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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우리 사회 지식논쟁]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한겨레 안수찬 기자
 
 
»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사진 도서출판 b제공.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이유있는 열풍

 

철학에도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최신 유행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모든 첨단 유행이 그러하듯이 지젝 또한 시대의 상식을 파괴한다.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접붙인 그는 독일 고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뒤, 이를 디딤돌 삼아 다시 현대 철학의 새로운 사유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실천적 철학자’의 전형이기도 한데, 고국 슬로베니아에서 1990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국내에서도 지젝 열풍은 심상찮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2000년대 들어 그가 직접 쓴 책만 10권 이상 번역·출판됐다.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겨레>는 이번주부터 이 ‘지젝 신드롬’의 속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의 사유에는 과연 새로운 영감으로 삼을 만한 자양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함 빼고는 건질 게 없는 서구적 언어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저작을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관련 논의를 이끌었던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박사가 첫 번째 글을 썼다. 그는 지젝의 사유로부터 우리 시대의 이념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레닌의 혁명 전략마저 넘어서는 전복의 기운이 지젝에게 있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자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을 경탄과 함께 읽어본 독자라면 ‘당신도 인간인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라고도 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로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엠티브이(MTV) 철학자’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을 써낸 철학자, 그가 지젝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독자들까지도 그의 책을 다 따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매년 두어 권씩 번역돼 나오는 ‘한국어 지젝’에만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한 비판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젝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어떤 저자를 읽기 위해서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대중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면 보통은 다른 저자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은 매혹적이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매혹은 동시에 그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정신분열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비판은 그의 이런 작업방식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 옆에는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독창성도 진정성도 없는 ‘철학적 재담꾼’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세기적인 ‘재담꾼’을 갖는다는 게 과연 불행한 일인지? 가령, 급진적 철학자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재담은 어떠한가?

 

헤겔과 라캉 자유자재로 다루며
마르크스·대중문화 이론적 틀까지
매혹과 혐오의 시선 동시에 받는
21세기 세계철학계의 이단아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곧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이다.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불가능을 돌파한 레닌의 바로 그러한 ‘광기’였다. 하지만 레닌도 혁명 이후에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대해 불신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곧 스탈린주의로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거대 은행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기구인 중앙은행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 지점에서 국가의 관리에 대한 레닌의 ‘전체주의적’ 프로그램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자리에 오늘날 ‘일반 지성’의 상징인 월드와이드웹을 갖다놓아 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경제의 첨병처럼 보이는 월드와이드웹에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경우 레닌적 제스처는 국가기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과 싸우는 대신에 그것을 사회화(국유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주의=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레닌의 공식은 ‘사회주의=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중앙은행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전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에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재담’이다.

 

시대 넘나드는 철학적 재담으로
오늘날 이념적 지형·돌파구 찾아
‘독창성·진정성 없다’ 비판 불구
열정과 광기에 아낌없는 지지를

 

물론 그의 재담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젝은 또한 ‘소유의 종말’이 예견되는 디지털시대의 ‘탈소유 사회’에 대한 첫 번째 모형을 바로 스탈린시대 소련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서열관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스탈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서열’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관료, 군대 등의 순으로 정확하게 서열화된 사회였다. 거기서 지배계급은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통제수단, 물질적·사회적 특권에 직접 접근이 가능한가라는 ‘접속 가능성’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오늘날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도 특권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라 뒤에서 조정하고 교육과 경영·정보 등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인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


 
» 이현우 씨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한갓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 이현우/서울대 강사

 


이현우 씨는 1968년생이며 서울대 노어노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 논문에서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을 다뤘습니다. 현재 서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전공 외에도 현대 철학과 영화 이론에 두루 관심이 깊고, 최근에는 새로운 인문학의 변형을 학문적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누리꾼들에게는 ‘로쟈’라는 필명의 인터넷 서평꾼으로 더욱 친근할 것입니다.


 
기사등록 : 2008-05-23 오후 08:57

 

지식사회 ‘사상 논쟁’ 말문을 트다
결산
 
 
한겨레 안수찬 기자
 
 
» 지식사회 ‘사상 논쟁’ 말문을 트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지난해 9월1일부터 매주 한 차례씩 연재했던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이번 호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우리시대 지식논쟁은 지식·담론·시사를 버무려 지상 논쟁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려는 노력이었다. 지금까지 37차례에 걸쳐 여러 지식인들의 글을 실었다. 모두 아홉 가지의 주제를 다뤘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1~3회),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 (4~6회),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 (7~9회),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10~16회),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17~21회), ‘코뮨주의 대안 맞나’ (22~25회), ‘이명박 정부의 성격’ (26~28회), ‘고종 어떻게 볼까’ (29~34회),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35~37회) 등이 우리 시대 지식논쟁의 화두로 다뤄졌다. 그 논쟁의 주요 장면을 톺아본다.

 

신자유주의… 민족주의…
9개 주제 37차례 걸쳐 실어

 

 

최첨단 서구 이론으로 지식논쟁의 첫 장을 열었다.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주창한 개념인 ‘제국’을 둘러싼 논쟁을 다뤘다. “권력의 중심이 사라지고 경제적·문화적 교환들이 전지구적으로 전개되는” 상태를 일컫는 ‘제국’ 개념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해하는 첨단의 이론틀이다. 국민국가 중심의 기존 이론틀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기도 한 이 주장을 놓고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정성진 경상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이 논쟁을 펼쳤다.




제국 논쟁이 다분히 이론적인 논구의 성격이 강했다면 ‘차베스 혁명, 사회주의 대안인가’는 구체적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벌인 논쟁이었다. 반미 노선과 기간산업 국유화로 이름 높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실험이 ‘반신자유주의’ 진영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을지를 두고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 김수행 서울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실험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는지가 핵심 쟁점이 됐다.

‘근대문학은 종언을 고했나’는 조금 깊은 이야기를 끄집어 올렸다. 근대문학이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제기를 바탕에 두고 ‘리얼리즘’의 가치와 근대문학의 현재적 의미에 관한 논란의 자리를 만들었다. 조영일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교수,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 등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지지 또는 비판했다.

 

우리 시대 지식논쟁이 주목한 가장 큰 화두는 민족주의 문제였다.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는 무려 일곱차례에 걸쳐 논쟁이 진행됐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근대 국민국가 형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지배, 분단, 산업화, 민주화 등을 가로지르는 핵심 쟁점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 민족사학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새로운 보수 이념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고, 기존 진보학계 내부에서도 관성적인 민족주의를 성찰하려는 흐름이 생겨났는데, 이후 민족주의 논쟁은 복잡한 결을 가진 예민한 문제가 됐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임지현 한양대 교수,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권혁범 대전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이 치열한 논전을 펼쳤다. 안병욱 교수 등이 저항적 민족주의로부터 초국적 자본을 견제할 동력을 찾은 반면, 박노자 교수 등은 계급 모순을 호도하는 민족주의의 맹점을 비판했다.

 

지식·담론·시사 버무려
지지-비판 열띤 논쟁 벌여

 

다섯차례에 걸쳐 진행된 ‘고종 어떻게 볼까’ 논쟁도 민족주의 담론과 떼놓을 수 없다. 고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 시기에야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하게 된다. 이는 다시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의 대립으로 이어지고, 오늘에 이르러 민주화와 산업화의 흐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태진 서울대 교수, 하원호 동국대 교수, 강상규 박사,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김도형 연세대 교수 등이 고종을 평가했다.

마르크스주의의 현대적 재해석을 둘러싼 개념들도 우리 시대 지식논쟁에서 자주 다뤄졌다. 다섯차례에 걸쳐 다룬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는 새로운 저항의 이념을 찾으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을 드러낸 논쟁이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창한 ‘노마디즘’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붙박이지 않고 끊임없이 탈주선을 그리며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사유의 여행”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사유 방식이 과연 저항 또는 변혁의 기획에 어울리는 것인지를 두고 홍윤기 동국대 교수,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 이광래 강원대 교수 등이 논쟁했다.

 

논쟁의 핵심은 노마디즘이 한국 사회에 새로운 영감을 던지는 실천적 기획인지, 아니면 급진적 언어를 빌린 상념의 소산인지에 있었다. ‘코뮨주의 대안 맞나’,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등도 비슷한 맥락의 논쟁이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주창으로 국내에서도 하나의 대안 이념으로 자리잡은 ‘코뮨주의’와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급진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를 각각 논했는데, 그때마다 이들 새로운 개념과 이념이 구체적 현실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두고 쟁점이 형성됐다. 고병권 ‘수유+너머’ 대표,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조정환 자율평론 상임만사, 이현우 박사, 박정수 수유+너머 연구원, 이성민 도서출판 b 기획위원 등이 글을 썼다.

‘이명박 정부의 성격’은 정부 출범 2주 뒤부터 세차례에 걸쳐 연재됐다. 박정희식 개발독재와의 차별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따라 이명박 정부의 성격 규정이 달라지는데,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 홍성민 동아대 교수, 고세훈 고려대 교수 등이 글을 썼다. 신보수라는 규정성을 수용하는 논자도 있었고, 구보수와 별 차이가 없다는 이도 있었다. 신보수냐 구보수냐를 넘어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선명히 규정해야 한다는 필자도 있었다. 당시 논쟁은 한국 보수세력의 정치적 기원을 궁구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조희연 교수는 글에서 “극단적 친미주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전혀 고려가 없는 천민자본주의적 지향, 탈도덕적 경제주의 등이 한국적 보수의 특성”이라고 썼는데, 그 정의는 촛불집회 길에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이명박 정부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새롭다. <한겨레>는 앞으로도 주요 쟁점이 떠오를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우리 시대 지식논쟁’과 비슷한 기획을 지면에 실을 계획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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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8-06-13 오후 07:56:21 기사수정 : 2008-06-16 오전 11: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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