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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의 복수?…한국판 <식코>를 찍으려는 그들

 

 

강만수의 복수?…한국판 <식코>를 찍으려는 그들

[기고] 의료 민영화 이념의 섬뜩함

기사입력 2009-03-10 오전 9: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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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초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를 보았다. 필자는 제주에서 그 영화를 보았는데,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마지막 날에는 영화관 복도까지 관객으로 넘쳐났다. 결국, 연장 상영을 결정하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식코>를 볼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의 흥행이었다.

영화 <식코>를 본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먼저 "미국 의료제도가 저렇게 엉망인가"라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우리나라에는 국민건강보험이 있어 천만 다행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들에 비하면, 국민소득이 한참 낮은 우리나라가 의료 이용 문제로 인한 고통만큼은 의외로 그리 크지 않음을 우리는 일상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영화 <식코>의 참혹함이 사실을 과장하는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특히, 미국 사회시스템 전반에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은 더욱 그럴 수 있겠다. 그런데 영화 <식코>의 이야기는 사실이다.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 후보의 선거 공약이 이를 공식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다음의 글은 오바마 대통령 후보의 대선 공약 중 일부다.

"미국의 의료보험료는 지난 8년 동안 두 배 올랐고, 지난 8년 동안의 임금 인상보다 3.7배나 더 올랐다. 미국에서 파산자의 절반 이상이 의료비에 기인한 것이었고, 미국 총 의료비의 25%는 행정비용과 오버헤드 비용으로 지출된다. 현재 45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은 의료보험이 없으며,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들의 80%는 현재 일을 하고 있지만 의료보험이 없는 것이다. 치솟는 의료비는 특히 중소기업 고용주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의료보험을 구입해주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의료 체계는 예방과 공중보건에 지나치게 투자를 적게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16%를 국민의료비로 사용하면서도 국가의료제도의 성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거의 꼴찌 수준이다(캐나다의 컨퍼런스 보드가 실시한 이 평가에서 한국은 5위를 기록하였음). 미국 의료 체계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높은 의료비가 기업의 경쟁력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미 도를 넘었다. 결과적으로 보험회사, 제약회사, 일부 의료자본을 제외한 미국 전체가 막대한 손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어쩌다가 의료제도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누가 언제부터 이렇게 만들었을까? 미국의료제도가 이렇게 잘못되어 있다면 왜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을까? 개혁의 시도는 없었을까? 많은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답은 이렇다. 1946년 트루먼은 유럽형 의료보장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후에도 몇 차례 개혁의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미 거대자본과 시장이 지배하는 미국의 시장주의 의료제도는 '혁명에 준하는 상황'이 전개되지 않고서는 유럽형의 공적 의료보장제도로 개혁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 미국 의료제도의 끔찍한 현실을 고발한 영화 <식코>. 분명히 실패한 이 미국의 의료제도를 모방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국내에서 진행 중이다. ⓒ프레시안
그래서 우리나라 시민사회와 진보개혁진영은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된 정부의 의료 민영화를 줄기차게 반대해왔던 것이다. 2008년은 큰 위기였으나 다행히 촛불의 힘 덕택에 의료 민영화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의료 민영화 추진 세력이 다시 시동을 걸고 나섰다. 연초부터 제주특별자치도 김태환 지사가 내국인 영리법인 병원 도입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공식화하더니, 이제 이명박 정권이 범정부 차원에서 의료 민영화의 추진을 공식 선언하고 본격적인 행동에 돌입하고 있다.

세계적 경제 위기를 맞아 어려운 나라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어 놓은 '실패한'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 강만수 씨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의 수장으로 간 후,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한 이후, 의료 민영화가 본격 추진되고 있다. 그 첫 작품은 2009년 3월 6일(금요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의료제도 선진화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한 것인데, 이는 의료 민영화 추진을 위한 일종의 세몰이이자 의료시장주의자들의 시위였다.

의료 민영화의 강력한 추진 또는 지지 세력인 두 명의 교수가 발표를 하였고, 역시 의료 민영화를 지지하는 5명의 각계 전문가가 토론하는 형식이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들만의 어이없는 토론회 잔치였다. 필자는 이런 일방적인 토론회 구성은 난생 처음 보았다.

그런데 그 다음은 섬뜩함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자본 주도의 시장주의 의료제도에 대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저들의 이념과 의료 민영화를 밀어붙여 달라며 이명박 정부의 결단을 압박하는 저들의 목소리는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자본 주도형 의료제도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거대한 이념이었고, 의료공공성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의료공공성을 주장하며 현행 '국민건강보험 의료제도'를 발전시켜온 시민사회와 진보개혁진영은 합리적 논리가 아니라 '이념'적 주장만 펴는 '이념' 세력으로 매도되었다.

이들은 '국민건강보험 의료제도'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시민사회 등 진보개혁진영과 이를 지지하는 다수 국민의 목소리에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며 낙인을 찍고 정부가 결단해서 '이념'을 진압하고 의료 민영화를 관철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2008년 촛불의 힘에 굴복한 허약한 정부를 질타하며, 이번에는 '이념'적 반대의 목소리를 반드시 넘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얼마나 섬뜩한 장면인가.

무시무시한 의료시장주의 이념 앞에선 진실도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의료제도에서 '시장의 과소와 정부 역할의 과잉'을 공격한다. 정부 역할을 줄이고 의료 규제를 풀자는 시장만능주의의 교리를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의료시장에 자본 주도의 날개를 달아주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진단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제도는 공공성의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과소'로 인한 시장실패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료 제도는 의료 재정의 공공성 수준이 53%에 불과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평균인 72.3%에 비하여 20% 포인트 낮고, 프랑스나 스웨덴 등 유럽의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는 약 30% 포인트나 낮은 수준이다. 의료 공급을 담당하는 병원 중 공공병원의 비중도 우리나라는 10%에도 미달하여 유럽 선진국의 50~90%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낮고, 미국의 25%보다도 낮은 실정이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의료 재정과 의료 제공 체계 양 측면에서 의료 제도의 공공성 수준이 낮다보니, 의료 재정에서는 민간의료보험이 엄청나게 시장을 넓혀가고 있으며, 의료 공급에서는 민간병원이 주를 이루면서 불필요한 병상 및 시설 경쟁으로 자원의 낭비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병원의 대형화, 고급화, 상업화는 이미 의료 시장의 과열 경쟁을 촉발하여 중소병원은 도산하거나 파행적 의료 행태를 보이고 있다. 머지않아 지방의 대학병원은 물론이고 서울의 일부 대학병원들도 동네병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우리나라 의료의 '시장 과잉'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의료 시장주의자들은 정반대의 주장을 펴며, 여론의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미국식 의료 시장주의 이념이 뼛속까지 침윤한 이유 때문일까, 혹시 필자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결국,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리법인 병원의 허용'과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를 제도적으로 촉진하여 자본 주도의 의료 민영화를 이 땅에서 완성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는 보험회사의 엄청난 힘, 이들 자본과 뜻을 같이하는 정관계의 엘리트 집단이 버티고 있다.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한다. 저들은 뭉쳐있고, 우리는 흩어져 있으니 말이다. 흩어진 힘을 결집할 계기와 기획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들 의료 민영화 옹호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김대중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의료계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의약분업을 달성했다"는 비유를 들며, 이명박 정부가 강력하게 의료 민영화를 밀어붙여 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어이없는 일이다. 약물의 오남용으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의약질서를 바로 세우자는 취지의 의약분업이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국민의료를 망칠 의료 민영화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의료 민영화를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이념적 반대'로 규정하고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장면은 섬뜩함 그 자체였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부처는 의료 민영화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여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의료 분야에 자본이 투자되면 당연히 일자리는 늘어날 것이고, 부가가치도 증대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에 의한 의료 투자는 국민 의료비를 높이고 의료 이용의 양극화를 유발하는 등의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므로, 유럽 선진국들은 공적 의료 투자 방식을 사용한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획기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국고에서 연간 5조 원을 추가 투입하고, 건강보험료를 인상하여 5조 원을 추가로 마련하여, 이 재원을 의료서비스에 투입하자. 병원이 확 달라지고 서비스가 좋아지며, 고용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당장 대부분의 병원을 보호자 없는 병원으로 만들 수 있고, 간호사 등 병원서비스 인력을 2배로 늘릴 수 있다. 당장에 최소 20만 개 이상의 좋은 일자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돈으로 중증 질환자의 본인부담 진료비를 절감할 수 있고, 이러한 공적 지출은 서민가계의 가처분소득을 높여 서민경제의 활성화에도 도움을 준다. 자본에 의한 의료 투자를 인정하고 있는 미국 보다 정부에 의한 공적 의료 투자를 하고 있는 스웨덴이나 영국 등의 유럽 선진국들이 고용의 양과 질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정부재정에 의한 공적 의료 투자를 하는 스웨덴은 영리적 자본 투자를 하는 미국보다 병상 당 고용된 인력의 수가 더 많고 고용의 질도 더 높다. 엄청난 부작용으로 사실상 실패한 '미국의 시장주의 의료제도'를 옹호하는 우리나라 의료시장주의자들은 자본을 이익을 옹호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정제된 논리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편협한 시장 '이념'으로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 의료제도'의 해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깊이 명심할 일은 한 번 '자본 주도의 시장주의 의료제도'가 우리 사회에 착근하면, 이를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의료 개혁을 최우선 정책 과제로 내걸고 추진하고 있지만 의료 개혁의 깊이와 폭은 매우 얕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미 전문가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20년에 걸쳐 국민적 지지 속에서 시민사회와 진보개혁진영이 성취해 놓은 '국민건강보험 의료제도'를 획기적 재정 확충을 통해 더욱 발전시켜 나가느냐, 아니면 의료 민영화를 통해 미국식 시장주의 의료제도로 바뀌느냐의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다.

<프레시안>은 앞으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칼럼을 공동 게재합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회원이 돌아가며 쓰는 각 분야의 깊이 있는 칼럼을 <프레시안>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홈페이지 바로 가기)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제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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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의 복수?…한국판 <식코>를 찍으려는 그들

 

 

강만수의 복수?…한국판 <식코>를 찍으려는 그들

[기고] 의료 민영화 이념의 섬뜩함

기사입력 2009-03-10 오전 9: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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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초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를 보았다. 필자는 제주에서 그 영화를 보았는데,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마지막 날에는 영화관 복도까지 관객으로 넘쳐났다. 결국, 연장 상영을 결정하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식코>를 볼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의 흥행이었다.

영화 <식코>를 본 사람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먼저 "미국 의료제도가 저렇게 엉망인가"라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우리나라에는 국민건강보험이 있어 천만 다행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들에 비하면, 국민소득이 한참 낮은 우리나라가 의료 이용 문제로 인한 고통만큼은 의외로 그리 크지 않음을 우리는 일상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영화 <식코>의 참혹함이 사실을 과장하는 것이라고 의심하기도 한다. 특히, 미국 사회시스템 전반에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은 더욱 그럴 수 있겠다. 그런데 영화 <식코>의 이야기는 사실이다.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 후보의 선거 공약이 이를 공식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다음의 글은 오바마 대통령 후보의 대선 공약 중 일부다.

"미국의 의료보험료는 지난 8년 동안 두 배 올랐고, 지난 8년 동안의 임금 인상보다 3.7배나 더 올랐다. 미국에서 파산자의 절반 이상이 의료비에 기인한 것이었고, 미국 총 의료비의 25%는 행정비용과 오버헤드 비용으로 지출된다. 현재 4500만 명 이상의 미국인은 의료보험이 없으며,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들의 80%는 현재 일을 하고 있지만 의료보험이 없는 것이다. 치솟는 의료비는 특히 중소기업 고용주가 자신의 노동자들에게 의료보험을 구입해주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의 의료 체계는 예방과 공중보건에 지나치게 투자를 적게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16%를 국민의료비로 사용하면서도 국가의료제도의 성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거의 꼴찌 수준이다(캐나다의 컨퍼런스 보드가 실시한 이 평가에서 한국은 5위를 기록하였음). 미국 의료 체계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높은 의료비가 기업의 경쟁력에 미치는 악영향은 이미 도를 넘었다. 결과적으로 보험회사, 제약회사, 일부 의료자본을 제외한 미국 전체가 막대한 손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어쩌다가 의료제도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누가 언제부터 이렇게 만들었을까? 미국의료제도가 이렇게 잘못되어 있다면 왜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을까? 개혁의 시도는 없었을까? 많은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답은 이렇다. 1946년 트루먼은 유럽형 의료보장제도를 도입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후에도 몇 차례 개혁의 시도가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미 거대자본과 시장이 지배하는 미국의 시장주의 의료제도는 '혁명에 준하는 상황'이 전개되지 않고서는 유럽형의 공적 의료보장제도로 개혁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 미국 의료제도의 끔찍한 현실을 고발한 영화 <식코>. 분명히 실패한 이 미국의 의료제도를 모방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국내에서 진행 중이다. ⓒ프레시안
그래서 우리나라 시민사회와 진보개혁진영은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아 노무현 정부 때부터 추진된 정부의 의료 민영화를 줄기차게 반대해왔던 것이다. 2008년은 큰 위기였으나 다행히 촛불의 힘 덕택에 의료 민영화를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의료 민영화 추진 세력이 다시 시동을 걸고 나섰다. 연초부터 제주특별자치도 김태환 지사가 내국인 영리법인 병원 도입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공식화하더니, 이제 이명박 정권이 범정부 차원에서 의료 민영화의 추진을 공식 선언하고 본격적인 행동에 돌입하고 있다.

세계적 경제 위기를 맞아 어려운 나라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들어 놓은 '실패한'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 강만수 씨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의 수장으로 간 후,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한 이후, 의료 민영화가 본격 추진되고 있다. 그 첫 작품은 2009년 3월 6일(금요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의료제도 선진화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한 것인데, 이는 의료 민영화 추진을 위한 일종의 세몰이이자 의료시장주의자들의 시위였다.

의료 민영화의 강력한 추진 또는 지지 세력인 두 명의 교수가 발표를 하였고, 역시 의료 민영화를 지지하는 5명의 각계 전문가가 토론하는 형식이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들만의 어이없는 토론회 잔치였다. 필자는 이런 일방적인 토론회 구성은 난생 처음 보았다.

그런데 그 다음은 섬뜩함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자본 주도의 시장주의 의료제도에 대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진 저들의 이념과 의료 민영화를 밀어붙여 달라며 이명박 정부의 결단을 압박하는 저들의 목소리는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자본 주도형 의료제도에 대한 이들의 집착은 거대한 이념이었고, 의료공공성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의료공공성을 주장하며 현행 '국민건강보험 의료제도'를 발전시켜온 시민사회와 진보개혁진영은 합리적 논리가 아니라 '이념'적 주장만 펴는 '이념' 세력으로 매도되었다.

이들은 '국민건강보험 의료제도'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시민사회 등 진보개혁진영과 이를 지지하는 다수 국민의 목소리에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며 낙인을 찍고 정부가 결단해서 '이념'을 진압하고 의료 민영화를 관철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2008년 촛불의 힘에 굴복한 허약한 정부를 질타하며, 이번에는 '이념'적 반대의 목소리를 반드시 넘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얼마나 섬뜩한 장면인가.

무시무시한 의료시장주의 이념 앞에선 진실도 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의료제도에서 '시장의 과소와 정부 역할의 과잉'을 공격한다. 정부 역할을 줄이고 의료 규제를 풀자는 시장만능주의의 교리를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의료시장에 자본 주도의 날개를 달아주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진단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제도는 공공성의 '과잉'이 아니라 오히려 '과소'로 인한 시장실패로 고통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의료 제도는 의료 재정의 공공성 수준이 53%에 불과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평균인 72.3%에 비하여 20% 포인트 낮고, 프랑스나 스웨덴 등 유럽의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는 약 30% 포인트나 낮은 수준이다. 의료 공급을 담당하는 병원 중 공공병원의 비중도 우리나라는 10%에도 미달하여 유럽 선진국의 50~90%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낮고, 미국의 25%보다도 낮은 실정이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의료 재정과 의료 제공 체계 양 측면에서 의료 제도의 공공성 수준이 낮다보니, 의료 재정에서는 민간의료보험이 엄청나게 시장을 넓혀가고 있으며, 의료 공급에서는 민간병원이 주를 이루면서 불필요한 병상 및 시설 경쟁으로 자원의 낭비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병원의 대형화, 고급화, 상업화는 이미 의료 시장의 과열 경쟁을 촉발하여 중소병원은 도산하거나 파행적 의료 행태를 보이고 있다. 머지않아 지방의 대학병원은 물론이고 서울의 일부 대학병원들도 동네병원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우리나라 의료의 '시장 과잉'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의료 시장주의자들은 정반대의 주장을 펴며, 여론의 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 미국식 의료 시장주의 이념이 뼛속까지 침윤한 이유 때문일까, 혹시 필자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결국,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영리법인 병원의 허용'과 '민간의료보험의 활성화'를 제도적으로 촉진하여 자본 주도의 의료 민영화를 이 땅에서 완성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는 보험회사의 엄청난 힘, 이들 자본과 뜻을 같이하는 정관계의 엘리트 집단이 버티고 있다.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해야 한다. 저들은 뭉쳐있고, 우리는 흩어져 있으니 말이다. 흩어진 힘을 결집할 계기와 기획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들 의료 민영화 옹호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김대중 정부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의료계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의약분업을 달성했다"는 비유를 들며, 이명박 정부가 강력하게 의료 민영화를 밀어붙여 줄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어이없는 일이다. 약물의 오남용으로부터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의약질서를 바로 세우자는 취지의 의약분업이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고 국민의료를 망칠 의료 민영화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의료 민영화를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이념적 반대'로 규정하고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장면은 섬뜩함 그 자체였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부처는 의료 민영화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여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의료 분야에 자본이 투자되면 당연히 일자리는 늘어날 것이고, 부가가치도 증대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에 의한 의료 투자는 국민 의료비를 높이고 의료 이용의 양극화를 유발하는 등의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므로, 유럽 선진국들은 공적 의료 투자 방식을 사용한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획기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국고에서 연간 5조 원을 추가 투입하고, 건강보험료를 인상하여 5조 원을 추가로 마련하여, 이 재원을 의료서비스에 투입하자. 병원이 확 달라지고 서비스가 좋아지며, 고용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면, 당장 대부분의 병원을 보호자 없는 병원으로 만들 수 있고, 간호사 등 병원서비스 인력을 2배로 늘릴 수 있다. 당장에 최소 20만 개 이상의 좋은 일자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돈으로 중증 질환자의 본인부담 진료비를 절감할 수 있고, 이러한 공적 지출은 서민가계의 가처분소득을 높여 서민경제의 활성화에도 도움을 준다. 자본에 의한 의료 투자를 인정하고 있는 미국 보다 정부에 의한 공적 의료 투자를 하고 있는 스웨덴이나 영국 등의 유럽 선진국들이 고용의 양과 질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정부재정에 의한 공적 의료 투자를 하는 스웨덴은 영리적 자본 투자를 하는 미국보다 병상 당 고용된 인력의 수가 더 많고 고용의 질도 더 높다. 엄청난 부작용으로 사실상 실패한 '미국의 시장주의 의료제도'를 옹호하는 우리나라 의료시장주의자들은 자본을 이익을 옹호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정제된 논리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편협한 시장 '이념'으로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 의료제도'의 해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깊이 명심할 일은 한 번 '자본 주도의 시장주의 의료제도'가 우리 사회에 착근하면, 이를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의료 개혁을 최우선 정책 과제로 내걸고 추진하고 있지만 의료 개혁의 깊이와 폭은 매우 얕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이미 전문가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20년에 걸쳐 국민적 지지 속에서 시민사회와 진보개혁진영이 성취해 놓은 '국민건강보험 의료제도'를 획기적 재정 확충을 통해 더욱 발전시켜 나가느냐, 아니면 의료 민영화를 통해 미국식 시장주의 의료제도로 바뀌느냐의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다.

<프레시안>은 앞으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칼럼을 공동 게재합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회원이 돌아가며 쓰는 각 분야의 깊이 있는 칼럼을 <프레시안>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홈페이지 바로 가기)

/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제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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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만방에 'B급 국가' 선포하려나&quot;

 

 

세계 만방에 'B급 국가' 선포하려나"

[기고] 무식한 '인권위 축소', 당장 중단하라

기사입력 2009-03-05 오전 10: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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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차원에서 추진된 특정정책에 대해 이렇듯 한목소리로 반대론만 쏟아진 경우가 과거에도 있었나 싶다. 행정안전부, 아니 청와대가 추진 중인 국가인권위원회 축소방침은 적어도 공론의 장에선 찬성론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반면 반대하는 소리는 크고 절박하다. 국제사회, 야당, 시민사회, 인권단체, 법학교수, 전임 인권위원 등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이 일제히 '아니오'를 합창하며 '인권위 구하기'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누구보다 인권단체들이 치열하게 투쟁 중이다. 그중 제일 속이 타는 건 장애단체들이다. 인권위 인력을 축소하면 천신만고 끝에 제정한 장애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권위 지역사무소 폐쇄방침을 접한 부산, 광주, 대구의 시민사회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개소식에 참석한지 2~3년도 안 됐는데 폐소식을 하라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냐"는 볼멘소리가 절로 나온다. 당연히 강도 높은 상경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평소 인권위와 적당히 거리를 두며, 이른바 협력 속의 긴장 관계를 유지해 온 인권단체들이 '인권위 지킴이'를 자임하며 똘똘 뭉친 셈이다.

국제사회도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움직인다. 지난 2월 25일 유엔인권최고대표(인권고등판무관)은 직접 외교통상부장관과 행전안전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서 심각한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공개되지 않아서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인권위에 거는 국제적 기대와 인권위가 획득한 국제적 위상을 거론하며 인권위 축소강행은 인권위와 정부의 국제적 평판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를 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 인권위를 모범기구로 칭송하며 벤치마킹을 주문해온 아시아 각국의 주요 인권단체와 아시아 중심의 국제인권단체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이들은 조만간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원회(International Coordinating Committee)에 한국 인권위 사태를 조사할 다국적 진상조사단 파견 및 한국정부의 독립성 침해시도에 대한 특별심사절차 회부를 공식 요청할 태세다. 이렇게 되면 한국정부는 향후 국제 인권사회에서 독립성 침해사례의 악명 높은 주인공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 인권단체연석회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인권단체는 지난 2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행정안전부의 국가인권위원회 축소방침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뉴시스

인권위 축소론은 건전한 법리와 상식에 반한다

법학계가 집단적으로 1개 국가기관의 축소에 대해 강력한 반대의사를 밝힌 점도 몹시 이례적이다. 유엔인권최고대표의 항의서한이 전달된 날은 무려 252명의 법학교수들이 인권위 축소 반대 성명서를 발표한 날이기도 하다. 인권법 전임교수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은 한국법학풍토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은 법학교수들이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인권위 축소론은 건전한 법리와 상식에 반한다.

법학교수들은 특히, 인권위법 제18조에서 '조직에 필요한 사항'을 대통령령으로 정할 수 있도록 위임한 것은 인권위 자체의 법규 제정권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 뿐, 대통령이나 정부가 제멋대로 인권위 조직과 인원을 감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권위 직제를 대통령령으로 규정해놓은 취지는 인권위가 헌법기관이 아니기 때문일 뿐, 인권위의 직제와 인력을 대통령이 마음대로 손대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인권위의 독립성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정부한테 밉보이는 순간 인권위의 인력과 예산이 바로 반토막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지난 3월 2일에는 16명의 전직 국가인권위원들이 긴급호소문을 발표했다. "선진화를 추구하는 현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선진화의 핵심목표 중 하나가 인권보장에 있느니만큼 인권위를 축소해서는 안 된다"는 절절한 호소를 담았다. 이들은 내년도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원회 의장국으로 추대될 한국 인권위의 국제적 위상을 정부가 앞장서서 깎아내리는 일을 해서야 되겠느냐는 은근한 질책도 곁들였다.

싸움의 승부는 이미 나있다

국내외 다양한 구성원들이 이렇듯 인권위 축소방침에 일제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걸 보면 인권위가 지난 7년간 국내외에서 상당히 괜찮은 평가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한국 인권위는 초기부터 국제인권공동체에서 독립성과 진정성을 인정받아서 국제인권 외교무대에서도 한몫을 단단히 수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권위는 벌써 아시아태평양 국가인권기구포럼(APF)의 의장국을 역임한데 이어 현재 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위원회(ICC)의 부의장국이자 국제조정위원회 승인심사소위의 아태지역 대표위원국으로 활동 중이며, 내년에는 기구축소와 같은 특별한 사정만 없으면 ICC 의장국으로 피선될 것이 확실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안부, 아니 청와대는 3월 중 국무회의에서 인권위직제 개정안을 통과시켜 인권위 축소방침을 밀어붙이겠다고 공언한다. 특히 이달곤 행안부 장관이 지난 19일 국회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강행의지를 밝힌 점이 매우 우려된다. 어물쩡 넘어가도 그만인 청문회에서 이렇게 답변한 이상 청와대의 강한 의지가 담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3월 중 이명박 정권과 국내외 인권공동체가 인권위 축소여부를 둘러싸고 정면으로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싸움의 승부는 이미 나있다. 정부 방침에 찬성의견을 밝히는 사람은 국내외를 통틀어 단 한 사람도 없는 반면 국내외에서 반대의견이 쏟아지고 있다면 승부는 보나마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 혼자서 법령상의 형식적 권한을 알량한 핑계 삼아 축소방침을 강행한다면 이보다 더 반지성적이고 반인권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이명박 정권이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도대체 민생경제가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할 일 많은 정부가 이렇게 승산 없고 실익 없는 싸움에 매달려도 되는지, 한숨만 나온다.

아무리 미워도 이러진 않았다

왜 국내외가 다 자랑스러워하는 인권위를 유독 이명박 정권은 미워하는가. 아마도 가까이는 촛불시위에 대한 경찰의 과잉진압을 인정해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고 멀게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소극성, 공권력 행사에 대한 엄격성 등 인권위의 접근방식이 체질적으로 거슬리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인권위가 정부의 입지를 난처하게 만든 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더 심했다. 대표적인 예로, 인권위는 김대중 정부 시절 테러방지법 제정을 무산시키고 교육정보시스템(NEIS) 도입에 반대했으며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비정규직법안에서 노동조합의 손을 들어주고 여의도 농민집회 사망사고와 관련해 경찰청장의 징계를 권고했다. 당시의 정권도 이명박 정권 못지않게 인권위에 미움과 분노를 보였지만 인력감축을 겁주진 않았다. 인권위가 독립성을 지키는 이상 인권위는 어느 정권에게나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설령 인권위의 업무수행방식에 대한 현 정부의 불만과 부담에도 일리가 있다 치자. 그렇다고 해서 대규모 인력감축을 단행해 팔다리를 자르는 보복성 방식으로 불만을 해소하여야 하는가. 이것이 인권의 보호와 증진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권의 보호와 증진을 위한 것인가. 도대체 이런 방침을 세우면서 인권의 실질적 주체인 약자와 소수자의 처지를 한순간이라도 헤아려본 적이 있는가. 이래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흐르면 위원장과 인권위원의 임기가 종료돼 자연스레 인권위를 재구성할 것 아닌가. 인권위의 인력을 대폭 줄여서 무력화하면 이명박 정권이 임명할 인권위원장은 어떻게 일하라는 말인가. 어떻게 이토록 단견일 수 있으며 이토록 자가당착일 수 있는가. 이건 누가 봐도 벼룩 잡으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향후 경제공황상태에서 쏟아질 실업자, 사회경제적 약자의 열악한 지위를 생각하면 정부는 이 '연약한 지체들'의 인권을 지켜줄 책무를 갖는 인권위에 인력감축이 아니라 더 정력적으로 일해줄 것을 주문하며 필요하면 인력증원도 마다않겠노라고 약속해야 옳다. 구구하게 말할 것 없다. 법학교수들이 성명서에서 날카롭게 지적한대로, 다른 국가기관의 인력은 2%도 감축하지 않으면서 유독 인권위만 30% 감축하라는 건 촛불시위 '과잉진압' 결정에 대한 보복성 표적감축이 아닐 수 없다.

▲ "다른 국가기관의 인력은 2%도 감축하지 않으면서 유독 인권위만 30% 감축하라는 건 촛불시위 '과잉진압' 결정에 대한 보복성 표적감축이 아닐 수 없다." 국회에 출석한 이달곤 행안부 장관. ⓒ뉴시스

1년 새 유엔에서 항의서한 두 번 받는 '불명예 기록'

이명박 정권은 인수위 시절의 인권위 장악시도와 최근의 인권위 무력화 시도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한껏 망신살이 뻗쳤다. 이렇게 가면 이명박 대통령이 국제인권공동체에서 기피인물로 낙인찍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이미 당시 루이스 아버 유엔인권최고대표의 항의서한을 받은 바 있다. 인수위가 인권위의 위상을 대통령 직속으로 변경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최근 이 대통령은 필레이 유엔인권최고대표로부터 다시 한 번 인권위의 인력감축에 항의하는 공식서한을 받음으로써 불과 1년 동안 유엔인권최고대표에게 두 번이나 항의서한을 받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세웠다.

국가인권기구는 좀 별난 구석이 많은 이색적인 국가기관이다. 무엇보다도 헌법기관이 아니면서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기관이라는 점이 그렇다. 인권위의 독립적 위상은 인권단체들이 입법과정에서 무려 3년 넘게 법무부와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워 획득한 국민들의 귀중한 공유재산이다. 덕분에 현재 대통령, 총리, 장관은 인권위에 대해 어떤 지시나 명령도 할 수 없다. 반면 인권위는 대통령, 총리, 장관에게 인권관련 법제와 정책의 개선을 권고하는 것은 물론 인권침해에 책임이 있는 장관, 청장, 기타 공무원에 대한 해임 기타 징계 조치를 권고할 수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인권위의 활동을 지켜보는 국제기관이 유난히 많다는 점이다. 인권위는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유엔원칙, 일명 파리원칙(Paris Principles)에 대한 부합여부를 정기적으로 심사받는다. 전세계의 모든 국가인권기구들은 파리원칙이 요구하는 독립성과 실효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매5년마다 심사받는다. 파리원칙의 이행수준에 따라 등급을 부여받고 그에 따라 발언권과 의결권이 달라진다. A등급 인권기구만이 유엔인권이사회 발언권과 국제조정위원회 의결권을 갖는다. 매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1~2개 국가인권기구는 A급에서 B급으로 하향 조정되는 수모를 겪는다. 독립성이나 실효성을 침해한 자국정부의 형편없는 조치들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시아 인권단체들은 곧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에 한국인권위에 대한 특별심사 회부를 요청할 것이다. 만약 국제조정위원회가 특별심사 회부결정을 내리면 한국인권위의 A등급 지위는 조만간 B등급으로 격하될 것이 틀림없다. 인권의 관점에서 B급 정부를 만난 탓에 A급 인권위가 B급 인권위로 강등되게 생긴 셈인다. 해서 이명박 정부에 묻는다. 이러한 상황을 뻔히 알고도 축소고집을 부릴 것인가. 하루속히 축소방침 철회 방침을 세워서 국제사회에 알려야 한다. 그래야 위와 같은 수치스런 시나리오가 작동하지 않는다.

인권위에 대한 무지는 더 이상 변명이 되지 못한다

한국인권위는 현재 국제조정위원회의 부의장국이자 국제조정위원회 등급심사소위의 아시아태평양지역 대표국이다. 등급심사소위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미주에서 각1개국씩 모두 4개 인권기구대표로 구성된다. 최근에 특별심사절차에 회부된 경우는 네팔,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말레이시아 등인데 모두 정부의 독립성 침해조치 때문이었다. 예컨대, 나이지리아에선 정부가 정당한 이유 없이 사무총장을 경질한 것이 문제됐다. 스리랑카의 경우 대통령의 무리한 인권위원 임명이 화근이었다. 네팔에서는 친위쿠데타 직후 국왕이 인권위원 모두를 친쿠데타 왕당파로 교체한 데 대해 국제사회가 딴지를 걸었다.

한국 인권위는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독립성과 실효성이 훨씬 뛰어나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시아의 모범적 인권기구가 인력과 업무를 1/3이나 줄여야 하는 새로운 사태 앞에서 아시아의 주요 인권단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나마 한국 인권위가 있어서 모범과 위안을 삼을 수 있었는데 이제 이것마저 형편없이 쪼그라들면 아시아의 국가인권기구 중에 반듯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는 한탄이다. 그래서 국가인권기구 감시를 위한 아시아 인권단체네트워크(ANNI, Asian Network on NHRIs)는 지금 초비상이다. 한국 인권위를 살리는 일은 이처럼 비단 한국의 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시아의 일이자 세계의 일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 정동기 민정수석, 이달곤 행안부장관은 자신들의 보수적인 성향과 어긋나는 인권위의 결정 몇 개를 기억하고 있을 뿐 인권위가 과연 무엇을 하는 기관이며 어떤 점에서 위상과 역할이 독특한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국제사회와 시민사회가 일제히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인권위에 대한 무지는 더 이상 변명이 되지 못한다. 이명박 정부는 인권위 축소방침을 즉각 철회해야 한다.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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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 스캔들' 주인공은 바로 이용훈 대법원장&quot;

 

 

'사법 스캔들' 주인공은 바로 이용훈 대법원장"

[기고] 이용훈 대법원장에게 고함

기사입력 2009-03-11 오전 9:5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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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대통령은 고심 끝에 내놓은 뉴딜(New Deal)법안들이 번번이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자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특히 1935년의 경제재건법 위헌 판결에 평소 자신을 지지한 진보 성향의 대법관들마저 가담한 사실을 알고는 충격과 울화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종신직인 연방법관직의 속성상 연방법원의 노령화가 필연적이라는 사실에서 연방법원, 특히 대법원의 보수화 근거를 찾아냈다. 1936년 말의 대선에서 압도적 승리로 재선된 루스벨트 대통령은 70세가 넘는 고령법관의 수만큼 연방법관 정원을 늘리는 법원재편법안(court packing bill)을 1937년 2월 5일 의회에 제출한다.

법원재편법안이 통과되면 루스벨트는 무려 6인의 대법관과 44명의 연방판사를 자신의 입맛에 따라 신규 임명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연방대법원이 루스벨트의 개혁 법안을 무효화할 가능성도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야심찬 법안은 루스벨트에게 불명예와 상처만 남기고 곧바로 폐기된다. 여야를 막론하고 여론 주도층 사이에서 반대와 조롱이 워낙 거셌기 때문이다. 민주당 성향의 진보적 대법관들도 공개적으로 비판할 정도였다. 루스벨트의 법원재편법안은 지금도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침해 시도의 하나로 회자된다. 루스벨트의 명예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남은 셈이다.

계엄 아래서도 '코드 배당', '코드 배제'는 절대금기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입법과 행정 조치는 심지어 비상계엄 상황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비상 사태라고 해도 계엄정부가 제멋대로 법원 조직을 뒤흔들고 재판부를 재구성하는 따위의 일은 금지된다는 것이 확립된 비상 사태 통제법리의 일부다. 그나마 이와 같은 법적 제약마저 없으면 모든 쿠데타 정부는 평소 미운털이 박힌 법관들을 마구잡이로 해임하거나 주요 재판에서 배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특정 판사에 대한 '코드 배당'과 특정 판사에 대한 '코드 배제'는 이처럼 계엄통치 아래서도 금지되는 사법 세계의 절대금기다.

사실 분쟁 당사자 간에 사생결단으로 싸우다가도 법관의 판결이 나는 순간 그것을 고분고분 따르는 걸 당연시하는 재판 제도의 위대한 마술은 법관과 재판의 독립성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한시도 유지될 수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일반 국민들이 법관의 판결만은 신주단지 모시듯 일단 받아들이는 이유도 법관이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해서 재판할 것이라는 헌법상의 보증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특정 법관에게 특정 사건을 특별히 배당하는 '코드 배당'과 특정사건에서 특정 법관을 특별히 배제하는 '코드 배제'는 법관과 재판의 독립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공적 신뢰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 신뢰를 좀먹는 최악의 사법 파괴 행위이자 국기 문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난해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였던 삼성 재판과 촛불 재판에서 대법원과 중앙지법이 이러한 절대금기를 정면으로 위배한 사실이 지난 2월 말부터 언론의 집중 취재를 통해 드러남으로써 전례 없는 사법 파동으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는 것이 현 상황이다. 이미 법원행정처 진상 조사단이 이용훈 대법원장과 신영철 대법관을 위시하여 관련 판사들에 대한 진상조사에 돌입했을 뿐 아니라 법원 내부에서도 신대법관의 용퇴촉구 등 자성과 자정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탓에 모두들 현 사태가 과연 제5차 사법 파동으로 비화할 것인지를 예의주시 중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중앙지방법원은 지난해 봄·여름의 촛불 시위 관련 사건을 처음에는 특정 성향의 판사에게 몰아주었으나 소장 판사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자 서둘러 전자배당 방식으로 바꿨다. 그 후 박재영 판사의 야간 집회 금지 위헌심판 제청으로 촛불 사건 담당 판사들이 동요하자 당시 법원장이 여러 차례 이메일을 보내 위헌심판 결과를 기다릴 것 없이 야간 집회 금지 법규에 따라 촛불 재판을 계속해 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 '촛불 재판 개입 스캔들'의 요체다.

▲ "지난해부터 이어진 촛불 집회 관련 재판은 촛불 정국에 미치는 정치적 파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정치권은 물론 온 국민의 이목이 쏠렸다. 대법원의 진상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현 사태가 과연 제5차 사법 파동으로 비화할 것인지를 예의주시 중이다." ⓒ뉴시스

야간 집회 금지 위헌심판 제청이 낳은 파장

지난해 8월부터 촛불 집회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검찰과 경찰은 본격적인 처벌 국면에 돌입한다. 촛불 시위 참가자에 대한 법원의 구속여부와 처벌강도는 따라서 촛불 집회의 정당성 및 지속가능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범죄 혐의와 적용 형량만 놓고 보면 단독판사가 처리하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사건들이지만 촛불 정국에 미치는 정치적 파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정치권은 물론 온 국민의 이목이 쏠렸던 것이다.

중앙지법도 처음에는 촛불 집회 관련 사건들을 임의배당이 가능한 중요 사건으로 인식해서 보수 성향의 특정 판사에게 몰아줬다. 하지만 다른 단독판사들이 집단 반발하자 곧바로 전자배당 방식으로 바꾼다. 중대 사건에 대한 법원장의 임의배당 권한이 현행법상 인정되는 이상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 삼기 어렵다. 단독판사들의 집단적 항의를 받고 지체 없이 기계적 배당 방식으로 바꿨으니 더욱 그렇다.

진짜 문제는 중앙지법의 한 판사가 작년 10월 9일 야간 집회 금지 조항에 대해 위헌심판을 제청하면서부터 발생한다. 박재영 판사의 위헌심판 제청은 중앙지법은 물론 전국 법원에서 진행되는 촛불 형사 재판 모두를 중단시킬 수 있는 메가톤급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형사법규에 대한 위헌심판 제청이 있으면 문제 조항의 적용 여부가 걸려있는 동종 사건들의 재판부들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여부 판결 때까지 사안 심리를 중단하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종 사건에 대한 심리 계속이나 문제 조항에 따른 판결 선고를 금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이 경우 헌재의 위헌 판결로 문제 조항이 무효가 되면 재심 청구 등으로 사태가 복잡하게 꼬인다. 따라서 어지간히 배포가 좋은 판사들이 아니면 일단 재판 진행을 중단하고 헌재 결정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특히 문제 조항에 위헌적 요소가 강하다고 판단하는 판사들은 그 때문에 구속된 피고인을 과감하게 보석으로 풀어주기도 한다.

그런데 일반적 관행에 따라 대부분의 판사들이 촛불 재판의 진행을 중단하게 되면 촛불 집회 시위자에 대한 형사 처벌이 헌재 결정 시점까지 불가능해진다. 더불어 '촛불' 형사 처벌을 통한 위하(威嚇) 및 예방 효과도 사라질 판이었다. 믈론 이러한 상황 전개는 당시 촛불 국면의 조기 진화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올인하던 1년차 이명박 정권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외비도 모자라 '대내비' 강조한 법원장의 이메일

당시 중앙지법원장의 이메일 내용은 이런 특수 상황을 배경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법원장의 거듭된 메시지는 위헌심판 제청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중단하지 말고 현행법(야간 집회 금지조항)에 따라 재판을 진행하라는 것. 법원장의 이런 이메일 지침은 조금만 뜯어보면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문제투성이다.

내용적으로는 판사가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단해야 할 위헌심판 제청에 따른 재판 중단 여부에 대해 간섭한 것이다. 더욱이 법원장은 대법원장도 같은 의견임을 강조했다. 마지막 이메일에서는 2월의 정기 인사 이동을 상기시키면서 그 전까지 사건 처리를 마쳐서 후임자의 부담을 덜어달라고 호소했다. 심지어 구속 사건이 아닌 이상 현행법(야간 집회 금지조항)에 따라 유죄 판결을 선고해야 한다는 것이 법원 내외부의 거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못 박기까지 했다.

형식적으로는 친전 이메일의 '대내외비' 요구가 걸린다. 기자들이나 국민들에게 대외비로 하자는 뜻까지는 알겠는데 '대내비'는 다소 엉뚱하고 낯설다. 취지는 물론 중앙지법의 다른 판사들, 특히 똑같은 이메일을 받았을 동료 단독판사들한테도 비밀로 해달라는 것. 다시 말해서 동료 단독판사들과도 법원장의 '밀지'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아달라는 것.

만약 '현행법'에 따른 조속 처리 당부가 법원장의 공식적이고 떳떳한 사법행정 권한의 범주에 속하는 사항이라면 대내비는 물론 대외비를 신신당부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법원장의 뜻이 헌재를 포함한 법원 내외부의 일치된 의견, 특히 대법원장의 의견과 같다면 그 방침을 정정당당하게 공표하면 될 일이었다.

짐작 가능한 신 대법관의 '정치 계산'

법조계의 중론은 당시 중앙지법원장이 유력한 대법관 후보로서 정치적 계산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데로 모아진다. 그는 2009년 2월 중으로 고참 대법관이 임기 만료를 맞이해 빈자리가 생긴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대법관이 되려면 이용훈 대법원장의 제청, 이명박 대통령의 임명, 한나라당과 국회의 인준이 필요하다는 점도 모를 리 없었다. 사회분위기가 보수적으로 바뀌면서 대법원장이 외부 인사를 제청할 가능성이 사라진 상황에서 자신이 0순위에 근접한 내부 인사라는 점도 의심치 않았을 터이다.

아무튼 대법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대법원장의 선택을 받는 것은 물론 청와대의 비토를 피해야 하기 때문에 촛불 사건에 대한 대법원장과 청와대의 의중을 거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리라. 그는 삼성 사건과 관련해서 이미 대법원장의 점수를 딴 상태였다. 저가 발행에 대한 무죄 선고 가능성이 큰 민병훈 부장판사에게 삼성 사건을 특별 배당해서 대법원장의 삼성 변호인 시절의 주장을 뒷받침해줬기 때문이다. 이제 눈앞의 촛불 사건만 잘 처리하면 대법관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본인의 예상대로 그는 대법원장의 제청과 대통령의 임명으로 지난 2월 18일 대법관이 됐다.

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사평정권을 가진 직속 법원장에게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위와 같은 내용과 형식의 이메일을 받고 노골적인 압력으로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판사가 그 정도 이메일을 압력으로 받아들여 움츠려들면 판사 그릇이 못되는 것 아니냐"는 이용훈 대법원장과 신영철 대법관의 지적은 백번 타당하다. 그럼에도 촛불 사건을 맡았던 중앙지법 단독판사들 중 법원장의 거듭되는 지침을 거역한 '판사다운 판사'는 고작 서너 명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점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반면 '촛불 처벌'을 위헌 제청한 박재영 판사는 결국 금년 1월 사표를 내고 법원을 떠났다. 언론의 후속 보도에 따르면 중앙지법원장은 국보법 사건과 관련하여 박 판사에게 선고 연기를 부탁했지만 박 판사가 과감하게 무죄를 선고한 후 사표를 던졌다는 것. 박 판사는 아마도 주변과 동료 중에서 판사다운 판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데 낙담하고 절망했을 것이다. 또한 선배 법원장의 되풀이되는 재판개입에 대해서도 낙담하고 절망했을 것이다. 아마도 박재영 판사를 사직으로 몰아간 주범은 이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

대법원의 스캔들은 삼성 재판으로 이어진다

중앙지법원장의 촛불 사건 개입과 본질적인 성격에서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 이용훈 대법원장의 지난 2월 18일자 삼성 사건 재배당 및 특정 대법관 배제행위다. 대법원장은 삼성 사건에서 소수 의견을 고집하며 전원합의체 회부를 요구한 특정 대법관을 향후 심의 과정에서 눈 딱 감고 배제함으로써 전례 없는 코드 배제의 주인공이 됐다. 다시 한 번 삼성 사건에 걸려 넘어진 셈이다.

삼성 재판에 관한 배당 관련 스캔들은 대법원의 재배당 스캔들이 처음이 아니다. 심각한 코드 배당 의혹이 삼성특검사건에 대한 중앙지법의 1심에서 이미 제기된 바 있었다. 요체는 사안의 성격상 형사24부나 25부로 가야 마땅한 경제범죄 사건이 이례적으로 형사23부에 배당됐다는 것.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시 형사23부 민병훈 부장판사는 에버랜드의 저가 발행은 배임이 되지 않는다는 법리적 소신을 삼성 사건을 맡기 1년 전에 중앙지법 기자실에서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삼성 사안이 민 부장에게 돌아간 것은 결국 민 부장의 배임 무죄 소신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1심 판결 후에 불거진 코드 배당 의혹의 요지였다.

물론 이러한 의혹은 사실이더라도 입증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검찰이 '미네르바'나 사건을 수사하듯 저인망식으로 철저하게 수사한다면 특별히 밝혀내는 게 어려울 것도 없을 것이다. 기자실에서 공공연하게 거론할 정도로 법리적 확신이 강한 민 부장판사가 각종 모임에서 거침없이 소신을 피력했을 것이고 이를 들은 주변 인사들이 적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만에 하나 이러한 의혹이 사실이라면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민병훈 부장판사가 그런 법리적 소신이 있는 사람인줄 꿈에도 몰랐다. 오히려 1심 공판을 몇 번 방청하면서 민 부장판사의 당당하고 모범적인 재판 진행 방식에 매료돼 재판 결과를 낙관한 편이었다. 만약 중앙지법원장이 민 부장판사의 무죄 소신을 직간접적으로 인지한 상태에서 형사23부에 특별 배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필자를 포함한 방청인들은 이미 결론이 나있는 재판 아닌 요식행위를 구경하며 공연히 마음 졸인 셈이다.

만약 이런 배당 의혹이 사실이라면 여기에 무슨 정의가 있겠는가. 설령 민 부장판사의 법리 이해가 내용적으로 정확한 것이라 해도 특정 결론을 미리 낸 코드 판사에 대한 특별 배당은, 정의는 행할 뿐 아니라 보여줘야 한다는 저 오래된 법언에 위배된다. 게다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건희 회장 등 피고인들과 변호인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일반 국민만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중앙지방법원장에게도 알려진 담당 재판부의 오랜 소신을 관련정보 수집에 혈안이 됐을 삼성측 정보 안테나가 놓쳤을 리 없기 때문이다.

▲ "중앙지법원장의 촛불 사건 개입과 본질적인 성격에서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 이용훈 대법원장의 지난 2월 18일자 삼성 사건 재배당 및 특정 대법관 배제 행위다." 법원을 나서고 있는 이용훈 대법원장. ⓒ뉴시스

이용훈 대법원장이 주도한 사법 스캔들

이제 와서 굳이 삼성특검사안에 대한 1심 배당 의혹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준)사법 절차에서는 사건이 누구에게 배당되는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당연히 사건 배당을 제멋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공식절차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사회적 이목이 쏠린 중대사안의 배당 권한을 특정결론을 유도하거나 특정인을 봐주기 위해서 법원장이 남용하기 시작하면 사법부는 머지않아 제 무덤을 파게 된다. 임의배당권의 폐지 등 배당권의 자의적 행사 방지장치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 향후 절대적으로 갖춰야 할 0순위 사법개혁이다.

대법원의 2월 18일자 삼성 사건 재배당 및 코드 배제 스캔들은 하급심에서 발생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법 스캔들이 대법원에서, 그것도 삼성 재판과 관련하여, 더욱이 대법원장의 주도로 발생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대법원장은 지난 18일 각 4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 재판부 3개의 인적 구성을 대폭 변경한다. 부의 재구성 혹은 인적 구성 변경은 대법관의 퇴임이나 신규 임명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을 때에 불가피하게 인정된다. 재판부의 구성원이 바뀌면 계류 중인 사건 전부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에 의해 확인된 재배당 관련 경위와 의혹은 이렇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변호사 시절 에버랜드 저가 발행 배임 사건에서 허태학 피고인 등 삼성측의 1심 변호인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이 2심을 거쳐 대법원에 올라오면서 사단이 벌어진다. 변호인으로서 에버랜드 사건에서 배임무죄 주장을 폈던 대법원장은 에버랜드 사건이 전원합의체로 회부되면 사건 심리 자체를 회피해야 하는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대법원장이 자신의 전력으로 말미암아 중대 사안의 재판에서 빠지는 사법 사상 최초의 진기록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허태학 피고인의 에버랜드 사건을 맡은 대법원 제2부는 이미 여러 차례 합의 과정을 거쳤으나 그 중 대법관 1인이 소수 의견을 굽히지 않는 바람에 지난 1월 중에 전원합의체 회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주심대법관은 무슨 이유에선가 한 달 이상 필요한 절차를 밟지 않는다. 문제는 이렇게 꾸물거리는 사이 대법원장이 재판부 재구성을 단행했는데 공교롭게도 소수 의견을 고집한 특정 대법관을 배제한 채 삼성 사안을 새로 구성된 두 개의 부에 새로 배당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2월말의 언론 보도는 삼성 사안과 에버랜드 사안을 담당한 1, 2부 소속 대법관 총8인이 모여서 몇 차례의 합의 과정을 거쳤는데 1인을 제외한 나머지 7인의 대법관은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문제의 대법관이 빠진 현재의 삼성 재판부는 8대0으로 의견 일치를 볼 가능성이 높다. 이때 삼성 사건은 전원합의부에 갈 필요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용훈 대법원장은 변호사 시절의 전력 때문에 삼성 사건을 회피해야 하는 난처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된다. 반면 문제의 대법관은 삼성 사안에 대해 소수 의견권을 개진할 기회마저 누릴 수 없게 된다.

눈 딱 감은 이용훈 대법원장의 선택

이제 이용훈 대법원장의 삼성 사건 재배당 스캔들의 핵심에 도달했다. 대법원장의 지난 18일자 부 변경권 행사의 백미는 삼성 사안에 대해 소수 의견을 가진 특정 대법관을 삼성 사안 심리에서 밀어낸 데 있다. 에버랜드사건을 심의한 대법원 제2부의 합의결렬사실 및 이 과정에서 특정 대법관의 역할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 모두에게 잘 알려진 대법원 내부의 공지의 사실. 특히 부 구성 권한을 가진 대법원장이 삼성 사안과 같이 중대한 사안의 합의 진행 상황을 몰랐을 리는 없다. 부 변경권 행사로 인한 재판 차질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주요사건의 합의 진행 상황은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용훈 대법원장은 코드 배제를 결정할 때 최소한 다음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첫째, 특정 대법관의 소수 의견으로 말미암아 에버랜드사안을 심의한 2부에서 의견 불일치가 계속된 사실, 둘째, 그 결과 2부에서 전원합의부 회부를 결정한 사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버랜드 사안의 주심대법관이 전원합의부 회부절차를 밟지 않은 사실, 넷째, 1부에서 다룬 삼성 사안에 대해서도 합의 과정이 끝났다는 사실, 다섯째, 만약 이런 상태에서 부 구성을 변경하면 실질적으로 합의 과정이 종료된 두 개의 삼성 사안을 모두 처음부터 새로 심리해야 한다는 사실, 여섯째, 이것이 쓸데없는 심의 중복과 결정 지연을 초래하고 특검법의 위반 상태를 장기화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용훈 대법원장이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고 불신을 받지 않으려면, 당연히 비서실장을 주심대법관에게 보내서 부 변경 예정일까지 전원합의부 회부 결정 이행을 당부했어야 한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전원합의부에 삼성 사건이 오게 되면 막상 재판장인 자신은 재판을 회피해야 한다는 점. 여기서 대법원장은 일대 딜레마에 빠진다. 이미 결론이 난대로 전원합의부에 회부한 후 당당하게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문제의 대법관을 배제하고 새 부를 구성한 후 그래도 합의가 안 되는지를 지켜볼 것인가. 햄릿의 고민이 시작된다.

논리적으로는 제3의 길, 즉 전원합의부 회부 결정을 이행하지 않되 특정 대법관을 여전히 삼성 재판부 중 하나에 소속시키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런 방안은 특정 대법관의 뚝심으로 볼 때 전원합의부 회부시점을 늦추는 효과 이상이 없으므로 폐기됐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드러난 대법원장의 선택은 눈 딱 감고 문제의 대법관을 삼성 사건 재판부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사법폭거 자행한 대법원장은 물러나야

이런 자기중심적 선택을 함으로써 이용훈 대법원장은 첫째, 자신의 전력 때문에 대법원 전원합의부 심리 사건을 회피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둘째, 이런 부담 때문에 삼성 사건이 전원합의부로 넘어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 셋째, 삼성 사건에 대한 전원합의부 회부를 강제한 특정 대법관을 향후 논의 과정에서 배제하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이런 소망을 관철시키고자 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어떤 면에서 대법원장의 속 보이는 행태보다 더욱 절망스러운 건 이번 부 변경 사태의 전말과 함의를 뻔히 알면서도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며 대법원장의 불법과 전횡을 눈감아주고 있는 대다수 대법관들의 비겁함이다. 특히 삼성 사건을 다뤘던 1부와 2부 소속 대법관들은 주심 대법관의 직무유기 책임을 준엄히 물으며 늦게라도 삼성 사건의 전원합의체 회부를 촉구했어야 마땅하다. 도대체 합의 과정이 다 끝난 삼성 사안을 새로 구성된 재판부에 다시 맡겨서 새롭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7대1을 8대0으로 바꿔서 전원합의체 회부를 막는 것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대법원장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동료 대법관에 대한 배제와 모욕을 수수방관하는 셈 아닌가.

이용훈 대법원장은 본인의 권위를 위해서는 물론 사법부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삼성 사안을 더욱 엄정하게 처리함으로써 혹시 모를 세간의 의혹과 우려를 말끔히 불식해야 할 엄중한 책무가 있다. 대법원장이 이렇게 행동해야만 판결 내용과 상관없이 삼성 재판의 결과를 국민들이 승복할 것 아닌가. 다시 말해서 이 대법원장은 삼성 사건 처리 과정에서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는 따위의 어리석은 짓은 결단코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걸 못했다. 본인의 체면이 눈에 밟혀서다.

위의 설명이 대체로 맞는다면 자신의 체면치레를 위해서 대법관의 소수 의견 개진 기회 박탈을 서슴지 않은 이용훈 대법원장의 행태는 '사법 폭거'라는 용어 외에 달리 적합한 용어를 찾는 것이 어렵다. 이 경우 이용훈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를 앞장서서 훼손한 책임을 지고 바로 물러나야 한다. 물론 대법원장을 생각해서 부 변경 예정일을 염두에 두고 전원합의체 회부결정을 불이행한 주심대법관도 함께 물러나야 마땅하다. 껍데기는 가라.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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