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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이야기 3-'시댁'가는 길

처가집에서 이틀을 보내고

'시댁'으로 출발했습니다.

 

천만 명 사이에 끼어서

셋이 잘 왔다갔다 할려면

 

무엇보다도

각오가 단단해야 했습니다.

 

결혼 하기 전 추석엔

서울에서 전북 김제까지

온갖 별스러운 방법으로 내려가곤 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외버스 10대 갈아타고 내려가기는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 중심으로

시외버스를 계속 갈아타고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동네가 나왔었습니다.

 

여행하는 셈 치고

슬슬 내려가면 됐었습니다.

 

근데 미루를 이렇게 데려가는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기차타고 내려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몇 달 전에 새벽부터 부지런 떨어서

기차표를 구했었습니다.

 

미루는 태어난지 150일도 안돼서

그 매우 빠른 기차, KTX를 타게 되었습니다.

 

아기띠로 미루를 메고

한 손엔 2박 3일 생활용품이 가득한 여행용 트렁크를 끌고

다른 한 손엔 이것 저것 넣은 빨간 가방을 들고

또 한 손엔 그러고도 넣을 게 더 있어서 가방을 하나 더 들고

마지막 한 손엔 선물 보따리를 들고

 

용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상구, 내가 먹을 거 사올께..여기서 기다려..."

"응"

"이 짐들은 일단 다 들고 있을래?"

"알았어...후딱 갔다와.."

 

손 네개에 들었던 짐이

저한테 다 모였습니다.

 

주선생님은

가게를 찾아서, 군중 사이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미루가 울까봐

몸에 미세하게 바이브레이션을 주고

 

두 개 밖에 없는 손을

어떻게 잘 써서

짐 네개를 다 들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한 젊은 남자가

껌을 씹고 서 있었습니다.

인상이 참 안 좋은 남자였습니다.

 

부러웠습니다.

그 남자는 짐이 하나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제 앞에서

제 옆에서, 혹은 저를 스치면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합니다.

 

갑자기 슬퍼집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어디로든 튈 수 있는 자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니 맘대로 가봐라"라고 해도

짐도 많고 애까지 딸려 있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상구~도너츠 사왔어..어서 가자.."

"어? 왔네...그래..가자"

 

KTX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고맙게도 고통이 우리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루가 보채서

두 사람이 한 시간씩 안고 있었습니다.

 

꼭 이럴 때 똥을 있는대로 싸서

냄새에 둘러싸인 미루를 안고

3번 칸에서 8번 칸까지 뛰다시피 갔습니다.

8번칸은 기저귀 교환대가 있는 칸입니다.

 

명절엔 KTX에도 입석이 있어서

8번칸 까지 사람들을 헤치고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배도 고파했는데

모유수유실은 그 긴 KTX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싸는 건 되도 먹는 건 안된다는 건지

아니면 아무데서나 내놓고 먹이라는 건지

어쨌든 모유수유실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탄 칸에만 해도

젖먹을 만한 아이가 셋이 있었습니다.

 

"야...젖 안 멕였냐? 오자 마자 젖부터 멕이네.."

"네.."

"젖 먹이는 데 없대?"

"그런 게 있으면 복지국가게요..."

 

하여튼, 젖먹는 아이들의

'자유로운 식사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엄마들이 주고객인 백화점 말고,

아무데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엄마들은 서점에 가서 책을 볼 수도 없고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수도 없습니다.

 

천 몇백만이 본 영화를 아직 안 본 사람이 있다면

그 중 상당수는 '산모'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시댁'으로 내려가는 길은

처음부터 험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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