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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다. <불멸의 이순신>...

말도 많고 탈도 많던 KBS의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지난주 마침내 1년간의 장정을 마치고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참 비판도 많았다. 처음 원균명장론을 들고 나와서 사람 황당하게 만들더니, 이후로는 역사무시 고증무시 개연성무시의 삼무시주의로 보는 이로 하여금 도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한 때 나 또한 공식홈페이지에서 꽤나 비판도 하고 했었다. 나중에야 귀찮고 짜증나서 다 때려치기는 했지만.

비판이 있으면 그 비판에 대한 반론도 당연히 있는 법이라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비판 논리 또한 물론 없지는 않다. 그런데 이 비판에 내한 반론이라는 게 참 궁색하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 "드라마는 드라마로서만 보라."는 것. 그것이 <불멸의 이순신>에서 내내 보여 왔던 역사와 고증, 개연성상의 문제에 대한 비판에 대한 거의 유일한 반론의 논리다. 아주 애처롭게도.

애처롭다. 진짜 애처롭다. "드라마일 뿐"이라? "허구로서 보아" 달라? 역사드라마다. 그것도 대하역사드라마다. 역사드라마란 무엇인가?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역사를 주제로 한 드라마다. 드라마이면서 역사다. 역사이면서 드라마다. 그래서 역사드라마다. 물론 드라마라는 부분이 더 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라고 하는 부분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역사라는 것을 부정하고 "드라마로만" 볼 수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역사드라마가 아닌 판타지가 되어 버릴 테니까.

물론 드라마인 이상 허구를 배제할 수는 없다. 작가와 제작진의 제작의도에 따라 어느정도 창의력이 개입될 여지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역사적인 사건 혹은 인물에 대한 엄격하고 냉정한 깊이 있는 분석과 치밀한 고증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그에 대한 고증이야 어찌되었든 좋은, 아무래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의 내면을 제대로 재구성해냈다고 하는데,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은 12척의 조선 수군 함대가 뒤로 물러나 있는 사이, 대장선 한 척만 이끌고 133척의 적선과 홀로 맞서 싸웠었다. 철쇄설의 근거가 되는 행장의 주인공인 김억추가 한참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동안, 겁먹은 조선수군의 앞에서 홀로 적선에 둘러싸여가며 싸움을 독려했다. <불멸의 이순신>에 그러한 이순신의 모습이 있는가? 오로지 홀로 배 한 척으로 적과 맞서는 고독하고 치열한 용기가 <불멸의 이순신>에 있던가?

칼을 비껴 들고 적선으로 뛰어 올라가 적장과 칼을 맞대는 것도 그렇다. 조선 수군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함대의 지휘관이다. 고작 12척. 임진년에서 정유년까지 그를 도와 함께 싸워 왔던 이억기도 원균도 없다. 오로지 그 하나다. 그 상황에서 조선수군을 이끌 지휘관은 이순신 단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이가 칼 한 자루를 들고 적선으로 뛰어 올라가 적장과 칼을 맞대고 싸운다? 그것도 단병접전을 피하기 위해 개발한 판옥선을 이끌고? 그렇게 무모한 인간이었나? 이순신이?

"내 저들을 베고 도성을 치리라."라는 대사도 그렇다. 이순신을 박정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이순신을 전두환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인가? 시원했을 것이다. 통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이라는 인간이 과연 그러한 말을 했을 인간이던가? 난중일기에서,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징비록에서, 온갖 역사상의 기록에서 등장하는 이순신이라는 인간이 과연 그러한 말을 했을 정도로 경솔하고 경우 없는 인간이었던가?

자살설도 그렇다. 아직 전투가 치열한 와중이다. 더구나 노량해전은 철저하게 조명연합수군에 불리한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사천에서 구원하려 오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함대와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함대 사이에 끼인 채 양면으로 적을 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하고 위험한 전투에서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는데 지휘관이 죽자고 작정한 듯 갑옷을 벗고 함대의 앞으로 나아가 지휘를 한다? 이순신이 그렇게 무책임한 지휘관이었던가?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그려내겠다고 하면서 정작 드라마 어디에도 역사에 실존했던 "인간 이순신"은 없다. 당연하다. 역사가 우리에게 인간 이순신을 보여주는 방법은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이순신의 대응을 통해서다. 133척의 적선을 맞아 아군이 뒤로 물러서는 상황에서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켜 싸우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 고독한 용기와 치열한 의기를 읽는다.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파직되어 온갖 고문을 겪다가, 모친의 임종조차 보지 못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된 상황에서도 수군통제사로서 자신의 맡은 바 본분을 다 하는 모습에서 그 올곧음과 그 강인함을 읽는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러한 역사상의 이순신을 작가와 제작진이 자의적으로 재구성한 사건들을 통해 엉떵한 모습으로 바꾸어 버린다.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그려낸다면서 정작 실재했던 이순신이 아닌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나약한 인간 이순신"을 그려내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을 비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 이순신의 모습을 그려내려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믿고 싶어하는 이순신을 역사상의 이순신인 양 드라마라는 수단을 통해 꾸며내려 했기 때문이다.

<해신>의 장보고처럼 아예 역사기록 자체가 부실한 경우라면 어쩔 수 없다.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장보고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려면 역사기록 이상의 창작이 없어서는 안 될 테니까. 그러나 이순신은 다르다. 이순신에 대한 사료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드라마로 제작하는 데 있어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다고 할 정도다. 그런데 그런 사료를 모조리 무시해 버리고 그들 멋대로 역사를 조작해내고 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런 주제에 이순신에 대한 일반의 숭배에 가까운 존경심에 영합하기 위해 조선의 조정을 보다 더 악질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다. 역사의 기록 어디에도 없는 이순신을 죽이기 위해 담합하는 조정이라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창작해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침략자인 일본군보다 조선의 조정을 더 증오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조선의 조정을 위해서 싸웠던 이순신을 위해 "조선따위 망해버리는 게 당연하다."라는 말을 하게 만들어 버렸다.

어떻게 된 게 침략한 쪽은 일본이고 침략당한 쪽은 조선인데, 사람들은 조선을 더 증오하고 혐오한다. 이순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조선이고, 조선의 조정이고, 조선의 왕실이었을 것인데, 오히려 이순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을 모욕함으로써 덩달아 이순신까지 모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모른다. 이순신과 조선을 철저히 분리해서 사고하고 있으니까. 그 또한 드라마가 의도한 바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면사첩이라니. 면사첩이라니. 그 면사첩이라는 건 한 마디로 찌라시 같은 거다. 이거 갖고 있으면 왜군에 부역했다 하더라도 죽이지 않는다는 일종의 면죄부 같은 거다. 대상은 당연히 일본에 협력하거나 일본에 의해 동원되어 부역했던 일반 백성이다. 그런데 그 면사첩을 이순신에게 전해줌으로써 드라마는 철저히 이순신과 조선 조정을 분리해 버린다. 당연히 이순신을 위해 이순신이 지키고자 했던 나라를 경멸하게 되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좋은 역사 드라마는 역사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여러가지 생각과 가능성을 보여준다. 역사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만들고, 역사를 보다 디테일하게 보게 만들며, 역사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역사로부터 유리된 오로지 허구로서의 드라마가 아니라, 역사를 소재와 주제로 삼은 드라마로서,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보여주려 한다. 그래서 역사드라마다.

그런데 <불멸의 이순신>에는 그것이 없다. 그래서 오죽하면 그 비판에 대한 반론이라는 것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불멸의 이순신>이 역사드라마라고 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역사 드라마가 역사적 고증을 포기한다는 것은 역사를 보여주기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역사를 소재로 삼고 역사를 주제로 삼는 역사 드라마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것을 어찌 역사드라마라 할 수 있을까? 그냥 드라마로서 역사적인 요소를 조금 삽입한 정도에 불과한 정도다.

그래서 불쌍하다는 거다. 역사드라마. 그것도 대하역사드라마로서 만들어진 드라마가 스스로 "역사성"을 거세한다는 것이. <불멸의 이순신>을 좋아하기에 오히려 역사드라마로서의 "역사성"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불쌍하고 또 불쌍하다는 거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역사드라마라 하지나 말지. <다모>처럼 퓨전사극을 지향했다면 누구도 역사적 고증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걸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말이다. 역사드라마로 만들어 놓고서 역사성을 배제해 버렸으니 결국은 이렇게 역사드라마도, 역사드라마가 아니지도 않은 드라마가 되어 버렸지 않은가?

역사드라마라고 만들었다. 그런데 그 역사적 고증의 문제로 비판자들은 그 역사성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비판자들로부터 드라마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역사성을 배제한 드라마를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비판을 반박한다. 그래서 대하역사드라마인 <불멸의 이순신>은 비판자와 옹호자 양쪽에 의해서 역사드라마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작가와 제작진만이 역사드라마임을 꾸준히 주장하고 있을 뿐. 이보다 불쌍한 드라마가 어디 있을까? 불쌍해서 눈물이 다 난다. 찔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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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정리를 해야겠다...

쓸데없이 많기만 한 폴더를 하나나 두 개로 줄여야겠다. 쓰는 분야도 하나로 통일하고.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쓸까? 원래 여기 블로그를 만든 목적이 그것이었으니 그쪽으로 나가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다른 건 포기해야지. 드라마든 영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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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바퀴벌레...

그동안 내 방의 주인은 바퀴벌레였다. 내가 끔찍이도 바퀴벌레를 싫어하는 바람에, 바퀴벌레를 잡기는 커녕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해하는 탓에, 바퀴벌레는 그야말로 무소불위 절대의 권력자로서 내 방의 모든 것을 지배했었다. 심지어 방주인인 나조차도 바퀴벌레가 행차하면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을 정도로.

 

그런데 고양이가 들어오고 나서 그 서열이 바뀌었다. 이를테면 바퀴벌레의 수난시대라고나 할까? 벌써 항상 눈에 보이던 손가락 세개 굵기의 바퀴벌레들이 이제 한 마리 겨우 남아 있다. 나머지는 방바닥 어딘가에, 그리고 싱크대 주위 어딘가에 개미가 들끓는 것을 흔적으로 발견했다. 그 주범은? 다름아닌 고양이다.

 

고양이가 바퀴벌레 사냥을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략 보름 전쯤. 그 전에는 너무 어려서인지, 아니면 집에 적응이 덜 되어서인지 바퀴벌레를 잡는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언제부터인지 휘리릭 날아다니며 바퀴벌레며 파리며 낼름낼름 잡아서 먹는다.

 

녀석들이 방안에서 사냥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날아가던 파리를 앞발로 때려 떨어뜨린 뒤 그걸 낼름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날 바퀴벌레 한 마리를 잡아 물고 방안을 누비는 그야말로 살떨리는 경험을 했다. 고양이 입에 물린 채 꿈틀거리는 바퀴벌레 뒷다리라니.(우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린다.

 

그 이후 내 방은 고양이의 사냥터가 되었다. 때로는 파리도 잡아먹고, 때로는 모기도 잡아먹고, 가끔 길잃은 잠자리가 날아 들어오면 그것도 먹는다. 귀뚜라미는 고양이밥과 더불어 양대 주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 먹는 지, 아니면 잡아서 어디다 갖다 버리는 지 알 수 없는, 후자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퀴벌레다.

 

덕분에 이제 내 방의 서열은 완전 바뀌었다. 서열 1위는 역시 고양이. 이놈들 자리에 누우면 나는 피해서 앉아야 한다.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으면 키보드 들고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가끔 바퀴벌레라도 입에 물고 들어오면 나는 아예 방을 나선다. 그러면 방은 온전히 고양이의 차지가 되어 버린다.

 

서열 2위는 고양이에게 서열 1위의 자리를 빼앗긴 바퀴벌레. 아직도 나는 바퀴벌레가 보이면 일단 도망부터 치고 본다. 물론 바퀴벌레는 모습을 보이자 마자 고양이 두 마리의 추격에 온몸이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되어 죽거나 혹은 잡히거나 도망친다. 도망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개는 잡혀 장난감 신세가 된다. 불쌍한 서열 2위라고나 할까?

 

마지막 서열 3위는 당연하게도 나다. 고양이 배고프면 밥 차려주고, 오줌 똥 싸면 오줌 똥 다 치워주고, 심심하면 놀아주고, 잘 때는 옆에서 난로역할 해주는 고양이의 종, 고양이의 노예, 바퀴벌레의 압제로부터 해방해주는 댓가로 고양이에게 절대복종을 맹세한 바로 나다. 덕분에 여전히 바퀴벌레에게 쫓기면서도 요즘은 비교적 맘 편하게 지내고 있다. 아아. 바퀴벌레가 한 마리밖에 보이지 않는 쾌적한 한경이라니.

 

하여튼 걷는 모습에서도 서열의 표가 확연히 드러난다. 고양이 놈들은 항상 자세를 꼿꼿이 세우고, 꼬리마저 치켜들고 걸어다닌다. 나는 주머니가 빈 티를 팍팍 내며 어깨를 구부정하니 숙이고 다니고. 바퀴벌레는? 여전히 빨빨거리며 잘도 쏘다닌다. 누가 보더라도 이 방의 실세가 누구인지 확연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오죽하면 고양이가 내 이불에 오줌을 싸도 한 대 때리지 못했겠는가? 고양이가 똥을 싸는 바람에 가방을 빨아야 했음에도 웃으며 넘어갔겠는가? 밥을 주지 않는다고 얼굴을 핥으며 맛을 볼 때는 발발 떨면서 재빨리 고양이밥을 차려 앞에다 대령했겠는가? 고양이가 내 애완동물인 게 아니라 내가 고양이의 애완동물이 된 기분이다.

 

하긴 이런 맛에 고양이를 기르기는 한다. 말 잘 듣는 고양이면 고양이가 아니다. 고양이는 항상 주인 알기를 애완동물 알 듯 해야 한다. 항상 자기가 방 주인인 줄 알고 있어야 하며, 그래서 오만과 건방이 털 오라기 하나하나마다 뚝뚝 떨어져야 한다. 그래야 고양이다. 그래야 고양이를 기르는 맛이 있는 것이고.

 

어쨌거나 예전에는 쥐를 잡으려 고양이를 길렀는데, 이제는 바퀴벌레 잡이용으로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다. 쥐를 보기가 그만큼 힘들어진 때문일까? 아니면 바퀴벌레 보기가 쥐를 보기 만큼이나 흔해졌기 때문일까? 예나 지금이나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이 일생에 도움이 되는 동물이 고양이다. 그러니 충성을 맹세하지.

 

지크 고양이! 지크 쭈그리! 지크 꼬맹이! 우야뜬둥 고양이 만세! 반자이! 비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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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닭고기를 나누어 먹다...

고양이 사료를 사러 동물병원에 갔더니 협박을 한다. 고양이에게 사료 이외의 것을 먹이면 안 좋다고. 인터넷을 뒤졌더니 마찬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고양이에게는 사료만 먹이라고. 그래서 지금껏 쭈그리와 꼬맹이 녀석들에게 사료만 먹였다. 어찌되었거나 그게 더 좋다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게 사료만 먹이고 있으려니 꼭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를 기르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고양이를 기를 때는 기른다기보다는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이 강했다. 먹는 것을 같이 먹었기 때문이다. 생선을 먹으면 생선을 나눠먹었고, 고기를 먹으면 고기를 나눠먹었다. 하다못해 된장국을 먹어도 된장국 안에 들어 있는 멸치는 고양이 차지였다. 그래서 밥상에서는 전쟁이 벌어진다. 뭐라도 하나 얻어먹으려는 고양이와 그것을 막으려는 어머니의.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시장에 갔다 오실 때마다 먹지도 않는 생선대가리와 내장들을 억지로 챙겨오셨다. 고양이를 먹이기 위해서였다. 가족의 밥을 차릴 때면 부엌 한 구석에서는 생선대가리와 내장이 밥알과 함께 익어가는 비린내가 진동하곤 했고, 그 냄새에 이끌린 고양이와 어머니의 싸움이 또 시작되었었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을 때 어머니는 애써 종이박스를 구해 산실을 따로 만들어 주고, 미역국을 끓여주셨다. 나나 동생도 먹지 못하는 우유를 뼈에 좋다고 사다 주시고는, 그래도 애 낳았는데 미역국은 먹어야 한다며 닭고기를 찢어 넣은 미역국을 끓여 고양이에게 먹이셨다. 어머니도 고양이를 마치 한가족처럼 여기셨던 것이다.

 

하기야 사람이 먹는 것 가운데 사람 몸에 좋은 게 몇 가지나 되겠는가? 나처럼 먹는 대부분을 밖에서 사들고 와서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면야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튀김닭에 쓰인 기름이나 양념들은 사람에게도 안 좋은 것들이다. 하물며 고양이에게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어제 닭을 먹으면서도 고양이를 쫓기 위해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으려니 꼭 고양이와 내가 남인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먹을 것을 달라고 외치는 파리 시민들에게 "빵 없으면 케잌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어떤 바람난 유부녀의 말이 생각난다. 먹는 것과 먹고자 하는 것과 그것을 가로막는 어떠한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해 고양이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 어제 남은 닭을 데워 먹으며 일부를 떼어 고양이에게 주었다. 그랬더니 내 발 밑에서 잘도 먹는다.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앞발로 눌러가며, 먹던 것을 빼앗아 도망도 다니며 아주 잘도 먹는다. 먹는 것이 보기 좋아 닭을 조금 더 떼어 주니 더 좋아한다. 같이 먹는다는 기분. 무언가를 나누어 같이 먹는 다는 그 느낌. 그러고 있으니 마치 고양이가 가족이 된 것만 같다.

 

앞으로도 고양이에게 사료 이외의 것을 먹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를 좋아하기에 고양이에게 안 좋다고 하는 것을 굳이 먹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 고양이가 탈이라도 나게 된다면 무척이나 슬프고 아플 것이기에 가족이라는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여전히 사료로만 고양이를 먹일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런 딱딱한 이야기따위 모두 무시해 버린 채 먹던 것을 나누어 먹으며 가족이라는 느낌을 확인해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먹는 것을 고양이도 먹고, 고양이가 먹는 것을 나도 먹는다는 예전 고양이를 기르면서 느꼈던 일체감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을 것이다. 조마조마. 무슨 탈이라도 날까 가슴을 조이면서도.

 

어쨌거나 걱정과는 달리 참 잘도 먹는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닭고기이건만 자기들끼리 잘도 먹어댄다. 저렇게 잘 먹고 있는 것을 보니 그동안 먹여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그렇다고 사료 대신 다른 것을 먹이기엔 내가 또 너무 소심하고. 주인을 잘못 만난 탓이다. 불쌍한 것들. 언제고 생선을 먹을 일 있으면 또 먹으라 나눠주어야지. 그 정도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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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니며, 믿고 싶지 않은 것은 존재하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뭇가지 하나가 서 있어도 그것은 귀신이 되고, 칼이 되고, 군대가 되기도 한다. 그저 둥실 떠다닐 뿐인 구름이 양떼가 되기도 하고, 사람의 얼굴이 되기도 하며, 솜사탕이 되기도 한다. 그림이 실제 풍경을 보듯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풍경이 그림을 보듯 아름답다.

그래서 사람의 기억이란 믿을 게 못된다. 사람의 판단 또한 믿을 게 못 된다. 아마 세상에 못 믿을 게 사람이 보고 듣고 믿는 것일 게다. 그럼에도 결국 사람이 믿을 것도 사람이 보고 듣고 믿고 있는 것일 테니 이보다 난감한 일이 또 없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 믿어야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것. 믿어야 할 것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지 않는다는 모든 것이 사람이 갖는 번뇌와 혼란과 갈등의 원인이다. 결국 현명하다 하는 것은 이러한 가운데서 바른 길을 찾는다는 의미일 것이고.

지혜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이 알고 그것을 멋지게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것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지 않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그 단순하고 솔직한 본질이야 말로 지혜롭다고 하는 것일 게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현은 대둔과 통한다 하던가? 하긴 쉬운 것을 쉽게 하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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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기르기에 대한 잡상...

어렸을 적, 그러니까 아직 중학교 다니던 무렵에 집에서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운 적이 있었다. 이름은 그냥 평범한 야옹이. 암컷이라 나중에 새끼를 낳으면서부터는 에미가 되었다. 검은색이라 동생들은 네로라 이름짓기를 졸라댔지만 어쩐 일인지 야옹이였고 에미인 채로 자랐고 새끼를 낳고 그리고 죽었다. 모두 세 배, 15마리의 새끼를 낳았으니 고작 3년의 인연치고는 꽤 많은 것을 남기고 간 셈이다.

그때 처음 에미를 기르던 때 사실 고양이를 기른다고 하는 자각은 그리 크게 없었다. 집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고, 고양이 밥그릇이 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고양이 집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고양이를 위한 다른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래도 고양이라고 사람도 자주 먹지 못하는 생선 대신 멸치를 넣어 국을 끓여주는 정도였다. 똥이야 그냥 알아서 돌아다니다 아무데나 싸고 돌아오면 그만이고.

그런데 이제 다시 고양이를 키우려니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는 것이 너무도 크게 현실로 와닿는다. 그냥 사람 먹는 것을 먹이면 안 된단다. 먹다 남긴 밥이라든가, 술안주로 사다 놓은 오징어포라든가, 예전에 에미를 기를 때는 오히려 별식으로 주던 것들이 자칫 고양이가 탈이 날 수 있어 피해야 할 것들이 되었다. 물도 수돗물은 고양이에게 안 좋으니까 생수를 먹이라 하고. 그래서 한 봉지에 8천원이나 하는 고양이먹이를 사다 먹이고 물도 따로 사서 먹이고 있다.

먹이는 것도 큰 일이지만 함부로 밖에 내보낼 수도 없어 방안에서 똥오줌을 받아야 하니 화장실 꾸미는 것도 일이다. 사실 이번에야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고서 화장실용 모래를 따로 팔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심지어 어떤 것들은 사람이 쓰는 변기에서도 녹도록 사람도 없어서 못 먹는 옥수수나 쌀을 사용해서 만든 것들이란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아마도 집에서 기르는 잡종고양이 두 마리 모두를 합해봐야 화장실용 모래 한 봉지 값도 안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모래를 쓰자니 모래를 구하기도 애매한 것이 옛날에야 학교 운동장에서 퍼 오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허용되는 시대가 아니다. 그나마 공짜로 뿌려지는 무가지를 가져다 화장실에 두텁게 깔아 모래를 대신하지 않았다면 모래 값으로만 수억 깨졌을 것이다. 워낙 똥을 많이 싸야지.

참 어렵다.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이. 뭐 그리 안 되는 게 많고, 뭐 그리 해야 하는 게 많고, 뭐 그리 돈 들어가는 게 많은지. 가족처럼 밥 먹이고 같이 뒹굴면 그만이던 그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솔직히 지금도 예전처럼 남은 밥 먹이고, 오징어포 같이 나눠먹던 그때 방식대로 기르고 싶다. 가끔 멸치대가리 가지고 장난도 치고, 생선가게에서 생선대가리며 내장 얻어다가 고양이밥 만들어 주고도 싶다. 하지만 아는게 병이라던가? 우유조차도 고양이는 일반우유를 소화시키지 못한다는 말에 먹이기 꺼려진다. 고양이를 기른다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렵고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일까?

하긴 대개의 일이 그렇다. 처음에는 단순하다. 일상처럼 단순하고 당연하게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하나의 체계가 되고 원리가 되고 규칙이 되어 사람을 구속하게 된다. 밥 나눠먹으며 기르던 개나 고양이도 개나 고양이를 위한 어떠한 특별한 것을 제공해야 하고, 일상에서 쓰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말이어야 할 언어는 문법과 맞춤법과 어휘 속에서 구속되고 강제된다. 그러면서 먼저 체계와 원리와 규칙을 지배한 자들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게 되고.

아마도 이런 것이 지식의 속성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사람을 구속하고 강제함으로써 소수의 특정인들을 위한 이익을 구하는 것. 역사상 나타났던 모든 형태의 지식이 추구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다. 겉포장이야 보다 많은 다수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그 지식을 먼저 선점한, 혹은 그 지식이 지향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던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 농간에 현혹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소시민일 뿐이고.

참 돈도 많이 들어가고, 손도 많이 간다. 예전 생각하고 고양이 덜컥 맡았다가 꽤나 고생이 심하다. 그래도 뭐 귀여우니까 모든 것이 용서가 된다. 하긴 그 비싼 고양이밥이며 고양이모래며 만들어 팔 수 있는 것도 그 귀여움 때문일 것이다. 때로 자고 있는 데 배 위에 올라와 웅크리고 자는 뜨거운 체온을 느낄 때면 당장 고양이쇼핑몰에 가서 이것저것 다 사다주고 싶어지니까. 그래서 고양이를 요물이라 하는 것일게다. 역시 여자는 예쁘면 장땡이고 고양이는 귀여우면 광땡인 모양이다. 아유 귀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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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커피에 빠지다!

커피를 타놓고 글을 쓰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워낙에 커피를 물 마시듯 마셔대다 보니 이제는 커피를 마셔도 잠을 쫓는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습관처럼 커피를 타고 습관처럼 커피를 타 놓은 채 잠이 든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자다가 일어나면 목이 마르다. 그래서 일어나면 가장 먼저 마실 것을 찾게 된다. 그럴 때 자기전에 타놓은 커피는 자리끼 대신이 된다. 일단 그것도 마실 거니까. 그날도 잠결에 목이 말라 아직 불도 켜지 않은 상태에서 손에 닿는 곳에 놓아둔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없는 습관과도 같은 일상의 행동이었다.

그런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향긋한 커피 내음과 함께 무언가 구릿한 냄새가 난다. 아주 익숙한 냄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디선가 많이 맡아본 냄새다. 그 냄새는 커피향이 풍기는 바로 그 컵 안에서 나고 있었다.

두근.
두근.

알 수 없는 불안에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무언가 있다. 이 안에 무언가 있다. 차마 보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지금 이 컵 안에 있다. 입안에는 커피를 머금은 채다. 채 삼키지도 못하고 입안에 머금은 채다.

달깍--!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형광등 불을 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그컵 안으로 눈을 보냈다. 혹시나. 혹시나. 불안을 억누르며 띄엄띄엄 컵 안의 거뭇한 커피로 눈을 보냈다. 그리고 순간!

"우웩--!"

이불을 빨아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입안에 있던 커피를 다 토해내 버렸으니.

검은색 커피 위에 둥둥 떠 있는 바퀴벌레라니. 그것도 거의 500원짜리 동전만한 큰 놈이었다. 배까지 뒤집고 커피에 잠겨 있는 모습이 가히 감동적이었다. 내가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것 가운데 하나가 뒤집혀진 바퀴인데 하필이면. 더구나 그 놈은 내가 누워있을라치면 사방 벽을 누비고 다니던 바로 그 보스급 바퀴벌레였다.

"우웨에엑--!"

이번의 것은 자기전 먹은 위 안의 것들이다. 입안에 예의 그 구린내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다시 토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기를 한참. 몇 번을 토하고 입 안에 고인 침을 방안에 뱉지도 못하고 어쩔줄 몰라하며 한참 그렇게 있다가, 결국 나는 컵 안의 것을 애써 외면한 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컵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변기 위해 컵 안의 것을 부어버렸다. 보지도 않고. 차마 보지도 못하고.

콰르르르르--!

변기 물 내려가는 소리가 왜 그리도 고맙던지.

변기에 커피를 흘려 보내고도 한참을 입안을 행구어야 했다. 입안에 남은 커피냄새가 마치 그 바퀴벌레의 살점인 양 속을 뒤집어버린 때문이다. 거의 한 시간은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닦고, 입안을 행구고, 녹차로 냄새를 지우기를 거의 한 시간을 그러고 있었다.

지금도 커피를 마시려면 그때 그 모습이 떠오른다. 검은 커피와 그 위에 둥둥 떠다니는 노란 바퀴의 배. 길다란 다리가 커피를 따라 흐느적거리는 그 모습이.

"우웩!"

그럼에도 여전히 커피를 잘 마시는 걸 보면 나도 꽤 비위가 좋은 편이다. 뭐 이제는 자고 일어나서 바로 커피부터 마시는 짓은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지만. 아니 커피를 마시면서도 컵 안을 살피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랄까?

바로 지난주 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우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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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삼국지 하면 역시 고우영 삼국지! 수호전 하면 고우영 수호전! 초한지 하면 고우영 초한지! 이두호의 임꺽정 이전에 고우영의 임꺽정이 있었고, 가루지기전은 우리의 성문학을 이어받은 섹스를 소재로 한 성인만화의 백미였다. 중국의 쿵후와 일본의 인술을 배운 일지매는 요즘 흔히 유행하는 퓨전물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성인을 뛰어넘어 청소년들에게까지 인기있던 만화였고.

성인만화만 그렸던 것도 아니다. 어린이잡지였던 소년중앙에 연재했던 <거북바위>는  세 형제가 각기 한 가지씩 기술을 배워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는 우리의 전통설화와 무협적인 요소를 조화시킨 수작이었고, 새소년에도 이해창선수의 어린시절 등 다양한 만화를 그렸었다. 흔히 성인만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소년만화도 적지 않게 그려온, 그래서 아직 어린 나이였던 내게도 친숙한 만화가가 바로 고우영 선생님이었다.

천의무봉이라. 선녀가 지은 옷은 바느질 자국이 없다고 하던가? 그야말로 무애의 경지였다. 어디 하나 걸리는 것 없는, 그대로 마음 가는대로 지어낸 인위가 배제된 자연스러운 그림과 자연스러운 연출과 자연스런 이야기들. 때로는 억지스럽고 때로는 유치한 우스개까지도 그 단순하고 엉성해 보이는 그림 속에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여백의 미라는 것이 만화에도 존재할 수 있음을 고우영 선생님을 통해 처음 알았다. 문인화의 여유와 자유로움이 만화의 컷 안에 담아질 수 있음을 고우영 선생님을 통해 처음 알았다. 내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세 분의 만화가 가운데 한 분. 그리고 내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만화가 가운데 한 분이라고 꼽는 분. 한국이라는 나라가 담아내기엔 너무나도 큰, 그래서 한국이라는 틀에 갇혀 오히려 작아졌다고 여겨지는 너무도 크고 너무도 큰 그저 크기만 한 분. 그것이 내게 있어서의 고우영 선생님이시다.

그 고우영 선생님이 오늘 돌아가셨다. 향년 63세. 천수를 누리시고 가셨다면 천수를 누리시고 가셨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나이다. 요즘 70을 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70을 넘어, 80, 90을 넘겨서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는 시절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63살. 10년은 더 살아서 그 천의무봉의 필력을 보여주실 수 있는 나이에 너무도 일찍 가셨다.

솔직히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고우영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니. 그분께서 돌아가셨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오보라며 정정보도가 나올 것 같다. 아니 돌아가신 줄 알았던 분이 다시 살아나실 것 같다. 그래서 항상 그랬던 것처럼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천하에 그 쌍을 찾을 수 없는 필력을 다시 보여주실 수 있을 것만 같다.

돌아가시다니. 그 분이 돌아가시다니. 아득하다. 그야말로 아득하다. 이제 고우영 선생님의 <삼국지><초한지><수호지><임꺽정><일지매><가루지기전>등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유작이 되는 것인가? 처음 그 작품들을 보고 문화적 충격과도 같은 감동에 휩싸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 작품들이 선생님의 유작이 되는 것인가? 그저 아득할 뿐이다. 슬프지도 않고 그저 아득하고 아득할 뿐이다.

하긴 선생님은 돌아가셨어도 쉬이 쉬지 못하실게다. 그분의 그림과 그분의 이야기와 그분의 해학을 안다면 하늘에서도 선생님을 그대로 쉬도록 두지 못할테니까. 아마도 지금쯤 하늘 어디에서 새로이 작품을 준비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하늘 저 위 이승을 벗어난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람들이 웃고 울고 감동받을 수 있는 작품을 그리느라 다시 책상 앞에 앉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실게다.

그래서 명복은 빌지 않는다. 저 위에서 영원토록 그 재미있는 만화들을 계속 그려주시기를 바랄 뿐. 언제고 그 작품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분은 고우영선생님이시니까. 나 스스로가 인정하는 가장 존경하는 작가 고우영 선생님이니까. 선생님 그곳에서라도 재미있는 만화 많이, 많이, 그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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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꿋꿋해라!!

사람들이 별로 잘 보지도 않는 일본 드라마. 그것도 일본에서조차 별 인기가 없는 대하역사드라마. 더구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겐페이 합전 당시의 영웅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 <요시츠네>다. 써봐야 솔직히 뭔 소리 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그런 드라마. 그런데 꿋꿋하게도 매회 감상문을 써대고 있다. 그것도 무쟈게 길게.

 

확실히 작년 <신센구미>에 대해 쓸 때와는 반응이 확연히 구분된다. 최소한 <신센구미>는 리플이라도 있었다. 뭐 어떻게 생각하느니, 여기서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느니 하는. 그런데 <요시츠네>에 대해서만큼은 반응이 없다. 사실 읽는 사람도 거의 없고. 그야말로 꿋꿋함. 읽는 사람 없어도 나는 쓴다고 하는 악과 깡의 글쓰기라 할 것이다. 

 

젠장. 이러다가는 블로그 방문자 다 끊기겠다. 빠른 시일 안에 남들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포스트를 하나 정도 세워야지. 뭘 쓰는 게 좋을까? 이것저것 쓴다고 자료조사 하다가 왠지 쓰지 않아도 배불러져서 때려친 것이 태반이라는... 음... 다카하시 신의 <최종병기 그녀>나 써볼까? 요즘 저작권 문제가 하도 시끄러워서 그림 없이 써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든 당분간은 요시츠네로 쎄운다. 방영분 따라잡을 때까지. 아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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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임계점...

나는 코미디를 잘 보지 못한다. 코미디를 보는 것이 때로 괴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본다. 그리고 그 수준을 넘어서더라도 보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다만 웃지 못할 뿐이다. 웃던 것을 웃지 못하게 되고, 무덤덤하던 것이 괴로워질 뿐이다. 즉 임계점이다.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의 한 장면이다. 사막에서 홀로 떠돌다가 우연히 사막 원주민에게 구해진 아이가, 자신을 구해준 원주민을 오해해서 돌을 던지자 그 원주민은 화를 내며 미련없이 아이에게서 등을 돌려버린다. 그 원주민의 관습에 돌을 던지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되는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아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막에 어린아이를 버려두고 떠나버린 것이다.

 

현실에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처음에는 웃고 떠들던 누군가가 어느 순간 갑자기 화를 내며 일어서는 것을. 아니 화를 내고 일어서는 것을 넘어 폭력적이 되어버리거나, 아예 친하던 사이를 단절시키는 것을. 대개는 그런 사람에 대해 주위에서는 비난을 한다. 속이 좁다고.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결코 건드려서는 안되는 금기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결코 해서는 안되는 그러한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개는 처음에는 어느정도 허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을 경우가 더 많다. 그렇게 처음에는 같이 웃으며 즐기다가, 어느 순간부터 웃지 못하게 되고 관계를 고려해 참게 되고, 그러다가 한 순간 폭발해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임계점이다. 허용할 수 있던 것을 더이상 허용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마 누구나 그러한 임계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장난을 칠 때 어느 정도 선까지는 대개는 다 참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어가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대개는 그렇다. 장난 그 자체로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장난이 내가 정해놓은 어떠한 선을 넘어서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처음엔 웃음이었던 것이 임계점을 거치면서 인내가 되고 화가 되는 것이다.

웃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웃는 것, 우는 것, 화내는 것, 미워하는 것, 기뻐하는 것, 모든 감정이 임계점을 가지고 있다. 어느 수준까지는 좀더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감정을 갖다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좀더 부정적이고 배타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어떠한 선. 물론 그 선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말하자면 역린이라고나 할까? 건드려서는 안되는. 넘어서는 결코 안되는. 그런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감정의 임계점을 타인은 물론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 대개는 모른다. 자기가 어디까지 참아내지 않아도 되고, 어디까지 참아낼 수 있으며, 어디까지 참아낼 수 없는지. 참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참아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알게 된다. 스스로든 혹은 타인이든. 그래서 싸운다. 그래서 갈등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사귀다 등을 돌린다. 그리고 등을 돌리지 않은 사람들은 깊은 친구사이가 된다.

진정한 친구라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싸우고 갈등하고 절교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금기와 감정의 임계점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사이다. 서로의 금기를 범하지 않고, 서로의 임계점을 넘어서더라도 용서해주는, 설사 참지 못하고 싸우게 되더라도 끝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사이를 진정한 친구라 한다. 처음부터 좋기만 한 사이가 아니라, 상처가 쌓여 어떠한 상처도 이겨낼 수 있는 사이를 진정한 친구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친구라 하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만의 친구는 아니다. 그 친구는 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으며, 여동생이 될 수도 있고, 선생이 될 수도 있다. 나이와 관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수 있을 때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된다. 그것이 친구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래서 친구를 갖기란 평생을 사랑할 사람을 얻기보다 더 어렵다.


어쨌든 감정의 임계점이라 하는 것은 참 미묘하면서도 사람 관계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 허용할 수 있고 없고의, 공존할 수 있고 없고의,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고 대개는 알지 못하는 사이 넘어선 그 임계점의 경계로 인해 싸우고 등돌리고 원수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 임계점을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말이다.

나 자신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감정의 임계점이 매우 낮은 선에 머물러 있다는 것. 아주 낮다. 한 마디로 되는 건 되는데, 안되는 건 처음부터 안된다고 못을 박아버린다. 못을 박지 않을 거라면 혼자 끙끙 앓다 아예 폭발해 버리거나. 대개 이런 사람들을 소심하다고 그런다. 감정의 임계점의 폭이 좁은 사람을 일컬어 흔히 소심하다 하는 것이다. 내가 코미디를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소심함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 대하는 것이 정말 서툴다. 서툴러서 서툰게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 대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어느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해 지나치게 솔직해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후회한다. 왜 그랬을까 하고. 그리고 끝. 그래서 이 나이 먹도록 사람 대하는 것이 어렵다. 아마 평생 가도 사람 대하는 것이 더 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심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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