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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뮌주의 대안 맞나

다양한 존재의 소통을 실험하라, 새 삶을 위해!
‘코뮨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강성만 기자
 
 
»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들이 재작년 경기 평택 시청 앞에서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 계획의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고 대표는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들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로 가는 유효한 방도라고 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공
 
① 독점당한 삶 벗어나야 할 때

 

‘코뮨주의’는 21세기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다. 현실 사회주의 패배 이후에도 마르크시즘을 고수하고 있는 좌파 진영 일군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이 용어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라고 옮겨 온 ‘코뮤니즘’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어 표기를 할때 ‘Commun’(공동체란 뜻)과 ‘ism’ 사이에 하이픈(-)을 끼워 넣기도 한다. 코뮨주의를 통해 새 대안 체제를 구상해온 그룹 가운데 하나인 연구공간 ‘수유+너머’ 쪽이 최근 한 권의 책을 내어 그 개념과 전략을 소상히 밝혔다. 이 논쟁을 통해 코뮨주의가 새로운 대안 체제 담론으로서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지 알아본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이 글에서 자신들이 내세우는 ‘코뮨주의’를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존재들은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국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그 보기이다. 때문에 과거와 같은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은 더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이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여는 유효한 방도라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탈국가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다른 코뮨주의자들과 차이를 보인다. 국가의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으면서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의 발명”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다. 다음 주에는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그야말로 만연한 시대다. 지난 십여년간 한국 사회의 대중들은 부와 권력의 장에서 계속 배제되고 추방되었다. 국가경쟁력, 기업경쟁력의 이름으로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정부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 나라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별 의미도 없을 정도로 권력과 자본의 지구적 폭력에 난타당하고, 마치 이국인처럼 나라 안에서 거처를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말 그대로 ‘홈리스’가 우리 사회 대중들의 보편 형상이 되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국가와 자본에 의한 추방과 배제가 노골화될수록 사람들은 그것들에 더 매달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삶의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삶의 소속과 근거를 얻기 위해 온갖 불이익과 차별을 감수한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반밖에 안 되는 임금에 고용 기간만 일정하게 보장하는 직군·직무군제도 감지덕지 받아들이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농민이나 어민은 적은 보상금이나마 더 받으려고 경쟁한다. 일자리만 늘어난다면 자연이 어찌되든 대운하라도 만들라 하고,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국가 지도자나 기업가의 부도덕성 따위는 문제도 안 된다. 삶의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와 자본의 온정에 기대를 걸게 하고, 국가와 자본의 힘은 습한 환경의 곰팡이처럼 이런 불안 속에서 급속히 증대된다.

이제야말로 다른 삶의 방향을 발명해야 할 때가 아닐까. 좋은 정부와 좋은 기업에 대한 소속을 그리워할 게 아니라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삶을 시도해야 할 때가 아닐까. 코뮨주의는 이처럼 우리 삶을 보살핀다는 환상 속에서 사실상 우리 삶을 지배하고 한정짓던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이며,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다.




코뮨주의를 제창하면서 우리는 국민이나 시민, 노동자 등의 이름으로 진행된 과거 운동의 유산, 곧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령 1987년의 ‘국민운동본부’는 오늘날 더는 작동할 수 없다. 최근 민노당의 자주파 논란에서 학계의 민주주의 논쟁까지 ‘국민’의 표상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이미 국민이 아닌 자, 시민권이 없는 자, 가령 이주노동자 같은 존재들이 들어 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지, ‘그들’이 새로운 ‘우리’임을 깨닫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대중들 삶 지배하고 불안 키워
사회운동도 자격·소속에 기반
이주민·실업자·비정규직 등 외면

 

노동 운동은 어떤가. 취업과 노조라는 자격과 소속을 기본으로 자기 이익을 확대하려는 운동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현재 민주노총이 자격과 소속이 불투명한 실업자나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에 실질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나 자본보다 먼저 대기업 노동조합들, 현장의 운동가들이 자격과 소속을 은연중에 문제삼기 때문이다. “우리도 힘든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희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단결시켰던 동일성의 표상이 이제는 거기에 속하지 못한 자들, 자격 없는 자들을 내치는 장치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동원했던 방식이 그렇게 기능하는 것이다.

이는 대표를 늘리고 소속을 늘려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정규직을 늘리고, 민주노총의 발언권을 키우고, 민노당의 국회의원을 늘리고, 시민단체의 참여를 확대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소속이나 자격, 근거의 공유 없이 서로의 자유와 해방, 삶의 행복을 위해 공통 작용을 생산해낼 수 있는 실질적인 운동의 기예이다.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이 만나는 데 인간이라는 공통 근거가 필요하지 않고, 비정규 노동자가 농민회와 접속하는 데 생산자라는 공통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의 싸움이 이동권이라는 공통의 권리를 창안해낼 수 있을지, 홈에버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홈에버에 물건을 납품하던 농민과 함께 대형마트를 극복하는 농산물 유통에 성공할 수 있을지이다. 상이한 존재들의 이러한 공통 운동은 서로의 삶에 절실한 상호협력뿐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의 정책에 맞설 힘과 방향을 제공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상을 공상적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공상적인 것은 국가의 핵심을 장악한 후 그것으로 사회 전체를 바꾸겠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구체적 이미지도 없으면서 국가를 장악한 후 그런 삶을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을 낳을 뿐이다. 대안적 삶을 꿈꾸었던 공산주의가 삶의 다양한 특이성을 상실하고 획일적 국가 독점 체제가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복지국가도 국가권력만 확대
지식·정보 등의 독점 아닌 공유 바탕
각계각층 사람들의 공통 운동으로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한 길 찾아야

 

이런 면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좌파들의 갈망에는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복지국가 모델은 국가 권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보살핌을 확대하는 것이다. 국가는 복지제공을 명목으로 삼아 사람들을 분류 관리하고 서비스를 매개로 지배력을 키운다.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삶의 의존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본적 삶에 대한 보장이지 국가권력의 확대가 아니다. 우리는 소속이나 자격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적 삶의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소통하고 협력하는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

공공성 강화는 이 점에서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코뮨주의자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공성은 진보진영에서 그동안 강조해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공공성의 강화가 국가성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는 국가 독점과 사적 독점(계급 독점)이라는 나쁜 선택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교육을 국가가 독점해야 하느냐 민간이 독점해야 하느냐 하는 나쁜 선택지를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이든 사적이든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깨고 자유롭게 소통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비국가적 공공성’인 소통과 협력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식, 정보, 에너지, 생명 자원, 그 무엇이든 함께 소통하고 생산하는 비국가적·비시장적 네트워크를 구축해가야 한다.

사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강할 때일수록 정부 역할이 중요해 보이고 안정된 일자리 창출이 중요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은 해법이라기보다는 증상이다. 그것들은 우리 삶이 얼마나 불안한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어떻게 대안적인 삶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국가나 시장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 고병권 대표
 
단지 지금처럼 그것들에 대한 의존을 높여 놓고서는 결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분명한 것은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들과 그것의 소통만이 지형을 바꿀 힘과 방향을 알려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

 


고병권 대표는 1971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코뮨주의,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가, 공저로는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습니다.

 

자본지배 ‘벗어남’ 넘어 ‘극복·대체’ 노력을
‘코뮌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 이탈리아 볼로냐 지역 코뮌 운동의 구심점인 ‘민중의 집’의 활동 모습을 만화로 보여주고 있다. 볼로냐 민중의 집 소개 책자에 실린 만화다. 이곳은 생활협동조합의 기능은 물론 문화 활동과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도 활용된다. 심광현 교수는 ‘민중의 집’이 생태적 문화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올 여름께 한국에도 ‘민중의 집’을 세울 계획이다. 심광현 교수 제공.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생태문화적 혁명이다

 

 

지난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새로운 대안 체제 모델로 ‘코뮨주의’를 정립하면서 그 특징을 개괄적으로 밝혔다. 그는 우선 ‘코뮨주의’를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라고 규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의 의미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이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여는 유효한 방도라는 시각을 보였다. 탈국가적 태도도 눈에 띈다.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으면서 소통과 협력의 삶으로 가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다.

심광현 교수의 시각은 다르다. 그는 우선 국가를 “벗어나는 것”과 “극복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적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를 위한 실천이 동반되지 않을 경우 자칫 고립된 공동체주의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존재들의 공통운동을 강조하는 것은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는 시각을 보였다. 그는 새 대안 체제는 특정 세력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국가에 예속된 삶을 극복할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는 복합적 운동을 통해 형성될 것이라고 봤다. 다음주에는 조정환 성공회대 강사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지난해 내내 20여 년 간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위한 노력이 민주주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후퇴로 귀착된 원인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논의들이 무색하게 2007년 대선에서 투표자 다수는 양극화를 초래해온 신자유주의를 아예 전면화하려는 ‘이명박 정부’를 선택했다. 대단히 위험한 ‘이열치열’ 식의 논리인 셈이다.

이에 맞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사회투자국가, 사회적 공화주의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대안들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윤율 하락으로 일부 첨단산업과 투기금융에만 투자하는 신자유주의의 장기 하강 궤도에서 성장과 분배의 끊긴 고리는 다시 연결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대다수가 성장의 떡고물이 언제 내게 떨어지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은 성장과 소비의 악순환에 중독된 탓이다.

민주주의란 본래 대중의 자기-통치를 뜻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자율·자립에 기반 한 자기-통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자기-통치의 권리를 오직 투표 때만 행사하면서 모든 책임을 자본·국가나 ‘진보개혁세력’에게 돌릴 경우 민주주의의 실종은 필연적이다. 아무리 새로운 진보정당을 구성해도 대중의 자기-통치가 부재할 경우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그동안 대의제에 넘겨줬던 정치적 자기결정력을 되찾고, 자본주의적 성장과 소비 논리에서 벗어나 호혜적 생활양식을 새롭게 꾸리고 사회적 연대를 확장해야 한다. 또 자기-조직적인 문화적 역능을 키워내어 자본·국가의 지배를 극복하고 대체할, 자기-통치적인 대중적 네트워크(“민중의 집”)를 아래로부터 새롭게 구성해가야 한다. 이 새로운 운동을 우리는 ‘코뮌주의’라고 지칭한다.(※심광현 교수는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는 달리 코뮌주의라는 용어를 썼다. 고 대표는 그가 말하는 코뮨주의의 개념은 공산주의 번역어인 ‘communism’에 하이픈을 넣은 ‘commun-ism’이라면서 ‘코뮨-주의’로 표기해야 한다는 견해다. 반면 심 교수는 주민 자치체를 뜻하는 프랑스어 commune의 우리말 표기인 ‘코뮌’을 따라 써야 한다는 견해다. 두 의견을 모두 존중해 필자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기한다.)

 

성장·소비논리에 중독된 대중들
자기 통치력 상실로 민주주의 후퇴
자기 삶의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
아래로부터의 사회연대 구성해야

 

흔한 오해와 달리 마르크스는 ‘위로부터의’ 계획은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보고, 그 ‘전제적’ 성격을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적인 계획생산에 맞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코뮌주의’)을 대치시켰고, 후자로부터 생산의 진정한 재조직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코뮈니즘’은 ‘전제적 계획’에 의한 공동생산을 강조하는 번역어 ‘공산주의(共産主義)’와는 무관하다. 코뮈니즘을 ‘코뮌주의’로 재번역하려는 것은 이런 오해를 불식하고, 자유롭고 호혜적인 “사회적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코뮌’의 새로운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에도 몇 가지 중요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고병권은 코뮌주의를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로 정의했다. 그러나 자본·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과 “이를 극복하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을 수 있다. 노장 사상이나 간디의 운동, 모르몬교 같은 전통적인 공동체 운동도 국가와 자본의 포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물론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벗어나는” 실험부터 해야 한다. 하지만 후자의 노력이 전자의 노력과 선순환 구조를 이루지 않는 한, 이는 자본·국가의 지배에 무해한 소수자들의 자족적인 유토피아적 실험에 머물 뿐이다. 마르크스가 고립된 기묘한 성을 세우는 데에 몰두하며 노동자들의 정치운동에 반대했던 오웬의 ‘홈-콜로니’나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운동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수많은 생활협동조합 운동이 그러하듯이 ‘사회적 공공성의 코뮌적 전화’를 위한 실천 없는 코뮌 운동은 고립된 공동체주의로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제도 내 사회화 투쟁에만 매몰될 경우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에 실패하고, 이념적 전위주의로 고립되거나 개혁주의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 자본·국가의 지배를 극복·대체할 대안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양자가 자기 혁신을 통해 선순환구조를 만드는 일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정규-비정규·장애-비장애 구분 없이
모든 이들의 호혜적 협동 필요
화폐적·상품적 생활양식 벗어나
생태적 문화사회에서 대안 찾아야

 

그동안의 국민운동, 민주노총 운동, 민주노동당 운동, 시민운동 등은 대의제 운동의 한계에 갇혀 있었기에 비판받을 점이 많다. 또 공공성의 강화가 단지 국가성의 강화로 귀결되지 않게 하려면 국가권력의 장악을 넘어 국가권력을 해체할 비국가적 공공성을 새롭게 발명해야 한다. 하지만 과거 운동들이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기 때문에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공통작용”을 찾아야 한다는 고병권의 주장은 원인 분석과 대안으로 적절한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비정규직·해고 노동자가, 정주노동자보다 이주노동자가, 비장애인보다 장애인이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자 대신에 후자만의 공통작용이 대안이라고 보는 것은 마치 남성보다 여성이 열악한 처지이므로 오직 여성들 간의 공통작용만이 대안이라는 기이한 주장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들뢰즈·가타리도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소수자를 고정된 형태에 한정하지 않았다.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은 “목욕물 갈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기 쉬운 관념적 도식이다. 자본과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날 뿐만이 아니라” 이를 “극복·대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은 특정 세력이 아니라 현대세계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국가에 예속된 삶을 극복할 능동적 기획자로 거듭나는 복합적 운동에 붙여진 이름인 까닭이다.

동시에 만연해 있는 화폐적·상품적·반생태적 생활양식과 문화를 비화폐적·비상품적·생태적 생활양식과 문화로 대체해가는 연속적 노력이 중요하다. 이것이 과거의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을 구별해주는 생태문화적 특성이다. 호혜적 협동 속에서 지적·감성적·인성적·신체적 역능을 극대화하면서 타자와 적극 소통하는 다양한 문화적 실험들을 대중 스스로 수행하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코뮌주의 운동을 과거의 정치혁명과는 다른 자기조직적인 문화정치적 혁명으로 발전시켜줄 핵심이다.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는” 코뮌주의는 노동을 단지 새롭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양식을 변혁하여

 
»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노동의 폐지”와 더불어 “모든 개인들을 위해 자유롭게 된 시간과 창출된 수단에 의한 각 개인들의 예술적·과학적 교양 등”을 통해-자연과 공생하는 한에서만- “생활과정을 확장하고 풍요롭게 하는 사회”, 곧 생태적 문화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심광현 교수는1956년생으로 서울대 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생태문화사회 구성체와 코뮌주의 운동의 관계, 생산 양식과 주체화 양식의 관계를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프랙탈〉 〈흥한민국〉 〈문화사회와 문화정치〉 등이 있습니다.

 

코뮤니즘 ‘발견’하고 현실화를 ‘발명’하라
‘코뮨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 1968년 5월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 학생 시위대. 프랑스 좌파는 ‘68혁명’을 계기로 ‘탈중앙·탈집중화’ 의제에 눈을 떴다. 조정환 강사는 이 운동이 학생이나 여성·동성애자 등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인 움직임에 의해 전개되어 나갔다는 점에서 정치적 태도의 다양성과 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 시기 대안체제 운동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이미 실재한다

 

 

지난 두 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코뮨주의’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두 가지 쟁점이 두드러졌다. 고 대표는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더는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봤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은 대안적 삶을 위한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이에 대해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고 대표는 또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을 것이라며 탈국가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반면 심 교수는 국가를 벗어나는 것과 극복하는 것은 다르다며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조정환 강사는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아이러니하게도 ‘코뮤니즘’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면서 새로운 삶, 새로운 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적 요구에 붙일 이름으로 코뮤니즘보다 더 적실한 것이 아직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오늘날 가능한 코뮤니즘은 자본 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 자체”라고 했다. 이런 노력들 속에서 발전된 코뮤니즘의 개념으로 그는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을 들었다. 다음주에는 이 주제의 마지막 논자인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신자유주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삶의 곳곳에 깊숙이 도입되었고 이명박 후임정부에서 더욱 심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정치적 집중점이라고 주장해 왔다. 최근 민주노동당의 선거 패배와 혁신, 탈당, 분당, 창당 급물살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대응, 곧 복고적 대응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와 생태주의적 가치의 정치적 혼합 혹은 정치의 사회주의적 급진화 등의 주장이 새로운 대안처럼 제기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제국은 이러한 정치들에 대한 면역력과 포섭력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치적 균열과 다종적 분기의 이 현상들이 새로운 삶, 새로운 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적 요구가 실재함을 보여주는 징후들임은 분명하다. 그 요구가 무엇인가? 그것은 신자유주의 및 신보수주의 우파는 물론이고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좌파들 모두가 한사코 억제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것인바, 그것에 붙일 이름으로는 코뮤니즘(communism)보다 더 적실한 것이 아직은 없다. 이것은 정확히 160년 전 마르크스가 불러내었으나 20세기의 각종 동구적·서구적·제3세계적 사회주의들이 먼 미래로 추방하거나 복지국가, 관료국가의 울타리 속에 가두는 데 성공했던 바로 그 괴물의 이름이다. 코뮤니즘을 추방하고 가두었던 저 역사적 울타리들을 파내면서 지금 코뮤니즘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다.

코뮤니즘은 우리가 미래에서 현재 속으로 도입해야 할 어떤 이상적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자연-인간-기계 사이의) 협력관계로, 나아가 착취관계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의 운동으로 이미 실재한다. 자본은 사회 속에 협력관계를 도입하고 촉진함으로써만 축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착취는 인간들 사이의 협력과 자연-인간-기계 사이의 협력에 대한 착취이기 때문이다. 착취가 노동시간에 대한 착취로 나타나는 순간에조차 그것은 ‘사회적인’ 노동시간, 곧 협력의 시간을 착취한다. 따라서 자본의 성장과 발전은 동시에 이 협력관계의 성장과 발전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코뮤니즘이라는 사람들간의 협력관계
착취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는
자본 등 세계화 속에서 이미 성장·발전
그 잠재된 실재의 발견이 최우선

 

마르크스는 착취관계의 발전을 규명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발전하는 협력관계를 밝힐 개념들을 발명했다. 생산 확대에 따른 욕망의 사회문화적 확대, 노동의 사회화, 일반지성의 형성 등이 그것이다. 아니 ‘추상노동’부터가 사회적 협력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비물질화와 혼종(뒤섞임)을 통한 노동의 공통되기, 금융화를 통한 자본의 공통되기, 네트워크적 제국화를 통한 주권의 공통되기가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 공통되기는 적대적으로 발전한다. 점점 공통화하는 삶에 대한 공통적 식민화가, 다시 말해 공통된 것의 지구화에 대한 공통적 착취의 지구화가 진행된다. 주식회사가 자본의 사회주의였듯이 초국적 금융자본과 제국은 자본의 코뮤니즘의 형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반혁명적 코뮤니즘이다. 우리는 자본의 코뮤니즘이라는 거울상을 통해 삶의 코뮤니즘의 실재성과 그 성숙을 엿볼 수 있다. 코뮤니즘은 발명되기에 앞서 우선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정치가 이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 사회주의 운동들은 당대의 협력관계와 공통된 것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자본주의적 추상 내부에서 주체화하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관리하려 했다. 오늘날 사회주의 정치는 코뮤니즘의 실재성을 부정함으로써 코뮤니즘의 현실화를 봉쇄하는 자본주의적 위기관리 방책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문제는 코뮤니즘이다. 코뮤니즘이 현실화하고 활성화해야 할 ‘공통된 것(the common)’은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해온 산물이라는 점에서 전자본주의적 공유지(commons)들과는 다르며 전자본주의의 지역적 소공동체들인 코뮌(commune)들과도 다르다. 파리 코뮌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전국적 정치공동체들도 오늘날의 ‘공통된 것’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모든 공동체들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그 동력을 획득하지만 오늘날 공통된 것은 그 어떤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 삶의 내재적 공통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가능한 코뮤니즘은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 자체이다. 특이적 공통으로서의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은 이러한 노력 속에서 발전된 코뮤니즘의 개념들이다.

 

‘소공동체들의 소통 중시한 코뮨주의’와
‘국가를 정점에 둔 다층적 코뮌주의’는
새로운 발명 아닌 실험·관리에 그쳐
실질적 창조로서 기능할 코뮤니즘 필요

 

고병권과 심광현은 기존의 자본주의 정치들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발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필자와 공통적이다. 고병권이 코뮤니즘을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으로 정의할 때 그것은 나의 코뮤니즘 개념의 뒷부분과 일치한다. 하지만 그에게서 코뮤니즘적 발명은 잠재적 코뮤니즘의 발견에 정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소속, 자격, 근거 등의 동일성들을 버리는 과정에서 바로 그것들 속에서 잠재하는 코뮤니즘의 실재성까지 버려 버린다. 그래서 코뮤니즘의 발명은 발견된 실재 위에서의 그것의 발명적 현실화로서보다는 의지적 실험으로 축소된다. 그 실험의 정치는 지금 소공동체로서의 코뮨들을 도입하고 촉발하고 연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코뮨-주의’로 발전되고 있다.

심광현은 이것의 위험성을 ‘고립된 공동체주의’라는 말로 표현해 낸다. 이 위험을 벗어날 심광현의 ‘코뮌주의’적 묘수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험적 코뮌들의 발명의 층위 위에 비국가적 공공성의 발명이라는 층위을 얹는 것이다. 이 두 발명의 층위들은 국가를 민주화할 층위들인데 국가는 이들의 상층에 놓인다. 그런데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이 삼층의 선순환 구조야말로 지금까지 자본이 협력을 흡혈하고자 사용한 바로 그 구조가 아닌가? 그리하여 심광현은 다중의 전 지구적 공통되기를 코뮌적 발명들로 환원한 후 그 위에 몇 겹의 중층적 구조물을 얹어 그것을 관리하는 정치를 ‘코뮌주의’적 정치라고 한다. 다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고병권의 실험적 위험보다 더 큰 구조적 위험을 삶에 도입하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은 이 변형된 사회주의가 ‘호혜적 협동 속에서 대중 스스로 수행하는 문화적 실험’들의 성과까지 체계적으로 금력(金力)으로 전화시킬 연금술적 장치로 기능할 것임을 앞서 보여준다.


 
» 조정환 강사
 
이 위험들로부터 우리는, 코뮤니즘적 발명들이 실험이나 관리를 넘는 실질적 창조로서 기능하려면 발견되는 코뮤니즘의 발명적 현실화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조정환 강사는 1956년에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등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탈근대적 사회운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국기계 비판〉(갈무리, 2005)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 등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자본주의 안의 코뮤니즘’ 아닌 반자본주의로
‘코뮨주의’ 대안 맞나
 
 
한겨레  
 
 
» 멕시코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가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착취 구조를 고발할 의도로 그린 1933년 벽화 <현대 산업>. 정성진 교수는 자본주의를 뛰어 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④ 고전적 코뮤니즘과 접목해야

 

지난 세 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정환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가 논쟁을 펼쳤다.

고 대표는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더는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봤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은 대안적 삶을 위한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독점만 강화할 것이라고도 했다. 심 교수는 고 대표 주장은 동질성 대 이질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지난 주, 조 강사는 코뮤니즘은 “자본 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이라면서 이는 “다중이나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으로 이미 실재한다고 했다.

정성진 교수는 코뮤니즘 담론의 난점으로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이미 실존한다는 주장으로 건너뛴 데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코뮨주의자들의 ‘탈주’는 자본주의 영토를 더욱 넓힐 것이라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다음 주에는 논쟁의 새 주제인 ‘이명박 정부의 성격,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최근 진보진영 일각에서 코뮨주의 혹은 코뮤니즘 담론이 유행하고 있다. 코뮤니즘은 이전에는 ‘공산주의’라고 번역했던 ‘communism’이라는 영어 단어를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이며, 코뮨주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코뮨’(commune)의 성격을 부각하기 위한 표기법이다.

우리나라에서 코뮤니즘 담론은 고병권과 이진경이 주로 주장하는데, 자율주의자 조정환과 생태적 문화사회론자 심광현도 이를 부분적으로 공유한다. 고병권에 따르면, 코뮤니즘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노력”으로서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로 정의되며, 실제로는 공동체주의로 구체화된다. 반면, 조정환은 코뮤니즘을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로 정의하고, 이는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 나아가 착취관계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의 운동”, 곧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으로 이미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의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개념 복원이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이미지 쇄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 재건 길 마련한 것

 

최근 코뮤니즘 담론의 유행은 옛 소련의 몰락 이후 득세했던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TINA)이나 ‘역사의 종언’이 퇴조하고 자본주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려는 갈망이 증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코뮤니즘 담론은 그 동안 스탈린주의와 반공주의, 사민주의가 억압·왜곡해 온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코뮤니즘 개념에 핵심적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의의를 갖는다. 그 동안 국유화, 명령경제, 수용소군도의 음울한 세계로 그려졌던 코뮤니즘을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고병권과 이진경)으로, 혹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기쁨”(네그리와 하트)으로 환골탈태한 것은 코뮤니즘 담론의 주요한 공헌이다.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의 실현을 “먼 미래”의 일로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달성해야 할 과제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최근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진보진영의 개량화 경향에 제동을 걸고, 반자본주의 공동전선을 재건할 수 있는 이론적 자원으로서 주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코뮤니즘 담론을 그 뿌리인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비추어 보면 몇 가지 중요한 차이와 난점이 드러난다. 우선 코뮤니즘 담론은 코뮤니즘이 현재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에,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미래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가 없다. 코뮤니즘의 잠재태가 자본주의 안에서도 “자본관계 속에서 사람들 사이의 협력관계”로서 형성·발전된다는 말은 맞다. 또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을 지향하는 운동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코뮨주의자들이 새롭게 창안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반복한 것이다. 코뮤니즘 담론에서 새로운 점은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 이행의 주객관적 조건의 실존 사실을 근거로 하여 현실의 지배적 체제로서 코뮤니즘이 자본주의 안에서 이미 실존한다는 주장으로 건너 뛴 데 있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을 위한 주객관적 조건이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에서 지배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체제는 코뮤니즘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지배적인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문제는 회피될 수 없다.

코뮤니즘 담론은 이행의 문제 자체를 부정하고, 코뮤니즘으로의 이행의 도정에서 정면 돌파해야 할 장애물들인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와 억압적 국가권력을 모두 회피하거나 무력한 것 혹은 무해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들이 유지되고 강화되는 것에 봉사한다. 단지 “탈주”를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국가와 자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중투쟁의 거대한 고양 없이 “비국가적 비시장적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것만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체제와 억압적 국가권력은 해체될 수 없다. 자본과 국가를 배경으로 한 시장의 논리,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 자체가 코뮨주의의 “잠재태의 현실화”에 근본적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코뮤니즘이 이미 실재한다는 건 비약
자본주의 지배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비국가·비시장적 네트워크 실현 힘들어
대중투쟁 통해 자본주의 경계 넘어서야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대중들이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을 갖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이러한 대중의 갈망을 뭔가 문제 있는 “증상”이라고 탓하거나 무시하고, 이를 모종의 대안 공동체 실험들로 대신하는 것이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에 갇혀 있는 한, 대중들의 이와 같은 갈망이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구명하고, 대중의 갈망과 분노, 투쟁과 결합하여, 이를 자본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코뮨주의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조직노동운동처럼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한 운동이나 “복지국가에 대한 갈망”을 “복고적”일 뿐만 아니라 기존 체제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대중들이 국가에서든 자본에서든 “자격이나, 소속,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은 자신의 노동력 판매에 성공할 때이다. 극소수 자산가를 제외한 대중은 이와 같은 노동력 상품의 판매에 실패할 경우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복지국가에 의존하거나, 소상품생산자(자영업자)가 되는 도리 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은 이러한 선택지 중 노동력 상품 판매와 복지국가를 거부하므로, 결국 남는 대안은 소상품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의 주변부에 기생하는 것이다.

코뮨주의자들은 브로델이나 아리기처럼 “비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서 시장의 논리는 상품화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로 발전하여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코뮨주의자들이 애호하는 “비시장적 네트워크”도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 자체가 거부되고 폐지되지 않는 한, 고립된 주변적 공동체들 간의 연계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가 지배적인 조건에서 코뮨주의자들이 탈주하고 난 다음 생겨난 국가와 자본의 빈 자리는 다시 시장에 의해 채워질 것이며, 그 결과 자본주의 영토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 정성진 경상대 교수
 
코뮨주의자들의 오해와는 달리, 오늘날 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퇴각하거나 시장으로 대체되기는커녕, 상품화의 확대와 경쟁력의 강화, 착취의 강화에 봉사하는 국가로서 그 역할이 다시 정의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코뮤니즘 개념에 핵심적인 자본주의 국가 분쇄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투쟁 및 혁명정당의 역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코뮤니즘 담론이 진정으로 반자본주의 운동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 동안 멀리했던 자신의 뿌리와 다시 접목할 필요가 있다.

정성진 경성대 교수·경제학

 


정성진 교수는 1957년생이며 현재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방법에 의거한 현대 한국경제 분석과 대안적 사회주의 경제 모델 구상 및 대안사회운동론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2005),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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