8년 후, 1944년. 역설적이게도 2차대전의 유럽전선에서 나치들은 패망했지만, 프랑코는 승리한다. 얄타협정이 냉전의 국경선을 획정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최종적인 배신.

 

그러나 여전히 민병대는 남아 '반군'이 되어 투쟁한다. 마을 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이 '잘 훈련된 정예부대'로 대체하고자했던 그 사람들이다. ('랜드 앤 프리덤'에서 민병대를 살해하고 무장해제하던, 제복을 차려입은 그 '정예부대'는 다 어디에 갔단 말인가?)

 

(여기서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 내 블로그의 제목인 '겨울철쭉'은 '녹슬은 해방구'라는 노래의 한 구절이다. 아마도 1953~4년 겨울의 빨치산의 상황일 텐데, 혁명이 후퇴하고, 전투가 패배한 후, 그러나 여전히 투쟁하는 비극적인 상황. 이 영화의 민병대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비극일 수 있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체가 자기 스스로에게 떳떳하며, 숭고하기 때문이다.)

 

영화 첫장면, 해설이 끝나고 첫대사.

"대체 저 많은 책을 어쩔 셈이니! 오필리아"

오호! 이건  내가 책을 또 살 때마다 주변에서 나에게 하는 낯익은 잔소리다. 어쩌긴요, 하나하나 가장 소중한데다가, 언젠간 다 읽을 거랍니다. 그 속에서 모험이 시작되죠. 일단 오필리아, 나와 공감.

 

오필리아는 책에 나온 요정 이야기를 믿는다. 그래서 요정을 만나고, 미로 속에서 판Fauno을 만난다.(판Fauno는 마치 POUM같은 어감이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은 책의 이야기도 요정 이야기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렇다. 산속 반군들은 노동자, 인민이 평등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책에 나온 것을 보고 믿었는지는 확실치 않더라도, 그들은 산속에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반군과 함께하는 하녀 메르세테츠는 유일하게 오필리아를 믿어주는 사람이다. 그/녀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에는 전선이 그어져있다. 여기서 짧지만 빛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 구절을 다시 생각해보자.

 

..오히려 그들이 그들 자신의 가상의 요구들에 부응하여 행동하고 그 결과들을 도출해내려고 집단적으로 시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여 반역하는 것이다.

- 발리바르, '비동시대성: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中


그/녀들은 모두 그것이 이데올로기이든, 판타지이든 자신의 '가상'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현실에 반역하는 동지들이 된다.

'오필리아'는 '햄릿'에 나오는 이름이기도 하다.(아마 감독이 그 비교를 염두에 두었겠지만 말이다.) '햄릿'을 읽으면서 세익스피어가 오필리아를 너무나 수동적인 인물로 그렸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자면)  '햄릿'에서 그녀는 수동적이기 때문에 슬픈 정념을 상징한다.

 

이 영화에서도 오필리아는 슬픈 조건에 처하고, 우리에게 슬픈 감정을 불러오지만 그것은 '햄릿'에서의 오필리아와는 다르다. 오필리아는 이번에는 지극히 능동적이고, 자신의 죽음-희생도 스스로 선택한다. 따라서 그녀의 행동은 단지 슬픈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기쁜 정념'. 판타지와 현실 사이(사실 그 구분이 뭐 필요할까 싶지만)에서 슬프지만 기쁜, 기쁘지만 슬픈. 그래서 오필리아는 한편에서는 죽지만, 지하세계의 공주로 찬란하게 부활한다.

 

그래서 오필리아가 돌아가는 곳은 영화의 처음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빛의 세계. 지하에서 그곳의 아버지는 말한다.

"일어나거라, 내딸아. 어서 오너라.
너는 다른자의 순결한 피를 희생하지 않고 너 자신의 피를 흘렸구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마지막 과제란다"

이 시를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전략)

세상의 가장 밑바닥에서

세상의 미래를 가장 먼저 이룩한다

그렇다 생애는 추락보다 멀고 깊다

그렇다 패배를 죽음에 비유한 것은 옳지 않았다

무엇이 또 다시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씨앗이 아니다 일어서는 것은

이미 이룩된 것이다, 일어서라

이룩된 것이 보다 찬란하게 일어선다"

- 김정환, '에필로그' 『하나의 二人舞와 세 개의 一人舞』(1993)

소련의 몰락으로 한 시대가 최종적으로 패배한 (것으로 생각된) 후 쓰여진 시에서 우리는 유사한 비극적 감성을 느낀다.

 

그녀는 운명 앞에서 자신에게 끝까지 당당하기 때문에 이것은 숭고한 비극이다. 마치, 최종적인 패배를 예상하면서도 투쟁을 계속하는 반군들처럼 말이다.

 

오필리아는 그래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그리스 비극은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숭고한 정신을 형상화한다.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오필리아와 반군들에게도, 그리고 1953년 겨울의 빨치산과 80년 광주도청의 시민군에도 적용될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20세기의 패배 이후에도 투쟁하는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언젠가.)

 

오로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만이 죽음의 운명을 통해 도리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죽음보다 더 큰 정신의 크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146쪽)

..여기서 고귀함이란 자기의 탁월함을 실현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죽음의 시험 앞에 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80년 광주의 전사들처럼, 삶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선과 악이 싸우는 싸움터요, 때때로 그 싸움은 우리에게 의로움과 목숨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를 요구할 만큼 치열할 때가 있습니다. 트로이 성 앞에서 아킬레우스는 생존을 버리고 덕을 선택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운명보다 더 크고 강한 정신의 힘을 보였습니다. 80년 광주도청을 마지막으로 지켰던 사람들도 그랬겠지요.(151쪽)

-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한길사 中 

 

그래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영화. '랜드 앤 프리덤'과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개의 열쇠' , 둘 모두 그렇다. 현실과 영화 세계의 진정한 비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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